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에 대한 정의 (3)

 

 

본인은 강령에 대한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하다가 10년도 더된 자료 중에서 강령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졌던 기억이 났으며, 그때 발행되었던 문건 중에서 어느 조직에서 발행  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사상이 현재의 노동자의 힘이라는 정치조직과의 사상과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라고 판단하여 일부 인용하여 시작하겠다. 그 문건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론의 정립을 위하여' 라고 한다.

"강령이란... 전국적으로 대중에 뿌리깊게 구축되어진 당적 조직의 체계와 그러한 역량에 바탕해서만 강령작성은 가능하다는 의미 외에도. 당적 조직의 특수성,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전위 대오로써 당이 갖추어야할 고유한 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이란 사상의지의 단 일체 일 때에만 당 조직으로 기능 할 수 일수 있으며, ...... 강령은 명확하게 '괴학적 사회주의 당적표' 이어야 할 것이다."

윗 글의 전체 내용으로 봤을 때  강령은 당적표현이고, 당이 존재 할 때만이 강령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나온다. 물론 당적조직이 강령을 가지고 활동을 해야 하며, 노동자대중에게 더욱더 힘을 줄 수 있다. 당이 가지고 있는 외피 전국적 정치 조직이기대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정치 조직과는 질과 양적인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당이라는 것 자체가 대중에게 권력에 대한 도전의 목적을 분명하게 하여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강령은 당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때 만 필요한 것이라는 점으로 제기 했으니 1991년도에 강령에 대한 사상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한 사상의 밑바닥에 두고 현재까지 나타난 강령에 대한 글이 있어서 잠시 옮겨 놓겠다.

"강령은 자본주의 성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노동자계급이 부르조아 사상 및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 온 실천을 총괄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요구되는 노동자계급의 진로와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강령은 단순한 이론들의 총괄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그 자신의 피로 얼룩진 투쟁의 역사와 세계 곳곳에서 국지적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자본의 분활 통치에 대항하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경험을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으로 재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 때부터 싸워 왔던 그 역사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조직하면서, 미래를 향한 우리 자신의 실천을 조직화해 내야 할 것입니다. 강령 건설은 바로 이런 우리 자신의 실천적인 의식화, 즉 실천을 통해서 획득된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을 조직하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그 투쟁을 미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 자신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의 이념적 프로젝트의 건설 투쟁이 되어야 합니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강령은 단순한 이론들의 총화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가 강령을 '작성'이 아니라 '건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강령은 항상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계급 투쟁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하며, 계급 투쟁에 대한 개입을 통해서 실질적인 무기로 전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령 건설 작업은 계급 투쟁의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입이라는 정치적 실천 그 자체로부터 시작되며,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 자신을 미래 사회의 주체로 승인(주체와 객체는?- 필자)함과 동시에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강령 건설의 궁극적 주체는 노동자 계급 그 자신의 투쟁이라는 점을 승인(누가)하는 것을 그 출발로 하고자 합니다.

○ 그런데 이 승인은 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승인함과 동시에 주체로 조직하는 과정이라는 양자의 현실적인 모순을 승인하기 때문에, 강령 건설은 첫째, 이를 우선적으로 자각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조직된 특정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조직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둘째, 특정한 정치조직에 의한 제안·제출된 강령은 노동자 계급 그 자신의 실천적인 투쟁들과 발전에 복무하면서 그들 자신의 투쟁과 경험이 강령 건설 과정,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조직이 제출하는 강령은 어느 당이 가지고 있는 그럴 듯한 강령이 되거나 정치조직 내부의 자족적 정치 행위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통해서 획득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다시 검증되고 교정을 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힘의 소개중에서)

현시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당이 없는 관계로 노동계급의 사상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은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으나, 이들을 하나로 묶어 놓은 조직이나 사상을 대변할 만한 내용을 가진 강령이 없는 관계로 하나의 목소리가 날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이들과 함께 민주주의 중앙집중주의가 이루어져 운영이 되는 전국적인 정치조직을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강령이다. 운동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의 통일 과정으로 엮기게 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로 나가는 구체화된 노동계급의 목적을 가지고 이를 조직화 할 수 있는 것으로써, 당면 혁명의 동력과 동맹 및 제휴세력을 찾아내어 피지배계급의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현체제를 부정하게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강령인 것이다. 그러나 현시기에서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전국적인 정치조직이 없는 관계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안식처인 혁명정당이 시급히 필요한 것이며, 완전한 강령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초안을 가지고라도 선진 대중을 조직화해야 하는 것이 의무이다. 당적활동을 할 때만이 당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자칭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강령초안 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강령은 전국적 정치 조직이 존재 할때만이 가능하다라고 외치는 91년도의 한 조직처럼 현실에서 강령의 외침을 찾아 내지 못하고 묵묵히 쁘띠부르조아가 하는 데로 따라가는 것은 부르조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지식인적 반항인 것이다. 벌써 맑시즘의 혁명 1세대가 있어온지 20년이 넘어 섰지만, 좌파라고 자처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목표와 과제 추진 경로등을 구체적으로 공유 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조차 어떠한 모습을 구체화시킬 수 없는 천박한 사상의 수준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다른 정파 조직들의 강령의 초안이나 내용을 대안도 없이 무시하여,  마치 자신들이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내고 있으며, 언제나 당위적인 제안의 수준으로 머무를 수뿐이 없는 것으로 되었다.

노동자계급이 비록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투쟁을 하며, 노동관료나 노동귀족과는 분리 된채,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더불어 대중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고립되고, 분산되여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의 슬로건으로 체제내의 개혁인 '비정규직 철폐'를 외친다라고 한들, 개혁은 개혁으로 좀더 약한 타협점으로서 법률로 지정되고, 이를 실천에 의한 실현으로서 바라보게 되는 강령적인 시각으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속박하고, 대중에 대한 기만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한 전국적인 정치조직이 없다는 핑계로 강령에 대한 초안도 작성하지 못하여 대안을 제시 못하여 쁘띠부르조아 개혁에 이끌려 가는 것은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인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부르조아적 궤변에 빠지게 되며 변명만을 늘어놓게 될 것이다. 강령이 건설이던지 작성이던지 관계없이 헛소리만을 늘어놓고 정작 해야 할 일 조차도 하지 못하는 조직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부르조아에게만 득이 될 것이다. 노동자의 힘의 동지들은 강령의 최소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강령이 로또대박처럼 번호만 잘 찍으면 몇 백만분의 일의 확률 속에서 하늘에서 벼락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여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낮은 차원에서라도 함께, 아니면 하나의 조직에서라도 시작을 하면서 - 솔직히 해방연대의 강령의 내용이 문제가 있으나 명함조 내밀지 못한 조직보단 대안을 가지고 있다라는 측면에서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일관성 및 총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과 선동을 보다 더 일관성 있게 대중 및 선진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들을 조직화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도 시작 할 때 하나의 전국적인 정치조직으로써 당이 결성될 것이며, 사상의 밑거름으로써 뿌리는 강령은 전국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결집시켜 자본주의체제에게 철퇴를 내리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들 수 있는 도구는 정치신문, 인터넷, 방송 등등 다양하게 표현되어서 나타날 것이며, 현 시기에서는 인터넷 방송이 그 대안으로써 역할을 자임하게 될 경우가 크다. 이런 시작은  작을 지라도 현실의 노동계급이 처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기지개를 펴기 시작 할 것이다.

어느 조직이라도 강령이 없다면 이미 만들어 놓은 조직의 강령이라도 가져다가 사용해야 옳다. 그것을 비판을 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있다면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함이 옳다. 대안이 없다면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으로서 표현되어지는 프롤레타리아트조직의 사상에 무엇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강령의 형식적인 사용을 함께라도 하다보면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 서로에 대한 비판을 하며, 정치적인 조직으로 하나 하나 엮기에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의 슬로건으로 적들에게 보여지며 대중들은 커다란 감명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면 무엇이 필요한가? 아직도 선배를 따라 자신의 정치 노선을 지키겠는가? 자신이 속해 있는 써클의 사상에만 빠져 자신들의 실천과 이론적인 오류를 아집으로 굳건하게 지킬 것인가? 대중정치조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정치조직들이 자기들만의 새장 안에 들어가 있어서, 그안에서 놀고 있는 모습은 우물 안의 개구리만을 만들어 낼뿐이다. 자기도 부르조아의 사상인 써클주의, 지역연고, 선후배사이 등에서 나타나고 잇는 혁명운동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아는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연줄로 인하여 정작 대중은 자신들만의 길을 갈 뿐인 것이다.

강령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어떠한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가치는 실천적 의미에서 나타날 것이며, 이것은 계급투쟁의 전 과정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와 기회주의와의 벽들 사이에서 검증되어 질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 하나로 모아질 땐,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지위를 이양 할 것이고, 다시 탈환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모습을 제지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잇는 것은 자신들의 가장 굳건한 무기인 조직을 유지할 때 가능하며, 이는 그들이 가지는 강령이 존재 할 때만이 가능 한 것이다.

"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획득된 교훈은.... 생존권적 요구를 넘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하고 있다.(누구에게 제기 하고 있는가?).....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본의 질서를 극복하고 사회의 운영을 위해 전면으로 나설 때 가능하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굴종의 삶을 살 것인가, 사회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자본의 공세는, 둘 사이에 중간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으로 자본의 사슬을 끊고 사회주의 전망을 만들어 가자! 해방5호)

무엇으로 가능한가? 그것의 표현은 무엇인가?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실질적 권력을 형성하고, 생산과 생활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운영과 생산통제를 만들어가자는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건데, 불법파견 투쟁을 위한 원하청 공동의 공장위원회를 건설하는 과정은 분할지배와 현장탄압이라는 자본의 질서에 반대하고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확대시키는 민중권력기관의 맹아를 형성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혹은 물류의 공영화와 이에 대한 노동자 관리, 통제의 강화는 생산을 노동자들의 요구에 기반해서 조직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의 질서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자주적 질서를 세우는 사회주의적 실천이 자본에 대한 생존권 확보요구와 함께 가야 한다."(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으로 자본의 사슬을 끊고 사회주의 전망을 만들어 가자! 해방5호)

사회주의는 이전의 소수지배계급이 다른 소수의 지배계급으로 바뀌던 방식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혁명 운동의 세력이 쿠테타나 내란 방식만 가지고는 권력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전망 속에서 , 그 전망을 담보할 수 있는 조직이 존재 할 때만이 가능하며, 이를 통한 피지배계급의 권력에 대한 의지가 함께 달아올랐을 땐, 임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붉은 카페트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 하게 하는 것이 강령이며, 강령을 가지고 조직화 시켜나갈 때만이 가능 한 것이다.
 
"(3)부분적 요구, 개량요구 조차도 자본주의와 충돌하고 있다."(회원자료집)라는 명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 대중의식이 낮다는 등, 강령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개량을 위한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대중의 투쟁을 부채질하면서, 마치 이를 통한 투쟁이 혁명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라고 하지만 이는 체제내의 개량은 개혁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대중들의 투쟁을 개혁으로 한정지어 지는 모습으로 보여지며, - 이미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하지 않았는가? 4.19, 5.18, 서울역에서의 회군, 87년의 직선제투쟁 등등 체제내의 개량은 결국 다시 시작해야한다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잇다라는 사실이다. - 혁명으로 나가는 길목에 장벽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혁은 혁명의 길의 부산물이지, 개혁을 위한 투쟁이 대중들에게 혁명, 계급의식을 강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체제내의 개량적인 투쟁은 그것이 지배계급이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들의 권력을 부서지지 않게 하는 선에서의 양보로써 채찍과 당근 중 당근을 주어 대중들이 혁명으로 나가는 길을 봉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며, 개혁에 대한 수준은 실제적으로 개혁을 구현할 가능성, 가망성 및 접근성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실제적으로는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해방도지들의 교육지침이라고 제기되고 잇는 해방 6호에서 나오는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요구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이러한 요구(최대강령 적 요구라고 함)로 발전 해가려는 전망 속에서 제출되는 요구"는 부르조아의 궤변이며, 그의 실제적인 가치는 환상적인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방해 할 수뿐이 없으며, 혁명투쟁을 저지하고 약화시키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며, 혁명적 계급들의 세력과 정력을 분열시켜, 그들의 의식을 흐리게 하여 부르조아의 지배 체제를 굳건히 지켜주는 철옹성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강령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을 돕는 것이다.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방향성을 각인시키며, 제휴세력과 동맹세력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사회주의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진을 일보 내딛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란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 자신의 해방을  획득하고 유익한 길은 대 공장들에 의해 창출된 자본가와 공장 소유자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나라의 모든 노동자들의 이해는 동일하며, 그들 모두는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들에 독립적인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라는 것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지주와 자본가들처럼 상황에 영향을 주기 위해 활동해야하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레닌 저작집1 강령의 초안과 해설 p37)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발전하지만 그들의 자생성은 물적 개량이상의 발전은 결국에 가서 체제내의 개혁이라는 투쟁으로 그 이상 발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투쟁의 한계점을 이끌어 내어 부수어 나가 자신들의 위치를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할 일인 것이다. "개량을 혁명의 수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량을 목적으로 볼 것인가"라고 강조하는 이진철씨의 변명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내용 가지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개량을 무엇으로 혁명의 수단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점을 빠뜨리고 오로지 개량에 대한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개량투쟁을 방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투쟁을 강령적요구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투쟁한다는 점이고, 개량주의자들은 오로지 체제내의 개혁인 개량을 실현가능한것만을 골라서 투쟁을 이끌어 낸다는 점이라고 누차 이야기했다. 그것이 개량주의와 혁명주의와의 차이점인 것이다.

노동계급을 의식화, 목적의 방향성을 지침하고 이들을 하나로 이끌어 조직화하는 것이 강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바램이다.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과학적인 사상이 아니고 자신만의 관념속에서 나타나고, 실현하기 위한 개량적인 요구투쟁을 위해서 강령이 작성되어지고 그것이 체제내의 개혁이라는 모양을 그려질땐 노동자대중의 새로운 세상은 몽상가들의 하룻밤의 꿈으로 나와 부르조아의 환상이라는 틀 속에서 울부짖는 앵무새에 지날 수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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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8 17:03 2005/12/0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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