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체제 붕괴 이후를 보는 문학의 눈

category 관주와 비점 | Posted by 오씨 부부 | 2017/06/17 15:26


 

작년 겨울에 나온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읽었습니다. 8년 전,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을 읽은 적 있는데, 장강명 스스로도 이응준의 소설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느니만치 아무래도 두 소설을 함께 말할 수밖에 없겠군요. 전자는 이른바 ‘김씨 왕조’ 붕괴 후를 다루고 있고 후자는 통일 이후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멋대로 작명을 하자면, ‘포스트 NK’ 또는 ‘포스트 레짐 콜랩스’ 장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장르가 안 생긴다면 오히려 북한의 체제 변화 이후에 대한 상상의 빈곤함을 지적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류는 다르지만, 북한의 현실을 다룬 소설들은 간간히 나오는 모양입니다. 스탠포드의 교수가 쓴 <Orphan Master's Son>이라는 작품이 2013년 퓰리처상까지 받았고, 그 다음 해에는 북한에서 살고 있는 작가가 체제를 비판한 단편들을 묶은 <고발>이라는 소설이 국내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북한 체제의 문제에 대한 당연한 비판이 예상되어서, 구태여 읽을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더라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비판하는 소설을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니 당신은 빨갱이구려”라고 얘기하는 ‘곤충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아침에 김치만 먹고 점심에도 김치만 먹어서 저녁에는 김치 안 먹었더니, 김치 싫어하는 인간으로 모는 세태를 비판하는 게 지성인의 책임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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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과 이응준의 소설은 북한 체제 변화 이후의 세계를 매우 암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꿈꿨을 듯한 영화화가 안 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대중은 통일을 내셔널리즘의 낙관적 당위로 보아오는 데 익숙해져 있고, 정치인들은 “통일대박”이니 “북방경제”니 하며 대중을 현혹하기에 바쁩니다. 그러기에 대중은 하드코어 폭력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두 편의 소설에 그닥 반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두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엄연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올 가능성이 분명 있습니다. 물론 특정 시공간의 표면이 아니라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는 이면에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일어날 일들입니다.

 

두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면, 자신들의 의도를 잘 전달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 체제 변화 이후의 세상을 법보다 폭력이 앞서는, 마치 범죄조직이 창궐할 것처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포스트 레짐 콜랩스’류의 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들이라면, 이미 나온 <국가의 사생활>이나 <우리의 소원은 전쟁>과는 다른 문제 의식과 전개를 가지고 독자들 앞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북한 체제 변화는 권력의 빈자리를 대체할 거대한 조직 폭력이 등장하여 무기를 빼돌리고 국가에 대항하는 식으로는 전개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의외로 크기 때문입니다. 체제 변화로 인한 특별한 혼란이나 조직 폭력의 발호 등등은 동구권 몰락 당시를 보면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정도로까지는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설사 그랬더라도 일시적이고 국지적이었습니다. 마약, 무기밀매와 같은 범죄들도 정권 붕괴나 체제 변화가 있든 없든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구 소련제 무기가 암시장에서 밀매된다는 식의 설정들을 흔히 봅니다만, 지금 세계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논리와 군사력입니다.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고 북한의 체제 변화가 국가적 혼란을 몰고 오고, 풀려난 야수인 전직 특수부대원들이 폭력배가 된다는 식의 설정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구체적 폭력보다 추상적 부정부패가 훨씬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난 9년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들은 그런 부정부패를 폭력으로 은유했다고 하겠지만, 그건 헐리웃이 만들어낸 변명일 뿐입니다.

 

우리가 남북 문제를 보는 방식으로는 우선 반공ㆍ멸공ㆍ혐공의 잣대가 있고, 두 번째로는 헤어진 피붙이라는 식의 민족주의적ㆍ온정주의적 시각이 있으며, 세 번째로 가난과 후진, 낙후 등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것이 테러와 범죄, 강인한 생존 능력에 대한 관심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체제 변혁 시기의 남북 관계를 논할 문학적 상상력이 대중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어 아쉽습니다. 한편, 상상력과는 별도로 그나마 장강명의 작품에서는 남측 사람들이 가진 이율배반적이고 인종차별적 태도 등등도 얼핏얼핏 다루고 있는데, 그 ‘생각할 거리’조차 오락영화를 보고 나서 “재미는 있는데, 남는 게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딱 좋아할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는 한계가 보입니다.

 

사실, 체제 급변기의 남북 간에는 남측 우익집단의 북측 민간인에 대한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을 수도 있고,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다양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데, 여기에 미리 문학적 상상력으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봅니다. 김씨 왕조가 붕괴되어도 내셔널리즘에 길들여진 인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혼란을 최소화할 가능성도 관련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론되는 형편이다 보니 오히려 남측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들에도 눈을 돌린 작품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덧붙임

 

*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석 달전에 영화화를 위한 판권 계약을 마쳤다고 합니다. 포스팅 후에 뒤늦게 뉴스를 접하여 덧붙입니다. 이제까지의 영화가 간첩물, 탈북자, 또는 남북 공조를 다루던 것에서 통일 이후를 다루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는군요. 영화 <황해>도 따지고 보면 왕래하게 된 이질들간의 충돌과 민족주의적 낭만의 참담한 현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통일은 화사한 꽃도 아니고 썩은 열매도 아니므로, 작가의 문제 의식이 흥미 위주로만 각색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17-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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