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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는 안 티나게..

언제부턴가 인터넷을 통해 안티문화가 활발해졌습니다.
사회 곳곳의 모순과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여러 측면에서의 접근법은 참신했고 다양한 정보 제공에 촉매가 됐습니다.
또한 각 게시판과 토론마당의 논객들이 이 안티문화에 주체가 됨으로 슈퍼스타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좀 철지난 얘기 같지만 안티에 안티를 걸어야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안티문화에 편향적이었던 제 자신도 반성하게 됩니다.)
특히 탄핵정국에 들어 일부 논객들의 지나친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안티문화에 대한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세대라고 평가되는 386세대들이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성을 갖고 인터넷이란 광장에 다시 모이게 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이라는 폭발력 높은 광장이 이 현상을 더욱 편승시켰습니다. 단순히 수동적이고 단방향적인 정보의 주입에서 - 그래서 신문을 읽어도 한번 더 분석해야 했던 - 능동적이고, 양방향적인 - 그래서 피드백이 빠르고, 풍부해진 - 이 광장은 정보의 성격 자체를 바꿔놨고, 안티문화가 싹틀 수 있는 장이 되었습니다.

문두에 썼던 것과 같이 어느 수준, 어느 내용에서는 안티문화는 상당한 순작용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래 몇 가지의 반작용적인 현상을 보게됩니다.

첫째, 대안 없는 반론.
어떤 글들은 그 내용의 풍부함과 예리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비난, 독설, 씹기위한 광시곡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논쟁의 기본원칙이라고 생각되는데, 대안 없는 반론은 허무합니다.
대안 없는 안티의 텍스트는 "토론"이 아닌 "주장"으로 성격이 바껴집니다. 때로는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서 "주장"도 안되는 필자의 "신념", "신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이 주장이나, 신념, 신앙들이 논리체계를 갖춘 논지로 포장된다는데 있습니다.

둘째, 자기성찰없는 비판.
사견이지만 사회는 고루 썪고 있으며, 우리의 제도와 도덕, 양식에도 추악한 면과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이 되는 대상은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인, 연애인과 같은 특정 계급들입니다. 이 계급들의 특징은 사회적 수혜 계층이기 때문에 그 오염도가 더 심하고 또 오염도와 수혜도 때문에 처절한 비난을 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는? 서울 위성도시들의 러브호텔과 교육 기형 현상, 소비에만 집착하는 성향, 질서 보단 이익이 우선시 되는 미덕... 어찌보면 비난받는 그들은 이 추악한 모순되고 부조리한, 부패한 지옥도에서 패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현상으론 양시론, 양비론을 통해 자기만 쏙 빠진 타인들, 현상에 대한 질책들입니다. 제가 촘스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기준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건 비열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무결하고 하자 없는 사람만이 비판할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항상 그들의 시점은 3인칭 관찰자 혹은 전지적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꼭 죄없는 자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남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는 겸허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자기성찰이 없는 비판은 또다른 위선에 불과합니다.


진짜로 안티를 제대로 하려면 "안티"가 안티나게 하는게 세련되지 않나? 바른 안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몇 자 적어봤습니다.

끝으로 이 지적은 저에게도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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