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성명] 청와대앞 선도적인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

 

[성명] 정부종합청사 앞
선도적인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
비정규직 철폐하고

노동법 개악 중단하라!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법 개악저지를 외치는 분노가 표출되었다. 12일 오전 8시 서울한복판 정부 종합청사 앞에서 학생들이 정부와 국회의 노동법 개악 음모에 맞서기 위해 청사 정문에 화염병을 던진 것이다. 이들이 던진 불길은 노동자 민중의 분노이다. 피 끊는 절규이다. 왜 이들은 스스로의 신변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화염병 투척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어야만 했는가.

정부는 지난 11월 2일 국무회의를 통해 비정규직노동법 개악안(파견법 등)을 의결하였다. 이미 한국은 IMF이후 비정규직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어가면서 노동자의 삶은 그야말로 벼랑끝으로 내몰려 있는데도, 정부는 더 많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비정규직 보호라는 거짓말로 위장하며 노동법을 개악하려 하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와 민중,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법안은 비정규직 보호가 아닌 합법적인 노동자 살해법이라 지적하며 정부의 법안 통과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해왔다. 이런 와중에 정부종합청사에서 날아오른 화염병은 노동자민중과 노무현정권과의 결코 물러 설 수 없는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날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또한 민생법안 운운하며 비정규직노동법 개악을 시도하려는 국회에게도 해당하는 경고이다. 그것은 아직은 몇몇의 학생들에 의해서 촉발된 불씨이다. 그러나 이 불씨는 이미 일촉즉발 상태인 노동자 민중의 가슴에 다가가고 있다. 정부는 학생들이 뿌린 유인물의 내용처럼 즉각적으로 비정규노동법 개악 시도를 중단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무효화해야 한다. 이러한 분노의 함성의 의미를 무시한다면, 전 노동자 민중에 불꽃이 자신들을 향하게 될 것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경고이다. 비정규직노동법 개악 중단하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동지들, 후퇴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다시금 복구하고 전선에 섭시다. 비타협적 투쟁만이 벼랑끝의 삶을 바꾸어 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오늘 동지들이 보여 투쟁의 의지를 가슴속에 새기며 투쟁합시다.



광주민중항쟁 25년 11월 12일

학/생/행/동/연/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매매 특별법 관련 정세에 대한 입장

  [입장] 남성 성욕 중심의 착취구조를 공창제로 존속시킬 수 없다!

성매매피해 여성들의 생존권 쟁취의 요구는 여성노동권과 여성권 쟁취로! 

 


1. 성매매 특별법 시행 

지난 9월 23일, 소위 ‘성매매 특별법’이라 불리는 법무부 소관의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여성부 소관의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라는 두개의 특별법이 공포되고 시행됐다.

이미 2003년 6월 성매매 방지기획단이 출범할 때부터 성매매 업주들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고, 2004년 3월 2일 입시국회를 통해 법안이 통과되고 같은 달 31일 성매매 방지 종합대책이 발표되자, 성매매 업주들은 담합 형태로 집단행동을 준비해왔다. 성매매 업주들은 사회적 인식이 ‘성매매는 비도덕적이나 필요악’으로 뿌리깊다는 것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 보장을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과 결합시켜 주장함으로써 성매매에 대한 사회구조적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성매매 여성들이 폭력과 협방 등으로 강제 동원되어 집단행동에 함께 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업주들의 생존권 보장이 진짜로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다.

더구나 집중단속기간인 현재에도 음성화된 방식으로 성매매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2007년까지 집창촌을 폐지하겠다는 계획은 2005년 ‘집창촌 폐지를 위한 법’ 제정부터가 난관에 처할 것임을 확실히 예견케 만들고 있다.

하기에 성매매 특별법이 정말로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군산 경찰의 성매매 사건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일반적인 관행으로 묵인되고 있는 업주-공권력간의 연계 고리를 끊어 냄으로써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법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해야하고, 성매매 피해여성들에 대한 적극적인 구제조치는 물론 이 사회의 하나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여성으로서의 권리와 노동권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만으로 해결되리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으로는 음성적 방식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만 가중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남성성욕 중심의 사회 인식을 바꿔가는 작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현재 사회적 여론 파악

현재 뉴스의 핫이슈로 성매매 특별법 시행과 이에 따른 현상들이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언론보도의 대부분이 성매매피해여성들에 초점을 맞춰 근본적인 부분을 짚어내기 보다는 여성단체와 업주들의 대립을 현상적으로만 보여준다든가, 마치 이 사안이 여성단체와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대립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어 사태의 본질은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현재 Daum이나 각 미디어 매체에서는 성매매 특별법 관련하여 여론조사나 토론들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토론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다 보면 굉장히 여러 가지 입장들이 격렬하게 맞부딪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시킬 것이냐와 성폭력이 증가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고전적 남성 성욕 중심의 입장이고, 경제계와 제주․강원 등의 소위 관광/향락산업 중심의 도시에서는 심지어 공무원들까지도 가세해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경제중심의 입장이 존재한다. 또 다른 입장은 성매매는 근절되어야 하지만 성매매피해 여성들 역시도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과,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척하면서 성매매를 합법화하자는 공창제 입장도 있다.

이에 ‘성매매방지법의 올바른 시행을 위한 전국 80개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난 10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성매매를 사회의 필요악이라 보는 남성성욕 중심의 의식부터를 전환할 것과 법의 강력한 시행으로 성매매업을 범죄화하여 강력히 단속할 것, 성매매 피해여성에 대한 자립 지원 등의 보호방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여기서 우리는 시민사회단체의 입장을 제외한 입장들에서 공통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데 즉, 남성성욕 중심의 사회는 쉽사리 바뀌기 어렵다는 것과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사회를 지속시켜가겠다는 의지가 우세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10월 13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의 ‘28회 한경연 포럼’에서의 “자신이 믿는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남의 자유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 좌파적 생각이며 성매매특별법은 도덕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인간의 성욕을 막는 법”이라는 발언이 그것이며, 지난 11일 경북지방경찰청 국정감사 현장에서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은 경찰의 성매매 단속과 관련해 “성매매를 완전히 중단시킬 경우 30살을 전후한 결혼 적령 시기까지 성인 남성들이 12년 동안이나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게 되는데 대안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며 “경찰은 단속을 사려 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당 김기춘 의원도 “업주나 매수자와 달리 몸을 파는 여성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생계형인데 국가가 이를 구제하지 못하면서 상황을 보지 않고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몇몇 파렴치한의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3. 남성 성욕 중심의 착취 구조를 바꿔내고 공창제를 막아내자! 

언론들의 ‘여성단체-업주’, 특히 ‘여성단체-성매매피해여성’ 대립구도만을 보여주는 현재적 상황은 여론을 보수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위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업주와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집단행동의 영향으로 여론의 중심이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생존권도 보장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모아지고는 있으나, 교묘하게도 성매매 업주들의 이해와 맞물리면서 성매매는 필요악이며, 그러므로 합법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하지만 공창제는 남성성욕 중심의 사회구조를 바꿔내기는커녕 이를 당연시하는 것으로부터의 발상이며, 여성을 하나의 시민 주체로가 아닌 남성성욕을 충족시켜줄 하나의 도구로만 대상화할 뿐이다.

하기에 근본적인 여성억압과 착취의 기저에 깔려있는 남성성욕 중심의 사회구조를 바꿔내려는 노력과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의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공창제를 주장하는 것은 그나마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성매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 현실 대중운동으로서, 현재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생존권 요구를 여성으로서의 권리와 노동의 권리로 만들어내자!

이제 우리는 현재 이러한 여론구도와 여성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는 장치들을 걷어내야 할 시점에 와있다. 하지만 이것이 남성성욕 중심의 인식전환과 공창제 반대라는 요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기에 현실 대중운동으로의 흐름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태이며,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주체화시켜내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민중운동 내에서도 성매매에 대한 입장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성매매 근절이라는 원칙만을 고수하여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운동을 만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며 그들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주장을 옹호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대립하는 그 무엇이라기보다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남성성욕중심의 권력구조가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누가 얼마나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성매매를 근절시킬 수 있겠는가?

장기적 관점에서 성을 매매하는 형태의 착취체제는 근절되어야 하지만, 현실 대중운동의 주체로서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보호의 대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하여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생존의 권리가 업주들의 이익과 맞물리는 교묘한 이데올로기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생존권의 요구를 진정한 생존권으로서의 여성 노동권 쟁취로 주장할 수 있어야 하며, 여성으로서의 성욕의 권리 및 모권 등의 여성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흐름을 창출해야한다. . 


5. 그렇다면 무엇으로 실물적 대중운동 흐름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주체로 설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입장개진이나 선전 이상은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기에, 우선은 남성성욕 중심의 인식과 구조전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동시에 생존의 요구를 여성노동권, 여성권의 요구로 전환시키는 입장개진이 활발해져야한다. 이는 거리 선전전의 형태일 수도 있고,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대중운동공간에서 대중들과 대화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또는 업주들 주도하에 진행되는 집회이긴 하지만, 그 시공간에서의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인권보장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실천을 해볼 수 있다. 

지금 이시기가 아니고서 언제 다시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할 수 있을까? 여성단체들과의 의견충돌이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그 생존권이 성을 매매하는 착취체제가 아니어도 보장될 수 있어야 하는 권리라는 것이 우리의 입에서부터, 행동으로부터 발언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 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 이 글은 누룽지님의 [[강수돌]노동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2000-07-14) 高大文化 [50호]


노동 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강 수 돌 (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1.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21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은 과연 희망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전례 없이 비참한 종말의 시대가 될 것인가? '더 이상 착취당할 기회마저 상실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현재의 지구촌을 둘러보면, 최소한, 21세기는 희망의 시대가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비참한 종말이 자동적으로 다가온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결과는 우리들의 집합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 책임성(self-responsibility)과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기본 원리로 하는 '풀뿌리 자율성 운동'이 그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개되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결국 절망의 시대를 희망의 시대로 전화시켜낼 수 있는 거대한 힘은 시장 경쟁력에도 있지 않고 국가(또는 엘리트) 권력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민초들의 자율 역량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자율 역량의 문제와 노동거부의 문제는 과연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또한 노동권, 즉 노동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거부권의 상충적인 개념들을 민중의 자율성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부분적으로만 문제시되고 있는 노동중독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노동거부와 삶의 자율성 강화를 이루기 위한 탈구들은 어떤 것일까? 이런 점에서 노동시간단축 운동을 다르게 자리매김할 수는 없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이다.
자유로운 노동 내지 노동 해방을 향한 외침은 오래되었으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에 관한 노동자 내부의 논의는 그리 깊지 않다. 내가 보기에 자유와 해방을 향한 돌파구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당연한 듯 '신성시'하는 '노동'의 권리를 되짚어보는 것에서, 둘째, '자본'을 닮아있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에서, 셋째, 삶의 재생산과정이 전적으로 화폐의존적으로 변하고 있는 경향성에 맞서는 것에서 찾아지리라 본다. 이 세 가지 사례는 원래 노동시장, 노동과정, 생활과정이라는 세 범주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2. 노동권과 노동거부권

* 에피소드 1: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 마을의 아침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이 노인이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그 노인이 행복하게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찍어댔다. 그런데 이 찰칵거리는 소리에 그만 이 고기잡이 노인은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 그만 ...…, 이거 어떡하지요?"
"......"
"그런데 할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
"벌써 새벽녘에 한 번 다녀왔구만."
"아, 그러세요? ... 그러면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 참, 할아버지두, 고기 많이 잡으면 할아버지의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쟎아요?"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씬 빨리, 한결 많이 ..."
"음... 그 다음에는?"
"그야,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그렇게 되면, 한꺼번에 뭉칫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 이 마을에 생선 가공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
"흠...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이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네."
"......"(원작 하인리히 뵐; 강수돌 <경영과 노동> 제14장 참고)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 '뿌듯함'을 느낀다. 성과가 나타나거나 돈을 버는 데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 즉 노동이란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으로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이 노동은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켜 주는 한에서만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이다. 한마디로, 여기서 노동은 곧 자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실업과 해고라는 삶의 위험성 앞에서 노동을 할 권리(das Recht auf Arbeit), 즉 노동권을 주장해왔다. 그 위에서 오늘날 노동3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노동자에게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노동기본권으로 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이러한 노동권조차도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로서의 자본종속적인 노동을 당연시하고 나아가 노동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부터 주장되고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연과 부단히 교류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생명 활동을 수행하던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의 형태로 거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동권 개념이 나왔던 것이다.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은 달리 보면 민중들의 삶의 자율성이 거세되는 과정이었다. 삶의 문제를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노동시장에 경쟁력 있게 내다 팖으로써 해결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노동자들은 노동권이야말로 '생존권'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자본 아래 실질적으로 복속되어 노동을 해야지만 임금이라는 소득이 생겨 비로소 삶의 문제(먹고사는 문제, 자녀 양육 문제 등) 해결이 가능하므로 '노동할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실업과 해고는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에게는 죽음이다. 그것은 경제적 토대의 박탈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정체감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의 노동이야말로 '자아실현'의 기회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량실업 시기에 자살율이 높은 것은 경제적 위기 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위기 의식이 극단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 발로 선 자본주의의 역사 200년만에 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는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대량실업이 활개를 치게 되었고 민중들의 노동권에 대한 강한 정열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더 활활 불타오른다: "노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 노동거부권(das Recht auf Faulheit), 즉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 여유롭게 살 권리는 결코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요구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완전고용'을 이룰 수 없는 시장의 실패 문제나 정책의 실패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 자체가 이미 삶의 기쁨이 아니라 삶의 억압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다. 가변 '자본'으로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자본이므로 마치 흡혈귀처럼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부단히 흡수해야지만 시장경쟁 구조에서 생존이 가능하다. 또한 '가변' 자본이기 때문에 자본의 몸뚱어리를 갈수록 더 크게 변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삶을 억압하는 과정이 아닌가. 만일 일시적으로나마 삶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가변자본이 증식시켜 준 자본의 떡고물을 좀더 많이 분배받을 때뿐이다(임금인상과 휴가, 승진, 복지라는 형태로).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하는 사람들을 억압 구조 속으로 더욱 더 단단히 묶어놓는다. 따라서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삶의 기쁨은 그 안에는 없다. 따라서 단호한 요구가 나온다. "노동거부!" 어차피 시장경쟁 속에서 20%도 안되는 '똑똑한' 자들 뒤에서 80% 이상이 들러리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나만이라도 20% 대열에 합류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에피소드 속의 노인처럼 삶의 자율성의 누리며 '주인공'으로 살 필요가 있다! 또한 실업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실업자의 취업 능력(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업을 낳는 구조(경쟁 구조) 자체를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20%의 경쟁력 있는 노동력과 80%의 경쟁력 없는 노동력으로 갈라지는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서로 처절히 경쟁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분열과 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노동시장(labor market)이라는 공간 위에서 나름대로 사회적 인정을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결코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본증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서로 경쟁하는 그런 노동을 거부하겠다는 구호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새로운 햇살을 강하게 받고 있다.


3. 노동중독증에 대한 고백

* 에피소드 2: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이상하게 저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일을 안하고 쉬는 것을 못 견딥니다. 불안한 데다 컨디션도 평소보다 더 나빠지곤 합니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물론 일을 할 때도 몸의 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쉬는 날보다는 낫습니다."(1999. 8. 25. 서울 논현동의 한 회사원)

* 에피소드 3: 주부 박아무개(35)씨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일찍 나가야 되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저도 남편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때부터 남편은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모른다"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박씨는 "사는 게 허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격무에 시달려 일만 쫓아간 남편의 생활이 부인한테 우울증세를 유발한 것이다.(한겨레 21, 99. 8. 26)

일찍이 110년 전에 맑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일중독증'에 사로잡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외친 적이 있다. 그만큼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고 있는 일중독증은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사회적 병이다. 그런데 알코올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섹스중독증, 쇼핑중독증 등 다른 중독증과는 달리 일중독증만큼은, 위 에피소드들의 사례에서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권장'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과 성과를 내야지만 편안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진는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란 우리 사회에서, '미친 놈, 한가한 소리한다'고 욕먹을 가능성이 크다.
대개 사람들은, 늦게 자더라도 일찍 일어나 다음날 할 일을 일일이 리스트로 작성하고 정말로 일에 흠뻑 빠져 일을 즐기면서 하는 이들을 두고 성실하고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경영학에서는 '직무몰입'이나 '조직몰입'과 같은 용어를 쓰면서 이것이야말로 조직의 성과를 내는 데에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일중독증 환자라고 문제시한다. 의사들의 정신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상한가? 정확한 답은, 오늘날 한 해 동안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 버금가는 '과로사'(work to death) 숫자가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 심각성이 사회문제화 되기는커녕 '국가경쟁력 강화'니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니 하면서 자본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일중독에 빠지도록 몰아간다.
일반적으로 중독증의 이면에는 모종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이하 Heide 1999, 강수돌 1997a 제14장 참고). 이 두려움은 사실상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전일적 삶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의 결핍(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는 대립과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제 사회는 갈수록 이를 부채질한다)에서 온다. 만일 만물의 삶과 죽음 일체에 대해 전일적으로 심층 이해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은 극소화되고 대신 삶의 자율성이 극대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의 부족으로 생긴 두려움을 적극 끌어안거나 올바로 극복하려는 내면적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회피'하기 위해 다른 대체물에 의존하게 된다. 일중독 또한 삶의 자율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삶의 전반적 불확실성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을 통해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삶의 불확실성이란 사실은 인간이 자연과(그리하여 동시에, 자기의 내면적 본성과) 맺는 관계가 잘못된 데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적대시하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 외면과 내면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또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적대시할수록 인간은 결코 스스로 평화로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 불안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고 마침내 그 수단에 종속된다. 그러나 결코 원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고 공허감만 커져, 갈수록 그 수단에의 종속도가 커지는 것이다. 일중독자의 경우 갈수록 더 많은 성취(가시적 성과)를 이루어야지만 뭔가 하는 것 같고 성공적인 것으로 비춰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결코 진실한 만족감을 갖다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큰 공허감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에 젖은 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이 일중독에 빠져들게 된다.
다른 병들이 그러하듯 일중독증도 가장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열심히 일에 파묻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칭찬과 보상이 일중독증을 드러내기는커녕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성실성과 일중독증을 동일시하는 문화 자체를 단호히 타파해야 한다: "노동거부, 여유로울 권리!"


4. 노동자에게 내면화된 자본 털어내기

* 에피소드 4: "…그분은 결국 회사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짝사랑의 보람도 없이 문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여전히 회사를 사랑한다는 그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온갖 수발을 다 들다가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고도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비련의 여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심봉사(회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정상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인당수(해고)에 빠졌던 심청이를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 심청이를 희생시키고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심봉사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웃들의 도움에 의해서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임원택 1998)

* 에피소드 5: "… 남성들은 회사 다니면서, 회사생활에 적응하면서 '회사가 내 목을 쥐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성을 회사의 스케줄에 따라 조절하지요. 이른바 회사형 인간이 되는 거예요. 회사가 '너 오늘은 성관계 하지마' 이렇게 대놓고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르는 순응적인 인간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회사 일정에 성 스케줄을 맞추면서도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고 또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제일 비극이죠."(엄인희,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작가)

일(성과)과 자신(행복)을 동일시하는 문화를 극복하는 것은 곧,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 내면화된 자본의 논리를 훌훌 털어내는 것이다. 가변 '자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노동이란 곧 자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 털어내기 운동'은 앞서 말한 노동 거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의 에피소드에도 나오듯이, 내가 회사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냉정히 깨닫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돈벌이 기계(회사)의 스케줄에 삶의 세계를 종속시키지 않는 것 등등 매우 많다. 몇 가지 현실적 사례들을 더 살펴보자.
노동자들이 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다른 회사의 소액주주가 되는 경우에 그들은 노동자의 모습과 자본가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굳이 그러한 지분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노사 협력 하에 '파이를 많이 늘여야지만 나눠먹을 파이가 생긴다'라고 생각하는 때부터 이미 그들은 자본을 닮게 된다. 여기서 자본의 핵심은 본전 생각하기, 끝없이 불려나가기,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든 살아있는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기('상품화'하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경쟁과 분열하기 따위에 숨어 있다. 이른바 '물신주의'는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전화되는 통로이다(상품 물신, 돈 물신, 자본 물신 등에 대해서는 힌켈라메르트 1999 참조).
따라서 우리가 돈을 은행에다 맡기고 높은 이자를 기대하거나 더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을 찾아다니는 것은 바로 자본의 모습이다. 은행에 예금된 돈은 자본으로 투자되어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영행위가 이뤄진다면 가변자본(노동력) 덕택에 불어나게 된다. 이 불어난 자본의 일부를 이윤분배, 이자, 배당금의 형태로 사람들이 나눠먹는 것이다. 크게 보아 한마디로 우리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여 경영의 수익성 내지 경쟁력 향상이나 위기 관리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공동경영자'(Co-Management)가 되는 길이다. 물론 노동자가 철저히 배제되어 어떠한 영향력 행사도 어렵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그러나 경영 참여의 과정이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삶의 자율성 향상을 위해 일관되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익성과 경쟁력, 생산성의 울타리에 새로이 갇혀 자본의 합리성을 앞장 서서 대변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본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요컨대 '내 마음 속의 자본'(internalized capital)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자본의 모습을 닮아있거나 닮아 가는 행위 논리와 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 발본색원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은 생활임금 쟁취와 노동시간 단축, 고용안정성 유지, 노동 환경 개선, 인격 대우 및 평등 대우, 복지 향상 등과 같은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하는 차원에서는 지극히 정당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바로 그러한 노동조건의 개선이 역설적으로 임노동관계의 강화와 일중독증을 부채질하는 역설적 한계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노동이 자본 안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보면 노조운동도 사실은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경쟁 업체를 물리쳐야만 안정된 고용과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적 딜렘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노동운동은 스스로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정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허재영 1997 참고).


5. 삶의 화폐의존도 줄이기

* 에피소드 6: "그는 월 30만원을 벌고 그 돈으로 한 달을 산다. 그는 시인이다. 게다가 다른 직업이 따로 없는 '전업시인'이다. 시는 많이 써야 한 달에 두어 편 정도. … 그 친구는 시 한 편당 2만-5만 원을 받는다. 가난한 잡지에 시를 발표할 경우엔 그나마 원고료도 못 받고 대신 그 잡지의 정기구독권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게 된다. … 한 달에 30만 원으로 살려니 그건 생활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극기훈련이다. 우선 집밖을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버스를 타도 거금 500원이 들기 때문이다. 방안에 틀어박혀 사는데도 전화코드를 빼놓는다. … 대신 누군가에게서 '호출'이 오면 코드를 꽂아 전화를 한다. 누군가가 호출을 했다는 건 술이든 밥이든 사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 시인 친구의 화려한 외출은 그렇게 이루어진다."(김중식, 돈에 관한 쓸쓸한 삽화 둘, <공동선> 1998년 5·6)

* 에피소드 7: "몇년 전부터 농사는 내 먹을 만큼만 하고 나무를 주로 키워. 없는걸 만들어내는 건 농업밖에 없어. 상업이야 있는 물건 사고파는 거고 공업도 모양만 바꾸는 거 아냐. 식물만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내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건 그것들로부터 세상살이 이치를 배우기 때문이지. 한 자도 안되는 도라지는 겨울 땅 속에서 완전히 얼었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살아나. 시련을 달게 이기고 일어서는 게 사람보다 나아. 나무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지 뻗으며 사는데 빛 많이 받는 남쪽가지가 북쪽보다 길고 크지. 그렇다고 북쪽 가지가 남쪽으로 가진 않아. 사람은 어떤가. 편하게 살겠다고 농촌을 버리고 다들 도시로 갔잖아. 그래서 남은 게 뭐야. 눈에 쌍심지 돋우고 분초 다투며 산 끝에 다들 나가 떨어지잖아. 도시에서는 요즘 매일 30명이 자살을 한다며. 남 탓할 것 없어. 서울가면 큰 수나 날 줄알고 몰려간 거 아냐. 어떤 사람이 취직해 열심히 일했더니 과장 부장 사장된 다음 송장이 되더라는 농담도 있더구만. 내가 좋아하는 도연명 말처럼 '헛살아야 해'. 이루지 못하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해서 아쉬워할 거 없어. 괜히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저 살아있으니 산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살면 돼. 마누라는 오륙년 전에 죽었고 애들(3남3녀)은 모두 나가 살아. 고등학교 나온 놈도 있고 초등학교만 마친 놈도 있어. 막내딸은 공부 지지리 못했는데 시집가서 잘만 살아. 처음 혼자 됐을때는 미치겠더니 차차 익숙해지더구만. 혼자사니 생활이 단순해져 좋아. 결국은 혼자 살고 죽는거야. 잘 산다는 건 옳게 사는거지 사람 많은데 따라가며 사는 게 아니야. 한 삼십년 쉼없이 움직거리며 일하다보니 일에는 워크(Work)와 레이버(Labor)가 있는 거 같아. 워크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고 레이버는 팔기 위해 노동을 하는 거지. 요즘 직장잃은 사람들 많은데 그렇다고 일(Work)이 없어진 게 아니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벼룩은 보통 한번에 3m를 뛴데. 2m 유리병에 벼룩을 가둬놓았더니 유리병을 치워도 1.8m만 뛰고 말더라구만. 사람도 똑같애. 직장은 어쩌면 유리병같은 거라구. 인생은 사는 길이 참 많아. 남들이 옳다고 하는 관습, 상투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해.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말이야."(경북 봉화에서 강아지와 함께 사는 전우익씨, 동아일보 1998. 5. 6)

실업자가 많아지면 한편으로는 자살율이 높아지지만 다른 편으로는 범죄율이 높아진다. 정상적인 소득원이 사라지게 되므로 비정상적인 소득원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성마저 상품화하게 된다. 갈수록 교도소가 많아져야 하므로 교도소의 민영화가 이루어지는 반면에, 소수의 부자들은 불어나는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사설 경비원을 두고 자기들만의 성곽을 구축하게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돈'을 통해 해결하려는 구조를 강화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영리주의가 삶의 전 과정을 돈벌이의 합리성 속으로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스템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고 말했다. 이미 우리 모두의 생활은 충분한 돈이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지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생활비가 오르면 노동자는 임금인상투쟁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고,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는 물가를 올린다. 그리하여 갈수록 삶의 문제 해결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먹는 것도 재료부터 요리까지 사서 먹어야 하고, 옷도 사서 입어야 하고, 집도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줄어드니까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보아야 하고 재미나는 놀이 문화를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되니까 노래방과 오락실을 찾거나 게임 프로그램을 사야만 한다. 심지어는 집안 일이나 계단 청소까지도 돈을 주고 해결한다. 육아, 교육도 모두 그러하다. 도둑이 설치니까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경비 체계도 구축한다. 특히 광고와 유행(패션)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통하여 인간 본연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조작하고 '자본친화적으로'(kapitalfreundlich) 변동시켜 나가기 때문에 소비중독, 돈중독, 이윤중독의 경향성이 커진다. 나중에는 별로 필요 없는 상품마저 이미지나 유행 때문에 구매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긴박한 필요가 없이도 많은 돈을 지출해야만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도 벌어진다. 이런 식으로 삶의 전 과정이 화폐를 통해야 해결되는 양상으로 가다보니 결국 화폐의존도가 높아지는 대신 삶의 자율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임금노동에의 종속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결국 일을 더 많이 해야지만, 또 소속된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더 높여야지만 돈을 많이 벌게 되므로, 생활의 화폐의존도 강화는 마침내 일중독증을 구조적으로 부채질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반면에 위 에피소드의 시인이나 농부처럼 화폐의존도가 지극히 낮은 생활방식을 하나씩 실험해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생활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여 '돈'이 별로 필요 없는 삶의 문화를 만들거나, 갈수록 돈이 적게 들도록 바꾸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국의 애미쉬 공동체나 일본의 야마기시 실현지처럼 '자발적 간소함'과 '내면적인 풍요'를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곳곳에 그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생활과정에 돈이 별로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중독에 빠지기보다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고 또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일을 나누어 가지면서 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하려 하니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할 필요도 없어지고 대신에 창의적인 문화생활을 할 여유가 많아진다.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함께 사는 이들이 각자의 역량에 맞게 도와가면서 하게 되니까 비교적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자율자치 공동체'일 것이다.
굳이 마을 단위의 구조변화가 아니라도 먹거리의 자립도를 높여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텃밭이나 주말농장 따위를 통해서 당장이라도 간단한 야채는 스스로 경작하여 먹어보자. 품질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동시에 흙과 물, 공기와 햇볕, 벌레와 곤충 따위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시야가 확장되면 인간이 우주 만물과 맺는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고 마을을 만들고 또 그 마을들이 연대하게 되면 우리를 억압하던 커다란 삶의 구조마저도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사람이 가지는 새로운 삶의 원리(다른 사람과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되는가이다.


6. 다시 생각하는 노동시간단축 운동

대개 사람들은 그러한 '자율자치 공동체'라는 밑그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현실적 조건은 자본과 국가의 억압이 첨예화되고 일상적인 노동자의 생활이 임노동에 묶여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대안적 밑그림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우선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실성이라는 것조차도 결코 저절로 주어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얼마나 절박하게 열망하는가에 따라, 그리하여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가면서 그 얼마나 새로운 돌파구들을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리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적 조건 타령만 하고 앉아있다가는 아무 것도 현실화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바로 우리들의 의식적 행위와 온갖 분열의 벽을 뛰어넘는 연대 활동이 새로운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더욱 넓은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세계 변화의 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우리가 공동전선을 칠 수 있는 구호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그것은 단연코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아닐까 한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건강의 수호와 노동의 인간화라는 차원, 일자리 나누기라는 사회 연대의 차원, 여가 선용과 시간주권의 확보라는 차원 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간의 생산성 향상이나 기술발전, 노동자 의식과 욕구의 변화, 대량실업과 불완전고용의 증대라는 조건들은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현실적 절박성을 더 크게 해 주고 있다.
만일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일할 수 있다면 삶의 구조는 엄청 달라질 것이다. 텃밭을 일구며 새로운 감각을 키울 것이고 삶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다양한 사회운동 속에서 진보의 방향과 내용을 세우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주권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고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파열구들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어중간한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비록 단기간에 어려울지라도.
그런데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노동시간의 단축은 잉여노동의 감소를 초래하므로 자본은 당연히도 잉여노동을 더 많이 추출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유연화 전략을 들고나올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실질임금 문제는 물론이요, 노동시간의 유연화 문제까지도 함께 걸려 있어, 전 사회적인 지혜와 힘의 결집이 없는 한 관철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의 상호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시점이다.



7. 맺음말

'노동거부!'라는 구호. 이것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동, 자본을 지속가능하게(sustainable) 만드는 노동, 그리고 자본의 생존 논리 그 자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켜 자본의 몸불리기에 동원해내는 이 구조적 모순을 깨닫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구조와 그 구조를 온존시키는 삶의 방식을 어디서부터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아이디어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유능한 노동능력과 왕성한 노동의지를 갖춘 노동력을 양성하는 사회적 공장인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커리큘럼을 바꾸고 학습방식을 바꾸고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맺기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류주의, 일등주의, 엘리뜨주의, 기능주의, 적응주의, 국가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기존 학교에서의 참교육 운동, 새로운 대안 학교 건설 운동, 그리고 이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류가 필요하다.
둘째, 경쟁력과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키면서 자본증식에 혈안이 된 일터를 바꾸어야 한다. 작업방식을 바꾸고 노동시간을 과감히 줄이며(예컨대 하루에 한나절 노동) 생산물의 내용을 사회·생태적 필요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동료끼리, 상사와 부하끼리 맺어진 관계들도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산력주의, 경쟁지상주의, 효율지상주의, 이윤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하되 차별과 지배가 없는 일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노동운동이 매우 중요하긴 하나 그 근본적인 내부 혁신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특히 노동시간단축 운동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이 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개인주의화되고 물신주의에 젖어 가는 마을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마을을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공동체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삶의 자립도와 자율성을 증대시켜 나가야 하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증진시키는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개발해야 한다. 두레나 품앗이에 의한 건강한 집짓기와 건강한 먹거리 만들기, 건강한 옷 만들기, 건전한 놀이 공간과 문화 공간 조성하기, 교환가치를 중심에 두는 거래의 경제가 아닌 선물의 경제를 확대시키기 따위가 구체적인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구조를 갈수록 화폐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화폐독립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탈상품화' 전략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요컨대, 이 세 가지 핵심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란,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따라서 자본)을 직·간접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보람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본 원칙에 동의하는 다양한 실험과 노력에 대해서는 많은 수의 "예스!"가 필요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경쟁과 분열, 억압과 지배, 착취와 수탈,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을 고집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이구동성으로 "노우!"를 외쳐야 한다("one No!, many Yes!").
이러한 대안적 운동에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는 첫째, 지금까지 우리를 억눌러 온 온갖 피해의식이나 의무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기자신에게 책임성을 가지며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일이며(self-responsibility), 둘째, 어떠한 엘리뜨나 지도자에 의해 상층 중심적으로 이끌려가는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화를 통해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져 가는 운동(self-organizing)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노동자의 권리(내지 '노동권')란, 한편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동을 할 권리와 다른 편으로 반생명적이고 물신주의적인 노동을 거부할 권리의 통일물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삶의 자율성(life autonomy)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내희(1998), 노동거부의 사상-진보를 위한 하나의 전망, <문화과학> 99년 겨울, 제16호.
강수돌(1997a), 『경영과 노동』, 한울.
강수돌(1997b), 노동 중독 사회의 극복을 위하여, <비판> 제2호, 박종철출판사.
강수돌(1999), 『작은 풍요』, 이후.
A. 고르(1988),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 노동시간의 단축, 심광현·이동연 편저(1999), 『문화사회를 위하여』, 문화과학사.
P. 라파르그(1883), 여유로움을 즐길 권리, 강수돌(1997a), 『경영과 노동』 제10장, 또는 조형준 역(1997).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새물결.
S. 아로노비츠(1998), 탈노동 선언, 심광현·이동연 편저(1999), 『문화사회를 위하여』, 문화과학사.
이진경(1999),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 <진보평론> 창간호, 99년 가을, 현장에서 미래를.
임원택(1998), 심청이를 '정리해고'시킨 심봉사, 노기연(편)(1998), 『아빠 소리 하지마! 사람들이 듣잖아』, 노기연.
H. 하이데(1998),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출구: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조건, 고려대 노동문제 연구소(편),『미래의 일과 노동』, 미래인력연구센터.
허재영(1997), 노동 운동은 노동운동이기를 거부할 수 있는가, <비판> 제2호, 박종철출판사.
F. 힌켈라메르트(1999), 김항섭 역, 『물신: 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 다산글방.
H. Heide(1999), Arbeitssucht und ihre Folgen f r Unternehmen und Gesellschaft, Vortrag an der Aichi-Universit t Toyohashi am 22. Oktober 1999, Manuskript, Toyohashi, Japan.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 이 글은 누룽지님의 [[고병권]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빈곤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 시장경제의 일상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처음 올라온 내 눈을 휘둥그레 만든 것은 대우 빌딩이 아니라 곳곳에 누워있던 노숙자들이었다. 대학로에서 생활할 때는 마로니에 공원에 길게 늘어선 급식 줄을 바라보며 아이엠에프 이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제 종묘 산책을 즐기는 내 눈에 점심 한 끼를 얻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교통체증으로 늘어서 있는 종로의 자동차들을 보듯이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줄을 그렇게 보고 있다. 아,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한 사회의 익숙한 풍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빈곤을 풍경처럼 보는 내 눈이 무섭다. 잘 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되고 못 사는 사람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경제가 어렵다는 허망한 말에 수긍하는 내 고갯짓이 놀랍다. 잘 사는 소수를 만드는 과정이 비참한 다수를 만드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는 나의 신속한 패배주의. 빈곤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악랄한 방해자가 이것이다.


 

지난 달 말 미국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층은 3500만명을 웃돌고, 18살 미만을 기준으로 여섯 명 중의 한 명이 빈곤 아동이라고 한다. 사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 지구 전체가 ‘슬럼투성이’다. 20세기 말 지구의 지니계수는 낮추어 잡아도 0.67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의 상층 3분의 1이 모든 것을 갖고, 하층 3분의 2는 굶어죽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올봄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와 빈곤율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1996년과 2000년 사이 절대빈곤층은 두 배로 늘었고, 전체가구의 15%, 즉 6~7가구 중 한 가구는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히도 한국개발연구원이 되뇌는 것은 빈곤 양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그것이다. 시장의 폭력으로 생겨난 빈곤층을 없애기 위해 시장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시장활성화론’, 정부의 복지 지원이 자칫 사람들의 버릇을 나빠지게 해서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근로복지연계론’. 빈곤 상황에 대한 보고보다 우리를 더 암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제안들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디파치오는 지구적 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담론이 없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빈곤 문제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잘 지적했다.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지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비용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 담당자들은 재정경제부 눈치를 보고, 시민단체들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을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 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빈민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왜 빈민운동이 없는가. 디파치오는 이렇게 답했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다는 것.


 

결국 빈곤을 둘러싼 투쟁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패배주의적 시각과 고갯짓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수익을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 이 글은 누룽지님의 [[비나리]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과 지하경제]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비나리]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아직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경제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을 잡은 건 전두환 시절의 일이다. 77년 석유파동을 만나기 전까지 그야말로 완전고용의 신화 속에 중화학공업의 단 꿈에 젖어있는 우리나라 경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난 공급 과잉에 의한 전형적인 공황이 78~79년 경제공황을 만들어냈다. 박정희가 피격당하던 순간은 정치적으로만 혼란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경제적 위기는 공급과잉이 촉발시켰던 물가상승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물론 별다른 경제대책을 했던 것은 아니고 하여간 지 맘대로 물건값 올렸다가는 전두환한테 끌려가서 그야말로 줄경을 쳤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가를 잡는다고 해서 원화의 평가절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달러당 600원 시절에서 달러당 1200원 시절을 살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 물가상승 때문에 거래 단위가 커져서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크게 설득력은 없다. 물가상승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동일하게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화폐 개혁에 대한 논의는 고액권 발행 논의와 맞물려서 진행된다. 물론 고액거래의 문제점 때문에 임의로 발행되어 사용되는 자기앞수표라는, 은행 발행 수표가 수수료 등의 문제와 환전상의 문제로 그야말로 불필요한 비용이 사회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수면 위에서 논의되던 고액권 발행과 관련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의 일이다. 거래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까 고액권 발행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한나라당에서 추진된 일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차떼기를 할려고 고액권을 발행하려고 한다고 보는 것은 약간은 지나친 억측이다. 나쁜넘이 하면 모든 일이 나쁜 넘 같아 보인다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다시 국회의원 이계안을 비롯한 몇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 아예 디노미네이션 즉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당론을 몰아나간다. 이계안.... 이명박과 비교할 수 있는 린간이다. 이명박이 건설업으로 거물이 되었다면, 이계안은 90년대 석유화학을 만든 사람이고, 자동차 호황구도를 만든 사람이다. 전형적인 반개혁인사이기도 하지만, 혁신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혁신을 만드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는 메카톤급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이다. 당연히 현 경제팀은 강력 반대한다. 물어보나 마나다. 이헌재는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그려내고 싶은 의욕도 없을뿐더러 기업과 정부의 원할한 관계라는 관점을 가지고 현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 경제팀 혹은 재정경제부 자체가 그런 식의 세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초록화폐개혁을 지지한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화폐개혁은 일본과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을 가르게 되는 사건인 김영삼의 금융실명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지금도 바보 아니면 쪼다 정도로 막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만큼은 김영삼의 공적으로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가지는 힘은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르지 않는다. 덕분에 전두환 선생이 감추어놓은 돈들이 움직인 흔적이 자꾸만 꼬리를 밟히게 된다. 어지간해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는 잘 파악되지 않고, 이 지하경제는 현실적으로 국민소득의 10% 정도라고 추정하지만, 추정 방식의 문제점과 별도 항목들을 놓고 계산해보면 15%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3% 정도가 국방비에 해당하니까 군대를 세 개 정도 움직일 정도의 돈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를 형성한다고 보면 된다.

 

디노미네이션은 이 지하경제에 대해서 날리는 미사일 같은 거다. 고액권은 지하경제를 키우는 힘이 있는 반면에 디노미네이션은 지하경제가 움직일 공간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화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숨어있는 힘들을 한 번에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이 디노미네이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은 잘 단행하지 않는다. 대개는 국민경제 4~5% 선에서 지하경제가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화폐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국민소득 만 불 대에서 한 번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지하권력의 힘을 한 번은 털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에 화폐개혁까지 패키지로 진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화폐개혁 대신 투신사를 통한 양성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투신사들이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정책적인 토론거리가 잘 되지 않지만, 이 투신사들이 IMF 경제위기 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이 화폐개혁하기에 좋은 시점일까? 화폐개핵에 대해서 특별히 좋은 시점은 없다. 공황이나 호황이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개혁의 분위기나 사회구성원들이 동의가 있는 시점이 유일하게 화폐개혁이 가능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지하경제를 관리하는 방식은 세원관리와 신용거래 확대라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부당한 소득을 끝까지 찾아내 세금을 물리겠다는 강력한 세무당국과 개인 수표와 카드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나라에서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카드를 거래의 투명화를 위해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대신 카드발급 간소화라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필요할까?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지하경제를 적절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고 또 한 번은 지하경제에 집중된 경제적 권력을 털고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노미네이션은 열린우리당 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해서 결정타로 작용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고액권은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 정책이지만, 이걸 디노미네이션으로 화답(?)한 것은 초강수 개혁정책 같은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디노미네이션은 받아내기 어렵다. 관료들한테 전부 맡겨놓고 있는 경제정책은 한나라당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혁성향만 놓고 얘기하면 정부의 정책 보다는 차라리 한나라당의 정책이 그래도 비교적 개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결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확률이 많다. 1년 전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이헌재 부총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대로 한다고 하면,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정말 국기를 흔들 정도의 토목공사를 시행하기 이전에 투기 억제책 같은 것으로 디노미네이션 같은 것들이 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 골프장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혁신이라고 하지만, 쉽게 돈을 벌고, 어둡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쉽게 늘어져 있는 경제운용

기조에서 사회적 혁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외국기업이 환경규제나 세제가 복잡해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경제와 골 아픈 관행 같은 것들이 많으니까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경제개혁... 변화는 단순히 노동자 위주의 소득개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투명하게 질서와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개혁의 방향이고, 그런 면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은 투명보다는 불법이었던 사실을 법을 고쳐서 합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경제를 더욱 더 어둡고 음침한 사람들이 돈을 잘 벌게 만들어주는 지난 1년간의 변화에 던져진 숙제 혹은 퀴즈놀이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화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개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입장에 대한 리트머스 같은 것이다. 새만금이 환경정책의 리트머스였다고 하면,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의 개혁성에 대한 리트머스로 볼 수 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3 보도사진전 대상 작품


전쟁은 끝나야 한다!

 

 

- 수상부분 대상 

World Press Photo of the Year 2003 1st Prize People in the news Singles

- 작가명

Jean Marc Bouju

- 소속명

France, AP

작품소개 2003년 3월 31일 남부 이라크 나자프 시에 있는 美 101 공수사단 3여단 內의 포로수용소. 한 이라크 포로가 겁에 질린 4살난 자신의 아들을 안고서 달래는 모습.

 

* 출처: 좌파 사진작가 모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란 무엇인가

나에 대한 앎이 해탈을 여는 열쇠다.

 

'나, 나, 나' '내것, 내것'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하면서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유감 아니겠는가? 무엇이 나인가? 무엇을 진정한 나[참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도 관심 기울여 연찬해 볼 주제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한 채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한데 웬일인가?

 

자. 무엇이 '나'인가. 이 몸, 이 마음을 '나'라 하겠는가? 대충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고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과거세 긴세월 동안 '나다' '내 것이다'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해탈할 수 없다.

불조(佛祖)께서 제시한 요긴한 해탈 방편 하나가 '나'를 제대로 알아버리는 길이다. '제대로'라는 것은 과학적인 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방편적인 진지성을 의미한다.

'나'가 무엇인지 알고자 함은, 앎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당기기 때문에 '나'를 잘 알아버림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즉 집착을 벗기 위한 방편으로 나에 대한 바른 앎이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가 ,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자. 무엇이 나인가? 동사섭 장(場)의 대단원에서는 "당신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 당신의 모습입니까?"하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그쳐 묻는다.

"홍길동입니다." "모모의 아빠입니다" "OO의 남편입니다" " OO그룹의 사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몸입니다" "혼입니다"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등등 답해 봄직한 별의별 대답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답한 그것이 진정 '나'인가 자문해 보면 "여차저차하니 그것을 진정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진정 무엇이 나란 말인가?"하고 새롭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성실히 몰입하고 있노라면 대체로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이른다. 이 상태의 밀도를 거듭 심화시켜 나가는 길이 화두선(話頭禪)이요, 이 답답함에서 돌파구를 찾아 진일보하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 관행해 간다면 이것이 염불선(念佛禪), 법계관(法界觀), 일심산관(一心三觀) 등의 행법(行法)이다.

 

 

'참나'가 아닌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법

 

참나를 찾는 일에 있어 일반화시켜도 됨직한 좋은 방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정한 나[참나]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명상이다. 흔히 세상 사람이 '나'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네 겹정도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식의 주체[識主我)], 마음[心我], 몸[身我], 그리고 자기 동일시[自己同一視]의 내용인 '내것'이라는 것들[境界我]이 그것이다. 그림과 같이 나란 식주아, 심아, 신아, 경계아 등 네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진정한 나를 알고자 나의 겉부분부터 "그것이 진정 나인가"하고 물어 보자. 양파의 핵심을 찾고자 껍질 한 겹 한 겹을 벗겨가듯......

 

경계아(境界我 :  경계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수히 자기 동일시하며 집착하고 있는 몸 밖의 것들, 부모, 형제, 자녀, 남편, 아내, 동산, 부동산, 아끼는 물건들, 명예 권력 등등 소중한(?) 나의 경계아들! 그것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러면 놓아라. 쥐고 있지 말자. 자녀를 놓을 때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를 수 있다. 재산을 놓을 때 그 관리의 효과적인 길이 보인다.

 

신아(身我 : 몸나), 그것이 나인가? 몸이라는 것, 알고 보면 현미경을 동원해야 겨우 보이는 아버지의 정자 한 마리, 어머니의 난소에서 한 달에 한 개씩 생산되는 난자 한마리,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열달동안 먹었던 밥, 김치들, 내가 태어나서 꾸준히 먹어온 밥, 김치들, 그것들의 집합이 몸이다. 정자가 나인가, 난자가 나인가, 밥,김치가 나인가? 그것들을 "나야!"하고 붙들고 있는 자가 있다면 딱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몸뚱이 이것, 내가 아니다. 놓아라 내일 모레쯤 화장터에서 뿌연 연기, 한줌의 뼛가루로 흩어질 이 몸뚱이, 내가 아니다. 놓아라.

 

심아(心我 : 마음나), 그것이 나인가? 심아, 그것은 생각과 감정의 조합과정일 뿐이다. 생각[知], 감정[情], 욕구[欲], 의지[意], 생각/감정/욕구/의지가 기능적으로 무수히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이다. 꽃 한송이를 본다[인지작용 : 생각], 기분이 좋다[감정], 꺽어서 집에 꽃아 놓고 싶다[욕구], 꺽고자 한다[의지], 인생사 전반에 마음은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

이때 생각들이 나인가? 아니다. 그 순간 일어난 생각 기능일 뿐이다. 감정, 요구, 의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라는 것도 막연히 생각하면 무슨 실체(實體)가 있는 듯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그런 식으로 몇몇 기능들이 난무할 뿐이다.

 

식주아(識主我 : 인식의 주체)! 산이 보인다. 무 엇인가 보는 주체가 있으니까 그것이 산을 볼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아트만(Atman)' 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나무가 있고 돌멩이가 있다면 그 것을 만든 자[창조자]가 있을 게 아니냐는 생각이 '브라우만(Brahman)'이라는 형이상학적 신(神)을 만들어 내었다. 석가의 석가다운 역사 출현의 의미는 그 두 형이상학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다.

새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역할하는 '기능'이 있을 뿐 주체자라는 실체는 없다. 아트만이나 브라만과 같이,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상상의 관념 창고에 설정하려드는 것은 약한 유아기 인격에서 볼 수 있는 '믿음 심리'이다. 믿어버림으로써 어떤 욕구를 성취하고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믿음 심리'이다.

이 믿음 심리가 인간에게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믿음 심리가 없다면 한강교를 건널 때마다 이상(異狀) 유무를 검토해야 할 것이요, 이웃을 대할 때마다 흉악범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많은 종교 교설이 믿음 심리를 전제로 하고 시설된다.

 

해탈하지 못해도 믿음으로써 얻는 공덕은 아주 많다. 그러나 무엇이나 중도(中道)라야 좋고 상황에 따라야 하는 법, 불신 능사(不神能事)도 금물이지만, 믿음 능사도 금물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너무도 뿌리 깊게, 너무도 심각하게 당하고 있는 믿음 심리 피해 사례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이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 단계적으로 필요하지만 최종 단계의 성국 과정에서는 그 철석같은 믿음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석존의 보리수 밑 수행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그 당연하고 자명한 듯한 '나'라는 실체는 연기적 기능에 불과함을 꿰뚫어 보고, 미지근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던 불안[ ]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참나' 운운 역시 관념의 허상이다.

 

자, 마지막 '나'라고 버티어 봄직한 인식 주체[識主我]도 '나'가 아니요 한갖 기능임을 조견(照見)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겟는가? 자유감이요, 해방감이요, 대자대비요, 넘치는 생명력이지 않겠는가. 산산수수(山山水水)요, 묘한 있음[]이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이 넘치는 어떤 상태가 아니겠는가. 공(空)과 성(性)과 상(相)이 일여(一如)로 현전하는 아미타불의 일심법계(一心法界)가 이것임을 명상의 깊이만큼 점두(点頭)하리라 본다.

 

혹 '무언가 허탈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가? 이해도 된다. 노망한 시어머니를 30년 시중하다가 죽었는 데 문득 서운하더란다. 관념적으로 사색하지 말고 명상적으로 관조하노라면 사색 과정에 따를 수 있는 어떤 허탈감은 극히 일시적이고 명상의 깊이에 비례하는 충만감이 현전할 것이다.

혹 "아, 그러면 마지막에 현전하는 그 자유감 등등이 '참나'이겠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감 등도 꾸준히 흐르는 법. 그것에다 다시 이름을 붙이고자 할 일이 아니다. '진아'이니 '참나'이니,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믿은 심리'가 깔려 있을 수 있으니 깨어 잇을 일이다.

 

세간의 명인이 되는 데에도 뼈를 깎는 노력이 따르는 법. 해탈자라는 출세간의 명인이 되어야 할 마당에 적은 노력으로 되겠는가. 석존의 유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하셨다. 이 한 말씀에 담긴 석존의 간절한 비원(悲願)과 자비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음미해 볼 때 가슴이 메인다.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긍정 바탕 없이 초월 지평 안 열린다


해탈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불행의 극점에서 해탈의 극점까지는 무한분법(無한분법)적인 무수(無數)단계가 있다고 봐야겠지만 표현의 편의를 얻고자 삼분법(三分法)을 써 본다면, 욕구가 좌절되면(좌절됐다고 생각하면) 불행을 느끼고, 욕구가 성취되면(성취됐다고 생각하면 행복을 느끼고, 욕구를 놓아 버리면 해탈을 느낀다.

불교인이 지향하는 바는 해탈의 극점인 묘각(妙覺: 大覺)이다. 이 묘각을 위해서 일체의 욕구를 버리게 한다. 물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수양 수준이나 근기나 기질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모든 사람에게 "탐심(貪心)을 놓아라. 무상, 무아이지 않느냐"하고 요구하기로는 무리다.


많은 가르침의 현실을 생각해 보자. 사람은 대체로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욕구-좌절-분노-욕구-좌절-분노'의 악숙환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 욕구는 더욱 치열해지고 진심(瞋心)은 더욱 심각해진다.
욕구가 성취되어 기쁨을 느끼는 경우라 할지라도 성취될때까지 지속되는 긴장감은 분노[불유쾌 정서층]의 심각도를 높여 준다. 뿐만 아니라 기뻐함과 동시에 다음 성취를 위한 새로운 긴장이 시작되고 더 큰 성취 욕구로 재무장하고 나서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인생이란 탐(貪), 진(瞋)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탐, 진은 "나는 존재한다" "나는 불만족 상태에 있다" "나는 사랑받아야 한다."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등의 그릇된 사고 방식[痴]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이는 탐(貪), 진(瞋), 치(痴)를 세가지 독물[三毒] 이라 하여 철저히 제거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심리 구조로 보아 탐, 진의 뿌리인 "나는 존재한다" 등의 삿된 견해를 퇴치하기 위해서 공(空), 무아(無我)와 같은 존재론적 정견이 요청됨은 당연하다.

 

 

지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욕구 좌절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겹겹이 퇴적되어진 무의식 속의 탐, 진의 한(恨)이 무작정 "공이니라" "무아니라" 등의 초워론법으로 용해되기는 어려운 법. 중생 진화의 완료인 묘각을 결정짓는 주(主)바라밀 - 염불선, 간화선, 묵조선, 비파사나, 주력, 공관(空觀), 법계관(法界觀), 일심삼관(日心三觀) 등 - 에 전념하기 이전에, 혹은 현자 주바라밀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탐, 진의 한을 완화시키는 정화[카타르시스, 한풀이, 밝은 마음 강화] 작업이 조(助)바라밀로 요청된다. 방편(바라밀)무한이라 했듯이 그 길은 많겠지만 지족(知足)이라는 방편을 좋은 조바라밀로 부각시켜 본다.(주와 조는 정해져 있음이 아니고 공부인이 선택에 달려 있다. 에컨대 '수식관'을 주바라밀로 선택했다면 화두나 묵조도 조바라밀이다- 필자 주.)


지족(知足), 즉 '만족을 아는 것'이다. ,『법구경』에 지족 최부(知足最富)라 했다.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부자라는 말이다. 사람은 현재 이미 있는 것[旣存], 현재까지 이루어 온 것[旣成]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 없는 것, 아직 이루지 않은 것을 있게 하고, 이루고자 하는 데에 집착함으로 인하여 괴로움의 늪에 빠져든다.
기존기성(旣存旣成)을 누리는 것,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지족이다. 지족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 지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지행(知行)이 일치되기 어렵듯이 지족의 중요성은 알되 지족하는 것이 몸에 잘 익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해탈이니 구언이니 초월이니는 제쳐 놓더라도 세상 사람이 이 '지족'이라는 덕목 하나만이라도 일정 수준 이상 체득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은 보장될 것이다. 불행이란 대체로 '없는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지나친 긴장감과 이루지 못했을 때 따르는 실망감을 의미할진데, 지족이 태도는 현재 이미 있는 것, 이루어 온 것[기존 기성]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니, 행복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이것이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실천하는 첫 단계일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소승 대승을, 불법을 한마디로 가파하라 하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基心)이다. 마음이 일체에 머물 바 없느니 자유롭고 그 자유로운 마음[응무소주]로 세상일이 하니[이생기심], 그것이면 전부이지 않겠는가. 지족은 일체의 당하여 만족하므로 마음에 스트레스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왈 응무소주라! 얼마나 덕목인가.

이렇듯 지족(知足)이란, 『법구경』 어느 귀퉁이에 있는 한 개 단얼 치부해 버리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족 철학은 경전이 많은 곳에서 이런 저런 표현으로 드러나 있지만 중대한 정견(正見) 덕목 하나로 부각하고 있지는 않은 현실인 듯 하여 유감이다. 지족(감사, 기존 기성의 확인)은 이처럼 현재의 행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지족못하여 쌓여온 탐, 진, 치, 삼독을 녹여내는 좋은 방편이다.

그러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놓으면 편리하겠지만 어느 쥐가 어떻게 그 방울 다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뭇 중생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식의, '그림 속의 떡'과 같은 식의 현실성 없는 공리 공담(空理空談)이 되고 있다. 지족! 그 중요성을 열번 백번 알아도 지족하는 인격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관행(觀行)이다. 내면화를 위한 명상이다. 동사섭(同事攝)법회에서 법쇠 시간 45시간 중 10시간 정도를 할애해서 지족의 이론과 그 실습을 하고 있음도, 그것이 인격으로 정착되도록 돕자는 것이다.

 

 

지족 명상

 

지족의 관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방법론은 많은 것이다. 하나의 대안을 말해 보겠다. 지족[감사] 명상은 혼자 있을 때는 참선하는 식으로 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할 적에는 스피치 식으로 해도 될 것이다.

지족 명상, 곧 감사 명상이란, 내 인식 주체가 인식 객체에 대해서 "OO이 여차여차해서 감사하다" 식으로 생각[말]하는 것이다. 즉 인식 객체란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일 터이니, 자신의 마음을 원점으로 해서 마음, 몸, 기능, 업적, 가족, 이웃 등의 사람들, 가정, 환경, 사회, 국가, 국제 사회, 삼라만상, 태양계, 은하계 등을 동심원(同心圓)적 단계로 긍정 명상해 들어간다. 명상문을 미리 작성해 놓고 읽억면서 명상 생활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이다. 나에 대한 정체(正體) 개념이 애매하거나 나에 대한 가지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이 온갖 불행의 씨앗이다. 정체감이 애매하고 자아 개념이 낮은 사람은 매사에 주체성이 없어 우유부단하고, 열등감이 많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특히 주로 많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호감이다. 인생은 사람과 만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데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끼는 시각이 발달돼 있다면 늘 사람들 때문에 기분 저조한 불행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나' 와 '사람'에 대한 긍정(肯定) 명상[지족명상, 감사 명상]을 강력하게 해서, 굳어 잇는 어리석은 사고대(思考帶, 痴)를 긍정적으로 교정해야 한다.

 

긍정명상은 자신의 마음부터 시작함이 좋을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운 사람, 남편이든 아내든 아들이든 친구든 대상으로 해서, 혹은 아무 물건이든 하나의 물건을 앞에 놓고 감사거리를 발견해 보아도 된다. 동사섭 법회에서는 방 가운데 주전자이든 볼펜이든 죽비든 놓고 감사거리를 발견해서 표현하게 해 보면 그 단순한 물건 하나에서 수십 수백가지의 감사점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모든 수련생이 감동한다. 수련생들은 대체로 "하찮은 저 볼펜 하나에 이토록 긍정점이 많이 있는데 하물며 OOO은 어떠하겠는가?"하면서 기존의 부정의 시각을 녹여내고 긍정 토대를 정립하게 된다.

 

 

긍정 명상의 요령

 

1. 마음에 대한 긍정 명상

(1) 마음은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함을 명상한다.

 

(2) 마음의 무한 가능성을 명상한다.(무한한 환희의 가능성, 무한한 지혜, 자비, 힘의 가능성,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 등등.)

 

(3) 마음이 초차원성, 해탈성을 명상한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라하고 신성(神性), 불성(佛性)을 멀리 찾지 않는다.

 

2. 몸에 대한 긍정 명상

(1) 일단 생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근거가 되는 육체에 감사한다.

 

(2) 부붐적으로 모든 기관과 조직, 곧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 머리, 눈, 귀, 코, 입, 살, 팔, 다리, 손, 발, 허파, 염통, 혈관, 위장, 소장, 대장, 간장, 신장, 췌장, 비장, 대뇌, 소뇌, 간뇌, 척추, 신경, 모공 등등을 가능하다면 샅샅이 관찰하여 그 기능의 신비를 찬탄하고 그 건재함을 감사한다.

 

3. 업적에 대한 긍정 명상

(1) "나는 이름을 쓸 줄 안다" "나는 삼곱하기 칠은 이 십 일임을 안다"와 같이 극히 사소한 듯한 것들을 업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그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가치 부여를 튼튼한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이루어 온 큰 성취(?)에까지 샅샅이 통찰 명상하여 자아 개념을 높인다.

 

(3) 업적 면에서 자기보다 큰(?) 업적을 이루어 온 이웃과 비교 평가하여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일은 금물이다. 지혜 하나로는, 상대 평가를 피하고 절대 평가 시각으로 10등이라면 15등보다는 우수하지 않느냐식으로 기대 수위[집착수위]를 가능한 한 밑으로 내리어 만족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매사에 100은 '지향 목표'로 바라다볼지언정 '집착 목표'로 놓고 매달릴 일은 아니다. 직찹 수위는 밑으로 거듭 내리어야 한다. 만일 집착 수위를 '0'으로 끌어내리고 산다면 그것이 곧 도인의 삶이다. 집착수위를 0으로 하여 사는 사람은 나날이 좋은 날이요, 순간순간이 환희요, 경이로움일 것이다.

 

4. 이웃 사람에 대한 긍정 명상

사람 긍정 명상은 우선 우호감이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떠올리는 것이 좋다. 한 사람을 떠올리고 조용히 있어 본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하여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본다. 극히 자연스런 흐름이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나, 공통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1) 아마 영접하고 있는 분을 향하여 맨 먼저 일어나는 마음은 "안녕하세요"하는 인사이지 않을까 한다. 인사는 정성이 가득할수록 좋다. 내가 대하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을 부처로, 하늘로, 소중한 존재로 받들지 못한다면 부처를, 하늘을 귀한 존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자세로 최대한 공경의 절을 올려본다.

 

(2) 절을 올리고 가만히 있노라면 자연히 기도가 나오지 않을까. "OO님 행복하세요. 몸 건강하시고 소원하는 것들 두루 이루시고, 마음 크게 자유로워지시고 주변에 사람을 베푸시는 존재되십시오" 식으로 간절하게,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3)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지 않을까. 태어나서 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주변에 기쁨과 유익함을 일으켜 주었던 일 등등에 대해서, 아는 것은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정보를 모르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서 감사한다.

 

(4) 마지막으로 그분의 존재 자체의 신성함에 대한 찬탄이 나오지 않을까. 그 육체이 신비, 눈, 귀, 입, 팔다리, 심장, 폐장, 위장, 간장 등 많은 기관과 조직의 신비를 음미하며 찬탄한다. 특히 그분 속의 주인공[혼]의 신비는 그 어떤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 찬탄한다 해도 다 찬탄하지 못할 만큼 불가사의 한 존재이다.

 

(5) 사람에 대한 긍정 명상 소재는 이 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다채로운 사람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소리내어 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5. 기타 긍정명상

전기 전화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 문명의 혜택에 대해서, 물, 공기, 풀, 나무, 산, 강 등의 대자연, 태양계로 부처 뭇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중중 연기(重重緣起)하는 대질서의 파노라마를 밀밀하게 느끼면서 감사찬탄한다.

'아미타불' 한 명호에만 전념키로 한 수행자라도 공부 에너지 십분의 일만 할애하여 긍정 명상을 한동안 해둔다면 공부 능률이 배가될 것이다.

모든 종교인은 긍정의 바탕이 허술하면 현재의 행복은 물론, 초월의 지평이 (잘) 안 열린다는 자각하에서 개이적, 집단적, 사회적 긍정시각 열어가기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 (어찌, 세상에 걸을 길이 없던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약할 뿐이지.)

 

 

* 출처 :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견(正見)이라는 첫 단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을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혹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여, 부와 명예와 출세와 건강 등등의 조건들만 나열되었다면 당신의 행복의 수준은 1, 2학년 정도밖에  될 수 없다. 3, 4학년 수준 이상의 행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마음관리가 행복의 조건에 우선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행복의 조건 제 1호는 단연 마음관리다. 마음관리를 하지 않고 수준 높은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낚싯대를 들고 산으로 가는 것과 같다.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건만 먹구름이 그 온전한 빛을 가리기도 하니, 가리운 것만 거두면 이내 찬란한 광명을 되찾을 수 있다. 이 구름장을 제거하는 노력이 곧 마음을 관리한는 작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름을 제거하는 선교 방편(善巧方便)은, 구름 여하와는 상관없이 태양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 버리는 것이다. 곧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 이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마음관리가 구체적으로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행복과는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 행복의 조건으로 중요한 것은 관계 좋음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이 내적으로 불행해지는 확실한 이유를 사회화 과정이 잘 못된 데 두었다. 사회화 과정은 곧 인간 관계이다. 어렸을 때부터의 부모와의 관계, 동생과 누나와의 관계, 이웃 친지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뭇 관계가 좋아야 하는 것이 행복의 요긴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이 두가지 조건, 즉 마음관리와 인간 관계를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마음관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행복은 항상 어떤 요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행복은 정서 상태이다. 정서는 홀로 일어나는 법이 항상 무엇인가의 대상에 의해 일어난다. 하다 못해 꽃 한송이를 바라다본 이유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친한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소리는, 이유가 분명히 안잡히기 때문이지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모든 것은 더불어 관계함을 통해서 존재한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사고방식이다.

'베크'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는 사고에서 나온다. 사고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정서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고로부터 정서가 나오고 사고는 선택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최고의 정서[깨달음,  解脫 등의 핵심은 정서이다]를 체험하려면 사고를 재조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성제(四成濟)를 심리학적 언어로 잘 갈파한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게서 깨달음을 이루신 다음에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하신 첫 설법의 내용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였다. 우리 마음이 괴롭다[苦], 그 괴로움의 원인은 이러이러한 것이다[集],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진다[滅], 괴로움이 사라지고 멸이 현전하게 하는 방법론이 있다[道]는 것이다. 이 도(道)에는 여덟 가지 방법[八正道]이 있는데 그중 첫번째가 정견으로, 방법론의 핵심이며 도(道)의 체(體)가 된다.

이 정견은 존재론적 정견과 가치론적 정견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두가지 형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존재론적으로 바라다본다는 말은 대상을 보면서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이다" "저분은 선생님이다"라고 아무런 감정 평가 없이 그냥 사고(思考)만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가치론적으로 발달되어서, "저것은 꽃인데 얼마짜리일까"하고 가격으로 환산해서 바라다보거나 자기 감정을 삽입시켜서 바라다보게 된다.

 

아무튼 가치론적인 견(見)이든 존재론적인 견이든 바로 보는 견해라면 우리는 보다 행복할텐데 대상을 그대로 보는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행복을 누리는 데 장애가 된다.

우선 존재론적 정견부터 연찬해 보자.

 

 

내가 없는데 괴로움은 어디에

 

우리 인간이 욕구(탐심)를 갖고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안전(安全)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무수하게 많다. 우리는 이들 욕구가 성취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면 슬퍼한다. 그런데 욕구가 성취될 때 행복해진다는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완벽한 말이 못 된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행복의 정서를 체험하게 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행의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밖에서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얘기해도 내 속에서 인정이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3억 정도 벌었으면 이제 성공한 것 아니냐?"고 주위에서 얘기해도 "아니야, 아는 10억 정도는 벌어야 성공이라 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는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중생심은 욕구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기뻐하고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면 불쾌해 하는, 쾌-불쾌-쾌-불쾌의 윤희를 거듭한다. 그럼 이 수준 낮은 행복으로부터 수준 높은 행복으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인간에게 욕구가 있을 때는 그 욕구 이전에 욕구하는 '나'가 존재하게 되고, 욕구의 '대상'이 존재하는 법이다. '나'와 '욕구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욕구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밝히신 법은 욕구의 뿔히가 되는 주(主)와 객(客)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을 이루시기 전 죽음에 대한 불안이 꾸준히 따라붙자 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를 사유해 나가시다가 스스로 어디에 걸려 있는지를 아시게 됨으로써 나온 법칙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 여러 외도 스승들 밒에서 갖가지 수행을 하며 기적적인 경지까지 체특했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고행의 방법을 통해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도록 수행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3*7일 동안 명상을 하며 이치를 궁구해 나갔다.

 

첫째는 "나는 죽기 싫다", 둘째는 "그런데 나는 죽는다", 이 두가지 명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신을 주시하게 된다. "나는 죽기 싫은데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신 후 이 두 가지 앞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아셨다. 나는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야지 그 문제를 제외해 놓고 아무리 밑에서 해결하려 해 봐야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연 나는 존재하는가"를 정사유(正思維)하셨다. 그리고는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것은 연기적 존재이므로 이때까지 '나'를 주장하며 살아 온 것은 마치 그림자를 놓고 실체라고 믿고, 눈병환자가 어깨비를 보면서 달이 있는 것처럼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기고공(緣起故空)'이다. 대전제인 "나는 존재한다"할 때의 '나'는 실체가 없는 연기적 존재이다. 고로 공(空)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곧 주격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니, 따라서 죽기 싫은 자[주체]도 사라져 버린다. 곧 아공(我空)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살펴보니 연기적 존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법공(法空)이다. 석가모니가 중생들을 보니까 한결같이 "나는 존재한다" "너는 존재한다" 해놓고 여기에 욕구가 나와서 아등바등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석존께서는 중생들이 내는 그 욕구는 성취되면 성취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고 좌절되면 좌절됨으로 해서 슬퍼서 분노하고, 분노하면 욕구는 더 커지는 중생살이를 보시고, 나도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중생들도 가능할 것이다 하고 다섯 비구를 위시해서 45년간 법을 설하였다.  

팔정도 중 그 벽두에 정견을 설하셨는데, 바로 팔만대장경은 정견의 숲이라 할 수 있다. 무수한 나무 하나하나가 다 정견이라는 나무인데 그 중에서 제일 큰 아름드리 나무는 무아(無我)라는 나무이다. 곧 무아야 말로 정견 중 정견이다. 아공이라는 정견이 있는 자리에는 욕구가 들어 설수 없기 때문에 욕구를 성취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욕구의 주체인 '나'가 공(空)하므로 욕구의 객체인 역시 공(空)할 수 밖에 없고, 욕구의 주객(主客)이 돈망(頓忘)하니 툭 트인 해탈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고로, 사고를 바르게 함이 행복을 위해 요긴한 일이다. 정견이라는 방편을 놓치고 다른 방편에 매달려 있다면 지말(支末)에 끄달리고 있는 것이다. 정견을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바른 가치관, 바른 세계관, 바른 인생관 등이다. 정견(正見)을 정립하지 못하면 그 인생 제대로일 수 없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몸둥이 하나만 문제가 되지만, 가치관이 잘못되면 혼이 망가지는 법이다. 세세생생 그 망가진 혼의 인과를 받아야 한다.

마음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곧 정견 정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이 된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견해로 정립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활불교(活佛敎)적으로 정립되어 있기보다는 관념 불교, 죽은 불교, 머리 속에만 있는 불교로서의 가치관 정립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우려 된다. 이때 이 자리, 이 순간이 곧 삶의 도(道)가 되고, 멸(滅)이 되어야 한다. 이때 이 순간의 나의 손짓 발짓이 도가 되어야, 그것이 활불교이다. 관념적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정견의 중요성과 존재론적 정견을 강조해 보았다. 이어서 가치론적 정견을 밝힐까 한다.

 

 

* 출처: 용타스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 대원사

* 주니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