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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충

 

차별금지법안 발의가 무산될 위기.
기독교계의 지랄 때문.
 
적은 조직적이다. 그리고 파렴치하다. 그리고 오리발을 내민다.
 
'종교'라는 것 때문에, '관용의 범위에 들어가야 하는, 엄연한 문화의 한 영역'이라는 원칙을 저버려선 안된다는 것때문에 언제까지 신사적으로 대해줘야 하나?
-란 생각을 첨엔 했다.
그래, 니들 말야 니들. 다름아닌 바로 니들, 니들이 나쁜놈이라고 바로 니들이.
그렇게 곧바로 지적을 할 수 있는 반대전선이 필요한 거 아닌가.
'언론'이라는 허울 때문에 봐주지 않고 대놓고 '악'으로 지목하는 안티조선운동이 있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안티조선운동에 생각이 닿자, 역시 원칙을 허무는 게 과연 좋은 방법인가 하는 의구심을 논리적으로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원칙은 일단 내깔겨 두더라도. 전략적으로는 괜찮은 방법인가? 
'아니야, 기독교가 다 그렇진 않아'라고 떠드는 것들에게 그럼 니들이 들고 일어나서 증명을 하든가 씹새끼들아-라고 외쳐주고 싶던 게 한두번이던가.
 
그런 '분통 터짐'을 해소한다는 것 말고, 전략적으로 정말 괜찮을 방법인가?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 '링컨'에서.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그 장면.
 
급진파 의원이, 일단 '입법을 위해', 원래 자신의 소신대로 말하지 않고 눈가리고 아웅을 한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흑인이 법적 지위를 얻게 되면 지들이 정말로 백인이랑 똑같다고 하면서 막 참정권도 달라고 그러겠네? 그담은 뭔데? 여자도 막 투표권 달라고 하겠어? 말세다!' ←이랬으므로, 대중정서를 확 건드릴 말을 피해 우회한다. 덕분에 그 법이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는 분위기가 말로나마 조성됐으므로 망설이던 의원들이 찬성하는 데에 힘을 받는다. 하지만 가결과는 별도로, 지켜보던 다른 급진파 동료의원은 배신감과 분노에 몸을 떤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지켜보는 우리는, 그런 절차로라도 입법을 우선 시켜버리는 게 결국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초석이 되었다고 받아들여 준다.
 
언젠가 나도 다이어리에 썼다. 100%를 원하면 혁명은 할 수가 없다고.
 
어차피 곧이곧대로 원칙을 고수하지 못할 바엔, 적을 보이게 만들어 공격하는 것과 눈가리고 아웅을 해서라도 계단 하날 만드는 것, 어느편이 더 효율적일까?
 
 
모르겠다.
 
 
 
그리고,
 
 
이 나란 안 망할 수 있을까? (아니 뭐, 언젠간 어떤 나라든 반드시 망하기야 하겠지만 상상 가능한 근미래에 말이지.) 누군가의 칼럼에서 읽고 아 그렇겠구나 했던 것처럼 '전 지구 단위의 도시 집중화'에 따라 능력 되고 정신 제대로 박힌 인간들은 차츰 다 '살만한 세계적 중심가'로 떠버리고, 그 외 잡것들이 못 떠나고 남은 곳은 변두리 시골마을 쇠락하듯 '세계의 슬럼가'가 될 것이며 한국도 그짝 날 거라는.
그 예상은 뒤엎어질 수 있을까?
 
이 나라가 과연 회생 가능성이 있을까..라고 회의하게 되는 건 지금이 '내리막의 시대'라서일까? 세월이 더 더 많이 지나다 보면 오르막의 시대가 여기에도 볕을 주게 되는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미국도 부시 시대 8년을 겪고 나서 오바마 시대도 열기도 하고 그러긴 했다. 세계적 우경화 추세에도 불구.
물론 많은 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최소한 한국의 평균 스태터스보다는 백배 낫다. 그거 부정하긴 그다지 쉽지 않다.
 
..어떤 일이 벌어지나 더 봐야 하련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인류의 등신같음'류의 생각이 드는 건 참, 막기 힘들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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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형

 

온라인 상에서 성희롱 또는 성폭력 얘기가 거듭되면서 느끼는 건데, 피임 문제, 혹은 플러팅이냐 성희롱이냐..라는 시시비비, 또는 왈가왈부. 대부분, 성적 자기 결정권을 사수해야지 이년들아 피해의식에만 쩌들어갖구 징징대지 마-로 흐르는 얘기들.
섹스 면으로는 도덕적 결벽증이 팽배한 사회인 것도 맞고, 나도 그 점은 짜증나 미칠 지경이고, 궁극적으론 남녀 공히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고 발랄무쌍한 성생활을 자유로이 탐닉할 수 있어야 된다는 지향점 역시 동의.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어떤 사안이든 일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
 
이런식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트위터 논쟁 구심점(?)이 되곤 하는 J님이나 M님으로 대변되는 그런 남자들은 '두려움'을 몰라서 그런다..는 생각이 든다.
 
공격받을 수 있다, 불리해질 수 있다, 질 수 있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위험해질 수 있다-가 단지 산술적 가능성에 불과한 게 아니라 현상적 사실인 삶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거다.
조건 자체가 불리하니 자유시장경쟁 체제 안에 내던져질 수 없다는 얘기와 때때로 닯아 있음을,
걔네들은 이해하질 못한다.
파업을하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어쨌거나 위법이잖아'라며 문자주의적으로 법리적 유권해석을 들이대는 거나 같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원칙적으로 옳은말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됨'이라는 테제가, 혹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권리를 주장한다'라는 테제가 잘 적용되려면- 그렇게 해도 약자, 소수자, 乙들이 발려버리지 않도록 조건이 마련돼야 할 게 아니냐고. 그런 조건은 다 무시하고 '내 말이 틀리냐?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잖아. 아 답답한 것들'이라고 하신들, 듣는 약자 입장에서 복장이 터져요, 안터져요?
 
피해망상에 쩌들었다..? 아아, 그들은 그 '감각'에 대해 전혀 모른다. 일상의 공포감이라는 그 감각을.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문제의 예.
커다란 방 안 가득 임의의 여자들을 모아놓고, 남자사람에게 물어봐라. 이 중에 1:1로 붙을 경우 완력으로 붙었을 때 니가 KO패 당할 거 같은 사람이 있냐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코웃음을 치지 않을까.
거기에서, 여자는 정확히 반대라는 거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방 가득 모인 임의의 남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완력으로 완벽히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은, 길 가는 저 사람들 중 어느 남자라도 맘 먹고 자신을 죽이려 들면 죽을 가능성이, 강간하려고 덤비면 강간당할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은 세상에서 산다. 남자인 당신이 '저 놈 정도면 그래도 제압할 수 있지, 저 놈은 좀 힘들겠는걸, 뭐 어느 쪽이든 싸우면 상해는 있을 수 밖에 없겠지'라 잴 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대다수의 남자는 길 가며 시야에 보이는 어떤 여자로부터도 '쟤한테 내가 맞아 죽을 수 있거나 존엄성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지 않는다.
단순하게 물리력 하나만 놓고 봐도 이런 거다.. 이런 감각을, 이런 감각을 완전히 체화하고 사는 삶을, 이런 감각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으로든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을 남자들은 이해나 하겠냐고.
이런 직접적 물리력 외에도, 사회경제역사도덕 각 분야별로 같은 맥락의 세상에서 여자들은 아직 산다. 많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져야 된다고 많이들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말이다.
 
니들이 브래지어에다 가슴 꽁기꽁기 쟁여넣고, 달마다 피바다 수습하고 날짜 계산하고, 분명 내몸에 달려있는데 남들이 사사건건 지들이 감놔라 대추놔라 관리하려 드는 보지달고 다니는 삶의 위태로움을 알긴 아냐고..
거듭 '아직은', 여자는 내 성을 오롯이 내가 관리하고 내가 권리를 주장하려고 들면 싼년 쌍년 씨발년 쌍시옷 쓰리콤보 시선속에 대놓고 전시되는 세상을 산다.
 
어휴
 
일단은 여기까지.
 
 
...모든 개인에게 투사가 되는 게 마땅하다고 요구할 순 없는거다. 같이 싸우자-라고 하는 거면 또 모르겠으나, 제3자들은 참 쉽게도 '싸워.'라고 내뱉는다.
온라인 상에서 성희롱 또는 성폭력 얘기가 거듭되면서 느끼는 건데, 피임 문제, 혹은 플러팅이냐 성희롱이냐..라는 시시비비, 또는 왈가왈부. 그 중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사수해야지 이년들아 피해의식에만 쩌들어갖구 징징대지 마-로 흐르는 얘기들에 대해.
 
섹스 면으로는 과도한 결벽증이 팽배한 사회인 것도 맞고, 나도 그 점은 짜증나 미칠 지경이고, 궁극적으론 남녀노소etc 공히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고 발랄무쌍한 성생활을 자유로이 탐닉할 수 있어야 된다는 지향점 역시 1000%동의. 되도않는 성적 엄숙주의에 경도되어 있어서 쓸데없이 입에 거품무는 인간들이 작금의 2고씨 사태에서도 깨알같이 많았으며 본질을 되려 흐리는 캐잡음으로 작용한 거 분명함.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어떤 사안이든 일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
 
이런식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뭔가 트위터 논쟁 구심점(?)이 되곤 하는 그런 고정캐같은 몇몇 남자분들은, '두려움'을 몰라서 그런다..는 생각이 든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좀 해라 바보같은 년들아, 주체성 찾아먹어야지 언제까지 피해자 코스에서 안주할꺼냐"라는 얘기들. 게다가 이런 얘기들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남자들이 아니라, 진보적 입장을 표방해온 남자들의 입에서 나온다. 거기다 대고 "아니 그거 쉽게 되는 거 아니거등"하려면 막 등신같아 보이게 되는 지경에도 빠져야 한다. 뭘 몰라서, 경색된 섹슈얼리티 바깥으로 못 나와서 그런다는 프레임이므로.
피해망상에 쩌들었다고..? 아아, 그들은 그 '감각'에 대해 전혀 모른다. 일상의 공포감이라는 그 감각을.
공격받을 수 있다, 불리해질 수 있다, 질 수 있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위험해질 수 있다-가 단지 산술적 가능성에 불과한 게 아니라 현상적 사실인 삶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거다.
 
조건 자체가 불리하니 자유시장경쟁 체제 안에 내던져질 수 없다는 얘기와 때때로 닮아 있음을, 그들은 이해하질 못한다.
파업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어쨌거나 위법이잖아'라며 문자주의적 유권해석을 들이대는 거나 같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원칙적으로 옳은말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됨'이라는 테제가, 혹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권리를 주장한다'라는 테제가 잘 적용되려면- 그렇게 해도 약자, 소수자, 乙들이 처참히 발려버리지 않도록 조건이 마련돼야 할 게 아니냐고. 그런 조건은 다 무시하고 '내 말이 틀리냐?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잖아. 아 답답한 것들'이라고 하신들, 듣는 약자 입장에서 복장이 터져요, 안터져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한 문제의 경우.
커다란 방 안 가득 임의의 여자들을 모아놓고, 남자사람에게 물어봐라. 이 중에 1:1로 붙을 경우 완력으로 니가 KO패 당할 거 같은 사람이 있냐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코웃음을 치지 않을까.
거기에서, 여자는 정확히 반대라는 거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방 가득 모인 임의의 남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완력으로 완벽히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은, 길 가는 저 사람들 중 어느 남자라도 맘 먹고 자신을 죽이려 들면 죽을 가능성이, 강간하려고 덤비면 강간당할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은 세상에서 산다. 남자인 당신이 '저 놈 정도면 그래도 제압할 수 있지, 저 놈은 좀 힘들겠는걸, 뭐 어느 쪽이든 싸우면 상해는 있을 수 밖에 없겠지'라 머릿속으로 재볼 수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대다수의 남자는 길 가며 시야에 보이는 어떤 여자로부터도 '쟤한테 내가 맞아 죽을 수 있거나 존엄성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지 않는다.
단순하게 물리력 하나만 놓고 봐도 이런 거다.. 이런 감각을, 이런 감각을 완전히 체화하고 사는 삶을, 이런 감각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으로든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을 남자들은 이해나 하겠냐고.
 
이런 직접적 물리력 외에도, 사회경제역사도덕 각 분야별로 같은 맥락의 세상에서 여자들은 아직 산다. 많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져야 된다고 많이들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말이다.
 
여자들에게 위험은 특정 사건만이 아니다, 늘 사는 일상에 내재된 어떤 것이지.
슬로뉴스 기사에 붙은 댓글 중에 그런 얘기가 있었다: 오가며 계속 마주치는 덩치 큰 조폭이 계속 널 툭,툭 건들고 지나가고, 주변 사람들은 전혀 그걸 '별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건들여질 때마다 항의하고 신고하고 할 수 있겠냐고. 신고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여자들의 현실이 이렇다는 거다. 어쩌다 한 번 맞닥뜨린 조폭한테 왕창 얻어터지는 게 아니라, 오며가며 계속, 늘상 툭, 툭 잽을 맞는 거라는 비유.
..뭐 이 비유도, 댓글란에서 논쟁이 오가고 있었던 상대방 남자분께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니들이 브래지어에다 가슴 꽁기꽁기 쟁여넣고, 달마다 피바다 수습하고 날짜 계산하고, 분명 내몸에 달려있는데 남들이 사사건건 지들이 감놔라 대추놔라 관리하려 드는 보지달고 다니는 삶의 피로를 알긴 아냐고..
거듭 '아직은', 여자는 내 성을 오롯이 내가 관리하고 내가 권리를 주장하려고 들면 싼년 쌍년 씨발년 쌍시옷 쓰리콤보 시선속에 대놓고 전시되는 세상을 산다. 나도 제발이지 그게 구태 못벗은 피해망상에 불과하면 참 좋겠는데, 증거는 날마다 우리 앞에 펼쳐진다고.
 
어휴
 
일단은 여기까지.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 투사가 되는 게 마땅하다고 요구할 순 없는거다. 같이 싸우자-라고 하는 거면 또 모르겠으나, 제3자들은 참 쉽게도 '싸워.'라고 내뱉는다.
 
여전히 우리에겐 계몽도, 조직적 운동도 필요하단 얘기이기도 하겠다.
시대가 그런 것들을 촌스러워하니 애티튜드와 메이크업은 달리해야겠지만, 총론 면에선 여전히 그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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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리얼리즘

 

일러스트레이터 정준호씨 작화집을 보다 읽은 얘기(를 기억에 의존해 내멋대로 옮김):
"해부학을 통한 인체 뎃생 능력은 중요함.
본인도 공부 멀리하고 있으면 무뎌져서 얼마만에 한번씩 막 다시 파서 그려보며 복습함.
'진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른 채 (특히나 일본 만화의)관습적으로 안착된 '기호'로만 표현하는 것에 멈추면 스스로 발전을 멈추는 거고 표현도 얕아짐."
 
내 보기엔 이 사람 자신도 무시무시한 해부학적 지식을 체화화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부족하다 하네..라고, 경각심에 조용히 고개 숙이는 기분이 들었던.
 
근데 엊그젠가, 웹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동인작가.
프로작가로 예를 들면 박설아님에다가 톰톰님을 좀 가미하면 딱 나올 거 같은 그림체를 지님.
즉, 2000년대 중반 이후 많이 배출된, 일본 쪽 만화 트렌드를 비교적 직접적으로 + 동시적으로 접했으며, 동인 생활을 거치는 10~20대 여성향 만화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딱 그 그림체.
특히, '딱 그 그림체'를 쓰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입모양이네-라고 보면서 생각. 기본적으론 기쁘면서도 뭔가 겸연쩍거거나 난감할 때 나타나는 '찌글찌글 입' 말이다. 평상시일 때에도 살짝 벌린 상태임에도 치아가 가는 선으로 같이 들어가는 특유의 모양이 있고.
 
그런 익숙한 몇몇 특성들을 보면서.. 문득 우라사와 나오키님의 '인간이 초조할 때 정말 땀방울이 흘러내리나?'얘기가 포괄하는 지점이 같이 생각났고, 잠시 재고해봤지만 역시 저런 찌글찌글한 입모양은 실제 인체에선 나타날 수 없네, 역시 이것도 장르적 관습에 의한 표현이구나 생각하다가.
아, 내가 좋아하는 A작가의 늘 안타까운 '2% 부족한 점'의 적어도 일부는 어쩌면 그 때문인 것일지도..!란 생각에 도달했다.
 
A작가는 야오이로 출발했고 지금은 이른바 레이디스 코믹스 계열 작업을 많이 하는 일본 작가다. 야오이판에서든 순정판에서든 특유의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하는 작업을 한다. 평균적이지 않다고 스스로 고민하는 유형의 내면을 지닌 캐릭터를 많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쫓아가기 마련인 장르판의 일정 분위기에서 슬쩍 빗겨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뤘다. 
 
그러나 소위 뎃생 실력이 탄탄한 작가는 아니다. 연출이나 표정의 많은 부분을 위에서 얘기한 '관습적 표현'에 의존하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 중 하나고.
근데, 지향하고 있는 스토리나, 연출에서 독자들이 느끼기 바라는 어떤 분위기들은 불행히도 꽤 디테일하고 리얼한 현실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습적 표현들로도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들 수 있는, '장르'적 규칙 하에 전개되는 다른 일정 작품들과는 좀 다른 지향점이다.
 
관습에 의해 얻어진 기호적 표정들은, 좀 비약하자면 그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나를 표시해주는 표지판일 뿐이다. 표지판에 그려진 세모 네모로 이루어진 인간은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나, 비상구로 탈출하고 있나만 명확히 잘 표시해주면 된다. 게다가 장르적 규칙을 따르는 세계란 온 세상이 그렇게 상징적 픽토그램으로 꽉 찬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어떤 특정인의 인생과 기분까진 안 나타나도 상관이 없다. 그런 개별적 리얼리티가 나타나지 않아도 전혀 튀지 않는다, 온 세상이 다 픽토그램이니까.
장르는 그 안에서 자신의 규칙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독자와 여행을 한다. 장르 독자들은 그렇게 관습적으로 기호가 정착될 정도로 쌓인 장르의 역사 전체와 함께 여행하는 셈이다. 물론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세계이다.
 
헌데, 문제는 개별적 리얼리즘을 획득해야 할 작품의 작가가 관습적 기호로 표현할 때인 것이다.
인간 관계의 부조리, 인생의 부조리, 장르 관습이 커버하는 종류가 아닌 가슴 짓누르는 아픔, 혹은 반대로 장르 관습과 동떨어진 한적한 일상, 이런 것들은 기호적 일반성이 아닌 특정 캐릭터 누구누구라는 '존재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모네모로만 이루어진 인간이 아닌, 아이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 특정 아줌마의 인생과 기분이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왜냐, 안그러면 독서할 때 턱턱 걸리기 때문이다.
 
온세상이 픽토그램일 때엔 그 일부인 어떤 연출, 어떤 표정이 기호적이어도 그게 '기호'라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요소가 서로 밸런스가 잡혀 흘러가고 있으므로 보는 우리의 뇌가 알아서 그걸 대하드라마로, 액션 어드벤쳐물로, 순정 로맨스로 읽어주기 때문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환타지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면서는 우리가 물리법칙을 계산하고 앉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그 세계 안에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 있기만 하면 우리 뇌 속의 레코드 바늘은 '튀지' 않고 잘 돌아가며 훌륭히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리얼리즘의 세계 중간중간에 픽토그램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봐라.
기호가 기호임이, 쉽게, 보인다. 바늘이 튄다. 바늘이 튀면 재생이 원활하지 못해지고, 결국 음악에 몰입할 수가 없어진다.
 
우리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별 혼란 없이 극장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것에서 보듯, 컨텐츠가 시작되고 초반 얼마간만 보면 수용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컨텐츠가 어떤 세계인지를 알아채고 거기에 채널을 맞춘다. 나무 작대기 끝에서 빛이 막 뿜어져 나와도 '마법 따윈 실존하지 않잖아'란 생각 때문에 2시간의 모험을 즐기지 못하진 않는단 얘기다.
그렇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만일 리얼리즘적 드라마 한가운데에서 좀비가 튀어나온다면 얼마나 튀겠나.
..뭐 사실 요샌 그런 종류의 컨텐츠도 따로 일가를 이룰 만큼 많긴 하다만. 여튼 주안점은 그런 장르적 이질감이 연출 의도가 아닌 경우라면 수용자를 컨텐츠로부터 확 이격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얘기지.
 
그런 식으로 기호가 기호임이 드러나는 경우 안타까운 중요한 점은, 작가가 ㉠을 의도하고 만든 장면이 ㉠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을. 의.도.하.고. 만.든.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의 그림을 보면서 '아.. 엄마를 그리려고 한 거구나'라거나 ' 이 장면은 소풍가서 재미있었단 걸 그리려고 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A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늘 느끼는 게 바로 그거였다. '이러이러한 분위기를 의도한 거였겠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ㅠㅠ그 분위기를 그냥 느끼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잡는 방식이나 캐릭터 운용, 주제의식 모두 좋아하는 작가인데 늘, 늘 보다보면 굉장히 안타깝게 뭔가가 부족하고 미진하고 그랬는데, 어쩌면 그 원인이 관습적 표현에 일부 빚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 거였다.
 
더불어 떠오르는 게 B작가였다.
터부를 건드리는 소재 선택, 가차없이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작품 세계.
하지만 캐릭터 그림체는 전형적 학원 명랑 로맨스물에 나올 거 같은 '커다란 눈에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다.
천사같은 얼굴의 애들에게 악마같은 짓을 시키기 위해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B작가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그렇게 생긴거다. 말 그대로 그림체가 그냥, 그런거다.
언젠가 에디터 일 하는 친구와 얘기하면서도 나는 '그림체와 스토리가 안어울린다'라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캐릭터의 표정 등에서 보이는 관습적 표현 쪽이 보다 더 원인인 거 아니었을까.
B작가 그림체의 기본 스트럭쳐가 리얼과는 거리가 있는 팬시 타입이긴 해도,  거기서도 굳이 다른 길을 가려면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장르적 그림체와 거기에 따른 표현양식'으로 입문한 뒤, 계속 그냥 '해오던 대로 '한 것이다. 발전도 오직 그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물론 이건 작가를 탓할 사안이라기엔 어렵다. 프로로서 제대로 일하려면 스타일을 확정해서 판 안에 자리잡는 게 대개의 경우 정석일 정도로 유리하다. 더군다나 자신의 방식이 먹히고 있다면,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건 효율 면에서 분명 현명한 짓은 아니다. 닥치는 일을 처리하기에만도 에너지가 모자라기 십상일 것이고.
 
두 작가 다.. 스토리빨과 그림빨이 바늘 튀는 불균형점을 갖고 있지만 남들과 다른 그 리얼리즘적인, 혹은 드라마틱한 스토리빨이 작가의 업계 독보성을 담보해주는 경우다. 음, B작가의 경우는 그림체 자체는 떼어놓고 보면 시장에서 먹히는 타입이므로 나와 같은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다. (나와 얘기를 나눴던 에디터 친구를 포함해서.)
어쨌건 밸런스 문제는 중요하다는 거..
작가가 밸런스를 잘 통제할 수만 있다면 '살인자ㅇ난감'의 경우처럼 2등신 개그체 캐릭터로 연쇄살인범 얘길 하고 있어도 독자들은 몰입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A작가는, 머릿속에선 만큼 표현하고 싶지만 딱 그렇게 그려낼 만큼의 능력은 살짜쿵 모자라서 '인갑다'까지밖엔 못하는 거 같다.. 이건 불균형이지. 진심 안타까운 일이다, 팬인 내 입장에서도..ㅠㅠ
 
하튼 그런 면에서.. 정준호씨가 얘기한 해부학적 기초란, 단지 통칭 '잘그린다'는 막연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현하고 싶은 걸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실질적으로 유용한 무기겠구나-라는 게 결론이겠다. 기호가 파생되어 나오기 이전의 '원재료'를 손에 넣는 것일테니. 장르적 컨벤션 바깥의 뭔가를 하고 싶은 작가라면 더더욱이나 염두에 둬야 좋을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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