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의 금강경 강의

2004/10/01 18:42

* [펌] http://www.transs.pe.kr/ 2004. 4.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昔在燃燈佛所 於法所得不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室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菩薩 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卽非

 莊嚴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 하 薩 應如是生淸凈心

 不應住聲香味触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信 是名大信



  

   1.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잘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 주거환경운동 명상 등. 명상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생각을 정지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생각의 정지란 몸의 정지입니다. 그것은 호흡만 빼고 몸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 몸을 정지 하고 있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상태에서 일어나던 것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현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한 순간 전에 사유된 인식 결과의 총체물이며, 그것이 또한 다음 순간 마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을 정지하고 생각을 정지하는 것은 이제까지 의식의 흐름 안에서만 이해한 것을 너머 의식 밖의 것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 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습관에 의해 파악된 나이며, 업종자의 흐름에 종속된 자아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기 관찰을 하다보면, 한순간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타가 함께 열리는 삶이 느껴집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과 타인의 마음의 흐름이 함께 어우러진 삶이.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자아, 즉 자신의 영역이 사라지면서 무아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건전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무아를 통해 발생하며, 이건 몸을 정지하고 오래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것. 그건 자신만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우주가 한없이 넓어져 사회영역을 미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는 것, 그게 명상입니다. 이 명상행위는 정지상태 같지만 실은 역동성을 동반합니다.

 몸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열어 가면 열어갈수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이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은 잘 살기 위한 첫 번째 길입니다. 현재적 자신을 있게 하는 습관적인 흐름이 바뀌어야합니다. 습관적인 기운과 종자를 전부 바꾸는 것, 이전까지의 자신을 바꾸는 것,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깍지를 낄 때 신발 신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요. 우리는 습관대로 행동합니다. 오른발을 먼저 내미는지 왼발을 먼저 내미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요. ‘습관’ 이란 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사유는 습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발을 신는 동작 자체를 자각할 때 우리는 다른 삶 살 수 있습니다. 오른발 왼발, 신을 신던 습관적 기운과 다른 흐름을 스스로 만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고, 그건 집중된 마음으로 행해지는 자기관찰을 통해 이뤄집니다.





   2.

 ‘개념’ 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소라는 것을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왜 소를 소라고 할까요. 그건 다른 것과 다른, 소의 특성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의 본질에 해당하는 성(性)은 없습니다. 소라는 성을 보는 우리의 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라고 하는 것의 특성을 보는 것.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성을 본다는 것. 이 봄에 의해 규정된 성은, 이제까지 자신이 인식한 대상의 결과물이 그와 같이 우리 앞에 인식된 것입니다. 즉 본다는 것이 성을 결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는 일. 일체의 어떤 것들을 떠나서, 다른 것과의 대비를 떠나서, 그 자체로서의 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앎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묘하게도, 알려고 하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앎을 다 놓을 때, 역설적으로 앎이 드러납니다. 견(見)과 비견(非見)이 동일한 지표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함께 존재합니다. 견이면서 비견이고, 비견이면서 견인 그런. 그게 앎의 형태입니다. 우리의 사유의 결과물이 언어로 표상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삶 자체가 언어를 통해, 사유를 통해 드러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언어 이전에 마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연기적 상황에서 총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따뜻한 흐름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기표현은 배움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배움 없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결과물인데, 이 결과물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결과가 경직되면, 삶의 역동성을 묶습니다. 이런 묶임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 무아.

 나는 ‘무엇’ 이다 라는, 규정성이 사라지는 것이 무아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무아로 열릴 때, 사회적 연대가 자비로운 흐름으로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현행과 습기가 일시에 소멸하게 됩니다.

 이전의 자심상속에서, 열린 마음을 통해 타심상속으로 변환돼 가는 것. 습관에 의한 기존의 인연 조건이 달라져 열린 세계로 가는 것. 꼬리뼈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그 흐름 기운이 수미산에 흐르는 지구적 기운과 일치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우리와 동떨어진 독보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만이 중생을 온전히 존경한 분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존경할 수 있는 마음 내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근거 자체가 무아적이며, 관계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중생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니, 국회의원들이 서로를 지칭 하는데, “존경하는 누구누구 의원님”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서로를 존경하는 걸까요. 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할까요. 국회의원들이 부처님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할 때, 정말 ‘존경하는 의원님’ 이 있을 겁니다.



  


   3.

 우리의 삶은 주로, 업종자의 훈습에 의해 ‘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 ‘아’와 ‘비아’ 가 전체적으로 연기적 상황을 열어갈 때만 삶은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삷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해야 합니다. 오랜 자기관찰 끝에 마음의 일시적인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비약은, 자기도약은, 묘하게도 정해진 모습이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자기 삶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모든 수행자들은 함께 사는 삶 안으로, 열린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열어 같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청정함을 내야 합니다. 그건 사유가 정지될 때부터, 몸이 정지 될 때부터, 하여 삶이 전체적 어울림이라는 것을 알 때부터 가능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큰 불이 났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상황이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지만 이웃들은 그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불을 끄려 움직입니다. 주인의 마음에는 집에 대한 집착, 즉 고착된 아의 흐름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불을 끄려는 행위가 불가능합니다. 그저 정신을 멍하니 놓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웃들은 불을 끄기 위해 행동합니다. 집착, 얽매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얽매임을 놓지 않으면 어울림의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규정된 얽매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외부대상의 얽매임으로부터 내재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 마음의 내부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명상 등을 오래하면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습관에 의한 우리의 정신과 몸의 얽매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통해 ‘아’ 의 훈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눈, 코, 귀  등등 모든 습관 훈행의 인식장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몸의 감각을 열어 다른 몸이 돼야 합니다. 무아적 삶으로 사회적 연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으로 느끼고 한 삶으로 숨 섞어가는, 머리와 논리와 이해의 삶이 아닌, 온몸의 삶을.



  4.

 깨달음의 내용이 각 종교간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한 가지. 세상에 과연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과연 같습니까. 아닙니다.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도 그 둘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고, 차이 그 자체도 그 자체로서 같질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하나의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판단 근거가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무엇이 같은가의 범주에서 다른 종교들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다른가에 의해, 즉 차이에 의해 종교 깨달음의 내용을 논해야 합니다.

  내 판단근거가 가장 높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 그룹이 인정하지 않는데. 불교는 자기존재의 근거가 불경이고,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불경에는 불경의 견해, 성경에는 성경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견해를 갖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 먼저 따뜻한 마음을 내야합니다.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에 의해 종교의 깨달음의 내용을 논의해야만 합니다. 자기인식을 버렸을 때만이 어울림 속에서 ‘상호이해’ 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종교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공포스럽게 느끼게 한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종교입니다. 이웃 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오려보면 충분히 공포스럽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하는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어야 알게 됩니다.

 흔히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신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부처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였습니다. 함께 어우러진 장에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지녔던 분입니다. 삶의 연기적인 모습을 내신 분입니다.

 본래적 모습으로 삶이 흐르는 것. 그 생명의 모습이 바로 부처이며 부처님은 그 모습의 구현체입니다. 일체 중생의 모습 그대로의 상황, 그 자체가 부처입니다. 부처는 그러니까 부처의 모습, 즉 모든 중생이 어울린 모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깨달아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 모습의 당위성이 바로 부처입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됩니다. 어울림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이 여래입니다. 위아래 규정하는 것과 어떤 상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형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무상, 무아의 지향점이 같은 것입니다. 한 개체가 무상과 무아인 앎의 장, 연기적 삶을 열어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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