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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차 비정규문제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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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패악질

 

현대차 노조 측, 불법파견 교섭권자 배분 놓고 갈등

31명, 7명, 5명... 전환대상도 의견 엇갈려

 

 

현대차 불법파견 특별교섭 재개를 위해 금속노조와 비정규직3지회(울산, 아산, 전주)의 만남이 거듭되고 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교섭 막바지 잠정합의(의견접근)안을 이끌 노조 측 결정권자의 숫자를 놓고 기존 31명, 7명, 5명으로 왔다갔다하고 있다.

기존 특별교섭 노조 측 교섭단은 총 31명으로 그 중 6명만이 비정규직지회 쪽 교섭위원이다. 현대차지부(정규직노조) 간부들이 절대 다수였다.

금속노조와 3지회는 지난 11일 임원 간담회와 14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3지회 연석회의에 이어 19일에도 금속노조와 3지회 확대간부들의 간담회를 열었다. 19일 간담회는 오후 1시 서울 정동의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상철 위원장과 3지회 지회장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금속노조와 3지회는 ‘교섭 방식은 3지회 입장을 최대한 반영한다. 최종 의견일치를 위해 7명(금속노조 1명, 정규직지부 3명, 비정규직지회 3명)이 논의해 결정한다(표결 포함)’는 내용을 정하고 이 내용을 정규직 지부 교섭단과 협의키로 했다.

비정규직의 목소리는 상당히 커지지만 금속노조 1명이 정규직지부와 같은 의견을 내면 비정규직과 상반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울산) 대의원대회가 21일 7시 북구비정규직센터 회의실에서 열렸다. [출처: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금속노조와 3지회 임원들은 교섭 방식을 보완해야 한다며 21일 다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3지회는 ‘교섭방식은 3지회 교섭위원 동의 없이 교섭팀 잠정합의(의견접근)를 하지 않는다. 3지회장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 최종 의견일치를 위해 5명(금속노조 위원장, 지부장, 3지회장)이 논의해 결정한다’고 교섭방향을 수정, 보완했다. 이에 금속노조는 '5명이 논의해 결정한다'는 교섭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금속노조와 3지회 간의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금속노조 관계자에 의하면 “지부(정규직노조)는 애초 최종 결정권을 7명이 갖자는 안에도 부정적이었다”고 밝혔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울산)는 21일 저녁 대의원 대회에서 이같이 금속노조, 3지회 간담회 과정을 보고했다. 울산지회는 대의원대회에서 교섭재개 방향을 논의하려고 했으나 회의장 사용시간이 밤 9시로 끝나 대의원대회를 정회하고 22일 오후 속개키로 했다.

박현제 지회장은 “특별교섭 재개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지만 계속 정규직 지부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다면 직접교섭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회는 "지난 17일 공장에 붙은 ‘독자교섭이 아니라 (비정규직노조가) 금속노조와 현자지부 등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자보에 이름을 건 김모 씨가 지난 2개월 동안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며 "100여 장에 이르는 대자보를 누가 어떻게 인쇄하고 부착했는지 배후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또 지회는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총 조합원 1,153명 가운데 이번 신규채용에 응시한 사람은 200명이 안 된다고 밝혔다. 특히 신규채용 응시 조합원 중 상당수는 지난해 8월 파업투쟁에 불참해 금속노조가 징계한 조합원들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오는 24일에는 송전탑 고공농성 100일을 맞아 저녁 7시 100일 기념집회를 열고 26일 오후 4시부터는 민주노총 주최의 전국노동자대회와 희망버스 행사가 열린다.

비정규직 3지회가 당사자인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은 의견일치안(잠정합의안) 도출을 우려하면서 지난달 27일 정규직노조 사무실을 봉쇄해 불법파견 특별교섭이 중단된 이후 전환 대상에 대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입장 차이로 특별교섭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기사제휴=울산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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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년 내부 투쟁 역학관계- 무슬림과군부.

 

무바라크 축출이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2) 이집트 민중의 염원과 무슬림 형제단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게는 아로미라는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무지개 연못의 독재자 메기의 하수인이었던 아로미의 아빠 투투는 메기의 명령에 못 이겨 딸을 갖다 바친다. 그 사실을 안 왕눈이가 아로미를 구해오고, 화가 난 메기는 연못의 모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그러자 왕눈이를 비롯한 연못의 개구리들이 똘똘 뭉쳐 메기를 쫓아내게 되고, 마침내 무지개 연못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만화 속 이야기일 뿐,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메기 대신 가재가 나타나 개구리들을 계속 괴롭힐 수도 있고, 독재자에 맞서 함께 싸웠던 황소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들을 따돌리고 연못의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놓으려 할 수도 있다. 독재자는 쫓겨났지만 언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 그래서 그토록 바라던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까지는 한시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의 나날들. 무바라크 독재정권을 30년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린 지 2년이 다 돼가는 오늘의 이집트가 처한 현실이 딱 그렇다.

[출처: 하스나인 카짐(Hasnain Kazim, http://www.spiegel.de/fotostrecke/fotostrecke-64450-12.html)]

살아있는 한 영원히 대통령일 것만 같던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사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지네 엘 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축출될 때까지만 해도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바로 그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식량가격 폭등으로 인해 튀니지보다도 먼저 대규모 정권퇴진 시위가 터져 나왔던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대기번호 1순위라는 관측이 더 우세했다. 그건 무바라크 정권의 횡포가 덜해서가 아니었다. 무바라크가 30년간 쌓아놓은 독재의 철옹성이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독재국가 치고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을까만, 1981년 10월 6일 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암살되면서 권력을 승계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사법, 언론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완전히 친위체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족민주당(NDP)에서는 둘째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가 사실상 후계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최고의 전력을 갖춘 50만 대군은 군 장성 출신인 무바라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면서 정권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하나둘씩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헐값에 알짜 기업을 넘겨받은 자본가들은 무바라크 일가의 든든한 돈줄이 되었으며, 국영 언론들은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는 순간까지도 시위 상황 대신 평화로운 나일강변의 영상을 화면에 내보낼 정도로 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충실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라도 독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민주주의, 인권 따위를 운운하는 반대파들은 보안기관과 경찰을 시켜 깔끔하게(?) 처리하면 그 뿐이었다. 그나마 2005년 선거에서 불법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소속 후보들이 하원 의석의 20%(88석)를 차지하면서 잠깐 화들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쫓겨나기 불과 석 달 전인) 2010년 11월 총선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로 모두 떨어뜨려 버렸으니 그걸로 끝인 것만 같았다.

결정적으로, 무바라크 정부의 뒤에는 미국 정부가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 의회조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던 1979년부터 해마다 평균 20억 달러의 경제, 군사 원조를 제공해왔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지역의 맹주로서 아랍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 대가였다.

그랬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다. 1월 25일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본격화된 지 불과 17일 만에 30년간 드리워져 있던 독재의 장막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극적인 변화가 연출된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가혹한 인권탄압, 권력층의 부정부패, 12%에 달하는 실업률과 30%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 그로 인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 식량가격 급등, 주택난, 열악한 공공서비스 등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에 불을 당긴 직접적인 도화선은 다들 알다시피 튀니지에서의 극적인 정치변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민중항쟁이 튀니지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과 뒤이은 항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집트의 민심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은 여기저기서 울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뚜렷한 파열음을 낸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마치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그들은 독재정권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온 몸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bazonline.ch]

독재의 성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노동운동은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전투적이고 강력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 1957년에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기 시작하면서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노동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유일한 합법 연맹이었던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은 무바라크 측근들의 자리를 보전해주는 이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하의 24개 산별연맹 가운데 22개 연맹의 위원장이 무바라크 정권이 건네준 낙하산을 타고 온 측근들이었으며, 후세인 메가웨르 총연맹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지도자들은 부지런히 조합비와 뇌물을 주머니에 구겨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노동조합마저 자신들의 목소리와 아픔을 외면할 때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 스스로를 조직해서 직접 싸움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 이집트에서는 파업과 점거농성, 태업 같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4년과 2008년 사이에만 약 1천 9백 여 건의 노동쟁의에 1백 7십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걸 비롯해, 7년간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통틀어 모두 3천여 건의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06년부터 수도 카이로 북쪽 마할라 알-쿠브라 시의 국영 마할라 미스르 방직회사에서 일하던 2만 5천여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은 일체의 파업과 시위를 불법화한 국가비상사태 법 하에서 항상 깨지고 터지기만 하던 전국의 개혁세력들에게 강렬한 희망의 빛이 되었다. 마할라 노동자들은 체포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한 투쟁을 벌인 끝에 정부로부터 15%의 임금인상과 해고시 반드시 노조와 협의한다는, 당시 이집트 현실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따낸 것이다.

이 소식은 민주화와 개혁을 바라던 도시의 중산층 엘리트 청년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자기네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승리를 일궈냈다는 것은, 아무리 두들겨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 같았던 독재정권도 뭉쳐서 싸우면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2008년에 다시 마할라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할 때는 도시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국적인 연대 총파업과 동맹휴업을 제안하는 글들을 부지런히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퍼다 날랐고, 마할라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점점 폭넓고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들어갔다. 그들이 바로 이집트 혁명의 기폭제가 된 1월 25일 시위를 처음 제안하고 주도한 ‘4월6일 청년운동’이었다. 그리고 ‘4월 6일’은 다름 아닌 마할라 노동자들이 3년 전 총파업을 계획한 날이었다.1)


자본가와 서구 정부에게는 어느새 손톱 밑의 가시가 돼버린 무바라크

항쟁을 제안하고 이끌어간 이들이 노동자 투쟁에 영감을 받은 청년운동 세대들이었다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한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겠다”며 끝까지 버티던 무바라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도 노동자들이었다. 무바라크가 물러나기 사흘 전 전국의 운송, 관광, 석유, 의류 노동자들이 일제히 일손을 놓아버렸다. 거기에 호응해 교사, 의사, 변호사, 기술자, 공무원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자본가를 비롯한 이집트의 지배계급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막대한 손실이었다.

이집트 현금 수입의 15%를 차지하며 최대 산업으로 자리 잡은 관광 부문만 보더라도, 평소 같으면 성수기인 1월에 백만 명이 넘게 찾던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 호텔과 여행사 사장들 입장에서는 무바라크가 하루를 더 버틸 때마다 고스란히 3억 1천만 달러(한화로 3천 7백억 원)가 공중에서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물류가 막히니까 수출입도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수시로 인터넷과 전화가 끊겨서 금융도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중동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가는 유조선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수에즈 운하의 노동자 6천 여 명이 벌인 선적 지연과 봉쇄 위협은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정부들까지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플랜B'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통치능력을 상실한 무바라크 대통령을 계속 붙들고 있기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2011년 2월 11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이집트의 한 핵심 금융기업 간부의 인터뷰는 당시 재계와 기득권 세력에 팽배했던 그런 정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반정부 정서가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이런 흐름은 정부뿐만 아니라 체제 전체에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시위대의 요구는 아주 분명하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게 한 가지 경로로 향하고 있어요. (향후) 시나리오가 두세 개 있긴 합니다만,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무바라크가 결국 물러날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재계도 거기에 따라 예상 시나리오를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게재된 바로 그 날, 무바라크는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2)

국민들이 원한 건 ‘무바라크 2.0’이 아니라 ‘혁명 2.0’

여기까지, 2년 전 그 때를 다시 되짚어봄으로써 새삼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딱 하나다.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는 ‘무려 30년에 걸친 철권통치’, ‘사실상의 일당독재’, ‘공권력을 동원한 가혹한 탄압’, ‘무바라크 일가가 빼돌린 120억 달러’ 같이 주로 정치적인 비민주성이나 권력자의 추악한 행태에 보도의 초점을 맞춘 바 있다. 만약 경찰과 친정부 깡패들의 폭력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집트의 국민들이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무바라크 개인을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면, 이미 이집트 혁명은 어느 정도 목표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최근에 재심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무바라크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집권 민족민주당은 강제 해산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도 해제되고, 악명 높던 보안기구 요원들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해외를 떠돌던 망명객들이 돌아오고 정치수감자들이 대거 석방됐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간판과 인테리어만 바꿔단 채 옛날과 똑같이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무바라크 2.0’ 식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물론 이마저도 턱없이 기대에 못 미치지만)와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리고 경제적 정의와 평등을 원했다. 간판에서부터 메뉴까지 모든 게 리모델링된 ‘혁명 2.0’ 식당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혁명의 주역이었던 보통의 시민들과 노동자, 청년들에게 혁명 이전과 이후는 아직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의 한가운데에는 크게 두 개의 세력이 버티고 있다. 바로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이 그들이다.

[출처: http://www.stern.de]

국가 안의 국가, 이집트군

이집트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권력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하면서 또 독특하다. 역사적으로 1952년 파루크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도 나세르를 비롯한 자유 장교단 군인들이었고,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과 무바라크 역시도 모두 군 장성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과거 자신이 소속됐던 군부가 언제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은 군에게 독자적인 권력과 각종 특혜, 이권을 안겨주는 대가로 충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무바라크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부 고위직으로 승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 장교들은 50살이 되면 무조건 퇴역하게 한 다음에 정부와 국회, 공기업, 언론사 등에 자리를 줘서 생계를 보장했다. 무바라크 집권 기간 동안 그렇게 사회 곳곳의 각종 요직을 꿰찬 퇴직 장교의 수만 해도 모두 25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또한 정부는 군대가 독자적으로 기업체를 세워 운영하고 각종 이권사업을 벌이는 것도 흔쾌히 인정해줬다. 오늘날 이집트 군은 평면 텔레비전에서부터 냉장고, 자동차, 파스타 등을 만드는 회사를 최소 35개 이상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주유소와 레스토랑, 축구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알짜배기 부동산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군이 소유한 사업체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대부분 징집으로 군대에 들어온 사병들이다. 당연히 월급은 최저임금을 훨씬 밑돈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수익 구조인 것이다.

군이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과 보유자산이 이집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자그마치 최소 15퍼센트에서 최대 40퍼센트에 이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통계 수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이유는, 아무도 군이 보유한 자산이 얼마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부는 국가에서 배정한 국방예산과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이 모두 얼마이고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의회를 비롯한 외부의 감시를 거의 받지 않아도 되도록 군부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해줬다. 국가 안보상의 기밀이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국가의 일정부분을 뚝 떼서 군인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집트 군은 미국 정부로부터 해마다 약 13억 달러 가량의 군사지원도 직접 받아왔다. 여기엔 현금을 비롯해 각종 최신무기도 포함되어 있고, 미제 M1A1 에이브럼 신형 탱크는 아예 이집트에서 생산을 허락받았다. 게다가 인적 교류(?)도 아주 활발하다. 지난 30년간 미 국방부는 해마다 수백 명의 이집트 군 장교들을 자국에 초청해 연수를 시켜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과거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미국이 ‘아메리카 군사학교(School of Americas)’3)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킨 라틴 아메리카의 장교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쿠데타의 주역이 돼 권력을 찬탈하고 각종 납치와 살해, 고문을 진두지휘했던 역사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즉, 미국 연수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집트 군 장교들은 미 국방부나 정재계 인사들과 독자적인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집트 정부와는 별개로 미국 정부와의 논의 창구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2011년 혁명 당시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군 최고 사령관을 비롯한 최고위급 군 장성들은 군인들과 탱크가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십만 명의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수시로 미국 워싱턴을 드나들었던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과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상으로 미뤄볼 때, 이집트가 무바라크 축출 이후 구체제 질서와 과감히 결별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의 역할을 제한하고 경제의 군사화를 해소하며 군을 둘러싼 비밀의 장막을 걷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무바라크가 쫓겨난 뒤 국정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은 탄타위 국방장관을 의장으로 한 군 최고 수뇌부 모임인 최고군사위원회(SCAF)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갑작스런 정권 퇴진과 내각 총사퇴, 헌법 정지, 의회 해산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세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쟁 기간 동안 ‘시위대를 향해 단 한 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국민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항쟁을 이끌고 참여했던 좌파와 자유주의 청년 세력들은 군이 공백기를 틈타 권력을 가로챌지도 모른다는 경계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다행히 2012년 6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군이 애초 약속대로 민간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그런 최악의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이 탄생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은 앞으로 과연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인다.

[출처: http://www.stern.de]

무슬림 형제단, 이슬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라는 게 문제

2012년 5월과 6월, 1차와 결선투표로 나눠서 치러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후보 가운데 당선권에 근접한 후보로는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정당인 자유정의당(FJP) 소속의 모하메드 무르시 이외에 무소속의 압델 모나임 아불 포토우, 좌파 민족주의 존엄당의 함딘 사바히,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아흐메드 샤피크와 역시 외무장관을 거쳐서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한 암르 무사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아흐메드 샤피크나 암르 무사의 당선은 무려 800명이 넘는 고귀한 목숨을 민주화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의 수였다. 둘 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과 인권탄압의 책임의 한 축을 짊어진 독재정권의 잔당들, 즉 '펠룰(felool)'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층은 대체로 아불 포토우와 함딘 사바히를 지지했다. 아불 포토우는 원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수차례 투옥을 거듭하면서도 정치민주화와 노동자들을 위해 꾸준히 헌신해온 이력으로 인해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고, 함딘 사바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상대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길 원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어쨌든 최종 결과는 1차 투표에서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해 51.73%를 득표한 무르시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다(결선 상대인 샤피크는 48.27%를 얻었다).

이런 결과를 두고 이집트 안팎에서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좌파와 자유주의자, 청년세력들은 애초 항쟁에 소극적이었고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무슬림 형제단이 이제 와서 혁명의 과실을 쏙 빼먹었다고 탄식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랍지역을 통틀어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를 거둔 걸 제외하면) 최초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된 상황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무슬림 형제단의 승리가 정말 예상 밖이라거나 그들이 혁명 과정에서 무임승차한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1928년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 집권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조직으로 낙인 찍혀 엄청난 탄압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시골과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하고 자선병원을 운영해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학교를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부가 대부분 기업가, 의사, 변호사, 학자, 기술자 등 중상층 전문직들이었음에도 선거 때만 되면 시골과 빈민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던 것도 그런 오랜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또한 그들을 급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이집트와 무슬림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화해와 단결을 이뤄야 한다는 게 창시자 하산의 가르침이었으며, 그들은 자살공격 같은 방식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9.11 테러에도 반대했고,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을 씌우려 하지도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은 간통혐의자를 돌로 쳐 죽이고 절도범의 손목을 자르는 탈레반이 아니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정권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진짜로 그들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그들이 무바라크 체제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 민주적인 절차를 어기면서 이집트 혁명에 걸었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http://english.ahram.org.eg 화면 캡처]

민중의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흔히 지난 대선을 가리켜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라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선 투표가 치러지기 이틀 전에 최고군사위원회(SCAF)는 1월에 선출된 의회를 해산시키고 선거의 전 과정을 군이 직접 통제했다. 그 덕분에 무바라크 정권 출신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한 ‘정치적 격리법(Political Isolation Law)’에도 불구하고 아흐메드 샤피크 같은 구체제 인물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두는 역시나 무바라크 시절에 임명된 판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헌법재판소(SCC)의 형식적인 법률 판단을 거쳐서 이뤄졌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은 입으로는 최고군사위원회와 사법부의 결정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군과 사법부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고 받아들였다.

내각 구성도 정확히 같은 맥락이었다. 무르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과거 무바라크 정권의 핵심인물이거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관료 출신들이었다. 최고군사위원회 의장이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총리에 임명된 히샴 칸딜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수자원관개부 고위 관료를 거쳐 아프리카 개발은행에서 일했던 신자유주의자였으며, 내무장관 아흐메다 가말 에딘은 항쟁 당시 시위대 탄압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내무차관이었다. 경제팀 역시도 무역산업부 장관에는 중동 최대의 민간자산회사인 시타델 캐피털(Citadel Capital)의 자회사 고주르 식품산업의 CEO 하템 살레, 투자부 장관에는 무바라크 시절 자유무역 및 투자총국 의장이었던 오사마 살레, 재무장관에는 예전 군부가 임명했던 신자유주의자 뭄타즈 알사이드를 각각 선택했다.

이런 인적 구성은 실제 정책으로도 그대로 반영됐다. 무르시가 집권 이후 맨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8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전기, 수도, 석유 같은 공공서비스와 식료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해 현재 11퍼센트인 재정적자를 다음 회계연도까지 8.5퍼센트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보듯이 그러한 조치는 곧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르시 정권의 절차적 반민주성도 헌법 제정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 세계 모든 혁명 과정에서 보면,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국민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헌법은 사회의 소수자도 아우르는 헌법, 시민적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여성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헌법, 민간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는 헌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국민투표를 밀어붙여 통과시킨 헌법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이슬람법(샤리아)의 원리가 모든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헌법 2조가 그대로 유지됐고, “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라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여전히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했으며, “가족을 향한 여성의 의무”라는 문구가 헌법에 직접 명시되는 한편, 군의 예산과 임무는 주로 군인들로 구성될 국방위원회가 알아서 책임지도록 했다.

노동권은 더욱 경우가 심해서, 공장 소유주와 기업 경영진의 이익은 보호하면서도 노동권은 완전히 외면했고 국회의원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 대표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는 조항도 없애 버렸다. 이런 내용을 담은 헌법 초안이 국민들의 의견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며 100명의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22명이 사퇴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집트 혁명은 못된 독재자 한 명을 쫓아내는 데 그친 ‘혁명 1.0’ 버전을 아직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이대로 끝났다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전체적으로 노동계급과 청년, 좌파 세력의 분위기는 혁명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활기와 전투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분위기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작년 11월 22일 무르시 대통령이 자신이 내린 결정은 어떠한 사법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포고령을 선포했을 당시, 불과 닷새 만에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을 다시 차지하고 결국 포고령을 철회시킨 게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사, 지하철 노동자, 국립병원 의사, 마할라 의류노동자들의 파업과 쟁의가 줄을 잇고 있고, 새롭게 생겨난 독립노조총연맹(EFIU)은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의 오랜 독점체제에 균열을 내며 월 200달러 최저임금제와 경영진의 임금이 최저임금의 10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임금상한제 도입을 위해 계속 투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과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2년 전 우리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날, 그때가 바로 본격적인 ‘혁명 2.0’의 시대가 열리는 첫날이 될 것이다.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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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국회전- 국정조사 기싸움 맛불 장면

 

“약속했던 쌍용차 국정조사 차질없이 진행돼야”

찬반 논란...“국정조사야말로 쌍용차 제대로 사는 길”

 

여야가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개최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가 쌍용차 국정조사 반대운동에 나서자 정치권,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회단체 등이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가 주장하는 쌍용차 국정조사 반대는 여당 및 야당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저급한 정치 공세며, 약속됐던 국정조사는 차질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쌍용차 사측, 기업노조, 평택시민단체협의회, 평택시 국회의원, 경기도 등 노·사·민·정 대표로 구성된 쌍용차 정상화추진위는 지난 17일 발족 이후 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조사 반대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 후 새누리당 이한구, 민주통합당 박기춘 원내대표에게 국정조사 반대 청원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는 “경영 정상화에 매진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국정조사를 반대했다. 김규한 쌍용차노조위원장은 “2009년 구조조정 이후 노사와 전 임직원, 협력사, 판매대리점과 모든 가족들이 뼈를 깎는 고통분담과 헌신적 노력으로 정상화 기반을 다져왔다”면서 “그런데 일부 노동단체와 외부세력이 사회적 이슈를 통해 쌍용차 국정조사 논란을 벌이는 것은 회사 정상화와는 다분히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대주주인 마힌드라 그룹이 투자약속을 지키고자 이사회에서 투자승인을 기다리는 시점인데 이런 논란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서 “국정조사가 이뤄지면 기업 이미지 훼손과 독립경영 및 판매에 악영향을 가져오고 노동조건도 하락한다. 노사와 협력사 등 11만 명의 일자리와 지역경제 안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추진위는 국회가 국정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과 함께 마힌드라 그룹을 방문, 투자를 확실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오자고 제안했다. 또, 쌍용차 사태와 같은 노동자 대량해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가 관련 법안을 개정해 ‘외국자본 먹튀 방지법’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조사 개최가 쌍용차 경영정상화와 거리가 멀다는 추진위의 의견은 그 자체로 논란거리여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야가 국정조사 개최에 합의했고, 박근혜 당선인이 후보시절 국정조사 개최 입장을 전했기 때문이다.

쌍용차범대위, 쌍용차지부와 민주통합당 은수미,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이었던 쌍용차 국정조사를 내팽개치려고 하고 있다”며 “또다시 쌍용차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는 국정조사 방해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쌍용차 문제는 사안의 심각성과 파장의 역동성을 따져봤을 때 개별기업의 문제일 수 없다”며 “국정조사는 추진위가 말하는 ‘기업 이미지 훼손’과 ‘판매 악영향’ ‘노동조건 하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지난 갈등과 반목을 정리해 쌍용차를 진정으로 정상화 궤도에 올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출처 : 쌍용차지부]

심상정 의원은 “국정조사 실시 가능성이 높아지자 사측이 대주주 마힌드라 자금을 포함, 9,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역시 국회의 지속적인 검증을 받아야 책임 있는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며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국정조사 약속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이한구 원내대표는 국정조사 반대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단은 “지난해 청문회에서 일부 드러난 기획부도와 그 배경, 상하이차의 기술유출과 먹튀 논란, 전대미문의 회계조작, 불법 정리해고, 공권력의 살인 진압, 24명의 희생자 대책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라며 “수많은 의혹을 끌어안고 경영을 정상화하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정조사 반대 서명을 하청업체 할당을 통해 강행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이런 행위는 수년간 고통을 받아온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아니며 저급하고 비열한 모리배들이나 감히 상상할 수 있는 행위이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오는 3월 복귀가 예정된 무급휴직자를 대상으로 사측이 임금 청구 소송 포기를 확약서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확약서를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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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당의 농성마무리 - 진심

 정의당, 쌍용차 국조 요구 국회 농성 마무리

심상정, “24일 임시국회 무산, 새누리당 반대가 걸림돌”

 

 

새누리당이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를 반대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24일로 잠정 합의한 1월 임시국회가 결국 열리지 못하자, 진보정의당이 쌍용차 국정조사 국회 농성을 잠정 마무리하고 국정조사를 재차 촉구했다.


정의당 의원단은 이날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장 앞(로텐더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시국회 무산은 전적으로 새누리당과 이한구 원내대표의 책임”이라며 “쌍용차 국정조사가 제외된 임시국회가 열리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냈지만, 국회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하게 만든 새누리당은 국민의 비난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의원단은 “진정한 쌍용차 정상화의 핵심은 정리해고자 159명의 전원 복직”이라며 “쌍용차에 대한 책임 있는 신규투자가 이뤄지고 신기술 개발이 시작될 수 있도록 점검하는 일 역시 여야 정치권 모두가 해야 할 책무”라고 지적했다.

심상정 의원(노동자살리기특위 위원장)은 “새누리당은 임시국회에 쌍용차 국정조사가 걸림돌이 됐다고 발표했는데, 말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며 “여야가 약속했던 국정조사 실시를 새누리당이 반대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반대가 걸림돌이 돼서 오늘 임시국회가 무산됐다”고 반박했다.

심 의원은 “이제는 황우여 당 대표가 책임 있게 나서야한다”며 “황우여 대표가 12월 31일 국민들에게 당을 대표해서 책임 있게 약속한 바가 있다. 황우여 대표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원석 원내수석대표는 “1월 26일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다시 한 번 조직해 울산 현대차와 평택 쌍용차, 그리고 부산 한진중공업에 다시 한 번 찾아간다”며 “진보정의당은 의원단과 당 전체가 희망버스에 동참해 평택 쌍용차 고공농성장을 찾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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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 비정규문제 개괄

 쌍용자동차 1,500명 비정규직 노동자 잔혹사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68)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이야기①

 

  평택역 앞 천막농성장

평택역 앞을 오고가는 시민들과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국정조사의 필요성과 쌍용차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일, 때로는 길이나 교통편을 묻는 시민들에게 안내를 하는 일도 서맹섭 씨가 하고 있는 일이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투쟁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거나 송전탑 농성장에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 시민단체와 지역 민주노총과 소통하고 조직해서 대응하는 것도 그가 하고 있는 일중 하나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86일 굴뚝농성의 주인공이기도 한 서맹섭 씨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비대위원 활동도 하고 있다. 서맹섭 씨는 인터뷰 전에 다음날 아침 선전전 때 사용할 유인물을 복사해갖고 왔다고 했다. 다음날인 21일 오전에는 평택역을 포함한 수도권 주요 전철역에서 쌍용차 사측과 기업노조(위원장 김규한)가 국정조사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하여 이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서맹섭 지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의 쌍용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생계활동을 하고 있는 4명의 조합원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조합원이 있다.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는 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이 1월 20일 현재 62일째 문기주·한상균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송전탑 밑에서는 비정규직지회 한윤수 사무국장이 고공농성 조합원들을 지원하며 투쟁하고 있고, 서울 대한문에는 유제선 조직부장이 분향소를 지키면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지만, 이들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 큰 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면서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어도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당시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된 노동자 숫자가 정규직 2,646명이 아니라 비정규직 350명을 포함한 3천명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왼쪽 문은 정규직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서맹섭 씨는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돕다가 농고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와 배추를 심고, 소를 키우고, 트랙터와 경운기를 몰았다.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후에는 경찰관의 꿈을 키우며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제대 후에 3번 도전했다가 떨어지자 2000년 쌍용자동차에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입사한 곳이 평택 쌍용자동차 하청업체였다. 1년 근무하고, 평택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역시 친구들의 권유로 다시 쌍용차 하청업체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하청업체인 동산기업으로 들어왔다가 2005년에 영일기업으로 옮긴 후에 2009년 5월 해고될 때까지 그곳 소속으로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입사 할 때 쓴 이후 거의 쓴 기억이 없다. 업체가 바뀌어도 근속과 고용은 자동승계 되었다.

차체2팀에 들어간 서맹섭 씨는 CO2 용접이나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 작업), 도아와 휀다(펜더) 조립 등의 일을 했다. 서맹섭 씨는 입사 초기 무소 생산을 잠깐 하다가 근무기간 내내 거의 로디우스 만드는 부서에 있었다. 서씨와 직장이 가장 먼저 그 일을 배웠고, 나중에 온 정규직들에게 서씨가 일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서씨는 10명 내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된 차체2팀 로디우스 3직에서 근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직 안에서 일을 같이 배우고, 로테이션하면서 근무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되어 1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도아 좌우를 나누어서 볼트작업 등을 했다. 왼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이 달기도 했다. 다만, 용접 일은 옷에 구멍이 난다는 이유로 정규직들이 기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비정규직이 했다.

2005년 노동부 ‘사내 하도급 업체 특별 지도점검’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12개 하청업체 중에 동산기업과 영일기업 등 4개 공정 44명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이 났고, 2006년 각각 벌금 백만 원 씩 약식명령 청구가 진행되었다. 당시, 서맹섭 씨가 있던 쌍용차 불법파견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부 조사를 받기도 했었다.

“평택에서 제일 큰 대공장이니까 아무래도 임금이나 복지 면에서 다른 데보다 좋을 거라 생각했었죠. 실질적으로 해보니까 정 반대였어요. 한번 몸 닿으니까 딴 데 가서 일하는 게 만만치가 않아서 그냥 견뎌본 건데. 임금은 적어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했지.”

대통령상 받은 최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을 꿈꾸다

서맹섭 씨는 7년 동안 월차를 두 개밖에 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웃도는 금액이었다. 입사 초기 주야 2교대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아본 임금이 170만원이었다. 상여금 600%를 12개월로 나눈 금액을 포함해서 나온 금액이었는데, 2007년 물량 감소로 주간 작업만 하게 되면서 세금을 떼고 110~120만 원 정도 받았다. 비정규직의 경우 호봉제가 있긴 하지만, 호봉 간 차이가 시급 25원(1일 8시간 200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임금 차이에 영향력이 거의 없다. 5년 다닌 사람이나 10년 다닌 사람이나 임금 차이가 거의 없는 셈이다. 늦게 입사한 사람이 잔업 특근을 많이 하면 오래 다닌 사람보다 임금이 많아지기도 한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2005년에 정규직 노동자들하고 같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비용 절감 사례를 발표하는 대회였는데, 쌍용차 생산과장이 파워포인트를 띄워주고 저랑 직장이 그거 보면서 발표를 했어요.”

서맹섭 씨는 2005년 9월, ‘전국품질분임조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경험도 있다. 상패는 정규직 직장이 받고, 메달은 서맹섭 씨가 받았다. 같이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정규직들은 2호봉 승급에 특근이 달리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회식 한번이 다였다. 하지만, 수상으로 플러스된 고과점수 덕분에 정규직을 뽑으면 일순위로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꿈을 안고 그는 5년 동안 열심히 일만 했다. 2009년 굴뚝농성 재판이 굴뚝에 지붕이 없어 주거침입죄 성립이 안 되면서 2심까지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그게 그 상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서맹섭 씨가 웃는다. 경찰조사 받을 때 상 받은 거 있냐고 묻길래 노무현 대통령상 받았다고 대답했었단다.

5년 동안 천오백 명 비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노조 설립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서맹섭 씨는 정규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5월 해고가 되었다. 서씨는 ‘잘 하면 해고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쌍용차에서 10년 가까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못해도 해고되고 잘해도 해고가 되니 중간만 가야 된다’는 그거 하나 배웠단다.

서지회장이 입사할 당시, 쌍용차에는 1,7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었다. 5년 동안 1,500명의 노동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강제해고로 쫓겨났다. 2004년도에 5백 명, 2006년에 5백 명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2008년에 정규직 노동조합의 전환배치 합의로 인해 3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쫓겨났다. 그리고 2009년 투쟁이 진행되던 중에 알게 모르게 백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리도 없이 쫓겨났다.

“2008년 8월에 전환배치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비정규직들이 일하던 자리에 정규직들이 와서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때 합의서가 두 번 나왔어요. 한번은 비정규직 희망퇴직을 안 받고 휴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합의서가 바뀌어버린 거야. 위로금 4개월 분 줄 테니까 350명 이거 받고 나가라는 거야.”

2008년 10월 말, 당시 쌍용자동차지부 1기 집행부(지부장 정일권)는 사측과 비정규직 347명에 대한 휴업을 전제로 하는 전환배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비정규직 350명에 대한 희망퇴직으로 사측과 합의 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8년 11월 4일, 쌍용차 정규직 전환배치에 따른 비정규직 희망퇴직 관련 노사합의서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쌍용자동차 사측은 하청업체에 할당을 주어 강제적인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사측은 ‘지금 희망퇴직을 하면 나중에 사람 뽑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등의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다. 지저분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 했던 일을 기피했던 정규직들은 2008년 전환배치 당시, “여기 안가면 잘린다. 잘려나갈래? 아니면 여기 갈래?”하는 상황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들이 하던 힘든 공정에 오게 되고, 비정규직들은 쫓겨난다. 서맹섭 씨가 하던 용접 일도 그가 쫓겨나면서 정규직이 와서 하게 된다.

이렇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 속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2008년 10월 22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참 어렵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동주체 3명이 이름 걸고 띄웠어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정규직이랑 노무팀 반발을 통제하고 엄호해 주면서 많이 도와줬죠. 그래서 무사히 띄울 수가 있었어요.”

  2008년 10월 23일,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설립 보고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전체 64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 150명이 가입을 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강제휴업·희망퇴직·전환배치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을 했지만, 사측은 업체 강제휴업을 했다. 그리고 희망퇴직에 동의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고통보를 하기 시작했다. 서맹섭 지회장은 2009년 5월 해고자가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투쟁

서맹섭 지회장은 그 당시에 정규직들이 한 번 더 휴업을 나가더라도 힘을 합쳐서 전환배치를 막았어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방패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번 밀리니까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치고 들어왔다.

“2008년도에 정규직 전환배치를 막아냈어야 돼. 그게 시발점이 된 거 아닌가. 인건비 싼 비정규직 다 쫓아내니까 그 다음에 쫓아낼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그때 우리가 한참 외쳤던 게 ‘우리 나가면 당신들도 나간다’ 였어요. 정규직도 칼바람 들어온다. 우리 쫓아내면 안 된다. 전환배치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못 막아 버린 거지.”

  2009년 4월, 회사 내에서 중식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2008년 12월 초에 한상균 지부장이 당선되자마자 사측은 법정관리 신청을 했고, 그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조합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잠을 자면서 투쟁을 했다. 당시 한상균 지부장 집행부는 일자리나누기(5+5와 3조 2교대)와 비정규직 고용안정기금 12억 노동조합 출연 등 정리해고 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 수 있는 자구책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리해고를 진행하였다. 비정규직지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이 투쟁에 흔쾌히 동참했다.

86일 간의 굴뚝농성과 휴지조각이 된 8.6 합의

2009년 5월 13일, 서맹섭 지회장(당시 부지회장)은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쌍용자동차 내에 있는 굴뚝에 올라가 86일 간의 고공농성을 한다.

“저는 비정규직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굴뚝에 올라간 거에요. 살기 위해서 올라간 거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쫓겨났던 게 얼마나 억울해요. ‘여기 누가 온다니까 너 나가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열심히 일만 했던 사람들인데... 또, 분사를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안 된다는 요구도 했죠.”

  2009년 7월, 86일 간의 고공농성이 진행된 쌍용차 굴뚝

굴뚝에 처음 올라갈 때,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왜 내려왔나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때 야무지게 해결했으면 또 다른 철탑에 올라갔겠나 싶어서다. 헬기소리와 쏟아지는 최루액을 견디며 86일을 버틴 경험이 있는 그는 지금 철탑에 올라가 있는 조합원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고공농성자들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목숨 걸고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굴뚝농성 50일 즈음부터 서 씨는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속이 다 망가졌다. 2009년 8.6합의가 이루어지고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 후에 병원에 입원을 했던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다. 8.6합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9명에 대해 10월 1일자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1일자로 복귀시키겠다며 9월에 비정규직 복직대상자 명단까지 요구했던 사측은 10월에 면접을 보라는 요구를 했다.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면접 과정에서 사측은 “도장반에 들어가서 도장똥 제거하다가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등의 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 결과 연배가 있는 여성노동자들이 큰 상처를 받고 복직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17명이었던 복직 대상자는 8명으로 줄었고, 이 중 생계 나간 조합원을 제외하고 현재 4명의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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