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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마음 속엔 체벌 한 조각씩

할머니는 해방 직후 교사이셨다.
사범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임하셨을 때 할머니의 나이는 열 아홉살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라곤 하지만 지금처럼 애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봉숭아 학당'이란 컨셉이 애초에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될거다. 당시의 학급은 정말로 그랬다고 한다. 나이먹은 남학생들이 어린 여자 교사를 짖궂게 희롱하던 일도 종종 있었단다. 그 '말 안 들어먹던' 학생들 얘기를 하시며 할머니는 아이구, 말도 못했어,하셨다.

 

할머니께서, 그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매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기강이 잡히고, 학생들에게 얕보이지 않고 위엄을 가질 수 있었을까.
다 큰 성인 남성 학생들이 19세 소녀에게 뙇 맞고서는 아이쿠 뜨거라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했을까.
머리모양을 이래라 저래라 했다면, 소지품을 제한했다면, 학생들의 학습의욕이 더 충만해졌을까.

 

통제 안되고 말 안듣고 개념없는 학생의 무리-란 점에선 지금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에 대한 인식이나 당시 할머니께서 끌고가야 했던 교실이나 다름없다.
차이는 그저, 얼마 전까지의 현대 교사들은 '때릴 수 있으니까' 때렸던 것 뿐이다.
얼마 전까지의 학생들이 '맞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통제 안되고 건방져서가 아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학생이 어른일 경우엔 불가능했던 것이 아이들에겐 가능했다. 어른들에겐 있는 건드려선 안되는 무언가가 아이들에겐 없다고, 세상이 합의해줬기 때문이다.

 

60여 년 전 과거의 교실 풍경에서 상상의 여지를 얻는다. 만일 지금의 교실에도, 나이 다 먹은 후에 들어온 만학도들이 군데군데 포진해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양반들이 교양머리도 참 없어 영 성생 말을 안 들어먹고 우습게 본다고도 생각해 보자. 때리면, 해결될 거 같나?

 

체벌이나 외모, 소지품 검사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기능은 상징이다. 너희는 통제받는 집단이고 우리는 통제한다-는 걸 알리는 것 말고는 실질적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똑같이 통제 안되는 상황에서 어른에겐 쓸 수 없고 애들한텐 쓸 수 있다는 게 그 수단적 무용성을 증명한다. 정말로 체벌만이 교실의 학습 분위기를 보장하는 수단이라면, 대상이 누구건 썼을 때 효과가 발휘될 수 있어야지.

 

애들이 맞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그건 쪽팔리고 화나고 굴욕적이기 때문이다. 10대 후반 쯤 된 애들이 정말 육체적 고통 때문에 매가 무서울까 설마.(만일 그렇다면 그건 체벌의 물리적 폭력 수위가 가히 어마어마한 거고.) 할머니 교실의 성인 어른 남자 학생들과 19세 여자 교사 만큼이나, 한창 뻗치는 게 힘일 10대 청소년들과 교사 한 사람 구도 역시 소위 계급장 까고 붙는다면 물리력은 교사쪽이 상당한 확률로 후달린다.
즉 매는 물리력으로 기능하는 게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굴욕을 줄 수 있는 위치이다'라는 상징인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면, 그건 말이 안된다. 소녀 교사가 어른들을 가르치며 매를 든다는 게 웃겨보이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게 가능하려면 별도의 룰을 끌고 들어와야 한다.
학생들에겐 성인과 같은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합의.
매는 그런 합의를 보여주는 상징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학생이 어른일 때 용납될 수 있을 것들이 아이들이란 이유만으로 안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습 환경 조성이 어렵니 어쩌니 하지만 사실상의 이유는 그저 단지 나이가 어리단 것뿐만이 아닌지 말이다.
이를테면 어른인 학생이 임신을 한다고 해서 학습권을 박탈한다면 타당할까? 왜 미성년자일 경우엔 당연스레 그렇게 하나? 청소년이 임신을 하면 인생이 당사자에게 꽤 터프해지긴 하겠으나, 배움을 금지당해야 할 근거라도 있나?

A에겐 가능하지만 B에겐 이유 막론 금지되는 것. 이걸 가리키는 단어는 '차별'이다.

 

매는, 내가 저항할 수 없는 권역의 사람이 나를 통제하는 수단이다. 6살 꼬마, 20대 청년, 백발 노인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처벌 권리자에게 '통제에 효율적'일 순 있어도, 피교육자에게 '교육 상 효과적'이진 않다. 이미 학교 체벌은 공공연히 할 수 없는 행위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추세다. 헌데 단지 그 이유가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방법은 괴롭고 야만적이라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체를 자신의 의사대로 보전할 권리를 갖고 있고 미성년자도 학생도 결코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도 행복 추구권을 가진 인간으로 보는 대신 막 굴려도 되는 미완성 중간 과정 취급하는 인식은 거의 의식도 못할 정도로 사회 전반에 깊고 넓게 자리하고 있다. 체벌의 효용을 논하고 어쩌고 하기에 앞서 보편 인권의 차원에서 생각을 출발시켜야 한다.

 

어른들끼리도, 제발 유념했음 좋겠다.

때리고 싶은 놈들이 있는 건 나도 십분 인정하지만,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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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 로망

온라인상에다가 플텍도 없이 띄우는 모든것들은 딴 사람들도 다 와서 보라고 던져놓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중립적인 모습이고 싶은 심정이 왜 없을까.
맨날 날 세워서 '이건 이래서 안돼', '이건 저래서 싫어' 하고 있는 사람을 보다보면, 아무리 기본적 지향이 맞는 사람일지라도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생명은 소중히 여겨야 돼- 정도의, 절대다수 인간이 다 공감할만한 모럴리티 외엔 가치중립적(이라고 방문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인 곳도 있다.
스노우캣홈이 거기에 비교적 가까울 것이다
탈정치적 분위기이기에, 그런 곳들은 언제 가든 별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을 뿐더러 컨텐츠 제공자에게서도 다정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곳으로 홈페이지든 블로그든 트위터든 내 계정을 꾸리고 싶다는 로망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지만)보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므로. 더구나 내가 쓰는 소리들이래봤자, 제대로 벼려진 통찰력에 의거한 잘된 글쓰기도 아니고 그저 불평불만 수준에 그치는 것들인데.

 

근데 안된다.. 내겐 어떤 편향들이 있고, 그 편향들이 참아낼 수 없는 사안들이 현실속에 끊임없이 존재하며, 그걸 말로 토로하는 것까지도 내 지향은 '옳음'으로 포괄하고 있어서. 한 마디로, 불평불만의 토로를 참아낼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 그저 나란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세련되고 올곧은 종류의 사람들을 부러워해 봤자 따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이러니까... 떠드는 건 떠들되, 행동이 말을 제발 근접하게라도 따라갔으면 하는 게 현재로선 소망이다.
그렇게 되면 조금은 덜 부끄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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