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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6
    세속독재에서 이슬람독재로- 아랍3국혁명교훈
    자유인
  2. 2013/01/25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분석 잘된 글
    자유인

세속독재에서 이슬람독재로- 아랍3국혁명교훈

  •  
 

친제국주의 이슬람 반동질서의 수립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5)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확대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민중의 항쟁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즉 아랍의 거의 대부분 국가로 번져 나갔지만, 오직 튀니지, 이집트, 리바아에서만 독재자를 몰아내었고, 예멘은 30년 독재자인 살레가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했을 뿐 변한 게 없고, 바레인은 탱크를 앞세운 사우디의 군사개입으로 짓밟혔고, 시리아에서는 6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아직도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아랍 민중이 저항한 체제는 무엇이었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항쟁 배경:
세속적인 후견독재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한 빈곤과 실업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독재자를 몰아낸 이들 나라들이 페르시아만의 왕족독재국가들과는 달리 모두 세속적인 국가였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국가란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헌법과 법률의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르게 타 종교를 용인하고,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 국가이다(세속주의 국가인 터키는 ‘종교의 원칙은 신을 위한 것이고 국가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2차 대전 후 반식민지 상태에서 친제국주의적인 이슬람 왕정 통치를 대체한 국가로 그 의미에서 자주적인 국가였고, 냉전체제하에서 사회주의체제를 흉내 내어 국가가 의료와 교육 나아가 식료품과 연료, 일자리까지 책임지는 후견적인 국가였고, 주요산업의 국가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다른 한편으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당 독재 혹은 일인 독재 국가였다.

1980년대 이후 이들 나라들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에 편입되면서 국가의 후견기능과 분배정의가 약해지는 가운데, 2008년 세계 대공황으로 식량가격의 폭등과 특히 교육받은 청년세대를 비롯한 높은 실업률이 항쟁의 배경이 되었다.

항쟁의 경과와 양상:
장기간에 걸친 잔악한 독재와 사생결단 항쟁의 폭발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내륙의 낙후한 시디 부지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26세의 부아지지는 6형제를 부양하는 가장이었고,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중학교 때부터 청과물상에서 일했다. 그는 시청 단속반의 뇌물요구를 거부했다가 뺨을 얻어맞고 손수레를 빼앗기자 시청으로 가 온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댕겼다. 2011년 아랍 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교육받은 젊은 실업자(그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후견기능으로 상대적으로 교육비가 쌌기 때문이다), 부패와 가난, 그리고 그 체제를 위지하기 위한 정보경찰을 앞세운 일당 독재! 부아지지의 자살은 이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고, 근처의 상인들과 청년, 학생들이 항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고무탄, 최루가스, 곤봉! 장기간의 독재와 신자유주의가 가한 고통 그리고 체제에 대한 절망은 분노의 폭발을 가져왔다.

시디 부지드의 저항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로 즉각적으로 공유되었지만,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대중은 곧바로 합류하지 않았다. 2011년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식을 전후하여 저항은 시디 부지드 인근의 내륙지방인 카세린과 탈라로 번져갔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쓰던 벤알리는 1월 6일부터 강경진압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물러서면 잔인한 색출과 보복이 따를 것을 안 민중은 생사를 건 저항에 나섰다. 그들은 탈라 시 입구에 “민중은 독재자가 떠나기를 원한다! 탈라는 북아프리카의 스탈린그라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영웅적인 저항 끝에 1월 9일 탈라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1월 11일 수도 튀니스의 빈곤층들이 몰려 사는 타다몬 지구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미국 대사는 “사회적 봉기가 실제 혁명으로, 다른 말로 하면, 이 체제에 진정한 위험으로 변하기 전에 소모된 독재자를 포기하고 그의 후계자를 조직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1월 14일 소모된 독재자 벤 알 리가 떠난 다음, 군부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들은 재야 세력을 약간 포함한 임시정부를 내세워 새 헌법과 선거 등의 일정을 연기하며 민중의 요구에 저항하였지만 집권당인 RCD의 해체와 학살책임자의 처벌요구는 피할 수 없었다. 낡은 세력과 민중의 끊임없는 긴장과 충돌 속에서 2011년 10월 온건 이슬람세력인 알-나흐다당이 40%의 득표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이 벤 알리를 축출하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29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고, 1월 18일에는 세 사람이 분신하였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은 ‘경찰의 날’인 1월 25일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호소하였고, 며칠도 안 되어 9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1월 25일은 ‘분노의 날’로 명명되었다. 수백 명이 경찰의 총질에 학살당하면서도 금요일마다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이는 시민들의 대오는 10만, 20만,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2월 11일 미국과 군부는 소모된 독재자 무바라크를 퇴진시키고 탄타위가 수장이 된 군사최고위원회SCAF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무바라크 체제란 한마디로 군부에 기반한 독재이고 여기에 특권층이 기생하는 반민중적 체제였다. 건설업, 방직업, 숙박업까지 국가경제의 40-50%를 운영하는 군부는 이스라엘과 평화공존정책이란 미명하에 이스라엘이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를 유린할 수 있게 만들어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12억 달러의 군사지원을 받는 친제국주의 세력의 온상이었다. 즉 무바라크 체제는 반민중적인 친미 친제 군부독재 국가였던 것이다.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라고 비난받았던 SCAF는 민중의 열망을 짓밟고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다. 그리고 2011년 말 총선에선 혁명의 과정에서 온갖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인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평화정의당(FJP)이 48%, 살라피주의(이슬람 근본주의)의 알 누르 당이 28%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군부와 친 무바라크 보수세력이 온존하고 있는 사법부 그리고 야당(친무바라크 세력, 자유주의 세력, 콥틱 기독교 세력 등)과 타협하여 헌법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이슬람주의 세력이 타협을 깨고 이슬람근본주의를 관철하려 하자 2012년 4월 사법부가 헌법위원회를 해산하였다. 2012년 6월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슬람주의자들은 새로운 헌법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2012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반 무르시 투쟁 혹은 이슬람 헌법 반대 투쟁은 12월 22일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찬성 63.96%로 새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투쟁에 고무되어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그동안 임시정부를 자임해 왔던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2011년 2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와 민중 세력의 성장을 두려워 한 리비아의 낡은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기 위해 NTC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자임하고, 전 국민의 반독재 항전을 정부군과 반군이 오직 무장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성격을 바꾸고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을 주도하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세속적이고 친제 친자본 신자유주의자이고 NTC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 동맹NFA:National Forces Alliance은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참으로 다양한 세력과 연합하여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항쟁의 성격:
민중항쟁인 튀니지, 시민항쟁인 이집트, 국민항쟁인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시리아도 포함하여)는 모두 세속적인 후견독재국가이면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체제에 편입되어 노동과 후견(복지)을 공격하였다. (페르시아만의 왕족독재국가도 세속주의에 대립되는 이슬람근본주의 국가라는 점을 제외한 후견독재국가인 점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체제에 편입되어 제국주의와 자본가계급을 위하여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공격하는 점은 똑같다.) 이들 국가들은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노동자계급과 운동의 수준들이 상이했고, 똑같은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독재이면서도 억압의 정도도 달랐다. 이러한 차이가 혁명과 혁명 이후의 양상에 차이를 가져왔다.

경찰의 소총에 맞서 화염병으로 저항하면서 격렬한 폭동으로 발전한 튀니지나, 투석전은 있었지만 비무장 시민들의 광범위한 거리진출로 독재자를 축출한 이집트와는 달리 유독 리비아만이 항쟁의 초기부터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것은 튀니지와 이집트에는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운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있었던 반면 리비아는 사소한 저항조차도 용납하지 않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 편승하여 관광과 저임금에 기반한 가공수출에 의존했던 튀니지는 공황의 타격이 컸고 특히 낙후된 내륙지방의 고통은 심각했다. 도시빈민계층이 대부분인 학생과 청년들 그리고 교사노조를 비롯한 전투적인 지역노조가 항쟁의 주력이었고 여기에 변호사협회 등 시민운동이 결합하였다. 이점에서 튀니지는 전형적인 민중항쟁이고 소모된 독재자뿐만 아니라 집권당과 학살주범, 부패관료와 부패자본가를 처벌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군부가 국가자본주의를 주도해왔던 이집트는 튀니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인정하는 유일노조체제였고, 항쟁 속에서 성장한 자주적 노총은 아직도 법외노조이고 탄압을 받고 있다. 이집트의 투쟁은 반독재투쟁 속에서 성장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에 섰고 성과 연령에 차이 없이 광범위한 시민이 결합하였고 그만큼 평화적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총파업이 있기는 하였으나 반무바라크 투쟁에 결합하였다기보다는 처우개선 투쟁의 성격이 강하였다(2011년 항쟁 때 일어난 총 250여건의 노동자 투쟁 중 오직 2건만이 항쟁-정치투쟁-에 직접 결합되어 있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즉 이집트는 한국의 촛불항쟁처럼 노동자계급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시민항쟁의 성격이 강하고, 그만큼 항쟁 후에 성립된 체제에 대하여 민중운동의 개입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던 리비아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양하였고, 항쟁이 초반부터 내전으로 발전하자 계급적이거나 민중적인 성격보다는 반카다피, 반 자마히리야라는 전국민적 항쟁의 성격을 가졌고, 지역과 부족 그리고 종교에 기반하여 조직된 반군의 성격은 구체제와 국가 자체가 분해되자 시민사회와 계급세력의 성장을 막는 봉건적 질서인 지역과 부족과 이슬람근본주의의 복귀를 가져왔다.

항쟁의 결산 :
세속독재를 대체한 이슬람 독재


독재권력의 축출 이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친서방 즉 제국주의의 파트너로서 온건 이슬람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점인데, 그들은 반미 반제를 내걸고 싸우는 알카에다와 같은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의 대항마이기도 하다. 이집트에서는 군부와 제국주의의 이해를 존중하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정당이 74%(498석 중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235석, 알-누르당이 123석, 알-와사트당이 10석)의 지지를 얻었다. 튀니지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의 알-나흐다당이 217석 중 89석으로 41%의 지지를 얻은 반면, 리비아에서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참으로 다양한 세력과 연합한 친제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온건 이슬람인 무슬림형제단이 제2당이 되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국가와 헌법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콥트교와 같은 소수 종파만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을 심각히 유린하고, 시민적 자유와 노동자계급의 운동에 부정적인 봉건적이고 반동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세속독재하에서 탄압을 받았고 그 위신을 이용하여 항쟁 후에 지배계급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세속독재를 종식시킨 혁명 후의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아니다.

UGTT 등 노동자계급이 적극 결합하여 가장 민중적인 항쟁이 진행되었던 튀니지는 벤 알리 축출 후 군부를 비롯한 낡은 지배계급의 책동에 맞서 RCD를 해체시키고 학살 주범과 부패 관료와 인사들을 처벌하였고, 구세력들이 위신을 잃은 공간에서 튀니지의 무슬림형제단이자 온건 이슬람 세력인 알-나흐다 당이 권력을 잡았다. 현재 튀니지는 온건 이슬람인 알-나흐다 당이 이슬람근본주의세력인 살라피스트와 연합하여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결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친제 세속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RCD의 잔당들 역시 자유주의세력과 연합하여 권력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고, 여기에 소수파인 ‘대중전선’ 또한 한축으로 개입하고 있다. 대중전선은 대부분 좌파로 이루어진 12개 정파가 모인 반이슬람 반신자유주의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알카에다와 같은 전투적 이슬람 세력 역시 사회적 불만과 혼란 속에서 자파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와 군부는 자파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거시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실업과 빈곤과 같은 당면한 경제난을 벗어나는 데에는 서방자본의 대출과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이해는 조금도 침해되지 않고 관철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리비아는 카다피를 이탈한 친제 친신자유주의 세력이 부족세력과 온건 이슬람세력 등 낡은 지배계급과 연합하여, 제국주의와 자본의 이해를 전혀 해치지 않을 또 다른 온건 이슬람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 권력을 다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점차 소외되고 지역과 부족 그리고 종교에 기반한 반군의 무장 또한 점차 해제되거나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되면서 지하디(전투적 이슬람) 세력을 고립시켜 갈 것이다.

이처럼 이들 나라에서 진행되고 수립되고 있는 새로운 질서는 전투적 이슬람을 배제하기 위해 온건 이슬람을 새로운 동맹세력으로 편입한 제국주의의 구상과 맞닿아 있다. 나라마다 민중들에게 주어진 과제의 선후는 다르겠지만, 이들 나라에서 친 신자유주의 세속적 후견독재를 대체하고 수립된 질서는 친제, 친자본, 친신자유주의 반민중적 이슬람 독재이다. 즉 세계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가 강요하였던 낡은 질서는 여전히 아랍민중의 해방을 억제하는 족쇄로 작동하고 있다. 다만 그 억압을 수행할 세력의 세속적 성격이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이슬람근본주의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을 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항쟁 속에서 성장한 민중의 요구를 더욱 강하게 억압하기 위해 더욱 반동적인 이슬람독재로의 성립과 강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지난한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현 시기 이들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헌법 강요 책동의 본질은 단지 반동적인 종교적 신념에 의해 추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반민중적 반노동적 질서를 만들어내어야만 하는 필연성 때문에도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랍민중의 과제는 낡은 질서(군부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이슬람세력과 낡은 질서에 대한 도전을 품지 않으면서 오직 권력만을 다투는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세력이 대립하는 전선이 아니라, 친제, 친자본, 친 신자유주의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전선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마치 한국의 지난 대선처럼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대립만이 전면화될 때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삶과 투쟁은 고립되고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대중의 분노와 불만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폭발력도 강하고 항쟁과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전투적이고 민중적인 세력이 투쟁을 통하여 대중적인 위신을 쌓고 있지 않는 한, 그 투쟁의 성과는 항상 낡은 지배계급에게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또 다른 비민중적 세력에게 도둑질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랍혁명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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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을 중심으로 분석 잘된 글

 

 
카다피 사후 리비아와 리비아 민중의 과제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4) 반봉건적·친제국주의적 질서 극복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다피 체제의 성립과 몰락

1969년 친영 이드리스 왕조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석유기업의 지분을 50%에서 79%로 끌어올렸다. 또한 금융, 보험, 무역 등을 국유화하고, 유휴토지와 이탈리아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촌장들의 토지확장을 금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1970년대에는 고유가 덕분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과 주택에 융자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경제제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소매업을 금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저가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유럽의 아프리카계 반이민정책에도 적극 협력하였고, 서방자본을 적극 끌어 들이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로 편입되었다. 국가의 후견기능이 약화되고 국민 대다수의 빈곤과 광범위한 실업, 정보경찰에 의한 지독한 정치적 억압 등이 전 국민적 항쟁의 배경이었다.

카다피 체제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후 아랍지역에 성립한 전형적인 세속적 후견국가였다. 한편으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인 독재 국가였다.

카다피는 어떠한 정치적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근대적인 관료적 행정체제를 통한 통치보다는 충성파들로 이루어진 혁명위원회와 부족적 질서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정당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다. 단지 시위를 음모하였다는 이유만으로 7년에서 20년의 가혹한 징역으로 억압하는 나라에서 시민들은 사생결단의 투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총을 든 무장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은 전투의 경험이 있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이나 카다피군에서 이탈한 장교들이 중심이 되고 이들은 지역과 부족을 배경으로 결집했다. 시민사회나 계급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리비아에서 동원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역 혹은 지역에 기반한 부족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뿐이었고, 항쟁세력의 이러한 성격은 혁명의 왜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카다피 사후의 진행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항쟁이 리비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카다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카다피 이후 득세할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과 민중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카다피를 이탈한 고위관료, 동부의 부족장, 상층자본가 계급과 명망가들이 모여 임시정부NTC를 자임하였다. 그 배경에 미국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TC는 임시정부를 자임함으로써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 항쟁의 성격을 정부군과 반란군이 무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바꾸고 카다피에게 중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었다. NTC는 이처럼 낡은 지배세력이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제국주의의 이해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NTC의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동맹(NFA: National Forces Alliance)이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알려진 지브릴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카다피 정부에서 경제계획부와 경제발전부의 책임자로써 사유화와 자유화 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NTC에서는 집행위원회의 대표를 맡아 프랑스의 군사개입(공습)을 이끌어 낸 주역이기도 하였다. 그가 이끄는 NFA에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한편 전투적 이슬람주의 조직인 LIFG(Libyan Islamic Fighting Group) 출신의 벨하지가 이끄는 알-와탄당(Homeland Party)은 3.45%의 득표로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리비아 민중의 과제

총체적으로 볼 때 NTC에서 GNC 체제로의 변화는 친제국주의 임시정부세력이 정통성을 획득한 과정이기도 하고, 온건 이슬람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 세력과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연합하면서 국정을 이끌겠지만 그들의 친제국주의적 반민중적 속성은 변함이 없고, 아직도 수만 명의 민병대가 무장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지역적, 부족적, 종교적 질서 한마디로 계급세력의 성장과 분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질서와 세력이 엄존한 현실은 리비아 민중의 과제가 참으로 심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작년 12월 28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약 2천명이 민병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www.france24.com 화면캡처]

이미 튀니지의 알-나흐다당이나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에 대하여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와 친제국주의적 성격과 억압적 성격 때문에 반정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독 리비아에서는 낡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민중의 운동이 건설되지 않고 있다.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의 과제는 먼저 국민적 통합과 국가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경우 특이한 점은 제국주의 군사개입이 지상군의 투입과 잔류로 이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물려있는 미국의 소극적 처지나 대공항을 경과하고 있는 NATO 회원국들의 처지가 지상전 개입이나 잔류를 할 만한 사정이 안 된다는 점, 리비아가 이집트나 이라크처럼 정치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이 아니라는 점, 제국주의와 알카에다와 같은 과격 이슬람에 대한 항전을 저항의 명분으로 삼은 카다피의 전략이나 외세의 개입에 대한 리비아 민중의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리비아의 내전을 수행한 반군은 벵가지의 ‘2월17일 여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과 부족적 기반하에 조직되었다. 심지어 트리폴리 점령도 서부의 진탄 부대(22,000명으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번 선거에서 지브릴을 지원하였다)와 벨하지가 이끄는 중부의 미스라타 부대가 나눠서 점령하였고, 벨하지의 트리폴리 입성에 앞서 봉기를 일으켰던 트리폴리 외곽의 줌마 지역은 지역자치위원회가 독자적인 무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국가가 초월적이고 독점적인 무장력의 장악에 의해 지탱된다고 할 때 리비아는 아직 국가의 형성이 안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법에 앞서 지역과 부족에 기반한 무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나 민중운동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지난 9월 11일 미국 대사와 세 명의 대사관 직원이 죽은 벵가지의 미영사관 습격사건은 여러모로 리비아의 현 상태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었다. 무장을 포기하지 않은 전투적 이슬람세력들로 이루어진 벵가지의 민병대가 미영사관을 습격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우리의 친구를 죽이지 마라”며 민병대의 거점으로 쇄도하였다. 그동안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 특히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직 경찰로 이루어진 민병대가 카다피 세력을 색출한다면서 벌인 약탈 만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NC는 체제내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민병대에 대한 무장해제와 일제검색을 선언하고 민병대 해체에 나서고 있다.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발본할 수는 없겠지만 GNC는 무장력의 국가독점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그동안 지브릴은 카다피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10월 23일 부대’를 만들어 반군과 민병대들을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 혹은 일자리 주선과 보상 등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처럼 민병대의 무장해제와 국군과 경찰로의 편입은 리비아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지만 그 귀결은 반민중적인 권력이 행사하는 국가독점의 억압적 폭력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리비아의 국가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연방주의 책동이 있다. 리비아 항쟁이 동부에서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이 석유수입의 분배에서 소외되고 낙후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이 컸고, 그것은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의 온상으로 작동한 배경이기도 하였다. 항쟁에 앞장섰던 동부의 벵가지, 토브룩, 베르나, 바이다, 아즈다비야에서는 연방주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석유시설이 주로 동부에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지역이기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리비아 전체 민중의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동부의 일부 연방주의 책동은 서부와 남부의 반발만이 아니라 NTC는 물론 새롭게 정통성을 획득한 GNC 역시 동부 주도권이 강하기 때문에 리비아의 통합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지역적인 교란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요소 외에도 리비아에는 막대한 석유수입과 관련한 분배정의 문제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GDP의 70%, 국가예산수입의 90%를 차지하는 석유와 가스 산업이 국영이라는 점이고, 이들 시설은 내전 때에 크게 파괴되지 않고 카다피 시절의 생산고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0위의 확인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14,000불이나 되지만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된다. 즉 국민 모두의 복지와 발전에 써져야 할 석유수입이 무능하고 부패한 상층부에 의해 분배가 왜곡되어 있고, 석유를 비롯한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NTC와 GNC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결탁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는 것 또한 리비아 민중의 과제이다.

이처럼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 민중에게는 지역과 부족과 종교에 기반한 반봉건적 질서와 그와 결탁한 각지의 무장세력 그리고 상층부의 친제국주의 반민중적 질서를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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