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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이라는 첫 단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을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혹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여, 부와 명예와 출세와 건강 등등의 조건들만 나열되었다면 당신의 행복의 수준은 1, 2학년 정도밖에  될 수 없다. 3, 4학년 수준 이상의 행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마음관리가 행복의 조건에 우선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행복의 조건 제 1호는 단연 마음관리다. 마음관리를 하지 않고 수준 높은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낚싯대를 들고 산으로 가는 것과 같다.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건만 먹구름이 그 온전한 빛을 가리기도 하니, 가리운 것만 거두면 이내 찬란한 광명을 되찾을 수 있다. 이 구름장을 제거하는 노력이 곧 마음을 관리한는 작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름을 제거하는 선교 방편(善巧方便)은, 구름 여하와는 상관없이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 버리는 것이다. 곧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 이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마음관리가 구체적으로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행복과는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 행복의 조건으로 중요한 것은 관계 좋음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이 내적으로 불행해지는 확실한 이유를 사회화 과정이 잘 못된 데 두었다. 사회화 과정은 곧 인간 관계이다. 어렸을 때부터의 부모와의 관계, 동생과 누나와의 관계, 이웃 친지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뭇 관계가 좋아야 하는 것이 행복의 요긴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이 두가지 조건, 즉 마음관리와 인간 관계를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마음관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행복은 항상 어떤 요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행복은 정서 상태이다. 정서는 홀로 일어나는 법이 항상 무엇인가의 대상에 의해 일어난다. 하다 못해 꽃 한송이를 바라다본 이유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친한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소리는, 이유가 분명히 안잡히기 때문이지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모든 것은 더불어 관계함을 통해서 존재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베크'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는 사고에서 나온다. 사고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정서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고로부터 정서가 나오고 사고는 선택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최고의 정서[깨달음,  解脫 등의 핵심은 정서이다]를 체험하려면 사고를 재조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성제(四成濟)를 심리학적 언어로 잘 갈파한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게서 깨달음을 이루신 다음에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하신 첫 설법의 내용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였다. 우리 마음이 괴롭다[苦], 그 괴로움의 원인은 이러이러한 것이다[集],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진다[滅], 괴로움이 사라지고 멸이 현전하게 하는 방법론이 있다[道]는 것이다. 이 도(道)에는 여덟 가지 방법[八正道]이 있는데 그중 첫번째가 정견으로, 방법론의 핵심이며 도(道)의 체(體)가 된다.

이 정견은 존재론적 정견과 가치론적 정견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두가지 형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존재론적으로 바라다본다는 말은 대상을 보면서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이다" "저분은 선생님이다"라고 아무런 감정 평가 없이 그냥 사고(思考)만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가치론적으로 발달되어서, "저것은 꽃인데 얼마짜리일까"하고 가격으로 환산해서 바라다보거나 자기 감정을 삽입시켜서 바라다보게 된다.

 

아무튼 가치론적인 견(見)이든 존재론적인 견이든 바로 보는 견해라면 우리는 보다 행복할텐데 대상을 그대로 보는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행복을 누리는 데 장애가 된다.

우선 존재론적 정견부터 연찬해 보자.

 

 

내가 없는데 괴로움은 어디에

 

우리 인간이 욕구(탐심)를 갖고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안전(安全)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무수하게 많다. 우리는 이들 욕구가 성취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면 슬퍼한다. 그런데 욕구가 성취될 때 행복해진다는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완벽한 말이 못 된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행복의 정서를 체험하게 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행의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밖에서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얘기해도 내 속에서 인정이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3억 정도 벌었으면 이제 성공한 것 아니냐?"고 주위에서 얘기해도 "아니야, 아는 10억 정도는 벌어야 성공이라 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는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중생심은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쾌해 하는, 쾌-불쾌-쾌-불쾌의 윤희를 거듭한다. 그럼 이 수준 낮은 행복으로부터 수준 높은 행복으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인간에게 욕구가 있을 때는 그 욕구 이전에 욕구하는 '나'가 존재하게 되고, 욕구의 '대상'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와 '욕구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욕구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밝히신 법은 욕구의 뿔히가 되는 주(主)와 객(客)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을 이루시기 전 죽음에 대한 불안이 꾸준히 따라붙자 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를 사유해 나가시다가 스스로 어디에 걸려 있는지를 아시게 됨으로써 나온 법칙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 여러 외도 스승들 밒에서 갖가지 수행을 하며 기적적인 경지까지 체특했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고행의 방법을 통해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도록 수행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3*7일 동안 명상을 하며 이치를 궁구해 나갔다.

 

첫째는 "나는 죽기 싫다", 둘째는 "그런데 나는 죽는다", 이 두가지 명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신을 주시하게 된다. "나는 죽기 싫은데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신 후 이 두 가지 앞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아셨다. 나는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야지 그 문제를 제외해 놓고 아무리 밑에서 해결하려 해 봐야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연 나는 존재하는가"를 정사유(正思維)하셨다. 그리고는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것은 연기적 존재이므로 이때까지 '나'를 주장하며 살아 온 것은 마치 그림자를 놓고 실체라고 믿고, 눈병환자가 어깨비를 보면서 달이 있는 것처럼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기고공(緣起故空)'이다. 대전제인 "나는 존재한다"할 때의 '나'는 실체가 없는 연기적 존재이다. 고로 공(空)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곧 주격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니, 따라서 죽기 싫은 자[주체]도 사라져 버린다. 곧 아공(我空)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살펴보니 연기적 존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법공(法空)이다. 석가모니가 중생들을 보니까 한결같이 "나는 존재한다" "너는 존재한다" 해놓고 여기에 욕구가 나와서 아등바등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석존께서는 중생들이 내는 그 욕구는 성취되면 성취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고 좌절되면 좌절됨으로 해서 슬퍼서 분노하고, 분노하면 욕구는 더 커지는 중생살이를 보시고, 나도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중생들도 가능할 것이다 하고 다섯 비구를 위시해서 45년간 법을 설하였다.  

팔정도 중 그 벽두에 정견을 설하셨는데, 바로 팔만대장경은 정견의 숲이라 할 수 있다. 무수한 나무 하나하나가 다 정견이라는 나무인데 그 중에서 제일 큰 아름드리 나무는 무아(無我)라는 나무이다. 곧 무아야 말로 정견 중 정견이다. 아공이라는 정견이 있는 자리에는 욕구가 들어 설수 없기 때문에 욕구를 성취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욕구의 주체인 '나'가 공(空)하므로 욕구의 객체인 역시 공(空)할 수 밖에 없고, 욕구의 주객(主客)이 돈망(頓忘)하니 툭 트인 해탈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고로, 사고를 바르게 함이 행복을 위해 요긴한 일이다. 정견이라는 방편을 놓치고 다른 방편에 매달려 있다면 지말(支末)에 끄달리고 있는 것이다. 정견을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바른 가치관, 바른 세계관, 바른 인생관 등이다. 정견(正見)을 정립하지 못하면 그 인생 제대로일 수 없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몸둥이 하나만 문제가 되지만, 가치관이 잘못되면 혼이 망가지는 법이다. 세세생생 그 망가진 혼의 인과를 받아야 한다.

마음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곧 정견 정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이 된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견해로 정립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활불교(活佛敎)적으로 정립되어 있기보다는 관념 불교, 죽은 불교, 머리 속에만 있는 불교로서의 가치관 정립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우려 된다. 이때 이 자리, 이 순간이 곧 삶의 도(道)가 되고, 멸(滅)이 되어야 한다. 이때 이 순간의 나의 손짓 발짓이 도가 되어야, 그것이 활불교이다. 관념적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정견의 중요성과 존재론적 정견을 강조해 보았다. 이어서 가치론적 정견을 밝힐까 한다.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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