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아직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경제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을 잡은 건 전두환 시절의 일이다. 77년 석유파동을 만나기 전까지 그야말로 완전고용의 신화 속에 중화학공업의 단 꿈에 젖어있는 우리나라 경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난 공급 과잉에 의한 전형적인 공황이 78~79년 경제공황을 만들어냈다. 박정희가 피격당하던 순간은 정치적으로만 혼란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경제적 위기는 공급과잉이 촉발시켰던 물가상승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물론 별다른 경제대책을 했던 것은 아니고 하여간 지 맘대로 물건값 올렸다가는 전두환한테 끌려가서 그야말로 줄경을 쳤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가를 잡는다고 해서 원화의 평가절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달러당 600원 시절에서 달러당 1200원 시절을 살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 물가상승 때문에 거래 단위가 커져서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크게 설득력은 없다. 물가상승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동일하게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화폐 개혁에 대한 논의는 고액권 발행 논의와 맞물려서 진행된다. 물론 고액거래의 문제점 때문에 임의로 발행되어 사용되는 자기앞수표라는, 은행 발행 수표가 수수료 등의 문제와 환전상의 문제로 그야말로 불필요한 비용이 사회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수면 위에서 논의되던 고액권 발행과 관련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의 일이다. 거래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까 고액권 발행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한나라당에서 추진된 일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차떼기를 할려고 고액권을 발행하려고 한다고 보는 것은 약간은 지나친 억측이다. 나쁜넘이 하면 모든 일이 나쁜 넘 같아 보인다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다시 국회의원 이계안을 비롯한 몇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 아예 디노미네이션 즉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당론을 몰아나간다. 이계안.... 이명박과 비교할 수 있는 린간이다. 이명박이 건설업으로 거물이 되었다면, 이계안은 90년대 석유화학을 만든 사람이고, 자동차 호황구도를 만든 사람이다. 전형적인 반개혁인사이기도 하지만, 혁신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혁신을 만드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는 메카톤급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이다. 당연히 현 경제팀은 강력 반대한다. 물어보나 마나다. 이헌재는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그려내고 싶은 의욕도 없을뿐더러 기업과 정부의 원할한 관계라는 관점을 가지고 현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 경제팀 혹은 재정경제부 자체가 그런 식의 세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초록화폐개혁을 지지한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화폐개혁은 일본과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을 가르게 되는 사건인 김영삼의 금융실명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지금도 바보 아니면 쪼다 정도로 막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만큼은 김영삼의 공적으로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가지는 힘은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르지 않는다. 덕분에 전두환 선생이 감추어놓은 돈들이 움직인 흔적이 자꾸만 꼬리를 밟히게 된다. 어지간해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는 잘 파악되지 않고, 이 지하경제는 현실적으로 국민소득의 10% 정도라고 추정하지만, 추정 방식의 문제점과 별도 항목들을 놓고 계산해보면 15%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3% 정도가 국방비에 해당하니까 군대를 세 개 정도 움직일 정도의 돈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를 형성한다고 보면 된다.

 

디노미네이션은 이 지하경제에 대해서 날리는 미사일 같은 거다. 고액권은 지하경제를 키우는 힘이 있는 반면에 디노미네이션은 지하경제가 움직일 공간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화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숨어있는 힘들을 한 번에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이 디노미네이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은 잘 단행하지 않는다. 대개는 국민경제 4~5% 선에서 지하경제가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화폐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국민소득 만 불 대에서 한 번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지하권력의 힘을 한 번은 털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에 화폐개혁까지 패키지로 진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화폐개혁 대신 투신사를 통한 양성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투신사들이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정책적인 토론거리가 잘 되지 않지만, 이 투신사들이 IMF 경제위기 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이 화폐개혁하기에 좋은 시점일까? 화폐개핵에 대해서 특별히 좋은 시점은 없다. 공황이나 호황이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개혁의 분위기나 사회구성원들이 동의가 있는 시점이 유일하게 화폐개혁이 가능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지하경제를 관리하는 방식은 세원관리와 신용거래 확대라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부당한 소득을 끝까지 찾아내 세금을 물리겠다는 강력한 세무당국과 개인 수표와 카드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나라에서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카드를 거래의 투명화를 위해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대신 카드발급 간소화라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필요할까?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지하경제를 적절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고 또 한 번은 지하경제에 집중된 경제적 권력을 털고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노미네이션은 열린우리당 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해서 결정타로 작용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고액권은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 정책이지만, 이걸 디노미네이션으로 화답(?)한 것은 초강수 개혁정책 같은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디노미네이션은 받아내기 어렵다. 관료들한테 전부 맡겨놓고 있는 경제정책은 한나라당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혁성향만 놓고 얘기하면 정부의 정책 보다는 차라리 한나라당의 정책이 그래도 비교적 개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결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확률이 많다. 1년 전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이헌재 부총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대로 한다고 하면,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정말 국기를 흔들 정도의 토목공사를 시행하기 이전에 투기 억제책 같은 것으로 디노미네이션 같은 것들이 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 골프장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혁신이라고 하지만, 쉽게 돈을 벌고, 어둡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쉽게 늘어져 있는 경제운용

기조에서 사회적 혁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외국기업이 환경규제나 세제가 복잡해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경제와 골 아픈 관행 같은 것들이 많으니까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경제개혁... 변화는 단순히 노동자 위주의 소득개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투명하게 질서와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개혁의 방향이고, 그런 면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은 투명보다는 불법이었던 사실을 법을 고쳐서 합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경제를 더욱 더 어둡고 음침한 사람들이 돈을 잘 벌게 만들어주는 지난 1년간의 변화에 던져진 숙제 혹은 퀴즈놀이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화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개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입장에 대한 리트머스 같은 것이다. 새만금이 환경정책의 리트머스였다고 하면,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의 개혁성에 대한 리트머스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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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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