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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자살정국이라고 했었다.
젊은이들은 소리를 치다치다 비명을 지르다지르다
자신의 몸뚱이를 내던졌다.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지하 시인이 하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때려치워라'라는 글을 실어
욕을 삼태기로 얻어먹을 때 왜 하필 조선일보냐...는 심정은 있었지만
그 의취를 이해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직도 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는 나의 질긴 생명력이 부끄럽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것일 게다.
(물론 아직 완결형은 되지 못하니 '남은'이라기보다는 남아나고 있는... 쯤이 적당할 게다.)
어쨌거나
숨쉬기 어려운 세월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제 이 비루하고 누추한 세상을 만든 책임까지도 회피할 수 없는
어중간한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자살할 용기도, 뒤엎을 힘도 없이
희미하게 항변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느냐!"
무엇, 무엇, 무엇...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삶은 소진되고 희망은 사라진다.
정신은 지치고
몸은 병들고
때로는 자살을 택하고
죽고 죽고 죽고 죽는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죽음의 굿판 때려치워라!'
말할 이가 없다.
죽음의 굿판이 계속되고 있다.
아침 일찍 전화를 받았다.
내 동기의 와이프인 후배였다.
동기는 지금 뇌종양이고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전에 원고 청탁을 한번 했었다.
원고가 맘에 들지 않아서 화를 냈었다.
10년 가까이 잡지를 만들면서 수합된 원고를 싣지 않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화가 난 것은 ... 단 두 번이었다.
그 중 하나였다. 아마... 기대가 남달랐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이 좋게 지냈을 텐데...
마음이 아프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죽음을 둘러싼 관계들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무언가가 나를 비웃는 느낌이다.
박완서 선생께서 영면하셨다.
벌써 재작년, 박선생께서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여성작가회의에 오신다고 해서
학교 발표회를 제끼고 찾아갔었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원한 없는 여성성의 승리다.
선생은 자신의 삶을 귀하게 대접할 줄 아셨고
그 힘은 안팎을 고루 성찰하는 힘으로 확장되었다.
선생의 비판에는 늘 가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었고
천박한 자본주의 세계에 대응하는 건강한 인간의지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가식없는 품위와 고상함과 힘의 삶을 보여주신 선생의 명복을 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어제 저녁 나에게는 5만 7천원이 있었다.
지갑에 5만원 한 장과 3천원, 가방 바깥쪽 지퍼 안에 4천원.
연극을 보고 팜플렛을 사느라 지갑을 열었는데
지갑 안에는 잔돈이 3천원밖에 없었다.
그래서 잔돈이 없다며 5만원권을 냈는데
다행히 돈이 많아 거스름돈을 거슬러 받았다.
4만4천원이 맞는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반 접힌 채로 대충 맞는다고 느끼며 가방 밖 지퍼 안에 돈을 넣었다.
넣으면서 보니 거기에 천원짜리 네 장이 있어서
“아유, 여기 잔돈이 있었네. 이걸로 낼 걸.”이라고 생각했다.
저녁밥을 먹고 장소를 옮겨서 술을 한잔 했는데
그건 모두 동행인 선배가 냈다.
선배네 집이 가까운 영등포역 근처에서 놀면서
술값은 선배가 내고
나는 집이 머니 택시비를 낸다는 계획이었다.
소위 총알택시를 탔다.
선배네 집이 가깝다지만 추운 밤길을 걷기는 좀 어려워서
선배네 집쪽으로 조금 돌아 내려주었고
나는 택시를 계속 타고 인천으로 달렸다.
택시비는 원래 3만5천원에 합의하고 있었지만
택시 안에서 선배가 고맙다고 한 인사를 전했더니
기사가 말로만 고마워하는 거 안 좋아한다고 하길래
톨비를 내겠다고 했더니
택시비를 4만원을 달라고 했다.
선배와 오랜만에 잘 놀고 훗훗한 기분에 그러라고 했다.
가방 뒤쪽 지퍼를 열어서 4만원을 맞춰놓고
원래 있던 4천원과 거스름 받은 4천원을 합해 8천원을 가방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집에 도착해서 택시비를 주었다.
택시 기사는 잠깐 우물쭈물 하더니
4만원이 아니라 2만2천원이라며 돈을 돌려주었다.
나는 민망해하며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만원권을 찾았다.
그러나 없었다.
결국 나머지 2만원은 카드로 계산했다.
집에 와서 보니
남은 돈은 지갑 안에 있던 3천원 포함, 1만 3천원
돈의 개수는 맞으나 만원권 두장이 천원권 두장으로 바뀐 것이었다.
경우의 수는 대략 4가지이다.
1. 만원권 2장이 발이 달려서 도망치고 새로 천원권 두장이 들어와서 만원권인 척했다.
2. 만원권 2장이 천원권으로 변신하였다.
3. 공연장에서 4만4천원이 아니라 2만6천원을 돌려받았다.
4. 택시 기사가 2만원을 2천원으로 바꿔친 다음 추가로 2만원을 계산하게 했다.
확실한 건 내가 바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염치없고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멀쩡한 경제인 중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내가 바보인 것도 싫고 남이 나쁜 사람인 것도 싫다.
정말 살맛 안 난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 2만원은 어떻게 된 것일까?
되는 일 없다.
하두 오래 되는 일이 없다보니 가끔 되는 일 없다고 하소연 하던 게 습관이 되었었다.
습관으로 하소연 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당하면서 느낀 감정이 말하면서 되살아나서..
말할 때마다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듣는 사람은 어떨까...
듣기 좋은 꽃타령도 한두번이라는데..
듣기 좋지도 않은 하소연이 매일 되풀이되면...
되풀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웹에 주절거려두는 게 낫다.
말하기 전에 미리 알고 위로를 들을 때도 있고...
말하기보다... 아유 거기 써놨으니 걍 바바... 말도 하기 싫어...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렇게 기록해 두면
기억해두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감정에 거리가 생기면서 왕짜증 사건이...
운나쁜 연속 사건쯤으로 재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자주 쓰면 거시기한데.. 가끔 쓰면 그래두 낫다.
감정기록을 조작해서 기억의 수위를 조절하는 기술이다.
지난 주는 정말 왕짜증주간이었다.
목요일 : 온 직장이 총동원되는 국제학술대회, 나는 마이너리그의 사회를 맡았다.
발표자 한 인간은 ... 나름 쌓이는 게 많았겠지만... 발표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전화걸고 문자날리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안오면 안되냐는 전화가 왔다고 메모가 왔다.
결국 자리를 비우고 나와서 전화를 했다. 다행히 오는 중이라고 했다.
발표순서를 조정해서 큰 문제는 없이 넘어갔지만... 오전부터 뱀파이어에게 한방 물린 상태가 되었다.
오후 사회는 대단히 힘든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하니까...
끝날 시간쯤엔 몹시 피곤하였다.
그런데... 외국인 중심으로 고급식사대접한다고 마이너리그 사회자인 나를 비롯해
외국어 잘 못하는 사람은 모두 빠지라고 하였다.
마무리 명색없는 머슴이라고 진종일 일시키고 밥을 굶기다니...
이런 삼성 같은 놈들을 봤나... 어처구니가 없다.
금요일 : 오전에 예의 국제학술대회 갔다가 서울로 강의를 갔다.
커피를 만들어놓고도 두고 가는 바람에 계속 피곤하였다.
차선을 잘못타서 하이패스 구간으로 갔다. '통과한 후에 영업소에 문의'하란다.
안쪽 차선에서 간신히 차를 빼서 갓길에 세운 후 영업소를 갔다.
차 번호를 묻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났다. 간신히 더듬어 알려주었는데...
차로 돌아와 보니 잘못 알려주었다.
저녁에는 청소년인문학 마지막 강의가 있었다.
운전하기 싫어서 택시를 탔다. 내리려고 보니 지갑이 없다.
주머니, 가방, 모두 뒤져도 고린전 한푼 없다.
택시 기사의 계좌번호를 적어가지고 내렸다.
올 때는 아예 처음부터 물어봤다. 집에 가서 지갑을 갖고 내려와야 하는데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팁 천원 보태서 택시비를 주었다.
우울이 극에 다다랐다.
결국 냉장고에 있던 카프리 한병갖고 모자라서 버드와이저 한병과 산사춘 한병을 사왔다.
전보다 일도 많이하고 돈도 더 버는데
전에는 냉장고에 상비해두던 버드와이저 번들을 요새는 꿈도 못꾼다.
누가 먹다 남긴 오징어 부스러기로 술을 더 마시고 잤다.
일 안하고 반항하며 주말을 보내고...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다.
다시 우울한 월요일이다.
난투극은 개뿔~~
여학생이 일방적으로 맞고 휘둘리두만...
그 여학생이라고 힘 없어서 머리채 잡히고 얻어맞기만 했겠어?
그래도 할망구라고 배운 게 있어서 주먹 안 나간 거지....
아니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때릴 수가 있느냐고!!!
그 여학생은 사람 아냐?
인권 없어?
너 같으면 반말 듣고 가만 있겠냐고?
확실한 건 반말 들어도 그렇게 때리진 않아.
그 여학생이 첨부터 반말하며 덤빈 것도 아니고...
장유유서라지만...
나이 많은 사람 노릇하기는 쉬웠던 줄 아나?
도대체 뭘 근거로 그렇게 나이 유세를 떨면서
대접을 강요하는 건데?
어정쩡한 양비론 완전 왕재수야.
난 학생 편, 맞은 사람 편, 약한 사람 편이야.
그럴 바엔 존대말을 폐지해 버려!
아예 반말을 폐지하든가.
공평하게 말해보자구.
웬 비냐.
또 비가 샜다. 심지어 이야기공방에서...
아침 먹고 띠굴거리면서 한 숨 자고 일어나
뭐 좀 먹을까 부엌 쪽으로 갔더니
빗물이 오늘은 북쪽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들이칠 수 없는 구조인데 빗물이 들이치고..
부랴부랴 그 방향 창을 모두 닫았다.
이야기공방의 창은 보통 닫혀 있어 그냥 문을 열어봤을 뿐인데...
완전 난리가 나 있었다.
키보드는 못쓰게 되었을 것 같다.
당황하여 부랴부랴 그릇과 걸레를 가져다 물기를 닦으며
테이프며 컴퓨터를 물이 안튀는 곳으로 옮기려 했지만
빌어먹을~~~
웬놈의 선이 그렇게 많은지 성질대로라면 죄다 잡아뜯고 싶었다.
간신히 컴을 옮기고 물기를 닦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내 생각에는 컴퓨터 본체와 테이프데크에만 별일 없으면 큰 일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지금은 컴퓨터를 켤 수도 없으려니와
하나하나 분해한 선들을 다시 이을 능력이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빗물 배수관이 우리층의 천장 위로 지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역류하여 빗물이 샌다.
맨처음에 봉변을 당한 것은 재환이었지만
그 다음은 여백은 없고 꼭 나 혼자 있을 때만 이런 일이 생긴다.
그 뒤로 다시 수리를 했는데도
지난 번 폭우 때도, 그 후에 폭우 때도...
그땐 그래도 편집실이나 자료실이 아니고
빈방, 회의실이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했었는데...
입초사 때문이었을까?
선풍기를 틀고 에어컨에서 제습기능을 실행해서
젖은 건 어지간히 말랐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응접실에 있는 컴퓨터가 켜지질 않는다.
전원이 접촉불량인지...
켜지다 꺼지고 켜지다 꺼지고...
내가 전원을 끌 때는 확실히 끈 상태였는데...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거 아닐까?
천둥번개 심하게 쳐서 혹시 낙뢰피해라도 입을까 해서였는데...
.................
대충 수습해 두고 여백에게 전화를 했다.
안된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해봤다.
역시 안된다.
전화까지 안되다니 열 받았다.
몇 시간이나 지난 다음에 간신히 통화가 되었는데...
이 친구는 장봉도 외가에 가 있어서 금방 오지도 못한다.
내일 3시 배를 타고 나올 예정이란다.
돌아오면 늦더라도 사무실로 오라고 했더니
또 비샜냐고 걱정한다.
잠시 당황했지만 돌아와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내일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내 탓인 것 같은 느낌이 커지면서
애 봐준 공 없다듯이 어처구니 없이 눈치가 보인다.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진빠지고 우울하다.
무사히 수습되기만 바랄 뿐이다.
회원님의 [맥아더동상을 철거하자] 에 관련된 글.
그러게 벌써 2005년이네. 이 썩을 것들이 인천사람을 물 먹인 것이...
나는 인천 산다.
맥아더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이전하고
식민도시, 식민항으로서 인천이 확립되기 이전의 인천
각국공원의 다양성을 호출하여 더 나은 인천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일보를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맥아더동상철거를 위한 뭔 인간들인가 모임인가 연대인가
인천 사람들은, 적어도 맥아더동상 이전을 위한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모임에서
갑자기 이슈를 터뜨렸다.
방송에서 갑자기 맥아더동상을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파했다.
그리고, 맥아더동상은 재발견되었다.
그 사이 거의 방치되어 있던 맥아더는 부활하여 오랜 먼지와 때도 말끔히 씻어냈고
사시사철 그윽한 향기 풍기는 꽃다발이 그칠 새 없이 바쳐졌으며
그 일대에는 군함을 연상케 하는 장식물도 만들어졌다.
맥아더 장군을 모신다는 무당은 1970년대조차 비웃음의 대상이었는데
2000년대에는 흥미진진한 기사거리가 되어 방송도 탔다.
동상의 이전은커녕 미군의 상륙지점과 상륙작전일은 새로운 기념일로 부활하여
수십억원에 이르는 대형 행사로 기려지게 되었다.
이제 그 공은 '맥아더 동상을철거하기위한 사람들' 이란 정체모를 집단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좌우익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원론을 새삼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극우를 옹호하자는 것도 맥아더동상이 그 자리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상은 이미 그 자리에 반백년이나 있었고 그 동상이 의미하는 정치적 함의 또한 나날이 쇄신되고 있다.
이는 이를 철거하든 이전하든 고려해야 할 지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맥아더 동상을철거하기위한 사람들'은 이미 사라졌지만
인천사람들에게 맥아더동상은 더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을 하고 싶은 때는 우선 머리를 써야할 것이다.
둘째로 이에 엮여있는 사람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바란다.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이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려되고 존중되는 세상이다.
무대뽀로 큰 목소리와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 대상이 극우든, 맥아더든, 인천사람이든 ...
다만 한 가지 경고해두겠다.
나에게 걸리지 마라. 죽는 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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