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터널

분류없음 2014/11/04 05:12

1994년 10월 21일. 그날은 금요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해의 여느 화요일, 목요일 밤에 늘 그랬듯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 당시 월, 수, 금 저녁마다 중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터라 학생회, 동아리, 학회의 월수금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화요일, 목요일은 나에게 해방의 날이었다. 

 

아침에 물을 사러 교문 밖으로 나갔다. 구멍가게에 들러 물을 사고 급히 갈증을 해소할 생각에 텔레토비 쭈쭈바를 샀다. 값을 치르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텔레비젼을 보며 혀를 끌끌 차셨다. 어쩌나, 애들이 생짜로 죽어버렸으니, 저거 죄다 죽었을거야. 

 

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 

 

성수대교 다리가 분질러져서 버스며 승용차며 죄다 아래로 빠져부렀어.  

 

 

구멍가게 차양 아래에서 텔레토비 쭈쭈바를 입에 물고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다리가 무너지고 상판 위에 있던 차량들과 그 차에 탄 사람들이 강물에 빠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매일 한강철교를 건너 학교를 오가면서도 한강 북단과 남단을 잇는 그 구조물이 무너진다는 건 --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학생회실에서 남아 쭈쭈바를 기다리는 선배들과 동기들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차양 아래에서 계속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급히 달려 학생회실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 비극의 정체를 깨달았다. 동기들 가운데 무학여고를 졸업한 친구들이 있었다. 성수대교를 조석으로 건너던 친구들이 있었다. 눈물바다로 변해버린 학생회실. 내 손에 들린 텔레토비 쭈쭈바 비닐봉투. 

 

그 바로 전 해에는 부안 앞바다에서 훼리 호가 침몰했고, 이듬해에는 삼품백화점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숱하게 많은 대형인명사고가 줄을 이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서민들이었다. 나의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 동기, 선후배, 이웃. 평범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천년대 초반에는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 뒤 얼마간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사무실의 한 동료는 한동안 나를 '김예민'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올해 세월 호가 침몰했다. 배에 있던 어린 친구들은 대부분 --- 운명을 달리했다.  

 

냉정하게 말해 어느 한 해 안전했던 적이 없었다.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연도는 한국 현대사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올해 유독 깊고 심각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지난 1994년 이래,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뒤 -- 엄청나게 큰 대형 다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지하철에 불이 나 승객이 모두 질식사할 수 있다는 것, 대형 훼리가 바다 한복판에서 그대로 가라앉을 수 있다는 것, 백화점과 같은 대형건물이 백주대낮에 주저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각각의 사건을 통해 몇백 명 단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른이 된 뒤 올해 유독 깊고 깊은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절망 이상의 감정이다. 무력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는. 그냥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나보다, 라는 무력감.

 

* 이 감정을 치료해야  바로 다음 코스인 노예로 가는 길을 차단할 수 있을텐데.   

* 나이가 들어 깨달을 것을 깨달을 때가 되어 -- 그러니까 때가 되어 그럴 수도 있고,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살면서 갖는 거리감 (상대화; 객관화) 때문일 수도 있고. 

 

 

2014/11/04 05:12 2014/11/04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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