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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의 장례식

경산에 내려가는 무궁화호는 40분이 넘게 연착을 했다. 승무원도 태우지 않은 KTX를 여러대 보내 주고, 중간엔 철도에 무슨 문제도 생겼다고 한 듯 했다. 가는 길에 파란 하늘에 걸린 예쁜 구름을 한덩이 봤다. 저녁 했ㅤㅂㅕㅊ을 받아 아주 하얗게 빛나는... 삼촌 가시는 길을 축복하는 것일까... 아침에 나오기 전에 최근 푹 빠져 있는 책 2권을 빌려왔다. 수십년 전 일본 사람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기를 읽다가 창밖을 보며 30여년 동안 외삼촌과 조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온 고인과 나와의 관계를 추억해보았다. 하지만, 많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뵌 게, 아무리 생각해도 거의 10년 전이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외할머니의 칠순잔치를 위해 대구에 내려갔었다. 그때 나는 첫 번째 학생회 선거의 경험과 첫 연애의 시작에 무척 동요하고 있었으므로, 사실 외갓집 친척들이 모인 그 칠순잔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목요일은 무척 피곤한 하루였다. 세 번째 회의가 끝난 것이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전날 밤엔 잠도 거의 자지 못해서 온 몸에 에너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느낌으로 회의실에서 나오는데, 핸드폰에 외사촌 동생 이름이 찍혔다. 이 아이가 전화를 한 건 얼마만일까. 지난번 메신져에서 잠시 만났을 때, 한번 놀러와서 밥이나 먹자고 한 약속이 생각나서 반갑게 받았다.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는 반가운 목소리.. 라고 생각했지만, 동생은 급하게 우리 집 전화번호를 묻기만 할 뿐. 무슨 일이야?라는 질문에 그냥 좀 일이 있어서... 라는 다급한 목소리만 돌아왔다. 함께 회의 한 사람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전화를 해봤다. 아빠가 받으셨다. 무척 당황한 목소리.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고... 마침 외할머니는 친척분 결혼식에 오셨다가 우리 집에서 묵고 계셨다. 황망한 집 풍경이 눈에 선했다. 사촌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한참 고민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따위의 말들이 너무 우습게 느껴졌다. 다시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해도 할 말은 별로 없었다. 첫째는 집에 없다고 했다. 네가 정신을 잘 차려야겠구나... 하는 말만 전할 뿐.

동생은 살인적인 기말 시험 기간. 그 시간에 도서관에 있었고, 나는 아직 사무실에...  전화를 끊고도 정신이 없었다. 나도 가야지. 언제 가지, 급하게 처리할 일이 뭐가 있지? 뜨문뜨문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바보같이 막차도 놓치고 택시를 잡아 탔다. 마음은 급하지만, 사실 별로 실감이 나지도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한강대교를 넘으며 겨우 머리가 정리되는 듯 했다. 내일 내려가야지. 기차표를 예매하고, 부조는 어떻게 하지? 뭘 입고 가지? 생각해보니 마땅한 상복 같은 옷도 없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사회생활 5년차 조카가, 삼촌의 부음을 듣고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니 한심한 지경이 되었다. 동생과 옷장을 뒤져서 검은색 긴 치마를 찾아내었다.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던 옷. 5년 쯤 전 친구 장례를 치를 때도 이 옷을 입었구나 하는 기억이 스쳤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선잠 사이에는 기억도 나지 않는 뒤숭숭한 꿈만 꾸었다. 아침도 거의 먹지 못하고, 어제 챙겨놓은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서 출근을 했다. 왜 출근을 했을까? 점심 약속이 있었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사실 최대한 늦추고 싶었던 것 같다. 황망한 죽음. 난장판이 되어 있을 외갓집 친척들을 만나는 것을..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어린 시절에는 경부선 열차를 자주 탔었다. 여름이면 외가 친척들과 함께 해수욕장에도 가곤 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된 일일까... 이제 경부선은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성서 공동체라디오 등으로 가는 길일 뿐. 십수년 만에 이 길이 나의 삶 속에 복원되어가고 있다. 무궁화호를 타고 가기로 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병원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빠를 만났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서 다른 방에 어른들과 계시는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이모부들을 만났다. 아빠가 인사를 시키지 않았다면 못알아볼 뻔 했다. 그 새 나이들도 많이 드셨지만, 그것 보다 더한 피로와 슬픔이 쌓여 있는 탓이리라. 빈소로 들어가는 길, 화환도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정말 오랫만에 작은 외삼촌과도 인사를 하고, 상복을 입고 있는 숙모와 사촌동생을 만났다. 빈소에 걸려 있는 삼촌의 모습은 너무나 멋졌다.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예술가의 옆모습.

외삼촌은, 말하자면 연극인이었다. 연극을 하겠다고, 시골에서 중앙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재학 중에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625때 월남해서 힘들게 살아오신 고지식한 교장선생님이었던 외할아버지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셨는지 그런 일이 가능했나보다. 대학에서 재능 있는 배우들과 함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던 그 당시가 삼촌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삼촌의 모습은 대구 수성구의 도투락 우유 대리점 사장님이다. 대학 졸업 이후 삼촌의 인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변화의 계기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다. 다만, 청초한 미인인 숙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부모를 닮아 큼직큼직하게 잘 생긴 아들을 연년생으로 둘 낳았다. 삼촌 보다 한 해 먼저 결혼한 우리 엄마는 그렇다 치고,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결혼을 했고,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교장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어느 시점에서 중풍으로 은퇴하고 몸져 누우신 이후에는 부모님을 모셨다. 그 시절 외갓집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촌과 숙모, 그리고 막내 이모도 함께 살았던 그 양옥 주택이었다. 집의 한쪽은 우유 대리점과 연결되어있었고, 사촌동생들의 방에는 2층 침대도 있었다. 방학때 내려갈 때 마다 친절한 외숙모가 매번 극장에 데려가 '우뢰매'를 보여주고 팥빙수도 사주셨다. 집에는 책이 무척 많았다. '신의 아그네스' 포스터 같은 것들도 걸려있었다. 간간이, 기회가 되면 연출을 하셨던 것 같다.

오래 고생하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뢰매 시리즈도, 별동왕자 홍길동 시리즈도 끝이 났다. 적어도 나와 동생은 대구에도 여간해선 가지 않게 되었다. 외갓댁에 있던 셰익스피어 전집은 우리집으로 옮겨와서 내가 읽는 책이 되었다.
내가 자라면서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고,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학업 보다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친가 친척들은 큰 외삼촌을 닮아서 그렇다고들 했다. 아직 영화가 황금알을 낳는 산업을 인식되기 전이었다. 어른들에게는 영화나 연극이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예술, 혹은 딴따라였던 것이다. 엄마는 그런 표현을 별로 듣기 싫어하기도 하고, 가끔 으쓱해했던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그럭저럭 수직적 학력구조를 잘 통과했고, 본격적인 딴따라가 되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별 볼일 없는 외삼촌의 인생과 비교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외삼촌이 연출한 연극을 한편도 보지 못했고, 그분이 쓴 희곡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이후에는, 가끔 집에 술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삼촌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삼촌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하시기도 하고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한동안 대구 시립극단에서 활동했던 것도 같다. 외갓집에는 빚이 쌓여갔다고 하고 가끔은 그 빚이 왠만큼 자리를 잡은 이모들, 별로 돈도 없는 우리 집에까지 밀려오기도 했다. 사촌동생들은 그리 성실한 학생들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아니면 엄마를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접할 뿐이었다.

그 분의 인생은, 적어도 사회적 기준에 충실한 우리 어머니에게는 점점 별 볼일 없는 쪽으로 변해갔다. 술을 많이 드셨고, 거의 집에만 계셨다. 대학에서 연극 전공하는 학생들을 한 두 과목 가르쳤던 것 같다. 생계는 거의 외숙모의 노동에 의존했다. 내가 느끼기에, 무척이나 전형적이고 평범한 길을 걸어왔지만 외외로 약간 낭만적인 기질이 있는 우리 아버지는 외삼촌을 인정했던 것 같다. 딸만 둘이어서인지 사촌동생들도 나름 예뻐했다. 첫째 사촌동생이 군대에 갈 때에는 우리 집에 인사를 와서 같이 술도 마시고 훈련소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아버지로서는 훈련소에 누굴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으리라. 그 첫째는 변변치 못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무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장례에도 오지 않았으니.. 걱정이 될 따름이다. 나름대로 성실했던 둘째는 체육에 대한 재능을 살려 대학도 가고, ROTC를 하고 군에 계속 복무하면서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마지막 날, 삼촌은 혼자 집에 계셨다. 저녁에 소주 한병을 비우고, 술병을 다용도실에 갔다두고 나오는 길에 미끌어져서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숙모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홉시 반 쯤, 삼촌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모두 그랬던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고, 그보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이 될까봐 우려했다. 하지만, 장례식은 성대했다. 경북 지역의 연극인이란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았다. 그 분들은 정말이지 조의를 표해주셨다. 학생들도 늦은 시간에 단체 작업복같은 것도 입고 우루루 몰려와서 눈물을 흘렸다. 동창들도, 친척들도, 사촌동생의 동료와 친구들도 많이 와서 힘이 되어주었다.
숙모도, 엄마와 이모들도, 할머니도, 삼촌이 잘 살다 가셨구나 하고 다소나마 마음을 놓으시는 것 같았다.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공원 묘지 높다란 자리, 외할아버지 밑에 삼촌의 관을 묻었다. 운구차가 사고를 당하신 집에 갔을 때에도 모두 많이 울었고, 입관 할 때도 엄청 울었다. 상주인 사촌동생과 숙모, 작은삼촌과 숙모, 이모들와 이모부들, 영정을 든 사촌여동생과 사돈댁, 먼 친척들과 동료들까지 모두모두... 입관 의식 내내 사촌동생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소주 반잔과 라이터를 곱게 집어넣은 디스 담배, 그리고 전화번호 수첩을 손에 꼭 쥐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관과 함께 묻어주었다.
비가 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날이 맑고 바람도 불어 쾌청한 날씨였다. 입관 하고 내려오는 길, 내 손을 잡고 계시던 숙모는, "너희 외삼촌이 항상 어두컴컴한 집에만 계셨는데, 이제야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지내게 되셨구나"하고 말씀하셨다.

입관 이후 삼촌댁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니 정말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엄청 힘든 일임은 확실했다. 담배를 필 수 없어서 괴롭고, 경산에 내려가고 나서 하필이면 시작된 생리통도 한몫 했다. 무엇과도, 한 사람이 삶에서 사라져버렸다는 무게와 남은 사람들이 겪을 회환과 상실감만은 못하겠지만...

일요일 내내, 부모님이 아직 내려오지 않은 집에서 동생과만 지냈다. 약속을 없애고 걸려오는 전화들을 무시하면서... 오늘이면 삼오제를 치르고 부모님이 올라오시고, 나도 출근을 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아직은 정신이 없지만, 이제 곧 회의를 하고, 할 일들을 정리하고, 하나하나 처리하다보면 고인을 모른 사람들과의 생활이 다시 굴러갈 것이다.

6년 전에, 동기가 죽었을 때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었고, 당일날 빈소에도 갈 형편이 되지 않았었다. 둘째날 가서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음날 재가 되어 나온 모습을 보고서야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와서 펑펑 울었었다. 그 이후에 가장 힘든 것은 그 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일상에서 내가 다시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억지로라도 과 사람들을 만났었다. 혼자 '부치지않은 편지'만 들었다. 그리고 몇 개의 글을 끄적거렸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성실해지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도 비슷하리라. 물론 친구와 삼촌은 다르고, 나이가 좀 더 들어서인지 더 많이 피곤하긴 하다. 멍 한 일상도 조금 더 오래 갈지 모르겠다. 관계에 대한 성실함을 얼마나 더 실천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기는 하다. 49제에는 이번에 내려가지 못한 동생과 함께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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