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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6
    [1호] 이랑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랑
    와글와글

[1호] 이랑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랑

이랑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랑


기획연재를 하다!

한국현대사를 조야하나마 공부해온지는 조금 되었다. 새내기시절 한․근․연(한국근현대사연구회)활동부터 지금의 한국현대사학회까지. 사실 공부보다는 동지들과 집회에 나가고 뒷풀이를 하는 것이 더 좋았던 적이 많지만 세월이 첩첩히 쌓이다 보니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얻어 읽은 책들이 조금 되었다. 그러던 찰라 ‘와글와글’이라는 어렵지 않고 대중적인 지역매체발간 소식을 듣게 되어 기획연재로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먼저 한국현대사의 시대구분은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만약 해방이후 분단까지의 8년의 역사를 해방 이전부터 연계되는 계급투쟁의 장으로 인식한다면 한국현대사의 시기는 분단이후부터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접근해야하는 이유는 이 시기부터 사회주의의 이념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영입되거나 노련한 노동운동가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구분의 명확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통해 근․현대를 함께 조망함이 한국현대사를 보는 기준으로 적합하다고 보인다.

고루하지만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 정세와 밀접한 현대사를 공부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정세 분석에 있어 효과적일 수 있고 전망을 밝힘에도 탁월하다. 특히 한국현대사는 해방, 분단, 전쟁, 전후복구와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는 성격을 갖고 있어 오늘날의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찾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아직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일례로 올해,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옹호했던 두 전직대통령의 죽음을 목도하며 인간적 애도로 그치지 않고 진보적 가치의 표상이나 민족통일의 영웅으로 미화하는 분위기라든가,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세력들과의 연대전선(反mb전선)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2mb정권이 들어서고 광우병쇠고기 파동, 용산참사, 쌍용차 구조조정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이보다 언론에 부각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많이 있지만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세 사건을 보면서 좀 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 사건에 대한 구조적인 파악과 분석을 가하지 못하고 현상적, 개별적 접근이라든가 민족주의적 접근을 관철시켰을 때 얼마나 낙관적이고 의지주의적인 평가를 양산하였는지를. 한발 물러선 쌍용차 구조조정 분쇄 투쟁과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들이 단순히 人類愛적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얼룩지운 신자유주의에 맞선 당찬 투쟁으로 역사 속에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기획연재의 결의가 이정도 수준이다. 앞으로 신자유주의의 역사,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을 들춰볼 생각이다.

 

 

비운의 혁명가 이정 박헌영
 

식민지 시기

박헌영의 출생 연월일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지만 통설은 음력으로 1900년 5월 1일설이다. 가족으로는 할아버지 박홍원, 할머니 전주 이씨 이일석의 딸, 아버지 박현주, 어머니 이학규로 형제는 박현주의 첫째부인 탐진 최씨의 소생으로 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박간난이 있다. 박헌영은 1912년 4월 대흥보통학교 제2학년 입학 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것으로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으며, 1915년 3월 16세의 나이로 대흥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해 4월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담임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박헌영은 출결에 있어 ‘개근’이었고 성질은 순정(純正), 종순(從順,) 쾌활(快活)했으며, 복장은 청결하고 언어는 명료했다고 전해진다.

박헌영 20세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운동의 참가는 박헌영을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발을 디디게 했고 직업 혁명가라는 생애를 선택하게 된다. 그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 사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여러 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전단을 쓰고 돌리는 일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3․1운동과정에서 그는 체포되지 않았고 1919년 3월 23일 경성고등보통학교 15회 졸업생이 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21세 1920년에 잡지『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이 잡지는 현재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지만 박헌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공판 판결문을 보면 박헌영은 당시 편집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해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다고 나와 있지만, 이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판결이고, 형평성에 맞는 비판을 요하는 사료이다.

결국 청년 박헌영은 1920년 11월 큰 뜻을 품고 상해에 망명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22세 1921년 3월 그는 고려공산청년단(일명 고려공청)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고 그 비서가 되었다. 당시 고려공청 상해회의 최고 책임자는 최창식이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4월 그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했으며, 5월에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여기서 고려공산당은 안병찬, 김만겸, 여운형, 조동호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려공산당 산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박헌영은 사상연구에 힘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해 봄에 주세죽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해 8월 북경에서 고려공청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23세 1922년 3월 20일,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말에 국제공청의 명령에 의거,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국내이전을 준비했다. 그해 3월 25일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상해를 출발했고 4월 1일 밤 중국 안동현에 도착했다. 4월 3일 선발대로 김단야가 단독으로 신의주로 건너갔으나 신의주경찰서에서 체포되었고, 박헌영과 임원근은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던 영빈루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5월 30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박헌영외 2인은 ‘制令’ 제 7호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制令이란 조선총독이 발령한 명령을 가리키고, 제7호는 해외 망명지의 반일운동 가담자를 처벌하는데 적용되는 법령이었다. 그 후 이들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그 간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불명확하다. 25세 1924년 1월 19일 이들은 만기 출옥하게 된다. 이들은 이리하여 ‘요시찰 인물’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한 채 서울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상경과 동시에 맹렬한 활동을 개시했기에, 박헌영과 김단야 그리고 임원근은 조선사회주의의 트로이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해 1924년 2월 11일 박헌영은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1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에 재선임 되었으며, 4월 15일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에 따르면 그의 재임기간은 1924년 4월부터 1925년 5월까지이고, 그의 직책은 판매부 서기, 지방부 기자였다. 이듬해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서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19명의 당원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경향 각지의 비밀 야체이카 대표자들이었다. 박헌영은 이때 합법 사상단체 화요회 내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출석했다. 조선공산당 대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라는 굵은 대회가 동시에 개최되었으므로, 일본 경찰의 감시망이 이 둘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회에서 김재봉외 6명의 중앙집행위원이 선임되었고, 코민테른과의 교섭을 위해 조동호가 파견되었다. 이듬해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과의 유일한 교섭 상대자가 되었으며, 조선 내에서 최고 영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26세 1925년 5월 동아일보를 사퇴한 박헌영은 8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러나 10얼 15일 발행정지 처분을 받은 조선일보는 처분해제에 있어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시켜야 했기에 박헌영은 이에 희생양이 되어 해직되었다.

1924년 1월 19일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이 출옥한지 1년 10개월이 지났을 무렵 이들은 다시 한 번 신의주에서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1925년 11월 22일 저녁 신의주 시내 음식점에서 신만청년회 회원들의 결혼식 피로연 자리가 열렸고, 다른 내실에선 변호사와 일본경찰 5명이 모여 있었다. 피로연 자리에 노래와 춤을 금지하는 형사들의 요청에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결국 집단폭행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신의주 경찰이 총출동한 보복수사에서 한 청년회원의 가택수사결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명의의 ‘회원자격 사표’와 통신문 3통이 발각되었고, 수사는 성격은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으로 전환되었다.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터졌고, 1925년 4월 서울서 열린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간부 및 당원들이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박헌영은 예상치 못한 수사에 아내 주세죽과 자택에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취조 끝에 이들은 그해 12월 3일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미 경찰에서는 그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임과 그가 작성한 비밀문서들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박헌영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피해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가 일본의 실정법을 위반한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던 경찰과 이듬해 7월 까지 긴 심문조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심문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사람 외에는 결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중앙위원회 후보였던 7명을 끝까지 보호할 수 있었고 다수의 지방조직을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경찰의 취조가 끝난 12월 12일 박헌영 외 43명은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졌다. 그해 6월 22일 신의주 사건에 관계가 있다는 혐의를 받았던 주세죽은 결국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주세죽은 3주간의 조사를 받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7월 2일 종로경찰서에서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피의자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7월 초 조선총독부는 제1차,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피의자를 병합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관할을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지방법원으로 바꿨고 박헌영 등의 인사들은 경성지법 예심판사의 주관 하에 다시 고난에 찬 취조를 받아야 했다. 28세 1927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 사건 제4회 공판에서 박헌영은 정신이상 증세를 드러냈다. 취조 중 사망한 인사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리쳤고, 이때부터 박헌영은 ‘광인행세’의 징조를 보였다. 그해 9월 22일 조선공산당 사건 제5회 공판에서는 신체이상으로 출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날 제6회 공판에도 불참했다. 10얼 7일부터 단식에 들어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의 면회도 철회했다. 결국 11월 22일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7일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여 혜화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이듬해 1928년 8월 아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박헌영과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딸 비비안나를 해산하고 모스크바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김단야의 지원으로 1929년 1월 18일 박헌영 역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 주세죽 역시 같은 해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해 박헌영은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그의 입당 연월일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국제레닌학교 입학 즈음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이다. 박헌영은 영어반 제2학년에 소속되어 노동운동사,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등을 수강했고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좌를 비롯한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32세 1931년 말 그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국제레닌학교 재학 시기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로 그 졸업일자가 정확하지 않다. 다음 달 박헌영은 상해로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학기 도중에 국제레닌학교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33세 1932년 1월 25일 박헌영과 주세죽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를 위해 상해에 도착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조선 공산주의운동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이 잡지는 1933년 7월까지 발간되었다. 잡지『콤뮤니스트』는 식민지 시기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뇌리를 지배한 문제인 공산당 재건의 노력 일환으로 간행되었다. 박헌영과 김단야에 의한 발행이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이 발간 주체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부딪히고 있다. 화요파 공산주의그룹과 ‘콤뮤니스트 그룹’이라는 독자적 공산주의 그룹이 거론되고 있다.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에는 조선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조공해산 이후 사회주의 조직이 어떻게 존재해왔는지는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기에 현재 『콤뮤니스트』의 발간주체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콤뮤니스트』의 출간을 상해에서 진두지휘한 것은 김단야이다. 그는 『콤뮤니스트』발간을 실무적으로 담당할 상해 사무국 조직에 착수했고 믿을 수 있는 동지 5명을 선발해 두 그룹, 제작팀과 국내파견그룹으로 나누었다. 한참을 활발히 활동하던 『콤뮤니스트』는 1931년 여름부터 부진에 빠졌고 그 활동력이 복원된 것은 193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온 박헌영과 아내 주세죽이 충원되면서 부터이다. 사령탑을 맡은 박헌영은 『콤뮤니스트』의 발간, 국내 조직과의 연락, 그 밖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한 전권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논란이 있는 잡지지만 결국 『콤뮤니스트』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기관지라고 볼 수 있다. 이 잡지에 간여한 여러 인사들은 어느 한 파에만 속하지 않았고, 상해파, 화요파, 이르쿠츠크파 인사들이 고루 참여했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지도선 외에는 어떤 독자적 노선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당대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을 ‘국제선’이라 불렀다. ‘국제선’은 조공해체이후 코민테른으로부터 존립의 의의를 인정받은 유일한 공산주의 그룹이었다. 이 그룹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를 받았으나 ‘국제선’은 당은 아니었다. 따라서 코민테른 지부로 가입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 대열 내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 코민테른은 모든 공산주의 그룹을 ‘종파’로 규정했는데, 기존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한 기초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콤뮤니스트』는 코민테른의 이런 변화된 새로운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4세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다시금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일본경찰은 김단야를 잡기 위해 잠복하고 있었는데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을 체포해 보니 그는 김단야가 아닌 박헌영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한 노력이 사자를 잡은 것이었다.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한 주세죽은 김단야를 찾아갔고 정황을 알기 위해 연락원이 사는 거처로 찾아갔다. 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은 박헌영을 앞세워 집으로 쳐들어왔는데, 눈치를 챈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 김단야와 주세죽을 보호하기 위해 연락원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속여 간 박헌영은 경찰들에게 그 자리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김단야를 잡기 위한 경찰의 폭압 수사에 박헌영은 엉뚱한 곳으로 유도, 김단야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그해 7월 말에 박헌영은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8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예심 종결 후 1934년 12월 27일 박헌영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박헌영이 징역 6년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공산당 사건때와는 다르게 중요 증거문건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해 거짓진술 함으로써 ‘심문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박헌영이 취조 중 사실대로 진술했다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와해 될 것이고 박헌영 자신도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박헌영이 잡혀 서울로 송치되는 시기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콤뮤니스트』발간사업에 손을 떼고 모스크바로 함께 귀환하게 된다. 여기서 박헌영과 김단야, 주세죽은 엇갈린 인생 항로를 가게 된다. 격렬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포시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란 생각은 주세죽을 비극적으로 몰아갔고, 그 옆에서 위로하던 김단야는 결국 주세죽과 1934년 모스크바에서 재혼하게 된다. 병보석간 해외탈출 전력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최고 수뇌부로 경찰의 가혹한 심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주세죽과 김단야 둘 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생존사실을 12년 동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생존 사실은 해방 이후에 알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재혼한 김단야도 죽고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주세죽의 비극적인 심리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사료가 없어도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주세죽과 김단야는 1937년 말에 아들을 출산하지만 그 아들 비탈리이도 남편 김단야 처럼 그 곁에 오래 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사형당했다. 당시 스탈린 숙청의 광풍은 구볼셰비키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형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외국인 혁명가들에게도 미쳐 한 장의 투서로 김단야는 소련 비밀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인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나 결국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활동과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라는 제1급 범죄자의 판결을 받고 직후 바로 사형 당했다. 김단야의 비극은 주세죽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해 5월 22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 결정으로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았다. 주세죽은 1953년 첫 남편 박헌영이 북조선에서 미국 간첩 혐의로 실각한 것을 알고 딸이 있던 모스크바를 급히 방문하던 길에 병을 얻어 기차에서 사망했다.

김단야가 죽고 주세죽이 카자흐스탄 5년 유배형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1939년 40세의 나이로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된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과도 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해 12월 12일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 이관술을 만나게 된다. 박헌영은 이관술과 함께 운동 전반에 대해 협의 하였고 그해 12월 말부터 약 40일 동안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경부터는 약 1년간 서울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경성콤그룹은 1929년 결성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면서 기관지의 명칭을 『콤뮤니스트』로 개칭하였다. 그해 10월 박헌영 서명의 위임장을 소지한 채 코민테른에 파견된 이관술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잡히게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위임장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1941년 1월 박헌영은 경성콤그룹 제1차 검거사건을 피하기 위해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서대문 사건’이라고도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인해 여러 인사들이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의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의 회고를 살펴보면 잠적 생활 간 정순년이 박헌영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아들 박병삼(원경스님)을 가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42세 1941년 8~10월 경성콤그룹 제2차 검거사건은 종로경찰서가 주도했기에 ‘종로사건’으로도 불린다. 박헌영은 이 검거도 모면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헌영은 일본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광주로 피신하였다. 이때부터 박헌영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잠적생활을 시작했다. 박헌영은 회고록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은신하고 있었음을 밝혔는데, 이 기간에도 박헌영은 활발한 사회주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46세 1945년 8월 15일 지하에서 잠적생활을 하던 박헌영은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박헌영에게 새롭게 득의에 찬 시기였다. 1919년 처음 직업 혁명가라는 생애를 택한 박헌영에게 민족의 해방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또한 그의 투쟁 역사는 자산이었다. 때문에 박헌영은 ‘해방 조선의 산 역사’, ‘27년 동안 꾸준한 초인적 투쟁을 계속한 철의 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해방 직후 1945년 8월 17일 박헌영은 광주를 출발 해 상경 길에 올랐다. 18일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저녁 경성콤그룹 간부회의를 개최했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 접촉했다. 당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일차적 관심은 소련과의 연계를 구축하는 것이기에 상경한 밤에 급하게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에 출두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 박헌영 사이의 연락관계를 파악하는데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만큼 해방 직후 미․소의 대립은 극에 달하고 있었고, 그 사이 박헌영이란 인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해 8월 20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는 경성콤그룹을 재편한 것으로 1929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당일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의 명의로 8월 테제라 불리는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이 채택되었다. 박헌영이 직접 작성한 이 문서는 현재 명지대 북한연구센터에서 발간한 『조선공산당사』에 「조선공산당 개편과 정치노선 결정 선언」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해 9월 11일 박헌영은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은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진 조선공산당의 제1인자였다. 그리고 당시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이 귀국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서울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되었다. 그해 9월 9일 미군은 서울에 진주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미래를 놓고 미군정의 이해와 박헌영의 이해는 상충되기 마련이었는데, 그해 10월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회견하게 된다. 회견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의 목표를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미군정과는 대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박헌영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은 미국의 이해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소련과 미군의 진주, 그리고 여러 사상의 대립 속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독자적인 노선만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해 10월 30일 박헌영은 안국동에서 문화단체 미 언론인 100여명과의 회합자리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해」라는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박헌영은 친일파를 청산한 바탕 위에서 민족통일전선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군정권의 협력을 강조했다. 여기서 유혈충돌의 두려움을 피하고, 미국의 진주 이유를 조선의 해방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해 말 귀국했던 이승만은 반공을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파괴자로 공산주의를 비난했다. 따라서 박헌영은 이에 반박하기 위해 12월 23일 이승만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전 두 차례에 걸친 회견이 있었지만 이처럼 이승만과 박헌영은 절연하게 된다.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이처럼 민족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정오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처음 성명 발표 후 박헌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위원들은 반탁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 인사들과의 접견 이후 어떤 정책 변화가 있었는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에 따른 국내의 분위기는 큰 파문이 일었다. 우익 정당들은 조선공산당이 소련 1국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을 편입시키려 한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와 인사들은 박헌영을 규탄하기 시작했는데, 박헌영을 암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해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결렬되었고 그해 9월 6일 미군정의 명령으로 3개의 좌익 신문이 폐쇄되었으며 그날 밤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이 발령되었다. 체포령이 발령된 시기를 기점으로 서울 시내에는 6천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수색작전에 들어갔다. 잠적생활을 통하면서도 비밀리에 박헌영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민전 의장단 회의가 연일 열렸다. 회의에서 박헌영 등은 대미협조노선 철폐를 재확인 했고,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5대원칙에 의해서만 응할 것이며, 입법기관 설립에는 절대 반대할 것을 재결의 했다. 그해 9월 29일 박헌영은 월북 길에 올랐다. 그는 관에 담긴 채 옮겨졌으며, 산악을 헤매며 월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한에서

47세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은 평양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부터 박헌영은 분주했다.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 추진세력이 발표한 7원칙에 대해 절대 반대를 선언했으며 개성에 비밀리에 잠입해 일주일간 머물면서 조선공산당 간부들과도 접촉했다. 또한 담화문 발표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저지하려는 우익 진영을 비난하면서 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역량을 집결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23~24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해 12월 10일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5월 21일에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즈음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협의대상에서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을 제외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또한 여러 단체에서 박헌영 체포령 철회 요구가 빗발쳤고, 캠페인도 전개되었다. 결국 그해 6월 18일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참가할 당 대표자로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신속한 진행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박헌영을 전국적 폭동을 일으키려는 음모죄를 씌운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되었다. 따라서 남조선노동당은 남북요인회담을 지지한다고 천명하게 되는데 미군정에 한해 좌익진영의 탄압을 중지할 것과 미․소 양국 군대의 공동철병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UN에 의해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미국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했고, 영구 분단을 저지하고 인민주권을 수립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단독선거를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1948년 5월 10일 이남에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냉전체제 속 두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은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박헌영은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면서 이런 성명서등을 UN에 보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해 9월 16일 맥아더 장군을 필두로 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따라서 박헌영과 김일성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긴급서한을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미군과의 전면전으로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제시한 것이 ‘중국과 기타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달라는 것이었고, 결국 중국정부가 ‘인민지원군’을 보내게 되었다. 그해 10월 초 박헌영은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인 인민군 중장이 되었다. 그와 함께 미군과 남한군에 의한 학살을 UN엔 항의 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휴전이란 명분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휴전이 거론될 시기였던 1953년 3월 5일 이승엽 등 다수의 남로당 출신 당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었으며, 박헌영 역시 그해 3월 11일 체포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범죄혐의 사실을 날조해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설명했다. 박헌영은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하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이라고 김일성은 주장했다. 이를 통해 조선노동당 내 분파투쟁 및 전쟁책임을 둘러싼 세력 간 갈등에 박헌영은 희생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은 공판이 진행되었다. 결국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56세의 나이에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선고를 받았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박헌영은 ‘자의 진술’과 ‘사실 심문’을 통해 자신의 범죄 사실에 관한 기소장의 내용을 모두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최후 진술에서 “검사총장의 논고가 전적으로 지당하다”고 말했으며 이어서 자신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매국 역적이며, 오전 공판 심리에서 기소 사실의 일부를 부인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취소한다고 말했다. 혁명가의 말로는 참으로 씁쓸했다. 1956년 4월 23~29일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박헌영은 김일성으로부터 ‘종파분자, 미제간첩’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57세 1956년 7월 19일 지하 감옥에서 나와 어느 산중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의 보호를 부탁한 채 박헌영은 그렇게 권총으로 사살 당하였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일대기가 최근에 들어 많이 연구되고 조사되고 있다. 소련과 미국의 문서들이 대량 방출됨에 따라 현대사의 연구도 진작하고 있지만 그간 궁금증을 자아내던 혁명가들의 삶들도 함께 발굴되고 있다. 한 번의 계기로 평생을 옥중에서 보내고 고문을 견디며 투쟁하던 혁명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현재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나는 역사 속에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혁명가들의 삶을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앞으로 몇 호는 더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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