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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서 초안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학교의 명칭이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2007년 7월 6일 현재 정부와 행정자치부는 미래지향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담았다는 이유로 ‘국민’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의 몇 글자를 바꾸어 수정안을 법령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맹세’ 안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같은 새 문구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낡은 형식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자유와 정의의 개념을 국가가 규정하고 독점한다면 이는 결코 진리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을 미국의 충성 맹세에서 보지 못했는가? 정말로 그 나라가 맹세로 읊어지듯이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국가’인가? 미국은 충성 맹세로 ‘국민’에게 주입된 애국주의를 양분 삼아, 아직도 20세기의 낡은 패권 질서를 전 세계에 강요하고 있다. 미국의 한 12세 소년이 간파한 맹세의 본질을 들어보라.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가 보장되지 않는 한, 충성의 맹세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위선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또 행자부는 ‘충성’의 사전적 의미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한 개인의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강요된 ‘충성 맹세’의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맹세’나 ‘효에 대한 맹세’ 따위를 법령으로 만들어 ‘국민’에게 선창시킬 계획도 가지고 있는가?

 

정부는 더 이상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국민(nation)’이기를 강요하지 말라. 국가=국민의 등식은 20세기를 피로 얼룩지게 한 국가의 낡은 호명 체계일 뿐이다. 기껏 그 부끄러운 ‘국민’학교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리고도, ‘국민’을 만드는 ‘맹세’라는 고갱이는 끝내 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이미 여러 외국에서는 ‘국민’이라는 호칭이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국민’ 개념이 아니라, ‘헌법에 기초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자유인으로서의 시민’ 개념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국민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기 경례와 맹세를 강제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지적 ․ 영적으로 다양할 수 있는 자유, 심지어 정반대일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심지어 ‘국민’ 의례가 강제적 절차 대신 임의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애국심이 약화될 것이라는 믿음은, 주권자들이 지닌 숭고한 자유정신을 폄하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며 오히려 주권자에게 텅 빈 충성의 맹세를 강요하려 들지 말고, 국가야말로 주권을 가진 시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똑바로 실천하라.

 

행정자치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 존폐 논란이 일자 “다시 한 번 국민의 뜻을 물어보자”며 여론조사를 벌였고, 75.0%의 ‘국민’이 ‘맹세’를 유지해야한다는 의견을 보였기에 “폐지한다는 것은 오히려 국민의 뜻을 행정부가 거스르는 것”이라며 ‘국기법 시행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논란이 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를 공론화하는 공론의 장이 반드시 선행되었어야만 한다. 최소한의 토론회나 공청회도 하지 않은 채 여론조사를 한다면, 수십여 년을 ‘국민’으로 호명되어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국민’으로 키워온 ‘맹세’가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이겠는가? 또 형식적인 여론조사만으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침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정부와 행정자치부는 ‘국기법 시행령’ 입법 시도를 중단하고 시민사회와 학계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라. 그렇지 않으면 애국주의가 낳은 폭력과 국가 간 경쟁에 신음하고 있는 시민사회와 노동자, 여성, 청소년, 소수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리라.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미래 세대가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끝까지 ‘자랑스럽지 못한 국가’와 싸울 것이다.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삭제하라!

아울러「대한민국 국기법」에 포함된 ‘국기에 대한 경례’ 조항도 삭제하라!

 

2007년 7월 9일

 

연명 단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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