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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자 15년 선거승리 의미

그리스 시리자, 좌파정부 수립의 의의와 한계 [국제포럼] 그리스 민중의 성과...투쟁 전진시켜야 박석삼(국제포럼) 2015.01.30 15:02 크게 작게 프린트 기사공유 | [편집자주] 발제는 1) 그리스의 좌파들 2) 그리스 경제위기의 본질 3) 트로이카의 긴축안과 대중의 투쟁 4) 선거강령과 Syriza의 후퇴 5) 선거결과와 해석 6) Syriza 승리의 의미와 전망과 교훈의 순서로 진행했습니다. 시리자 집권은 시리자의 우향우로 인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우리가 이를 엄호하면서 배울 교훈은 있다는 결론을 냅니다. 토론에서는 1) 시리자 집권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발제자와 다른 의견의 토론 2) KKE(그리스 공산당)와 시리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리스의 제 좌파들에 대한 토론 3) 집권 이후의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카드로 들고 나온 유로존 탈퇴, 부채 협상 등의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등에 대해서 토론합니다. 이번 토론회의 발제와 토론에 대해서 다른 의견 있는 분들의 글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 시리자의 알렉스 치프라스 [출처: 시리자 홈페이지] 발제 음성파일 바로 듣기(클릭) 질의, 토론 음성파일 바로 듣기(클릭) 1. 그리스 경제위기의 본질 그리스는 인구 1,100만 명의 소국이고, GDP는 2008년 2,329억 유로에서 2013년 1,820억 유로로 축소하였고, 정부부채는 2014년 말 3,170억 유로로 2008년 GDP의 113%에서 172%로 증가하였다. 2차 산업은 16%, 농업은 3.4%인 반면 서비스업이 80.6%를 차지하고, 특히 관광과 해운(그리스는 세계적인 해운 대국이다)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8.2%와 15%에 이른다. 1980년 집권한 PASOK(사민당)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공격이 시작될 때 진보적 입법과 사회보장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높은 비중의 지하경제(40%)와 악명 높은 조세회피 및 연고주의의 개혁은 소홀히 하였고, 법인세는 49%에서 25%로 오히려 삭감되었다. 정부부채는 1980년 21.4%에서 2004년 95.1%로 매년 평균 3%씩 증가하였다. 그리스 정부는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하였고 정부와 민간이 값싼 이자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위한 과시적 투자나 2008년 경제위기 후 무리한 주택대출로 은행권의 위기와 경기변동에 민감한 주력 산업인 해운과 관광 부문이 직격탄을 맞았다. 세수가 급감하고 재정적자와 조달금리가 치솟았고 2009년 말부터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었다. ▲ [표1] 그리스 정부예산, GDP 성장률과 부채 2. 트로이카의 긴축안과 대중의 투쟁 트로이카(EU, ECB:유럽중앙은행, IMF)가 제시한 구제금융의 집행조건인 양허안memorandum 혹은 긴축안은 총 300억 유로의 정부예산 삭감을 목표로 연금 삭감 10-12%, 공공부문 임금 삭감 약 25%, 의료 등 사회복지 지출 축소 50%, 통신회사 등 국영기업의 매각 그리고 최저임금의 삭감 22%(청년은 32%), 부가세 23%로 인상, 단체협상의 효과 부정, 해고요건의 완화 등으로 너무 가혹하였다. 긴축안은 경제를 목 졸랐고 지난 5년간 GDP는 25%나 축소되었다. 트로이카와 정부는 지난 분기에 성장률이 약 1% 정도 개선을 보인 것을 가지고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의미가 없다. 2014년 말 실업률은 25.8% (청년 실업률은 60%) 빈곤층은 300만 명을 넘었다. 그리스 정부가 긴축안을 받아들이자 2010년 5월 1일 1차로 3년 만기의 1,100억 유로가 5.5%의 고리로 승인되었다. 2009년 말부터 예산 삭감 등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고 5월 5일에는 대규모 총파업을 벌였지만, 이날 시위대의 화염병에 은행원 3명이 질식사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투쟁은 주춤하게 되었다. 다시 여름부터 구조조정의 대상인 항공관제사, 국영라디오(ERT), 국영TV, 국영철도 등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2011년 2월부터 긴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투쟁이 계속되고 5월 하순부터는 신타그마 광장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광장점거투쟁이 진행되었고 집회와 시위는 6월말까지 계속 확장되었다. 1차 구제금융이 효과가 없자 트로이카는 더 가혹한 긴축안을 제시했고 6월 29일 의회에서 2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긴축안이 찬성 155표로 간신히 통과되었다. PASOK과 ND(신민주당)는 반대표를 던진 43명의 의원을 출당시켰다. 특히 6월 27일의 총파업은 군부독재 이후 최대의 규모였다. 긴축안이 통과되자 트로이카는 7월에 총 부채의 50% 삭감(34,00억 유로에서 2,400억 유로)하고 만기일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1,300억 원의 2차구제금융이 승인되었다. 연말까지 공공과 관광을 비롯한 수많은 부문에서 파업과 긴축에 항의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2011년 경제 성장률은 -7.1%에 달하였고 11만개의 기업체가 도산하고 실업률은 19.9%, 청년실업률은 48%에 달했다. 구제금융은 트로이카가 긴축안의 이행을 점검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나뉘어 집행되었는데, IMF는 약속된 분담금을 지출하지 않고 새로운 긴축안을 요구하였다. 이에 2012년 2월 7일 정부가 2차 구제금융을 위해 공공과 서비스 부문 일자리 축소를 발표하자 양대 노총은 즉각 1일 총파업에 들어가고 긴축안이 통과된 2월 12일에는 의회 앞에 50만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는 등 전국적으로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는데 강경진압으로 120여명이 부상당했다. 2월 21일 부채조건은 최종적으로 53.5%가 삭감되고 금리는 3.65%로 인하되고 기간도 30년으로 연장되었다. 이러한 탕감과 완화는 부채율을 GDP의 120% 이내로 축소시켜 그리스 정부를 채권시장에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4월에 은퇴한 연금수령자가 신타그마 광장에서 자살하자 시위는 다시 불타올랐고 노동자들의 파업도 계속되어 2010년부터 2012년 5월까지 노동자들이 벌인 총파업은 18회에 달하였다. 그런데 53.5% 즉 약 1,000억 유로의 채무 탕감은 모두 민간인들이 보유한 채권에서 삭감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고리의 정크본드로 매입한 민간 채권자들의 채권을 흡족할만한 수준의 가격으로 되사준 것과 같았다. 그리고 구제금융의 90% 이상은 그리스 정부에 입금된 것이 아니라 원리금 상환과 채권 소지자 및 은행에 직접 분배되었다. 이것은 민간부채를 공적부채로 둔갑시킨 뒤 그리스 민중의 고혈을 짜서 갚도록 한 것이었고, 다시 말하면 국제 대부자본가들의 고리채를 트로이카가 고리로 막아준 뒤 그리스 정부를 채무자로 만든 사기극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재정적자를 누적시켜 온 것은 조세개혁을 소홀히 한 탓도 있지만 막대한 군비지출의 영향도 컸고 정치인들의 빼돌리기도 심각하였다. 특히 그리스는 NATO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군비지출 비율이 높았고 이 돈은 주로 미국과 독일, 프랑스의 무기구입에 쓰였다. 여기에서 부적절한 채무의 조사와 부당한 부채의 취소, 구제금융이 들어간 민간은행의 국유화, 그리고 협잡에 관여되었을 PASOK 국회의원들의 면책조항 폐지의 요구가 나오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긴축에 반대하는 그리스 민중의 투쟁은 2010년 초부터 불붙기 시작하여 2010년 5월 은행원 질식 사건으로 잠시 소강에 들어가지는 했지만 새로운 긴축안이 강요될 때마다 더 큰 규보로 확장되어 2012년 5월에 피크에 달하였다. 그리고 2012.5. 총선과 2012.6. 재선거가 있었다. 이후에도 2013년 국영라디오방송국 매각 반대, 간호원, 여성청소노동자 해고반대 등등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장기투쟁의 양상을 보이며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2014년 말에도 총파업이 있기는 하였지만, 크게 보면 2012년 선거를 계기로 대중의 저항과 투쟁보다는 선거주의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KKE(그리스 공산당)는 건재한 가운데 PASOK(특히 공공부문에 지배적이었다)과 ND(우파도 노조에 기반이 있다)는 많이 위축되고 특히 Syriza(급진좌파연합)와 Antarsya(반자본 좌파연합)가 많이 세력을 많이 확장하였고, 학생조직도 KKE, Syriza, Antarsya가 삼분하였다. Antarsya가 전투적이라면 KKE는 동원력이 가장 크고 때때로 전투적이지만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연대투쟁을 기본적으로 거부하고 있고, Syriza는 청년학생이 헌신적이기는 하지만 과격한 행동을 삼가는 경향이 있다. (치프라스도 공산당 청년조직 출신으로 Synaspismos의 청년조직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3. 그리스의 좌파들 KKE: 1918년 출범한 KKE(그리스 공산당)는 반나치 투쟁에서 민족해방전선과 인민해방군을 창설하여 2차 대전 후 세력이 20만 명에 달했다. 내전(1946-1949)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군부독재(1967-1974)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고, 민주화 이후 ND(신민주당), PASOK(사민당)의 양당체제하에서 소수당이지만 노동(PAME-민간노총 내의 공산당의 외곽전선)과 학생운동에 뿌리가 강하고 동원력이 막강하다. KKE는 유럽의 공산당 중에서 유일하게 유로코뮤니즘을 거부하고 반제 반독점 혁명을 주장한다. 대중투쟁의 동원력이 있고, 투쟁에 앞장서기도 하지만 종파적이고 배타적이다. Synaspismos와 Syriza: 1968년 KKE에서 유로코뮤니즘적 경향인 KKE 국내파가 떨어져 나가 Greek Left를 만들었다. 1988년 이들과 KKE 그리고 다른 좌파들이 모여 선거연합인 Synaspismos를 만들었지만 1991년 KKE가 탈퇴하자, 1992년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급진좌파정당으로 출범하여 2003년 ‘운동과 생태의 좌파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특히 Synaspismos는 민주적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반군국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며, 다원주의와 인권을 타협할 수 없는 신념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Syriza(급진좌파연합)는 2004년 Synaspismos가 주축이 되어 13개 정파가 합류한 선거연합이었는데, 반전, 반세계화 투쟁에 적극 결합하였고 2013년 7월 단일당(회원당)으로 전환하였다. 이처럼 Syriza는 소수의 다양한 변혁세력도 포함한 크게 보아 유럽중심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좌파개량주의정당이다. 단일당으로 출범한 뒤 Syriza내 변혁세력들은 Left Platform으로 당내 반대파로 기능하고 있고, 대략 25-30%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Antarsya(변혁을 위한 반자본 좌파연합): Antarsya는 그리스 말로 ‘반란’이란 뜻도 있는데, 2008년 12월 봉기 직후 반자본주의자, 혁명가, 공산주의 좌파, 급진 환경주의자들이 논의를 시작하여 2009년 3월 22일 결성하였고, 모든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전선에 개입하고 다가오는 선거에 참여하며 저항과 파괴와 전복을 추구하는 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10개의 조직과 MERA(급진좌파전선), ENANTIA(반자본 좌파연합)에 속한 활동가들 그리고 KKE 출신과 마오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좌익경향들이 모인 것이다. 기타: 이 외에 약 8,000명에 달하는 아나키스트가 있고, 이들은 화염병을 비롯해 폭력과 파괴를 불사하는 매우 전투적인 집단이다. 그리스 투쟁의 전투성은 주로 아나키스트와 Antarsya가 주도하고 있다. 참고로 DL(민주좌파)은 2010년 Synaspismos의 우파가 떨어져 나와 만든 것이고 나중에 PASOK의 일부가 참여하였다. 4. 선거강령과 Syriza의 우경화 2012년 이후 대중의 의식과 투쟁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은 선거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틀이 작동한 측면, 기왕에 노조 상층부를 장악한 타락한 PASOK 계열 집행부의 기회주의, Syriza의 선거주의 혹은 대안주의와 몸조심이 많이 작동하였다. Syriza는 2012.5. 1차 선거강령을 제출한 후 2012.6. 재선거의 경제강령에서 상당히 후퇴하였고, 다시 2014.9. 테살로니키 국제 설명회에서 발표된 당면강령에서 대폭 후퇴하였다. 2015.1. 총선을 즈음해서도 책임있고 믿을 수 있는 야당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Syriza는 이번 선거가 있기 전인 2013년부터 이미 긴축에 반대하는 민족우파인 독립당(ANEL, ND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을 연정의 파트너로 선택하였다. 2012.5. 1차 선거강령의 핵심은 유로존 잔류, 긴축안 거부(긴축안 이전으로의 복귀), 부채 지불 3년간 중지, 채무 조사 후 부당부채의 취소, 재협상과 탕감이었다면, 2012.6.에서는 은행 국유화 대신 통제, 2차 긴축안 이전으로의 복귀(1차 긴축안은 점진적으로 개선), 실업문제 해결에 중요한 주 35시간제 주장의 폐기 등이 있었고, 2014년 7월 테살로니키 당면강령은 부채지불 중지가 언급되지 않았고, NATO 철수가 빠졌고, 유럽부채회의 소집과 유럽부흥계획New Deal의 실시, 2차 대전 후 탕감해 준 독일 전쟁 배상금(800억 유로로 알려져 있다)의 지급요구가 강조되었다. 특히 경제 재도약을 목표로 총 114억 유로의 추가예산을 증세와 조세회피 방지로 확보하여, 빈곤층 30만 세대에 대한 전기 무상공급, 무소득 가구 30만에 대한 식비 지원, 3만 세대에 대한 아파트 임대료 보조(㎡당 3유로, 평균 약 19만원 정도), 연말 보너스와 연말 추가 연금 회복, 무상의료카드, 장기실업자와 빈곤층에 대한 특수 교통카드, 특소세와 주유세의 하향, 은행의 무소득자와 빈곤층 차압 중지, 채무회생 활성화, 2년간 30만 신규 일자리 창출, 재산세 면세점 상향과 부자세 등등이 제출되었다. 이외에도 Syriza 지도부는 독일의 재무장관과 ECB 총재를 만나 자신의 합리적이고 온건함을 설득하려고 계속 노력하여 왔다. 이러한 경제강령은 급격한 경기축소와 당면한 대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는 하나 강령상의 후퇴와 타협적 태도 즉 우경화로 Syriza는 자신의 왼편에 있는 Antarsya와 KKE에 대한 견인력이나 흡입력을 잃었다. (변혁세력 내에서 2012.6.때는 KKE의 종파주의를 비판하면서 비판적 지지의 분위기가 많았다면 2013년 이후에는 대중에게 Syriza와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해졌다.) Syriza 지도부는 선거강령만이 아니라 당을 온건화하고 조직내 변혁세력을 주변화하기 위해 2013년 7월 창당 총회에서 단일당으로 전환하면서 당대표의 직접선거, 분파와 경향의 해소, 중앙위원회 선거를 위한 경향들currents의 비례대표 명부제 폐기 등등의 시도하였고, 소수파는 이를 거부하고 모든 긴축안 폐기, 부채의 지불 정지, 유로존 탈출에 대한 대비, KKE와 Antarsya를 포함한 좌파정부의 수립, 강령과 저항운동을 통한 급진화 등의 수정안을 제출하였지만 30-40%의 찬성으로 패배하였다. 이 수정안(Left Platform)은 Synaspismos의 구성조직인 DEA:Internationalist Workers Left 등 3개 경향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중앙위원회의 대의원 선출에서 치프라스의 바람과는 반대로 25%에서 30%로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선거강령의 비교와 평가] 선거강령만을 볼 때에 Syriza는 유로존 잔류 및 재협상과 부채의 탕감을 주장하고 KKE와 Antarsya는 부채의 취소와 긴축안의 전면 거부 및 유로존 탈퇴(화폐주권의 회복)를 주장하였는데, 유로존 탈퇴가 생필품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그리스에게 즉각적으로는 심대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중의 의식수준을 감안하면 Syriza의 주장은 무원칙하고 타협적인 것으로 비난하기보다는 선거강령으로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2012.5. 1차 선거강령은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강령 설명회와 토론회를 통해 다듬어낸 대중적인 강령이기도 하였다. 114억 유로의 카탈로니키 당면 강령 역시 대중의 심각한 고통을 감안할 때 어떤 좌파도 우선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조치이고 따라서 이것만으로 케인스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대중의 의식수준에 따라서 선거강령은 최대강령에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고 따라서 선거강령은 최대강령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개량과 혁명을 따질 것은 없다.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은 선거투쟁을 대중을 유권자로 보느냐 아니면 대중을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냐이다. Syriza가 비난받아야 할 것은 최대강령으로부터 멀어지는 끊임없는 선거강령상의 우경화라기보다는 어떠한 작은 슬로건도 트로이카와 지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대결 없이는 얻어낼 수 없다는 투쟁적인 자세가 아니라 지배계급에 대한 유화적인 면모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대중의 의식화투쟁을 방기하고 악영향을 끼쳤다는 데에 있다. 5. 선거결과와 해석 이 절에서는 그리스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7년과 그리고 트로이카의 공격이 극심하였던 2012년 5월과 6월, 경기후퇴와 긴축과 실업의 고통이 극에 달한 2014년의 유럽의회 선거와 2015년 1월의 총선을 살펴본다.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거의 참가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일반적으로 기권율은 부르주아 선거놀음에 대한 불만자들의 이탈이라고 볼 때 유권자의 1/3 이상의 기권은 그 자체가 불만과 절망의 표시이다.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정부부채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09년 총선에서 지난 30년간 지속되어 온 PASOK과 ND의 양당구조는 2007년 총선과 비교하여 ND 정권(41.84%->33.47%)이 PASOK 정권(38.10%->43.92%)으로 바뀌었을 뿐 좌파나 극우는 각각 1%와 2%가 증가하였다. 2012년 5월 선거는 Syriza가 집권하면 유로존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다는 협박이 극에 달하던 때였지만 또한 1차 구제금융에 대한 긴축안으로 대중의 분노와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트로이카에 굴복한 PASOK의 몰락은 당연하였다. 2월 혁명 때 짜르가 몰락한 사례나 아랍혁명 때 독재자를 몰아낸 사례 그리고 IMF의 구제금융으로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가 대통령을 쫒아낸 적은 있지만 집권 세력이 선거에 의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은 거의 이례적이다. [표2]를 보면 PASOK은 2012년 5월 43.92%에서 13.18%로 30%를 잃었지만 중도 전체로 보면 19%만 줄어들었고 좌파는 15% 혹은 3/4가 극우는 4%가 증가하였다. 이 선거에서는 Syriza만이 아니라 KKE와 Antarsya의 득표율도 모두 증가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재선거에서 Syriza가 16.78%에서 26.89%로 10%를 더 올린 것은 2.5%만 순증한 좌파 합계에서 보듯 Syriza와의 어떠한 연합도 반대하겠다는 KKE에 대한 원망과 좌파들의 몰아주기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즉 2012년 5월과 6월 사이에 Syriza가 지지율을 10% 증가시킨 것은 대중의 급진화 때문이 아니라 2012년 5월에 이루어진 급진화의 응고였던 것이다. 리스에서는 2008년 12월에 한 달간 계속되었던 학생반란이 이었다. 당시 초반에는 KKE가 적극 나섰으나 곧이어 반달리즘이 나타나자 KKE는 이들을 “후드를 입은 폭도”로 비난하면서 발을 뺐지만 치프라스는 학생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Syriza는 이 투쟁을 옹호한 의회 내의 유일한 정당이었고 이후 2011년 5월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하는 자들) 투쟁에 비견되는 신타그마 점거투쟁에서 Syriza 청년활동가와 Antarsya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때 KKE는 이 투쟁을 소부르주아 투쟁으로 폄하하고 당원들을 격리시켰다. KKE의 혁명적 주장과 타 조직이나 대중의 자발적 투쟁에 대한 폄하, Syriza를 좌파개량주의로 비판하면서 어떠한 연대도 거부한 종파성은 다른 좌파와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가져왔다. 이처럼 2012년 5월 KKE에 대한 Syriza의 역전은 이런 일련의 과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를 보면 좌파가 32.72%에서 36.15%로 3.5% 증가할 때 1위를 한 Syriza만 26.57%로 정체한 것은 대중의 급진화를 갉아먹는 선거주의, Syriza의 몸조심과 우경화 때문이었다. 유럽의회 선거가 끝나자마자 구조조정이 본격화하여 2013년에 있었던 ERT(그리스 국영 라디오) 노동자들의 5개월에 걸친 투쟁이나 병원, 청소노동자들의 끈질긴 해고반대 투쟁이 있었음에도 Syriza는 투쟁에 전면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전형적인 선거야당의 면모를 보였다. 대중의 의식은 선거가 아니라 투쟁 속에서 성장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 대중의 급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집권세력과 극우의 무자비한 공격과 강제진압에 맞서 고립 속에서 절망에 찬 장투를 하였던 것이다.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가 기권율이 40%가 넘고 이전 선거와 비교하여 보수와 중도가 약간 씩 줄어들고 극우와 좌파만 조금씩 늘어난 것은 유럽의회 선거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특히 2012년 5월과 6월 그리고 2014년 5월의 좌파득표율은 각각 30.69%, 33.11%, 36.15%로 계속 늘어나는 것 같지만 절대 득표수로 보면 1,940,956명과 2,048,377명으로 변함이 없고, 2014년 5월도 2,066,505명이다. 즉 이 기간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ERT 등의 투쟁이 끈질기게 진행되었지만 전체 대중의 의식은 선거주의에 막혀 대중의 급진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5월과 2015년 1월 사이에도 대중의 의식화를 고양시킬만한 전면적인 대중투쟁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불과 7개월 후인 치러진 2015년 1월의 대중의 의식은 그 전과 비슷하고 총선의 투표율도 2012년 5월보다 약간 감소하였다. 유권자수가 비슷한 2015년 1과 2012년 6월의 총선과 비교할 때 극우와 보수는 약 40만 표, 중도는 20만 표가 줄면서 좌파 전체가 60만 표나 늘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Syriza의 선전에 기인한다. 따라서 2015년 1월에 Syriza가 10% 이상 상승한 것은 투쟁의 성과나 대중의 급진화의 반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극우가 2014년 5월의 12.23%와 비교하여 7.31%로 크게 준 것은 나치를 표방하는 극우인 황금새벽당은 시위대 살인 사건으로 당 대표부터 구속되는 등 집권세력조차 그동안 방관하던 입장을 바꿔 억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위신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연정의 파트너인 PASOK과 DL은 크게 줄었지만 중도 전체로는 17.21%에서 15.47%로 소폭 줄었다. 크게 보면 좌파는 6% 상승하고 극우는 5%, 중도는 1.5% 정도 하락하고 집권당인 ND는 5%나 늘었지만 보수 전체는 0.6%정도 늘었다. Syriza는 이 선거에서 36.34%를 얻어 과반수에 2석 부족한 149석을 얻고 반긴축에 동의하는 13석을 얻은 민족우파인 독립당(ANEL)을 파트너로 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를 보면 중도가 몰락한 반면(25.27%->15.28%) ND를 포함한 보수는 버티고 있고(33.61%->34.45%), 좌파의 성장(33.11%->42.66%)은 Syriza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괄적으로 보면 경제위기와 긴축안의 강요로 인한 대중의 극심한 고통과 35차례의 크고 작은 총파업은 좌파에게 3배가 넘는 급성장을 가져온 것이고, 급진화의 결정적 계기와 피크는 2012년 5월과 6월에 큰 틀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좌파개량주의정당인 Syriza가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2012년 6월 이후 Syriza의 의회주의는 대중의 더 높은 성장을 가로막았다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Syriza는 2012년 5월 총선 이후 집권의 가능성이 커지자 끊임없이 강령상의 온건화를 시도해 왔고 특히 2014년 9월의 테살로니키 당면 경제강령으로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Syriza가 10%이상 지지율을 높이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한 것은 대중의 급진화의 결과라기보다는 대중의 고통이 극에 달하여 극우와 연정에 참여한 중도의 지지율이 반 토막 난 것과 몰아주기에 기인하고, 새로운 지지층은 재협상이 성과가 없을 때 함께 넘으려는 의지를 가진 주체인 대중이 아니라 결과에 실망하면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유권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Syriza의 이번 높은 성적은 그다지 값진 것이 아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보듯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극우가 급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극우인 프랑스의 국민전선은 제1당으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경제위기는 대중의 급진화와 좌파의 성장을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극우가 성장할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것과 좌파가 성장할 기회도 된다는 것뿐이다. 달리 말하면 대중의 동원과 투쟁과 급진화가 없이는 경제위기라고 하여도 좌파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아무리 경제위기가 진행되어도 지배계급인 보수의 장악력은 거의 흔들리지 않으면서 계급적대가 심화될수록 중도의 입지가 좁아지고 그 공간을 좌파가 수렴할 가능성이 생김을 알 수 있다. ▲ [표2] 그리스 선거결과 분석 * XA:황금새벽당, ANEL:Independent Greeks LAOS:그리스정교당ND:신민주당, PASOK: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 DIMAR(DL):Democratic Left, Syriza:급진좌파연합, KKE:그리스 공산당, EEK:Workers Revolutionary Party(트로츠키 경향), OAKKE:Organization for the Reconstruction of the Communist Party of Greece, OKDE : Organisation of Communist Internationalists of Greece(제4인터 경향). The River (TO POTAMI), 6. Syriza 승리의 의미와 전망과 교훈 [Syriza 좌파정부의 전망] 그동안 전 세계에서 128개국에서 진행된 IMF 구제금융에는 정부예산의 삭감을 위해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축소, 공공재의 사유화 등등 가혹한 긴축안이 강요되었고 모두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에 강요된 긴축안은 연금과 임금의 삭감 등도 유례가 없지만 단체협약의 효력정지, 최저임금의 삭감, 해고규제 완화 등 정부예산 삭감이나 채무변제와 무관한 공격이 노골적으로 들어 있었고, 이것은 결국 복지국가의 파괴를 목적으로 나아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을 위축시키고 규율잡힌 노동력을 확보하려고 한 국제자본가계급의 노골적인 공격의 시험장이었다. 긴축안은 이외의 다른 목적을 찾을 수 없는 그리스 노동계급과 민중에 대한 노골적이고 야수적인 공격이었다. 따라서 이 공격에 맞서 싸우고 저지하고 반격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 민중만의 투쟁이 아니라 트로이카를 필두로 한 전 세계 자본가계급의 예봉에 맞서 최전방에서 벌어지는 전투이고 쌍방이 모두 이 투쟁의 의미를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Syriza가 강령을 온건화하고 합리화 한다고 하여 트로이카의 공격이 멈추고 윈-윈 할 수 있는 길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부채와 상환의 전면거부가 아니라 Syriza가 주장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재협상에 의한 부채의 50% 이상의 탕감이나 일부 지불정지 그리고 유럽부채회의 등등마저도 구제금융으로 고통받고 있는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으로의 도미노 현상 때문에 트로이카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25%나 축소되어 극심한 정체를 겪고 있는 그리스 경제와 –12.2%(약 220억 유로)에 달하는 예산 적자의 사정에서 설령 부자세로 증세를 한다고 하여도 Syriza가 계획한 114억 유로의 추가지출은 원리금 상환을 정지하지 않는 한 어렵다. 즉 협상이 늦어지면 일방적인 지불정지를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트로이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이 대결국면에서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2012년 6월 Syriza의 집권 가능성이 나오자 예금인출과 해외탈출은 무려 GDP의 40%에 달했다. 핵심은 이 국면을 감내하고 넘을 수 있는 대중의 의식과 단결이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을 고취시키지 않고 트로이카와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고 트로이카가 양보할 것이라는 치프라스의 태도는 양날의 칼이 된다. Syriza 집행부의 과오는 대중의 의식과 투쟁을 고취시켜 넘어야 할 문제를 적들과 공존할 수 있는 문제로 호도한 데에 있다. 114억 유로의 추가지출을 중심으로 한 당면 경제강령은 그것이 케인스주의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라 선거주의(의회주의)의 한계가 있다는 점과 그리스 민중의 당면한 현실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 조치마저도 트로이카의 질서에 도전이 된다는 점에 있다. 사실 ECB는 최근에 회원국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여 공격적인 양적완화에 착수할 예정인데 이는 심각한 유로존의 경기후퇴 때문에 국가부채와 재정적자를 GDP의 각 60%와 연간 3%로 제한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일시 정지하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동안 이 조약을 핑계로 유럽민중에게 강요해 온 긴축을 푼다는 의미에서 ECB의 양적완화나 Syriza의 긴축안 정지와 추가지출은 같은 측면이 있으면서도, 계급적 성격에 있어서 한쪽은 여전히 반노동자적인 신자유주의의 유지이고 다른 한쪽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거부이다. 그러므로 Syriza 정부는 반긴축 정부의 성립이라기보다는 반신자유주의 정부의 성립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트로이카는 Syriza와 협상하고 타협하기보다는 추가적인 자금공급을 하지 않으면서 지연전술을 쓰면서 고사시키는 길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트로이카는 Syriza가 아무리 온건화하고 타협적이 되어도 Syriza의 정책을 좌절시키고 고립시켜 파산시키려고 할 것이다. 즉 트로이카와 Syriza 혹은 트로이카와 반긴축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트로이카 독재에 반대하는 전 유럽적인 심대한 연대투쟁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를 위해 전 유럽 민중의 급진화를 위한 지속적인 선동과 동원이 필수적임을 생각할 때 Syriza의 성공 전망은 어둡다. 트로이카는 온건한 좌파조차도 허용할 수가 없다. [Syriza 승리의 의의와 교훈] 2012년 5월 Syriza는 지배계급의 선거슬로건인 “유로화냐 그라크마화냐”에 맞서 “긴축이냐 Syriza냐”로 대응하였다. 그리스 선거의 대결구도와 성격은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유로존 조약상으로는 축출은 가능하지 않고 탈퇴만 가능하기 때문에 트로이카도 그렉시트의 가능성을 사실상 낮게 보고 있다. 그럼에도 트로이카를 비롯한 내외의 지배계급은 2012년 5년 선거 때부터 Syriza가 집권하면 유로존에서 축출될 것이라고 협박하였고 이 악선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치프라스를 “발칸의 차베스”라고 부르며 최근에도 EC 의장은 그리스인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회원국의 내정에 대해 허용될 수 없는 간섭을 공공연히 하였다. Syriza 집행부는 끊임없이 자신을 온건화 우경화하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음에도 선거는 트로이카, 독일, 그에 빌붙은 우파와 중도, 자본가계급의 언론을 한편으로 하고 Syriza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결양상을 보여 왔다. 달리 말하면 Syriza 상층부의 개량주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선거강령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와 Syriza의 승리는 지배계급에 대한 그리스 민중과 좌파의 유의미한 승리임이 분명하다. 2015년 1월 총선에서 Syriza가 승리한 것은 소련과 동유럽을 제외하면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나 칠레의 아옌데 정부에 이어 사회민주주의 왼편의 급진좌파가 선거에서 승리한 2차 대전 이후의 최초의 사례이다. 또한 1980년대 이후 몰도바를 제외하면 민중이 신자유주의 정부를 패퇴시킨 최초의 승리이다. 나아가 IMF를 앞세운 국제자본가계급이 구제금융을 빌미로 강요한 구조조정이라는 공격에 파열구를 낸 최초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민중의 승리이고 좌파의 승리이다. 그리고 Syriza의 승리에서 좌파가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Syriza가 변혁좌파를 포함하여 다양한 좌파들이 연합한 새로운 유형의 당new party이고 넓은 당broad party라는 점이다. 혁명은 단선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 러시아 혁명 후 발달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혁명 세력 혹은 변혁세력은 집권은커녕 주변화를 면한 적이 없다는 점, 스페인의 인민전선이나 아옌데 정부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좌파정부 하에서 대중의 의식과 투쟁이 급성장한 사례에서 보듯 선거로 집권한 좌파정부가 더 높은 변혁투쟁의 유리한 고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Syriza의 개량주의적 성격이나 Syriza 상층부의 우경화나 한계만으로 유럽 최초의 좌파정부의 수립이라는 이 중대한 성과를 폄하하고 어두운 전망을 예언하는데 만족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리스와 전 세계 좌파는 이 투쟁이 좌절하거나 Syriza정부가 자본의 위기관리정부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리스 민중이 획득한 이 성과를 엄호하고 이 성과를 교두보로 삼아 투쟁을 더욱 전진시켜야 한다. 그리므로 개량주의적인 좌파정부에 대한 시니컬한 냉소나 비관적 전망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변혁좌파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유럽 최초의 좌파정부의 수립이라는 이 역사적 기회를 맞아 최선을 다하자. 트로이카의 공격으로 동일한 처지에 있는 스페인이나 아일랜드, 포르투갈만이 아니라 자본가 독재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이 그리스 민중의 운명과 동일시하면서 지금 이 투쟁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 투쟁을 엄호하고 이 투쟁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 이번 음성파일에 사용된 그리스 인터내셔널가는 Maria Dimitriadi, Afroditi Manou, and Thanos Mikroutsikos’ choir(from CD “Ta Antartika”, 1991; recorded in 1981, originally came out on LP)의 곡입니다. * 시간: 2015년 1월 28일 * 장소: 참세상 회의실 참조할 자료(링크) 박석삼 [그리스 경제위기 분석](1) 그리스 부채위기의 원인과 본질 2012.10.09. 박석삼 [그리스 경제위기 분석](2) 세계 자본가계급 공격의 최전방이 된 그리스 2012.10.10 박석삼 [그리스 경제위기 분석](3)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 체제 위기에서 좌파의 과제 2012.10.11. 박석삼 유럽 좌파통합운동의 현재(1) Syriza, Left Bloc, NPA를 중심으로 2013.05.08. 박석삼 유럽 좌파통합운동의 현재(2) 유럽 Syriza, Left Bloc, NPA를 중심으로 2013.05.10. 시리자 강령 요약(Greece: SYRIZA's 40-point program)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정치신문, [95호]21세기 볼셰비키 전위 그리스공산당 제19차 당대회 분석, 2013/04/30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정치신문, 변혁의 여명을 밝히는 그리스 노동자 민중, 2012. 02.29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정치신문, [번역-제일호] 아테네 국제대회에서의 PAME(전노동자투쟁전선) 발표문(1) 2012.02.02.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정치신문, [번역-제일호] 아테네 국제대회에서의 PAME(전노동자투쟁전선) 발표문(2) 2012.02.29.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정치신문, [63호] 그리스 재정위기, 과잉생산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2010.05.29. 소티리스 콘토야니스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 활동가), 그리스의 좌파들 ─ 시리자, 공산당, SEK, 안타르시아 <노동자 연대> 142호,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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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4국관계관련 학자들의 시선- 13년 연초 토론회

 

노동자 자살, 한 국가만의 문제아니다...국가주의 넘어야

“아태 4개국 권력교체와 동아시아질서 재편” 사회토론회 열려

 

“애플이 생산하는 아이팟이 중국에서 최종 조립되고 미국으로 수출되면 미국은 한 대당 150 달러 정도의 ‘무역 적자’를 본다. 이중 애플은 80달러의 수익을 남기며, 일본의 도시바는 20달러, 미국 브로드콤은 5달러, 삼성은 약 1달러 그리고 대만의 인벤텍은 4달러 정도의 이윤을 챙긴다. 그리고 나머지 금액이 중국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아태 4개국 권력교체와 동아시아질서 재편 토론회서 최근 흐름을 존스홉킨스 대학 서재정 교수는 아이팟의 사례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의 표현처럼 아시아는 경제의 질적 변화 속에서 미국을 포함한 초국적 생산, 교역, 금융네트워크로 발전하며 서로에 대한 의존성이 복합적으로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와 민주주의연구소가 공동으로 지난달 30일 마련한 “아태 4개국 권력교체와 동아시아질서 재편” 토론회에서는 백원담 동아시아연구소장이 설명했듯, 미국과 중국이 만드는 새로운 강권질서 등 동아시아 하늘에 드리운 힘의 중첩 아래 다원적 평화관계를 이룰 수 있는 방향과 동력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를 놓고 여러 명의 학자들이 생각을 모았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력 전이”와 “복합적 상호의존성”의 심화

우선 서재정 교수는 아이팟의 사례로 말한 “복합적 상호의존성”이란 경제관계 변화는 3가지 “세력전이”를 추동한다며 구조적인 변화의 흐름을 짚었다. 전이의 내용은 이렇다. 그 동안 아시아의 주도국은 일본이었지만 이제는 중국이다. 여전히 절대적으로는 미국이 우월한 지위에 있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 관계는 G2라는 말처럼 크게 변했으며, 또 미국-유럽의 교역 규모를 넘어선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관계 변화도 주요한 변동 지점이다. 즉 세계적으로는 아시아의 중요성이, 아시아 역내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부각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서재정 교수는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회귀도 아시아의 경제적 중요성이 높아지고 질적으로 변화하는 이러한 하부구조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강화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상호의존성은 이의 수위를 제한하며 다양한 대화와 관여의 틀을 파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최근 추진되는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등 초국적 생산, 교역, 금융 네트워크 활성화를 위한 조치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외교의 공세화, 구조와 상황 변화에 따른 표현

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구조적인 변화의 중국적 양상을 설명했다. 그는 시진핑 시대 개막 이후 중국이 보다 공세적으로 변했다는 표현들은 구조와 상황 변화에 따른 작용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변화를 추동하는 배경은, 해외 시장에서 중국의 상업적인 이익이 더욱 커졌다는 데 있다. 또한 중국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변화되는 양상 중의 하나다. 갈등은 확산되고 있지만 지도력은 약화됐기 때문에 희토류 수출 제한, 항공모함 건설, 난샤 군도에서의 물리력 동원 등 민족주의와 공세적 측면을 강화해 외부 문제에 활용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인도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도 중국의 변화를 압박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중국은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군사적 외교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후진타오가 지난 5월 제시했듯 한편으로는 “신형대국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중미 간 경쟁은 계속 치열해질 것이며 특히 주변 국가들과의 영토분쟁은 중국 개혁개방 후 가장 심각한 외교적 도전에 직면하게 하고 있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아베의 일본, 환율갈등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관계 후퇴 이미 현실화

아시아 환경과 일본의 변화는 권혁태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가 설명했다. 그는 아베의 승리요인에 대해 한국에서는 역사인식, 영토문제 등의 쟁점이 부각됐지만 실제로는 경제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장기불황에 대한 아베의 공격적인 양적팽창정책이 과거 성장시대를 살았던 세대에 어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상호 의존된 아시아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극단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지만 일본발 환율전쟁 등 환율갈등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관계의 후퇴는 이미 현실화 되고 있다고 권 교수는 보았다.

한편으로는 같은 유신의 자손인 아베-박근혜의 등장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크고 밀월관계로 갈 것이란 말도 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권 교수는 보았다. 김대중-노무현 당시 상대적으로 약화됐던 북한-중국을 포위하는 일본-한국의 심정적 공유가 기본적으로 커졌지만 일본이 고립된 면이 크며 외교안보라는 쟁점과 영토, 역사인식 사이에 양자가 불일치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혁태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의 대일정책이 이전과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지도 않겠지만 위안부, 야스쿠니 등의 문제를 회피하면 국내에서 여론이 악화될 것이기 때문에 현상유지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는 일본-미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한-일 군사교류나 미국에 의한 TPP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권 교수는 일종의 ‘돌발 사태’의 개연성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베는 7월 참의원선거 까지 계속 우경화 노선을 밟을 것이고 헌법 개정에도 매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며, 일본 우파들이 시마네 앞바다에서 출몰하는 등 이들의 돌발행동이 박-아베 사태를 악화시킬 순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경제적 요구에 따른 대북정책 변화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김동춘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장은 권력 교체기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변화의 지형을 짚었다. 그는 박근혜 당선자의 외교 전망에 회의를 나타내면서도 중소기업에 대한 박 당선자의 입장에 따라 대북정책 변화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김 소장은 우선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나 박근혜 후보 모두 약한 인물이었으며 외교정책에 대한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 조중동이 걱정할 정도로 북한이나 외교가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래 없이 높은 투표율은 2,30대가 가진 절망과 50대의 불안감 등 강한 위기의식을 반영한다며 박 당선자가 대면하고 있는 경제적 조건을 전제했다.

김동춘 교수는 이러한 조건에서, 박근혜 당선자의 가치관은 이명박보단 훨씬 냉전적 세계관에 가깝지만 박 후보가 중소기업에 대해 상당한 방점을 두고 있고 개성공단에 대해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안들을 수 없기 때문에 강경 입장을 취했던 이명박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고 보았다. 즉, 노태우 정권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성사시켰듯 극우들을 달래면서 대북정책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동춘 교수는 박근혜 당선자가 한반도 정세에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인물과 리더쉽 부족 등을 문제로 매우 회의적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박 정권에 대응하는 야권에 대해서도 낙관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은 몰락했는데 민족주의 경향의 통합진보당 리더십이 가졌던 목소리가 역작용을 일으켜 합리적인 대북이야기도 현재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불안정한 정치 기반도 대북 관계를 낙관하기 어렵게 하는 하나의 이유라고 지목했다.

이러한 미국, 중국, 일본과 한국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양상을 전제로 이날 토론회에서는 몇 가지 주요 쟁점이 형성됐다.

노동자들의 자살, 개별 국가들의 문제 아냐
국가주의적 접근의 한계, 전면적으로 얘기해야


우선 백원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이 지적했듯, 복합적 상호의존성 아래 아시아라는 공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로 제기됐다. 중심축이 대서양에서 아시아로 왔다면 이 공간에서 살아내야 하는 기층민중은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서재정 교수는 국가 간 상호의존성은 심화되는 동시에 소비자의 소비는 확대시키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악화되는 상호모순적인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을 문제로 “상품과 세계는 국경 없는 세계를 누리고 있지만 노동자는 배제”된 상황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에 대한 국가주의적 접근을 문제로 제기하고 복합적 상호의존성이 낳는 노동의 구조적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거 후 한국 노동자들의 자살, 중국 팍스콘 공장 노동자들의 자살, 필리핀 노동 분규 심화 등은 개별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 사례로 한진중공업을 들었다. 한진중공업은 장사는 잘 됐지만 얻은 수익을 한국의 재투자나 노동자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싼 필리핀으로 투자를 돌리며 양국 노동자들에 대한 악순환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은 이렇기 때문에 국가주의적 접근이 가지는 한계를 전면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단계라고 그는 제안했다.

같은 측면에서 현실의 자본은 TPP 등 현재의 복합적 상호의존성을 제도 차원으로 구조화하는 단계인데 그에 비해 복합적 상호의존성의 피해 당사자들은 아직까지 국가주의적 틀에 갇혀 제도화는커녕, 국가 안에서도 대응을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민주당이 들어섰더라도 이 부분에 큰 변화가 있었을지 회의적이라며 이를 동아시아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로 재차 강조했다.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향한 아시아의 다양한 주체 드러내야

이러한 상황에서 참여자들은 새로운 질서로서의 전환이 논의되지만 모델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과연 아시아의 조건과 새로운 질서를 위한 아시아적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백원담 소장은 아시아는 유럽에 의해 규정된 아시아이자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발전모델에 의해 추동돼 왔지만 이제는 상호의존성 주변으로부터 재중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우선 돌이켜 봤다.

이남주 교수는 아시아는 여전히 ‘발전’의 문제에 매어 있지만, 이는 격차, 환경과 자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대 후 아시아는 전쟁에 둔감해져 있는데, 지금 이런 문제를 생각해봐야하지 않는가라며 기존 냉전 유산의 잔재, 발전 문제 등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에서 아시아가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좋을 수 있지만 국제관계 질서 역사에서 보면, 새로운 질서로 전환되었을 때, 설득, 대화로 진행된 건 드물다며 평화적인 질서 전환이 가능한가라고 우려했다.

서재정 교수는 이 상황에서 현 국면을 주도하고 있는 개발국가가 외부충돌을 야기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새로운 질서를 얘기하기 위해서도 현재 전쟁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평화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단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김동춘 소장은 아시아 4개국 권력 교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세습사회 현상을 짚으며 이를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내부 위기의식이 보수적으로 돌파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에서는 동북아시아가 갖는 천년의 관료주의 아래 자본이동만 편해진 상황에서 국가주의가 강화되고 있다며 아시아적 성찰적 근대라는 사고가 필요하고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과제를 지적했다.

김동춘 선생은 또한 52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한중, 한일, 중일 등 양자간 체제들이 지속되는데 여기에 남북관계가 중요한 고리가 될 것 같다고 제기했다.

백원담 소장은 후발 자본주의국인 민족해방 국가에서 비동맹운동, 저항의 요소가 있었는데 경제논리로 이것들이 없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주체의 형성이 국가에서도 안 되고, 민족적 정체성도 아니고, 계급적 정체성도 해체되고 있고 대만이나 홍콩에서처럼 이중 삼중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며 아시아의 재편이라는 것은 굉장히 다층적인 세력전이와 상호의존성이 조직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특정 다수의 노동과, 결혼, 문화적 교류, 탈경계적으로 흐르고 있는 과정을 지목하며 이 흐름들을 잡아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여자들은 이외에도 아시아 내에서 각 정치주체의 전략과 변동과정, 세계 무대에서 보다 중요해진 아시아와는 대비되는 동아시아론의 퇴조, 변화된 지형에서 한국이 가지는 추동성의 중요성 등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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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독재에서 이슬람독재로- 아랍3국혁명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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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제국주의 이슬람 반동질서의 수립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5)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확대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민중의 항쟁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즉 아랍의 거의 대부분 국가로 번져 나갔지만, 오직 튀니지, 이집트, 리바아에서만 독재자를 몰아내었고, 예멘은 30년 독재자인 살레가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했을 뿐 변한 게 없고, 바레인은 탱크를 앞세운 사우디의 군사개입으로 짓밟혔고, 시리아에서는 6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아직도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아랍 민중이 저항한 체제는 무엇이었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항쟁 배경:
세속적인 후견독재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한 빈곤과 실업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독재자를 몰아낸 이들 나라들이 페르시아만의 왕족독재국가들과는 달리 모두 세속적인 국가였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국가란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헌법과 법률의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르게 타 종교를 용인하고,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 국가이다(세속주의 국가인 터키는 ‘종교의 원칙은 신을 위한 것이고 국가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2차 대전 후 반식민지 상태에서 친제국주의적인 이슬람 왕정 통치를 대체한 국가로 그 의미에서 자주적인 국가였고, 냉전체제하에서 사회주의체제를 흉내 내어 국가가 의료와 교육 나아가 식료품과 연료, 일자리까지 책임지는 후견적인 국가였고, 주요산업의 국가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다른 한편으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당 독재 혹은 일인 독재 국가였다.

1980년대 이후 이들 나라들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에 편입되면서 국가의 후견기능과 분배정의가 약해지는 가운데, 2008년 세계 대공황으로 식량가격의 폭등과 특히 교육받은 청년세대를 비롯한 높은 실업률이 항쟁의 배경이 되었다.

항쟁의 경과와 양상:
장기간에 걸친 잔악한 독재와 사생결단 항쟁의 폭발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내륙의 낙후한 시디 부지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26세의 부아지지는 6형제를 부양하는 가장이었고,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중학교 때부터 청과물상에서 일했다. 그는 시청 단속반의 뇌물요구를 거부했다가 뺨을 얻어맞고 손수레를 빼앗기자 시청으로 가 온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댕겼다. 2011년 아랍 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교육받은 젊은 실업자(그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후견기능으로 상대적으로 교육비가 쌌기 때문이다), 부패와 가난, 그리고 그 체제를 위지하기 위한 정보경찰을 앞세운 일당 독재! 부아지지의 자살은 이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고, 근처의 상인들과 청년, 학생들이 항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고무탄, 최루가스, 곤봉! 장기간의 독재와 신자유주의가 가한 고통 그리고 체제에 대한 절망은 분노의 폭발을 가져왔다.

시디 부지드의 저항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로 즉각적으로 공유되었지만,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대중은 곧바로 합류하지 않았다. 2011년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식을 전후하여 저항은 시디 부지드 인근의 내륙지방인 카세린과 탈라로 번져갔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쓰던 벤알리는 1월 6일부터 강경진압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물러서면 잔인한 색출과 보복이 따를 것을 안 민중은 생사를 건 저항에 나섰다. 그들은 탈라 시 입구에 “민중은 독재자가 떠나기를 원한다! 탈라는 북아프리카의 스탈린그라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영웅적인 저항 끝에 1월 9일 탈라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1월 11일 수도 튀니스의 빈곤층들이 몰려 사는 타다몬 지구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미국 대사는 “사회적 봉기가 실제 혁명으로, 다른 말로 하면, 이 체제에 진정한 위험으로 변하기 전에 소모된 독재자를 포기하고 그의 후계자를 조직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1월 14일 소모된 독재자 벤 알 리가 떠난 다음, 군부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들은 재야 세력을 약간 포함한 임시정부를 내세워 새 헌법과 선거 등의 일정을 연기하며 민중의 요구에 저항하였지만 집권당인 RCD의 해체와 학살책임자의 처벌요구는 피할 수 없었다. 낡은 세력과 민중의 끊임없는 긴장과 충돌 속에서 2011년 10월 온건 이슬람세력인 알-나흐다당이 40%의 득표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이 벤 알리를 축출하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29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고, 1월 18일에는 세 사람이 분신하였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은 ‘경찰의 날’인 1월 25일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호소하였고, 며칠도 안 되어 9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1월 25일은 ‘분노의 날’로 명명되었다. 수백 명이 경찰의 총질에 학살당하면서도 금요일마다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이는 시민들의 대오는 10만, 20만,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2월 11일 미국과 군부는 소모된 독재자 무바라크를 퇴진시키고 탄타위가 수장이 된 군사최고위원회SCAF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무바라크 체제란 한마디로 군부에 기반한 독재이고 여기에 특권층이 기생하는 반민중적 체제였다. 건설업, 방직업, 숙박업까지 국가경제의 40-50%를 운영하는 군부는 이스라엘과 평화공존정책이란 미명하에 이스라엘이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를 유린할 수 있게 만들어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12억 달러의 군사지원을 받는 친제국주의 세력의 온상이었다. 즉 무바라크 체제는 반민중적인 친미 친제 군부독재 국가였던 것이다.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라고 비난받았던 SCAF는 민중의 열망을 짓밟고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다. 그리고 2011년 말 총선에선 혁명의 과정에서 온갖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인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평화정의당(FJP)이 48%, 살라피주의(이슬람 근본주의)의 알 누르 당이 28%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군부와 친 무바라크 보수세력이 온존하고 있는 사법부 그리고 야당(친무바라크 세력, 자유주의 세력, 콥틱 기독교 세력 등)과 타협하여 헌법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이슬람주의 세력이 타협을 깨고 이슬람근본주의를 관철하려 하자 2012년 4월 사법부가 헌법위원회를 해산하였다. 2012년 6월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슬람주의자들은 새로운 헌법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2012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반 무르시 투쟁 혹은 이슬람 헌법 반대 투쟁은 12월 22일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찬성 63.96%로 새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투쟁에 고무되어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그동안 임시정부를 자임해 왔던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2011년 2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와 민중 세력의 성장을 두려워 한 리비아의 낡은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기 위해 NTC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자임하고, 전 국민의 반독재 항전을 정부군과 반군이 오직 무장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성격을 바꾸고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을 주도하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세속적이고 친제 친자본 신자유주의자이고 NTC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 동맹NFA:National Forces Alliance은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참으로 다양한 세력과 연합하여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항쟁의 성격:
민중항쟁인 튀니지, 시민항쟁인 이집트, 국민항쟁인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시리아도 포함하여)는 모두 세속적인 후견독재국가이면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체제에 편입되어 노동과 후견(복지)을 공격하였다. (페르시아만의 왕족독재국가도 세속주의에 대립되는 이슬람근본주의 국가라는 점을 제외한 후견독재국가인 점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체제에 편입되어 제국주의와 자본가계급을 위하여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공격하는 점은 똑같다.) 이들 국가들은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노동자계급과 운동의 수준들이 상이했고, 똑같은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독재이면서도 억압의 정도도 달랐다. 이러한 차이가 혁명과 혁명 이후의 양상에 차이를 가져왔다.

경찰의 소총에 맞서 화염병으로 저항하면서 격렬한 폭동으로 발전한 튀니지나, 투석전은 있었지만 비무장 시민들의 광범위한 거리진출로 독재자를 축출한 이집트와는 달리 유독 리비아만이 항쟁의 초기부터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것은 튀니지와 이집트에는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운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있었던 반면 리비아는 사소한 저항조차도 용납하지 않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 편승하여 관광과 저임금에 기반한 가공수출에 의존했던 튀니지는 공황의 타격이 컸고 특히 낙후된 내륙지방의 고통은 심각했다. 도시빈민계층이 대부분인 학생과 청년들 그리고 교사노조를 비롯한 전투적인 지역노조가 항쟁의 주력이었고 여기에 변호사협회 등 시민운동이 결합하였다. 이점에서 튀니지는 전형적인 민중항쟁이고 소모된 독재자뿐만 아니라 집권당과 학살주범, 부패관료와 부패자본가를 처벌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군부가 국가자본주의를 주도해왔던 이집트는 튀니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인정하는 유일노조체제였고, 항쟁 속에서 성장한 자주적 노총은 아직도 법외노조이고 탄압을 받고 있다. 이집트의 투쟁은 반독재투쟁 속에서 성장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에 섰고 성과 연령에 차이 없이 광범위한 시민이 결합하였고 그만큼 평화적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총파업이 있기는 하였으나 반무바라크 투쟁에 결합하였다기보다는 처우개선 투쟁의 성격이 강하였다(2011년 항쟁 때 일어난 총 250여건의 노동자 투쟁 중 오직 2건만이 항쟁-정치투쟁-에 직접 결합되어 있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즉 이집트는 한국의 촛불항쟁처럼 노동자계급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시민항쟁의 성격이 강하고, 그만큼 항쟁 후에 성립된 체제에 대하여 민중운동의 개입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던 리비아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양하였고, 항쟁이 초반부터 내전으로 발전하자 계급적이거나 민중적인 성격보다는 반카다피, 반 자마히리야라는 전국민적 항쟁의 성격을 가졌고, 지역과 부족 그리고 종교에 기반하여 조직된 반군의 성격은 구체제와 국가 자체가 분해되자 시민사회와 계급세력의 성장을 막는 봉건적 질서인 지역과 부족과 이슬람근본주의의 복귀를 가져왔다.

항쟁의 결산 :
세속독재를 대체한 이슬람 독재


독재권력의 축출 이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친서방 즉 제국주의의 파트너로서 온건 이슬람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점인데, 그들은 반미 반제를 내걸고 싸우는 알카에다와 같은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의 대항마이기도 하다. 이집트에서는 군부와 제국주의의 이해를 존중하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정당이 74%(498석 중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235석, 알-누르당이 123석, 알-와사트당이 10석)의 지지를 얻었다. 튀니지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의 알-나흐다당이 217석 중 89석으로 41%의 지지를 얻은 반면, 리비아에서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참으로 다양한 세력과 연합한 친제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온건 이슬람인 무슬림형제단이 제2당이 되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국가와 헌법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콥트교와 같은 소수 종파만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을 심각히 유린하고, 시민적 자유와 노동자계급의 운동에 부정적인 봉건적이고 반동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세속독재하에서 탄압을 받았고 그 위신을 이용하여 항쟁 후에 지배계급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세속독재를 종식시킨 혁명 후의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아니다.

UGTT 등 노동자계급이 적극 결합하여 가장 민중적인 항쟁이 진행되었던 튀니지는 벤 알리 축출 후 군부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의 책동에 맞서 RCD를 해체시키고 학살 주범과 부패 관료와 인사들을 처벌하였고, 구세력들이 위신을 잃은 공간에서 튀니지의 무슬림형제단이자 온건 이슬람 세력인 알-나흐다 당이 권력을 잡았다. 현재 튀니지는 온건 이슬람인 알-나흐다 당이 이슬람근본주의세력인 살라피스트와 연합하여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결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친제 세속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RCD의 잔당들 역시 자유주의세력과 연합하여 권력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고, 여기에 소수파인 ‘대중전선’ 또한 한축으로 개입하고 있다. 대중전선은 대부분 좌파로 이루어진 12개 정파가 모인 반이슬람 반신자유주의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알카에다와 같은 전투적 이슬람 세력 역시 사회적 불만과 혼란 속에서 자파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와 군부는 자파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거시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실업과 빈곤과 같은 당면한 경제난을 벗어나는 데에는 서방자본의 대출과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이해는 조금도 침해되지 않고 관철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리비아는 카다피를 이탈한 친제 친신자유주의 세력이 부족세력과 온건 이슬람세력 등 낡은 지배계급과 연합하여, 제국주의와 자본의 이해를 전혀 해치지 않을 또 다른 온건 이슬람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 권력을 다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점차 소외되고 지역과 부족 그리고 종교에 기반한 반군의 무장 또한 점차 해제되거나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되면서 지하디(전투적 이슬람) 세력을 고립시켜 갈 것이다.

이처럼 이들 나라에서 진행되고 수립되고 있는 새로운 질서는 전투적 이슬람을 배제하기 위해 온건 이슬람을 새로운 동맹세력으로 편입한 제국주의의 구상과 맞닿아 있다. 나라마다 민중들에게 주어진 과제의 선후는 다르겠지만, 이들 나라에서 친 신자유주의 세속적 후견독재를 대체하고 수립된 질서는 친제, 친자본, 친신자유주의 반민중적 이슬람 독재이다. 즉 세계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가 강요하였던 낡은 질서는 여전히 아랍민중의 해방을 억제하는 족쇄로 작동하고 있다. 다만 그 억압을 수행할 세력의 세속적 성격이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이슬람근본주의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을 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항쟁 속에서 성장한 민중의 요구를 더욱 강하게 억압하기 위해 더욱 반동적인 이슬람독재로의 성립과 강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지난한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현 시기 이들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헌법 강요 책동의 본질은 단지 반동적인 종교적 신념에 의해 추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반민중적 반노동적 질서를 만들어내어야만 하는 필연성 때문에도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랍민중의 과제는 낡은 질서(군부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이슬람세력과 낡은 질서에 대한 도전을 품지 않으면서 오직 권력만을 다투는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세력이 대립하는 전선이 아니라, 친제, 친자본, 친 신자유주의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전선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마치 한국의 지난 대선처럼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대립만이 전면화될 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삶과 투쟁은 고립되고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대중의 분노와 불만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폭발력도 강하고 항쟁과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전투적이고 민중적인 세력이 투쟁을 통하여 대중적인 위신을 쌓고 있지 않는 한, 그 투쟁의 성과는 항상 낡은 지배계급에게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또 다른 비민중적 세력에게 도둑질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랍혁명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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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년 내부 투쟁 역학관계- 무슬림과군부.

 

무바라크 축출이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2) 이집트 민중의 염원과 무슬림 형제단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게는 아로미라는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무지개 연못의 독재자 메기의 하수인이었던 아로미의 아빠 투투는 메기의 명령에 못 이겨 딸을 갖다 바친다. 그 사실을 안 왕눈이가 아로미를 구해오고, 화가 난 메기는 연못의 모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그러자 왕눈이를 비롯한 연못의 개구리들이 똘똘 뭉쳐 메기를 쫓아내게 되고, 마침내 무지개 연못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만화 속 이야기일 뿐,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메기 대신 가재가 나타나 개구리들을 계속 괴롭힐 수도 있고, 독재자에 맞서 함께 싸웠던 황소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들을 따돌리고 연못의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놓으려 할 수도 있다. 독재자는 쫓겨났지만 언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 그래서 그토록 바라던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까지는 한시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의 나날들. 무바라크 독재정권을 30년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린 지 2년이 다 돼가는 오늘의 이집트가 처한 현실이 딱 그렇다.

[출처: 하스나인 카짐(Hasnain Kazim, http://www.spiegel.de/fotostrecke/fotostrecke-64450-12.html)]

살아있는 한 영원히 대통령일 것만 같던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사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지네 엘 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축출될 때까지만 해도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바로 그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식량가격 폭등으로 인해 튀니지보다도 먼저 대규모 정권퇴진 시위가 터져 나왔던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대기번호 1순위라는 관측이 더 우세했다. 그건 무바라크 정권의 횡포가 덜해서가 아니었다. 무바라크가 30년간 쌓아놓은 독재의 철옹성이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독재국가 치고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을까만, 1981년 10월 6일 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암살되면서 권력을 승계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사법, 언론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완전히 친위체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족민주당(NDP)에서는 둘째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가 사실상 후계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최고의 전력을 갖춘 50만 대군은 군 장성 출신인 무바라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면서 정권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하나둘씩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헐값에 알짜 기업을 넘겨받은 자본가들은 무바라크 일가의 든든한 돈줄이 되었으며, 국영 언론들은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는 순간까지도 시위 상황 대신 평화로운 나일강변의 영상을 화면에 내보낼 정도로 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충실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라도 독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민주주의, 인권 따위를 운운하는 반대파들은 보안기관과 경찰을 시켜 깔끔하게(?) 처리하면 그 뿐이었다. 그나마 2005년 선거에서 불법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소속 후보들이 하원 의석의 20%(88석)를 차지하면서 잠깐 화들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쫓겨나기 불과 석 달 전인) 2010년 11월 총선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로 모두 떨어뜨려 버렸으니 그걸로 끝인 것만 같았다.

결정적으로, 무바라크 정부의 뒤에는 미국 정부가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 의회조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던 1979년부터 해마다 평균 20억 달러의 경제, 군사 원조를 제공해왔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지역의 맹주로서 아랍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 대가였다.

그랬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다. 1월 25일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본격화된 지 불과 17일 만에 30년간 드리워져 있던 독재의 장막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극적인 변화가 연출된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가혹한 인권탄압, 권력층의 부정부패, 12%에 달하는 실업률과 30%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 그로 인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 식량가격 급등, 주택난, 열악한 공공서비스 등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에 불을 당긴 직접적인 도화선은 다들 알다시피 튀니지에서의 극적인 정치변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민중항쟁이 튀니지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과 뒤이은 항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집트의 민심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은 여기저기서 울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뚜렷한 파열음을 낸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마치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그들은 독재정권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온 몸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bazonline.ch]

독재의 성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노동운동은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전투적이고 강력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 1957년에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기 시작하면서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노동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유일한 합법 연맹이었던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은 무바라크 측근들의 자리를 보전해주는 이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하의 24개 산별연맹 가운데 22개 연맹의 위원장이 무바라크 정권이 건네준 낙하산을 타고 온 측근들이었으며, 후세인 메가웨르 총연맹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지도자들은 부지런히 조합비와 뇌물을 주머니에 구겨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노동조합마저 자신들의 목소리와 아픔을 외면할 때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 스스로를 조직해서 직접 싸움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와 이집트에서는 파업과 점거농성, 태업 같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4년과 2008년 사이에만 약 1천 9백 여 건의 노동쟁의에 1백 7십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걸 비롯해, 7년간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통틀어 모두 3천여 건의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06년부터 수도 카이로 북쪽 마할라 알-쿠브라 시의 국영 마할라 미스르 방직회사에서 일하던 2만 5천여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은 일체의 파업과 시위를 불법화한 국가비상사태 법 하에서 항상 깨지고 터지기만 하던 전국의 개혁세력들에게 강렬한 희망의 빛이 되었다. 마할라 노동자들은 체포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한 투쟁을 벌인 끝에 정부로부터 15%의 임금인상과 해고시 반드시 노조와 협의한다는, 당시 이집트 현실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따낸 것이다.

이 소식은 민주화와 개혁을 바라던 도시의 중산층 엘리트 청년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자기네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승리를 일궈냈다는 것은, 아무리 두들겨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 같았던 독재정권도 뭉쳐서 싸우면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2008년에 다시 마할라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할 때는 도시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국적인 연대 총파업과 동맹휴업을 제안하는 글들을 부지런히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퍼다 날랐고, 마할라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점점 폭넓고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들어갔다. 그들이 바로 이집트 혁명의 기폭제가 된 1월 25일 시위를 처음 제안하고 주도한 ‘4월6일 청년운동’이었다. 그리고 ‘4월 6일’은 다름 아닌 마할라 노동자들이 3년 전 총파업을 계획한 날이었다.1)


자본가와 서구 정부에게는 어느새 손톱 밑의 가시가 돼버린 무바라크

항쟁을 제안하고 이끌어간 이들이 노동자 투쟁에 영감을 받은 청년운동 세대들이었다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한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겠다”며 끝까지 버티던 무바라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도 노동자들이었다. 무바라크가 물러나기 사흘 전 전국의 운송, 관광, 석유, 의류 노동자들이 일제히 일손을 놓아버렸다. 거기에 호응해 교사, 의사, 변호사, 기술자, 공무원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자본가를 비롯한 이집트의 지배계급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자 막대한 손실이었다.

이집트 현금 수입의 15%를 차지하며 최대 산업으로 자리 잡은 관광 부문만 보더라도, 평소 같으면 성수기인 1월에 백만 명이 넘게 찾던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 호텔과 여행사 사장들 입장에서는 무바라크가 하루를 더 버틸 때마다 고스란히 3억 1천만 달러(한화로 3천 7백억 원)가 공중에서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물류가 막히니까 수출입도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수시로 인터넷과 전화가 끊겨서 금융도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중동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가는 유조선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수에즈 운하의 노동자 6천 여 명이 벌인 선적 지연과 봉쇄 위협은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정부들까지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플랜B'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통치능력을 상실한 무바라크 대통령을 계속 붙들고 있기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2011년 2월 11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이집트의 한 핵심 금융기업 간부의 인터뷰는 당시 재계와 기득권 세력에 팽배했던 그런 정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반정부 정서가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이런 흐름은 정부뿐만 아니라 체제 전체에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시위대의 요구는 아주 분명하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게 한 가지 경로로 향하고 있어요. (향후) 시나리오가 두세 개 있긴 합니다만,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무바라크가 결국 물러날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재계도 거기에 따라 예상 시나리오를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게재된 바로 그 날, 무바라크는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2)

국민들이 원한 건 ‘무바라크 2.0’이 아니라 ‘혁명 2.0’

여기까지, 2년 전 그 때를 다시 되짚어봄으로써 새삼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딱 하나다.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는 ‘무려 30년에 걸친 철권통치’, ‘사실상의 일당독재’, ‘공권력을 동원한 가혹한 탄압’, ‘무바라크 일가가 빼돌린 120억 달러’ 같이 주로 정치적인 비민주성이나 권력자의 추악한 행태에 보도의 초점을 맞춘 바 있다. 만약 경찰과 친정부 깡패들의 폭력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집트의 국민들이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무바라크 개인을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면, 이미 이집트 혁명은 어느 정도 목표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최근에 재심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무바라크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집권 민족민주당은 강제 해산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도 해제되고, 악명 높던 보안기구 요원들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해외를 떠돌던 망명객들이 돌아오고 정치수감자들이 대거 석방됐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간판과 인테리어만 바꿔단 채 옛날과 똑같이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무바라크 2.0’ 식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물론 이마저도 턱없이 기대에 못 미치지만)와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리고 경제적 정의와 평등을 원했다. 간판에서부터 메뉴까지 모든 게 리모델링된 ‘혁명 2.0’ 식당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혁명의 주역이었던 보통의 시민들과 노동자, 청년들에게 혁명 이전과 이후는 아직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의 한가운데에는 크게 두 개의 세력이 버티고 있다. 바로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이 그들이다.

[출처: http://www.stern.de]

국가 안의 국가, 이집트군

이집트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권력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하면서 또 독특하다. 역사적으로 1952년 파루크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도 나세르를 비롯한 자유 장교단 군인들이었고,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과 무바라크 역시도 모두 군 장성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과거 자신이 소속됐던 군부가 언제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은 군에게 독자적인 권력과 각종 특혜, 이권을 안겨주는 대가로 충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무바라크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부 고위직으로 승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 장교들은 50살이 되면 무조건 퇴역하게 한 다음에 정부와 국회, 공기업, 언론사 등에 자리를 줘서 생계를 보장했다. 무바라크 집권 기간 동안 그렇게 사회 곳곳의 각종 요직을 꿰찬 퇴직 장교의 수만 해도 모두 25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또한 정부는 군대가 독자적으로 기업체를 세워 운영하고 각종 이권사업을 벌이는 것도 흔쾌히 인정해줬다. 오늘날 이집트 군은 평면 텔레비전에서부터 냉장고, 자동차, 파스타 등을 만드는 회사를 최소 35개 이상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주유소와 레스토랑, 축구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알짜배기 부동산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군이 소유한 사업체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대부분 징집으로 군대에 들어온 사병들이다. 당연히 월급은 최저임금을 훨씬 밑돈다. 전형적인 저비용 고수익 구조인 것이다.

군이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과 보유자산이 이집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자그마치 최소 15퍼센트에서 최대 40퍼센트에 이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통계 수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이유는, 아무도 군이 보유한 자산이 얼마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부는 국가에서 배정한 국방예산과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이 모두 얼마이고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의회를 비롯한 외부의 감시를 거의 받지 않아도 되도록 군부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해줬다. 국가 안보상의 기밀이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국가의 일정부분을 뚝 떼서 군인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집트 군은 미국 정부로부터 해마다 약 13억 달러 가량의 군사지원도 직접 받아왔다. 여기엔 현금을 비롯해 각종 최신무기도 포함되어 있고, 미제 M1A1 에이브럼 신형 탱크는 아예 이집트에서 생산을 허락받았다. 게다가 인적 교류(?)도 아주 활발하다. 지난 30년간 미 국방부는 해마다 수백 명의 이집트 군 장교들을 자국에 초청해 연수를 시켜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과거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미국이 ‘아메리카 군사학교(School of Americas)’3)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킨 라틴 아메리카의 장교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쿠데타의 주역이 돼 권력을 찬탈하고 각종 납치와 살해, 고문을 진두지휘했던 역사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즉, 미국 연수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집트 군 장교들은 미 국방부나 정재계 인사들과 독자적인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집트 정부와는 별개로 미국 정부와의 논의 창구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2011년 혁명 당시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군 최고 사령관을 비롯한 최고위급 군 장성들은 군인들과 탱크가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십만 명의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수시로 미국 워싱턴을 드나들었던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과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상으로 미뤄볼 때, 이집트가 무바라크 축출 이후 구체제 질서와 과감히 결별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의 역할을 제한하고 경제의 군사화를 해소하며 군을 둘러싼 비밀의 장막을 걷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무바라크가 쫓겨난 뒤 국정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은 탄타위 국방장관을 의장으로 한 군 최고 수뇌부 모임인 최고군사위원회(SCAF)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갑작스런 정권 퇴진과 내각 총사퇴, 헌법 정지, 의회 해산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세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쟁 기간 동안 ‘시위대를 향해 단 한 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국민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항쟁을 이끌고 참여했던 좌파와 자유주의 청년 세력들은 군이 공백기를 틈타 권력을 가로챌지도 모른다는 경계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다행히 2012년 6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군이 애초 약속대로 민간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그런 최악의 예측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이 탄생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은 앞으로 과연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인다.

[출처: http://www.stern.de]

무슬림 형제단, 이슬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라는 게 문제

2012년 5월과 6월, 1차와 결선투표로 나눠서 치러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후보 가운데 당선권에 근접한 후보로는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정당인 자유정의당(FJP) 소속의 모하메드 무르시 이외에 무소속의 압델 모나임 아불 포토우, 좌파 민족주의 존엄당의 함딘 사바히,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아흐메드 샤피크와 역시 외무장관을 거쳐서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한 암르 무사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아흐메드 샤피크나 암르 무사의 당선은 무려 800명이 넘는 고귀한 목숨을 민주화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의 수였다. 둘 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과 인권탄압의 책임의 한 축을 짊어진 독재정권의 잔당들, 즉 '펠룰(felool)'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층은 대체로 아불 포토우와 함딘 사바히를 지지했다. 아불 포토우는 원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수차례 투옥을 거듭하면서도 정치민주화와 노동자들을 위해 꾸준히 헌신해온 이력으로 인해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고, 함딘 사바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상대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길 원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어쨌든 최종 결과는 1차 투표에서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해 51.73%를 득표한 무르시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다(결선 상대인 샤피크는 48.27%를 얻었다).

이런 결과를 두고 이집트 안팎에서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좌파와 자유주의자, 청년세력들은 애초 항쟁에 소극적이었고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무슬림 형제단이 이제 와서 혁명의 과실을 쏙 빼먹었다고 탄식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랍지역을 통틀어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를 거둔 걸 제외하면) 최초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된 상황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무슬림 형제단의 승리가 정말 예상 밖이라거나 그들이 혁명 과정에서 무임승차한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1928년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 집권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조직으로 낙인 찍혀 엄청난 탄압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시골과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하고 자선병원을 운영해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학교를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부가 대부분 기업가, 의사, 변호사, 학자, 기술자 등 중상층 전문직들이었음에도 선거 때만 되면 시골과 빈민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던 것도 그런 오랜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또한 그들을 급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이집트와 무슬림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화해와 단결을 이뤄야 한다는 게 창시자 하산의 가르침이었으며, 그들은 자살공격 같은 방식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9.11 테러에도 반대했고,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을 씌우려 하지도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은 간통혐의자를 돌로 쳐 죽이고 절도범의 손목을 자르는 탈레반이 아니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정권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진짜로 그들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그들이 무바라크 체제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 민주적인 절차를 어기면서 이집트 혁명에 걸었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http://english.ahram.org.eg 화면 캡처]

민중의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흔히 지난 대선을 가리켜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라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선 투표가 치러지기 이틀 전에 최고군사위원회(SCAF)는 1월에 선출된 의회를 해산시키고 선거의 전 과정을 군이 직접 통제했다. 그 덕분에 무바라크 정권 출신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한 ‘정치적 격리법(Political Isolation Law)’에도 불구하고 아흐메드 샤피크 같은 구체제 인물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두는 역시나 무바라크 시절에 임명된 판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헌법재판소(SCC)의 형식적인 법률 판단을 거쳐서 이뤄졌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은 입으로는 최고군사위원회와 사법부의 결정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군과 사법부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고 받아들였다.

내각 구성도 정확히 같은 맥락이었다. 무르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과거 무바라크 정권의 핵심인물이거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관료 출신들이었다. 최고군사위원회 의장이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총리에 임명된 히샴 칸딜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수자원관개부 고위 관료를 거쳐 아프리카 개발은행에서 일했던 신자유주의자였으며, 내무장관 아흐메다 가말 에딘은 항쟁 당시 시위대 탄압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내무차관이었다. 경제팀 역시도 무역산업부 장관에는 중동 최대의 민간자산회사인 시타델 캐피털(Citadel Capital)의 자회사 고주르 식품산업의 CEO 하템 살레, 투자부 장관에는 무바라크 시절 자유무역 및 투자총국 의장이었던 오사마 살레, 재무장관에는 예전 군부가 임명했던 신자유주의자 뭄타즈 알사이드를 각각 선택했다.

이런 인적 구성은 실제 정책으로도 그대로 반영됐다. 무르시가 집권 이후 맨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8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전기, 수도, 석유 같은 공공서비스와 식료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해 현재 11퍼센트인 재정적자를 다음 회계연도까지 8.5퍼센트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보듯이 그러한 조치는 곧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르시 정권의 절차적 반민주성도 헌법 제정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 세계 모든 혁명 과정에서 보면,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국민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헌법은 사회의 소수자도 아우르는 헌법, 시민적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여성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헌법, 민간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는 헌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국민투표를 밀어붙여 통과시킨 헌법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이슬람법(샤리아)의 원리가 모든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헌법 2조가 그대로 유지됐고, “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라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여전히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했으며, “가족을 향한 여성의 의무”라는 문구가 헌법에 직접 명시되는 한편, 군의 예산과 임무는 주로 군인들로 구성될 국방위원회가 알아서 책임지도록 했다.

노동권은 더욱 경우가 심해서, 공장 소유주와 기업 경영진의 이익은 보호하면서도 노동권은 완전히 외면했고 국회의원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 대표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는 조항도 없애 버렸다. 이런 내용을 담은 헌법 초안이 국민들의 의견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며 100명의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22명이 사퇴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집트 혁명은 못된 독재자 한 명을 쫓아내는 데 그친 ‘혁명 1.0’ 버전을 아직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이대로 끝났다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전체적으로 노동계급과 청년, 좌파 세력의 분위기는 혁명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활기와 전투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분위기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작년 11월 22일 무르시 대통령이 자신이 내린 결정은 어떠한 사법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포고령을 선포했을 당시, 불과 닷새 만에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을 다시 차지하고 결국 포고령을 철회시킨 게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사, 지하철 노동자, 국립병원 의사, 마할라 의류노동자들의 파업과 쟁의가 줄을 잇고 있고, 새롭게 생겨난 독립노조총연맹(EFIU)은 이집트노조총연맹(ETUF)의 오랜 독점체제에 균열을 내며 월 200달러 최저임금제와 경영진의 임금이 최저임금의 10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임금상한제 도입을 위해 계속 투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과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2년 전 우리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날, 그때가 바로 본격적인 ‘혁명 2.0’의 시대가 열리는 첫날이 될 것이다.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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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을 중심으로 분석 잘된 글

 

 
카다피 사후 리비아와 리비아 민중의 과제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4) 반봉건적·친제국주의적 질서 극복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다피 체제의 성립과 몰락

1969년 친영 이드리스 왕조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석유기업의 지분을 50%에서 79%로 끌어올렸다. 또한 금융, 보험, 무역 등을 국유화하고, 유휴토지와 이탈리아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촌장들의 토지확장을 금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1970년대에는 고유가 덕분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과 주택에 융자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경제제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소매업을 금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저가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유럽의 아프리카계 반이민정책에도 적극 협력하였고, 서방자본을 적극 끌어 들이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로 편입되었다. 국가의 후견기능이 약화되고 국민 대다수의 빈곤과 광범위한 실업, 정보경찰에 의한 지독한 정치적 억압 등이 전 국민적 항쟁의 배경이었다.

카다피 체제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후 아랍지역에 성립한 전형적인 세속적 후견국가였다. 한편으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인 독재 국가였다.

카다피는 어떠한 정치적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근대적인 관료적 행정체제를 통한 통치보다는 충성파들로 이루어진 혁명위원회와 부족적 질서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정당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다. 단지 시위를 음모하였다는 이유만으로 7년에서 20년의 가혹한 징역으로 억압하는 나라에서 시민들은 사생결단의 투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총을 든 무장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은 전투의 경험이 있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이나 카다피군에서 이탈한 장교들이 중심이 되고 이들은 지역과 부족을 배경으로 결집했다. 시민사회나 계급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리비아에서 동원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역 혹은 지역에 기반한 부족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뿐이었고, 항쟁세력의 이러한 성격은 혁명의 왜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카다피 사후의 진행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항쟁이 리비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카다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카다피 이후 득세할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과 민중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카다피를 이탈한 고위관료, 동부의 부족장, 상층자본가 계급과 명망가들이 모여 임시정부NTC를 자임하였다. 그 배경에 미국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TC는 임시정부를 자임함으로써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 항쟁의 성격을 정부군과 반란군이 무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바꾸고 카다피에게 중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었다. NTC는 이처럼 낡은 지배세력이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제국주의의 이해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NTC의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동맹(NFA: National Forces Alliance)이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알려진 지브릴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카다피 정부에서 경제계획부와 경제발전부의 책임자로써 사유화와 자유화 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NTC에서는 집행위원회의 대표를 맡아 프랑스의 군사개입(공습)을 이끌어 낸 주역이기도 하였다. 그가 이끄는 NFA에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한편 전투적 이슬람주의 조직인 LIFG(Libyan Islamic Fighting Group) 출신의 벨하지가 이끄는 알-와탄당(Homeland Party)은 3.45%의 득표로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리비아 민중의 과제

총체적으로 볼 때 NTC에서 GNC 체제로의 변화는 친제국주의 임시정부세력이 정통성을 획득한 과정이기도 하고, 온건 이슬람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 세력과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연합하면서 국정을 이끌겠지만 그들의 친제국주의적 반민중적 속성은 변함이 없고, 아직도 수만 명의 민병대가 무장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지역적, 부족적, 종교적 질서 한마디로 계급세력의 성장과 분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질서와 세력이 엄존한 현실은 리비아 민중의 과제가 참으로 심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작년 12월 28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약 2천명이 민병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www.france24.com 화면캡처]

이미 튀니지의 알-나흐다당이나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에 대하여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와 친제국주의적 성격과 억압적 성격 때문에 반정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독 리비아에서는 낡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민중의 운동이 건설되지 않고 있다.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의 과제는 먼저 국민적 통합과 국가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경우 특이한 점은 제국주의 군사개입이 지상군의 투입과 잔류로 이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물려있는 미국의 소극적 처지나 대공항을 경과하고 있는 NATO 회원국들의 처지가 지상전 개입이나 잔류를 할 만한 사정이 안 된다는 점, 리비아가 이집트나 이라크처럼 정치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이 아니라는 점, 제국주의와 알카에다와 같은 과격 이슬람에 대한 항전을 저항의 명분으로 삼은 카다피의 전략이나 외세의 개입에 대한 리비아 민중의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리비아의 내전을 수행한 반군은 벵가지의 ‘2월17일 여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과 부족적 기반하에 조직되었다. 심지어 트리폴리 점령도 서부의 진탄 부대(22,000명으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번 선거에서 지브릴을 지원하였다)와 벨하지가 이끄는 중부의 미스라타 부대가 나눠서 점령하였고, 벨하지의 트리폴리 입성에 앞서 봉기를 일으켰던 트리폴리 외곽의 줌마 지역은 지역자치위원회가 독자적인 무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국가가 초월적이고 독점적인 무장력의 장악에 의해 지탱된다고 할 때 리비아는 아직 국가의 형성이 안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법에 앞서 지역과 부족에 기반한 무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나 민중운동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지난 9월 11일 미국 대사와 세 명의 대사관 직원이 죽은 벵가지의 미영사관 습격사건은 여러모로 리비아의 현 상태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었다. 무장을 포기하지 않은 전투적 이슬람세력들로 이루어진 벵가지의 민병대가 미영사관을 습격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우리의 친구를 죽이지 마라”며 민병대의 거점으로 쇄도하였다. 그동안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 특히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직 경찰로 이루어진 민병대가 카다피 세력을 색출한다면서 벌인 약탈 만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NC는 체제내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민병대에 대한 무장해제와 일제검색을 선언하고 민병대 해체에 나서고 있다.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발본할 수는 없겠지만 GNC는 무장력의 국가독점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그동안 지브릴은 카다피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10월 23일 부대’를 만들어 반군과 민병대들을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 혹은 일자리 주선과 보상 등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처럼 민병대의 무장해제와 국군과 경찰로의 편입은 리비아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지만 그 귀결은 반민중적인 권력이 행사하는 국가독점의 억압적 폭력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리비아의 국가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연방주의 책동이 있다. 리비아 항쟁이 동부에서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이 석유수입의 분배에서 소외되고 낙후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이 컸고, 그것은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의 온상으로 작동한 배경이기도 하였다. 항쟁에 앞장섰던 동부의 벵가지, 토브룩, 베르나, 바이다, 아즈다비야에서는 연방주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석유시설이 주로 동부에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지역이기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리비아 전체 민중의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동부의 일부 연방주의 책동은 서부와 남부의 반발만이 아니라 NTC는 물론 새롭게 정통성을 획득한 GNC 역시 동부 주도권이 강하기 때문에 리비아의 통합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지역적인 교란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요소 외에도 리비아에는 막대한 석유수입과 관련한 분배정의 문제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GDP의 70%, 국가예산수입의 90%를 차지하는 석유와 가스 산업이 국영이라는 점이고, 이들 시설은 내전 때에 크게 파괴되지 않고 카다피 시절의 생산고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0위의 확인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14,000불이나 되지만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된다. 즉 국민 모두의 복지와 발전에 써져야 할 석유수입이 무능하고 부패한 상층부에 의해 분배가 왜곡되어 있고, 석유를 비롯한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NTC와 GNC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결탁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는 것 또한 리비아 민중의 과제이다.

이처럼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 민중에게는 지역과 부족과 종교에 기반한 반봉건적 질서와 그와 결탁한 각지의 무장세력 그리고 상층부의 친제국주의 반민중적 질서를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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