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에 대한 정의 2

먼저 기회주의로 유명한 카우츠키의 글을 인용하여 이 글을 시작해보자. 비록 사회배외주의자 이지만 그래도 예전엔 혁명적인 사상을 가졌던 그에게서 나왔던 그래서 레닌이 인용한 글을 인용한다.

"요구들이 강령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든 가 아니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조항'이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요구들은, 주어진 세력편성아래서 실현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현존사회제도와 양립할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용이하게 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의 길을 닦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고려에 따라 확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의 세력 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 강령은 주어진 시기를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오늘날의 사회의 모든 우발적인 사건들을 포괄하여야 한다. 그것은 실천적 행동뿐만 아니라 선전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요구들의 형태로 추상적 주장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켜야한다. 유토피아적 사변에 빠지는 일 없이 우리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실천적 목표들이 멀면 멀수록 더 좋다. 즉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대중에게 더욱 더 분명해질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이론적 전제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강령은 우리가 현존하는 사회, 현존하는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중에서. 레닌 저작집2-1 전진출판사)

혁명이란 무엇을 의미 하는것인가? 피지배계급이 현존의 지배계급을 뒤업고 자신들의 세계를 창출해나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가장 온존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현 체제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앞으로의 체제, 즉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모습을 구체화 시켜서 그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할수 잇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강령이 아닌가! 강령을 통하여 노동계급을을 조직화하고 계급의식화하는 것이며,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요구가 되는것은 대중들에게 자본주의의부정을이끌어 그들의 체제를 만들어 나갈 수 잇는 목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면 어느 대중이 신뢰를 하겠는가? 동지들! 동지들의 강령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혁명적인 사상을 희석시키고 야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하여 강령을 만들었는가?

"과도적 요구는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아"(삶의 파탄을 막고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요구(3) 이하 요구(3) 해방6호) 니기 때문에 "궁극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과 개량투쟁을 올바로 결합해 가야 한다."(요구(3))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동지들이 강령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살짝 들어가면 회원학습자료집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낮은 차원에 머물고 있는 대중의 의식수준을 충분히 고려한 과도적 요구와 과도적 강령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 해" 나갈 때만이 "궁극적 과제의 실현이라는 길로" 갈 수 잇다라고 제기 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지적이 나오는데 첫 번째가 바로 대중의 의식을 고려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실현 가능한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만이 자본주의 틀을 깨고 대중들의 투쟁이 궁극적 목표를 찾아 간다라고 한다. 위 두 가지를 하나로 통일 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인 것이다. 그러나 해방연대의 동지의 바탕은 이미 대중의식의 낙후성으로 인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를 낙후시키고 있다.

"...노동자대중들의 의식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회원학습자료집)"대부분의 활동이 개량쟁취투쟁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개량쟁취는 더욱더 어려워지는 상태가 되었고, 이는 다시 투쟁수위를 낮추는 요인이 되고 투쟁수위를 낮추는 것은 더욱더 투쟁성과를 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요구(2)해방5호)을 할 뿐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령을 실현이라는 것으로 맞추다 보면 오히려 대중을 현실이라는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절망이라는 늪으로 Q@k지게 하는 결과만을 보여줄 것이다. 강령이란, 분명하게 하나의 의식에 대한 질적인 목표를 심어 줄 수 잇는 것이지만 그 한계성을 못을 박으면 언제든지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으로 들어 갈 수뿐이 없는 경계선에 있는 것이다. 노동대중은 이미 경제투쟁을 하면서 사회주의로 나가기 위한 투쟁의 바탕을 깔고 있으며, 이를 권력투쟁으로 발전시키며, 그 정점에서 유지하고 발전시켜 내야하는 것이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다. 노동게급의 투쟁의시작은 자본주의 부정에 시작되며 그 맹아적인 형태는 생존권투쟁이며. 그 형태가 부르조아에게서 자신들이 빼앗긴 권리를 찾는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투쟁을 정치투쟁으로 권력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발전경로이며, 주관적인 개입에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 특히 지배계급의 대응방식에 따라서 수동적이지만 피지배계급의 행동의 형태가 이루어 질 것이다. 그것을 의식수준을 가지고 핑계를 대는 것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도망가기 위한 하나의 길을 열어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 본인은 대중의식에 대한 고찰을 섰다. 읽어본 동지도 있을 것이고 못 읽어본 동지도 있지만 그 글에서 "대중의 수준이 미약하게 시작되는 것은 그들의 전체의 요구 수준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며, 여기의 교차점으로 직접적인 생활상의 문제를 제기 하는 밑바탕으로서의 경제적인 요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배계급의 대응방식과 대중들의 할수있다, 또는 하면된다라는 의식의 공유 속에서 피지배계급의 경험이 녹아들어 점차적으로 높은 권력에 대응하여 체제를 흔들게 된다." 라고 썼다 대중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과 투쟁속에서 의식을 높여가고 있으나 사회주의라고 자처하는자들은 아직도 대중의 대중으식의 미약성만을 찾아서 아직도 투쟁을 방기하고 잇는 것이다. 대중의 의식은 혁명의 급격한 고양속에서 분명하게 권력에 대한 투쟁을 위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준비를 위하여 대중들에게 그 목적과 당의성을 설명하고 그들의 가는 길에 횃불을 밝혀야하는 것이 누구나 알고 있으나 이를 행동 속에서 망각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핑계로서 대중의 의식을 찾으면 안된다. 동지들이 대중의 의식을 무엇으로 보는지는 그들의 투쟁의 형태를 보면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노동계급은 혁명의 와중에도 경제투쟁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고 그럴때도 그렇게 외칠것인가? "아직도 대중의 의식 수준이 낮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도 권력을 장악 할때가 아니다"

한국자본주의의 위기 심화는 이미 하루 이틀전의 일이 아니다. 이미 태생부터 무계급사회로 나가기 위한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과정으로 본 맑스는 그 대안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이루어 질때만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 시작된다라고 생각했다. 현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의 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농민들의 쌀 수입개방 반대, 노동자계급의 비정규직철폐, 도시빈민들에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빈집점거 등등. 이미 자본주의를 부정해도 될 정도의 물적토대가 쌓여 있으며 그에 대한 권력을 잡을 계급들로 양적으로 성장하여 더 이상 한국을 반봉건사회라고 하는 조직은 더 이상 자리를 잡을 곳도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노동자 정부를 외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론을 설명하면서도 강령은 아직도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직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동지들의 강령은 결국 보여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다. 대중들의 의식이 미약한 관계로 실현가능한 것을 강령으로서 제시할 때 그들은 일어설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이 궁극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갈것이라고...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본다. 강령은 현실의 객관적인 계급투쟁의 쟁점을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파헤쳐서 근본적인 모습과 현실적인 개량 적인 모습 속에서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하나의 다리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노동대중을 구체적인 노동자정부가 해야할 일을 제시하고 이를 하기 위한 제 투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대중들을 선전선동하며, 조직화시키고, 계급의식으로 무장 시켜야하는 것이다. 그 요구가 실현되지 못한다라고 하더라도 이를 통한 자본주의 모순을 폭넓게 보여주어야 대중을 대안을 더 쉽게 피부로 느낄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아는 "최대강령적 요구로....발전해가려는 전망 속에서 제출되는 요구"(요구(3))는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대중의식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은어로서 그러한 꿈을 갖는 것은 로또대박을 노리는 서민을 우롱하는 처사로서 사회주의를 향해서 나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교를 부시는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동지들의 강령에서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 어느 몽상가의 하루의 꿈일 뿐이다. 동지들의 강령의 의미가 그렇게 나올 수뿐이 없는 것은 바탕에 객관적인 사실보단 동지들의 관념을 적용해서 민주노동당이라는 틀 안에서 편안하게 노후보장을 위하여 대중의식이라는 허울, 또는 만병통치약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지들 !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갖다붙이기만 하면 그 모양을 가지고 대중을 사회주의로 이끌고 나갈 수 가 있다는 것인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자연발생적인 대중들의 투쟁을 사회주의 이상과 접목시키고, 그 투쟁을 현대과학의 수준으로 만들며 사회주의 신념과 확고하게 결합시키며, 사회주의를 완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투쟁을 이용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 강령이 지녀야 할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하여 대중을 실현 가능한 목적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망을 제시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현실의 체제를 부정하게 만들어야 함과 동시에 사회주의라는 대안으로서 대중을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강령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강령이 이러한 목적을 상실했을 땐 부르조아 정당의 선거 공약과 다름이 없고, 이를 통한 대중은 계급간의 차이점을 경험을 통하여 얻지 못하고, 자신들의 투쟁의 성과를 부르조아에게 헌납하게 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10.26선거에서 한나라당에게 말할 필요성도 없이 패배한 쁘띠 부르조아 개량주의정당의 모습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잇는 것이다.

동지들의 주장이 비록 잘못되엇다라고 비판을 받는다하여도 강령을 제출도 못하고 강령의 이름만 내세우면 도망가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들 보단 오히려 진보했다라고 할 수 잇지만, 동지들의 잘못된 사상은 과학을 관념으로 후퇴시키는 역할을 하는 총대를 매는 꼴인 것이다. 우리에게 과학은 신념이면서 생활인 것이다. 그 사이에 관념적인 사고는 들어올 틈도 없겠지만, 한올의 틈이라도 생겼다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결국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나무꾼 신세가 될 것이다.


이미 남한은 자본주의의 과잉으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촌의 농민들의 경제가 핍박을 받고잇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곡을 깨기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인식시켜야 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강령은 물질적 개량적인 요구와 더불어 사회주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하는것이다. 그래서 강령이 갖는 모습은 개량적인 모습과 더불어서 혁명적인 모습을 갗추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강령은 대중들에게 개량적이기도 하지만 결코 현 자본주의체제의 부정을 통헤서만이 가능 할것이고, 그 시작은 노동자정부로 부터 되는것을 제시 해야 하는것이다. 우리의 다음 사회에 대한 모습을 보여줄땐 당당하게 하나의 거침도 없고, 거짓도 없이 보여 주어야 하며, 그러한 모습에서 대중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하고자 할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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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5 17:32 2005/12/0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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