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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국회전- 국정조사 기싸움 맛불 장면

 

“약속했던 쌍용차 국정조사 차질없이 진행돼야”

찬반 논란...“국정조사야말로 쌍용차 제대로 사는 길”

 

여야가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개최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가 쌍용차 국정조사 반대운동에 나서자 정치권, 전국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회단체 등이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가 주장하는 쌍용차 국정조사 반대는 여당 및 야당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저급한 정치 공세며, 약속됐던 국정조사는 차질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쌍용차 사측, 기업노조, 평택시민단체협의회, 평택시 국회의원, 경기도 등 노·사·민·정 대표로 구성된 쌍용차 정상화추진위는 지난 17일 발족 이후 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조사 반대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 후 새누리당 이한구, 민주통합당 박기춘 원내대표에게 국정조사 반대 청원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쌍용차 정상화추진위원회는 “경영 정상화에 매진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국정조사를 반대했다. 김규한 쌍용차노조위원장은 “2009년 구조조정 이후 노사와 전 임직원, 협력사, 판매대리점과 모든 가족들이 뼈를 깎는 고통분담과 헌신적 노력으로 정상화 기반을 다져왔다”면서 “그런데 일부 노동단체와 외부세력이 사회적 이슈를 통해 쌍용차 국정조사 논란을 벌이는 것은 회사 정상화와는 다분히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대주주인 마힌드라 그룹이 투자약속을 지키고자 이사회에서 투자승인을 기다리는 시점인데 이런 논란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서 “국정조사가 이뤄지면 기업 이미지 훼손과 독립경영 및 판매에 악영향을 가져오고 노동조건도 하락한다. 노사와 협력사 등 11만 명의 일자리와 지역경제 안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추진위는 국회가 국정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과 함께 마힌드라 그룹을 방문, 투자를 확실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오자고 제안했다. 또, 쌍용차 사태와 같은 노동자 대량해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가 관련 법안을 개정해 ‘외국자본 먹튀 방지법’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조사 개최가 쌍용차 경영정상화와 거리가 멀다는 추진위의 의견은 그 자체로 논란거리여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야가 국정조사 개최에 합의했고, 박근혜 당선인이 후보시절 국정조사 개최 입장을 전했기 때문이다.

쌍용차범대위, 쌍용차지부와 민주통합당 은수미,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이었던 쌍용차 국정조사를 내팽개치려고 하고 있다”며 “또다시 쌍용차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는 국정조사 방해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쌍용차 문제는 사안의 심각성과 파장의 역동성을 따져봤을 때 개별기업의 문제일 수 없다”며 “국정조사는 추진위가 말하는 ‘기업 이미지 훼손’과 ‘판매 악영향’ ‘노동조건 하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지난 갈등과 반목을 정리해 쌍용차를 진정으로 정상화 궤도에 올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출처 : 쌍용차지부]

심상정 의원은 “국정조사 실시 가능성이 높아지자 사측이 대주주 마힌드라 자금을 포함, 9,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역시 국회의 지속적인 검증을 받아야 책임 있는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며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국정조사 약속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이한구 원내대표는 국정조사 반대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단은 “지난해 청문회에서 일부 드러난 기획부도와 그 배경, 상하이차의 기술유출과 먹튀 논란, 전대미문의 회계조작, 불법 정리해고, 공권력의 살인 진압, 24명의 희생자 대책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라며 “수많은 의혹을 끌어안고 경영을 정상화하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정조사 반대 서명을 하청업체 할당을 통해 강행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이런 행위는 수년간 고통을 받아온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아니며 저급하고 비열한 모리배들이나 감히 상상할 수 있는 행위이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오는 3월 복귀가 예정된 무급휴직자를 대상으로 사측이 임금 청구 소송 포기를 확약서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확약서를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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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당의 농성마무리 - 진심

 정의당, 쌍용차 국조 요구 국회 농성 마무리

심상정, “24일 임시국회 무산, 새누리당 반대가 걸림돌”

 

 

새누리당이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를 반대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24일로 잠정 합의한 1월 임시국회가 결국 열리지 못하자, 진보정의당이 쌍용차 국정조사 국회 농성을 잠정 마무리하고 국정조사를 재차 촉구했다.


정의당 의원단은 이날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장 앞(로텐더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시국회 무산은 전적으로 새누리당과 이한구 원내대표의 책임”이라며 “쌍용차 국정조사가 제외된 임시국회가 열리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냈지만, 국회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하게 만든 새누리당은 국민의 비난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의원단은 “진정한 쌍용차 정상화의 핵심은 정리해고자 159명의 전원 복직”이라며 “쌍용차에 대한 책임 있는 신규투자가 이뤄지고 신기술 개발이 시작될 수 있도록 점검하는 일 역시 여야 정치권 모두가 해야 할 책무”라고 지적했다.

심상정 의원(노동자살리기특위 위원장)은 “새누리당은 임시국회에 쌍용차 국정조사가 걸림돌이 됐다고 발표했는데, 말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며 “여야가 약속했던 국정조사 실시를 새누리당이 반대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반대가 걸림돌이 돼서 오늘 임시국회가 무산됐다”고 반박했다.

심 의원은 “이제는 황우여 당 대표가 책임 있게 나서야한다”며 “황우여 대표가 12월 31일 국민들에게 당을 대표해서 책임 있게 약속한 바가 있다. 황우여 대표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원석 원내수석대표는 “1월 26일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다시 한 번 조직해 울산 현대차와 평택 쌍용차, 그리고 부산 한진중공업에 다시 한 번 찾아간다”며 “진보정의당은 의원단과 당 전체가 희망버스에 동참해 평택 쌍용차 고공농성장을 찾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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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 비정규문제 개괄

 쌍용자동차 1,500명 비정규직 노동자 잔혹사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68)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이야기①

 

  평택역 앞 천막농성장

평택역 앞을 오고가는 시민들과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국정조사의 필요성과 쌍용차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일, 때로는 길이나 교통편을 묻는 시민들에게 안내를 하는 일도 서맹섭 씨가 하고 있는 일이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투쟁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거나 송전탑 농성장에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 시민단체와 지역 민주노총과 소통하고 조직해서 대응하는 것도 그가 하고 있는 일중 하나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86일 굴뚝농성의 주인공이기도 한 서맹섭 씨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비대위원 활동도 하고 있다. 서맹섭 씨는 인터뷰 전에 다음날 아침 선전전 때 사용할 유인물을 복사해갖고 왔다고 했다. 다음날인 21일 오전에는 평택역을 포함한 수도권 주요 전철역에서 쌍용차 사측과 기업노조(위원장 김규한)가 국정조사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하여 이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서맹섭 지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의 쌍용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생계활동을 하고 있는 4명의 조합원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조합원이 있다.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는 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이 1월 20일 현재 62일째 문기주·한상균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송전탑 밑에서는 비정규직지회 한윤수 사무국장이 고공농성 조합원들을 지원하며 투쟁하고 있고, 서울 대한문에는 유제선 조직부장이 분향소를 지키면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지만, 이들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 큰 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함께 하면서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어도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당시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된 노동자 숫자가 정규직 2,646명이 아니라 비정규직 350명을 포함한 3천명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왼쪽 문은 정규직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서맹섭 씨는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돕다가 농고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와 배추를 심고, 소를 키우고, 트랙터와 경운기를 몰았다.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후에는 경찰관의 꿈을 키우며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제대 후에 3번 도전했다가 떨어지자 2000년 쌍용자동차에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입사한 곳이 평택 쌍용자동차 하청업체였다. 1년 근무하고, 평택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역시 친구들의 권유로 다시 쌍용차 하청업체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하청업체인 동산기업으로 들어왔다가 2005년에 영일기업으로 옮긴 후에 2009년 5월 해고될 때까지 그곳 소속으로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입사 할 때 쓴 이후 거의 쓴 기억이 없다. 업체가 바뀌어도 근속과 고용은 자동승계 되었다.

차체2팀에 들어간 서맹섭 씨는 CO2 용접이나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 작업), 도아와 휀다(펜더) 조립 등의 일을 했다. 서맹섭 씨는 입사 초기 무소 생산을 잠깐 하다가 근무기간 내내 거의 로디우스 만드는 부서에 있었다. 서씨와 직장이 가장 먼저 그 일을 배웠고, 나중에 온 정규직들에게 서씨가 일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서씨는 10명 내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된 차체2팀 로디우스 3직에서 근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직 안에서 일을 같이 배우고, 로테이션하면서 근무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되어 1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도아 좌우를 나누어서 볼트작업 등을 했다. 왼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이 달기도 했다. 다만, 용접 일은 옷에 구멍이 난다는 이유로 정규직들이 기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비정규직이 했다.

2005년 노동부 ‘사내 하도급 업체 특별 지도점검’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12개 하청업체 중에 동산기업과 영일기업 등 4개 공정 44명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이 났고, 2006년 각각 벌금 백만 원 씩 약식명령 청구가 진행되었다. 당시, 서맹섭 씨가 있던 쌍용차 불법파견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부 조사를 받기도 했었다.

“평택에서 제일 큰 대공장이니까 아무래도 임금이나 복지 면에서 다른 데보다 좋을 거라 생각했었죠. 실질적으로 해보니까 정 반대였어요. 한번 몸 닿으니까 딴 데 가서 일하는 게 만만치가 않아서 그냥 견뎌본 건데. 임금은 적어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했지.”

대통령상 받은 최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을 꿈꾸다

서맹섭 씨는 7년 동안 월차를 두 개밖에 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웃도는 금액이었다. 입사 초기 주야 2교대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아본 임금이 170만원이었다. 상여금 600%를 12개월로 나눈 금액을 포함해서 나온 금액이었는데, 2007년 물량 감소로 주간 작업만 하게 되면서 세금을 떼고 110~120만 원 정도 받았다. 비정규직의 경우 호봉제가 있긴 하지만, 호봉 간 차이가 시급 25원(1일 8시간 200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임금 차이에 영향력이 거의 없다. 5년 다닌 사람이나 10년 다닌 사람이나 임금 차이가 거의 없는 셈이다. 늦게 입사한 사람이 잔업 특근을 많이 하면 오래 다닌 사람보다 임금이 많아지기도 한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2005년에 정규직 노동자들하고 같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비용 절감 사례를 발표하는 대회였는데, 쌍용차 생산과장이 파워포인트를 띄워주고 저랑 직장이 그거 보면서 발표를 했어요.”

서맹섭 씨는 2005년 9월, ‘전국품질분임조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경험도 있다. 상패는 정규직 직장이 받고, 메달은 서맹섭 씨가 받았다. 같이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정규직들은 2호봉 승급에 특근이 달리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회식 한번이 다였다. 하지만, 수상으로 플러스된 고과점수 덕분에 정규직을 뽑으면 일순위로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꿈을 안고 그는 5년 동안 열심히 일만 했다. 2009년 굴뚝농성 재판이 굴뚝에 지붕이 없어 주거침입죄 성립이 안 되면서 2심까지 무죄선고를 받았는데, 그게 그 상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서맹섭 씨가 웃는다. 경찰조사 받을 때 상 받은 거 있냐고 묻길래 노무현 대통령상 받았다고 대답했었단다.

5년 동안 천오백 명 비정규직 해고와 비정규직 노조 설립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서맹섭 씨는 정규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5월 해고가 되었다. 서씨는 ‘잘 하면 해고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쌍용차에서 10년 가까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못해도 해고되고 잘해도 해고가 되니 중간만 가야 된다’는 그거 하나 배웠단다.

서지회장이 입사할 당시, 쌍용차에는 1,7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었다. 5년 동안 1,500명의 노동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강제해고로 쫓겨났다. 2004년도에 5백 명, 2006년에 5백 명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2008년에 정규직 노동조합의 전환배치 합의로 인해 3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쫓겨났다. 그리고 2009년 투쟁이 진행되던 중에 알게 모르게 백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리도 없이 쫓겨났다.

“2008년 8월에 전환배치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비정규직들이 일하던 자리에 정규직들이 와서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때 합의서가 두 번 나왔어요. 한번은 비정규직 희망퇴직을 안 받고 휴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합의서가 바뀌어버린 거야. 위로금 4개월 분 줄 테니까 350명 이거 받고 나가라는 거야.”

2008년 10월 말, 당시 쌍용자동차지부 1기 집행부(지부장 정일권)는 사측과 비정규직 347명에 대한 휴업을 전제로 하는 전환배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비정규직 350명에 대한 희망퇴직으로 사측과 합의 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8년 11월 4일, 쌍용차 정규직 전환배치에 따른 비정규직 희망퇴직 관련 노사합의서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쌍용자동차 사측은 하청업체에 할당을 주어 강제적인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사측은 ‘지금 희망퇴직을 하면 나중에 사람 뽑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등의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다. 지저분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 했던 일을 기피했던 정규직들은 2008년 전환배치 당시, “여기 안가면 잘린다. 잘려나갈래? 아니면 여기 갈래?”하는 상황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들이 하던 힘든 공정에 오게 되고, 비정규직들은 쫓겨난다. 서맹섭 씨가 하던 용접 일도 그가 쫓겨나면서 정규직이 와서 하게 된다.

이렇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 속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2008년 10월 22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참 어렵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동주체 3명이 이름 걸고 띄웠어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정규직이랑 노무팀 반발을 통제하고 엄호해 주면서 많이 도와줬죠. 그래서 무사히 띄울 수가 있었어요.”

  2008년 10월 23일,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설립 보고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전체 64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 150명이 가입을 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강제휴업·희망퇴직·전환배치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을 했지만, 사측은 업체 강제휴업을 했다. 그리고 희망퇴직에 동의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고통보를 하기 시작했다. 서맹섭 지회장은 2009년 5월 해고자가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투쟁

서맹섭 지회장은 그 당시에 정규직들이 한 번 더 휴업을 나가더라도 힘을 합쳐서 전환배치를 막았어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방패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번 밀리니까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치고 들어왔다.

“2008년도에 정규직 전환배치를 막아냈어야 돼. 그게 시발점이 된 거 아닌가. 인건비 싼 비정규직 다 쫓아내니까 그 다음에 쫓아낼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그때 우리가 한참 외쳤던 게 ‘우리 나가면 당신들도 나간다’ 였어요. 정규직도 칼바람 들어온다. 우리 쫓아내면 안 된다. 전환배치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못 막아 버린 거지.”

  2009년 4월, 회사 내에서 중식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출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2008년 12월 초에 한상균 지부장이 당선되자마자 사측은 법정관리 신청을 했고, 그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조합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잠을 자면서 투쟁을 했다. 당시 한상균 지부장 집행부는 일자리나누기(5+5와 3조 2교대)와 비정규직 고용안정기금 12억 노동조합 출연 등 정리해고 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 수 있는 자구책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리해고를 진행하였다. 비정규직지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이 투쟁에 흔쾌히 동참했다.

86일 간의 굴뚝농성과 휴지조각이 된 8.6 합의

2009년 5월 13일, 서맹섭 지회장(당시 부지회장)은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쌍용자동차 내에 있는 굴뚝에 올라가 86일 간의 고공농성을 한다.

“저는 비정규직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굴뚝에 올라간 거에요. 살기 위해서 올라간 거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쫓겨났던 게 얼마나 억울해요. ‘여기 누가 온다니까 너 나가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열심히 일만 했던 사람들인데... 또, 분사를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안 된다는 요구도 했죠.”

  2009년 7월, 86일 간의 고공농성이 진행된 쌍용차 굴뚝

굴뚝에 처음 올라갈 때,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왜 내려왔나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때 야무지게 해결했으면 또 다른 철탑에 올라갔겠나 싶어서다. 헬기소리와 쏟아지는 최루액을 견디며 86일을 버틴 경험이 있는 그는 지금 철탑에 올라가 있는 조합원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고공농성자들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목숨 걸고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굴뚝농성 50일 즈음부터 서 씨는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속이 다 망가졌다. 2009년 8.6합의가 이루어지고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 후에 병원에 입원을 했던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다. 8.6합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9명에 대해 10월 1일자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1일자로 복귀시키겠다며 9월에 비정규직 복직대상자 명단까지 요구했던 사측은 10월에 면접을 보라는 요구를 했다.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면접 과정에서 사측은 “도장반에 들어가서 도장똥 제거하다가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등의 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 결과 연배가 있는 여성노동자들이 큰 상처를 받고 복직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17명이었던 복직 대상자는 8명으로 줄었고, 이 중 생계 나간 조합원을 제외하고 현재 4명의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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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을 중심으로 분석 잘된 글

 

 
카다피 사후 리비아와 리비아 민중의 과제

[북아프리카 혁명 2주년](4) 반봉건적·친제국주의적 질서 극복해야

 

[편집자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을 시작으로 점화된 북아프리카 혁명 발발 후 2년을 경과하고 있다. 튀니지 민중의 목숨 건 투쟁은 급기야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쓰러뜨렸고 이집트인들의 1월 25일 혁명으로 이어져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또한 권좌에서 끌어낸다. 확산된 혁명의 열기는 아랍국에서만 17개국에서 유사한 시위 물결을 낳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신자유주의 독재 정권의 몰락 후 집권한 이슬람주의 세력에 맞선 혁명세력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는 야권의 무장과 서구 개입 아래 내전으로 비화된 후 친서구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된 한편, 시리아에서도 내전으로 격화된 가운데 유혈 충돌에 따른 희생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참극이 계속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예멘에서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에서도 시위와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혁명은 경제위기 등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민중운동의 지속적 투쟁은 북아프리카/중동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세상>은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와 전체 조망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혁명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 진행과정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 투쟁하는 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다피 체제의 성립과 몰락

1969년 친영 이드리스 왕조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석유기업의 지분을 50%에서 79%로 끌어올렸다. 또한 금융, 보험, 무역 등을 국유화하고, 유휴토지와 이탈리아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촌장들의 토지확장을 금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다. 1970년대에는 고유가 덕분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하고, 대학교육과 주택에 융자정책을 폈다. 1981년에는 경제제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소매업을 금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저가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유럽의 아프리카계 반이민정책에도 적극 협력하였고, 서방자본을 적극 끌어 들이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로 편입되었다. 국가의 후견기능이 약화되고 국민 대다수의 빈곤과 광범위한 실업, 정보경찰에 의한 지독한 정치적 억압 등이 전 국민적 항쟁의 배경이었다.

카다피 체제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후 아랍지역에 성립한 전형적인 세속적 후견국가였다. 한편으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정보경찰에 의존하는 장기간에 걸친 일인 독재 국가였다.

카다피는 어떠한 정치적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근대적인 관료적 행정체제를 통한 통치보다는 충성파들로 이루어진 혁명위원회와 부족적 질서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정당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질식당한 상태였다. 단지 시위를 음모하였다는 이유만으로 7년에서 20년의 가혹한 징역으로 억압하는 나라에서 시민들은 사생결단의 투쟁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총을 든 무장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은 전투의 경험이 있는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이나 카다피군에서 이탈한 장교들이 중심이 되고 이들은 지역과 부족을 배경으로 결집했다. 시민사회나 계급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리비아에서 동원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역 혹은 지역에 기반한 부족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뿐이었고, 항쟁세력의 이러한 성격은 혁명의 왜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카다피 사후의 진행

2011년 2월 15일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 혁명은 2011년 10월 카다피가 생포되어 사살됨으로써 42년에 걸친 카다피 체제가 막을 내리고 NTC(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NTC체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확보한 국회GNC(General National Congress) 체제로 이행하였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항쟁이 리비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카다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카다피 이후 득세할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과 민중세력의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카다피를 이탈한 고위관료, 동부의 부족장, 상층자본가 계급과 명망가들이 모여 임시정부NTC를 자임하였다. 그 배경에 미국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NTC는 임시정부를 자임함으로써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 항쟁의 성격을 정부군과 반란군이 무력으로만 대결하는 내전으로 바꾸고 카다피에게 중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었다. NTC는 이처럼 낡은 지배세력이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제국주의의 이해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였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법무장관 출신인 잘릴이 이끌던 NTC 체제는 2012년 7월 7일 치러진 선거로 헌법을 작성할 국회GNC가 성립되자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 선거에서 NTC의 집행위원회의 전 위원장이었던 지브릴이 이끄는 민족전선동맹(NFA: National Forces Alliance)이 48.14%의 지지로 정당 비례 80석 중 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알려진 지브릴은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카다피 정부에서 경제계획부와 경제발전부의 책임자로써 사유화와 자유화 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NTC에서는 집행위원회의 대표를 맡아 프랑스의 군사개입(공습)을 이끌어 낸 주역이기도 하였다. 그가 이끄는 NFA에는 온건 이슬람 세력을 비롯해 부족세력, 자유주의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다. 또한 리비아의 무슬림형제단인 정의건설당이 카타르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21%의 지지로 제2당이 되었다. 한편 전투적 이슬람주의 조직인 LIFG(Libyan Islamic Fighting Group) 출신의 벨하지가 이끄는 알-와탄당(Homeland Party)은 3.45%의 득표로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리비아 민중의 과제

총체적으로 볼 때 NTC에서 GNC 체제로의 변화는 친제국주의 임시정부세력이 정통성을 획득한 과정이기도 하고, 온건 이슬람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자유주의 세력과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연합하면서 국정을 이끌겠지만 그들의 친제국주의적 반민중적 속성은 변함이 없고, 아직도 수만 명의 민병대가 무장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지역적, 부족적, 종교적 질서 한마디로 계급세력의 성장과 분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질서와 세력이 엄존한 현실은 리비아 민중의 과제가 참으로 심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작년 12월 28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약 2천명이 민병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http://www.france24.com 화면캡처]

이미 튀니지의 알-나흐다당이나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에 대하여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와 친제국주의적 성격과 억압적 성격 때문에 반정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독 리비아에서는 낡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민중의 운동이 건설되지 않고 있다.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의 과제는 먼저 국민적 통합과 국가의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경우 특이한 점은 제국주의 군사개입이 지상군의 투입과 잔류로 이어지지 않은 점이다.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물려있는 미국의 소극적 처지나 대공항을 경과하고 있는 NATO 회원국들의 처지가 지상전 개입이나 잔류를 할 만한 사정이 안 된다는 점, 리비아가 이집트나 이라크처럼 정치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이 아니라는 점, 제국주의와 알카에다와 같은 과격 이슬람에 대한 항전을 저항의 명분으로 삼은 카다피의 전략이나 외세의 개입에 대한 리비아 민중의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리비아의 내전을 수행한 반군은 벵가지의 ‘2월17일 여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과 부족적 기반하에 조직되었다. 심지어 트리폴리 점령도 서부의 진탄 부대(22,000명으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번 선거에서 지브릴을 지원하였다)와 벨하지가 이끄는 중부의 미스라타 부대가 나눠서 점령하였고, 벨하지의 트리폴리 입성에 앞서 봉기를 일으켰던 트리폴리 외곽의 줌마 지역은 지역자치위원회가 독자적인 무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국가가 초월적이고 독점적인 무장력의 장악에 의해 지탱된다고 할 때 리비아는 아직 국가의 형성이 안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법에 앞서 지역과 부족에 기반한 무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나 민중운동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지난 9월 11일 미국 대사와 세 명의 대사관 직원이 죽은 벵가지의 미영사관 습격사건은 여러모로 리비아의 현 상태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었다. 무장을 포기하지 않은 전투적 이슬람세력들로 이루어진 벵가지의 민병대가 미영사관을 습격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우리의 친구를 죽이지 마라”며 민병대의 거점으로 쇄도하였다. 그동안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 특히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직 경찰로 이루어진 민병대가 카다피 세력을 색출한다면서 벌인 약탈 만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NC는 체제내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민병대에 대한 무장해제와 일제검색을 선언하고 민병대 해체에 나서고 있다.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발본할 수는 없겠지만 GNC는 무장력의 국가독점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그동안 지브릴은 카다피가 죽은 날을 기념하는 ‘10월 23일 부대’를 만들어 반군과 민병대들을 국군이나 경찰로 편입 혹은 일자리 주선과 보상 등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처럼 민병대의 무장해제와 국군과 경찰로의 편입은 리비아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지만 그 귀결은 반민중적인 권력이 행사하는 국가독점의 억압적 폭력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리비아의 국가통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연방주의 책동이 있다. 리비아 항쟁이 동부에서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이 석유수입의 분배에서 소외되고 낙후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이 컸고, 그것은 전투적 이슬람주의 세력의 온상으로 작동한 배경이기도 하였다. 항쟁에 앞장섰던 동부의 벵가지, 토브룩, 베르나, 바이다, 아즈다비야에서는 연방주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석유시설이 주로 동부에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지역이기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리비아 전체 민중의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동부의 일부 연방주의 책동은 서부와 남부의 반발만이 아니라 NTC는 물론 새롭게 정통성을 획득한 GNC 역시 동부 주도권이 강하기 때문에 리비아의 통합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전투적 이슬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지역적인 교란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요소 외에도 리비아에는 막대한 석유수입과 관련한 분배정의 문제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GDP의 70%, 국가예산수입의 90%를 차지하는 석유와 가스 산업이 국영이라는 점이고, 이들 시설은 내전 때에 크게 파괴되지 않고 카다피 시절의 생산고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10위의 확인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리비아는 국민소득이 14,000불이나 되지만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된다. 즉 국민 모두의 복지와 발전에 써져야 할 석유수입이 무능하고 부패한 상층부에 의해 분배가 왜곡되어 있고, 석유를 비롯한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NTC와 GNC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결탁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는 것 또한 리비아 민중의 과제이다.

이처럼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 민중에게는 지역과 부족과 종교에 기반한 반봉건적 질서와 그와 결탁한 각지의 무장세력 그리고 상층부의 친제국주의 반민중적 질서를 극복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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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새지도부 정치의식 수준

진보신당 부대표 후보 토론회
대표 후보 못지 않은 열띤 논쟁 벌여

 1월 23일, 11:13 AM 

 

진보신당 5기 대표단 선거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5명의 부대표 후보가 22일 오전 11시 서대문에 위치한 <레드북스> 서점에서 칼라TV 녹화방송 토론회를 가졌다.

정현정 사무총장의 사회로 일반명부의 기호1번 정진우, 2번 장석준, 3번 이해림 후보와 여성명부 기호1번 박은지, 2번 이봉화 후보가 참석했다.

이날 토론회에의 공통 주제는 △4기 대표단과 18대 대선 평가 △5기 대표단의 주요 과제 △당 역량 강화와 2014년 지방선거 대응 방안 등 3가지 주제로 진행했다.

* 4기 대표단과 18대 대선 평가
박은지 홍세화 체제 “리더십 부족” vs. 정진우 “우리가 누구인가”
이봉화 “지도부-활동가-당원 따로 노는 사상 최악의 대선”
이해림 “내부혁신 통한 재창당과 대선 치뤘어야”
장석준 “민주연합론과 급진적 선전선동 정치, 모두와 단절해야”

첫 번째 주제 토론인 4기 대표단의 평가와 2012년 제18대 대선에 대한 평가에서 박은지 후보는 “사실 그동안 진보신당은 몇 명의 명망가와 인기 정치인 중심으로 움직였다”며 “홍세화 대표 체제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박 후보는 “당헌당규상의 대표 권한은 굉장히 막강한데, 이 권한이라는 것은 전당적으로 합의할 때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막강한 권한과는 반대로 리더십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8대 대선 평가와 관련해 박 후보는 “김순자 당원의 탈당과 출마는 당론 위배라고 명확히 확인한 바 있다. 또한 당론 위배를 넘어 지도부가 이에 대한 조치를 단호하게 했는지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신당 부대표 후보 토론회(사진=장여진)

이봉화 후보는 대선과 관련해 “지난 대선은 지도부 따로, 활동가 따로, 당원 따로의 진보정치 사상 최악의 선거였다”고 평가했다. 그에 대한 이유로 이 후보는 “홍세화 대표는 훌륭한 분이지만 개인적인 권위에 의존한다는 리더십의 한계를 가졌다. 두번째로 김순자 당원 등의 분파주의 행동이 있다. 마지막으로 당원들과 지지자 및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요구를 포괄하는 방식이 아닌 고립주의적 길로 가면서 실패를 좌초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당시 대표단 입장도 노선적 급진성을 과하게 추구했다”며 “다양한 가치를 포함하는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대중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진보정치가 우리가 추구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해림 후보는 “지난해 총선 패배가 우리당에 있어 당원들과 지도부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라며 “이후 대선까지 우리에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내부 혁신을 통한 재창당을 도모했어야 했고 그 힘으로 대선을 치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순자 당원의 탈당과 출마에 대해 그는 “대선에서 당론으로 결정된 김소연 후보의 지지 방침, 저는 정치적 소신에 따라 김순자 후보를 지지했지만 당에서 두 가지 선택으로 나눠져 안타깝다. 김순자 후보를 지지했던 당원들이 당론 위배라고 한 것은 저도 동의한다”며 하지만 “이런 과정을 당원들과 함께 총의를 모아 이후 어떻게 좌파정당 건설의 밑바탕으로 만들 수 있는지 (논의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밝혔다.

장석준 후보는 “이번 대선으로 드러난 건 진보신당 뿐만 아니라 지금껏 진보라 불렸던 모든 세력의 파탄을 뜻하는 결과라, 성찰도 엄중하고 근본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후보는 “진보정의당이나 통진당은 선거의 득실에 따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결국 민주당과 선거연합했다”며 “그동안 당장의 선거만을 염두해두고 정치를 한 궁극적 결과”라고 평가했다.

김소연, 김순자 후보에 대해서도 “노동자 후보가 2명 있었지만 득표율은 형편 없었다. 급진적 선전선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과는 단절해야 한다. 평소 일상적으로 조직하지 않고 내용이 없다면 지지를 얻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정진우 후보는 “홍세화 전 대표가 대표직을 수락할 때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를 올랐다’고 했다”며 “(다른 후보들이) 4기 지도부의 리더십 문제를 공통적으로 지적하지만 결과로써 말하는 건 편하다.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전체 역할과 운영에 대한 평가가 구체적이었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홍 전 대표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고 말한 것이 제 마음을 울린 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었고, 그 답은 싸우는 자들과 함께하는 정당이라는 당 대표의 언어로 다가갔기 때문이다. 실패라면 실패”라며 “총선 실패와 대선 평가에 중요한 것은 가고자 했던 길이 무엇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망가졌는지 정확히 진단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해림 “김순자 후보는 사회연대전술 과정에서 탄생”
장석준 “올바른 방향일지라도 당원 동의 얻는 리더십 되어야”
이봉화 “물리적 통합만 되고 화학적 통합 안돼 발생한 것”

대선 평가 주제별 토론 이후 진행된 자유토론에서 박은지 후보가 이해림 후보에게 “김소연 후보는 이 후보가 말하는 좌파정당 건설에 함께 할 대상이 아닌지, 대상이라 판단한다면 대선 시기 김순자 후보와 만났어야 했던 것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해림 후보는 “김소연 후보측이 대상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두 선본이 선거과정에서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했어야 한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또한 이 후보는 “김순자 후보를 지지한 게 정치적 소신이라고 한 것은 사회당과 진보신당이 통합면서 정치적 노선으로 좌파정당으로 가고, 스스로 대선도 만들었어야 했던 측면이 컸다”며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김순자 후보는 나중에 김순자 선본을 만든 사람들이 (추대한 것이 아니라) 당 내 (사회연대전술) 과정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석준 후보는 “저는 진보진영의 연합이 안 된다면 당의 독자후보라도 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며 “하지만 전국위의 (안효상 전 대표의 독자후보) 안건은 단순히 독자가 아니라 당명 개정안이 포함됐다. 그렇게 하면 당원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고 했는데 안효상 전 대표가 그렇게 했다. 결국 부결됐고 저같은 사람으로선 정말 안타까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앞으로 우리의 리더십은 아무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더라도 당원들의 마음과 동의를 얻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5기 대표단의 주요 과제: 재창당
이봉화 “자본주의를 넘어선 노동중심의 포괄적 대중정당”
장석준 “세력 재편이 아닌 내용 중심으로 만들어가야”
정진우 “반자본주의 연대정당으로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박은지 “양당제 저지, 사회주의 이상, 민주주의 기본적 소양있다면 모두 만나야”

5기 대표단의 주요 과제인 재창당과 관련해 당명이나 당 정체성에 대한 두 번째 주제 토론에서 이봉화, 박은지 후보는 비슷한 원칙과 지향을 제시했고, 정진우 후보는 세력이 아닌 인물을 호명했다. 장석준 후보는 녹색당을 언급하긴 했으나 세력 재편이 아닌 내용 중심성을 강조했고, 이해림 후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자며 큰 틀에서만 제시했다.

이봉화 후보는 “재창당 방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노동 중심의 대중정당,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대중정당이여야 한다”며 “풍찬노숙이라는 말이 싫은 이유는 주관적 의지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전기요금이 없어 얼어죽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며 현실적인 실천 방향을 강조했다.

장석준 후보는 “재창당은 세력 재편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 중심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진보라고 에둘러 표현했던 근본적 과제를 꺼내 구체화, 전면화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녹색사회주의”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급진적 내용으로 선전선동한다고 사회주의는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일상생활을 통해 생활주체를 매력있게 만들어 나간다면 좌파, 노동, 녹색 등 여러 세력들이 기꺼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진우 후보는 “재창당을 말하기 이전에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며 “대중정당이라는 정체성은 앞으로 당원이 될 사람들과 이미 있는 당원들이 왜 여기 남아있는가에 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정체성과 관련해 정 후보는 “반자본주의 연대정당”이라며 “우리의 정치적 위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송전탑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 함께 살자 농성촌에 몰려가는 시민들에게 표를 획득하는 정당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들이라는 것, 그들이 지지하고 엄호하는 사람들이 우리 당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선언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자유토론에서 정 후보는 함께 할 세력으로 세력이 아닌 인물을 지명했다. 그는 “김소연, 이호동, 김일섭을 호명하고 싶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 분들의 살아온 길과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가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활동의 연대가 우리 스스로 주체화되는 것이고, 이들이 가장 1차적으로 함께 할 사람이라고 자신감 있게 호명했으면 좋겠다”며 “지난 과정에서 알지 모르겠지만 내용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박은지 후보는 “재창당은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명확히 하고 한국정치의 퇴보를 가져오는 양당제로 기울고 있는 것을 막고자하며, 사회주의 이상과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 당 역량 강화와 지방선거 대응 방안
이해림 “좌파당 존재감 위해 서울시장 후보내고 완주해야”
장석준 “지방선거에 목숨 걸지 말고 기초의원 중심으로”
정진우 “사내하청, 불법파견 등 이슈 중심으로”
이봉화 “실질적 성과낼 수 있는 범진보 선거연합 해야”
박은지 “50.1% 당선 가능성 있다면 폭 넓은 연대해야”

이해림 후보는 당 역량 강화 방안에 대해 “당의 골간 조직인 당협을 활성화하고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재창당 이후 정치위원회를 강화하고 정치연구소가 활발하게 어우러져야 하며 당원들도 정책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정책과 당협 활성화로 당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석준 후보는 “지방선거가 중요하지만 목숨 걸진 말아야 한다”며 “이번에는 철저히 기초의원 중심으로 해야한다. 투기적 관점에서 광역단체장 후보 내고 어디선가 숨은 표가 나타나 대박 치는 환성을 쫒을 게 아니라 밑에서 우리 후보를 발굴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진우 후보는 “민주노동당 때 학교급식 이슈가 없었다면 2004년 총선 성과가 없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며 “현재 사내하청 투쟁과 불법파견, 영세사업자 관련 이슈가 있다. 진보신당이 지방선거와 총선을 준비함에 있어 통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들과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정치기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은지 후보는 “당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재벌세로 하고 싶다”며 이에 대해 설명하며 지방선거와 관련해 “지역거점 사업을 후보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특히 그는 선거연대와 관련해 “50.1%의 당선 가능성이 있다면 넓은 선거연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봉화 후보는 “지방선거는 기초의회에 다수 진출을 목표로 하고, 지방선거에 앞서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정치전략 만들며, 진보세력 연합을 통해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정책위에서도 시군구청장 1명, 지방의원 20명 정도로 목표로 하는데 실질적인 목표가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광역단체장 선거보다 기초의원 선거에 방점을 두었다.

선거연대와 관련해서도 이 후보는 “진보정치의 재편과는 별개로, 지방선거에서 범진보 선거연합을 해야 한다. 현재 지방의원 13명인데 자력으로 당선 가능한 사람은 2-3명에 불과하다. 이대로 각개각진하면 몰락하고 대중적 지지도 얻지 못한다”며 “후보군 선거구 조정부터 범진보연합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각 후보간의 지방선거 대응 방안 중 특히 광역단체장 선거와 관련해 자유토론에서 후보간 맞붙기도 했다.

이봉화 후보가 이해림 후보에게 “선관위 제출 답변을 보면 최소한 광역단체장 1명을 후보로 내고 완주하겠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지 질문하자 이 후보는 “이번 선거가 당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좌파당이 존재함을 밝히는 선거가 되기 위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선거가 되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이봉화 후보는 “정치적 파급력을 가질려면 일정 정도의 다른 지역구에서 다수 출마해야 해야 한다. 2010년에도 다수 출마 전략 결과는 이미 확인됐다. 서울시장 선거에 효과를 볼려면 TV토론을 해야 하는데 당의 현실적 여건상 불가능하다. 다수 구청장이 출마한다고 해서 지상전도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인적, 재정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봉화 후보는 “부대표 후보로 나섰지만 야심있게 대표 후보를 겨냥하겠다”며 김현우 대표 후보를 호명했다. 그는 “김 후보는 전국적이고 위력적인 선거를 위해 후보를 200명 이상 확보해야 하고, 당협별로 2명 이상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에 당협 100군데가 가동되어야 한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며 “이건 선거에 매몰되서 당협을 확대건설하자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녹색당 정도만 연대하자는데 녹색당은 지방선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후보는 “연대의 선을 긋지 않고 폭 넓게 연대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제 토론 이외 주도권 토론에서 언론 노출 방안, 지역 당협 활성화 방안에 대한 의견 교류, 지역과 정치를 결합시킬 방안,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현재적 판단, 당 내 성평등 문화 정착 방안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했다.

2차 대표 후보 토론회는 24일(목) 밤 8시 민주노총 금속노조 4층 회의실에서 진행하며 칼라TV에서 생중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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