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잃다

분류없음 2013/06/24 11:54
중학생 때인가, 어느 해부터 손목 시계 욕심이 생겨 어린 중학생이 대여섯 개나 되는 시계를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끼던 것은 작은 나침반이 달린 시계. 그 시계만 있으면 어딜 가도 길을 잃을 것 같지 않았는데 아, 그만 글쎄 그 시계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그 겨울날, 생사를 오가던 그 겨울날 밤에 잃어버린 것 같다. 죽다 살아났으니 그 다음부터 사는 것도 시큰둥하고 시계 욕심도 그럭저럭 잦아들어 하나둘 누군가에게 주고 잃어버리고 서랍 속에 방치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뒤로 나침반 달린 시계를 찾았는데 그리 썩 마음에 드는 시계를 구하지 못해 이것저것 사다가 잃어버리다가 또 사다가 잃어버리다가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황학동에선가 아주 작은 나침반을 구했고 그 나침반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수첩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어느덧 모바일을 시계처럼 쓰는 시절이 왔다. / 이제는 모바일에 나침반 어플리케이션을 장착할 수 있는 시대라 딱히 별도로 나침반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지금 사는 곳은 동서남북 구별이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지하철도 동서 방향을 구별해야 하고 지하철 역에서 내려 출구를 찾아도 동서사이드를 알아야 제대로 스트릿카로 갈아탈 수 있다. 거리 이름에도 동, 서가 따로 붙어 미리 확인하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 /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면, 방향을 잃으면 해를 보고 그림자를 보고 시계를 보고 동, 서를 구별한다. 그래서 딱히 또 나침반 어플리케이션을 열어볼 일도 없었는데 비가 죽죽 내리는 해없는 날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어디가 동쪽인가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열에 여덟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중 몇은 찾아갈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기도. / 길을 잃으면 나침반이나 해와 그림자를 이용하거나 사람에게 물어 잃은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물을 사람도, 나침반도 없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 이 외로운 인생에서는 스스로 길을 찾아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길 위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The night of Super Moon, Buffalo Moon.
2013/06/24 11:54 2013/06/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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