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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오늘(9.23) 장개석, 국공합작 및 중국공산당 합법화 선언

1937년 9월 23일 장개석이 2차 국공합작과 공산당 합법화를 선언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을 겨우 마치고 연안에서 허덕이고 있던 중국공산당으로선 항일전선에 복무하고 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이 왜 갑자기 국공합작을 선언했을까? 중국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에 감복해서? 아니면 항일의 대의 앞에 뭉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어서? 둘다 아니고 실은 장학량이라는 인물이 일으킨 서안사변 때문이다. 삼년전에 101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영면한 장학량은 봉천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다. 흔히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쓰는데 장학량이야 말로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한꺼번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동북지역을 장악한 군벌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동북지역과 수십만의 대군을 한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색잡기와 아편으로 소일하던 장학량은 아버지가 죽고 나선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본 육참본부 대본영의 공작으로 만주철도에서 아버지가 폭사하자 장하량은 일본과 가까웠던 아버지와 달리 항일의지에 불타게 된다. 그래서 자기 휘하 병력과 영토를 그대로 국민당에 헌납하고 국민당군 동북 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했다. 그런데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일본하고 싸우는데는 별 관심없고 현상유지 하는 수준에 그치며 십여년동안 공산당 때려잡는 일에만 열중하는게 아닌가? 열받은 장학량은 장개석을 서안으로 불러 잔치를 벌이다가 그냥 감금해버렸다. 공산당의 합법화와 국공합작을 안 받아 들이면 장개석도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을 것이며 받아들이면 그대로 풀어서 총통직과 총사령관직을 계속 맡도로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였다. 장개석도 그나마 대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것이 서안을 빠져나온 후에도 자기 말을 뒤짚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홍군(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팔로군으로 재편된다. 팔로군 팔로군 말은 많이 들어봤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국민당군 팔로군이다.( 전에 정률성 이야기를 하면서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5 팔로군 행진곡을 한 번 언급한적이 있다. 다시 찾아가보던지 아니면 기억해보라. )


하여튼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인민은 항일전선에서 일치되어 싸우게 된다. 참 서안사변이 잠잠해진 후 장개석은 장학량을 재판에 회부하고 49년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데려갔다.(죽이거나 육체적 폭력을 가한적이 없이 장학량을 데리고 갔다. 대만 데리고 가선 40년동안 가택연금을 시켰고...왜 그랬을까? 두고 두고 괴롭힐 심산이었을까?) 1990년대에 들면서 고령임을 감안해 대만 정부는 장학량이 자기 맘대로 살 수 있게 했고 장학량은 하와이로 이주해서 십년간 살다 죽었다.


혁명동지를 제외하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중국공산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학량이 죽었을 때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장선생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으며 중국 공산당과 인민을 대표해 삼가 애도한다. 장 선생은 65년전 애국의 심정으로 서안사변을 일으켜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중국을 구했다.” 대만 총통 첸수이벤 조차도 “공과를 떠나 장선생은 중화민국(대만)의 자산이었다” 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1949년 내전에서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패배해 광활한 대륙을 뒤로한 채 배 타고 대만으로 도망칠 때 장학량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전해지지는 않지만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린건 아닐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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