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무현

1.

2002년 대선 때 난 구치소에 있었다. 대선 당시까지는 재판 중이었기 때문에 구치소에서 부재자 투표를 했다.

그 때 나는 사회당 당원이었고 사회당 후보를 찍었다.

득표율 0.1%였던가? 땡중보다 표가 안 나온다며 방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고 차라리 민노당 후보를

찍으라며 여기저기서 권하던 분위기였다. 머리 속은 다른 일로 복잡했던데다 구치소 안에서는 대선의

열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 하나는 노무현의 대선 광고였다. 존 레넌의 이매진 노래에

맞춰 나오는 그 광고에 눈물을 훔쳤다. 그 뒤 5년 지금 말고는 노무현이 내게 주는 의미는 크지 않다.



2.

학생운동을 할 때 후배가 물었다.

"운동권들은 김대중을 자본가의 하수인처럼 묘사하는데 정말 그런 거냐고?"

대답했다.

"김대중 개인은 아마 매우 멋있는 사람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반할 수도 있다. 사형까지 받은

사람인데 어지간한 사람보다 엄청난 내공과 깊이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도 그랬을 것이다. 매우 강하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돼지저금통으로 선거자금을 모으고, 행사장을 점거한 시위대에게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얘기하세요.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배려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는 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북한보다 많은 군비를 썼는데 여태까지 자기 나라 작전권도 없으니 여태까지

이 나라 군대는 뭐했냐...이건 직무유기 아니냐?' 고 기득권을 정면으로 면박주고 그래서 적으로

돌리는 행위도 서슴치 않는 대통령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 이명박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인이다.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새삼 반추할 그 무엇이 내게는 없다. 원래부터 환타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를 몰라본 것도 아니다.

노무현과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정치는 다른 것이다. 당시 이게 내 생각이었고 그래서 멋진 사람

이전에 멋진 이념과 멋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

사회당은 가진 자원이 너무 적어서 언젠가는 나도 후보를 하겠지 생각했었다.

당시 내가 가진 환타지는 당당하게 돈없는 자들의 정치를 이야기하며 하고 싶은 얘기 다하고 처절하게

낙선하는 거였다. 내가 가진 약점, 내가 가진 정체성으로 정치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덜 비겁하고 정직한

정치였다.

노무현은 감동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경상도에서 민주당의 간판을 달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는 것. 그는 그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을 자신의 언어로, 정치로 발전시킬 줄 아는 몇 안 되는

착하게 영리했던 정치인이다. 사람들은 그런 패배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끝내 그가 당선되었으니...



평화주의를 자신의 언어로 선거에 출마하는 장면을 몇 번 상상한 적이 있다. 이것은 정치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평화주의는 일상적인 정치 영역의 언어로는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현실 정치에 대한 무력과 환멸은 도를 넘어서 때로 자신을 공격한다.

사회당의 분열 이후 내 인생에서는 '정치'라는 단어가 실종됐다. 5년간 모든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았고 '정치=비겁합=냉소'라는 코드가 너무 강력하게 작동해서 한 동안 신문 정치면조차 보질 않았다.

병역거부는 이런 냉소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래서 반국가, 비국가적인 사고들이 자라났고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앞에서 늘 도피만 꿈꿀 수는 없었지만. 점점 오타꾸화 되어가는 생활.



4.

학원 강사들끼리 모여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떤다. 몇몇은 사람들의 분노가 언제 터질지 그것밖에

관심이 없다. 조문행렬 속에서 이명박에 대한 분노 밖에 읽어내지 못한다. 또 한 사람은 수업 내내

근조 리본을 달고 다녔다. 남은 한 명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임금님을 모시는 듯한 권력의식이

남아 있어 불편하다고 한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조문에 나서는 이유는 다르지만 나는 그 거대한 행렬 속에서 끝없는 자기 고백을

본다.

내가 볼 때 저 행렬은 온전한 자기치유과정이다. 자책감, 미안함, 분노, 그리움, 애틋함...그 모든 자기

감정을 스스로 주어삼키고자 조문에 나선다.



그리고, 이것은 내 고백이다. 


이런 국면이 올 때마다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진보진영. 광우병 사태 때도 그랬고.

노무현 관련 기사를 클릭. 울면서 속으로는 냉소하고 있는 자기분열.

이 분열이 내 안에도 있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만한 내 언어가 없다. 언어 이전에 감정이 먼저 온다.

그 감정을 인정한다. 사람은 정당정치의 부품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죽음은, 그것도 자살은 너무 애틋하다.

노무현은 그나마 정치인 중에 내 정서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기도 하다. 솔직하고 화끈하고 정이 많고...


그러나 남는 자에게 냉혹한 내일이.  일시적인 거품은 걷힐 것이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손익계산서를 따져볼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 전국정당화, 휴머니즘과 민주주의. 이런 것에 대해

사람들은 좀 더 생각해보게 될 것이고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이명박의 지지율이 조금 떨어지고

다음 총선과 대선에 미칠 변수가 어쩌고 저쩌고...그러나 여전히 가장 심각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기분열 양상을 보이는 30, 40대가 이명박을 지지했던 이유. 경제적 욕망은

늘 사람들을 분열적인 양상으로 몰아갈 것이고....우리 안의 이명박은 또 다시 작동할 것이다.

술자리에서 '노무현씨는 아마도 파병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위의 관심법으로

그를 향수하면서 아파트 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분열 양상은 계속될 것이다. 




남는 건 결국 내 문제다. 나의 언어. 나의 정치. 나의 일상.

이제부터는 그 문제를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아주 작은 시작으로 나도 이제 냉소를 걷어치우고

한 사람의 몫을 해야겠다.

냉소도 지겹다. 상처입은 자들의 피난처는 그 나름대로 안락함을 제공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자기연민이 도가 지나쳐 상처를 추억하고 지난 이야기를 각색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금이 여기를

빠져나가야 할 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대산과 낙산사

영국에서 돌아온 날맹과 간만에 여행. 친구가 열라 차를 몰아준 덕분에 편하게 갔다왔다.

오대산에 있는 절 상원사, 월정사를 갔는데 여기선 그냥 그랬다.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적멸보궁에도 들렀다. 난 이름만 듣고 섶는 대몽항쟁을 위한

임시왕궁 같은 곳인줄 알았다. 흠...그런데 그 진신사리는 직접 볼 수가 없어서 밍밍했고...

진신사리를 지키고 있는 스님은 묘상한 염불만 외고 있는데...들어보니 이렇게 저렇게 돈낸 사람들

잘 되라고 이름과 주소를 나열해주고 있는거다.

염불은 늘 음울하고 몽환적인데 그 목소리로 '임용고시, 수능시험, 사법시험...'따위를 낭독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에휴~~ 종교란 게 참 나약한 인간처럼 형용모순이다.



>> 오대산. 강원도 평창군에 있다.


오대산에서는 상원사와 월정사를 다녀왔다. 참나무 숲길도 살짝 걸었다. 아직 절정이 아니었지만
숲의 기운이 좋았다.



>> 절 입구에 서 있는 어르신들.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토속신앙과 결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낮에 보니 코믹하지만 밤에 혼자 보면 오싹할 듯. 친구말대로 절에서 혼자 수행하다 정신 나가지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 다람쥐...똑같은 쥔데 쥐랑 너무 다른다. 쥐의 세계에도 F4가 있을 듯...



>> 상원사.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런가 인테리어가 퓨전이다. 돈 많이 벌었나??




그러나 다음 날 들른 낙산사는 완전 흥미로웠다.

농담 삼아 해수관음상이 게이같다고 했지만 정말 여성스럽게 묘사된 부처도 흥미로웠고...
(아무래도 바다를 품어 아는 이미지라 그런 게 아닐까? 보통 바다나 대지는 여성성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으니)

절벽에 위치한 홍련암도 신비로웠다.

친구는 '자기가 죽을 자리로 봐둔 곳'이라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했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소리에 섞여 들리는 목탁과 염불 소리.

그리고 쉬지 않고 절하는 사람들. 그 아줌마의 모습에 온 세상의 고뇌와 번민이 가득해 보였다.

가정주부들이 종교라도 믿으니 그나마 화병걸려 죽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은 기분. 

절이나 성당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고 늘 그냥 관광지처럼만 여겼는데 낙산사는 조금 흥분됐다.






>> 코끼리, 용, 사자, ?? 등등 비현실과 상상과 이방의 존재가 현실 속으로. 근데 서 있는 사자 좀
웃겼다. 허벅지 튼튼하겠어...


>> 예쁜 풍경. 몰래 갖고 오고 싶었다. 생선 훔친 자리에 영광 굴비 하나 걸어놓고..


>> 해수관음상. 곱다. 손에 왠 술병을?? 외로우셨나?



>> 홍련암. 몽환적이었던 곳.



고스톱으로 돈 땄다. 역시 점백엔 연속 나가리 4배판이 최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꽃향기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밤공기를 타고 꽃향기가 진하게 퍼진다.

이 꽃/향기에 어울리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

영화가 끝났다. 한 번 북받쳐 오른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수 많은 잡념과 말들이 질서를 찾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뭔가 심오한 거 같은데 못 알아 듣겠다.", "영화 지루하고
재미없다." 졸다 일어난 여자, 그 여자를 안아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근사한 러브스토리를 기대
했다가 투덜대며 나가는 연인들.





장면 1- 한나 "내가 무엇을 느끼건 간에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과거를 대하는 첫번째 태도.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한나의 태도는 전쟁을 대하는 다수의 정신상태를 대변. 자신은 그저 힘없는 공무원에 불과하다는.
한나는 홀로코스트 감시원에 지원했다. 먹고 살려고 그랬다. 매달 10명씩 가스실로 보내는 사람을
선별했다. 그것은 그저 공무였다. 마치 동사무소에 앉아 기초생활수급대상자를 분류하는 9급 공무원의
작업같은. 그 작업 과정 어디에도 감정은 없다.  분류기준이 있다, 규정이 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려면 오래된 사람이 나가야 한다, 자리가 비좁았다. 분류하고, 보내고, 새로 들어오고,
일상은 반복된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났다. 그 때의 기억은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여기서 잠시 논리적인 설명을 위해 부가설명.


1.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마사아키 노다 지음 |서혜영 옮김, 길 출판사)는 수감 중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보석 같은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비교문화정신의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집단적인 망각 상태를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집요하고 파고 들어간다. 인터뷰 대상은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징집되어 만주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던 일본인들. 난징대학살과 태평양전쟁은 물론 731부대(흔히들 마루타 부대라 부른다)의 존재까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개인들의 증언 속에서 되살아난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했던 밤,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는 생체실험, 초년병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어 살해당한 무고한 농민. 이 책은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전쟁과 살육에 무뎌져가는 과정, 전쟁 이후 가해의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그 집단적인 망각과정이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로 나타나고, 결국 또 다시 일본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가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죄의식이야말로 우리들(일본사회)의 귀중한 문화이며, 진정으로 상처를 입는 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

2차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유죄선고를 받았다. 국가가 학살과 침략행위에 참가하고 동조할 때 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이에 저항하는 군인이 있다면? 광주시민을 진압하려는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훗날 역사는 전쟁을 거부한 이들을 영웅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이들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 선택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침묵하고 따를 뿐이다. 당장 살아야 한다. 저항의 대가는 너무 가혹하고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그 큰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라는 말이 모든 걸 압축한다.


어찌보면 자신도 전쟁이라는 수레바퀴에 휩쓸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다수는 이 선택을 차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살짝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적당히 비겁하게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이 늘 다수의 선택이며 가장 강력한 침묵의 연대보증이다.

 


한나로 인해 힘겨운 감정. 솔직함. 성실함.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면 가장 생활력 강하고 듬직한 존재였을 이 사람. 

일생을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던 이 사람.

한나로 인해 불편한 감정. 죄의식의 결여.

출소를 하루 앞두고 몇 십 년 만에 마이클과 재회한 장면에서조차 일관된 그 솔직함과 죄의식의 결여.

 

한나의 자살은 마이클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자신에게 내린 사망선고. 한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마이클. 

 

 

 

 


장면 2- 마이클 "요란하게 헤어질까 아니면 조용하게"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써먹을 명대사가 있나 검색해봤다. 명대사는 대부분 한나의 것.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마이클 대사는 전부 어릴 적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날린 대사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분명하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역사는 그 안타까운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만들어주는

양념같은 것.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의 태도를 답답해한다.

 

끝내 재판정에서 한나가 글을 몰랐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사랑을 원하는 한나에게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나의 유언에 따라 돈을 전해주러 갔을 때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은 심하게 대사가 없다.

늘 울고 있는 그 눈. 그것이 모든 대사다.

마이클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가 없다.

마이클이 할 말이 없는 이유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한나에게 물었던 것은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이었다. 

사랑에 관대한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몸서리쳐지는 장면. 완고함. 결벽증.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하냐는...

사랑과 역사적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이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조차

이분법적 사고를 용인하지 않았던, 끝내 타협을 거부했던,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편'이라는

대다수 사랑 지상주의자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그 태도.



마이클은 진심으로 한나를 사랑했다. 

녹음테이프를 보내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던 것은, 그 사랑이 너무 멋져서가 아니라

지난 시절과 화해하고 오래 동안 가슴 속 깊이 쌓여있는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치료할 용기를

냈다는 사실.

동시에 마이클은 역사적 책임감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수 많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둘 사이에 화해는 가능했을텐데...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가능성.

하지만...답은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그 마저도 마이클은 준비하고 있었던 듯. 계속 관계에 미련을 보였지만 체념의 태도 역시

늘 준비해두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자의식. 끝도 없는 반성. 

이제 그는 그 모든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독일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일본의 태도는 관심도 없다.

적어도 수 많은 반성을 거듭한 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불편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제 충분하다고 여길까?

그들에게 한나나 마이클의 태도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  모든 의문은 딸의 몫인걸까? 그는 최대한 성실한 태도로 많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이제 너의 몫이 생길거란다.......


<더 리더:책읽어 주는 남자>라는 제목만 보고 연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영화 마켓팅은 늘 본말 전도. 짜증이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쿄 소나타, 워낭소리

>> 도쿄 소나타


카가와 테루유키는 <유레루>부터 시작해서 너무 찌질한 역만 나오는 듯.

막판으로 갈수록 심하게 지루했음. 상상력 부재=대안부재.

꼭 무슨 대안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애써 긍정하려는 것도 조금 억지스러운 듯.

그렇게 절망적인 어조로 일관하다가 해결은 결국 피아노라니...
(그래도 피아노치는 장면은 아름답다.)

특히 이상한 남자의 등장 이후로는 괜히 웃음만 피식 피식 나왔음. 영화가 조금 우스워져서.

권력의 중심에 선 아버지와 가족만 바라보는 어머니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으로 그렸다....고작, 그거 할라고.



>> 워낭소리


눈물도 났다.

근데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나는

1. 소가 불쌍하다.

2. 할머니는 더 불쌍하다.

3. 할아버지가 제일 덜 불쌍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랜 토리노

얼마 전 씨네21에서 <그랜 토리노>에 대한 영화평을 보고 이 번 만큼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최근 <체인즐링>까지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들려왔다. 남이 평가하면 덩달아 평가하고 싶어지는 심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끝내 안봤던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표상되는 미국식 정의와 착한 마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머니즘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보수라해도 강자와 약자의 논리를 버릴 수 없는 한

그게 그거다. 개화한 마초와 여성의 관계 역시.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많이 힘들었다. 씨네21에서 보았던 영화평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 보수주의가 지난 단점까지도 모두 떠안고 가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유언장을 미리 보는 것

같다는. 그 영화평 때문일까 나는 그를 평가할 수 없었고 그냥 한없이 서글퍼졌다.

왜일까? 경계심과 불만으로 가득한 눈, 이죽거리는 입, 세월에 무릎꿇은 수많은 주름, 과장되게 거친

말투, 지독한 도덕적 강박증, 모든 권위에 대한 반감, 일상처럼 달고 사는 외로움과 술, 그리고 영원히

지우지 못하는 전쟁의 상처.



그 모든 것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장면에서, 아주 영화 극초반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옆집 사는 수가 말을

걸어올 때부터. 타오가 일을 거들기 시작할 때부터. 몽족 아줌마들이 쉴새없이 음식과 꽃을 날라줄

때부터. 자식들보다 망할 동양인들이 자기 마음을 훨씬 잘 안다고 투덜댈 때부터. 대사와 장면 하나

하나,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 하나 그게 너무 시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결론이 아름답지 않으리란 건 미리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가 원해서 강해진 것이 아니라 부서지지 않으려고 악으로 버티며 강해진 그 남자가

이유없는 폭력과 맞섰을 때 결론은 비겁하거나 비참하거나.

비참하지 않기를 바랬다. 비겁은 더더욱 아니기를 바랬다. 그러나 힘으로 이길 수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그러나 힘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고, 강함이 약함을 이기고...

폭력의 고통과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악순환하고....

그걸 포기한 마지막 장면은 너무 큰 고통과 아픔이었다.

그 순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더 이상 영화 속 질문이 아니었다. 



왜 세상은 아무런 악의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외면할 수도 부딪칠 수도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가 끝내 멋진 복수를 선택했다면, 그냥 계속 꼰대로

남았다면, 인종주의자로 남았다면, 그래서 유산만 탐내는 가족들 틈에 둘러싸여 비참하게 죽었다면

조금은 동정할 수 있고 그 동정 못지 않은 냉소를 퍼부어줄 수 있었을텐데.



세상에 대한 단선적인 분석, 사람에 대한 이분법적 편가르기,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단. 이런 것들에 자신이 없고 그 만큼 이 영화가 힘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리한 건가?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겁하게 살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리한건가? 비겁한건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그냥 즐겁고 싶다.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재미있거나, 혹은 유익하거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너는 펫, 비몽

1.

만화 [너는 펫]을 봤다.

일본 소설, 일본 드라마, 일본 만화, 일본 영화 등등....


일본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심리묘사가 섬세하다,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엮어낸다, 남자 캐릭터들이 여성화되어 있다 등등....

일본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밍밍하고 지루하다, 탈정치적이다, 쪼잔하다, 너무 가볍다 등등....



일본 드라마는 못 보겠고,

일본 영화는 어쩌다 가끔 보고,(대개 비주류 영화)

일본 소설은 한 때 유행이었던 거 같고,

일본 만화는 일상이다.


일본 만화의 우울함, 세기말적 자학, 인간 심리의 극단 뭐 이런 것들이 묘하게 끌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림이나 스토리가 기본 탄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조금씩 순정만화(로 분류되는)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스물 다섯 이전까지는

과정되게 큰 눈, 작은 컷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글자, 과도한 환타지, 사랑이야기에 대한 거부감,

무엇보다 남자라는 자의식...이런 것들 때문에 순정만화를 안 봤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요즘은 꽤나 재밌게 본다. 오히려 치고 받고 주먹질에 강호의 달인들과

거리의 복서만이 넘쳐흐르는 코믹스의 세계에 이별을 고한지 오래.

꽃보다 남자는 너무 짜증나서 다 못 읽겠고, 너는 펫 정도면 무난하다.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그런지 만화 속에 담긴 말의 의미가 이전과는 달리 구체성을 획득한다.



너무 너무 재밌게 봤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주인공 스미레의 관계맺기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다.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말과 행동이야 연애관계에서 어차피 도드라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고 여성에게 강요되는 품성이란 것이 더더욱 불편한 것이지만....

엘리트에 능력 있고 이쁘고 성깔도 있는 스미레가 유독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급소심증과 눈치보기로

일관할 때는 조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가장 식겁했던 대사는 하스미에게 작별을 고하는 스미레가 했던 말

"부탁입니다. 헤어져주세요."

이건 참....완전 난감이다. 자신의 결심으로 헤어지는데 헤어져달라는 건 뭔가?

과도하게 남에게 선택을 미루는 일본식 어법을 감안하더라도 고개를 90도 숙이며 저런 말을 내뱉는

장면에서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더라. 한 편으로는 짜증도 나더라. 헤어지는 것 마저도 남이 해줘야 하나?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또는 지나치게 의식하는 어법을 여성이 사용하니까 굉장히 불편하다.


...그리고 홧김에 직장 여성에게 거칠게 화풀이하는 하스미는 결국 남자. 시종일관 중성 매력을

남발하다 막판에 스미레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다케시도 남자. 그 남자들을 대할 때마다

급격히 여성화되는 스미레는 사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고...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자아발견이라는 식의 결말은

어쩐지 헛헛하다.





2.

비몽을 봤다. 오다기리 죠 말고는 전혀 남는 것이 없는 느낌.

에휴. 몽환적 분위기도 좋지만 이렇게 비유만 난무하고 당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설정도 이젠 지겹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도 좋지만 왜 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충분히 쉬운 해결책을 두고도 극단적인

결말로만 가는 것일까? 그걸 멋지게 포장하는 것도 이젠 짜증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3월] 꽃이 피나요?

3월 13일


꽃이 피는 건가요? 난 지금 술이 살짝 취했고, 그냥 꽃이 피는 건거요? 그렇게 물어요.

꽃이 피겠죠?? 누구에게나...그게 봄이잖아요. 꽃이 피잖아요.




봉중근 열사까진 참겠는데 이치로 영어 못한다고 신나서 지랄하는 것들은....븅신들....

그렇게 자랑할 게 없어서...그런 걸로 우월질이냐?? 열등감쟁이들.




진보넷 블로그가 너무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다. 이걸 옮겨야 하나??

난 자주 쓰지는 않지만 누군가 보길 바라면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새로운 룸메가 들어왔다. 많이 힘들어한다. 또 그 사람 덕에 많이 즐겁다.

그녀에게도 봄이 온다. 봄은 온다. 그게 봄이 아니라면. 아니, 봄 너마저.



동네 만화방에 가서 20세기 소년 마지막권은 왜 없냐고 물었다.

마지막권은 아직 안 나왔다고 말한다. 그 만화방, 자격미달이다.

20세기 소년 마지막권은 제목이 [21세기 소년]이다.

결국 나는 만화책을 사고 말았다.

나는 25권으로 완결된 만화 가운데 마지막 2권만을 소장하고 있다.

어색하고,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만화책 딱 2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칸나는 큰 활약을 못 한다.

내 블로그 칸나일파는 칸나에게 바치는 20대의 마지막 순정이었는데...

칸나....아~~ 어릴 적 듣던 칸나 앨범과는 다른 느낌. 훨씬 설레고 가슴저미는 이름이야. 칸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당시엔 감독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재밌게만 봤는데

 

나중에 철들고 다시 보니 곳곳에 역사적 장치들이 꽤나 많이 깔려 있더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다를 보기 전에는 그런 비슷한 느낌을 상상했다.

 

개인의 일대기가 좌~악 펼쳐지고, 숱한 역사적 사건들이 양념으로 들어가고,

 

그 이야기가 죽음으로 마무리 될 때는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이른 군상들의 면면을 볼 수

 

있을테다. 허탈함, 씁쓸함, 달관과 수용, 넉넉함, 이해와 용서, 축복, 고귀함, 반성...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죽음이란 그런 모습이다.

 

 

본 사람들 의견은 대체로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다. '좋았는데...조금 기~~일더라.' 정도.

 

나는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중간에 살짝 졸긴했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성장영화 포함.

 

저 인생이 대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저 순간에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보면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보다는 최대한 감독의 주관적 개입이 자제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중심에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변 이야기들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사랑이 전개되는 방식도 조금은 맘에

 

들었다. 영원이란 없다는 벤자민의 현실적 사고, 그럼에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모습.

 

최고의 발레리나로 명성을 얻다가 부상을 당한 후 방황하지만 멋있게 제 삶을 찾아나가는 데이지,

 

적극적이면서도 성숙한 모습. 무엇보다 그 배우 둘은 왜 그리 멋지고 아름다운지...브레드 피트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멋있고...케이트 블란쳇은 매력적이고 우아하다.

 

 

 

먼 길을 돌아 제나와 결합하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미국 보수주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이고 올바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포레스트 검프는 너무 착해서 조금은 정치적이고 유치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모든 삶이 다 다큐멘터리다. )

 

반면 '벤자민~~'의 담담한 어조는 극적 재미가 크진 않지만(그래서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

 

나이듦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멋있게 늙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세월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데이지였다. 아름다운 외모, 절정의 발레리나. 부상으로 발레를 접고

 

점점 어려지는 벤자민과 대조적으로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 끝내 이별을 받아들이지만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그 말 '굿나잇 벤자민'....

 

마지막 순간까지 애 늙은이 벤자민을 보살피는 장면이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세월을 대하는 벤자민의 태도도 성숙해보였다. 젊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무기로 쓸 수도 있었을텐데...

 

늘 미래를 대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행동이 괜찮아보였다. 뭐랄까 가장 기쁜 순간에도 존재하는

 

숙명적 비관주의 같은 것.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