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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발간사

디어 지역진보매체 ‘와글와글’이 발간되다!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을 고민하던 동지들과 함께 손쉽게 읽을 수 있고 여러 현안을 가지고 강원에서 소통할 수 있는 지역진보매체를 만들게 되었다. 무겁지 않은 글에 삶과 운동을 융화시킬 수 있는 매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몇 일 전 춘천에서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는 촛불추모제’가 열렸다. 올해가 시작되며 발생했던 그 참사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되짚어 보면 자본의 위기전가가 명백했던 쌍용차 구조조정도 결국 그 책임은 노동자가 졌다. 똑같이 지금 우리 사회는 용산참사의 책임을 철거민에게 지우고 있다. 수사기록도 완전히 공개하지 못하는 지금의 검찰을 보며 저것들이 사람인가도 싶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점점 야만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면서 나름 세련되게.

mb정권 등장 후 사회가 참 많이 변했다. 잠을 좀처럼 못 이루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술자리에서 화두는 언제나 mb정권의 정책이다. 집회문화도 많이 달라졌고 네티즌이라는 존재도 등장했다. 시청 앞 광장을 붉은악마가 아닌 촛불시민이 가득 메우기도 했다. 이런 대규모 시민봉기에 앞으로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역사성을 거대하게 부여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시민을 노동자가 아닌 소비자로 권리를 강조하는 운동들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이런 구조적 모순을 만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한 채 촛불시위는 한 단락 마무리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올해의 쌍용차 구조조정 분쇄 옥쇄파업은 실패로 마무리 되었지만 너무나 영웅적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구조조정은 이어진다. TV광고에서 매일 아름다운 기업이라고 외치는 금호 기업은 대한통운 박종태 열사를 기억조차 못하는 듯 금호타이어 직장폐쇄 조치를 내렸다. 비단 금호타이어만이 아닌 수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열사들의 죽음과 쌍용차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실패에 대한 암울한 패배주의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물러섬 없는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강원에 살다보니 투쟁현장들에 대한 연대를 적극적으로 못함이 있다. 하지만 운동이 척박한 강원지역에서 또 다른 연대로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바로 이 지역진보매체가 그러한 역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길 기대한다. 지역에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이 올바로 연계되고 전체운동에 충실히 복무할 수 있는 지역진보매체가 되길 기대한다.


 

봄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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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이랑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랑

이랑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랑


기획연재를 하다!

한국현대사를 조야하나마 공부해온지는 조금 되었다. 새내기시절 한․근․연(한국근현대사연구회)활동부터 지금의 한국현대사학회까지. 사실 공부보다는 동지들과 집회에 나가고 뒷풀이를 하는 것이 더 좋았던 적이 많지만 세월이 첩첩히 쌓이다 보니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얻어 읽은 책들이 조금 되었다. 그러던 찰라 ‘와글와글’이라는 어렵지 않고 대중적인 지역매체발간 소식을 듣게 되어 기획연재로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먼저 한국현대사의 시대구분은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만약 해방이후 분단까지의 8년의 역사를 해방 이전부터 연계되는 계급투쟁의 장으로 인식한다면 한국현대사의 시기는 분단이후부터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접근해야하는 이유는 이 시기부터 사회주의의 이념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영입되거나 노련한 노동운동가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구분의 명확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통해 근․현대를 함께 조망함이 한국현대사를 보는 기준으로 적합하다고 보인다.

고루하지만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 정세와 밀접한 현대사를 공부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정세 분석에 있어 효과적일 수 있고 전망을 밝힘에도 탁월하다. 특히 한국현대사는 해방, 분단, 전쟁, 전후복구와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는 성격을 갖고 있어 오늘날의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찾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아직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일례로 올해,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옹호했던 두 전직대통령의 죽음을 목도하며 인간적 애도로 그치지 않고 진보적 가치의 표상이나 민족통일의 영웅으로 미화하는 분위기라든가,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세력들과의 연대전선(反mb전선)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2mb정권이 들어서고 광우병쇠고기 파동, 용산참사, 쌍용차 구조조정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이보다 언론에 부각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많이 있지만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세 사건을 보면서 좀 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 사건에 대한 구조적인 파악과 분석을 가하지 못하고 현상적, 개별적 접근이라든가 민족주의적 접근을 관철시켰을 때 얼마나 낙관적이고 의지주의적인 평가를 양산하였는지를. 한발 물러선 쌍용차 구조조정 분쇄 투쟁과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들이 단순히 人類愛적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얼룩지운 신자유주의에 맞선 당찬 투쟁으로 역사 속에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기획연재의 결의가 이정도 수준이다. 앞으로 신자유주의의 역사,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을 들춰볼 생각이다.

 

 

비운의 혁명가 이정 박헌영
 

식민지 시기

박헌영의 출생 연월일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지만 통설은 음력으로 1900년 5월 1일설이다. 가족으로는 할아버지 박홍원, 할머니 전주 이씨 이일석의 딸, 아버지 박현주, 어머니 이학규로 형제는 박현주의 첫째부인 탐진 최씨의 소생으로 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박간난이 있다. 박헌영은 1912년 4월 대흥보통학교 제2학년 입학 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것으로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으며, 1915년 3월 16세의 나이로 대흥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해 4월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담임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박헌영은 출결에 있어 ‘개근’이었고 성질은 순정(純正), 종순(從順,) 쾌활(快活)했으며, 복장은 청결하고 언어는 명료했다고 전해진다.

박헌영 20세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운동의 참가는 박헌영을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발을 디디게 했고 직업 혁명가라는 생애를 선택하게 된다. 그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 사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여러 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전단을 쓰고 돌리는 일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3․1운동과정에서 그는 체포되지 않았고 1919년 3월 23일 경성고등보통학교 15회 졸업생이 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21세 1920년에 잡지『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이 잡지는 현재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지만 박헌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공판 판결문을 보면 박헌영은 당시 편집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해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다고 나와 있지만, 이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판결이고, 형평성에 맞는 비판을 요하는 사료이다.

결국 청년 박헌영은 1920년 11월 큰 뜻을 품고 상해에 망명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22세 1921년 3월 그는 고려공산청년단(일명 고려공청)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고 그 비서가 되었다. 당시 고려공청 상해회의 최고 책임자는 최창식이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4월 그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했으며, 5월에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여기서 고려공산당은 안병찬, 김만겸, 여운형, 조동호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려공산당 산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박헌영은 사상연구에 힘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해 봄에 주세죽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해 8월 북경에서 고려공청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23세 1922년 3월 20일,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말에 국제공청의 명령에 의거,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국내이전을 준비했다. 그해 3월 25일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상해를 출발했고 4월 1일 밤 중국 안동현에 도착했다. 4월 3일 선발대로 김단야가 단독으로 신의주로 건너갔으나 신의주경찰서에서 체포되었고, 박헌영과 임원근은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던 영빈루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5월 30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박헌영외 2인은 ‘制令’ 제 7호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制令이란 조선총독이 발령한 명령을 가리키고, 제7호는 해외 망명지의 반일운동 가담자를 처벌하는데 적용되는 법령이었다. 그 후 이들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그 간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불명확하다. 25세 1924년 1월 19일 이들은 만기 출옥하게 된다. 이들은 이리하여 ‘요시찰 인물’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한 채 서울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상경과 동시에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기에, 박헌영과 김단야 그리고 임원근은 조선사회주의의 트로이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해 1924년 2월 11일 박헌영은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1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에 재선임 되었으며, 4월 15일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에 따르면 그의 재임기간은 1924년 4월부터 1925년 5월까지이고, 그의 직책은 판매부 서기, 지방부 기자였다. 이듬해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서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19명의 당원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경향 각지의 비밀 야체이카 대표자들이었다. 박헌영은 이때 합법 사상단체 화요회 내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출석했다. 조선공산당 대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라는 굵은 대회가 동시에 개최되었으므로, 일본 경찰의 감시망이 이 둘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회에서 김재봉외 6명의 중앙집행위원이 선임되었고, 코민테른과의 교섭을 위해 조동호가 파견되었다. 이듬해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과의 유일한 교섭 상대자가 되었으며, 조선 내에서 최고 영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26세 1925년 5월 동아일보를 사퇴한 박헌영은 8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러나 10얼 15일 발행정지 처분을 받은 조선일보는 처분해제에 있어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시켜야 했기에 박헌영은 이에 희생양이 되어 해직되었다.

1924년 1월 19일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이 출옥한지 1년 10개월이 지났을 무렵 이들은 다시 한 번 신의주에서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1925년 11월 22일 저녁 신의주 시내 음식점에서 신만청년회 회원들의 결혼식 피로연 자리가 열렸고, 다른 내실에선 변호사와 일본경찰 5명이 모여 있었다. 피로연 자리에 노래와 춤을 금지하는 형사들의 요청에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결국 집단폭행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신의주 경찰이 총출동한 보복수사에서 한 청년회원의 가택수사결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의 ‘회원자격 사표’와 통신문 3통이 발각되었고, 수사는 성격은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으로 전환되었다.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터졌고, 1925년 4월 서울서 열린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간부 및 당원들이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박헌영은 예상치 못한 수사에 아내 주세죽과 자택에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취조 끝에 이들은 그해 12월 3일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미 경찰에서는 그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임과 그가 작성한 비밀문서들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박헌영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피해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가 일본의 실정법을 위반한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던 경찰과 이듬해 7월 까지 긴 심문조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심문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사람 외에는 결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중앙위원회 후보였던 7명을 끝까지 보호할 수 있었고 다수의 지방조직을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경찰의 취조가 끝난 12월 12일 박헌영 외 43명은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졌다. 그해 6월 22일 신의주 사건에 관계가 있다는 혐의를 받았던 주세죽은 결국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주세죽은 3주간의 조사를 받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7월 2일 종로경찰서에서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피의자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7월 초 조선총독부는 제1차,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피의자를 병합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관할을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지방법원으로 바꿨고 박헌영 등의 인사들은 경성지법 예심판사의 주관 하에 다시 고난에 찬 취조를 받아야 했다. 28세 1927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 사건 제4회 공판에서 박헌영은 정신이상 증세를 드러냈다. 취조 중 사망한 인사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리쳤고, 이때부터 박헌영은 ‘광인행세’의 징조를 보였다. 그해 9월 22일 조선공산당 사건 제5회 공판에서는 신체이상으로 출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날 제6회 공판에도 불참했다. 10얼 7일부터 단식에 들어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의 면회도 철회했다. 결국 11월 22일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7일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여 혜화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이듬해 1928년 8월 아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박헌영과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딸 비비안나를 해산하고 모스크바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김단야의 지원으로 1929년 1월 18일 박헌영 역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 주세죽 역시 같은 해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해 박헌영은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그의 입당 연월일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국제레닌학교 입학 즈음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이다. 박헌영은 영어반 제2학년에 소속되어 노동운동사,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등을 수강했고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좌를 비롯한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32세 1931년 말 그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국제레닌학교 재학 시기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로 그 졸업일자가 정확하지 않다. 다음 달 박헌영은 상해로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학기 도중에 국제레닌학교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33세 1932년 1월 25일 박헌영과 주세죽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를 위해 상해에 도착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조선 공산주의운동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이 잡지는 1933년 7월까지 발간되었다. 잡지『콤뮤니스트』는 식민지 시기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뇌리를 지배한 문제인 공산당 재건의 노력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박헌영과 김단야에 의한 발행이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이 발간 주체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부딪히고 있다. 화요파 공산주의그룹과 ‘콤뮤니스트 그룹’이라는 독자적 공산주의 그룹이 거론되고 있다.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에는 조선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조공해산 이후 사회주의 조직이 어떻게 존재해왔는지는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기에 현재 『콤뮤니스트』의 발간주체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콤뮤니스트』의 출간을 상해에서 진두지휘한 것은 김단야이다. 그는 『콤뮤니스트』발간을 실무적으로 담당할 상해 사무국 조직에 착수했고 믿을 수 있는 동지 5명을 선발해 두 그룹, 제작팀과 국내파견그룹으로 나누었다. 한참을 활발히 활동하던 『콤뮤니스트』는 1931년 여름부터 부진에 빠졌고 그 활동력이 복원된 것은 193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온 박헌영과 아내 주세죽이 충원되면서 부터이다. 사령탑을 맡은 박헌영은 『콤뮤니스트』의 발간, 국내 조직과의 연락, 그 밖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한 전권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논란이 있는 잡지지만 결국 『콤뮤니스트』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기관지라고 볼 수 있다. 이 잡지에 간여한 여러 인사들은 어느 한 파에만 속하지 않았고, 상해파, 화요파, 이르쿠츠크파 인사들이 고루 참여했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지도선 외에는 어떤 독자적 노선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당대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을 ‘국제선’이라 불렀다. ‘국제선’은 조공해체이후 코민테른으로부터 존립의 의의를 인정받은 유일한 공산주의 그룹이었다. 이 그룹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를 받았으나 ‘국제선’은 당은 아니었다. 따라서 코민테른 지부로 가입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 대열 내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 코민테른은 모든 공산주의 그룹을 ‘종파’로 규정했는데, 기존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한 기초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콤뮤니스트』는 코민테른의 이런 변화된 새로운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4세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다시금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일본경찰은 김단야를 잡기 위해 잠복하고 있었는데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을 체포해 보니 그는 김단야가 아닌 박헌영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한 노력이 사자를 잡은 것이었다.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한 주세죽은 김단야를 찾아갔고 정황을 알기 위해 연락원이 사는 거처로 찾아갔다. 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은 박헌영을 앞세워 집으로 쳐들어왔는데, 눈치를 챈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 김단야와 주세죽을 보호하기 위해 연락원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속여 간 박헌영은 경찰들에게 그 자리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김단야를 잡기 위한 경찰의 폭압 수사에 박헌영은 엉뚱한 곳으로 유도, 김단야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그해 7월 말에 박헌영은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8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예심 종결 후 1934년 12월 27일 박헌영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박헌영이 징역 6년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공산당 사건때와는 다르게 중요 증거문건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해 거짓진술 함으로써 ‘심문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박헌영이 취조 중 사실대로 진술했다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와해 될 것이고 박헌영 자신도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박헌영이 잡혀 서울로 송치되는 시기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콤뮤니스트』발간사업에 손을 떼고 모스크바로 함께 귀환하게 된다. 여기서 박헌영과 김단야, 주세죽은 엇갈린 인생 항로를 가게 된다. 격렬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포시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란 생각은 주세죽을 비극적으로 몰아갔고, 그 옆에서 위로하던 김단야는 결국 주세죽과 1934년 모스크바에서 재혼하게 된다. 병보석간 해외탈출 전력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최고 수뇌부로 경찰의 가혹한 심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주세죽과 김단야 둘 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생존사실을 12년 동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생존 사실은 해방 이후에 알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재혼한 김단야도 죽고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주세죽의 비극적인 심리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사료가 없어도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주세죽과 김단야는 1937년 말에 아들을 출산하지만 그 아들 비탈리이도 남편 김단야 처럼 그 곁에 오래 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사형당했다. 당시 스탈린 숙청의 광풍은 구볼셰비키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형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외국인 혁명가들에게도 미쳐 한 장의 투서로 김단야는 소련 비밀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인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나 결국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활동과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라는 제1급 범죄자의 판결을 받고 직후 바로 사형 당했다. 김단야의 비극은 주세죽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해 5월 22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 결정으로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았다. 주세죽은 1953년 첫 남편 박헌영이 북조선에서 미국 간첩 혐의로 실각한 것을 알고 딸이 있던 모스크바를 급히 방문하던 길에 병을 얻어 기차에서 사망했다.

김단야가 죽고 주세죽이 카자흐스탄 5년 유배형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1939년 40세의 나이로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된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과도 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해 12월 12일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 이관술을 만나게 된다. 박헌영은 이관술과 함께 운동 전반에 대해 협의 하였고 그해 12월 말부터 약 40일 동안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경부터는 약 1년간 서울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경성콤그룹은 1929년 결성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면서 기관지의 명칭을 『콤뮤니스트』로 개칭하였다. 그해 10월 박헌영 서명의 위임장을 소지한 채 코민테른에 파견된 이관술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잡히게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위임장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1941년 1월 박헌영은 경성콤그룹 제1차 검거사건을 피하기 위해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서대문 사건’이라고도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인해 여러 인사들이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의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의 회고를 살펴보면 잠적 생활 간 정순년이 박헌영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아들 박병삼(원경스님)을 가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42세 1941년 8~10월 경성콤그룹 제2차 검거사건은 종로경찰서가 주도했기에 ‘종로사건’으로도 불린다. 박헌영은 이 검거도 모면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헌영은 일본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광주로 피신하였다. 이때부터 박헌영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잠적생활을 시작했다. 박헌영은 회고록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은신하고 있었음을 밝혔는데, 이 기간에도 박헌영은 활발한 사회주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46세 1945년 8월 15일 지하에서 잠적생활을 하던 박헌영은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박헌영에게 새롭게 득의에 찬 시기였다. 1919년 처음 직업 혁명가라는 생애를 택한 박헌영에게 민족의 해방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또한 그의 투쟁 역사는 자산이었다. 때문에 박헌영은 ‘해방 조선의 산 역사’, ‘27년 동안 꾸준한 초인적 투쟁을 계속한 철의 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해방 직후 1945년 8월 17일 박헌영은 광주를 출발 해 상경 길에 올랐다. 18일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저녁 경성콤그룹 간부회의를 개최했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 접촉했다. 당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일차적 관심은 소련과의 연계를 구축하는 것이기에 상경한 밤에 급하게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에 출두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 박헌영 사이의 연락관계를 파악하는데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만큼 해방 직후 미․소의 대립은 극에 달하고 있었고, 그 사이 박헌영이란 인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해 8월 20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는 경성콤그룹을 재편한 것으로 1929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당일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의 명의로 8월 테제라 불리는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이 채택되었다. 박헌영이 직접 작성한 이 문서는 현재 명지대 북한연구센터에서 발간한 『조선공산당사』에 「조선공산당 개편과 정치노선 결정 선언」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해 9월 11일 박헌영은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은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진 조선공산당의 제1인자였다. 그리고 당시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이 귀국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서울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되었다. 그해 9월 9일 미군은 서울에 진주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미래를 놓고 미군정의 이해와 박헌영의 이해는 상충되기 마련이었는데, 그해 10월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회견하게 된다. 회견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의 목표를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미군정과는 대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박헌영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은 미국의 이해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소련과 미군의 진주, 그리고 여러 사상의 대립 속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독자적인 노선만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해 10월 30일 박헌영은 안국동에서 문화단체 미 언론인 100여명과의 회합자리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해」라는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박헌영은 친일파를 청산한 바탕 위에서 민족통일전선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군정권의 협력을 강조했다. 여기서 유혈충돌의 두려움을 피하고, 미국의 진주 이유를 조선의 해방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해 말 귀국했던 이승만은 반공을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파괴자로 공산주의를 비난했다. 따라서 박헌영은 이에 반박하기 위해 12월 23일 이승만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전 두 차례에 걸친 회견이 있었지만 이처럼 이승만과 박헌영은 절연하게 된다.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이처럼 민족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정오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처음 성명 발표 후 박헌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위원들은 반탁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 인사들과의 접견 이후 어떤 정책 변화가 있었는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에 따른 국내의 분위기는 큰 파문이 일었다. 우익 정당들은 조선공산당이 소련 1국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을 편입시키려 한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와 인사들은 박헌영을 규탄하기 시작했는데, 박헌영을 암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해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결렬되었고 그해 9월 6일 미군정의 명령으로 3개의 좌익 신문이 폐쇄되었으며 그날 밤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이 발령되었다. 체포령이 발령된 시기를 기점으로 서울 시내에는 6천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수색작전에 들어갔다. 잠적생활을 통하면서도 비밀리에 박헌영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민전 의장단 회의가 연일 열렸다. 회의에서 박헌영 등은 대미협조노선 철폐를 재확인 했고,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5대원칙에 의해서만 응할 것이며, 입법기관 설립에는 절대 반대할 것을 재결의 했다. 그해 9월 29일 박헌영은 월북 길에 올랐다. 그는 관에 담긴 채 옮겨졌으며, 산악을 헤매며 월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한에서

47세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은 평양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부터 박헌영은 분주했다.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 추진세력이 발표한 7원칙에 대해 절대 반대를 선언했으며 개성에 비밀리에 잠입해 일주일간 머물면서 조선공산당 간부들과도 접촉했다. 또한 담화문 발표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저지하려는 우익 진영을 비난하면서 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역량을 집결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23~24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해 12월 10일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5월 21일에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즈음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협의대상에서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을 제외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또한 여러 단체에서 박헌영 체포령 철회 요구가 빗발쳤고, 캠페인도 전개되었다. 결국 그해 6월 18일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참가할 당 대표자로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신속한 진행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박헌영을 전국적 폭동을 일으키려는 음모죄를 씌운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되었다. 따라서 남조선노동당은 남북요인회담을 지지한다고 천명하게 되는데 미군정에 한해 좌익진영의 탄압을 중지할 것과 미․소 양국 군대의 공동철병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UN에 의해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미국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했고, 영구 분단을 저지하고 인민주권을 수립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단독선거를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1948년 5월 10일 이남에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냉전체제 속 두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은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박헌영은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면서 이런 성명서등을 UN에 보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해 9월 16일 맥아더 장군을 필두로 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따라서 박헌영과 김일성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긴급서한을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미군과의 전면전으로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제시한 것이 ‘중국과 기타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달라는 것이었고, 결국 중국정부가 ‘인민지원군’을 보내게 되었다. 그해 10월 초 박헌영은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인 인민군 중장이 되었다. 그와 함께 미군과 남한군에 의한 학살을 UN엔 항의 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휴전이란 명분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휴전이 거론될 시기였던 1953년 3월 5일 이승엽 등 다수의 남로당 출신 당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었으며, 박헌영 역시 그해 3월 11일 체포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범죄혐의 사실을 날조해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설명했다. 박헌영은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하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이라고 김일성은 주장했다. 이를 통해 조선노동당 내 분파투쟁 및 전쟁책임을 둘러싼 세력 간 갈등에 박헌영은 희생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은 공판이 진행되었다. 결국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56세의 나이에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선고를 받았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박헌영은 ‘자의 진술’과 ‘사실 심문’을 통해 자신의 범죄 사실에 관한 기소장의 내용을 모두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최후 진술에서 “검사총장의 논고가 전적으로 지당하다”고 말했으며 이어서 자신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매국 역적이며, 오전 공판 심리에서 기소 사실의 일부를 부인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취소한다고 말했다. 혁명가의 말로는 참으로 씁쓸했다. 1956년 4월 23~29일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박헌영은 김일성으로부터 ‘종파분자, 미제간첩’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57세 1956년 7월 19일 지하 감옥에서 나와 어느 산중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의 보호를 부탁한 채 박헌영은 그렇게 권총으로 사살 당하였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일대기가 최근에 들어 많이 연구되고 조사되고 있다. 소련과 미국의 문서들이 대량 방출됨에 따라 현대사의 연구도 진작하고 있지만 그간 궁금증을 자아내던 혁명가들의 삶들도 함께 발굴되고 있다. 한 번의 계기로 평생을 옥중에서 보내고 고문을 견디며 투쟁하던 혁명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현재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나는 역사 속에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혁명가들의 삶을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앞으로 몇 호는 더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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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눈을 부릅뜨고 다닙시다/ 희랑

눈을 부릅뜨고 다닙시다

―우체국에서 현실까지―

희랑


우리들 다수는 문득 어떠한 경험과 생각을 하기 전에는 체제 내지는 사회 구조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국가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사회 구조상의 문제로 개인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고 개선해야하는지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체제·사회구조가 만들어낸 관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순응과 무관심을 전제로 얻는 평화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 ‘평화’를 깨게 된 것은 얼마 전 지나간 여름 때였다.

우체국은 당연히 집배원아저씨와 빨간 우체통을 떠올리게 하며 왠지 모를 친숙함을 주는 공공기관이다.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체국이 공공기관이라는 것이다. 우체국의 서비스 중 하나인 택배를 이용하고자 예약을 문의하러 전화를 했었는데, 택배 수거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예약 할 수 없었다. 이유인 즉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의 서비스 제공 기간 중 오후 3시에서 6시는 매일 같이 몇몇 기업체의 택배를 수거하러 가기 때문에 늘 오후는 일반 개인에게는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며, 개인은 오전 9시~오후 2시 안에― 택배 담당자도 점심은 먹을 테니 그 시간도 빠질 것이란 예상도 할 수 있겠다.―만 서비스를 이용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특별한 경우도 아닌 늘 오후는 특정 업체를 위해 제공되는 서비스라니. 대개 사람들이 아주 이른 시간 대 아니면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 서비스를 이용하지 어정쩡한 낮~점심시간에 서비스를 이용할리는 없지 않은가. 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내 문의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우체국이 분명 공공기관인데 어째서 서비스 제공 시간 중 대다수가 특정에게만 제공되는 지, 실질적으로는 개인고객의 경우 오전9시~오후2시정도까지 밖에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것이 왜 당연한지에 대해 물었고, 개선조치를 취할 여지가 있는지 물었지만 내게 돌아오는 답변은 ‘원래 그렇다.’와 ‘인력수급도 안되고 예산도 안돼서 추가로 택배수집기사를 둘 수 없다.’ 였다.

너무나 당연하게 공공의 권리가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상황과 그걸 납득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공기관’이었다. 마땅한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의무 대비 권리를 찾을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을 축소시켜 느끼게 한 일상의 경험은 일종의 허탈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끼게 했다. 어째서 의무를 다한 시민이며, 타인에게 해가 가지 않는 권리를 요구함에 있어서 오히려 제약을 받아야 하고, 그것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마저 유별난 행동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한 엉뚱한 곳에 낭비할 예산은 있으면서1) 예산을 확보해 필요한 인력을 수급할 능력도 없고, 도청소재지인 시를 단 2명이 우편 업무를 담당한다는 빠듯한 상황을 생각하니 분명 노동 환경도 좋지 않을 것이란 예감을 하면서 공공기관의 무능력함을 느꼈다. 

내가 특별히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작년부터 뉴스나 신문 등 언론매체 어디선가 접했던 공기업 민영화라든지, 승자독식 구조로의 개편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은 블루오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레드오션으로 치 닫아 가는 작금의 상황은 과연 일부 몇몇이 경험하며, 일부가 만들어가는 현상일까. 개인이 아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정부적 차원에서의 공기업 민영화 추진이라든지, 행정주의, 복지감소와 불균형 분배, 다수의 시민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대기업 위주의 경제 살리기라는 구시대적 정책이 계속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한다면, 결코 개인만이 선하게 성실히 산다하여 극복될 문제도, 유별난 누군가만 겪을 흔치않은 사건도 아닌 것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우체국 서비스 이용에서 느낀 점 하나가지고 왜 이렇게 확대했느냐고 혹자는 말하겠지만, 사회와 개인은 사소하게라도 마주하게 되어 있고 그 정책 하나하나 뜬구름 같이 느끼다가는 언젠가는 분명히 힘없는 다수의 ‘시민’-동등하되 동등하지 못하는 시장 논리에서의-이 그 불이익을 감내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그리하여 끝맺음은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지 못하면, 시민은 자연스럽게 축소된 공공성에서 스스로 시민일 수 없게 될 것이니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겠다.’가 되겠다. 나와는 또 다른 시민인 당신도 눈을 부릅뜨고, 우리 모두 눈을 부릅떠야겠습니다. 부릅~+ㅁ+


1) 해외로 연수를 빙자한 여행을 간다든지, 쓸모없는 구조물을 새웠다가 다시 철거하는데 예산을 두배로 낭비하는 둥의 이야기는 인터넷 신문만 검색해도 충분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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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새내기 교사의 연수후기/ 정해

새내기 교사의 연수후기


 

정해 교사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5일... 허기진 몸과 마음을 채우려 수원으로 향했다. 삼척에서 수원까지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전주까지 내려갔던 걸 생각하면... 이쯤이야 싶다.

올해 2년차... 아직은 병아리 교사...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정체성을 고민하고, 열정이 식을까 두려움도 많다. 때문에 스스로 나태해 지지 않으려고 작년에 이어 이 연수를 신청하였다. 그 동안의 연수는 학교 도서관 전반적인 운영에 대한 것과 일회성 행사 진행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정작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고 교과교사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작년 연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주제가 없이 뷔페식으로 다른 선생님들의 사례 발표에 그치는... 유명 작가의 강의를 듣는 등. 단지 수확이라면 연수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배워오는 정도였다.

이번 연수는 독서토론이라는 하나의 명확한 주제 아래 실제 독서토론의 진행 과정별로 전문가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독서토론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어 내가 정작 필요로 하는 방법적인 면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많은 기대를 하였다. 연수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강원대 강치원 교수님의 독서토론 전반에 관한 강의는 단연 최고였다. 그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한 토론은... 토론이라는 이름을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토론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과 방법적인 면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이론에 방법을 더한 실습을 통해 짧은 시간에 배운 것들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강의가 이처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토론의 진행과정별로 강의가 계획되어 있어서 강치원 교수님이 전반적인 것에 대해 다루고, 다른 선생님들께서 독서토론 도서 목록 선정 기준, 다양한 발문 요령, 사회과학․자연과학 계열별로 독서토론 실습, 독서토론 마무리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 독서토론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을 강의해 주셨다. 예컨대 독서토론이 왜 중요한지, 어떤 유형이 있으며,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런 내용들은 이미 첫 강의부터 들어서 아는 상태이며, 우리가 듣고자 했던 강의 계획처럼 실제로 어떻게 책을 선정하고, 어떻게 발문을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런 세부적인 것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이 독서토론에 대한 전반을 다루어주니... 독서토론이 무엇이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독서토론은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연수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로 도서관 활용수업의 실제와 도서관 협력 수업의 실제 등 사서교사가 학교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수업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이 강의가 부실해서 아쉽다는 것이 아니라 강의가 너무 유익하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정확히 짚어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는데, 일단은 ‘독서토론’이라는 주제가 있는 연수에서 다루기에는 방향이 어긋남이 있었고, 강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강의하시는 선생님도 많은 준비를 하셨고, 우리도 더 듣기를 원했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 강의를 따로 떼어 다음번 연수 주제로 잡았다면 독서토론 연수도, 다음번 연수도 더욱 유익하고 좋은 연수가 되었을 것 같다.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두 마리 토끼 모두 놓치는 꼴이 아니었나 싶다.

적다보니 아쉬운 점만 나열한 듯하여 연수를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분명히 말해두는 건 이번 연수는 나에게 유익하고, 알찬 기회였다. 학교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연수였으며, 찾아다니던 연수였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독서토론이 뭔지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었으며, 항상 일년의 중간쯤에... 열정이 식어감을 느낄때 그걸 다시 되살리는 좋은 기회였다. 다만 기대가 컸고, 욕심이 많았기에 이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투정이다. 항상 배움에 목말라 하고, 배운 걸 어떻게 학교 도서관에서 풀어나가야 할까 고민이 많은 병아리 교사의 투정으로 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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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4교시 추리영역’으로 학교 읽기/ 스프링

‘4교시 추리영역’으로 학교 읽기


스프링


얼마 전 충무로에서 엄친아 유승호가 주연인 ‘4교시 추리영역’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상용 감독은 롯데칠성 2% 등과 같은 유명한 CF를 연출한 CF 감독출신으로, 극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연출력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4교시 추리영역’은 엉성하기 그지없는, 그리고 엄친아 유승호를 전면에 내건 ‘실패한 소년탐정 김전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로 글을 써보고자 생각했던 것은 영화 속에서 학교라는 공간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교시 추리영역’의 배경은 남녀공학 고등학교이다. 학교는 질서와 희망, 성장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오늘날 학교는 무한경쟁과 인권침해, 서열화로 상징되고 있다. 바로 그 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살인용의자가 내부인물로 요약되면서 인물들간의 얽히고 설킨 사연이 하나 둘씩 밝혀진다.

‘4교시 추리영역’이라는 제목만 보면 모의수능시험을 보다가 4교시에 사건이 발생해 주인공 일행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같다. 정작 영화를 보니 시간적 배경은 모의수능시험이 아니라 체육시간이었지만 말이다. 사소한 것은 그냥 넘어가자. 문제는 이 영화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 핵심 설정들이다. 교사들간의 불륜, 사서교사의 과거, 사서교사를 사랑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은 노총각 교사, 교감을 나눈 학생을 죽음의 위기에 방치한 사서교사, 거기다 학교폭력을 체화한 ‘미친개’ 선생까지. 어쩌다 학교가 이런 인물들의 집합장이 되었을까 씁쓸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이 학교의 자랑은 오로지 전국 1등이 한정훈 학생(유승호)이다. 교장 선생님은 교육청 장학사에게 이것이 교사와 학생, 학교의 완벽한 호흡으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자랑한다. 물론 장학사가 학교를 순시하는 순간 몇 명의 교사와 학생이 학교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야단법석이 벌어진다. 감독은 이것을 웃음코드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하나도 안 웃긴다. 장학사가 기사 딸린 관용차로 학교를 방문하는 것도 현실과는 다르다. 그런데 ‘장학사’는 교육행정의 권력자로, 일선 학교는 약자로 그려지는 것은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학교는 행정관료의 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전북지역 모 중학교 교장이 일제고사를 치는 날 체험학습을 허용했다가 징계를 당한 사건이 기억난다. 체험학습 허용 여부는 교장의 권한인데, 교장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체험학습을 허용했다고 교육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당했다. 사실 일선 교사에게 교장은 얼마나 큰 권력인가! 그런 교장조차 별 수 없이 징계를 당했으니 교육당국, 행정관료의 힘은 참 대단하다.

유승호와의 키스신 하나로 여성의 비난을 받았다는 공동주연 강소라는 이질적인 존재다. 그녀는 왕따 혹은 ‘은둔형 왕따’로 보인다. 그녀는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아무도 그녀와 친구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별명은 ‘커튼마녀’다. 수업 중에 추리소설을 읽고, 온갖 하드코어 추리물을 탐독하지만 그녀는 왕따다. 그녀가 머리를 정리하며 미녀로 재탄생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적 설정일 뿐이다. 현실에서라면 그녀는 아마도 깊고 긴 수렁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기의 방황, 고민, 반항을 허용할 정도로 관용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진학’이라는 목표로 천하가 통일되어 있으니, 왕따에다 수업시간에 추리소설이나 읽는 그녀가 인정받기는 힘들 것이다.

참, 어떤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는 10대만 보라. 성인이 보면 화가 날 수도 있다.’ 맞다. 이 영화는 딱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는 학교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도 들어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불편하다. 교사인 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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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교사 임용고사 전망/ 믹키

교사 임용고사 전망


믹키   모 초등학교 교사

 


신규교사 채용 규모는 퇴직자의 수, 학령기 인구수, 정책적 요인 등과 관련이 있다. 퇴직자의 수는 증가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유지가 될 것이다. 연금법 개정에 따른 명예퇴직자는 더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령기 인구수는 예상할 수 있었던 대로 지속적인 감소추세이다. 향후 10여 년 간은 학령인구의 현 수준 유지도 기대하기 어렵다. 소규모학교 통폐합도 많이 진행이 되었고 계속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전체 교원 수도 특수교사의 약간의 증가 외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정책적 요인에 따라서도 상당 부분 임용규모가 증감된다. 현 정부는 전반적인으로 공무원 감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교사 역시 예외 없이 신규채용 규모가 감소할 것이다. 임용시험 응시자는 증가하고 신규 임용은 축소되는 경향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09년 현재 국공립 초중고교 교사들의 확보는 법정정원수에 비해 4만 여명이 부족한 상태이다. 초등은 교과전담교사, 중등은 과목별 교사가 부족하고 특수의 경우는 특수학급과 특수교원 모두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단기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추진했던 행정인턴 사례와 마찬가지로 인턴교사와 비정규 인력들의 임용이 추진 중이다. 영어회화 전문강사, 방과 후 강사. 학교 보조인력 등의 비정규직 고용이 예정되며 이에도 많은 예산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일제고사와 함께 교육 이슈로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미래형 교육과정과 같은 정책 요인도 교원 양성과 임용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이 학교 현장에 적용되기도 전인 2010년 고시 2013년부터 현장 적용하겠다는 것이 계획인데, 그렇다면 당장 2010년 임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초등 임용은 2006년 하반기의 대 충격1) 이후 대체로 2:1 정도의 경쟁률을 유지해 왔다. 당시 2007~8년 3:1까지 가파르게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던 임용경쟁률은 일단 2009년 임용까지 2:1 내외로 유지되었다. 이는 교원수급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은 아니며 유예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연금법 개정 등으로 명예 퇴직자가 급증하고 미래의 교원정원을 앞서서 증원하는 신용카드식의 임용으로 충격을 완화해 왔다.2) 또 2009년 임용 합격자 중 많은 수가 해를 넘겨 임용될 것으로 보인다. 강원 지역의 경우 2009년 합격자 중 70~80명 이상은 2010년에 임용될 것으로 보인다.

초등 교원 역시 신규채용규모가 감소할 것이다. 2010년은 3200명 정도로 임용할 것이라는 정보들이 흘러 다니고 있으며 많아도 4000명 정도를 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 정도라면 단순 계산으로 임용 경쟁률은 3~4:1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의 사범대와 중등 교사 임용이 이미 그런 위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초등 예비교사도 돌이키기 힘든 과잉양성의 국면을 맞았다. 현재 까지는 임용 경쟁 레이스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심리적으로 5:1 내외가 될 때 까지는 이탈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상이 된다면 교사 임용을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할 것이다. 교대가 목적성을 띈 교사양성기관으로 남기가 힘들어질 것이며 이에 따라 어떠한 방식이던 교대 통폐합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초등 현장에 미래형 교육과정이 적용될 경우 2013년부터 과학, 음악, 미술, 체육, 영어 등에 교과 전담교사제가 도입된다. 기존 학급담임위주의 무게중심도 상당부분 이동할 것이다. 기존 초등교사는 국어, 수학, 사회, 도덕, 생활지도, 학급 운영정도로 역할이 축소된다. 계획이 잘 추진된다면 단기적으로도 초등교사 임용규모 축소가 불가피하다. 또 교과전담교사들의 임용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중초임용3)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를 가능성도 높고, 불안정 고용이 증가할 것도 예상할 수 있다.

현재 중등교사의 법정정원 확보율은 80%내외 이다. 중등 교원 임용도 2000년대 초중반 비교적 완화되었던 임용 경쟁률이 신규 채용 규모 축소로 더욱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강원 지역의 경우 최근 몇 년 한 명도 뽑지 않는 과목들도 다수 있고 2010년 임용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등에 미래형 교육과정이 도입될 경우 몇몇 과목의 경우 존립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심각한 반발이 예상된다. 단기적으로도 신규 임용 규모 축소가 예상된다. 당분간 국영수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비정규직 교원의 비율도 증가할 것이다. 선택 중심 교육과정의 확대로 비인기 교과는 치열한 경쟁과 과목자체의 존립위기를 맞고 정규직으로의 임용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사범대의 존립도 위기를 맞을 것이고, 양성과정의 부실화도 불가피하다. 또 복수전공자 단순 가산점 부과인 현재와 달리 복수전공자를 우선적으로 임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인데, 이도 양성과정의 부실화를 부채질할 것이다.

예비교사들은 우리 과목이 TO가 안날수도 있다거나 우리 과가 폐지될 수도 있다는 정도의 위기의식 이상을 느끼고 행동하지는 못하고 있다.

미래형 교육과정이 적용될 경우 각 학교에서 20%내외로 자율적으로 시수를 증감할 수 있게 되는데 당연히 주지교과가 중심의 증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주지교과의 경우 집중이수제4)에 따라 교과가 축소되고 선택과목화 될 개연성이 높다. 비주지 교과의 안정적 임용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며 정규직으로의 임용이 힘들어 질 수 있다. 양성 과정도 이에 따라 개편될 텐데 사범대 내에서 관련학과들의 폐지 가능성이 있어보이며, 이에 따라 사범대의 존립 자체도 위협받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사범대학의 기능은 약화되어 왔으며 2015년으로 계획된 교원전문대학원에 따라 폐지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유치원 교원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유치원 교원은 양성기관의 종류도 다양하고 그 수도 많다. 당분간 더욱 치열해 질 것으로 보인다. 특수 교원 또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신규채용이 급감하거나 임용하지 않는 지역도 생긴다. 특수 교사의 법정정원 확보율은 64% 정도이고 당장 부족한 특수교사만 1300명 내외로 추산되지만 2009년 60명 정도만 증원되었고 앞으로도 많은 수가 증원되기는 힘들다. 특수 자격도 최근 다수가 발급되 임용 경쟁률도 계속 급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교과교원 또한 안정적 임용은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보이고, 그중 일부는 향후 전혀 임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확률도 높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교사의 양성과 임용은 새로운 싸이클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전 정권에서도 추진해 왔던 학제개편 논의, 미래형 교육과정에 따른 필연적인 비정규직 확대, 탄력 받는 교대 통폐합, 사범대 존폐위기, 교육대학원 등 다른 요인들도 많다. 이런 교사가 될지 알 수 없는 시기에는 예비교사로서의 정체성도 약화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더욱더 임용에 매진해서 살아남을지,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돌파해 나갈지 선택의 상황에 몰리게 된다. 다수는 전자를 택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위기의 지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2) 수입보다 많이 카드빚으로 지출하면 파산하게 되듯, 이런 방식은 한계가 있다. 더구나 다른 돈쓸 곳도 많은 상황이지 않은가?

 

3) 중등 교사 자격 소지자의 초등 임용

 

4) 한 학년에 몰아서 이수할 수 있게 된다. 학교 급간 심각한 단절이 우려된다.

 

 

1) 2007년 초등 임용 규모의 급격한 축소. 이에 교대협에서는 총 동맹휴업을 실시했으며 당시 적절하지 못한 대응이 교대협의 누적된 위기를 일시에 터트리는 상황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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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등록금 후불제는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최고봉

등록금 후불제는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최고봉 전교조 강원지부 정책연구국장

 

 

 

 


 

확실히 이주호(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는 인물이다. 이주호는 이명박 정부 최고의 교육정책 브레인으로, 교과부 장관보다 힘이 세다는 실세 중의 실세다. 그가 이번에 ‘취업 후 상환 학자금대출제도’ 즉, 등록금 후불제를 들고 나왔다. 지난 7월 30일, 교과부는 몇 해 전 교수노조 등이 제기했던 내용과 상당히 비슷한 ‘ICL'제도의 도입을 발표했다. 물론 정치적 의미와 구체적인 실현방안에서는 교수노조의 구상과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대출제도’란 학생은 등록금을 일단 유예받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일정 수준의 소득이 있을 때 원천징수하는 방안이다. 따라서 학생은 졸업 이후에 원리금을 상환하게 되어 등록금에 신경 쓰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과부는 세부적인 내용을 다른 나라의 사례를 고려하여 9월 중에 발표할 계획이다.

등록금 후불제 도입이 공개되자 언론에서는 일단 환영하고 나섰다.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일부 국가만이 도입한 등록금 후불제를 한국이 앞장 서서 도입을 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등록금 후불제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리콜’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MB식 등록금 후불제’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현재의 등록금 후불제 도입 비판 근거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높은 등록금 인상률로 인한 가계파산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에 비해 한국의 대학등록금은 매우 높은 수준이고, 인상률마저 높은 편이다. 등록금 대출금리, 혹은 등록금 후불제 도입으로 적용될 이자율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은 매한가지이다. 따라서 등록금을 대폭 인상하는 대학의 ‘윤리적 타락’ 앞에 등록금 후불제는 대학의 이윤만을 보장한 채, 대학생에게는 실질적인 이익을 박탈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비판은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이 약화된 것이다. 교과부는 등록금 후불제 도입 이후 일정 소득에만 도달하면 빈곤 여부에 관계 없이 원리금을 모두 상환하게 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비 지원, 이자율 인하혜택이 모두 철폐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저소득층은 막대한 교육비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로 인해 송경원 진보신당 연구원은 등록금 상한제 또는 등록금 인상률 상한제를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등록금 후불제 이전에 대학재정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손쉽게 등록금 인상을 통해 해결하는 관행이 해결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정부는 GDP 대비 0.6%를 고등교육비로 지출하고 있다. OECD 평균은 1.1이다. 더군다나 사립대학의 비중이 높고, 기부금이 적은 한국 현실로 인해 학생의 교육비 부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개혁 없이, 그저 ‘등록금을 대학 졸업 이후 일정 수준의 소득에 도달했을 때 상환한다’는 개념은 ‘언 발에 오줌누기’일 뿐이다.

등록금 상환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전문직 계층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이다. 즉, 월급쟁이는 소득이 그대로 드러나 대학등록금이 원천징수 되고 전문직 계층은 소득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몇 해 전에는 의사가 월수입을 100만 원 미만으로 신고한 적도 있었다. 만약 집단적으로 수입을 축소신고, 허위신고 한다면 상환을 피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일정 소득에 미달하는 저소득층이 증가할 경우 등록금 상환률이 급격하게 낮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의 경우 등록금 대출금 회수율이 90% 내외이고, 한국 역시 90% 가량의 회수율이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등록금후불제가 도입되면 상환률이 70% 내외로 하락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즉, 대졸자 취업률과 소득을 감안하면 회수율 70%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현 정부에서는 당장 회수율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회수율 저하가 막대한 채무를 불러올 것이다.

사실 등록금후불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친서민적이라거나 정치적으로 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노동자 민중에게 교육비를 전가하는 것은 매 한가지이고, 그나마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확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9월에 발표될 등록금 후불제 보완책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지만, 보완된다고 해서 등록금 후불제가 장밋빛 미래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육사를 읽으며 배운 교훈 한 가지 : 교육비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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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쌍용자동차, 그 후/ 상철

쌍용자동차, 그 후

상철


 

77일간의 공장 점거를 마지막으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8월 6일 파업을 철회했다. 음식과 물, 의료품까지 반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진행한 파업이었다. 조합원들은 공장 안에서 굶주림과 고립감, 두려움을 마주해야 했고, 밖에서는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들과 구사대, 중무장 한 공권력의 침탈에 맞서야 했다. 주요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있었던 극한의 대치상황은 어느 전쟁 영화에서 봤던 시가전을 떠올리게 할 만큼 두려웠다. 조합원들이 있는 도장 공장 안에 페인트, 신나 등 인화물질이 가득하다는 걸 모를리 없는 경찰이 옥상으로 진입을 시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용산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결국 협상이 이뤄지면서 진압과정에서의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협상 내용을 비롯해 쌍용차 문제가 사회적으로 미친 파장은 최악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77일 간의 고된 점거 농성을 끝으로 파업을 철회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보수 언론과 사측은 노조의 파업이 진행되는 내내 ‘노조가 회사를 죽이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며 정부의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정부는 경찰을 언제 투입할 것인지 만을 저울질할 뿐,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에 있어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면서 개입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외국자본이자 최대 주주인 상하이 자동차가 기술 개발을 위한 약속된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게 쌍용차 문제의 핵심인데, 보수 언론과 사측, 정부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하이 차로의 쌍용차 지분 매각 당시 기술 유출이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외자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정부는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상하이 차는 기술 이전을 완료했고, 정부는 개별 노사관계라며 개입을 거부했다. 가장 무책임하고 이득을 본건 먹튀자본 상하이 차고, 가장 많은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본 건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왜 노동자들이 회사를 죽였다며 욕을 먹어야 하는가. 오히려 투기 자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싸운 노조를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


 

 

△ 쌍용자동차 노조의 투쟁은 정리해고에 맞섰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정된 직장을 원한다. 파업을 한 쌍용차 노동자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 싶어 하는 평범한 서민들이다. 그들은 사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일하는 것 외에는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싸웠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곧 생존권 박탈을 의미한다. 해고는 보통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빠져나올 수 없는 빈곤을 안겨주기 때문에 사회 양극화를 지양하고 서민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노동권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 경제 위기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봤을 때, 앞으로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만약 그때도 우리 사회가 쌍용차 노조에게 보였던 반응처럼 해고를 문제 삼지 않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실업과 빈곤은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위기의 극복 자체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쌍용차 투쟁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문구는 ‘함께 살자’와 ‘해고는 살인이다’였다. 파산 위기에 몰린 쌍용차가 법정 관리를 신청하고 노조의 파업이 종결된 기간 동안 쌍용차 노동자들은 모두 6명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스트레스로 돌아가신 분도 있었고, 노조 간부 부인이 비참한 심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해고는 정말 살인이다.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야만의 시대를 저지할 수 있는 열쇠는 쌍용차에 있지 않을까.


 

추신 : 이 글을 쓰기 위해 쌍용자동차에 관련한 기사들을 검색해보던 중, 8월 24일에 자살을 기도한 쌍용차 조합원의 소식을 접했다. 파업 철회 후에도 경찰의 보복 수사로 인해 거짓 진술을 강요받다가 동료를 배신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고 한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고 하던데, 쾌유가 있으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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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일제고사와 징계 이야기’/ 윤아름

‘일제고사와 징계 이야기’


 

윤아름 ∥ 서울 선곡초등학교 교사

 


 

올 해 초까지만 해도 ‘교육공무원 징계’라는 말을 들으면 크게 세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첫째, 5년 전 임용고사 공부하던 대학교 4학년 시절 수험 교재에서 보았던 ‘징계’. 징계의 종류에는 파면, 해임, 정직, 감봉 등등이 있다는 것과 각각의 뜻을 외우던 생각이 난다. 이 때의 ‘징계’는 그저 외워야할 암기 내용 중 하나였을 뿐이다. 두 번째는 뉴스에서 보았던 솜방망이 ‘징계’. 어느 어느 학교에 성추행, 뇌물 수수 교사가 있었는데 가벼운 징계로 그냥 넘어 갔다는 소식과 함께 교육청의 제 식구 감싸기식, 생색 내기 징계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때는 징계라는 것이 제 역할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불신의 대상이었다.

세 번째는 책 읽기 모임에서 만난 선배가 받은 ‘징계’. 지난 해 10월 교육청의 일방적인 일제고사 시행에 반대해 시험 응시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한 학부모와 아이들의 담임 교사 7명이 파면, 해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이 때의 징계는 서울시교육청의 협박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교육의 한 주체인 교사들에게 교육 당국의 입장과 반대되는 얘기하려면 “입 다물어! 아니면 잘린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올해 7월, 그 징계가 바로 나의 일이 되었다. 왜? 입 다물라는 교육청의 협박을 듣지 않고 입을 열었기 때문에.


 

올 해 3월 교과부는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를 시행하겠다고 했다. 교과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시험 문제는 모두 선다형이며, 시험 결과는 전혀 비교나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교사들이 교과 부진 학생을 가르치는 데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 당초 3월 10일로 예정되었던 시험이지만 작년 일제고사의 성적 조작, 비리 사건 마무리 작업 때문에 시험일이 3월 30일로 늦춰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시험의 형태, 목적, 일자와 같은 간단한 시행 계획만 눈여겨 봐도 이 시험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차 교육과정에는 ‘초등학교 교과의 평가는 선다형 일변도의 지필 검사를 지양하고, 서술형 주관식 평가와 표현 및 태도의 관찰 평가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진단평가라는 것은 학습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교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학기의 한 달이나 지난 3월 말에 ‘진단평가’를 시행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쓸 데 없는 짓이었다.(더군다나 결과는 5월에 통지되었다.) 그리고 작년 10월 일제고사를 통해 성적 조작 사건, 성적 위주의 경쟁 가열 등의 문제가 이미 사회적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교사들은 전교조 서울지부가 추진한 ‘일제고사 불복종 선언’을 통해 일제고사에 대한 반대 의견을 서울시 교육청에 전달했다. 그 선언의 주된 내용은 일제고사에 대한 반대 의견 개진과 학부모, 학생에게 시험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선언지에 서명한 교사 중 122명의 교사는 스스로 언론에 명단을 공개하였다. 그리고 그 122명 중 (작년에 3명의 해직 교사를 배출한 강동교육청만 제외한) 각 지역교육청 별로 1명씩 모두 10명의 교사가 징계 의결 요구를 받았다. 교육청은 서명, 명단공개라는 동일한 행위를 한 교사 122명 중 10명을 골라내어 표적 감사를 하고, 또 명분 없는 감사에 응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감사 거부라는 징계 사유까지 덧붙여 일관성, 원칙이라고는 전혀 없는 징계 절차를 진행해나갔다. 그들이 나에게 말하는 징계 사유는 불복종 선언 참여, 교장 허가받지 않은 가정통신문 발송, 일제고사 관련 감사 불응이다.

교사로서 스스로 소신을 갖고 판단하여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선언지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우리 반 학부모들에게 담임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통해 3월 우리반 소식과 더불어 일제고사에 대한 담임으로서의 의견을 알리고 시험 선택권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학부모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회신란도 만들었다. 일제고사에 대한 찬성, 반대 의견, 시험 응시 여부를 물었다. 여기까지가 교육청이 말하는 일제고사와 관련된 모든 법률 위반 행위의 전부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서명을 통해 최소한의 의견 표명하고, 담임으로서 학부모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감사와 징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은 법률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고,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교육 당국의 아무런 교육학적, 법률적 근거 없는 일제고사 시행과 무분별한 징계 남발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했다. 바로 학부모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월에 일제고사 편지 회신을 통해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일제고사를 반대하고 있었고, 그 중 11명의 학부모는 자녀가 시험 응시 대신 체험학습 참여를 원했다. (교장, 교감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모두가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담임인 내가 징계 대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지난해 학부모들이 스스로 나서서 탄원서를 써 주시고, 지역 주민들에게 서명지를 돌려주셨다. 탄원서 내용에는 나 자신이 민망할 정도의 학부모님들의 나에 대한 무한 신뢰와 당국에 대한 따끔한 질책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휴가철인데도 불과하고 징계위원회가 열린 8월 14일에는 몇 분의 학부모님들과 10여명의 제자들이 교육청 앞 집회에 함께 와서 응원해주시기도 했다. 교실에서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 보도블록 위에 앉아 의젓하게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이 있어 한결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집회를 할 수 있었고, 징계위원회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부, 교육당국은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고 내가 그들의 교사인 줄 착각하지만 나는 그들의 교사가 아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교사일 뿐이다.

우리 옆 반 선생님이 이번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육청, 정말 별 거 아닌 거 갖고 교사 징계하고,,,쓸 데 없는 짓거리 많이 하고 있네!”

교육 당국, 제발 일제고사 폐지하고, 쓸 데 없는 짓거리 그만 하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뭔지 생각 좀 하시길 바란다.


 

※이 글을 쓴 직후, 윤아름 선생님은 감봉 1개월의 징계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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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DJ시대 대학생의 고백/ 스프링

DJ시대 대학생의 고백

 

스프링

 

※ 이 글은 DJ의 공과를 따지는 글은 아니다. DJ의 서거 후 DJ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싶었다. 따라서 엄밀한 평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나는 대학시절을 DJ와 함께 시작했다. 투표권이 없었던 나는 경상도의 지역적인 특색 때문이었을까,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마음속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회창 후보가 국무총리 시절 대통령인 YS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런 행위가 ‘2인자의 홀로서기’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내가 그것을 분석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내게 대학생 시절은 ‘IMF 구제금융 시대’와 동의어로 기억된다. DJ가 ‘대중경제학’의 주창자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수용하는 변신이 이뤄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DJ는 최소한 케인즈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DJ가 집권 이후 케인즈주의에도 미달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라는 한 친구는 ‘IMF 재협상’을 이야기하는 대학생(한총련 학생)에게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정치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 못해 거부감이 일 정도였다. 그런 내가 DJ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시절, 5월 광주에서였다. 나는 광주로 향하는 순례단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경상도 출신인 내 눈에 DJ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과의 대화와 같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당시 대학생의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도 있었는데, 여러 대학생의 의견을 듣기 어려우니 사전에 카메라로 녹화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에도 카메라가 와서 녹화를 했는데, 당시 내가 패널로 나서게 되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데, 어찌나 긴장되었던지 이야기를 제대로 못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판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DJ가 빨갱이라고 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YS를 지지했고, YS 이후에는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그래서일까, DJ를 매우 못마땅해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라도 사람은~’이라는 낙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강원도에서도 많이 접한다. 얼마 전 20대의 젊은 교사로부터 ‘전라도 사람이었으면 나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가 보수적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걸까.

DJ는 지역감정의 희생자이자 수혜자라고 한다. 지역감정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고, 1997년에는 ‘호남지역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DJ는 호남맹주, YS는 영남맹주, JP(김종필)는 충남 혹은 충청맹주라는 지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두 맹주와는 확연히 다른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독재정권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래서인지 그는 집권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드는 등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DJ의 행보 중 쟁점이 되는 것은 이른 바 ‘햇볕정책’이라 불린 남북한 간의 교류이다. 그는 남한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아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금강산이 열렸고, 개성에 공단이 설치되었다. DJ의 정책은 남북한의 평화적인 관계 정립인지, 혹은 자본주의적인 틀 내에서 상호공존을 위한 것인지 논란을 일으켰다. 남한 내 진보진영에서도 ‘지지이행’에서부터 ‘반김일성 반조선노동당’(사회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났다.

DJ는 퇴임 이후에도 정치에 훈수를 두었다. 노무현 정권 최대정파가 친노파였던 것은 맞지만, 동교동계니 민주화 세력이니 하는 사람들이 기반이 되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DJ를 ‘가슴은 이상주의자, 머리는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했다. 굉장한 칭찬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가 왜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었는지 보여주는 힌트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계의 큰 별이 졌다. DJ와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서거는 느낌이 다르다. 연이어 두 명의 대통령이 세상과 작별했다. 이제야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DJ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에 맡겨졌다. 험난한 삶을 살다간 인간 DJ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그러나 대통령 DJ에게는 할 말이 많다. 이제 그가 뿌린 비운의 씨앗도 냉정하게 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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