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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서의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주의 1_국제공산주의동맹

 

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61호[2009년 봄]로부터

당시와 현재, POUM의 배신을 옹호하는 자들에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서의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주의

1937년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은 1930년 프리모 드 리베라 군사독재와 그 1년 후 왕조의 몰락에서 시작되어 1939년 장군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한 공화국의 분쇄로 끝이 났던 스페인에서의 10년 동안의 혁명과 반혁명의 정점이었다. 대부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던 프랑코 반동의 뒤로 집결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주장하였듯이, 이 “그림자”가 노동자 조직들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종속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탈선의 핵심이었다.

부르주아지 국가의 허약하고 파편화된 세력들이 무장한 채 봉기에 나선 프롤레타리아트와 1936년 7월 19일 노동자들이 프랑코의 군사반란을 격퇴하기 위하여 일어섰을 때 만들어졌던 민병대들, 공장위원회들, 그리고 농경 공동체들과 같은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려 하자, 프랑코 군대와 공화국 민병대 사이의 군사적 분쟁과 나란히, 공화국 진영 내부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났다. 카탈로니아의 산업 중심지의 주 도시이며 혁명적 스페인의 전위였던 바르셀로나가 이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카탈로니아의 인민전선 자치정부와 바르셀로나의 주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노동자들 사이의 계속되던 충돌들은 1937년 5월 3일, 월요일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3대의 트럭에 올라탄 스탈린주의 경찰국장이 이끌던 증오를 받던 강습부대가 텔레포니카(주요한 전화교환국)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던 전국노동연맹(CNT) 노동자들로부터 이 전략적 통신 허브를 장악하려고 시도하자, 도시 전체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리케이드들을 세웠다. 부르주아지 무장 군대들은 순식간에 패주했고, 해군시설의 해군들은 봉기세력과 우호관계에 있었다. 로이스 오르「Lois Orr]의 현장보도는 이 장면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화요일 아침, 무장한 노동자들이 바르셀로나의 가장 중요한 곳을 장악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포로 항구와 도시를 통제하고 있던 몽츄이치「Montjuich] 요새를 점령했다. 티비다보[Tibidabo], 항구, 그리고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모든 도시 주변지역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몇 안되는 고립된 바리케이드들을 제외하고는, 정부군대들은 완전히 수적으로 열세였고 부르주아지 거주지역인 도시의 중심에 집중해 있었는데, 이들은 1936년 7월 19일 봉기세력들이 그랬던 것 처럼 모든 방향으로부터 쉽게 포위될 수 있었다.”

- “5월 사태들: 배반당한 혁명” 1937년 7월 제4 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이 발행한 정보통신

영웅적인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그들의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가 끝나면서, 노동자들은 무장해제 되었고, 그들의 바리케이드들은 해체되었다. 이것은 군사적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노동자 지도자들이 유포한 사보타지와 혼란, 그리고 패배주의의 결과였다. 발렌시아(이전에는 마드리드)에 있던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카탈로니아 자본가 정부의 중심에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들은 카탈로니아에서 통합하여 통합사회당(PSUC)이 되었다], 이베리안 무정부주의자 연맹(FAI)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 그리고 FAI가 이끌던 CNT 노동조합 연맹이 있었다. 스스로도 잠깐 동안 자본가 자치정부의 일부였던 중도주의 통합 맑스주의 노동자당(POUM)은 외부로부터 인민전선 정부를 위한 좌익적 얼굴을 제공해주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으며, 사적소유의 불가침성을 선포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시끄러웠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공화파 반혁명의 투쟁하는 전위”였다.(레온 트로츠키, “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 1940년 8월 20일, 스페인혁명[1931-1939] [패스파인더, 1973년 뉴욕]). 그러나 그들이 바리케이드들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이 임무는 CNT/FAI와 POUM의 지도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들의 투사들이 바리케이드들에 있었다. CNT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무기들을 내려 놓으라”고 요구했다(펠릭스 모로우(Felix Morrow)의 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패스파인더 1974년 뉴욕]으로부터 인용). POUM 지도부는 CNT의 뒤를 따랐고, POUM의 신문 La Batalla(1937년 5월 6일)은 봉기세력들에게 “거리를 떠나”서 “일자리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같은).

트로츠키는 스페인 스탈린주의자이며 소비에트 GPU의 암살자인 라몬 메르카더「Ramon Mercader]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끝내지 못한 채 남겨졌던 글인 “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에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올바른 길을 향해 그들의 길을 뚫으려고 노력했던 대중들이 혁명의 요구들에 조응하는 새로운 지도부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봉기에 나섰던 노동자들이 CNT/FAI와 POUM 지도자들의 배신에 반대하여 분노하게 되면서, 오직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인 두루티의 친구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스페인 지부(SBLE)만이 혁명을 앞으로 끌고가기 위하여 애썼다. 비록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CNT/FAI와 궁극적으로 분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루티의 친구들은 노동자들에게 사회혁명을 위해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목소리는 자신들의 전단에서 아래와 같이 선언했던 소규모의 SBLE에 의해서만 제기되었다.

“혁명적 공세 만세

“타협 반대. 전국 공화국 경비대와 반동적 강습부대 해체.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다음 순간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반동적 정권 퇴진 때까지 전쟁 수행과 관련된 곳을 제외한 모든 산업들에서의 총파업. 프롤레타리아트 권력만이 군사적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 SBLE 전단, 1937년 5월 4일, 정보통신 1937년 7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승리는 노동자 농민의 스페인으로 귀결될 수 있었고, 2차 대전의 전야에 유럽을 혁명적 투쟁으로 불타오르게 할 수 있었다. 패배가 POUM에 대한 억압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살해와 투옥을 포함하여 강화된 억압의 길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 시키면서, 인민전선은 프랑코의 군대들과 피비린내 나는 우익 반동의 통치를 위한 문을 열어주었다.

인민전선: 문제 중의 문제

70년이 지난 지금, 당시 패배의 교훈들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의 재창립에 있어서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평가의 중심적인 출발점은 이 글에서 많이 인용되는 영어판 스페인 혁명을 포함하는 트로츠키의 저작들이다. 보다 방대한 저작집으로는 프랑스어로 된 트로츠키 저작의 Pierre Broue판인 La revolution expagnole(1930-1940)(스페인 혁명)(1975년 Les Editions de Minuit, 파리)가 있다. 내전의 와중에 펠릭스 모로우가 썼던 읽어주는 듯한 필체의 글인 스페인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또한 굉장히 소중하다. 노동자들의 영웅적 실천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배신행위들에 대한 생생한 서술인 모로우의 책은 맑스주의적 분석과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 몇 달 후에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투쟁을 요약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공화국 영토에서는 2개의 화해 불가능한 강령들이 서로 대결했다. 한편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사적 소유를 지켜내고,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많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강령과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을 통하여 사적소유를 폐지하고자 했던 강령.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이라는 매개와 최고의 소부르주아지 부위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통한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완전하게 의식적이지는 않았지만 강력했던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들을 맑스주의의 언어로 바꾸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한 줌의 볼셰비키들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혁명적 장벽이 서 있었다.”

- “스페인의 교훈들: 마지막 경고” 1937년 12월 17일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혁명적 정당이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1930년대 초반 스페인에서 트로츠키 좌익반대파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페인공산당(PCE)의 과거 지도자들인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장 안드라데[Juan Andrade]의 정치적 굴종에서 기인했다. 닌과 안드라데는 결국에는 1935년에 조아퀸 모린[Joaquin Maruin]의 우익중도주의 노동자농민연합[Workers and Peasants Bloc](BOC)과 통합하여 POUM을 만들고, 이것으로부터 부르주아지 인민전선이라는 둥지와 1936년 자본가 카탈로니아 정부로 나아가면서, 무원칙한 블럭들과 술책들을 추진하기 위하여 스페인 공산주의의 축적된 자산을 던져버렸다. 1930년대 스페인에서의 격렬한 투쟁의 과정에서, 닌과 안드라데는 반(半)혁명적인 것에서 비혁명적인 것으로 그리고 반(反)혁명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중도 이탈은 한줌밖에 되지 못하는 볼셰비키들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그리고 경험과 뿌리 혹은 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가운데, 트로츠키에 의해 정리된 강령적 방침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혁명적인 전위의 중핵을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도록 남겨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주아지 정당들과 노동자 정당들의 연합인 인민전선은 스페인 혁명을 교살시킨 장치였다. 인민전선 내에서의 하찮은 좌익 공화주의 정치인들의 존재는 “‘민주주의 혁명’ 의 원칙, 즉 사적소유의 신성불가침성을 실현하면서”(같은 책) 다름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지배의 유지에 대한 인민전선의 헌신을 위한 보증인으로서 복무했다. 이 계급 협조적 연합을 “작은, 일시적인 기술적 선거 협정”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렸던 POUM 옹호자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트로츠키는 “현재 문제들 중의 문제가 인민전선이다. 좌익 중도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하여, 이 문제를 전술적인 것, 혹은 심지어 기술적인 술책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실제로는 인민전선은 이 시대의 주요한프롤레타리아트계급전략의문제이다. 이것은 또한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의 차이를 위한 최고의 표준을 제공한다”(“POUM과 인민전선” 1936년 7월 16일)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그렇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수없이 많은 책과 글들이 나왔다. 이것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패배의 길을 닦았던 인민전선이라는 배신적인 정책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적어도 CNT/FAI 지도자들의 배신들에 대한 솔직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좌익 무정부주의자 베르논 리차드스[Vernon Richards]의 스페인혁명의교훈들(런던, 자유 출판사, 1953년)이 몇 안돼는 예외들 중의 하나이다. 다양한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역사가들은 트로츠키를 장문으로 인용하는 너무나도 박식한 설명들을 제공하지만 트로츠키가 자신의 총구를 겨누었던 POUM 중도주의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제공한다. 이 중에서 프랑스 램버트[Lambert] 그룹의 지도적 성원이었으며, 프랑스어 트로츠키 저작들의 편집인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관한 몇 가지 저작들의 지은이였던 지금은 사망한 피어 브루에[Pierre Broue]와 다양한 색조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개인들과 조직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영국 노동당을 추종하는 “비(非)당” 출판물인 혁명적역사가 으뜸이다. 혁명적역사는 고(故) 토니 클리프가 창립했던 개량주의 경향의 지지자였고, 오랫동안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지도자였던 앤디 더간[Andy Durgan]이 쓴 2개의 글을 출판했다(“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POUM의 기초”, 혁명적역사 4권 1-2호, 1991-2년 겨울, 그리고 “맑스주의, 전쟁, 그리고 혁명: 트로츠키와 POUM”, 혁명적역사 9권 2호, 2006년).

닌과 POUM에 대한 개량주의자들의 방어는 그 근저에서 스페인 혁명의 실패는 스페인에서 혁명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하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냉소적 숭배로 귀착된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어디에서라도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에 대한 그들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반대의 반영일 뿐이다. 구 소련과 동유럽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들을 칭송하면서,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이제 러시아 혁명은 기껏해야 실패한 실험이라는 “공산주의의 사망”을 외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가능성을 단념하고, 과거에 있었던 혁명적 기회들을 부정하기 위하여 역사를 다시 쓴다.

우리의 나침반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스페인 혁명은 볼셰비키 유형의 혁명적 노동자당들을 건설할 필요성에 대한 부정적 측면에서의 반대의 교훈이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있는 이 결적적으로 중요한 장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은 세계적으로 새로운 10월들을 위한 투쟁을 지도할 레닌주의 전위의 미래 중핵들을 교육하고 무장시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3년 동안의 볼셰비키주의

10월 혁명은 스페인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이것은 특히나 그들이 짜르 러시아에서 자신들의 것과 비슷한 나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또한 국가교회에 의해 지지를 받아왔던 쇠퇴기에 접어든 왕조가 중세적 반(反)계몽주의와 거대한 귀족적 군사 장교들의 진흙탕 속에 빠져 있었다. 그 곳에서도 또한 대규모 농민들이 과거의 봉건 귀족들 출신의 지주계급에 의해 잔혹하게 착취당해왔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젊고, 가공되지 않았으며 전투적이었고, 겨우 그들의 농민적 기원으로부터 한두 세대가 지났었다. 그리고 짜르주의 러시아처럼, 스페인은 자신의 국경 내에서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인민들에 대한 민족적 억압을, 식민지 모로코에 대한 식민지적 억압을 강요하고 있던 “인민들의 감옥”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 지도부 하에서, 자신의 뒤로 농민 대중을 결집시키면서, 러시아의 다민족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들의 계급독재를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위원회들(소비에트)들의 기초 위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대체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볼셰비키가 이끌던 새로운 정부는 러시아를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간 살육전으로부터 끄집어냈고,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의 예를 따를 것과 세계 사회주의 혁명과 전 지구적으로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위한 투쟁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의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는 스페인 그 스스로가 한창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 있었고, 이 소식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에게 전기충격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 제랄드 미커(Gerald H. Meaker)는 자신의 이 시기에 대한 매력적인 설명인 스페인에서의혁명적좌익, 1914-1923(스탠포드,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교 출판사, 1974년)에서 “평등과 정의의 노동자 사회의 도래가 더 이상은 꿈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고 카탈로니아 대중들이 믿게 했던 이 시기 그들에 퍼져있던 모호하지만 강력했던 희망의 감정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혁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러시아 열병”은 남부 농촌지역, 특히 안달루시아(Andalusia)를 휩쓸었는데 이곳에서는 3년의 농민봉기가 3동안의볼셰비키주의로 불렸고 일부 도시의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유형” 공화국들을 선포했다. 친 볼셰비키 모임들과 집회들이 어느 곳에서나 흔했었다. 1919년 발렌시아에서 일주일을 끌었던 파업 동안에, 거리들과 상가들은 “레닌”, “소비에트들”, “10월 혁명”으로 재명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는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이 없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PSOE)이 맑스주의를 고수한다고 주장했지만,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단계의 실현 이후로까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미루었고 부르주아지 의회주의와 “민주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합들을 위하여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를 거부하던 이 당은 러시아의 멘셰비키에 더 가까왔다. 스페인은 1차 대전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PSOE 지도부는 스페인 군주에 의해 지지를 받던 독일에 반대하여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인 영국과 프랑스(그리고 러시아라는 그들의 전제적 동맹)을 지지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PSOE가 지도하던 노동조합 총연맹[General Workers Union](UGT)이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의 CNT보다 더 오래되었고 규모도 훨씬 컸지만, 카탈로니아의 산업 중심지들에 있는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층들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에 의지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는 산업화에 위협을 느끼던 지방의 농민들과 도시 경제 속에 있던 소규모 장인들에 기원을 두었다. 제1 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는 대부분이 바쿠닌과 맑스가 1870년대 초에 분리했을 때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과 함께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스페인 북쪽 지역들, 주로 아스투리아스[Asturias], 비즈카야[Vizcaya], 그리고 카탈로니아에서 대규모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그러나 특히 무정부주의의 중심지인 카탈로니아에서는 노동계급이 볼셰비키의 요새였던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던 비보르그[Vyborg] 지구와 같은 하나의 지붕 아래에 수천 명의 산업 노동자들을 집중시켰던 현대화된 공장들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경공업에 주로 기초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는 생디칼리즘 노동계급 운동의 발전을 통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순응했다.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고유한 사회권력을 인정했지만, 모든 정당들과 국가들 그리고 모든 중앙화된 권위의 형성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적개심을 공유했다.

비록 1911년 창립 이후 3년 동안 불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CNT는 전쟁 기간과 전후 기간의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서 급속하게 성장하여 1919년에는 70만 명 정도의 조직원 수를 호령했다. CNT가 성장하면서, 그 지도력은 바쿠닌의 소규모 자치 공동체사회를 옹호했고 종종 게릴라/테러주의 “유연조직들” 속에서 활동했던 부에나벤츄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와 같은 “순수” 무정부주의자들과 PSOE/UGT 지도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발레로[Francisco Largo Caballero]와 훨씬 더 유사한 본질적으로 노동조합 개량주의자들인 안겔 페스타나[Angel Pestana]같은 “순수” 생디칼리스트들로 점점 더 분열되었다.

사회주의 운동과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 운동들 모두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충격이 감지되었다. PSOE 다수파의 친 연합국(Aliadofilismo) 라인을 거부했던 평화주의/중립주의 인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고, 멘셰비키의 단계주의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정당들과의 정치적 연합들에 반대하는 주변으로 모였지만, 이 광범위한 좌익은 또한 개량주의 PSOE 다수파와의 분리에 반대했다. 장 안드라데가 지도하던 마드리드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1920년에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분리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경험이 미숙한 세력들을 가지고 공산당의 창립을 선포했다. 그 다음해에, 아스투리아스와 비즈카야에 중심을 두고 있던 PSOE의 한 세력 또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연대로 분리했다. 코민테른에 의한 많은 촉구가 있은 후인 1922년에야 비로소 두 당 사이의 조직적 통합이 성취되었다.

CNT 투사들에 대한 러시아 10월의 효과는 더욱 분명했다.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처음의 열광의 일부는 러시아의 “맥시멀리스트” 즉 볼셰비키들이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는 오해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커[Meaker]가 서술했던 것처럼: “볼셰비키 혁명에 홀린 나머지,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권위의 활용과 폭력에 대한 이론적 설명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사상이 그들 사이에서 놀라운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고, 혁명은 조직되어야만 하며, 자생적인 활동들에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레닌주의 입장을 그들은 점점 더 수용하게 되었다”(미커, 같은 책).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년)은 부르주아지 국가는 분쇄되어 새로운 유형의 국가, 노동자 국가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진정한 맑스주의적 관점을개량주의 사회민주당에 반대하여 재차 주장했다. 이 저작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특히 스페인에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비옥한 토양에서 어떠한 대중적 공산당도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실패는 제국주의 사이의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스페인의 중립에서 기인했다. 전쟁 참가국들의 노동자 운동에서 목격되었던 것과 같은 날카로운 분극화가 PSOE에서도 CNT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사회-배외주의적인 잘못된 지도자들이 “조국 방위”를 위한 애국주의적 호소들 안에서 뒹굴었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단결에 대한 진실을 고수했던 국제주의자들과의 가차없는 분리를 조장하면서 자기 “자신들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을 위한 신병모집 하사관으로서 활동했다. (당시에는 심지어 개량주의자들과 혁명적 국제주의 세력들 사이의 분리가 종종 독일의 칼 카우츠키 주변부의 것들처럼 처음에는 대규모 중도주의 조직들의 발전으로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절망적인 부르주아지 의회주의에 반발했던 많은 수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을 끌어들였다 - 예를 들면, 프랑스의 빅토르 서지[Victor Serge]와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 그리고 미국 공산당 창립자이며 후에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던 제임스 캐넌을 포함하는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IWW) 출신의 일부 활동가들. 1921년에 창립된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 혹은 프로핀테른은 이러한 생디칼리스트 인자들에 개입하여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 그들을 공산주의로 획득하고자 했다.

안드레스 닌과 조아퀸 모린(Joaquin Maurin)은 바르셀로나 CNT의 공산주의적-생디칼리스트 세력의 지도자들이었고, CNT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해 투쟁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대회와 동시에 개최되었던 프로핀테른 창립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1921년 모스크바로 갔다. 모린은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1924년까지 PCE에 합류하지 않았다. 카탈로니아 중심의 그의 공산주의적-생디칼리스트들은 PCE로부터 사실상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자, 닌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 프로핀테른의 서기장이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혁명의 조수가 뒤로 밀려나게 되면서, CNT는 1922년에 프로핀테른과의 모든 관계들을 깨뜨리면서 공공연하게 반(反)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1923년 미구엘 프리모 드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의 군사 쿠데타에 직면하여, PSOE/UGT와 카탈로니아 CNT 모두가 쿠데타에 대항하는 공동전선 투쟁에서 PCE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프리모 드 리베라는 “나는 공산주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선포하면서 PCE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당 사무실들을 폐쇄했고, CNT와 PCE는 모두 지하로 내몰리게 되었다. 일부 PSOE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지만, 독재는 개량주의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 UGT 수장 라르고 카발레로는 1924년에 독재의 국가위원회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상승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산업과 기반시설의 유린과 맞물린, 갓 태어난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고립은 부족한 자원들의 조정자로서의 관료층의 성장을 낳았다. 볼셰비키들은 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보다 발전한 산업국가들로의 혁명의 확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혁명적 기회들의 유실, 특히 1923년 독일 혁명의 유산과 그 결과로서 계속되던 소비에트 노동계급 내부에서의 사기저하의 물결이 관료집단의 권력장악을 점점 더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923-24년을 시작으로 관료집단은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했다.

이것이 정치적 반혁명의 시작이었다. 비록 소련이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수립된 집산화된 소유양식에 여전히 기초하고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 소련을 지배했던 자들, 소련이 지배되던 방식과 소련이 지배되던 목적이 모두 바뀌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정치적 반혁명은 1924년 후반에 스탈린이 선포했던 사실상 사회주의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부정했던, 민족주의적이고 반(反)맑스주의적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에서 성문화되었다. 1926년에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영국 노동조합 총회 지도자들이 총파업을 배신하자 영러 노동조합 통일위원회를 통해서 그들을 위한 좌익적 덮개를 제공해주었다. 1925-27년 중국 혁명에서 스탈린과 부하린은 “2단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공산당에게 부르주아지-민족주의 국민당으로 청산할 것을 지시했다. 세계 곳곳의 공산당들이 점점 더 소비에트의 외교를 위한 도구로 변형되었고, 자신들의 해당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소련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되었다.

상승하는 관료집단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은 1923년 러시아 반대파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의 1928년 저작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레닌이후의3인터내셔널의 핵심부분)은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와 코민테른의 굴욕적인 갈지자 행보, 특히 중국 혁명에 대한 배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분석했다. 1927년 소비에트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되었고 1929년에 강제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 당한 분파로서 코민테른을 혁명적 국제주의의 길로 되돌리기 위하여 투쟁하기 위하여 국제좌익반대파(ILO)로 그의 지지자들을 조직했다. 성장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으로 획득되었던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닌이 이들 지지자들 중에 하나였다.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기원

후진국 스페인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 질서를 강제하기 위하여 권력에 올랐던 프리모 드 리베라 독재는 1929년 후반의 주식시장 붕괴로 촉발되었던 대공황이라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의 충격으로 1930년 1월에 붕괴되고 있었다. 대중들의 갇혀 있던 열망들이 시위들의 폭발로 귀결되었다. 5월에, 적기와 공화국기를 든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마드리드에서 경찰과 무장전투를 벌였다. 12월에는 공화파 군장교들이 군주제에 반대하여 반란을 꾸몄다. 반란은 진압 당했고, 주도자들은 처형되었지만, 이것은 군주제의 사망의 조종을 의미했다. 1931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도시지역 투표를 휩쓸었고, 임금 알폰소13세는 도망치고, PSOE를 포함하는 연합정부가 이끄는 스페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30년 2월에,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래비드(라크로익스-Lacroix)와 망명 중이던 다른 과거 PCE 당원들이 벨기에에서 스페인 공산주의자 반대파를 창립했다. 스페인에서는 장 안드라데와 몇몇 다른 과거 PCE 중핵들 또한 좌익반대파에 합류했다. 그해 후반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닌이 이들에 합류했다. 닌은 스페인 노동자운동에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트로츠키는 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 지부의 가장 커다란 불행은 명성을 가지고 있고 분명한 과거와 스탈린주의에 의한 순교자라는 후광을 가진 자가 지부의 꼭대기에 섰고 지부를 잘못되게 이끌었으며, 마비시켰다는 사실이다”(“POUM과 인민전선”, 1936년 7월 16일).

벨기에에 있던 망명그룹에 보낸 1930년 5월 25일자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이번에는 스페인의 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 전위가 스스로를 준비할 시간을 제공하는 가운데 분명한 정규성을 가지고 벌어지고 있다”(“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임무들”)라고 썼다. 겨우 수백 명의 당원을 가진 공식적인 공산당은 권위를 가지는 지도부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내부적 혼란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예전의 그들의 부르주아지 내각 참여주의에 대한 반대가 단지 군주제 하에서 자신들에게 기회가 부족했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었을 뿐인 PSOE는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점점 더 인기가 없던 자본가 정권의 일부가 되었다.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인 CNT/FAI는 모든 정치 활동에 대한 보이코트와 “민주적”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 사이에서 동요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사상 자체를 거부했다.

트로츠키는 먼 곳으로부터 글을 쓰면서, 닌과 그의 동지들이 예외적인 상황전개를 활용하도록 이끌면서 이들과 함께 활동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31-33년 사이 트로츠키와 닌 사이에 왕래되었던 서신들의 발췌본이 1933년에 인터내셔널소식지에 출판되었고 스페인혁명에 재출판되었다. 불행하게도, 편지들 자체는 하버드에 있는 트로츠키 문서고에 없으며,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인쇄된 트로츠키의 편지 발췌본들은 강령적 명확성, 문제들에 대한 면밀한 탐구, 동지적 설득의 전형인 반면, 닌의 것들은 개인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얼버무림으로 가득했다. “명확성, 이론적 적확성, 그리고 결론적으로 정치적 정직성은 혁명적 경향을 무적으로 만든다”(“진실을 말하기”, 1931년 4월 12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그러나 닌은 이론적 명확성과 적확성에 등을 돌렸다. 그는 “우리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개념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과 함께는 반대파 선전을 수행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없다”(트로츠키에 보내는 편지, 1930년 11월 12일)라고 썼다. 대신에, 닌은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과모린에 대한 영향력을 떠벌였다.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변호사용 요약문서를 읽으면서, 많은 수의 오늘날의 닌의 정치적 변호인들은 소위 “종파주의적” 태도, 스페인 정세에 대한 그의 무지라는 근거 없는 주장, 그리고 논박의 “가혹함”을 이유로 트로츠키를 호되게 꾸짖는다. 이것은 닌이 “실책들”을 저질렀음을 민주적 “반파시즘”의 압력 때문에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했던 1930년대 일부 트로츠키의 예전의 동료들과 동맹자들의 후렴구였다(벨기에의 서지, 로즈머, 조지 베리켄과 네덜란드의 헨리쿠스 스니블리에트(Henricus Sneevliet)와 같은 자들). 트로츠키는 서지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은 안드레스 닌에 대한 우리의 태도, 당신이 발견했다는 ‘종파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불만스러워 한다. 당신은 우리 관계의 정치적, 개인적 역사에 관하여 모르고 있으며, 알 수도 없다.

“당신은 닌이 외국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가에 대하여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수년 동안 나는 닌과 정기적으로 편지를 교환했다. 내 편지들 중 일부는 닌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고, 했어야 할 살아 생생한 혁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사실상의 다소 긴 논문들’이라는 것이 틀림없다. 내 생각에 닌에게 2-3년 동안 보낸 나의 편지들은 수백 페이지 두께의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닌을, 그리고 그와의 동료적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당연하게 보여준다. 그의 대답들에서, 닌은 거듭해서 이론에서의 동의를 확인했지만, 항상 실천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은 회피했다....

“물론, 누구도 혁명가가 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닌은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수장이었고, 이 사실 하나에 의해서 그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실천에서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그 동안 죽 나를 속였다.”

- “닌과의 화해가 가능한가?” 1935년 6월 3일

당, 다시 한번 당, 또 다시 당

1931년 글 “스페인에서의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스페인 혁명가들을 권력을 향한 길로 인도할 수도 있었던 강령과 전략에 관하여 개괄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지배를 위한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요구들을 제기했다. 대규모 소유 토지의 빈농의 이익을 위한 몰수, 교회와 국가의 분리(성직자 반동의 요새의 무장해제와 교회의 광대한 부의 대중들에 대한 반환), 노동자 농민 민병대의 창설, 철도, 은행, 광산 자원에 대한 국유화,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인민들의 민족적 자기결정권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에서 입증되었고 1925-27년 중국 혁명의 패배를 통해서 부정적 방식으로 확증되었던 영구혁명의 이론과 강령을 적용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에서의 뒤늦은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조건에서, 17세기와 18세기 국가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들과 역사적으로 결합된 임무들은 농민 대중의 선두에 서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을 통해서만 오직 성취될 수 있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은 민주주의적 임무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을 필수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일정에 올렸다.

트로츠키는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적 편견들로부터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CNT의 전투적 대오들로 향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통합된 노동조합 연맹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현재의 정치적, 민족적, 지방적, 그리고 노동조합 분열들을 초월하여”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기관들로서 활동하기 위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workers juntas]의 형성을 위한 선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계속했다.

“프롤레타리아트 평의회는 모든 정당들과 모든 조직들이 광대한 대중의 눈앞에서 시험에 들고 자세하게 조사를 받게 될 광대한 장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 일부 생디칼리스트들의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라는 실천에 노동자 공동전선의 슬로건을 대치시킬 것이다. 오직 통일된 혁명적 전선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마을과 도시의 피억압 대중들 사이에서 필요한 확신을 불어넣는 것을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공동전선의 실현은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에서만 오직 생각할 수 있다. 평의회는 지도적인 정당을 필요로 한다. 굳건한 지도부가 없다면 평의회는 공허한 조직 형식으로 남게 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의존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 “스페인에서의 혁명” 1931년 1월 24일

무엇보다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들 임무들 모두의 성공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들이 필요하다. 당, 다시 한번 당, 또 다시 당!”(같은 책).

그러나 닌이 트로츠키와 가장 갈렸던 것이 당에 관한 문제였다. 닌은 처음에는 볼셰비키-레닌주의 전위를 위한 명확한 강령적 기초를 놓을 이론지 창간에 대한 트로츠키의 강력한 제안에 저항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시 다양한 어설픈 지식인들, 장난 삼아 활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타 우연히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끌렸던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혁명가들을 걸러내기 위하여 필요했던 ILO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치투쟁들을 진중하게 유념하라는 트로츠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한 논쟁들은 규율 잡힌 정치적으로 균일한 인터내셔널 경향을 건설하고, 그것을 불구화하는 민족적 압력들과의 투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반대파 지도자들은 이 논쟁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거나 이 논쟁들을 자신들의 지부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보다는 “개인적 관계들, 호의와 반감에 의해서 자신들이 이끌리도록 했다”(트로츠키, “좌익반대파의 상태”, 1932년 12월 16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좌익반대파가 공식적인 공산당의 기치를 따르는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ILO의 방침을 수행할 것을 닌에게 촉구했다(“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들”). 스탈린과 그 도당들의 관료적 잔악무도함들, 거짓말들 그리고 배신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들은 러시아 혁명에 이끌려 자기 나라들에서 노동자 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원했던 국제 노동계급 내부의 인자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였다. 더욱이, 투쟁이나 결정적인 시험도 없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기치를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넘겨준다면 그것은 범죄일 것이었다.

닌은 다음과 같이 스페인 예외주의를 이유로 ILO의 국제적 관점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스페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식적인 정당의 외부에서, 그러한 정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당의 외부에서 자신의 당을 조직할 것이다”(트로츠키에 보내는 편지, 1930년 12월 3일). 트로츠키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공식적인 당이 비록 유약하고 하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 자신 안에, 그리고 소련에 있는 모든 외부의 역사적 가능성들과 소련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동지가 오로지 직접적인 세력들의 관계에만 경험적으로 기초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이다”고 대답했다(닌에 보내는 편지, 1931년 1월 31일). 닌은 그러한 주장들에 귀를 닫았고, 1932년 3월에 보란듯이 스페인 조직의 이름을 좌익반대파에서 좌익공산주의자(ICE)로 바꿔 버렸다.

좌익반대파의 투쟁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닌은 조아퀸 모린이 이끌던 과거 카탈로니아 연맹에 기대를 걸었다. 1930년 6월에 PCE로부터 축출되었던 카탈로니아 연맹은 트로츠키가 그 정치를 “소부르주아지의 편견들, 무지, 지방적 ‘과학’과 정치적 부정직함의 짬뽕”(“스페인 공산주의와 카탈로니아 연맹”, 1931년 7월 8일)이라고 성격규정했던 우회전하고 있던 중도주의 조직이었다. 1931년 3월에 카탈로니아 연맹은 카탈로니아 공산당(PCE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 소부르주아지 조직)과 통합해서 “대중”조직인 노동자농민연합을 창립했다. 트로츠키는 모린의 BOC의 강령을 “스페인 토양에 이식된 순수한 ‘국민당주의’”(즉, 장개석의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국민당)으로, 그리고 “노동자 농민 정당의 새로운 판”으로 성격 규정했다(“카탈로니아 연맹의 정강”, 1931년 6월 12일). 이 두 계급 공식은 국민당과 미국의 “농민-노동당”과 같은 기타 부르주아지 인민주의적 조직들로의 청산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었다.

국제적으로, 모린은 소위 “제3기” 정책들에 반대하던, 과거 스탈린의 동맹이었던 니콜라이 부하린(그 자신은 잽싸게 스탈린에 투항했다)의 관점 주변에서 연합해 있던 우익반대파와 제휴했다. 이들 정책들은 1929년에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임박했다는 소위 새로운 시대로서 스탈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공산당들은 고립된 “적색”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하여 개량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조합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사회 파시스트”라고 이름을 붙였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어떠한 공동실천도 반대하면서 모험주의적이고 종파적인 방침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제우익반대파는 점증하는 계급협조의 관점으로부터 이러한 종파주의적 방침에 반대했다. 이들의 최고 대변인은 1923년에 독일혁명의 패배를 이끌었던 하인리히 브랜들러였다. 동시에, 브랜들러 추종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1925-27년 중국에서의 재앙적인 정책들과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도그마를 방어했다.

트로츠키는 우익반대파와 기치를 섞는 어떠한 것에도 반대하여 반복해서 투쟁했다. 소련에서는, 트로츠키는 부유한 농민들(쿨락들)과 소규모 사업자들의 층인 내부의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과 타협하고 그들을 고무하는 정책을 가졌던 관료집단의 부하린 세력과의 블럭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했었다 . 국제적으로는, 우익반대파와의 통합은 공산주의 전위를 위한 투쟁의 청산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해의 올바름은 모린을 추종하는 것에서 닌과 안드라데가 취했던 노선에 의해 전적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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