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의일치

분류없음 2015/03/25 02:06

제목: 지행의 일치, 라고 정했는데 콘텐츠에 비해 제목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다. 글을 더 잘 써야 한다.  

 

 

 

수요일 오버나이트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주말 뒤 월요일 화요일 상간에) 경찰이 데려온 클라이언트 하나가 더 늘었다. 우리 아가 괜찮니 my baby, are you okay 라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뒤를 돌아보니 스카프로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 아마도 히잡인 모양 - 인종이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 응 나는 괜찮아, 너 이름이 뭐니. 언제 왔어. 이름은 E이고 오늘 (그러니까 수요일) 왔단다. 짧은 영어 대화만으로는 억양을 짐작하기 힘들어 백그라운드도 알 수 없지만 복장으로 대략 젠더 이외의 간략한 것은 헤아릴 수 있다. 나를 대하는 자세가 아무래도 엄마 내지 케어기버 같다. 아이고 No, thanks. 이날 밤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목요일 오버나이트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만 하루 사이) 이 양반이 경고를 받았다. 케이스메니징 노트를 읽어보니 손으로 음식을 만지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 손으로 다른 클라이언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스탭에게 허그 (hug)를 하자고 했단다. 이브닝 근무자들에 따르면 바운더리 이슈 (boundary issues)가 있는 것 같다고.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이고 No, thanks. 이날 밤은 이 양반이 돌아오지 않아 또 역시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토요일 이브닝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만 이틀 사이) 우리 프로그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너의 마음은 고맙지만 하지 말라고, 음식을 다루는 일은 네 일이 아니라고 해도 매일 낮에 오는 쿡 (요리사) 에게 잔소리를 하고 이래라저래라 한 모양이다. 쿡이 마련한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서 다른 이들의 접시에 담아주고 또 역시 낮에 근무하는 스탭들에게 허그를 하자고 한 모양이다. 데이 근무자들은 "E는 코리언을 좋아한대. 그러니까 너는 큰 걱정 안해도 돼"라며 웃는다. 뭔소리야. 했더니 브라운과 흑인들에겐 야멸차게 굴고 백인과 코리언에게만 허그를 하자고 한단다. 희한한 케이스다. 인종차별을 차이니스 (로 인식되는 동아시안)에게는 하지 않고 흑인과 브라운에게만 하다니. 아이고 No, thanks. 그런데 그날 밤 늦게까지 이 양반이 돌아오지 않았다.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항상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일한 근무자들에게서 대략의 보고를 듣고 근무 준비를 한다. 그 보고시간은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공식적인 전달과 클라이언트들의 특이사항, 근무 시간 중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이 때 나누기 때문이다. 세 번의 시프트 동안 우리 프로그램의 유명인사, 셀럽이 되신 E의 행동이 보고시간 대화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그 가운데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한 분이 "그건 E의 문화야. 문화 차이야"라며 E가 보이는 부적절한 행동을 설명한다. 한 건물에서 같이 머무는 모든 이를 케어하려 하고 자신이 동지라고 믿는 사람과 신체적 접촉 (가령 허그를 한다든가) 을 하면서 친밀감을 표현하려는 E의 행동은 E가 나고자란 문화와 성장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과 나를 포함한 나머지 스탭의 이후 판단은 달랐다. 그래, 그게 문화의 차이라고 해두자, 그래서 뭐?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은 E의 행동에 조금 더 관대하거나 이해를 하자는 쪽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스탭은 E의 행동은 "부적절하다"는 쪽이다. 따라서 E가 경고를 받은 것은 당연하며 이후 행동도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쪽이다. 혼자 주구장창 주장하기 곤란했던 그 스탭은 의견을 철회했다. 아니, 철회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았다. 

 

 

사람의 행동거지가 이상하다거나 (odd; bizzare; creepy) 부적절하다는 (inappropriate) 것은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가령 태곳적 아담과 이브처럼 중요부위만 가리는 복장이 허용되는 사회가 있고 그것을 적당하지 않은 것으로 고려하는 사회가 있기 마련이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고온다습한 곳과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인 다른 한 곳, 이 두 곳을 생각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겠다. 

같은 사회라고 해도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다르다. 가령 박정희 시대만 해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은 형법상 제재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빤히 쳐다보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 내지 아웃데이트한 (outdated) 사람 취급을 받는다. 

 

 

부족사회-가족사회 개념이 강한 곳에서 나고자란 E에게는 한 지붕 아래 함께 거주하는 이들과 음식을 나누고 신체적 접촉을 통해 연대감을 드높이는 일이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피아 (彼我)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E가 머무르는 곳이자 나의 일터는 부족이나 가족이라는 개념보다는 shared community 이라는 개념이 더 강하다. 부족 내지 가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E에게, 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에게 이 차이를 설득하기란 무망할는지도 모른다. 불혹을 넘긴 다 자란 어른에게, 굳을대로 굳어버린 하나의 강고한 세계에 접속하는 일이란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하는 일이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서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일 E를 다시 만난다. 다시 또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리 아가 괜찮니 my baby, are you okay 라고 하는 일이 없기를, 허그하자고 하는 일이 없기를, 모두의 음식을 맨손으로 만지며 나눠주는 일이 없기를. 

 

 

 

2015/03/25 02:06 2015/03/2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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