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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서의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주의 3 - 국제공산주의동맹

반혁명이 다시 무장하다

1936년 9월에 닌은 마드리드의 인민전선 정부를 비난했고 “부르주아지 장관들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동시에 닌은 카탈로니아는 이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 있다고 선포했다! 같은 달에, POUM이 CNT/FAI와 함께 카탈로니아 자치정부에 합류면서 닌 스스로가 부르주아지 국가의 장관이 되었다. 닌은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서 케렌스키가 처음으로 장악했던 그 자리였다! 그 자격으로 닌은 카탈로니아의 혁명적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던 맹아적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기관들에 맞선 공화국 정부의 정면공격을 관장했다. 이 반혁명적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민병대의 “군대화”였다. 10월 초 자치정부의 한 포고는 CCMA의 해산과 노동자 민병대들의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복종을 명령했다. 지역 위원회들 또한 해산되어 부르주아지 지방자치 행정기관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POUM의 La Batalla의 “Indegeta”로 사인된 1936년 8월 7일의 한 기사는 아래와 같이 뻔뻔하게 선언했다.

“반파시스트 민병대들의 중앙위원회는 자치정부 위원회라는 새로운 정부의 수립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해산되었다. 고전적인 혁명적의 국면인 ‘이중권력’은 우리 혁명의 경로에 완전히 해로운 것이었다.... 두 달간의 내전과 혁명이 그러한 이중성이라는 해악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다.”

- 1937년 10월, Jose Rebull의 “이중권력에 대하여”에서 인용. 혁명적 역사 4권 No. 1/2에서 재출판됨.

모든 도시 노동자들의 무장해제에 대한 명령이 뒤따랐다. 또 다른 포고가 “산업의 집산화”라는 이름으로 공장의 노동자 그룹들을 점점 더 정부가 임명한 대행자들의 지배하에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닌은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에스쿠에라 지도자 루이스 컴패니스를 따라서 Lerida로 가서 그곳에서 POUM이 장악했던 위원회의 해산을 감독했다. POUM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엔릭 아드로어[Enric Adroher](Gironella)는 후에 자치정부는 “위원회들의 해산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임무”를 띠고 있었으며, POUM은 “혁명적 세력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기 위하여 위임되었고”, 일단 이 “값진 봉사”가 수행되자 정부로부터 쫓겨났을 뿐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더간의 “트로츠키와 POUM”에서 인용).

1936년 12월 자치정부로부터의 축출에 뒤이어, POUM은 노동조합, 농민, 전투원들의 대회를 소집해 줄 것을 이 부르주아지 정부에게 간청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던 것 처럼, 이것은 POUM이 인민전선 정부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방책에 불과했다:

“POUM 지도자들은 정부가 사회주의의 길을 택할 것을 애처롭게 설득하려고 한다. POUM 지도자들은 CNT 지도자들이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의 가르침을 결국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중하게 노력한다. POUM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에 대한 ‘혁명적’ 조언자들로 바라본다. 이 입장은 김빠지는 것이고, 혁명가들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하여 대중들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으나 실제로는 그냥 자유주의자들임이 판명된 이들 신사양반들의 배신을 생디칼리스트 노동자들,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이 보도록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최악의 대행자로서의 스탈린주의를 가차없이 비판해야할 필요가 있다. 동지들 스스로가 부르주아지 정부의 조언자들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들의 지도자들임을 느낄 필요가 있다....

“4월 4일자 La Batalla에는 ‘승리를 위한 13가지 포인트들’가 나온다. 모든 것들이 POUM의 중앙위원회가 당국들에 제안하고 있는 조언의 성격을 갖고 있다. POUM은 ‘노동자와 농민 신디케이트들 그리고 병사들의 대의원 대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 대표자들의 대회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POUM이 부르주아지 개량주의 정부 스스로가 그러한 대회를 소집하고, ‘평화적으로’ 부르주아지 정부를 자기 자신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정중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슬로건이 공허한 문구들로 둔갑하고 만다!”

- “스페인에서 승리는 가능한가?” 1937년 4월 23일

무정부주의 CNT/FAI의 역할

민병대의 군대화가 전환점이었다. 노동자들의 잘못된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힘을 강화한 공화파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신들의 우세를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코는 중앙정부가 발렌시아로 이동하도록 강제하면서 마드리드에 대한 포위를 시작했다. CNT/FAI 지도부는 발렌시아에서 정부 장관직 4개를 받는 조건으로 민병대의 국가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였다. 트로츠키 서술하고 있듯이, “권력의 장악이라는 목적에 반대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결국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의 나날들에)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에 들어서고자 열망했던 반면 그들의 지도자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을 인민전선 진영, 즉 부르주아지 정권으로 강제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노동조합에, 즉 평화적 시기라는 일상에 충만한 조직들에 제한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써, 그리고 노동조합의 틀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당들 사이에서, 그리고 정부 기구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무시함으로서 혁명의 법칙들과 임무들에 대한 치명적인 이해의 부족을 드러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혁명가들이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결코 노동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가장 억압받던 계층들을 포함하여 도시와 지방의 모든 노동인민들의 대표자들을 통합시키는 소비에트들의 수립을 호소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들 소비에트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하찮은 소수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적의 힘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허공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한번의 강력한 타격으로도 이들 기구를 박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로부터 숨고자 애쓰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은 전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단히 놀랍게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는 수레의 5번째 바퀴인 것으로 드러났다.”

- “스페인의 교훈들: 마지막 경고” 1937년 12월 17일

CNT 지도부가 했던 배신적인 역할에 대한 그의 신랄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베르논 리차드스는 이들 배신들을 단지 “권력의 부패”로만 한정할 수 있을 뿐이다(스페인 혁명의 교훈들). CNT의 컴패니스와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굴종은 무정부주의의 핵심에 있는 급진적 이상주의와의 절연이 아니라 그것의 반영이었다. 무정부주의는 정치권력을 거부하고, 대신에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한 도덕적 갱생의 행위라고 단정한다. 모로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으로, 계급 협조는 무정부주의 철학의 심장에 숨어 있다. 이것은 반동의 시기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한 무정부주의의 증오에 의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중권력이라는 혁명적 시기에는 표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때에는 자본가가 웃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함하여 ‘모든 독재들’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는 자본가에게 단지 자본가적 전망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에 그칠 것이며,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분쇄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에 더 나은 그것에 자연스럽게 동의한다.”

- 모로우, 인용된 으로부터

CNT는 자신이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고 부르주아지의 합법성이라는 조건에서 활동할 때에는, 다른 노동조합과 매우 비슷하게 활동했다. 트로츠키가 1938년에 썼듯이,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의 최근 경험을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에서 목격하는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높은 층들의 조직적 표현으로서 노동조합들은 부르주아지-민주주의 정권과의 타협을 향한 강력한 경향을 발전시켰다.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노동조합들의 지도적 기관들은 대중운동이 해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운동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이행의 시대의 노동조합들”, 트로츠키: 노동조합들에 대하여, [뉴욕, 패스파인더 출판사, 1969년]). 만약 노동조합들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정당의 지도하에 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보조물로서 활동하게 된다. CNT 지도자들은 그들의 보다 급진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과거의 그들, 즉 개량주의 노동조합 관료들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했다.

민병대의 해산에 대한 CNT 하부에서의 증가하는 분노와 불만을 반영하여, 두루티의 친구들이라는 무정부주의 그룹들 중의 하나가 결국 노동자 준타[평의회]를 제기했다. 1937년 3월에 조직된 이 그룹은 오랜 기간 급진 무정부주의자였으며, FAI에서 지도적인 투사였으며, 아라곤(Aragon) 전선에서는 CNT 민병대의 대장이었던 부에나벤튜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의 이름을 따서 그룹의 이름을 지었다. 1936년 11월에, 두루티는 민병대의 군대화에 대한 CNT 지도부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었다. 그는 후에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살해당했다. 귈라몬(Guillamon)이 두루티의친구들그룹: 1937-1939에서 지적하듯이, 이 그룹은 두루티의 과거 동료였던 파블로 루이즈(Pablo Ruiz) 처럼 민병대의 해산에 반대하던 급진적 무정부주의 전투원들과 정부 참여를 반대하던 무정부주의 지식인들의 통합을 의미했다. CNT의 Solidaridad Obrera의 중심적 필자였던 제이미 발리우스(Jaime Balius)가 후자의 지식인들 중에 하나였다. 친구들은 4천명 혹은 그 이상의 전투원들 보유했고, CNT/FAI에 유의미한 기반을 두고 있었다. (2004년 6월 11일과 7월 9일자 노동자전위 828-829호의 “스페인 내전에서 트로츠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보시오.)

비록 두루티의 친구들이 결코 무정부주의로부터 맑시즘으로의 도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승리를 통해 노동자 혁명을 보고자 하던 그들의 열망이 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까지 그들을 나아하게 했다. 1938년 팜플렛 “새로운 혁명을 향하여”에서 발리우스(Balius)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의 강령 속으로 약간의 차이를 도입하고 있다. 혁명적 준타의 수립.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혁명은 그것을 관장하고 조직화된 관점에서 적대 적 부위들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들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사태들이 보여주어 왔듯이, 그러한 부위들은 분쇄되지 않는다면 잊혀지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 귈라몬의 두루티의 친구들 그룹: 1937-1939에서 인용

“적대적 부위들”에 대한 억압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이 “약간의 차이”가 노동자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필요성에 대한 암묵적 인식에까지 이르렀다. 레닌이 썼듯이, “노동자들이 ‘그들의 무기들을 내려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들에 맞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계급에 맞서는 다른 하나의 계급에 의한 체계적인 무기들의 사용이 국가의 ‘과도적 형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와 혁명, 1917)

스페인 사태의 처음부터, 트로츠키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전투적인 인자들을 포함하고 있던” CNT와 접촉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런 선별은 수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이다. 이 연맹을 강화하는 것, 이 연맹을 진정한 대중들의 조직으로 변형하는 것은 모든 선진 노동자들의,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 ....의 의무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교리와 혁명적 방책으로서의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나코-생디칼리즘은 그것의 혁명적 강령의 부재와 정당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해제 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가 그들의 목을 쥘때까지도 정치를 ‘부정한다’; 그리고는 그들은 적대 계급의 정치를 위한 지반을 준비한다.”

- “스페인에서의 혁명”, 1931년 1월

ICE와 모린의 BOC 모두 처음에는 CNT 내부에 일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2-33년, 무정부주의 FAI가 모린 세력의 대부분을(뿐만 아니라 페스타나 주변의 개량주의 생디칼리스트들도) 축출하면서, CNT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소위 레닌의 볼셰비키들의 권위주의와 잔혹함에 욕을 퍼붓는 무정부주의자 머래이 부크친(Murray Bookchin)은 FAI의 CNT에 대한 관료적 장악을 냉소적으로 변론했다. “이번 성공이 민주주의의 예절에 관한 과도하게 민감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없어야 한다” (부크친, 샘 돌고프(Sam Dolgoff)가 편집한 아나키스트 집단들 [뉴욕, Free Life 판, 1974]의 “서문”).

트로츠키는 CNT/FAI는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자국을 쫓아서 인입되었고, 한편 모린 그룹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에 이끌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닌은 CNT/FAI와 모린의 뒤를 쫓았다. 이 정치적으로 화해주의적 경로는 내전과 인민전선이라는 충격 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닌의 “좌익”적 목소리였던 안드라데는 공공연하게 POUM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지도자들에 대한 파탄난 의존에 대하여 “스페인 혁명의 미래는 CNT와 FAI의 태도와 그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중들을 이끌어 가는 것에 있어서 그들이 보여주게 될 능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1937년 5월 28일, 아돌프(Adolphe)의 “실수의 역사와 교훈들”, 정보통신, 1937년 7월에서 인용)라고 인정했다. 모로우는 아래와 같이 썼다.

“POUM 지도부는 CNT에 집착했다. 대중들에 대한 지도부를 두고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자들과 대담하게 투쟁하는 것 대신, 닌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착각 속의 강력함을 추구했다. POUM은 CNT에 있는 수백만 명에 대한 지도부를 위하여 투쟁하기는커녕, 더 작고 이질적이었던 카탈로니아 UGT에 자신의 투사들을 보냈다. POUM은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적인 부위들이 모여있던 거대한 CNT 부대들 속으로 자신의 세력들을 보내기는커녕, 스스로의 영향력을 제한하면서 POUM 민병대 부대를 조직했다. 라 바탈라는 집산화된 소유를 다루기 위한 CNT 노동조합의 경향을 자신의 것으로서 기록했다. 라 바탈라는 그러한 경향을 만들어 낸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이론들을 결코 공격하지 않았다. 라 바탈라는 해를 거듭하면서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 지도부에 대한 원칙적인 공격을 결코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무정부주의자들이 POUM의 자치정부로부터의 축출을 묵묵히 받아들였을 때도 그러했다. CNT와의 통일된 실천을 지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잘못된 방침은 CNT-FAI 지도부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POUM을 배신하는 것을 허용했다.

-모로우, 인용된 책으로부터

두루티 그룹: 나침반 없는 좌익 무정부주의자들

POUM은 처음에는 두루티의 친구들을 (외견상 무비판적으로) 칭송했다. 나중에 안드라데는 1986년 “CNT-FAI의 혁명적 의식성을 분명히 말하면서, ‘두루티의 친구들’을 강력한 대표적 조직으로 묘사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는 그들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용어로는 혼란의 기념비였다.”(귈라몬, 인용된 책으로부터)고 쓰면서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 내부의 이 좌익적 경향의 중요성을 기각했다. 더간은 “스페인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글 속에서도 역시 1937년 5월 POUM의 잠재적 동맹들, 급진 무정부주의 조직 두루티의 친구들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왔다.”고 반복한다.(더간, “트로츠키와 POUM”)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들과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것에 대한 POUM의 거부를 위한 변명거리들이 있다. 두루티 그룹은 심각하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그룹은 정치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만약 그 변화에 개입할 레닌주의 정당이 있었다면, 이들 최고의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인습을 벗어 던지고, 볼셰비키주의로 획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경험과 CNT/FAI 지도자들의 배신을 통하여, 두루티 그룹의 투사들은 경험적으로 CNT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컴패니스에 대한 굴종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던 “반권위주의”를 포함하는 무정부주의 교의의 핵심 측면들을 거부하기 시작했었을 것이다. 해산 전의 아라곤 전선에 있던 겔사 지구의 두루티 부대는 CNT/FAI 지도부에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에 책임을 지는 중앙 지휘부 하의 민병대들을 다시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몇 걸음 나아갔었다. 1937년 1월에 발리우스는 이와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파시즘에 맞선 이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빨리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자신에 의해 지배되는, 적어도 스스로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 지휘부와 규율을 가진 군대: 노동자 지휘부.”

- 미큐엘 아모로스(Miquel Amoros), “배반당한 혁명: 발리우스와 두루티의 친구들의 진짜 역사”, 바르셀로나, Virus 출판사, 2003년 (ICL의 번역)

발리우스는 “두루티의 유언”이라는 CNT의 Solidaridad Obrera[노동자 연대](1936년 12월 6일)에서의 마지막 글들 중 하나에서, “두루티는, 우리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이라는 것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필요로 한다”고(귈라몬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인용)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썼다. 후에 발리우스는 이 그룹이 준타(평의회)를 새로운 계급권력의 기관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음을 부정했다(로날드 프래이서(Ronald Fraser)의 피의스페인스페인내전에관한구술역사, [뉴욕, Pantheom Books, 1979년]을 보시오). 그러나 1937년 4월 포스터에서, 이 그룹은 자본가 자치정부를 대체할 노동자평의회(준타)를 요구했다: “도시와 지방, 노동자들과 전투원들로 구성되는 혁명적 평의회(준타)의 즉각적인 수립.... 자치정부가 아니라 혁명적 평의회(준타)!”(귈라몬의 인용된 책으로부터).

그러나 두루티의 친구들은 시종일관 CNT/FAI에 계속해서 충성했고, 정치정당들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적 준타들을 노동조합으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들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다 억압받고 폭발성을 내포한 층의 미조직 노동자 대중들을 대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평화적 시기의 일상적인 방어적 투쟁의 기관으로서의 노동조합들은 혁명적 투쟁에서는 보수적인 제동장치로서 기능하는 경향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생디칼리즘의 아류들은 노동조합은 그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믿는 자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실천적으로는 혁명적 전위의 후진 대중들, 즉 노동조합들로의 해소를 의미한다”(“공산주의와 생디칼리즘”, 1929년 10월, 레온 트로츠키노동조합들에대하여)고 썼다.

두루티 그룹의 반(反)정치적 편견은 군사 행동에 대한 평의회(준타)의 통제와 경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통제 사이의 잘못된 구분에서도 역시 표현된다. 1938년 이들의 정강, 새로운혁명을향하여는 “준타는 노동조합의 독점적 영역인 경제업무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 문제들을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혁명적 군대의 투쟁력은 무기, 식량, 그리고 기타 물자들의 생산에 달려 있었다. 그러한 고려들 없이는 혁명적 평의회(준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노동조합은 경제적 업무들을 수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무기들을 공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CNT 지도자들은 현대적 무기들을 갖춘 중앙집중화된 군대가 프랑코 군대들에 맞선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정당화했다. 새로운혁명을향하여는 “만약 적에 대한 저항에 필요했던 전쟁 물자들이 확보되었더라면 스페인 북부는 구해질 수 있었다. 방법들이 있었다. 스페인 은행은 스페인 땅을 무기들로 뒤덮을 만큼 충분한 금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라고 서술했다. CNT는 은행들을 장악하지도 못했으며, 장악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은행이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 국가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금융과 산업에 대한 몰수와 집산화는 중앙집중화된 평의회(준타) 권력에 기초한 노동자 국가의 임무였다. 그러나 두루티 그룹은 이것을 중앙집중화된 소비에트 국가의 임무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은 채 있었다.

아마도 이 그룹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노선에, [두루티의] 친구들이 CNT/FAI로부터 완전하게 분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적대감이 논리적으로 그들을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1938년 팜플렛에서, 두루티 그룹은 스페인을 식민지로 묘사하였던 반면, 한번도 모로코의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베르논 리차드스의 CNT/FAI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두루티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의 실천들에 의하면, CNT는 모로코를 적으로부터 민중운동의 한 동맹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던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들 중의 누구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이 선동가들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해야 하고 아랍인들 사이에서 자치를 위한 폭넓은 선전 캠페인을 수행해아 한다고 주장했던 카밀로 베르네리(Camillo Berneri)와 같은 무정부주의 투사들에 한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스페인 혁명의 교훈들

모로코 문제는 CNT의 탄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문제는 모로코로 갈 예비군 소집에 반대했던 1909년 총파업의 결과에 뒤이은 것이었다. 1911년 창립 직후, CNT는 부분적으로는 모로코에서의 전쟁에 반대하는 또 다른 총파업을 요구했다. 그러나 1936년 말이 되면서, CNT/FAI 지도자들은 모로코 인민들에 대한 식민지적 억압을 강화하는 스페인 부르주아 국가의 장관들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로코 인민들을 위한 모로코. 이 슬로건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던 순간, 이 슬로건은 모로코의 피억압 대중들 사이에서 봉기를 선동할 것이며, 파시스트 용병 부대 안에서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다.”(“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강령”, 1937년 7월, 혁명적역사 1권 2호, 1988년 여름) 선포했다. 프랑코의 돌격부대들은 주로 모로코인들과 스페인의 외인용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일부 무쏠리니와 히틀러에 의해 공급된 군대들로도 구성되었다. 1921-26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모로코 식민지주의자들에 맞선 리프(Rif)전쟁의 지도자였던 리유니온 섬에 유배 중이던 아브드-엘-크림(Abd-el-Krim)은 PSOE 수상 라르고 카발레로에게 자신이 모로코로 돌아가 프랑코에 맞서는 봉기를 지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석방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레온 브룸(Le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정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페인 공화국이 희망을 걸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모로우가 언급했듯이, “카발레로는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브룸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를 분기시키는 것은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제국주의 지배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스페인에서의혁명과반혁명).

트로츠키주의 중핵을 재건설하기 위한 투쟁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배신과 기권이었던 1935년 닌의 POUM으로의 청산과 함께,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는 1년이 넘게 스페인으로부터 사라졌다. POUM이 인민전선 협정에 사인한 직후에 트로츠키는 “모린, 닌, 안드라데와 그들의 동료들의 배신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제4 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썼다(“POUM의 배신”).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기도 했으며 현재도 그러한 채로 있는 안드레스 닌과 안드라데의 정책 전부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규탄을 통해서만, 스페인에서의 맑스주의적 실천은 시작될 수 있다”고 썼다. “진정으로 혁명적 인자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모아 미래를 준비할 너무 길지는 않지만 일정한 기간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는 “스페인의 제4 인터내셔널 지지자들의” 임무들은.... “너무도 명확하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1.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도자들의 정책을 대중들 앞에서 가차없이 규탄하고 비난하기

“2. ‘맑스주의자 통합 노동자당’과 특히 과거 ‘좌익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안드레스 닌, 안드라데 등의 지도부의 가증스러움을 완전히 틀어쥐고 모든 선진노동자들의 눈 앞에서 그들을 분명하게 그려내기

“3. ‘공개서한’[1935년 봄]의 기초에 입각한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주변으로 집결하기

“4. 볼셰비키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분파로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회당과 통일청년당(United Youth)에 입당하기

“5. 노동조합과 기타 대중조직들에서 소조들과 다른 중핵들을 건설하기

“6. 이들의 주요한 관심을 즉자적, 반(半)즉자적 대중운동으로 이끌고, 이들의 일반적인 특징들, 즉 의회도당들이 아닌 대중의 상태 대하여 학습하기

“7. 투쟁에 명확한 표현을 부여하기 위하여 모든 투쟁에 결합하기

“8. 투쟁하는 대중들이 특히 선출되는 실천위원회들(준타, 소비에트)을 조직하고 끊임없이 확장하도록 항상 주장하기.

“9. 모든 꿀꿀이 죽 강령들(카발레로나 모린)에 권력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혁명의 강령을 대치시키기.

“이것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들”, 1936년 4월 12일

이 편지는 스페인에 있던 한 지지자를 위하여 쓴 것이기는 하지만, 편지가 목적지에 도달했었는지, 혹은 스페인에서 회람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편지는 트로츠키주의자 출판물에 국제적으로 출판되었다.

공공연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를 휘날리면서 독립적인 모습으로 대중을 향할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중핵을 재건설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또한 ICL 내부에 있던 화해주의 인자들에 대한 투쟁 또한 요구했다. 베리켄과 스니블리에트를 포함하는 많은 고참 유럽 반대파 중핵들은 중도주의 런던 사무국의 지배력 하에 있었고, 결국 트로츠키에 반대하여 닌과 같은 편에 섰다. 1936년 6월 하순에 ICL은 파리에서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한 운동이 이슈가 되었던 대회를 개최했다. 스니블리에트는 자신이 그해 늦은 가을에 런던 사무국의 대회에 참여할 작정이라고 선언하면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회로부터 퇴장했다. 대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인터내셔널 서기국은 상대적으로 젊고 경험이 일천한 인자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들은 인민전선주의의 압력을 받았는데, 당시 레온 브룸 인민전선 정부 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특히 현저했다. 프랑스 지부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쟝 로우스(Jean Rous)는 1936년에 스페인에서 IS(인터내셔널 서기국) 대표로 복무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국제적인 중앙은 신생의 공고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결정적인 5개월 동안 트로츠키 개입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 1936년 8월 하순 모스크바 측이 엄청나게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귀결되었던 일련의 조작된 재판들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선언했을 때,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억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퇴행에 대한 그의 명쾌한 분석인 ‘배반당한혁명’을 막 완성한 트로츠키는 바로 스탈린 정권의 그 자신과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에 대한 비방을 폭로하는 임무에 직면했다. 12 월에,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추방되어 다음 달에 멕시코에 도착했다. 이 기간 스페인에 대한 개입의 적극적인 요소로서의 그의 부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었다.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쓰거나 그들에 관한 문서화된 자료와 스페인에 대한 제4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논쟁은 다른 기관들 중에서도 하바드와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에서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검토하고, 합하여 트로츠키주의의 개입에 대한 완전한 그림에 더하는 작업은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일부 IS 의사록과 서한들, 스페인에 관한 보고서들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회고록, 그리고 영어로 출판된 ‘Revolutionary History’와 다른 자료들을 검토했다. 우리는 또한 아구스틴 귈라몬이 편집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료 전집인 스페인트로츠키주의에관한역사적문헌 (1936-1948) [Documentacion Historica del Trosquismo Esparnol (1936-1948)](마드리드: Ediciones de la Torre, 1996년)을 자세히 검토했다. 그러나, 무니스(Munis)의 Jalones de Derrota: Promesa de Victoria와 같은 최고의 회고록조차 1935년 ICE의 청산과 1937년 바르셀로나 봉기 사이에 벌어졌던 내부 논쟁과 토론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래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며, 우리는 일정 정도 일반적인 언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1936-37년 스페인에서의 제4 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POUM의 협력

1936 여름, 스페인에서 선을 재구축하기 위한 몇 번의 대개는 성공스럽지 못했던 시도들 이후, IS는 니콜라 디 바르톨로메오(Nicola di Bartolomeo(Fosco))가 지도하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그룹(GBL)이라는 작은 조직과 연락이 닿았다. GBL은 주로 자신들의 나라에서 좌익반대파의 조직원이었으며 내전에서 투쟁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왔던 외국인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 중 다수가 Fosco 처럼 이탈리아인들이었다. 그들의 다수가 즉시 전선으로 가서 POUM 민병대에 합류했다. 압도적인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강령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필요했던 이론적, 논쟁적인 기사들 가진 잡지를 발행하는 것을 무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중심적 임무였다. 레닌이 그의 훌륭한 저작 ‘무엇을할 것인가?’(1902년)에서 강조했듯이, 정기적인 당 기관지는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결정적인 뼈대이다. 1937년 4월이 되어서야 GBL을 계승한 조직인 SBLE가 ‘레닌주의자의목소리’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38년 SBLE가 진압될 때까지 겨우 3회가 출판되었을 뿐이었다. 정기적인 기관지의 부족이 근본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개입을 불구화시켰다.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면모로 대중들에게 향하기는커녕, GBL은 POUM의 흔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닌에 의해 POUM 민병대의 외국인 지원자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포스코는 “유일한 혁명적 정당”으로서 POUM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서약했다(바탈라, 1936년 8월 4일, 귈라몬의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1936년 8월에 장 로우스가 지도하던 IS 대표들이 스페인에 도착해서 “POUM의 배반”을 포함하고 있던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자투쟁(La Lutte Ouvreire)를 배포하자, 포스코는 POUM 지도자들만큼이나 격앙되었다. 나중에 그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터내셔널 서기국(IS)의 정책 전체를 비난하기에 충분했다.”고 썼다(귈라몬,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로우스는 포스코를 “POUM이 우리를 억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우리 대오 내부의 POUM 첩자”라고 묘사했다(Bulletin Interieur International 1호, 1937년 4월[우리의 번역]).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GBL로부터 쫓겨났고, 1935년 후반에 프랑스 지부로부터 쫓겨났던 무원칙한 책략가인 래이몬드 몰리니어(Raymond Molinier)와 결탁하여 프랑스어로 된 출판물인 Le Soviet를 몇 회 발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POUM 지도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에 대하여 그를 비난했던 사람은 포스코만이 아니었다. 스니블리에트, 서지, 그리고 베리켄도 역시 트로츠키를 비난했다. 1936-37년에, IS의 보다 젊은 인자들이 스니블리에트, 베리켄, 그리고 서지의 명백한 친POUM 관점과의 격렬했지만 종종 끝을 보지 못한 논쟁을 벌였다. IS에서 있던 그들 중에서 보다 굳건했던 인자들이 노르웨이에서 트로츠키의 비서로 활동했던 체첸 반대파 어윈 볼프(Erwin Wolf)(브라운)과 그 이전 터키와 프랑스에서 트로츠키의 비서였던 루돌프 클레멘트(Rudolph Klement)(아돌프)였다.

1936년 12월 20일의 한 편지에서, 로우스는 “스니블리에트가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제4 인터내셔널의 사무국의 한 성원으로서의 지위에 있던 그는 POUM의 정치노선을 칭송하기 위하여 IS의 정치노선을 분명하고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고 보고했다(같은 , [우리의 번역]). 베리켄 역시 POUM을 방어했다. POUM이 일부 “실책들”을 저질렀음을 베리칸이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실수들을 배신이라는 올바른 용어로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이들 “실수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범죄적”이라는 비난에 그의 총구를 겨누었다. 닌과 그의 지지자들을 칭송하는 서문을 단 POUM의 기사가 베리켄의 신문에 실리자, 트로츠키는 편집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6년 동안, 닌은 실수들 이외에는 한 것이 없다. 그는 사상을 가지고 농락했으며, 어려움들을 회피했다. 그는 전투를 작은 조합들로 대신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혁명정당의 건설을 방해했다. 그를 따르던 모든 지도자들이 똑같은 책임이 있다. 6년 동안, 그들은 스페인의 이 열정적이고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악의 비참한 패배들로 이끌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왔다....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동지는 가짜 볼셰비키의 정식들로 스스로를 덮고 있는 멘셰비키 배신자들을 혹평하기는커녕 동지의 동의로 그것을 재생한다.

“POUM의 노동자들이 영웅적으로 싸웠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말라.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와 그들의 희생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 그리고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권모술수, 변덕, 모호함을 박살내라. 전쟁의 운명, 혁명의 운명이 달려 있을 때에 가장 쓰라린 진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닌의 정책뿐만 아니라 닌의 정책을 보호하거나 기만하거나 방어하는 어떤 자들과도 공통점이 없다.”

-“노동자투쟁(La Lutte Ouvriere) 편집국에 보냄” 1937년 3월 23일

트로츠키에 응답하면서, 베리켄은 “우리는 이 기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무국과 프랑스 지부의 POUM에 대한 태도 일체를 종파주의이며 해로운 것이라고 간주하며, 강렬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범죄적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베리켄, “스페인 혁명과 POUM과 관련한 올바른 정책을 위하여”, 정보통신, 1937년 7월에서 재출판됨)라고 격노했다. 베리켄은 볼셰비키 혁명의 교훈들을 거부하기 위한 닌의 편협한 정당화들을 재탕했다: “당은 의지에 따라 원하는 대로 수입되거나 수출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아니다. 스페인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적’일 것이다.” 베리켄은 “사무국의 전체 활동은 POUM 외부에서의 혁명적 정당 건설로 향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마침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스페인에서 POUM은 혁명적 조직이라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다.(같은)

불행하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개입할 수 없었고, POUM을 둘러싼 차이들에 관하여 결론이 날 때까지 투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인하여, IS 내부의 인자들은 처음에는 스니블리에트와 베리켄과 같은 POUM 옹호론자들의 압력 들쪽으로 기울었고, 분명하게 닌과 그의 동료들의 “비열함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곳에서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의 미약함으로 인하여 이것은 악화되었다. 이것들은 PSOE/JS 입당 문제를 둘러싸고 닌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와 함께 했었던, 몇 안되던 ICE 중핵 중의 하나였던 그란디조 무니스(Grandizo Munis)가 1936년 10월에 돌아오면서 강화되었다. 당시까지도 압도적으로 많은 스페인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았으며, 혁명적 정세에서 노동계급 대중조직에 맞닥뜨렸던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도 간절하게 필요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지도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반대하기 위한 주장이 아니다.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기구인 레닌주의 전위정당 건설을 목적으로, POUM,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노동자 정당들로부터 분리하여 혁명적 인자들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첫 번째 임무였다. 그 대신에,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IS는 볼셰비키 정당이 건설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서 POUM 가입에 압도적으로 몰두했다.

1936년 8월 24일자 한 편지에서,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독일 이민자, 한스 데이비스 프로인드(Hans David Freund(Moulin/모울린))은 POUM을 “중도주의 정당”으로 서술했지만, “비록 우리가 POUM의 현재 지도부를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서, 혹은 현재의 지도자들의 볼셰비키주의-레닌주의의 방향으로의 진화에 의해서 POUM의 볼셰비키화를 성취할 것인지에 대하여 예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POUM의 볼셰비키화를 향하여 활동해야만 한다.” (혁명적 역사, 4권, No. 1/2)고 결론을 내렸다. IS의 지지와 재촉을 받으면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분파적 권리를 가지는 POUM으로의 입당을 준비하기 위하여 시도했다.

그들의 첫 번째 탄원에 대한 닌의 대답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개별적으로만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당신들은 반드시 당신들이 스스로를 해산하며 제4 인터내셔널의 출판물들이 되고자 하던 것들에 의해 우리 당에 대하여 수행되었던 비방과 명예훼손 캠페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닌이 바르셀로나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936년 11월 13일, 정보통신, 1937년 7월). 이 일 이후, SBLE는 1937년 4월 POUM 지도부를 격렬하게 논박하는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면서 또 다른 가입을 위한 시도를 했다(정보통신, 1937년 7월). 1937년 7월에 정보통신에는 바르셀로나 5월의 나날들 이후 POUM에 대한 집중에 대하여 경고하는 트로츠키의 기사도 역시 출판되었다.

“POUM은 아직까지 카탈로니아의 조직으로 남아 있다. POUM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당 입당 때에는 빈곤한 비타협성으로 자신들의 근본적인 기회주의를 덮어 가리면서 입당을 막았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에서의 사태들이 사회당과 UGT 대오 내부에서 균열과 분리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이 기대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돌아오는 수주일 안에 많이 줄어들게 될 POUM의 중핵들의 내부로 제한하는 것은 치명적일 것이다. 카탈로니아의 무정부주의 대중들, 다른 곳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대중들을 향하여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의 외형적 형식들을 보존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하여 지지의 새로운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문제이다.”

- “바르셀로나에서의 봉기(일부 서문들)”, 1937년 5월 12일

내전 첫 수개월만에 수천 명으로부터 3만 여명으로 성장했고,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 처럼, 그들의 좌익적 수사가 “스페인에 혁명정당이 존재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던” POUM의 조직원들에 대한 접근을 위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애써야 했던 것에는 의문이 없다(“좌익 중도주의의 죄목” 1939년 3월 10일). 두말할 것도 없이, 외부로부터 POUM의 대오에 접근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잠깐동안 지속될 기회를 낚아채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격동 속에서 대규모 정당들에 입당했으며,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관점과 원칙들을 채택하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프랑스 전환의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던 정세와는 완전히 달랐다.

POUM은 1936년 1월에 “좌익 선거협정”에 조인하면서 계급의 적에게로 넘어갔었다. 트로츠키가 강조하였듯이, POUM 대오 내부에 있는 혁명적 인자들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이러한 배신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규탄”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했다. POUM에 이 협정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입당 전술을 고려하는 것을 위해서 조차 유일하게 원칙적인 기초였다. 닌의 카탈로니아 인민전선정부 법무장관으로의 참여는 POUM의 원래의 배신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임이 명백했다. 비록 닌이 1936년 12월에 정부로부터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POUM의 전체 방침은 정부 재진입을 획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채로 있었다. 심지어 분파적 권리를 가지면서 조차 POUM에 합류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POUM의 규율에 종속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1936-37년 스페인에서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POUM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위한 장소는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후 스니블리에트와 베리켄에 대한 논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베리켄이 문제를 분파로서 존재할 단순한 권리로 축소하는 것은 단지 그가 중도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경계선을 완전히 지워버렸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하게 될 말이 여기 있다. ‘POUM에는 민주주의가 없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곳에는 우익을 위한, 중도주의자들을 위한,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있지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다.’ 즉, POUM에 있는 민주주의의 범위는 근본적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그들의 중도주의적 정책의 실제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한 사상들과 개인들에 대한 테스트” 1937년 8월 24일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이 당면했던 임무는 POUM과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스트들뿐만 아니라 사회당이나 공산당 출신의 좌익 인자들을 재편하는 것을 통하여 전위정당의 중핵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렛대의 받침으로서의 그러한 중핵을 건설함으로써만 오로지 혁명적 노동자 대중을 그들의 잘못된 지도자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하여 지렛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공동전선의 전술은 노동계급적 기초와 개량주의, 중도주의,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 경향들의 지도부 사이의 모순들을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반동의 공세에 맞서는 행동의 통일과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배신을 폭로하는데 있어서 비판의 자유라는 조합은 트로츠키주의라는 정치적 주장들을 생생한 현실 속으로 옮기는 것에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SBLE는 또한 인민전선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POUM과 CNT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선”에 대한 호소와 함께 강령적으로 POUM의 방향으로 휘었다. 1937년 2월의 한 전단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민전선에 의해 대표되는 신성한 통일에 반대하여 일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긴급하게 필요하다....

“극좌에서 강력한 조직들로서, POUM과 CNT는 반드시 혁명적 전선을 선도해야만 한다. 혁명적 전선의 목적뿐만 아니라 재앙적인 인민전선 정책을 거부하는 모든 노동자 조직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도 분명하게 수립되어야만 한다.”

- SBLE 전단, “CNT, POUM, FAI, JJ.LL.(청년 해방주의자들)의 노동자들 -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귈라몬의 Documentacion(ICL의 번역)

SBLE의 슬로건은 POUM의 “혁명적 노동자 전선” 호소에 대한 직접적인 메아리였는데, 이 “혁명적 노동자 전선” 슬로건을 통해서 닌은 카탈로니아 정부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CNT 지도자들과의 정치협정을 감추고자 했다.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혁명적 전선은 소비에트의 창설을 통해서만, 그리고 혁명정당의 지도력 하에서만 오직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POUM과는 달리, SBLE는 소비에트를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와 별개의, CNT와 POUM의 지도력 하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전선”에 대한 요구는 단지 무정부주의와 중도주의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환상만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37년 1월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트로츠키는 스페인에 관한 그의 저작을 다시 시작했는데,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POUM 옹호론자들에 대한 논박들이었다. IS에 있던 클레멘트와 볼프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도부의 친POUM 기회주의를 다루기 위한 초기의 어설픈 시도들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937년 5월의 한 IS 모임에서 베리켄과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내부 통신에 그에 대한 비판을 출판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스니블리에트에 대한 초기 동의에 대한 자기 비판적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안은 “IS는 [네덜란드]RSAP가 이들 차이들에 대한 국제적인 토론을 수용하도록 납득시키기 위하여 헛되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한다”고 인정했다. 나중에 스페인에서 소식을 전하면서 볼프는 “IS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침묵과 동요”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썼다. “POUM은 교묘하게 제4 인터내셔널의 각기 다른 지부들 사이의 차이를 활용했고, 스페인 BL의 주장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썼다(볼프, “내부 보고서” 1937년 7월 6-7, Documentacion[우리의 번역]). 볼프는 또한 “과거에, 우리는 POUM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했다. 혁명적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자주 잊혀졌다.”(같은 )고 인정했다. 마침내 “스페인의 현 정세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임무들에 대한 제4 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의 결의안들”(날짜 없음)에,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등장했다.

“제4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혁명적 지도부 건설의 임무는 POUM 지도부의 조언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4 인터내셔널 운동의 노선과 강령에 기초하여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보통신, 1937년 7월에 재출판됨

IS가 스페인으로 가고자하는 다른 중핵을 찾지 못하자 자진해서 스페인으로 갔던 볼프는 잠시 후에 스페인에 있던 스탈린주의 GPU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프로인드(모울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 해에 클레멘트 역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바르셀로나 봉기

POUM의 배신의 마지막 장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의 거리에서 펼쳐졌다. 4월 14일, 가엾은 부르주아지 정부의 공화국 창립 기념이 도시 노동계급 여성들에 의한 거대한 식량폭동으로 범벅이 되었다. 4월 29일에는, 휴고 오일러가 그의 1937년 목격담인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들”(혁명적 역사 1권 2호, 1988년 여름에 재출판 됨)에서 보고하듯이, 자치정부는 “자치 위원회에 직접적으로 기초하고 있지 않은” 모든 조직들은 “현재 카탈로니아가 겪고 있는 불안정과 공포를 신속하게 없앨 수 있도록 거리로부터 즉각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같은 ). CNT, UGT, PSUC 그리고 POUM은 책임감 있게도 그들의 메이데이 시위를 취소했다. 5월 3일,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끌던 강습부대가 CNT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텔레포니카를 공격했고, 바르셀로나와 교외 전체에서 바리케이드들이 세워졌다.

SBLE는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CNT와 POUM 조직원들에게 혁명적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투쟁했다. 1937년 5월 4일 그들의 전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공세”를 취할 것과 상점, 공장, 지구들에 “혁명적 방어위원회들”를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정보통신 1937년 7월에 재출판). 하지만 POUM의 한 전단은 노동자들이 이미 반혁명적 도발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퇴각이 필요하다”로 주장했다(같은 ). 거리로부터 정부 군대들의 철수와 노동계급이 무장을 유지할 것을 호소하면서, POUM은 “이들 완전히 수긍할 만한 조건들의 성취가 투쟁을 끝낼 수 있게 해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계급과 스탈린주의 부르주아지 똘마니들은 이들 “완전하게 수긍할 만한 조건들”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UM 지도자들은 “투쟁을 끝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혼란과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또 다시 바리케이드들로 되돌아갔다. 오엘러의 보고에 따르면, 5월 5일 수요일에는 경찰의 잔혹성에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새로와진 에너지와 분노로 계급의 적을 공격했다.” 기관총, 탱크, 소구경 포로 무장한 두루티 부대의 한 지부와 약 500명의 POUM 병사들이 바리케이드에 있는 자신들의 동지들에 합류하기 위하여 아라곤 전선을 떠났지만, 전투가 끝났다는 거짓말에 되돌아갔다. 바로 그날, 두루티의 친구들 또한 아래와 같이 선포하는 전단을 바리케이드들에 배포했다.

“노동자들! 혁명적 준타[소비에트]. 범죄자를 사살하라. 무장 군대를 무장해제 하라. 경제를 사회화하라. 노동자 계급에 반항해온 정치정당들을 해산시키라. 우리는 거리들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른 모든 것보다도 혁명. 우리는 거리에서 우리와 우호적이었던 POUM 출신의 우리 동지들을 환영한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반혁명을 타도하자!”

- 귈라몬, 두루티의 친구들 그룹: 1937-1939로부터 인용됨

그러나 두루티 그룹은 계속해서 CNT 지도부에 희망을 걸었고, CNT와 POUM이 권력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자 두루티 그룹 스스로가 혼란에 빠졌다. 5월 5일, SBLE의 대표들이 공동 실천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하여 두루티의 친구들과 만났으나 허사였다.

5월 6일, 오엘러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오늘 아침 Solidaridad Obrera(CNT)는 ‘CNT와 UGT 양자 모두는 일터에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고 선언했다. 똑같은 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전단에 대한 모든 책임을 거부했다. 라 바탈라(POUM)가 나타나서는 다음과 같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적인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반혁명적 기도들이 분쇄된 지금은 투쟁로부터 철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들, 일터로 복귀하라.’ ... 팔콘 호텔(POUM의 총지휘부 자리) 옆에 있던 바리케이드들에 있던 POUM 노동자들은 이 전단을 보자 분노하여 자신들의 자리들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배신자들로 비난했다. Soli로 불리던 CNT 신문의 목요일자는 많은 바리케이드들에서 그 이전 호의 신문들처럼 불에 태워졌다.”

- 오일러, 인용된 같은 으로부터

그날, POUM의 지도자들은 온순하게 라 바탈라 사무실들을 경찰에게 넘겨주었으며, 추앙 받던 좌익 무정부주의자 카밀로 베르네리의 살해된 시신이 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다시 나타난 백색테러의 첫 번째 희생자들 중의 하나였다. 수 주일이 지나지 않아 안드레스 닌도 역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에게 호의적인 전투원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체포가 임박했다는 경고를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거부하던, 그는 끝까지 인민전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장 안드라데는 “우리들 중 누구도 상황이 우리의 체포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심각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언급했다(프래이서, 피의스페인).

오엘러는 SBLE의 POUM 가입 시도들에 대하여 볼셰비키 지도자인 트로츠키를 잘못 비난하면서 그의 “청산주의”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의 평가의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오엘러는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이것은 POUM에 대한 지극히 실제적인 정치적 책임이다. 1934-35년 프랑스 전환에 반대하는 오엘러의 닌과의 썩은 블럭은 닌이 POUM 속으로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을 청산할 때 닌에게 좌익 정치적 위장막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의 시기에, 오엘러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호제 리벌(Jose Rebull)의 72 소조라는 POUM 내부에 있던 반대파 그룹과 제휴했다. 오엘러의 혁명적 노동자 동맹이 출판했던 1937년 4월 16일 오엘러의 가명으로 보이는 “에드워드 올리버(Edward H. Oliver)의 목격담”은 “그 목적(sic)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인 조직들”로서 POUM, CNT, 그리고 FAI가 “대중들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혁명적 공동전선을 조직”할 것을 호소했던 바르셀로나 POUM 지역위원회의 결의안을 무비판적으로 칭송했다.(올리버, “바르셀로나 스페인 공화국의 6번째 기념식”, 1937년 4월 16일 자로 되어있음). 올리버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자치정부의 위기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노동자들의 해법”을 제공했다(같은).

리벌은 POUM의 모든 배신들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걸쳐 POUM에 남아 있었다. 5월의 나날들 직후에 리벌은 POUM의 통치상의 슬로건에 대한 솔직한 비평을 저술했는데, 바리케이드들을 해체하고 봉기를 파괴시킨 것에 있어서의 POUM의 역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리벌, “‘UGT-CNT 정부’의 슬로건에 대하여”, 1937년 5월을 보시오. 혁명적역사 4권 1/2호에서 재출판)

피어 브루에: “객관성”으로 표현된 패배주의

에밀 테밈(Emile Temime)과 공동으로 저술한 스페인 내전의 역사에서, 피어 브루에(Pierre Broue)는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에서의 POUM의 역할에 대하여 교묘하게 속이고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사태들에 대한 닌/안드라데 버전을 퍼뜨리고 있다.

“5월 6일 목요일이 되면서 질서가 거의 회복되었다. 컴패니스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선언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 대중들은 평온에 대한 호소를 들었고, POUM은 후퇴했다. POUM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반혁명에 대한 부분적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자들, 일터로 복귀하라’고 선언했다.”

- 브루에와 테밈, 스페인에서의 혁명과 내전(캠브리지, 메사츄세츠: MIT 출판사, 1970)

노동자들에 의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물러서기는” 커녕, POUM 스스로가 바탈라(1937년 5월 8일)에서 “정상 상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기여를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을 떠벌렸다(오엘러,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들”에서 인용). 반대로, 레닌주의 전위였다면 이들 봉기에 나선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을 그들의 배신자들로부터 분리하고 권력을 위한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순간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닌과 그 도당은 노동자들에게 “물러 설 것”을 명령하는 데 있어서 CNT/FAI의 배신자들과 함께 했던 중도주의 투항주의자 집단이었다.

브루에와 테밈은 POUM의 인민전선 가입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스페인 혁명가들은 고립되었음을 느꼈다”라고 쓴다. 소련에서의 스탈린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들,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 그리고 다른 곳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추정에 따른 수동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은 “1936년에 세계적인 힘의 균형은 1917-1919년에 러시아 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 혁명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래와 같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한다.

“물론 그들이 가졌던 대담한 혁명적 정책으로 이러한 고립을 상쇄할 기회들에 대하여 끊없는 토론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 혁명은 세계적인 힘의 균형을 뒤집을 가능성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 정확하게 스페인 혁명의 패배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립감이 스페인 혁명가들의 태도를 결정했던 요소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들 중 다수가 혁명을 지속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같은 

브루에와 테밈은 바르셀로나 5월의 나날들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를 마무리하면서 이 주제로 되돌아온다.

“물론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즉자적인 반응이 새로운 혁명적 추진력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척척 진행되도록 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POUM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고 단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같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같이, 스페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의 승리는 당시 무르익어 가고 있던 2차 세계 대전으로의 경로를 뒤집으면서, 전세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1936년에 프랑스는 준 혁명적 정세에 휘말려 있었고, 벨기에에서는 거대한 파업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유럽 전역에서 독일 히틀러 나찌의 승리가 노동계급 내에서의 좌익적 실천의 증가를 강제했었다. 1934년 미국 노동자당이 지도했던 톨레도 오토-라이트 파업, 미니에폴리스에서 있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지도했던 팀스터스 파업들, 그리고 공산당 지지자들이 지도했던 샌프란시스코 항만노동자들의 11주 동안의 파업 등 3대 주요 파업들이 계급적 전투들을 위한 기초를 놓았고, 이것이 그 뒤 수년만에 CIO를 만들어 냈다. 혁명적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했으며,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에 대한 관료의 정치적 장악력에 대한 어떠한 인지된 도전에 대해서도 피로 물들였던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소비에트 대중들을 소생시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1937년 8월 24일자의 한 글에서, 트로츠키는 바르셀로나의 5월의 나날들 동안에 권력을 위한 투쟁은 순전히 “모험주의”였을 것이라는 베리켄의 주장에 답을 했다. 트로츠키의 말들은 브루에의 전투보다 상위에 있던 시건방진 “객관성”에 대한 응답으로도 또한 복무한다.

“1936년 7월에 실제로 권력을 장악했던 것처럼, 1937년 5월에 만약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했더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스페인 전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부르주아지-스탈린주의 반동은 카탈로니아 노동자들을 분쇄하기 위하여 2개의 정권들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코가 점령했던 영토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카탈로니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하여 돌아섰을 것이며, 파시스트 군대를 고립시켰을 것이고, 당연히 파시스트 군대의 해산을 낳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외국정부가 스페인이라는 가장 첨예한 땅에 자기 정권을 내던지는 모험을 감내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개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극도로 위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봉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불확실하고 위험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사태의 경로가 패배의 경우에 있어서 조차도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혁명정당이 있었다면 혁명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한 사상과 개인에 대한 테스트”

혁명적 지도부를 위한 투쟁

앤디 더간은 볼셰비키 지도자 트로츠키가 “혁명적 정세에서 올바른 정치노선이 가장 작은 규모의 그룹들조차도 노동계급의 지도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고 주장하면서 “거의 천년왕국을 신봉하는 구세주주의적인” 정치적 관점이라고 그를 혹평한다(더간, “트로츠키와 POUM”). 혁명적 정세가 무르익었던 때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들과 비교하여 작은 규모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에게 분명히 어려움들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적역사의 박식한 학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주위환경과 무관하게 레닌주의 전위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필사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은 패배를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노동자 운동과 혁명적 투쟁의 역사에 대한 평가는 자기 자신의 강령적 전망에 달려있다. 1930년대 스페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는 입장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능성의 정치”에 - 예를 들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개량주의적 수용 - 대한 그들 자신의 무기력한 탐닉으로 과거를 곡해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적역사라는 패거리는 마찬가지로 1923년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는데, 이 경우에는 브란들러 하에 있던 독일공산당 지도부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그렇게 한다(“볼셰비키주의를 재무장하면서: 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판”을 보시오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독자들은 이 문서의 한글본을 국제공산주의동맹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

자신의 팜플렛 10월의교훈들(1924년)에서 트로츠키는 만약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었더라면 비슷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왜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은 불가능했었는가에 관하여 1923년에 제기되었던 수많은 “객관적인” 주장들을 폭로하고 논박했다. 트로츠키는 1940년 8월, 빅토르 서지와 기타 “POUM의 변호인들”에 맞서 스페인에서의 혁명적 전망을 방어하는 논쟁에서 이 지점을 되풀이했다. “스페인 대중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대중들의 혁명적 운동을 마비시키거나 단순히 분쇄했던 정당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있다는 것에 역사에 대한 왜곡이 있다”(“계급, 당, 그리고 지도부”). 1936년에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1917년 초기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던 것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만약 레닌이 국가권력 장악을 위하여 볼셰비키 당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투쟁들을 러시아에서 수행하지 않았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비에트들은 반혁명에 의해 분쇄되었을 것이고, 모든 나라들의 몇 않되는 박식한 자들이 오직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가들만이 러시아에서 수적으로 너무도 작고 너무도 성숙하지 못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조로 하는 글들과 책들을 썼을 것이다”라고 썼다(같은).

스페인의 교훈들은 비싼 값을 치렀다. 우리 국제공산주의동맹이 1989-90년 동독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DDR)에서 있었던 맹아적 정치혁명에 개입했을 때, 우리는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정치적 문제와 약점들을 학습하고 이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굉장히 다르기는 했지만(하나는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항하는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지배의 복구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모두 다 혁명적 정세들이었다. 비록 우리가 국제전화와 팩스 통신, 그리고 서독에 확립된 지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SBLE과 제4 인터내셔널 운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력은 적었다. 그러나 중심적인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정치적 명확성, 응집성, 그리고 볼셰비키주의의 강령을 위한 가차없은 정치투쟁이었다. 이 측면에서, “비록 작은 그룹이라도 만약 올바른 진단과 시기 적절한 때에 올바른 슬로건들을 제기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정확하게 혁명적 정세의 이점이 있다”(“혁명의 성격”, 1931년 6월 18일)는 트로츠키의 스페인에 관한 저작들 속에 있는 그의 이해에 따랐다.

우리는 일간으로 출발하여 주간으로 바뀌었던, 동독에서 수만 부씩 배포되었던 Arbeiterpresskorrespondenz(노동자신문통신)이라는 신문을 만들었다. 우리는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인 양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논쟁에 충당되었던 특별호를 포함하여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선전으로 우리의 지지자들을 무장시켰다.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는 소비에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그들의 기원에 대한 1936년 트로츠키의 통렬한 분석인 배반당한혁명을 포함하여 트로츠키 저작들이 공개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충격은 히틀러의 나찌로부터의 독일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사망했던 소비에트 병사들을 형상화한 기념탑에 대한 파시스트의 모독에 맞서는 동베를린 트레프토브 공원에서 있었던 25만 명 규모의 1990년 1월 3일 공동전선 시위에서 보여졌다. 이것은 동독과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동독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으로의 조직화였다. 우리가 이 시위에 대한 호소를 선도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의 강령이 동독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동조를 받는지를 두려워 하고는 자신들의 기반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스탈린주의 지배당은 우리가 호소했던 시위를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동지들이 트레프토브의 연단에서 연설했는데, 이것은 트로츠키의 소련으로부터의 추방 이래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퇴행화되거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대중연설을 했던 최초의 경우였다. 고르바쵸프 하의 소비에트 관료집안으로부터 진행 신호(파란불)을 받은 서독 제국주의자들은 동독을 편입하려는 목적을 가진 최대한의 캠페인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정치혁명의 유령에 대응했다. 우리는 이 총공격에 맞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투쟁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하여 우리는 미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들을 위한 기초를 놓는데 일조 했다.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몇 않되는 세력들, 일천한 경험으로, 그리고 트로츠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시대 계급투쟁의 화해 불가능하고 잔혹한 성격에 대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현학적 반영인”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함에 있어서 가차없는 태도와 동요들에 맞서는 격렬한 논쟁” 속에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한 채 혁명적 파도의 물결에 휩쓸렸다(“좌익 중도주의의 죄목”). 우리가 스페인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 속에서 목숨을 바쳤던 (상당수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한 것이었다) 어윈 볼프, 루돌프 클레멘트, 그리고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에 경의를 표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과거의 배신들에 대하여 변명하고 그래서 미래의 새로운 배신들을 준비하는 기회주의자들을 규탄하고 논박한다. 이것은 새로운 10월들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트로츠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을 재건설하기 위한 필수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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