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차도로 첫발을 내려디디는 의미

* 이 글은 레니님의 [열 전도체]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사실 '거리의 주말' 이라는 미다시 뽑아 놓고 혼자 뿌듯해 하고 있다가 아무도 좋단 말 안하기에 삐져 있었는데--;; 레니님이  칭찬해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거리의 주말 이틀간, 정확히 말하면 금요일 부터 진짜로 거리에서 살았다.  아침 나절에 정부종합청사에서 오랜만에 꽃구경도 하고 노란 은행잎 이쁘게 깔린 국회 앞 농성천막촌을 돌아서 토요일 농민대회, 민중대회, 노동자대회전야제 일요일 노동자대회 금속연맹 사전결의대회, 노동자대회 본대회까지..

 

그 기간에 기사 공장도 차려놓고 라인 쉴틈 없이 돌렸다. 11개 뽑았나 12개 뽑았나...로스가 한 두개 나서 불량 처리했고 로스가 별로 안 크다 싶은 제품들은 그냥 다 출하했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고 '비정규 개악안 박살내자'  너무 많이 들어서 감흥도 별로 없다--;;  매너리즘이라 부르겠지 이런걸.

 

그나마 전야제날 이수호 위원장이 한총련 의장 같은 폼으로 "죽창이, 화살이 되어 자본가와 정권, 그 신자유주의의 심장에 꽂히자" 고 말할 땐 가오다시가 좀 났지만 그런 것에 감동먹기엔...

 

노동자 대회 본대회날 광화문엔 6만 정도 모였다. 경찰추산은 4만이고...물론 삼십분 정도 지나서 부턴 대오의 무대 집중도가 확 떨어졌다. 없는 사람들 품앗이 하는 셈인지 주위 노점상들은 신났고 여기 저기에서 술잔이 돌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십년전 노동자 대회에 처음 갔을 때는 삼십대 중반의 남성노동자들이 주 구성원이었다. 십년이 지난 지금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확 늘었고, 중년 여성 조합원들도 많고 어찌보면 되게 다양해졌다. 학삐리하고 남성 노동자로 대별되는 그 때에 비해선...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여튼 삼일 동안 빨빨 거리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짜증, 피곤, 가끔 신남, 심드렁 등등의 감정이 지배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꽃은 피는 법. 반짝이는 한 순간을 포착했다. 감사하게도....

 

복잡한 전술을 통해 공무원 노조 조합원들이 삼삼 오오 광화문으로 파고 들어와 작지만 소중한 수백의 대오를 형성하고 행렬 복판에 자리잡았다. 그 상기된 얼굴들, 어색하지만 힘찬 팔뚝질.

가방에서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새 깃발을 꺼내 깃대에 묶는 두 조합원들을 봤다.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여러 선배들이 보면 웃겠지만 나도 옛날 생각이 났다.

 

광화문, 종각에서 보도가 아닌 차도에 내려선다는 것의 의미는 내게 남달랐었다. 떳다비 할 때 긴장감 도 짜릿했지만 대규모 집회도 마찬가지지. 보도에서 거리로 한 발 내려 디딘다는 것은 내가 수동적 국민, 시민이 아니라 . 국외자가 아니라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주체로, 저항의 주인공으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난 아직도 생각한다.

 

보도와 차도의 높이 차이는 삼십센티미터 남짓하지만 그 한 발을 내려서긴 그리 쉽지 않을게다. 내가 처음으로 차도에 내려서던 날의 그 긴장, 짜릿함, 두려움  앞 뒤를 가득 메꾸고 있는 낯선 동지들에 대해 느끼는  든든함 그 복합적 무엇을 깃발 묶는 두 사람에게서 엿봤다.  그리고 그 무엇이 내게 다시 힘을 줬고..

 

공무원 노조 파업이 실질적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투표날 부터 예견되고 있던 사태인지도 모른다. 취재 다니며 만난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은 낯섬, 두려움, 위축감에 휩싸여 있었다. 대화 해보면 법과 규정에는 빠삭했지만 어떻게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는 부족해보였다.

 

그리고  구속, 해고, 징계 안 봐도 뻔한 비디오가 길게 상영될게다. 하지만 공무원 조합원들은 이제 차도로 첫발을 내려딛었다. 그리고 전야제를 하며 옆 조합원들과 어깨 맞대고 체온을 나눴다. 그거면 된거다. 시작이 반이라는 진부한 속담의 생명력은 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