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10/03/24 05:35

2010/03/24

장례식에 다녀왔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가 다니는 시간임에도 너무 졸렵고 다리가 풀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2010년에 접어들며 2번째 장례식이었다.

 

중학교 때, 내 동기였었던 친구가 있었고 1년 후배였던 친구가 있었는데, 둘 다 약간의 자폐증상이 있다.

한 명은 심하다면 심한데, 결국 학교를 나갔다. 그리고 1년 후배가 들어왔고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졸업까지 했다.

돌아가신 분은 1년 후배의 어머니인데, 2년 전 쯤에 위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고, 1년 전엔 위암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4개월 전쯤, 위에서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23일 오전에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왔다.

 

대구에 가서 절을 하는데, 사진을 올려다 보질 못하겠다. 향을 붙이는 손은 담배때문인지, 사람에 대한 추억때문인지 덜덜 떨렸고 식사를 하고 소주를 먹는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 후배 어머니는 떠올려 보자면,

성실하고, 착하셨다. 일반학교에 적응하기 힘든 아들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끔은 안스러울 정도의 표정을 짓고 고통스러울 만큼의 애정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1년 후배에게 유감이다, 괜찮냐, 고생한다 등의 헛소리를 하다가 요즘 뭐하냐라고 물어보는데,

건담시리즈를 보면서 지낸다고 한다. 이 아이는 날 쳐다보지 못하고 초점이 없다.

 

사실 1기라는 맨 위에 있으면서 동생이나 친구들을 챙기다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정심일까? 그 아이에게 엄청난 책임감이 생겼다.

어머니의 남편, 우리는 *부라고 불렀는데 그 분도 살이 쪽 빠져서 거의 반쪽이되고 조문객들과 이야기하며 가끔 터지는 울음을 볼 때마다 후배가 보고 있다는 건담시리즈가 떠오른다.

 

사실 걱정되는 건, 그 후배의 미래가 아니라 당장 직면한 현실에서 그 아이가 정신줄 놓지 않고 어떻게 잘 보듬고, 안고 갈 수 있을까가 걱정이다. 나름 강한 아이라면 주위에서 잘 케어하고 터치해 준다면 좋겠지만,

난 무슨 돌아가신 어머니 영정앞에 있는 그 아이한테 뭐 역할일까?

 

아무튼, 사람이 죽고 또 죽고 또 죽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장 그렇게 되면 모든 복잡하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쏟아져나와 무지 심한 회의, 상실감에 빠질 것 같다.

물론 따라오는 것은 어제와 한달전, 1년전, 10년전의 기억과 사진속에 있는 내가 모를 저 사람의 추억을 추측하는 것, 나와 있던 저 사람이 없고 이젠 땅 속에서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 것,

 

아직 장례식장에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자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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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 05:35 2010/03/2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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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0/02/02 17:13

2010/02/02

이야기를 할 때에는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얼마 전 신도림에서 술을 먹다가 알았다. 닭발이 맛있긴 맛있었는데 맵기도 하고, 아무튼 이야기를 꺼내면 정리안된 이야기, 된 이야기가 와르르 쏟아져 나와 이야기를 다 하고 나면 나도 정신이 없고 상대방은 아마, 더 정신이 없겠지?

 

나도 이제 4년차에 접어들었다. 20살부터 조급하게 활동을 한 것 같은데 어째 지금이 더 조급한 것 같다.

이 단체, 저 단체 기웃거린 것도 아니었고 무조건 하나 찍어서 들어간 나는 아마도 너무 준비없이 활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요즘에 든다.

운동, 이 무브먼트는 일정량의 공감대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의 그물이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반00투쟁을 전개하는 곳, 투쟁의 능력과 전술전략, 공감대와 인간관계는 대부분 육체적, 정신적 경험으로 부터 나온 다는 것, 그래서 대체로 나, 혹은 내 또래들이 운동을 하면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청소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좀 했던 학생운동도 안하고 그냥 고삐리에서 벗어나 바로 활동을 시작했기에 내 또래를 만나고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쳐다보자. 저 사람은 00학번에 00대학 00000출신에 예전에는 00에서 00활동을 했다던지, 혹은 저 사람은 학번은 00인데 학교는 모르겠고 아마 00000소속일꺼야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인가! 정말?

저 사람들이 저런 활동을 하고 저 출신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꽤 중요한 것 같아. 적어도 내가 활동하고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정정도의 사람들도 말 못할 그런 암묵적인 힘(?).

소속감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00학번에 00대학에 00정파의 00단체(혹은 노조)활동가는 예전부터 쭈욱 있어온 전통과 역사의 운동권일 것이고 아마 소속감도 꽤 있을 것이다. 근데, 나는 별로 그런게 없다.

그냥 어디 단체 소속 활동가 정도? 하지만 안을 보면 다들 학생운동으로 묶여있으니 공감할 수 이야기도 한정적이고 말하는 것도 한정이 되어 있고 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마다 약간 서글프다.

 

만약 기술을 배워서 현장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노조를 알게되고 가입하고 투쟁을 하다가 인정받아 실력있는 노조간부가 되었다면 나는 서글퍼하고 있을까?

 

경험은 대부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만 때론 유라고 생각한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을 창조할 수도 있다.

 

*수정

 

내가 경험을, 학생운동을, 정파를, 소속을, 그 이외 모든 것들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가끔은 이런 풍토가 괴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쓴 것.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차이가 차별되는 세상! 활동하면서 이런 생각 들 때면 내가 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와 계급투쟁,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노동자민중의 대상도 분간이 안가는데 저런 세심하고 어려운 의미를 내포한 단어를 우째 알겄는가?!!!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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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2 17:13 2010/02/0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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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0/01/15 15:00

1월21일 서울남부지역 '저달이차기전에'상영회

 

남부운동본부(준) 개최

 

시간이 되신다면 많이들 오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답니다.

비록 티켓가격이 있지만 담배두갑 안사면 되는 가격! 맥주 3캔 안사면 되는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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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5 15:00 2010/01/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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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0/01/10 22:11

2010/01/10

2009년 말 당시, 나는 화가 많이 났었고 지금은 괜찮다. 아니 그냥 고된 일정을 마치면 약간 예민해.

2010년 계획을 세우고 2009년 평가서를 쓰면서 느낀 건 내가 언제 이렇게 관성적인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것, 한글2007 화면 가득히 몇 십년 전부터 선배들이 써놓았던 글귀와 말투, 단어들이 나열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참신해야하는 사람인데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기를 마시며 일을 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때론 과거가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그 때 배웠던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고, 때론 그 곳을 부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31일과1일의 경계처럼 활동하는 것에서도 경계란 존재하는 거구나.

 

그래서 오늘은 그냥 용산참사에 대해 써야겠다.

 

1. 1월20일, 전날 술먹고 혜화동에 뻗어있다가 일어났다. 문자,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잤는데 문자엔 속보, 긴급 이란 단어가 한 가득, 정신없이 광화문에서 사회권 담당자를 만나고 용산으로 달려갔다.

 

2. 인태순동지, 연대회의에서 몇 번 보았던 인태순 동지가 추워서 인지 눈물인지 얼굴이 벌개져서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지르고 있었고 정종권선배는 쌍욕을 하며 길을 열으라고 하고 있었다. 철도회의실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 범대위구성을 결의하고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건물 넘어 들려오는 싸이렌 소리,

 

3. 망루에서는 그 때까지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탄내.

 

4. 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 망루에 타버렸다는 것도, 빈활에서 보았던 그 아저씨 시신이 위에 있다는 것도, 다만 실감이 나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진짜 격하게 진행되겠다라는 생각.

 

5. 순천향병원 생활이 시작되고 3명의 수배자들이 생겼다. 전철연동지들을 비롯한 상황실장님, 등등의 사람들이 긴급체포되고 소환되고 구속되는 나날들, 나는 그 속에서, 그 곳에서 성명서, 신문을 만들었고 그 외에 것들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불만만 늘어놓았지.

 

6. 사실 파견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역할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내가 한달만 더 있었더라면 끈질기게 할 수 있었을 텐데,

 

7. 그런 아쉬운 상황들이 지속되었다. 병원 앞 육회집에서 조직위원장과 이야기하면서 내 거취라던가, 앞으로 용산 활동, 사랑*활동이나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끈질기게 잡아야 할 무언가가 생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8. 병원생활이 지속되고 서로 지쳐가던 찰나에 전철연 국장이 술 한잔하자고 했다. 내가 30대 였다면, 나이가 좀 더 먹었더라면 아마 얼씨구나 하고 받았을 것 같은데 연배가 많으신 그 분과 술 한잔하려는 것이 부담스러워 냉큼 내뺐다. 그리고 그 사람은 곧 감옥에 갔지. 망루에 올라간 시간이 평균적으로 짧았지만 그 시간동안 그 황소같은, 노동으로 일궈진 손을 가진 그 이들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 아픈 가슴의 느낌을 가지고 용산투쟁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려는 준비는 하지 못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9. 내가 기억도 잘 안나는 몇 개월간의 긴 투쟁에서 도대체 내가 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회의가 들고 래군이형, 종회선배 얼굴보기도 쪽팔렸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서 한번씩 안아주고 술도 마시고 그랬는데 아무튼 가슴에 채워지지 않는 것들은 많았다.

 

10.  그건 아마 자책일 것이다. 자책,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

 

앞으로 용산에 대해, 개발에 대해, 3인에 대해, 유족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날 것 같다.

가슴에 잘 고이고이 모시고 필요할 때 잘 펴서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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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0 22:11 2010/01/1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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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0/01/06 15:09

2010/01/06

새해, 매번 같은 12월31일이 돌아오고 1월1일이 돌아온다.

매년 다른 분위기 다른 생각을 하며 새해를 품었는데 2010년은 잤다.

블로그에 글하나 써보려고 하다가 지우고 그만두고 했던적이 수십번되는 것 같은데

요즘에는 그냥 쓰고싶긴하나 일부러 잘 안하는 것 같다.

 

글쎄, 욕심나는 일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욕심났던 일들은 몇 개 떨어져 나갔다.

홀가분하지 않다. 그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그건 그냥 5분~10분 안에 정리하고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상처주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내가 잘해준 사람들은 쉽게 잊을 수 있고,

앞으로 더 많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게 갈팡질팡하겠지만 '틈'이 생기면 쓩 하고 빠져나가야겠다.

 

사계절 내내 겨울이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면서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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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6 15:09 2010/01/0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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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08/08/24 20:38

위험한 가계 - 기형도

위험한 가계 - 기형도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대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미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 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엔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 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 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엇을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 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시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들어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런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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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4 20:38 2008/08/2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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