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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부터의 도피

자유로 부터의 도피


도피할 수 있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의심해보게 된다.
모두가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 아니 이기적인 자유를 원한다. 이것은 '자유'란 얼마나 많은 책임들을 감내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자유에 따른 소위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성을 갖고있는 들개는 맑은 배고픔과 지독한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만약 이런 들개가 안전한 울타리와 제때 나오는 따뜻한 밥을 동경한다면 이미 들개로서 자격을 잃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 부터 도피하길 원한다.

하지만 기득권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부리기 좋고 불평을 최소화한 마지노선의 그것만을 개인에게 할당하여 자유로의 도피를 유도한다. (마치 노예에게 마약을 허용하여 삶의 의미를 갉아먹게 했던 것 처럼)
이 시스템은 제법 정교하다 할만하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 정도면 많이 풍요로와 졌자나..' 내심 긍정하고 있으니까...
이런 안전장치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적당한 야성을 갖은 집개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 계약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파기한다면 괴씸죄와 더불어 엄청난 패널티를 물게 된다.
서울역과 시청을 지나며 볼 수 있는 수 많은 홈리스족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내심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 서울의 중심이라 할 만한 곳에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실패한 인생'들은 제법 효과적인 협밥의 한 장치가 된다.

이런 정교한 시스템에 더해서 '자유'를 획득하려는 사람은 '초인'적인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원래 텍스트인 '자유로 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환경이 날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하자면 '~로의 자유:free from'은 나의 노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자유권 양도'에 지나지 않는다. 들개는 우리에 갖혀도 들개다.
(여담이지만 유독 미국에 히피가 그렇게도 자유로왔던 이유는 아마도 복지체계를 갖출 정도의 미국이 되어졌기 때문 아닐까...?)
이에 대해 프롬은 '자유'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 있다. (사실은 둘로 나누고 있지만..)
적어도 '자유'라고 한다면 '~를 향한 자유:free to'여야 한다. 이 '자유'란 것은 보다 많은 적극성을 요구한다. 진짜 '자유'하기 위해선 고독과 싸워야 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나의 가치를 쌩까고 나의 가치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하며, 존재의 의미를 자신이 찾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본다. 길들여진 자유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한편, 프롬이 지적한 마조히즘과 사디즘과 더불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더욱 비참한 상황을 연출한다. 엄석대가 만든 시스템은 애초에 자유 자체를 거세하고 있다. 이전에 '자유'에 첨가했던 욕구/실존의 문제가 폭력(더 나아가서 생존 - 마치 우리나라의 홈리스족이나 일부 신용불량자가 그렇듯이 )으로 인해 논외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모티브가 유신정권이었는데 반해 현재 상황을 보자면 형태만 달랐지 (신 자유주의란 조미료로 무장했지) 그 농도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야비하고 정교한 시스템 마저도 부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한편으론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치열하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강산에란 록커를 통해 느낀건데..
자유란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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