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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월 12일] 나는 오늘버틈 도루 나라없는 백성일세

 

  사람 6명이 죽었다. 그리고 검찰의 공식입장이 발표되었다. 사람은 죽었으나 잘못한 사람은 없단다. 공권력은 정권의 권력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돈이 있든 없든 전 국민의 나라이다. 따라서 공권력이란 국민의 목숨을 빼앗는 방향이 아니라 그 목숨을 지키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있었던 철거민 참사는 명백하게 이 방향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이 없다고 한다.

 

  지난 30여년 간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왔다. 개발이익을 둘러싸고 조합의 부정과 다툼도 끝없이 있어왔고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의 저항과 이를 강제로 진압하는 폭력, 그리고 이에 따른 희생도 어제오늘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농성을 하는 자도 엄동설한에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듯, 그들에 몽둥이, 물대포 세례를 퍼부은 자들도 좋아서 한 짓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오랜 재개발의 역사에서 이번 용산참사처럼 농성 수 시간 만에 안전장치도 갖추지 않고 유래 없는 강경진압을 저질러 이 같은 참혹한 참사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닐 말로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정권이 휘두를 힘이 없어서 그 같은 속전속결 강경진압을 피했을까.

 

  경제 한파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요즘에 피땀흘린 삶의 터전을 일조에 빼앗기고 생계가 막연해진 사람들이 그대로는 못나간다고 목청을 높였기로 그것이 그렇게도 큰 죄였던가? 백보 양보하여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라가고 시너를 뿌린 자들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고 그들의 유죄를 인정한다고 한들 그들이 죽을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자들이던가?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도 썩 좋은 말은 되지 못하지만 살겠다는 반어적 표현이지 말 그대로 죽겠다는 뜻은 아니다.

 

  농성에 투입되는 공권력이란 기본적으로 해산과 무력화를 목표로 삼아야 것이다. 도망갈 길 막아놓고 먹이를 쫓아 포획하는 사냥과는 다른 것이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뒷길도 열어놓지 않고 토끼 쫓듯 휘몰아 이토록 큰 희생을 냈단 말인가? 그리고도 아무도 잘못한 이가 없으니 애초부터 이들의 목표는 해산이나 무력화가 아니고 일벌백계였던가? 국민의 살아야겠다는 생존권 주장을 법질서 확립이니, 국가기강 정립이란 말로 서슬 퍼렇게 틀어막더니 앞으로 수없이 잇따를 재개발 분쟁을 이 참에 본때를 보여 막아보자는 것이었을까?

 

  채만식의 단편 <논이야기>는 구한말 동학당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미명 하에 무고하게 토지를 수탈당하고 소작농으로 떨어진 뒤 일제강점기를 보낸 가난한 소작농의 토지관을 다루고 있다. 해방을 맞은 한덕문, 한첨지는 일인에게 팔았던 토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지만 일본이 패망한 뒤, 적산(敵産, 패망한 일인이 남겨두고 물러간 재산)처리 과정은 그다지 공정하지 못하였다. 이를 둘러싼 일부 약빠른 자들의 협잡도 협잡이었지만 농토란 근본적으로 농사짓는 자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간과되고 있었던 것이다. 채만식은 이 같은 당시 토지정책의 반민중성을 일찌감치 간파하여 수준 높은 풍자와 해학으로 형상화하였다. 자신의 토지를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덕문은 분노한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길, 삼십육년두 나라 없이 살아왔을려드냐. 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한덕문의 선언이 너무나 무지스럽고 무작스러운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나라가 있으면 백성에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야 백성도 나라를 믿고 나라에다 마음을 붙인다는 그 심정 또한 이해가 된다. 먹고 사는 일에는 시비가 없다. 굶기고 못먹게 하는 쪽이 무조건 잘못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소리가 나온다. 국민의 밥상을 빼앗고 죽음으로 모는 공권력이란 애초부터 형용모순이다.

 

  왜 벌써부터 머리 싸매고 더 좋은 대책, 더 원만한 합의를 만들지 못했던가? 앞으로 또 제2, 제3의 참사를 자초하고 말 건가? 자책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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