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개의고민

분류없음 2017/02/18 02:32

작년 10월부터 일을 시작한 직장에는 대단히 독특한 문화가 있다. 특정 인종/ 국가 (흑인/ 자메이카 등의 캐리비안 국가들) 출신들이 한 디파트먼트를 장악하고 있다. 정해진 원칙대로 잘하면 좋은데 말이 그렇지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만약 한국에서 영남출신 남성들이 한 회사의 디파트먼트를 장악하고 그 출신 지역 사람들만 뽑으려고 한다면? 그러기도 쉽지 않지만 그러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그런데 과연 그 디파트먼트가 잘 돌아갈까? 글쎄, 회식자리에선 잘 돌아갈 것 같기는 하다. 이것은 영남출신 남성들에게 혹은 자메이카 출신 흑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결코 아니다. 살다보면, 일하다보면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렇다. 동물들을 시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 같다. 외부의 적절한 개입과 긴장이 없으면 그냥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바로 그 현실에서 비롯한다. 매뉴얼, 원칙, 규칙이 필요한 이유다. 노동조합에 힘이라도 있으면 외부적으로 강제하겠는데 노동조합조차 유명무실할 경우엔? 솔직히 답이 없다.

 

 

문제는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듣보잡 차이니스인 꽃개가 이 시스템에 들어가면서 비롯됐다. 꽃개의 매니저도 꽃개가 입사하기 직전 헤드헌터 픽업으로 회사에 입사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의 대빵 (ED) 과 각별한 사이이긴 하나 이 문제적인 디파트먼트의 디렉터를 상관으로 모셔야 한다. 디파트먼트의 디렉터인 이 양반은 역시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이다. 현장에서 이십년 넘게 잔뼈가 굵은 현장형/ 마이크로 메니지먼트형 디렉터다.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지시하려고 한다. 심지어 CCTV를 통해 집에서도 어디에서도 일터를 들여다보고 자기가 보고 있다는 늬앙스를 현장 프로트라인 워커들에게 공공연히 암시한다. 꽃개의 매니저 또한 현장에서 잔뼈가 단단히 굵은 사람이지만 전형적인 "캐나디언" 이다. 업무 시간 외에 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아예 불이 나거나 사람이 죽을 경우에만 연락하라는 유머러스한 지침까지 내렸다. 현장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

 

 

꽃개가 입사하자 차이니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 흑인그룹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들이 교묘하게 장치 (?) 한 테스트를 몇 차례 치렀다. 그런데 그 테스트라는 게 죄다 직업윤리에 어긋하거나 원칙과 무관한 문제적인 일들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콕 집어 문제제기를 했고 매니저에게 보고했고 매니저에게서 다시는 그런 일을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만약 이 때 매니저가 꽃개를 백업하지 않고 발을 뺐다면, 나는 모르는 일이야, 라고 했다면? 꽃개는 일을 때려쳤거나 아니면 쥐죽은 듯이 일을 하면서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일이 발생한 게 11월이었고 11월 한 달 동안 살이 5킬로는 더 빠진 것 같다. 일을 같이 의논하던 또 다른 신입사원 M 은 직장을 관뒀다. M 이 떠난 뒤 막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서 싸웠고 다행히 시프트 파트너인 J 가 곁에서 도왔다. J 는 노동조합 서기이고 나름대로 괜찮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는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J를 돕고 싶지만 의지만큼 실력이 출중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어제 J 에게서 단체협약 (Collective Agreement) 협의회 (Committee) 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일 년 정도 지난 뒤면 모를까. 우리 디파트먼트에 있는 평직원들 (자메이카 사람들. 이들은 모두 조합원이다) 이 차이니스를 안 좋아하고 신뢰하지 않아. 더구나 나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잖아. 시간이 필요해. 너는 차이니스가 아니잖아. ...... 자메이칸들이 왜 차이니스를 안 좋아하는지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캐리비안 지역으로 이주한 차이니스와 인디안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 들이 어떻게 현지에서 부를 축적했고 어떻게 현지 사람들을 착취했는지 장황한 이야기, 우리 디파트먼트의 파워다이나믹에 대해서 그리고 현장 비정규직들이 어떤 식으로 같은 지역 출신 디렉터에게 농락당하고 있는지 등등 그간의 관찰을 섞어 이야기를 전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순전히 나의 실력의 문제다. 영어실력, 정치력, 설득력 등등. 그런데 나는 아직 그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일당백으로 맞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니 아직 그들을 잘 모르겠다. 정보가 너무나 제한적이다.

 

 

얼마 전에 읽은 고용인들이 임금인상보다 선호하는 열가지 (10 Things Employees Want More Than a Raise) 라는 기사를 계속 곱씹고 있다. 다행히 꽃개를 직접 감독하는 매니저는 상당히 괜찮은 양반이다. 이 양반 때문에, 그리고 J 때문에 직장에 계속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지난 화요일에 주말에 일하는 회사, 그러니까 2011년부터 일했던 회사에서 근무평가 (Performance Appraisal) 미팅을 했다. 매니저와 미팅을 하면서 이 곳에서 이브닝 시프트 풀타임 포지션을 구하는 게 나의 다음 목표 (goal) 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넌 이미 풀타임을 구했잖아. 개인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그리고 두 직장의 장점을 이야기한 뒤 개인적인 선호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자리에서 단점을 얘기하면 절대 안된다. 아무래도 이게 한국 비즈니스 문화와 북미 비즈니스 문화의 차이점인 것 같다. 무조건 포지티브하게 이야기해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좋은 점수를 딴다) "꽃개를 풀타임으로 쓰면 나도 윈이고 너도 윈이야. 서로 윈윈해야하지 않겠니" 한국어로는 절대 하지 못할,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전했다. 다음에 포지션이 열리면 꽃개에게 가장 먼저 오퍼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그게 언제일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전달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주중에 일하는 직장이 과연 변화가 가능한 곳인지 그것을 천천히 따져봐야겠다. 아무리 엿같아도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그래도 좋지 않을까 그런 위로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과연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정말 나을까. 지금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던 - 할 필요도 없었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2017/02/18 02:32 2017/02/18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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