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선의기억

분류없음 2017/01/14 03:06

문득 컬리지 일학년 때 실습을 준비하면서 겪었던 일을 정리하고 싶은 욕구 (?) 가 발동했다. 대학마다, 프로그램 (학과) 마다 커리큘럼이 다르지만 꽃개가 공부했던 학교의 학과에서는 1학년 2학기, 2학년 1학기 때 두 번 실습을 한다. 두 번 실습을 모두 패스해야만 컬리지디플로마를 딸 수 있다. 1학년 1학기에서는 실습을 어떻게 준비할 지 그 이론을 배운다. 말이 좋아 실습이지 사실 인턴/ 무임노동이다. 학생들은 농담삼아 "노예노동" 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선 아마도 "열정페이" 정도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인턴으로 실습을 하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실습을 마친 뒤 그 회사에서 고용 오퍼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이미 얼굴을 익힌, 능력을 검증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낫다.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이미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유러피안, 북미 비즈니스 문화에서는 리퍼런스와 평판을 중요한 요소로 따진다. 학벌이나 지역연고 등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일류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혹은 어느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은 토익 점수가 높다는 이유로 취직하는 경우는 없다. 만약 부모님이나 친척이 회사의 중역이거나 고위층에 있다면 입문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역시 프로베이션 (수습) 기간을 거치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그 능력이라는 것 또한 업무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인간성, 사회성, 적응능력 등을 따진다. 피어 퍼포먼스 어프레이쟐 (동료 업무 평가) 이라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이것을 공식적으로 차용하기도 하고 비공식적으로 쓰기도 한다. 비공식적이라는 것 또한 별반 특별하진 않다. 그런데 이 비공식적인 게 상당히 중요하다. 커피를 마시면서, 농담을 하거나 스몰토크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그것이 바로 비공식적인 업무평가다. 이제 갓 입사한 사람에게 어떤 업무능력의 입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 물론 경력직일 경우 업무능력 입증이 필요하기는 하다. 경력직이나 메니지먼트 레벨의 포지션은 경우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민 문화가 발달하면서 실습/인턴 직에 있던 이들이 자연스레 고용기회를 확보하는 빈도도 현격히 낮아졌다. 이제 그런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특히나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학생들을 인턴/ 실습으로 받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부려먹고 내치는 경우가 흔하다. 일은 실컷 했는데 고용의 기회는 매니저의 친척, 친구, 대학졸업장을 서너 개 보유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열정페이의 산실은 사실 아시아 문화권인 것 같기도 하다. 비효율적이고 정당하지 못하다. 이 나라에 있는 아시아 문화권 회사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만날 그런 방식으로 하다보니 답보를 면치 못한다. 그러고는 사람 탓을 한다. "괜찮은 사람이 없어..." 사람을 괜찮게 키워내지 못하는 자기 능력을 탓해야 하는데 남탓을 한다. 김성근이 따로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기존의 비즈니스 문화에 널리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쁜 것은 빨리 퍼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will drive good money out of circulation)"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나 또한 실습할 회사를 찾아야했다. 몇 군데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렸다. 공짜로 일하겠다는데도 불러주는 곳이 없다. 사회서비스 영역 어느 곳에서 실습을 해도 상관없는데 그 기회를 만드는 게 상당히 어렵다. 캐나다 사회에 아무 연고가 없으니 더 어렵다. 그러다가 합법 정치조직에서 실습을 하면 어떨까 싶어서 캐나다공산당에 연락을 했다. 한참만에 담당자를 만났다. 무슨 반합/비합 조직 접선처럼 어느 어느 곳으로 몇 시까지 나와라, 해서 갔더니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다. 외관이 후줄근하고 피곤해보이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안 씻었는지 냄새가 난다. 옛날에 나도 저랬겠구나 싶었다. 왜 우리한테 연락을 했느냐 하길래 사실대로 말했다. 너네 교수 이름이 뭐야, 알려줬더니 면전에서 구글링을 한다.

 

 

 

우리 당엔 청년조직이 있어. 거기서 일하는 게 어때.

난 서른도 훨씬 넘었어. 괜찮겠어?

(난감해 한다)

나를 실습생으로 받아줘.

(딴 소리를 한다)

그런데 너네 페미니즘에도 관심이 있니?

당연하지!

그래서 너네 당은 뭘하고 있는데?

임금에서 성차별적인 차이에 대해 투쟁하고 있어.

(꽃개는 이 부분에서 약간 좌절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오그래. 훌륭하다. 

새로운 청년당원을 위한 패키지를 가져왔어. 읽어봐.

(나는 실습할 자리가 필요하다고. 나를 쓰란 말야.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고) 오그래. 정말 고마워.

읽어보고 관심이 있으면 연락해. 그리고 실습은 우리도 검토를 해보고 연락할께.

 

 

 

그이들과 대화를 하는 내내 -- 그들은 꽃개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디 근본도 없는 아시안이 연락해서 자기네 당에서 공짜로 일하겠다고 관심있다고 말은 하는데 쁘락치인지 아닌지 똥과 된장 아니 버터와 치즈는 구별할 줄 아는지 상당히 의아해하는 눈치다.

 

 

패키지를 받아 집에 도착한 뒤 하나하나 살펴봤다. 갱지로 만든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컨텐츠가 영 아니올시다이다. 우선 너무 뒤떨어진 데다가 하나같이 선동조의 조악한 표현이 과하다. 친절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구닥다리 영어와 여러 개의 문장이 하나로 통합된 전형적인 "못쓰는 영어" , 헤밍웨이가 읽었으면 벽난로에 집어던졌을 법한 그런 영어다. 읽을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한 페미니즘 파트는 그래도 끝까지 읽어봤다. 그냥 뭐랄까. 남녀 임금차이가 이러저러하다. 정도지 그래서 뭘하겠다는 건지 그게 없다. 비어 있다. 말은 장황하다.

 

 

아 씨발 괜히 연락했다. 그러고 며칠 뒤 이메일이 왔다. 토론토대학 강의실을 빌려 영화상영을 하는데 오란다. 가봤는데 역시 후즐근하고 몹시 심각한 데다가 거기다 더해 냄새까지 나는 청년들이 잔뜩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듯한 청년들의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안그래도 사는 게 고단한데 그들의 표정을 보자니 같이 있고싶은 생각이 절로 달아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계속 이메일을 보냈다. 이번엔 그람시 토론, 다음 번엔 클라라 제트킨 토론, 다음 번엔 트로츠키 토론... 그런데 너네 캐나다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에 관해선 언제 토론할 거야? 응, 곧 할거야. 곧 한다고는 했는데 그 "곧" 이 꽃개에게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꽃개는 접선 과정에서, 그리고 평판 체크를 당하면서 더 높은 수위로 접선하는 것을 차단당한 모양이다. 아이 씨발. 캐나다 공산당 내부에 친구나 친척 하나만 있었더라도... 계속 토론회에만 오란다. 그러면서 나의 출석률과 성실함 따위를 업데이트하고 싶은 모양으로 보이는데 그런 일은 한국에 있을 적에 아이에스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고 나 또한 그런 일을 해봤기 때문에 그냥 바로 시큰둥해졌다. 캐나다 정부에 등록한 합법정당이 이 지경이다. 오히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내걸지 않은 여타 풀뿌리운동조직, 등록하지 않은 운동조직들이 훠얼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에 가깝게 활동한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게 됐다.

 

 

어쨌든 꽃개는 나중에 좋은 회사에 실습 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실습 뒤 고용오퍼도 받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때 만약 운이 나빠서 캐나다 공산당에서 실습을 했다면 지금쯤 꽃개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2017/01/14 03:06 2017/01/14 03:06
tags :
Trackback 0 : Comment 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ys1917/trackback/1237

Write a comment

◀ PREV : [1] :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 [382]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