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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무엇인가

나에 대한 앎이 해탈을 여는 열쇠다.

 

'나, 나, 나' '내것, 내것'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하면서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유감 아니겠는가? 무엇이 나인가? 무엇을 진정한 나[참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도 관심 기울여 연찬해 볼 주제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한 채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한데 웬일인가?

 

자. 무엇이 '나'인가. 이 몸, 이 마음을 '나'라 하겠는가? 대충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고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과거세 긴세월 동안 '나다' '내 것이다'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해탈할 수 없다.

불조(佛祖)께서 제시한 요긴한 해탈 방편 하나가 '나'를 제대로 알아버리는 길이다. '제대로'라는 것은 과학적인 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방편적인 진지성을 의미한다.

'나'가 무엇인지 알고자 함은, 앎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당기기 때문에 '나'를 잘 알아버림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즉 집착을 벗기 위한 방편으로 나에 대한 바른 앎이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가 ,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자. 무엇이 나인가? 동사섭 장(場)의 대단원에서는 "당신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 당신의 모습입니까?"하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그쳐 묻는다.

"홍길동입니다." "모모의 아빠입니다" "OO의 남편입니다" " OO그룹의 사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몸입니다" "혼입니다"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그것이 진정 '나'인가 자문해 보면 "여차저차하니 그것을 진정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진정 무엇이 나란 말인가?"하고 새롭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성실히 몰입하고 있노라면 대체로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이른다. 이 상태의 밀도를 거듭 심화시켜 나가는 길이 화두선(話頭禪)이요, 이 답답함에서 돌파구를 찾아 진일보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 관행해 간다면 이것이 염불선(念佛禪), 법계관(法界觀), 일심산관(一心三觀) 등의 행법(行法)이다.

 

 

'참나'가 아닌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법

 

참나를 찾는 일에 있어 일반화시켜도 됨직한 좋은 방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정한 나[참나]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이다. 흔히 세상 사람이 '나'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네 겹정도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식의 주체[識主我)], 마음[心我], 몸[身我], 그리고 자기 동일시[自己同一視]의 내용인 '내것'이라는 것들[境界我]이 그것이다. 그림과 같이 나란 식주아, 심아, 신아, 경계아 등 네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진정한 나를 알고자 나의 겉부분부터 "그것이 진정 나인가"하고 물어 보자. 양파의 핵심을 찾고자 껍질 한 겹 한 겹을 벗겨가듯......

 

경계아(境界我 :  경계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수히 자기 동일시하며 집착하고 있는 몸 밖의 것들, 부모, 형제, 자녀, 남편, 아내, 동산, 부동산, 아끼는 물건들, 명예 권력 등등 소중한(?) 나의 경계아들! 그것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러면 놓아라. 쥐고 있지 말자. 자녀를 놓을 때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를 수 있다. 재산을 놓을 때 그 관리의 효과적인 길이 보인다.

 

신아(身我 : 몸나), 그것이 나인가? 몸이라는 것, 알고 보면 현미경을 동원해야 겨우 보이는 아버지의 정자 한 마리, 어머니의 난소에서 한 달에 한 개씩 생산되는 난자 한마리,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열달동안 먹었던 밥, 김치들, 내가 태어나서 꾸준히 먹어온 밥, 김치들, 그것들의 집합이 몸이다. 정자가 나인가, 난자가 나인가, 밥,김치가 나인가? 그것들을 "나야!"하고 붙들고 있는 자가 있다면 딱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몸뚱이 이것, 내가 아니다. 놓아라 내일 모레쯤 화장터에서 뿌연 연기, 한줌의 뼛가루로 흩어질 이 몸뚱이, 내가 아니다. 놓아라.

 

심아(心我 : 마음나), 그것이 나인가? 심아, 그것은 생각과 감정의 조합과정일 뿐이다. 생각[知], 감정[情], 욕구[欲], 의지[意], 생각/감정/욕구/의지가 기능적으로 무수히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이다. 꽃 한송이를 본다[인지작용 : 생각], 기분이 좋다[감정], 꺽어서 집에 꽃아 놓고 싶다[욕구], 꺽고자 한다[의지], 인생사 전반에 마음은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

이때 생각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 순간 일어난 생각 기능일 뿐이다. 감정, 요구, 의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라는 것도 막연히 생각하면 무슨 실체(實體)가 있는 듯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그런 식으로 몇몇 기능들이 난무할 뿐이다.

 

식주아(識主我 : 인식의 주체)! 산이 보인다. 무 엇인가 보는 주체가 있으니까 그것이 산을 볼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아트만(Atman)' 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나무가 있고 돌멩이가 있다면 그 것을 만든 자[창조자]가 있을 게 아니냐는 생각이 '브라우만(Brahman)'이라는 형이상학적 신(神)을 만들어 내었다. 석가의 석가다운 역사 출현의 의미는 그 두 형이상학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다.

새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역할하는 '기능'이 있을 뿐 주체자라는 실체는 없다. 아트만이나 브라만과 같이,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상상의 관념 창고에 설정하려드는 것은 약한 유아기 인격에서 볼 수 있는 '믿음 심리'이다. 믿어버림으로써 어떤 욕구를 성취하고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믿음 심리'이다.

이 믿음 심리가 인간에게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믿음 심리가 없다면 한강교를 건널 때마다 이상(異狀) 유무를 검토해야 할 것이요, 이웃을 대할 때마다 흉악범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많은 종교 교설이 믿음 심리를 전제로 하고 시설된다.

 

해탈하지 못해도 믿음으로써 얻는 공덕은 아주 많다. 그러나 무엇이나 중도(中道)라야 좋고 상황에 따라야 하는 법, 불신 능사(不神能事)도 금물이지만, 믿음 능사도 금물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너무도 뿌리 깊게, 너무도 심각하게 당하고 있는 믿음 심리 피해 사례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 단계적으로 필요하지만 최종 단계의 성국 과정에서는 그 철석같은 믿음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석존의 보리수 밑 수행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그 당연하고 자명한 듯한 '나'라는 실체는 연기적 기능에 불과함을 꿰뚫어 보고, 미지근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던 불안[ ]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참나' 운운 역시 관념의 허상이다.

 

자, 마지막 '나'라고 버티어 봄직한 인식 주체[識主我]도 '나'가 아니요 한갖 기능임을 조견(照見)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겟는가? 자유감이요, 해방감이요, 대자대비요, 넘치는 생명력이지 않겠는가. 산산수수(山山水水)요, 묘한 있음[]이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넘치는 어떤 상태가 아니겠는가. 공(空)과 성(性)과 상(相)이 일여(一如)로 현전하는 아미타불의 일심법계(一心法界)가 이것임을 명상의 깊이만큼 점두(点頭)하리라 본다.

 

혹 '무언가 허탈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가? 이해도 된다. 노망한 시어머니를 30년 시중하다가 죽었는 데 문득 서운하더란다. 관념적으로 사색하지 말고 명상적으로 관조하노라면 사색 과정에 따를 수 있는 어떤 허탈감은 극히 일시적이고 명상의 깊이에 비례하는 충만감이 현전할 것이다.

혹 "아, 그러면 마지막에 현전하는 그 자유감 등등이 '참나'이겠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감 등도 꾸준히 흐르는 법. 그것에다 다시 이름을 붙이고자 할 일이 아니다. '진아'이니 '참나'이니,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믿은 심리'가 깔려 있을 수 있으니 깨어 잇을 일이다.

 

세간의 명인이 되는 데에도 뼈를 깎는 노력이 따르는 법. 해탈자라는 출세간의 명인이 되어야 할 마당에 적은 노력으로 되겠는가. 석존의 유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하셨다. 이 한 말씀에 담긴 석존의 간절한 비원(悲願)과 자비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음미해 볼 때 가슴이 메인다.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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