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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원칙들과 선거 전술들-국제공산주의 동맹

스파르타시스트 영어판 61호

2009년 봄

 

자본주의 국가의 행정 기관장 직들을 타도하라!

맑스주의 원칙들과 선거 전술들

정정이 첨가됨

2007년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제5회 대회는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에 있는 기관장 직(예를 들면 대통령, 시장, 도지사)에 입후보하는 것에 대한 원칙의 문제로서의 반대의 입장을 채택했다. 이 입장은 자본주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라는 우리의 이해로부터 도출된다. 그 핵심에서, 이 국가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계급 지배와 그 생산체제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능하는 무장한 자들의 기관들(군대, 경찰, 법원들, 그리고 감옥들)로 구성된다.

공산주의 대표자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지도자들로서 미국 연방의회, 의회들, 그리고 기타 입법기관들에서 반대파들로서 복무할 수 있다. 그러나 단독으로건 연합으로건 기관장 직을 맡거나 부르주아지 입법기관이나 지방자치 의회의 통제권을 획득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 기제의 행정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필요로 한다. 과거 ICL은 우리가 행정 기관장 직들을 떠맡을 의도가 없음을 미리 선포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직위들에 입후보 할 수도 있음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재검토하는 가운데, 우리는 행정 기관장 직위들에 대한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은 어떠한 선포를 미리 하더라도 후보가 이미 그러한 책임을 수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한 활동에 개입하려는 자칭 맑스주의자들은 국가에 대한 지배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개념들에 합법성을 부여할 뿐이다.
 
2007년 대회 문서에서 우리가 선언하였듯이:

“행정 기관장 직 입후보에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하면서, 우리는 제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I, 혹은 코민테른]의 실제 창립문서들인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에 대한 자연스러운 추론으로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을 승인하고 성문화하고 있다. 선거활동을 추구함에 있어서 의회와 행정 기관장 직 사이의 차이를 도출하지 못했던 CI 2차 대회 시기가 이러한 이해를 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CI의 첫 4개 대회들에 대한 이론적, 강령적 작업의 완수를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당선의 기회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행정 기관장 직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는 것은 충분히 쉽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다: 당선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전의 우리 실천은 코민테른과 제4 인터내셔널의 그것에 따랐다. 이것이 우리가 과거에 무원칙한 방식으로 활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선배들이나 우리들 자신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원칙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함에 따라서 강령들은 진화하며 우리는 우리의 혁명적 선배들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면밀히 검토한다.”

-“행정 기관장 직위들을 타도하라!” 스파르타시스트 60호 2007년 가을

개량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대치(對置)가 행정 기관장 직 입후보 문제의 이면에 있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성취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지 국가를 활용할 수 있는가? 혹은, 이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국가 기제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자본가 착취자들을 진압하고 몰수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계급 지배(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강제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를 창조해야만 하는가?

1917년 10월 혁명 이래, 러시아의 멘셰비키들에서 시작하여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과 과거의 맑스주의자 칼 카우츠키에 의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예증되었던 다양한 조류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장악으로 이끌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대신에, 개량주의자들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지도권을 넘겨주고 그들을 지지했어야 했음을 고수했다 - 모두가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의 이름으로. 10월 혁명의 전야에 저술되었던 “국가와혁명”, 그리고 더불어서 1년 후에 쓰였던 이것과 짝을 이루는 저작인 “프롤레타리아트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는 이러한 관점들에 대한 통렬한 논박을 대변한다. 이들 저작들에서 레닌은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오(誤)인용하고, 그리고 참으로 종종 자기 자신들의 반혁명적 방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맑스와 엥겔스의 관점들을 발표하지 않았던 기회주의자들의 왜곡들과 변명들로부터 맑스와 엥겔스를 구출한다.

오늘날 수정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이 덜 활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정치는 부르주아지 사회라는 틀에 완벽하게 한정된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그러한 정책을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불가침성으로 대중들이 물들게 하기 위한 현실에서의 훈련”(트로츠키, 10월의 교훈들, 1924)으로 날카롭게 성격 규정했다. 맑스주의를 고수한다고 주장하는 조직들의 자본가 계급 지배에 대한 그러한 순응들은 10월 혁명의 최종적 파멸과 “공산주의는 죽었다”라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으로 정의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오히려 더욱 현저하다.

소비에트 퇴행화된 노동자 국가와 동유럽의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들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적” 제국주의와의 공통의 대의를 형성해 온 이들 조직들은 이제는 대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목적에 대한 립 서비스라는 수고조차 하지 않으면서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수용에 있어서 훨씬 더 뻔뻔스럽다. 프랑스에서,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인 노동자 투쟁[Lutte Ouvriere](LO), 램버트주의 그룹(지금은 스스로를 독립노동자당[Parti Ouvrier Independent]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통합 서기국(USec)의 대표 섹션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igue Communiste Revolutionnaire](LCR)은 반(半)보나파르트적인 대통령 직에 후보들을 정기적으로 내세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램버트주의 후보는 “시장들의 후보”로서 활동했던 시장이었고, 한편 LO와 LCR은 프랑스 자본주의 국가로부터의 직접적인 대폭적인 보조금들을 가지고 그들의 선거활동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한다. 브라질에서는, USec 그룹의 지도자 미구엘 로세토가 사회민주주의자 룰라가 이끌던 인민전선 부르주아지 정부에서 장관으로 실제 복무했다. 현재 프랑스 LCR은 공산주의 혹은 혁명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 “신 반자본가 당”으로 스스로를 변형시켜 왔다. 영국에서는, 초기의 모습에서, 구 노동당을 내부로부터 개혁하기 위하여 시도하면서 수십 년을 보냈던 피터 타페의 사회당(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의 핵심)이 이제는 블레어/브라운의 신노동당에 대한 대안으로서 “구노동당” 개량주의로 정의되는 “대중적 노동자 당”을 요구한다.

여전히 때때로 10월 혁명의 언어를 말하는 몇 되지 않는 자칭 맑스주의 그룹들 가운데 볼셰비키 경향(BT)와 국제주의자 그룹(IG)이 있다. BT는 2차 냉전의 시작에 맞추어 1980년대 초반 우리 조직을 그만두었던 소수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우리가 1979년 공산주의적 도덕과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반하는 범죄들을 이유로 축출했던 소시오패스 빌 로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이끌고 있다. IG의 창립 중핵은 동유럽과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반혁명들에 뒤이어 다양한 “급진적” 소부르주아지 환경들을 향한 기회주의적 방침을 추구하면서 1996년 우리 당으로부터 이탈했다. 이들 냉전의 정치적 받침대들은 행정 기관장 직 입후보를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을 비난하는 것에서 함께 해 왔다.

IG는 지금은 IG 지지자인 마르조리에 스탬버그를 뉴욕 시장선거에 입후보시킨 우리의 1985년 선거활동을 넌지시 비추면서 우리의 입장을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의 연속성”(“프랑스가 우익으로 심하게 회전하다”, 국제주의자, 2007년 7월)의 중단으로 비난했다. 우리의 혁명적 선배들의 실천을 뒤따르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과거 입장은 당시의 주어진 상황에서는 무원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IG의 계속적인 그러한 활동들에 대한 방어는 무원칙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최고사령관 직을 포함하여 “어떠한 직위에도” 입후보 할 수 있다고 IG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단언한다: “혁명적 후보가 선출될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는 비통상적인 경우에, 당은 이미 노동자 위원회들과 소비에트 성격의 기타 기관들에 대한 건설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은 만약 당선된다면 자신의 후보들은 부르주아지 국가의 기구들이 아니라 노동자 권력의 그러한 기관들에 스스로를 기초할 것이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한편 BT는 자기 자신의 의회주의적 왜곡을 추가하면서 이 문장과 “새로운 것”으로서 우리의 입장에 대한 IG의 서술을 찬성하면서 인용했다: “결국에는 아마도 ICL 동지들은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행정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의회 입후보 또한 ‘장애물’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ICL이 ‘기관장 직들’를 거부하다: 대통령들과 원칙들에 관하여”, 1917, 2008).

공산주의자들이 기관장 직에 입후보해야 함을 허용함에 있어서, IG는 “만약 당선된다면”, 적어도 혁명적 정세에서는 그러한 직위를 맡을 가능성을 분명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열어 둔다. BT는 나름대로 입각주의(즉, 부르주아지 내각에 장관으로서 복무하는 것)과 부르주아지 의회에서 혁명적 노동자 대표자들로서 복무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 사이의 어떠한 차이도 없앤다. BT의 투덜거림의 이면에는, 부르주아지 의회들이 “인민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절대적 권위의 기관들이라는 (매우 사실이 아니며 소부르주아지적 편견을 표현하는) 암묵적 가정이 숨어 있다. BT가 분명하게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은 여왕전하의 의회들이다. BT는 “물론 부르주아지 국가 기구들을 ‘철폐’하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는 것이다”(같은 출처)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쉽게 속는 자들을 위한 일요일 설교에 불과하다.

IG와 BT는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입장에 대한 장막으로서 뜻밖의 구세주(deus ex machina) “혁명적 정세”를 주문으로 불러낸다. 만약 볼셰비키가 혁명적 정세가 한창이었던 1917년에 멘셰비키와 우열을 다투면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들로”라는 볼셰비키들의 요구에 공허함을 부여했을 것이며, 볼셰비키들을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좌익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반대로 IG와 BT에게는,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인 척하는 자들이 부르주아지 국가권력의 조종간들에 자신들의 손가락을 얹기 위한 특수한 상황들을 항변하는 “비통상적인 경우들”로 역사가 어질러져 있다. 게다가, IG와 BT는 종종 혁명적 정세의 어떠한 징후도 없는 때에,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들이 선거승리로 시의회들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통하여 부르주아지 국가를 관리하는 그들의 첫번째 경험을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통상적이라는 사실을 고의로 무시한다. 그러한 지방자치주의 혹은 “지방자치적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탈선시키는데 복무해왔다.

아주 진정한 의미에서, 기관장 직 입후보의 문제는 20세기의 벽두에 제2 인터내셔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좌익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입각주의에 반대하는 미완의 투쟁으로 바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관장 직에 대한 자신들의 노선을 지키기 위하여 IG와 BT가 제기하는 주장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의 오른쪽에 이들을 위치시킨다.

이 소련 붕괴 이후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깊은 골에 빠져있다. 이들 상황들 속에서, 혁명가들이 과거의 지극히 중요한 강령적 성취들을 방어하고, 비판적 학습, 논쟁, 그리고 적용을 통하여 맑스주의 강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1848년의 혁명들, 1871년의 파리코뮌의 교훈들, 그리고 여태까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위대한 성취였던, 자본주의 정부에서 기관장 직을 맡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에 대치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던 1917년 10월 혁명이라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의식성의 최고의 표현들을 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가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1848년의 혁명적 격변들의 직전에 초고가 나왔던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번째 걸음”(공산당의 선언, 1847년 12월-1848년 1월)으로서 자기 자신의 국가를 세워야만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차 부르주아지 계급으로부터 모든 자본을 강제로 취하고,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모든 생산 기구들을 중앙집중화하고, 가능한 신속하게 생산력의 총합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활용할 것이다.”라고 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언급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가 어떻게 부르주아지 국가를 대체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선언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로의 의회적 길의 문제도 언급되지 않는다 - 보통선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852년 초가 되면서, 맑스는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의 투쟁 속에서, 의회제 공화정은 정부 권력의 자원들과 중앙집중화를 억압적 방책들과 함께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혁명들은 이 기제를 파괴하기는 커녕 그것을 완성했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1852)는 이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로 하여금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기제를 붙잡아 쥐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프랑스에서의 내전, 1871)고 결론 내리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었다. 이 저작에서 맑스는 “국가권력은 점점 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국적 권력, 사회적 노예제를 위하여 조직된 공권력, 계급 독재의 엔진의 성격을 띠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코뮌의 첫번째 포고는 상비군에 대한 진압과 그것의 무장한 인민들로의 대체였다. 부르주아지 국가권력을 대체했던 코뮌은 “의회가 아니라 일하는 기관,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이어야 했다”(같은 ).

수 차례,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맑스와 엥겔스 지지자인양 하던 자들은 중심적으로 국가라는 주제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혁명적 국제주의적 전망을 약화시키거나 일탈시키려고 시도했다. 맑스는 통합 SPD의 1875년 창립강령에서 제기되었던 “자유로운 국가” 요구를 다루면서 혹평을 하고 있다. 19세기 카이저의 독일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을 포착한 맑스는 속임수에 의지한다고 고타강령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의회적 형식들로 치장한, 봉건적 첨가물들로 잘 섞인, 동시에 이미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그리고 관료적으로 목수질하여 만들어진, 경찰의 보호를 받는 군사 독재에 불과한 국가로부터 오직 민주 공화국에서나 의미를 가지는 것들을 요구하는 것과 그리고는 게다가 ‘합법적 방식’으로 국가에 그러한 것들을 강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이 상상하도록 이 국가를 믿게 만드는 것이라는

“민주 공화국에서 천년왕국을 보며, 끝장을 볼 때까지 계급투쟁이 치러져야만 하는 곳이 정확하게 부르주아지 사회의 이 마지막 국가형식에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지어 천박한 민주주의 조차 - 심지어 그것조차 논리가 아니라 경찰에 의하여 허용된 것의 한계 속에 틀어박혀 있는 이러한 종류의 민주정치 위에 있는 산들만큼이나 높이 있다.”

-고타강령에 대한 비평, 1875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에 대한 그의 비평에서, 엥겔스는 이 주제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고 동시에 입각주의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썼다.

“만약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당과 노동계급은 오직 민주주의 공화국의 형식 하에서만 권력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미 제시된 것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특정한 형식이다. 제국 하에서 우리의 최상의 인민들이 미쿠엘 처럼 장관들이 되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일 것이다. 비록 이것이 프랑스의 루이 필립 하에서 조차 가능했고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을 위한 요구를 강령 속에 직접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법적 관점에서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공화제적 당 강령조차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 공화국, 그리고 공화국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도 또한 아늑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수립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증명한다.”

1891년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에 대한 비평, 1891년 6월

오하네스 미쿠엘은 1852년까지 공산주의 동맹의 성원이었는데, 그 이후 그는 독일 부르주아지 계급으로 탈주하여 결국에는 민족자유당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수 년 동안 정부 장관으로서 복무했다.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하여 제정되었던 반사회주의 법에도 불구하고, 독일 SPD는 19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 규모와 영향력에서 엄청나게 성장하였고, 1890년 그 법의 폐지 이후에는 훨씬 더 성장했다. 일련의 선거에서의 성공들이 거대한 지방자치 그리고 의회 구성부분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상당한 정도의 당재정과 기타 자원들, 그리고 육중한 당과 노동조합 기구가 모두 융합되어 보수화하는 영항력을 행사하고, 강력하면서도 어느때보다 더 현저한 기회주의 경향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파리코뮌에 관한 맑스의 주요 저작에 대한 1891년 서문의 수고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사회민주당 속물이 다시 한번 다음 단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좋아요, 신사양반들, 당신들 이 독재가 무엇과 같은지 알고 싶은가? 파리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

-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내전에 대한 서문, 1891년 3월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SPD 편집자들은 “사회민주당 속물”을 “독일의 속물”로 바꾸었다!

1895년 엥겔스의 사망 이후 수년 만에, SPD의 지도적 인물인 에듀어드 베른슈타인은 부르주아지 사회의 점진적 개혁을 전제로 한 “진화적 사회주의”를 찬성하면서 혁명적 맑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성장하는 기회주의 경향에 이론적 표현을 제공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에게는 “운동”이 모든 것이지 사회주의라는 최종 목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포했다. 이미 1895년이 되면서, 공식 독일사회민주당에서의 개량주의의 충격들이 너무도 강해져 있어서 엥겔스가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에 대한 그의 서문을 제출했을 때 SPD 집행부는 그 저술이 과도하게 혁명적이라고 거부했고 엥겔스에게 부드럽게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엥겔스는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려고 시도했다.

SPD 집행부는 재초고 전체를 출판하지 않고 엥겔스가 자신의 혁명적 관점을 포기했었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하여 엥겔스 몰래 특정한 문장들을 빠뜨렸다. 가장 유명하게는, “1848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이슈를 결정했던, 구닥다리 스타일의 반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둔 시가전은 상당히 많이 시대에 뒤 떨어졌다”(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에 대한 서문, 1895년 3월 6일)고 하는 엥겔스의 선언을 그들이 포함했다. 그러나 그들은 엥겔스의 명백한 주장을 삭제했다. “그것이 미래에는 시가전이 더 이상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1848년 이래의 상황들이 민간인 전사들에게는 훨씬 더 불리하게 되었고, 군대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오직 이러한 불리한 정세가 다른 요소들에 의하여 상쇄될 때에만 시가전에서 승리 할 수 있다”(같은 ). 반란자들이 “군대가 도덕적 영향력에 굴복하”도록 만들 필요성(같은 )이 그러한 요소들 중에 하나인데, “만약 그들이 이것에 성공한다면, 군대들이 대응을 하지 못하거나 지휘관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봉기는 승리한다”(같은 )고 엥겔스는 서문의 초반부에서 설명했다.

엥겔스의 요점은 개량주의자들이 그렇게 해서 주장하려고 하는 것처럼 혁명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이 분명하게 아니며, 프롤레타리아트 세력들이 부르주아지 군대를 분열시켜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일찌기 1856년에, 프러시아 군대의 핵심에 있는 거대한 농민적 기초를 날카롭게 알고 있던 맑스는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독일에서는모든 이 농민전쟁의 어떤 제2 판으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뒷받침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사태가 틀림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입니다”(“맑스로부터 엥겔스에게”, 1856년 4월 16일).

맑스: “평화적” 길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들은 또한 특정 나라들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들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맑스와 엥겔스의 격리된 언급들을 이용했다. 신문 La Liberte에 보도되었던, 암스테르담에서의 한 연설에서, 맑스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다른 나라들에서의 사회 제도들, 관습들, 그리고 전통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미국, 영국과 같은 나라들, 그리고 만약 내가 당신들의 제도들에 관하여 더 잘 알고 있다면 네덜란드를 추가할 수도 있겠는데, 노동자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그들의 목적들을 성취할 수도 있는 나라들의 존재를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대륙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우리 혁명의 지렛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 노동자들의 지배를 수립하기 위하여 한동안 의지해야만 할 것이 힘이라는 것을 우리가 또한 진실인 것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 맑스, “헤이그 대회에 관하여” 1872년 9월 8일

맑스는 이들 특정한 국가들에는 군사도당들이나 의미있는 관료적 기구들이 부족했음에 대한 이해에 자신의 주장을 기초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은 잘못되어 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모두 거대한 관료세력들과 대중들을 억제하기 위하여 수반되는 군사력이 필요한 광대한 식민제국들을 보유했다. 빅토리아 재임기간(1837년-1901년) 동안,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1853년-56년의 크림전쟁에 더하여 2차 보어전쟁에서 끝나는 거의 끊임없는 일련의 저강도 그리고 중강도 군사행동들과 전쟁들을 벌였다.

당시 미국은 자신의 가장 민주적인 시기, 재건의 시대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나 내전은 북부의 자본에 엄청난 경기의 활성화를 제공하여, 그랜트 행정부 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조각들이 다가오는 수십 년에 걸쳐 만개한 제국주의로 활짝 피게 될 자리에 있었다. 미국 자본이 최고의 경작지, 철도 그리고 광산 채굴권을 가로 채면서 (1846년-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 이미 영토가 광대하게 축소되었던) 멕시코에 대한 경제적 정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 시기에서였다. 1877년 철도 대파업 분쇄 그리고 같은 해의 재건의 해체는 이 과정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정표들이었다.

1848년 혁명의 시기에, 맑스는 영국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경험할 수 있는 지 여부에 관하여 다른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 해 부르주아지 계급의 손에 의한 프랑스 노동계급의 패배에 관하여 쓰면서, 맑스는 영국 부르주아지 계급에 맞서는 성공적인 봉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독립을 위한 피억압 민족들의 투쟁에 의해서 일어나건, 혹은 봉건 절대주의의 타도에 의해서 일어나건, 유럽의 해방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성공적인 봉기에 달려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모든 사회적 격변은 영국 부르주아지 계급, 대영제국의 산업적 그리고 상업적 세계지배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방해받을 수 밖에 없다. 만약 지속되도록 계획되었다면, 프랑스 혹은 전체로서의 유럽 대륙에서의 부분적인 사회적 개혁은 모두 경건한 소원에 불과하다. 오로지 구영국의 타도만이 조직화된 영국 노동자들의 당인 챠티스트들에게 그들의 거대한 억압자들에 맞서는 성공적인 봉기를 위한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오직 세계전쟁만이 구영국을 타도할 수 있다.”

- “혁명적 운동”, 1848년 12월 31일

1848년 실패한 혁명들에 뒤이어, 자본주의는 대륙에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러나 경제적 힘의 비율들이 어느 정도 바뀌었던 반면, 영국에 대한 맑스의 견해들은 분명하게 코뮌과 그 후의 시기를 관통하여 그 핵심적인 타당성을 유지했다.

맑스가 1872년에 무엇을 추측했건, 지금 우리는 세계역사의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에 있다: 한 줌의 거대 자본주의 열강들이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독점금융자본의 지배에 의하여 특징지어지는 제국주의 시대. 그러한 환경들 하에서, 사회주의로의 의회적 이행이라는 사상은 망상만도 못하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신의 계급의 적들에게 결박시키는 개량주의 강령이다.

마치 이점을 예증하는 것처럼, 이름에 걸맞지 않는 볼셰비키 경향은 기관장 직 입후보에 대한 우리의 반대에 대하여 논박하면서 엥겔스의 1893년 편지를 인용한다. 엥겔스는 미국 대통령 직에 후보들을 입후보시키는 실천은 혁명적 원칙에 대한 부정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던 망명객 사회주의자(텍사스주 베어드의 F. 위젠)에 답장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노동자 혁명이라는 목표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으며, 상원직이나 대통령직 입후보에 반대하는 원칙적 노선을 도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면서, 엥겔스는 원칙적인 입장에 대한 위젠의 요구를 “탁상공론적인” 것으로서 기각했다. 엥겔스는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어떤사람이 선거가 필요한 어떤 정치적 직위에 후보들을 내세우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러한 후보들에 투표하는 것, 심지어 그 사람이 그러한 직위를 철폐하기 위한 시도에 관여하는 것의 여부가 왜 필연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원칙의 침해를 의미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모르겠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대통령직과 상원을 철폐하기 위한 최상의 길이 그것들을 타도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사람을 그러한 직위들에 선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논리에 맞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방책이 부적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지점이다. 그러한 식의 행동이 또한 혁명적 원칙의 부정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상황들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왜 이것이 항상 그리고 변함없이 그래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겠다.”

- “엥겔스가 위젠에게” 1893년 3월 14일

엥겔스의 중심적인 관심사는 망명객들 중심의 사회주의 노동당(SLP)을 자극하여 정치적 노동계급 운동이 시작되도록 돕는 것에 있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몇 년 전에 엥겔스는, 1886년 통합 노동당의 단일세주의자 헨리조지의 뉴욕 시장 입후보의 중요성에 대하여, 유럽에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모범으로 하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으로의 한걸음 전진으로서, 그의 입후보를 바라보면서 강조했었다. 1893년 엥겔스는 전투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의회의 활동의 장 내부 어느 곳에 원칙적인 노선들이 그려질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지점에 있어서, 어떻게 엥겔스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어떤 종류의 당이 필요한지의 문제들, 볼셰비키의 의회활용주의의 원칙들에 관한 문제들, 개량주의 후보들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동학들의 문제들을 해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엥겔스는 내전으로의 길을 지적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엥겔스를 인용하는 그 자신의 동기가 입각주의에 대한 거짓 방어에 착수하는 것인 BT는 그렇지 않다. 1920년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논박하면서 트로츠키가 아래와 같이 썼듯이,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국가는 절대주의와 비교하여 노동자들의 정치적 교육에 더욱 유리한 조건들을 창출 할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상층부의 기회주의적 습성들과 법률준수적 편견들에 능숙하게 축적되고 확립되는 부르주아지적 합법성의 모양 속에 그러한 발전을 제한하기도 한다. 전쟁의 참상이 바로 가까이에 있을 때, 민주주의의 학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으로 분기시키는 것에 있어서 매우 불충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쟁, 사회제국주의적 야망들, 거대한 군사적 승리들, 그리고 비견될 수 없는 패배들이라는 야만의 학교가 필요했다. 우주에 있는, 그리고 심지어 에르푸르트 강령 속에 있는 얼마만큼의 차이를 만들어 냈던 이들 사태들 이후, 진부하게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교육을 위한 민주주의적 의회주의의 의미를 입 밖에 내놓는 것은 정치적 초년시절로의 추락을 의미한다.”

-트로츠키, 테러주의와 공산주의, 1920

아마도 BT는 이제 자신의 잡지의 이름을 1917(2월 혁명을 언급하는 것인가?)에서 1893으로 바꿀 것이다!

1900년, 밀레랑주의에 맞선 투쟁

부르주아지 국가에 있는 기관장 직위의 성격에 관한 문제가 알렉산더 밀레랑이 부르주아지 정부에서 각료직을 수용한 첫번째 사회주의 지도자가 되었던 1899년 6월 정면으로 제기되었다. BT의 소책자에서 인용되지 않았던 1894년 편지에서, 엥겔스는 사회당이 지지하는 혁명적 운동의 선두에 서서 이탈리아 공화당이 권력에 오를 단지 그 가능성에 반대하여 특별히 경고했었다. 엥겔스는 이탈리아 사회당 지도자 필리포 투라티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공동의 승리 이후에 우리는 새로운 정부의 몇 몇 자리들을 제안받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소수”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위험이다. 1848년 2월 이후 (개혁, 레드루-롤린, 루이 블랑, 필로콘 등의) 프랑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그러한 직위들을 수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정부에서 소수를 구성하면서 그들이 순수 공화당원들이 구성하는 다수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저질렀던 파렴치한 행위들과 배신들에 대한 책임을 자발적으로 공유했던 반면, 정부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대표한다고 주장했던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 “엥겔스가 필리포 투라티에게”, 1894년 1월 26일, 맑스와 엥겔스, 서신교환 선집 (모스크바: 프로그래스 출판사, 1955년)

5년 후에, 밀레랑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프랑스 공화국이 군장교 세력들과 카톨릭 교회와 동맹을 맺은 왕정주의자들과 귀족들의 반동적 동맹에 의하여 타도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르네 발데크-루소 수상 밑에서 상업 장관으로 복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파리코뮌의 유혈 진압자, 장군 갈리페트가 이 “공화국 방어”의 정부에서 밀레랑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프랑스를 심대한 정치적 위기 속으로 내던졌었던 정치 스캔들이었던 드레이푸스 사건이 이 모든 것들의 배경이었다. 참모조직의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이푸스는 외국의 한 열강에게 군사기밀들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1894년 비밀 군사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곧 귀족집단의 일원인 다른 장교의 범죄행위를 숨기기 위하여 군 최고위자들이 드레이푸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에서의 수년 동안의 징역살이 후에, 드레이푸스는 다시 재판을 받았고, 1899년 9월 다시 유죄를 받았다; 같은 달 말에 그는 최종적으로 대통령 사면을 받았다. 밀레랑은 진행중인 위기를 흐리기 위한 방편으로 정부에 들어가 있었다.

드레이푸스 사건으로 이미 양극화되었던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밀레랑의 행동을 두고 분열했다. 한쪽 세력은 밀레랑을 지지했다 - 특히 비록 엄격하게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의 틀 내에서였기는 했지만 1898년에 드레이푸스의 가장 열렬하고 설득력 있는 방어자가 되었던 장 조레스(Jean Jaures). 다른 세력, 줄 기드(Jules Guesde)와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이끌던 프랑스 노동자당(POF)은 드레이푸스를 방어할 것을 거부했었고 밀레앙의 정부합류에 반대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의 사회민주당의 창립자이며 이후 특히 베른슈타인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하여 SPD의 좌익 유력인사가 되었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밀레랑주의에 관한 논쟁에 합류하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에 대한 그녀의 설득력 있는 논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혁명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것들과 모순되게 입법적 개혁의 방책에 스스로가 찬성한다고 선포하는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향한 보다 평온하고 조용하며 더딘 선택을 정말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를 선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기는커녕, 그들은 구사회의 껍데기 수정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한다.”

- 룩셈부르크, 개혁인가 혁명인가, 1898-99년, 로자 룩셈부르크 연설들 (뉴욕: 패스파인더 출판사, 1970)에서 재 인쇄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들이 프랑스 자본주의와 군사주의를 고발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이용하면서 드레이푸스를 방어해야 하며 계급투쟁을 더욱 진전시켜야 한다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밀레랑의 정부입각에 반대하였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르주아지 정부의 성격은 그것의 구성원들의 개인적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사회에서의 그것의 유기적 기능에 의하여 결정된다. 현대국가의 정부는 본질적으로 그것의 정규적 기능이 계급 국가의 존재 조건들 중의 하나인 계급지배의 기관이다. 사회주의자의 정부 입각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지배라는 상태에서는, 부르주아지 정부가 스스로를 사회주의 정부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가 스스로를 부르주아지 장관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 “Affaire Deryfus et cas Millerand” (드레이푸스 사건과 밀레랑 사례), 1899년, 룩셈부르크, Le Socialisme en France (1898-1912) (프랑스에서의 사회주의 [1898년-1912년]) (파리: Editions Pierre Belfond, 1971년) (우리의 번역)

일단 정부에 들어가자, 어떤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발데크-루소 정부의 보존이라는 밀레랑주의의의 논리가 표면화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꼬면서 비평했듯이, “어제, 내각은 공화국을 구하기 위하여 방어적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내각을 구하기 위하여 공화국 방어가 포기되어야만 한다”(“Die sozialistische Krise in Frankreich”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위기], 1900년-01년 [우리의 번역]). 발데크-루소의 사임에 뒤이어, 조레스 그룹은 에밀 콤(Emile Combes) 급진당 정부를 지지했고, 군대와 해군을 위한 자금조달을 포함하는 부처 예산에 찬성투표했다.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밀레랑주의 사이의 명백한 연결고리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밀레랑은 실용적 베른슈타인주의의 훌륭한 예를 제공해왔다; 베른슈타인과 폴마르가 이유없이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그를 방어하고 칭찬했던 것이 아니다. 참으로, 본질적으로 사회민주당이 단지 개혁정당일 뿐이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받아 들일만큼 충분히 뻔뻔한 것임에 틀림없다면, 사회주의자는 부르주아지 내각에 합류할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해야만 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계급지배의 폐지를 의미한다면, 사회주의 장관이 계급협조에 관한 화법들로 전체 부르주아지 세상을 매력적이게 만들면 왜 안 되는가? 심지어 백 번 천 번씩 경관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사살이 계급들의 민주주의적 협조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한 이후에 조차, 그는 내각에 남아 있으면 왜 안 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입각주의에 대한 토론이 1900년 제2 인터내셔널 파리 대회를 지배했는데, 룩셈부르크, 러시아 맑스주의의 개척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미국 SLP 지도자 다니엘 드 레옹과 기타 좌익들이 조레스와 밀레랑을 지지했던 SPD의 베른슈타인과 게오르그 폰 폴마르가 좋은 예였던 우익에 맞서 싸웠다. 점증적으로 독일당 안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주의의 교황”으로 폭넓게 여겨지던 SPD의 이론가 칼 카우츠키가 정치적으로 가운데에 있었다. 역사가 G.D.H. 콜이 언급 했듯이 “우익을 인터내셔널에서 쫓아내는 일 없이, 그리고 조레스의 입장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 없이, 중도를 만족시키고 극좌를 무장해제시킬 단어들의 형식을 고안해내는 것이 카우츠키의 임무였다”(콜, 1889년-1914년의 제2 인터내셔널 [런던:Macmillan & Co. Ltd., 1960]).

카우츠키가 만들어냈던 타협 결의안은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가 제2 인터내셔널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던가라는 측면에서 교육적이다.

“현시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은 단지 폭동적 실천의 작업일 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의 오랜 그리고 고단한 작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육제적 그리고 도덕적 갱생, 그리고 지역을 대표하는 의회들과 입법 기관들에 있는 선출직의 점진적 장악의 귀결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권력이 중앙집중화된 곳에서는, 그것의 정복이 조각조각 벌어질 수 없다. 부르주아지 장관직으로의 개별 사회주의자의 입각은 정치권력 장악의 정상적인 시작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 빠진 상태에서의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미봉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주어진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미봉책이 존재하는가 여부는 전술의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대회는 결정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이 위험한 실험은 오직 그것이 통일된 당 조직에 의하여 승인된다면, 그리고 사회주의자 장관이 자신의 당의 위임을 받은 일꾼이며 일꾼으로 남는다면 이점을 가질 수 있다.”

-Internationaler Sozialisten-Kongress zu Paris 1900 (1900년 파리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베를린:Expedition der Buchhandlung Vorwärts 1900) (우리의 번역)

“폭동주의에 대한 불필요한 경고와 지방자치 의회들과 입법 기관들에 대한 점진적 침투를 찬성하는 주장들은 수정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하여 의도되었고 그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다행히도 밀레랑과 조레스가 그 ”예외적 미봉책“이라는 면책조항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주장을 그들 자신들의 입각주의를 지지하기 위하여 뻔뻔스럽게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이 사회주의 장관을 환영했던 것은 드레이푸스 사건으로 야기된 정치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예외적” 움직임을 행했던 부르주아지 계급이었다.
 
기드와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리가 제출한 소수 결의안은 “사람들은 공공권력들의 장악을 그 몰수가 평화적으로 벌어지건 아니면 폭력적으로 벌어지건 자본가계급에 대한 정치적 몰수로 이해해야 한다”고 재차 단언했다. 소수 결의안은 계속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것[공공권력들의 장악]은 부르주아지 정권 하에서 당이 자기 자신의 세력들, 즉 계급정당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을 통하여 잡을 수 있는 선출직들을 장악하는 것만을 허용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정부들에의 어떠한 사회주의자의 참여도 금지하는데,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항하여 비타협적인 야당의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Congres Socialiste International Paris 23-27 Septembre 1900 (Geneva: Minkoff Reprint, 1980) (우리의 번역)

이렇게 해서 소수 결의안은 “당이 자기 자신의 세력들을 통하여 잡을 수 있는” 부르주아지 정권에 있는 직위들을 떠맡을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놓아두었다. 플레하노프는 더 나아가 부르주아지 내각에의 참여가 특정한 예외적 환경들 하에서는 가치있는 전술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카우츠키의 결의안을 지지했으나, 극단적인 경우들에서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지 내각에 합류해야만 할 때, 만약 그것이 노동과 자본의 투쟁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서 치우침을 드러낸다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어도 밀레랑에 대한 암묵적 비판은 포함시켜 결의안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플레하노프 자신이 이론적 수준에서 자신의 수정안이 “과연어떤 종류의 부르주아지 정부가 노동의 자본에 대한 투쟁에 대하여 치우침이 없을 수 있겠는가?” (“Neskol'ko solv o poslednem Pariahskom mezhdunarodnom sotsialisticheskom kongresse” [최근의 파리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 관한 몇 마디], 1901년 4월 [우리의 번역])라는 “비판을 견딜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자 조레스가 만약 통일된 사회주의 당이 정부를 노동의 자본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다고 여긴다면 사회주의자는 내각을 떠나야만 한다 - 그러나 프랑스에는 통일된 정당이 없다고 능란하게 플레하노프의 수정안을 수정했다! 곤궁한 처지에 처한 플레하노프는 기드의 안이 부르주아지 내각 참여에 대한 그것의 반대에 있어서 너무나 단호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소수에 찬성투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기드 또한 부르주아지 정당들과의 계급 협조적 연합들에의 사회주의자의 참여에 반대하는 안을 제출했다. “계급투쟁은 어떠한 자본가 계급의 어떠한 부위와의 어떠한 종류의 연합이라도 금지한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안은 “예외적 상황들이 어떤 곳들에서는 연합들을 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을 허용했다(Congres Socialiste International [우리의 번역]). 이 빠져나갈 구멍은 심지어 굳어진 기회주의자들조차 그 결의안에 찬성투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컸고,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 재 논의된 밀레랑주의

제2 인터내셔널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밀레랑주의라는 주제로 되돌아갔다. 1년 전, 1903년 드레스덴에서의 SPD 대회에서 카우츠키가 수정주의, 그리고 암묵적으로 밀레랑주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찬성하는 것에 합류했었다. 미국 SLP 지도자 다니엘 드 레옹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논평했다. “파리 대회에서 반(反)밀레랑주의 입장은 단연 인기가 없었다; 거기서 카우츠키는 ‘줏대없이 저쪽 편에 붙’었던 반면, 드레스덴에서 카우츠키는 “다시 전면에 나서, 이제는 ’이쪽 편에 붙‘었다”(“드레스덴 대회”, 일간 인민, 1904년 1월 3일).

기드주의자들이 암스테르담에서의 승인을 위하여 SPD 결의안을 제출했다. 1904년에 통과된 그 결의안은 “이미 증명되었고 승리한 우리의 계급투쟁 전술들을 기존 질서를 받아들이는 정책이 우리의 상대방들에 대한 승리를 통한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수정주의적 노력들을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비난했다”(Internationaler Sozialisten-Kongress zu Amsterdam [암스테르담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베를린: Expedition der Buchhandlung Vorwärts, 1904] [우리의 번역]). 결의안은 “부르주아지 사회를 개혁하는 것에 만족하는 당”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거짓없이 반대함을 선포했고, 더 나아가 “사회민주당은 1900년 파리에서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의 카우츠키 결의안과 조화를 이루면서,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에서 정부권력의 공유를 추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럴만하게도 1900년 카우츠키 결의안에 대한 긍정적 언급은 우익의 환심을 하기 위한 선물이었다.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분리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모든 세력들이 “전체 계급의 당”, 즉 맑스주의로부터 개량주의까지의 모든 경향들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의 하나의 통합된 당이라는 개념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의 좌익과 우익 모두의 대의원들은 1903년 드레스덴 결의안을 1900년 밀레랑주의에 대한 호의에 대한 날카로운 반대로 바라보았다.

드 레옹은 1900년 파리 대회에서 카우츠키 결의안에 반대투표 했다. 1904년에 드 레옹은 아래와 같은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또 다시 1900년 카우츠키의 입장을 승인하는 것에 반대했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지난번 국제 대회에서, 카우츠키 결의안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결의안이 채택되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 결의안의 마지막 절(節)들은 자본가 정부들의 수중에 있는 직위를 수용하는 노동 계급의 긴급한 경우를 예견할 뿐만 아니라, 특히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분쟁들에서 지배계급 정부들 쪽에서의 공평함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첫째, 언급된 바와 같은 카우츠키 결의안이 일반적인 사회주의 전술들의 한 원칙으로서 철회된다;

“둘째,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전한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은 그들이 스스로를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하는 경우 말고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대한 배신 없이는 어떠한 정치적 직위도 채우지 못한다.”

- 드 레옹, “거부된 밀레랑주의”, 일간 인민, 1904년 8월 28일

자신의 결의안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획득하지 못한 드 레옹은 주 결의안에 찬성투표 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장악한 정치적 직위들을 채우는 것을 허용함에 있어서, 드 레옹의 결의안은 자본주의 국가 기제의 분쇄와 그것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의 대체의 필요성이라는 핵심 주제를 또 다시 회피했다. 드 레옹은 부르주아지적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원칙적 입장을 취했던 반면, 그는 또한 선거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한편으로 드 레옹은 “자신의 전술들에서 종파적이었고, 정치적 실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완고하게 형식주의적이었으며 합법주의적 맹신으로 인해 무기력했다”(캐넌, 미국 공산주의의 첫 10년들 [뉴욕: 패스파인더 출판사, 1962년])고 올바르게 언급하면서, 미국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후일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던 제임스 P. 캐넌은 미국 사회주의 운동이 형태를 갖추던 시기에 이루어졌던 드 레옹의 개척자적 역할을 칭송했다.

원래는 “IWW 전문(前文)”으로서 출판되었던 1905년 연설에서 그가 분명히 하였듯이, 드 레옹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투표함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그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가 스스로를 해산하고 권력을 “사회주의적 산업 노동조합들”(“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설”, 드 레옹, 사회주의적 획기적 사건들 [뉴욕: 뉴욕 노동뉴스, 1952년])라는 행정부에 이양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드 레옹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형성된 것과 같은 노동조합들은 자본가들에 맞서 경제적 힘을 장악하고 사용하면서 유기적이고 진보적으로 성장할 것이었다. 1890년대 초에, 드 레옹의 SLP는 4년마다 미국 대통령직을 위한 자기 자신의 후보를 충실하게 내세웠다. 1914년 드 레옹의 사망과 10월 혁명의 교훈들을 미국의 영역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한 SLP의 거부에 뒤이어, 그 당은 과거 자기 자신의 화석화된 껍질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선거주의에 있어서는 심지어 드 레옹 하의 SLP와 오이겐 V. 데브스의 사회당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1900년 이후부터, 데브스는 미국 대통령 직에 5번 입후보 했다. 데브스는 “노동자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그들을 대변하는 당인 사회당을 지지하면서 단결하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함께 투표하는 것을 배워야만 하며, 그들이 이렇게 할 때, 정부는 그들의 수중으로 옮겨질 것이며 자본주의는 붕괴하여 더 이상 상승하지 못할 것이다”(“사회주의의 성장”, 1906년, 오이겐 V. 데브스의 글들과 연설들 [뉴욕: Hermitage Press, 1948년])라고 읊조렸다. 1920년에 데브스는 1차 대전에 대한 반대의 죄목으로 10년 형(뿐만 아니라 평생 선거권 박탈)을 살고 있던 조지아 주의 아틀란타에 있는 감옥에서 자신의 마지막 대통령 선거 운동을 했고, 90만표 이상을 획득했다. 데브스의 대통령 선거 운동들뿐만 아니라 그의 커다란 권위가 미국 제국주의의 최고 사령관에 사회주의자들이 입후보하는 전통 - 뭐가 되었던 어떠한 선거활동에도 반대하는 반의회적 반대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전반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 을 굳혔다. 그러나 데브스가 자본주의 타도를 주창했던 반면, 모리스 힐퀸트와 같은 많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적의에 찬 반(反)레닌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이었다. 또 다른 사람, 빅터 버거는 부르주아지적 진보운동이 지지하는 것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지방자치 개혁의 강령을 지지하는 “하수도나 걱정하는 사회주의자”로서 적절하게 묘사되었다.

지방자치주의와 제2 인터내셔널

오직 공공연한 개량주의자들만이 지방자치주의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장관의 수준에서 부르주아지 정부에서 책임을 떠맡을 것인지를 둘러싼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의 개량주의 세력과 혁명적 세력들 사이의 깊은 분열은 지방자치적 수준으로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실제로, 1900년 파리 대회는 아래와 같이 주장했던 지방자치주의에 관한 결의안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만장일치였다.

“일단 중대한 자치가 성취되었다면, 지방자치체가 탈중앙화된 경제적 삶의 훌륭한 실험실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중앙권력의 부르주아지 다수에 맞서는 지방의 사회주의 다수들이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요새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함에 있어서;

“1900년 인터내셔널 대회는 선언한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일반적 정치의 중요성을 무시함이 없이 지방자치 활동을 설명하고 평가할, ‘집산화된 사회의 맹아들’로서의 그것들의 역할이 그것들에게 부여한 중요성을 지방자치적 개혁들에 부여할, 그리고 공공의 이익뿐만 아니라 이들 기능들에 고용된 시민들 양쪽의 관점에서 지역 서비스들 - 교통, 조명, 물 공급, 전기, 학교들, 의료 서비스들, 병원들, 공중 목욕탕들, 세탁소들, 지역 가게들, 지역 빵집들, 식료품 서비스, 난방, 노동자들의 주택, 의류, 경찰, 지방자치적 업무들  - 을 모범적 기구들로 바꾸기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다.

Congrès Socialiste International (우리의 번역)

이것이 아마도 제2 인터내셔널의 당들의 딜레마의 가장 극적인 예일 것이다 - 최소한의 개혁들이라는 현실의 강령과 너무나도 자주 일요일 정치설교들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닌 사회주의라는 최대강령. 베른슈타인주의와 밀레랑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가장 거리낌 없고 일관되었던 사람들조차 사회주의자들이 지방자치 정부들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까닭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 도시 지방정부 참여의 문제는 완전히 다르다. 소 도시 정부와 시장이 다른 무엇보다 그들에게 이양된 행정적 기능들과 부르주아지 법들의 수행이라는 임무를 가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두 가지 모두는 완전히 대치되는 구성인자들을 구성한다....

“사회주의적 전술들과 관련한 한, 그 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보이다: 현 국가의 중앙정부는 부르주아지 계급지배의 구체화인데, 그것의 제거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반면, 자치행정은 미래의 구성인자인데, 사회주의적 변형이 이것과 긍정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명백하게, 부르주아지 당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계급적 내용을 지방자치체의 경제적 문화적 기능들 속으로 주입해야 하는지조차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들의 정치를 배신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소 도시 대표 기관들에서 소수파로 있는 한, 그들은 의회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반대파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다수를 획득한다면, 그들은 지방자치체 그 자체를 부르주아지 중앙권력에 맞서는 투쟁의 기구로 변형시킬 것이다.”

- “프랑스에서의 사회주의의 위기” 1900-01년 (우리의 번역)

부분적으로 이 관점은 코뮌이 봉건적 왕조 국가에 대항하는 도시 계급들의 무기였던 혁명적 부르주아지 계급의 상승의 시기의 잔존물이었다. 중세 후기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코뮌들은 상업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봉건적 사회의 내부에서, 그리고 절대주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의 뿌리들을 발전시켰던 요새들로서 복무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계급이 권력에 오른 이후, 부르주아지 계급은 전국적 수준에서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들을 방어하기 위한 중앙집중화된 강력한 국가를 응집시키기 위하여 자치 코뮌들을 한 쪽으로 제쳐두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지방자치주의의 수용은 이론적 혼란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의 통제하의 지방 정부들이 종종 1800년대의 마지막 수 십 년 동안 계급투쟁을 통하여 획득되었던 그러한 개혁들을 실행했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실제로는 맑스와 엥겔스는 몇 번 지방자치주의적 환상들을 쫓아버리려고 시도했다. 1848년의 혁명들에 뒤이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스스로가 공동체들의 해방, 자치정부 등의 민주주의적 말로 인해 잘못 지도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만 한다”(“동맹에 대한 중앙 당국의 성명”, 1850년 3월)고 경고했다. 그리고 맑스는 자신의 파리 코뮌에 대한 글에서 중세적 코뮌의 기능들과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의 임무들을 혼동하는 것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일반적으로, 더 오래된 그리고 심지어 소멸한 사회적 삶의 형식들의 해당 대응물로 잘못 여겨지는 것이 그것들과 특정한 닮은 점을 가질지도 모르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창조물들의 운명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바로 그 국가권력에 선행했고, 나중에는 그 국가권력의 기초가 되었던 중세적 코뮌들의 재현으로 근대의 국가권력을 파괴하는 이 새로운 코뮌이 잘못 여겨졌다.... 국가권력에 대한 코뮌의 적대감은 과도한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고대의 투쟁의 과장된 형식으로 잘못 여겨졌다.... 코뮌의 존재 그 자체가 지역적인 자치체의 해방을 당연하게 포함하였으나, 현재는 국가권력을 대체했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한 하나의 제한이 아니다.”

프랑스에서의 내전

비슷한 맥락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 직후의 시기에 레닌은 “지방자치 사회주의”를 위한 멘셰비키의 책략들의 “속물적 기회주의”를 비난했다.

“부르주아지 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고 있는 한, 부르주아지 계급은 심지어 ‘지방자치체적’ 관점으로부터 조차 자신의 지배의 진정한 기반들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할 수 없으며, 만약 부르주아지 계급이 ‘지방자치 사회주의’를 허용하고 관용을 베푼다면, 이것은 그것이 그들의 지배의 기반들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부의 중요한 자원들을 방해하지 않으며, 단지 부르주아지 계급 스스로가 ‘인민들’로 하여금 운영하도록 허용하는 지역적인 지출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다. 사회주의적 지자체들 쪽에서의 자신들의 통상적인 즉 중요하지 않은 소규모 활동들의 경계들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려는, 노동자들에게 대폭적인 위안을 주지도 않는, 자본에 간섭하는 어떠한 시도도 부르주아지 국가의 중앙 당국들에 의하여 항상 가장 단호한 태도로 거부당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서구에서의 ‘지방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조금의 지식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

1905-1907년 첫 번째 러시아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1907년 11월-12월

룩셈부르크가 1900년 5월 바덴 주정부의 예산에 찬성 투표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폴마르의 동조자들이 적용했던 비슷한 주장들을 격렬하게 거부했던 것이 많은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자들에 의한 지방 정부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통제에 대한 지지에 고유한 모순들의 표현이었다. “개별 독일 주들의 예산들은 제국의 그것과는 반대로 군사부문이 아니라 대부분 문화를 위한 지출들을 포함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예산이 군사지출들 혹은 문화를 위한 지출들 중에서 어떤 것을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포함하는지, 그러한 양적인 고려들은 군사국가 .... 의 예에서와 같이 만약 우리가 오직 일반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현재의 국가에 기초하고 단지 그것의 지나친 행위들과만 싸운다면 우리에게 결정적일 것이다. 사실은, 우리는 독일 제국이 단지 군국주의 국가이기 때문뿐만 아니라, 이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독일제국이 부르주아지 계급 국가이기 때문에, 독일제국에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거둬들이는 것에 투표하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부르주아지 계급 국가는 독일의 연방단위 국가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룩셈부르크, “Die badische Budgetabstimmung” (바덴 예산에 대한 투표) (우리의 번역)

지방정부들에 대한 반대에서 처럼,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 대한 잘못된 구별이 입각주의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밀레랑의 지지자들에 의한 폭넓은 공격의 여지를 남겼다. 이렇게 해서 조레스가 POF의 기드 지지자들 스스로가 지방자치 수준에서 일부 집행기관장 직들 맡았다는 사실을 포착하여 입각주의에 대한 기드 지지자들의 반대가 일관성 없고 위선적임을 고발했다. (POF 시장을 가졌던 도시인) 릴리에서 있었던 1900년 11월 26일의 한 논쟁에서, 조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신들이 사회주의 장관이 부르주아지 장관직에서 떠맡는 책임들에 대하여 말하지만, 당신들의 선출된 지방자치 관리들은 책임들을 떠맡지 않는가? 그들은 부르주아지 국가의 일부가 아닌가?... 사회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시장은 중앙 권력에 의하여 징계를 당할 수 있고, 1년 동안 직위를 유지할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신이 시장이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대단히 많은 수의 부르주아지 법들을 집행하고 수행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당신들에게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만약 당신들의 거리들에서 폭력적인 분쟁들이 있다면, 그는 또한 사회주의가 약탈과 살인라는 말을 듣는 것을 염려하여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당신들에게 말할 수도 있겠다.”

-“le Socialisme en débat” (논쟁에 처한 사회주의) l'Humanité hebdo 부록, 2005년 11월 19-20일 (우리의 번역)

한편으로 밀레랑주의를 방어하는 것에 활용되었던, 기드 지지자들의 지방자치주의에 대한 조레스의 조소는 표적에 적중하였고, 제3 인터내셔널 속으로 이월되어야 했던, 제2 인터내셔널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던 약점을 나타냈다.

1차 세계 대전: 분수령

제2 인터내셔널에 깊게 뿌리내렸던 개량주의가 의회주의, 입각주의, 그리고 연립주의의 문제들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의 무능력함에서 스스로를 드러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부르주아지 국가를 분쇄하고 그것의 자리에 코뮨 형태의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를 세워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파리코뮨의 교훈들을 학습하지 않았다. 참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자칭 후계자들이었던 SPD의 지도부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부터 맑스와 엥겔스가 도출했던 교훈들을 매장하거나 모호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짓들을 했다.

1차 제국주의간 세계 대전이 제2 인터내셔널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문제들을 마지막 위기로 몰아 넣었다. 1914년 8월 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여, 인터내셔널은 극적으로 사회-배외주의로 붕괴되었다. 전쟁 당자자 국가들에서는, 오직 러시아의 볼셰비키들과 일부 멘셰비키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당들만이 자신들의 정부들을 위한 전쟁자금 모금에 반대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은 어느 쪽이건 한쪽의 승리가 봉건적 반동에 반대하는 사회적 진보를 의미했었던 19세기 유럽의 민족체 전쟁들의 선례라고 잘못된 주장을 하면서 “조국 방어”라는 이름으로 그들 자신들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뒤를 따라 집결했다. 1차 세계 대전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섰었음을 알렸다. 양쪽 편이 모두에서 그들 자신들 사이에서 세계를 재분할하려고 싸우는 열강들이 핵심세력들이었다.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적 패배주의를 주창하면서 전쟁에서 양쪽 편 모두에 반대했다.

1차 세계 대전은 국제적으로 혁명적 노동자 운동에서의 심원한 재편을 야기했던 분수령이었다. 그들의 수년간의 오랜 투쟁과 러시아판 기회주의자들인 멘셰비키와의 결정적인 분리로, 준비가 되어 있던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들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기치를 다시 움켜쥐기 위한 국제적 운동의 지도부로서 등장했다. 1914년 9월에 전쟁에 관한 그의 첫번째 글들에서 시작하여 1915년 짐머발트와 1916년 키엔탈에서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대회들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개입들에서 계속해서,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과 그들을 변호하던 중도주의자들과의 되돌이킬수 없는 분리와 새로운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과 제국주의 전쟁을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내전으로 전화시켜 내기 위한 요구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 있는 주제들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에 관한 문서를 위해서는 올가 헤스 간킨과 H.H. 피셔의 볼셰비키와 세계대전을 보시오.) 계속되던 제국주의 사이의 학살이 만들어냈던 혁명적 물결이 짜르주의 러시아라는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터졌다. 1917년 2월의 혁명적 격변들에 뒤이은 전제의 붕괴와 함께, 볼셰비키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1917년 여름에 작성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볼셰비키 당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에서 핵심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레닌은 국가와 코뮌의 교훈들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발굴해 냈다.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를 위한 요구는 부르주아지 정당들과의 선거적/의회적 연합들을 위한 어떠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급이 지배할 것인지의 문제를 매 단계마다 첨예하게 제기하면서, 러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1917년 10월의 승리로 이끌었던 혁명적 경로를 볼셰비키 당이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레닌의, 이후에는 트로츠키가 합류했던 위대한 투쟁들이 필요했다. 구 국가 권력이 일소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성장하던,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 대한 환상들이 결정적 순간 마다 혁명의 탈선을 위협했다. 입각주의와 지방자치주의가 이 위대한 혁명이라는 힘든 시험에서 그것들의 결정적 시험을 치렀다.

볼셰비키 혁명과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연합주의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의 노선을 그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에 의한 이 노선의 전도에 반대하여 이 노선을 고수했다 (예를 들면, 제임스 번햄의 1937년 팜플렛, 인민전선새로운배신을 보시오). 그러나 집행기관장 직이라는 주제는 초기의 혁명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서조차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의 교훈들

트로츠키가 언급하였듯이, 2월 혁명은 모순을 노정했다. (1917년 러시아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모든 날짜들은 현대의 그레고리력 보다 13일이 빠른 구 율리우스력이다.)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과 그들의 자유주의 정당들은 혁명을 두려워했고 혁명을 억제하려고 시도했다. 1905년 때처럼, 신속하게 정세의 지배자들이 되었던 소비에트들(위원회들)을 세워냈던 대중들의 엄청난 단호함과 대담함이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부르주아지 혁명이어야만 한다는 사상을 고집했고 그래서 권력을 무기력한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의 수중에 안기려고 애썼던 소부르주아지 사회주의 혁명가 당(SRs)과 멘셰비키들이 이들 소비에트들을 지배했다. 이들 타협주의자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트로츠키는 아래와 같이 썼다.

“혁명은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장악할 수도 없을 계급의 적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에 관하여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인데, 이 권력을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계급의 적에게 강제하는 것에 관하여 고민한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이 아닌가? 1918년 독일 혁명의 경험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이끌었던 ‘새로운 중간 계층’에 의하여 수행되었던 바로 이 똑같은 유형의 거대하고도 훨씬 더 성공적인 실행을 인류가 아직까지는 목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것은 훨씬 더 충격적으로 보인다.”

-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의 역사, 1930

이중권력이라는 이 정세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트로츠키는 “2월의 전복은 부르주아지 정부로 귀결되었는데, 거기서 소유계급들의 권력은 아직은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던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소비에트들의 통치권에 의하여 제한받았다”(같은)고 설명했다. (1918년 독일에서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위원회들이 사회민주당 지도부 하에 남아 있었고 곧 부르주아지 정부에 종속되어 청산되었다.)

2월 혁명 이후 첫 몇 주 동안, 볼셰비키 당은 자신의 혁명적 목소리를 잃었었다. 3월에는, 보다 좌익적인 볼셰비키들이 프라우다 편집부로부터 축출된 이후, 스탈린과 카메네프는 신문에서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가 반동이나 반혁명에 맞서 투쟁하는 한”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선포했으며, “우리의 슬로건은 전쟁 중인 모든 나라들이 즉각적인 협상들을 열 것을 유도하기 위하여 시도하도록 ... 임시정부를 강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임시정부에 대한 압박이며, ... 그때까지 모든 병사들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주둔지에 남아 있는다!”(같은에서 인용됨)라고 선언했다. 그러한 선언들은 볼셰비키 당의 대오 안에서 엄청난 분노를 야기했다. 당 지부들은 새로운 프라우다 편집자들을 당으로부터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타협주의자들 -“3월 멘셰비키들”- 은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스탈린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혁명을 완수했고, 임시정부의 임무는 그 성취들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4월 3일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레닌은 즉각적으로 3월 볼셰비키들과 소비에트 다수의 투항주의적 정당들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시작했다. 레닌은 소비에트들에 기초한 파리 코뮌 유형의 정부를 형성하도록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확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망을 요구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 자신의 이전 생각으로부터 분명하게 단절했다. 레닌의 결론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앞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며 혁명의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임무들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방책들을 수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이라는 생각과 실천적으로 일치했다. 트로츠키가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하던 지구간 위원회(메쯔라이온찌)와 볼셰비키들 사이의 그가 촉진했던 몇 달 후의 통합이 이러한 일치성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그의 이전의 흠이 있는 대수적 정식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가장 근본적으로 그의 관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분위기에 조응하였으며, 볼셰비키주의가 그 존재 전체를 통하여 계급적 독립성과 짜르 정권과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 모두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대의 굳건한 자세를 고수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혁명적 정세에서 당 지도부의 결정적인 역할의 가장 생생한 예이다. 만약 볼셰비키들이 타협주의자들에 대한 좌익적 비판자들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돌아서지 못했었다면, 당연하게 당은 매우 오래 동안 다시 오지 않을 혁명적 기회를 유실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들은 의회주의, 입각주의 그리고 지방자치주의의 역할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며, 집행기관장 직을 위하여 경쟁하는 것의 문제를 엄중하게 강조한다. 임시정부는 구 짜르 두마의 잔당으로부터 성장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법무부 장관직을 1917년 3월 2일에 열정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인 승인도 없이 수용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당연히 1917년의 가장 근사한 입각주의자였다. 비록 위원회에 있던 케렌스키의 동료들 중 누구도 당시에는 그의 발자국들을 따라가려 하지 않았지만, 5월 1일이 되면서 집행위원회 다수는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합 정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는데, 볼셰비키들과 율리우스 마르토프의 멘셰비키-국제주의자들만이 이것에 반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소비에트들을 지역 수준에서는 새로운 지방자치 정부들(지역 두마들)로, 그리고 전국적 수준에서는 제헌의회로 대체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은 소비에트들의 점진적 해소를 위해 활동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연합정부는 부르주아지 의회 공화국으로 가는 가교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들은 살아남았다.

계급 배신의 이 연합에 대한 볼셰비키의 반응은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라는 구호였다. 트로츠키가 설명하였듯이, 그 구호는 “이들 장관들의 직위들을 멘셰비키들과 나로드니크들로 채울 것을 요구했다.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자 제군들, 카데트들을 쫓아내라! 당신들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하라! 12명 (혹은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페셰코노프들 [“사회주의자” 장관]을 정부에 넣어라. 그러면, 굉장히 금방일텐데, 시간이 도래했을 때, 그것이 가능한 한, 당신들의 직위들부터 당신들을 “평화적으로” 몰아내겠다고 당신들에게 약속한다’” (10월의 교훈들, 1924). 볼셰비키 전술은 임시정부를 손에 넣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소비에트 다수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할 것을 거부한다고 개량주의자들을 폭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볼셰비키들은 이 부르주아지 정부가 역사의 쓰레기 통 속에 쓸려 담겨야 하며, 노동자들, 병사들 그리고 농민들의 소비에트들에 기초한 노동자 정부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집행기관장 직위들을 타도하라!”라는 구호의 구체화였다.

레닌의 1917년 4월 볼셰비키 당 재무장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가 지역 두마 선거들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세력이 지방자치주의의 문제를 올바르게 다루지 못했음을 보여주면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의장 L.M. 미하일로프는 지방자치적 개혁이라는 고전적인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주창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위로 1900년 파리 대회를 인용했다.

“모든 존재하는 사회주의 경향들과 색조들 모두가 지방자치체, 도시 공공 행정부를 ‘집합적 사회의 맹아’로서 항상 간주해왔고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집합적 사회’의 승리가 현대 계급국가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건설에서 요구됨을 굳건하게 이해하고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파리 인터내셔널 대회(1900년)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만장일치로 지방 공공 자치 행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임무들을, 이것 속에서 ‘탈중앙화된 경제적 삶이라는 눈에 띄는 실험과 강력한 정치적 거점’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부과할 것을 결정했다.”

Sed'maia (aprel'skaia) vserossiiskaia konferentsia RSLRP (Bol'shevikov), Petrogradskaia obshchegorodskaia konferentsia RSDRP (Bol'shevikov), Protokoly (7차[4월] RSDLP[볼셰비키] 전 러시아 대회, RSDLP[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도시전역 대회, 의사록들) (모스크바: Gozpolitizdat, 1958) (우리의 번역)

이러한 기초위에서, 미하일로프는 멘셰비키들과 SRs와의 선거연합을 요구했다 - 이들 정당들이 협상국의 편에서 전쟁을 계속할 것에 대한 러시아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에 대한 임시정부의 서약을 온순히 수용했었던 바로 직후. 레닌은 부르주아지 계급이나 방어주의자들과의 선거연합이라는 어떠한 생각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식량공급 등과 같은 즉각적인 문제들을 간과함이 없이, 레닌은 지방 두마 선거운동은 “모든 현재의 핵심적인 문제들, 특히 전쟁, 그리고 중앙권력과 관련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들에 관련한 것들”에서 부르주아지 계급, 멘셰비키-SR 화해주의자들과 볼셰비키들의 차이들을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 “지방자치의 문제에 관한 결의안”, RSDLP[볼셰비키들] 페트로그라드 시 대회, 1917년 4월 14-22일).

미하일로프의 언급들에서 분명한 것처럼, 지방자치 위원회들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태도들은 당 안에서의 더욱 근본적인 차이들의 한 부분집합에 불과했다: 볼셰비키들이 민주주의의 좌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제한할 것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위하여 투쟁할 것인가? 가장 광범위한 선거권 하에서 선출되었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방 두마들에서, 볼셰비키들은 작았지만 성장하는 소수였다. 양쪽 모두의 두마들과 소비에트들에서 다수였던 멘셰비키들과 SRs는 두마들이 소비에트들을 대신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설명하였듯이:

“다른 어떤 민주주의적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지방자치 정부들은 굳건하게 확립된 사회적 관계들, 즉 명백한 소유 체제라는 기초위에서만 오직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혁명의 본질은 혁명이 이것, 즉 모든 기초들의 바로 그 기초를 문제 삼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력들의 상호관계라는 공공연한 혁명적 시험만이 오직 이것의 문제에 대답할 수 있다.... 혁명의 일상에서, 지방자치 정부들은 절반은 허구적인 존재를 유지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개입 사태들의 더 이상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결정적인 순간들에, 이들 정부들은 바리케이드의 서로 다른 쪽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 정부들의 구성인자들을 간단히 공중으로 폭발시켰다. 제헌의회의 운명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5월부터 10월까지 소비에트들과 지방자치 정부들의 결코 서로 교차하지 않았던 역할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

장군 코르닐로프의 8월의 실패한 반혁명 쿠데타를 볼셰비키가 주도하여 패퇴시킨 뒤, 볼셰비키들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들에서 다수를 장악했다. 볼셰비키들을 향한 결정적인 지지의 증가와 증가하는 사회적 혼란 - 특히 농민들 사이에서의 - 대하여 레닌은 봉기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필요성에 집중하는 일련의 저작들로 대응했다. 그들 나름대로, 케렌스키-SR-멘셰비키 연합은 임박한 노동자들의 혁명에 대한 일련의 “민주주의적” 장애물들을 제기하기 위하여 시도했다. 9월 14-22일 민주주의 대회와 이 대회의 산물이었던 1917년 10월 7일에 개시되었던 전(前)-의회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지난 4월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이라는 레닌의 전망에 저항했었던 볼셰비키 당 내의 인자들이 이제는 그것의 수행에 저항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 있고 레닌은 숨어 지내는 가운데, 9월 3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 두마 행정부에서 직위를 맡을 것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3개의 부시장 직위들 중에 하나를 위하여(!) 볼셰비키의 의회내 당기관의 수장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를 임명했던 것을 포함했다. 그렇게 하면서, 볼셰비키 의회내 당기관은 케렌스키의 SR과 멘셰비키 임시정부 파트너들에 합류하여시 행정부를 감독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 카데트 부시장 F.M. 크니포비치와 나란히 앉았다! “시정부의 통제기관들에서 혁명의 명백한 적들[예를 들면, 카데트들]과의 어떠한 형식의 협력” (“볼셰비키들과 10혁명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들중앙위원회의사록, 1917 8 - 1918 2 [런런:플루토 프레스, 1974]에서 인용)도 거부했던 볼셰비키의 두마 개막선언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화해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민주주의적” 모임들을 정당화하는 것에도 또한 함께 했다. 여전히 도피 중에 있던 레닌은 볼셰비키의 민주적 정당들의 대회 참석을 소급적으로 비난했고, 트로츠키가 그 전(前)-의회에 대한 보이코트를 주창해왔음을 환영했다. 전(前)-의회를 “본질에서 보나파르트적 사기”로 비난하면서, 레닌은 “우리 당의 ‘꼭대기’에” 혁명을 성취함에 있어서 “파멸을초래하게 될 수 있는 눈에 띌만한 동요들이 있음에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고 경고했다(레닌, “정치평론가의 일기로부터”, 1917년 9월 22-24일).

10월 11일, 루나차르스키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봉기를 위한 계획들에 대한 파업파괴적인 비난과 “제헌의회 더하기 소비에트들, 이것이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을 향한 국가기구의 융합된 형태이다”(러시아혁명의역사로부터 인용)라는 그들의 선언에 공개적으로 연대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동요분자들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봉기 이후에 조차, 꽁무니를 뺐었던 자들은 계속해서 지연작전을 수행하려고 했다. 11월 4일, 레닌과 트로츠키가 멘셰비키들과 SRs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주의자” 정부, 게다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제외할 것이었던 정부(!)에 대한 루나차르스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요구를 수용하기를 거부한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책임들에서 사임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파업파괴행위들 이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투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방침을 고수한다면, 그들을 축출해야 한다고 레닌은 다시 주장했다. 당 안에서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하고, 연합정부를 지지하는 그들을 받아 줄 멘셰비키가 없자, 투항주의자들은 곧 자신들의 노선을 철회했고, 레닌은 그들이 책임 있는 직위들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조언했다.

비판적 지지 대 입각주의

10월 혁명의 근본적인 성질들은 러시아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며, 그것의 충격 또한 그러했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이 10월의 대의를 채택하고 10월의 교훈들에 기초한 새로운 혁명적 정당들을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면서, 10월 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운동을 양극화했다. 자신들의 승리에 힘입어, 볼셰비키들은 레닌이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배외주의로의 붕괴 이래로 요구했던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건설의 첫번째 발걸음을 디뎠다.

1919년 첫번째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가와혁명의 교훈들이라는 기치를 들었다. 1년 후 2번째 대회는 다른 것들 중에서도 의회주의와 혁명적 선거전술들이라는 주제들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개량주의적 사기꾼과 코민테른으로 이끌리고 있던 우연적 중도주의 인자들을 걸러내기 위하여, 가입을 원하는 모든 정당들에 대하여 일련의 조건들이 부과되었다. 11번 째 조건은 의회전선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하기를 원하는 정당들은 그들의 의회 의원단들의 개인적 기질을 검토하여 모든 믿을만하지 않은 인자들을 제거하고 이들 의원단들을 정당들의 집행위원회들에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종속시키고, 각각의 공산주의 의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모든 실천을 진정으로 혁명적 선전과 선동의 이해관계들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

- “가입을 위한 조건들에 관한 테제들” 세계의노동자들과억압받는인민들이여단결하라! 1920 2대회의의사진행들과문서들 (뉴욕: 패스파인더, 1991)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트혁명과배교자카우츠키,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공산주의, 그리고 기타 논박들은 사회민주주의, 특히 카우츠키주의 중도주의에 맞서는 명확한 강령적 선들을 그려내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동시에 레닌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스트와 초좌익 인자들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의 사회민주주의적 의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이들을 어떠한 선거활동이나 의회활동도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거부하도록 이들을 이끌었다. 2차 대회 직전에 레닌은 공산주의적 전술들에 관한 그의 소책자인 “좌익” 공산주의-유아기적 질병 (1920년 4월-5월)을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예를 들면, 영국에서 다가오는 선거들에서 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입장을 채택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헨더슨파, 클리네스파 맥도날드파, 그리고 스노우덴파[영국 노동당 지도자들]이 가망없는 반동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비록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연합을 더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낡은 부르주아지 방책들을 따라 지배하기를 원하며,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분명히 샤이데만파와 노스케파와 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혁명을 배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혁명의 이해관계에서 노동계급 혁명가들은 특정한 정도의 의회적 지지를 이들 신사양반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 노동자들이 여전히 영국판 케렌스키파나 샤이데만파의 지도를 따르며 이런 자들로 구성된 정부에 대한 경험을 아직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적 실천에 참여해야하고, 의회 내부로부터 그들이 노동자 대중들이 헨더슨과 스노우덴 정부의 결과들을 실천적으로 보도록 도와야 하며, 그들이 헨더슨파와 스노우덴파가 로이드 조지와 처칠의 통합세력들을 패배시키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가리킨다. 다른 식의 실천은 혁명의 대의를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인데, 노동계급 다수의 관점에서의 변화, 즉, 그것은 선전 하나에만 의한 것이 결코 아닌,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에 의하여 발생한 변화가 없이는 혁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익”공산주의

레닌은 단호하게 주장했다.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정치활동에서 선동과 선전의 완전한자유를 확보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물론, 이 조건이 없다면, 그것은 배신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블럭에 동의할 수 없다. (1903년에서 1917년이라는 15년 동안)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의 헨더슨파와 스노우덴파인 멘셰비키들에 대하여 요구하고 확보하였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헨더슨파와 스노우덴파를 폭로할 완전한 자유를 요구하고 확보해야만 한다” (같은).

분명하게 레닌의 전술들의 전체 요점은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 여당으로 노동당을 대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었고, 반대로 레닌은 “의회의 의석수는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같은)고 주장했다. 그렇기보다, 그러한 전술들은 혁명에 대한 개량주의적 장애물들을 폭로하는 것을 돕게 될 것이었다. 레닌이 썼듯이, “나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을 지탱하는 줄과 같은 방식으로 헨더슨을 지지하기를 원한다 - 임박한 헨더슨 정부의 수립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고, 대중들을 내편으로 넘어오도록 할 것이며, 헨더슨파와 스노우덴파의 정치적 사망을 재촉할 것이다”(같은). “좌익” 공산주의 어디에서도 레닌은 공산주의자가 부르주아지 정부에서 행정기관장 직위를 맡거나 그것과 기능상 같은 것 즉 의회 여당을 맡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다 앞선 성명에서 레닌이 분명하게 하였듯이:

“불한당들이나 숙맥들만이 오직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계급의멍에 하에서, 임금노예제도의멍에 하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 우선 다수를 확보하고 나서 권력을 획득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우둔함과 위선의 극치이다; 이것은 낡은 체제하에서 그리고 낡은 권력을 가지고 선거들로 계급투쟁과 혁명을 대신하는 것이다.“

- 레닌,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환영인사들”, 1919년 10월 10일

레닌이 제안했던 선거 전술들은 집행기관장 직위에 후보를 내세우는 것에 대한 반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2차 대회 직전에 썼던 한 문서에서, 레닌은 혁명적 의회주의는 단지 “부르주아지 대표 기관들(주요하게 국회, 그러나 또한 지역, 지방자치체 등의 대표 기관들)에 대표자들”(“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 대회의 근본적 임무들에 관한 테제들”, 1920년 7월 4일)을 가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분명히 했다. 단지 입법기관에 있는 노동자들의 대표자들 - 레닌은 결코 행정부에 있는 최고위직 공직자들, 시장들, 주지사들 혹은 대통령들을 적 진영에서 노동자들의 성취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2차 대회, 지방자치주의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ECCI)에 의하여 대회에서의 토론을 위하여 제출된 “공산당들과 의회주의의 문제들”에 관한 테제들 초안은 레닌의 문서들과 같은 노선에 있었다.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지방자치체의 수준에서를 포함하여 집행기관장 직을 맡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고, 대신 그 반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의회위원회가 대회현장에 제출했고 결과적으로 채택되었던 그 테제들은 어떤 특정한 결정적 측면들에서 수정되었었다. 부하린과 함께 그 위원회의 러시아 대표단의 일부가 되도록 임명되었던 트로츠키는 원래의 초안에 있는 첫번째 테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역사에 관한 서문 부분을 작성했다. 지노비에프가 의회 대표단을 위한 훈령들로 원래 작성했고, 제출되기 전에 러시아 당 정치국이 검토했던 그 테제들의 세번째 부분은 어떠한 의미있는 변화들도 없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원래는 부하린이 초안을 썼던 문서의 두번째 부분에서는, 초안의 혁명적 의도를 물타기하는 몇 가지 반 맑스주의적 수정들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시 번호가 붙었던) 4번째와 6번째 문단들은 공산당들이 부르주아지 의회들을 접수할 가능성을 더 이상은 분명하게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시적 기초에서 그 가능성을 허용했다. (우리가 수정들을 강조 처리해 두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 국가를 아무리해도 접수할 수는 없는 것처럼, 부르주아지 국가 기제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 중에서, 부르주아지 의회들은 항구적으로 접수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국가 기제와 아울러 그것이 공화제이거나 입헌군주제이거나에 관계없이 의회 기구들을 분쇄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5. 그것은 지역 정부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기구들에 대해서 전혀 다름이 없다. 그것들을 국가 기관들에 대치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 옳지 않다. 실제로 그것들은 부르주아지 국가의 메카니즘과 비슷한데, 그것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파괴되고 노동자 대표자들의 지역 소비에트들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6. 그래서, 공산주의는 미래 사회의 형태로서의 의회주의를 거부한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의한 독재의 형태로서 그것을 거부한다. 공산주의는 항구적기초에서 의회들을 접수할 가능성을 거부한다; 공산주의의 목적은 의회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부르주아지 국가 기구들의 파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

- “공산당들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들” 2차 대회의 의사진행들과 문서들

가장 의미심장하게, 위원회는 실천적으로 테제 5번과 모순되었던 새로운 테제 13번을 추가했다:

“13. 만약 공산당들이 지방 정부의 기구들에서 여당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면, (a) 중앙의 부르주아지 정부에 맞서는 혁명적 야당을 조직한다; (b) 인민의 보다 가난한 부위들에 복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한다(경제적 방책들, 무장한 노동자들의 민병대를 창설하거나 창설하기 위하여 시도하기, 등등); (c) 어떻게 부르주아지 국가가 진정으로 중대한 변화들을 방해하는지를 모든 기회에서 지적한다; (d)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국가와의 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력적인 혁명적 선전을 발전시킨다; (e) 특정한 조건들 하에서, 지방자치 정부들을 지역 노동자 위원회들로 대체한다. 즉, 지방 정부에서 공산당들의 모든 실천은 자본주의 체제를 침해하는 일반적인 활동의 일부이어야만 한다.”

같은

이것은 앞에서 인용되었던 1907년에서와 같은 지방자치주의에 맞서는 레닌의 주장들에 뚜렷하게 모순된다.

2차 대회와 대회의 관련 위원회들의 속기록들은 심하게 불완전하며, 우리는 의회 위원회의 의사진행에 관한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입수 가능한 증거가 관련된 수정들의 정치적 취지를 시사한다 - 일부 당들의 실천에 널리 퍼져있던 지방자치적 실천들에 대한 양보. 이와 관련하여, 위원회가 의회에서의 혁명적 활동의 모델들로 불가리아 공산당(CPB)를 독일에서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볼셰비키의 예들에 추가하는 테제 11번에 대한 수정을 또한 받아들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회 불과 몇 달 전에, 이미 꽤 큰 의회 분파를 가지고 있던 CPB는 불가리아 전역을 통하여 지방자치 선거들에서 놀랄만한 승리를 기록했다. 당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한 신청이 심리중에 있던 프랑스 사회당 또한 당시 1500에서 1800개 정도의 지방 정부들을 통제했으며, 이탈리아 사회당도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지방자치체들을 운영했다.

부하린의 의회주의에 대한 대회의 주요 보고는 위원회의 수정들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독일 대의원 볼스슈타인(로시 프뢸리히)에 의한 짧은 보충 보고에서 논평 없이 대의원들에게 제출되었다. 의회 활동에 반대하는 소수 보고를 내놓고 이탈리아 사회당의 공산주의-기권주의 분파를 위한 반대 테제들을 제출했던 이탈리아 극좌파 아마데오 보르디가와의 논쟁이 계속해서 진행된 토론을 지배했다. 다수파 결의안에 찬성과 반대 발언자 각각 3명씩을 허용했던 토론에서 레닌의 언급들은 오로지 보르디가의 주장만을 다루었다.

다수파 테제들에 찬성하던 발언자 중에 오직 한 명, 불가리아인 니콜라이 샤블린(이단 네델코프)만이 지방자치주의의 문제에 관하여 발언했다. 샤블린은 아래와 같이 큰소리쳤다.

“1919년 12월의 지방 선거들과 1920년의 카운티 선거들에서, 당은 거의 모든 도시들의 위원회에서, 그리고 100개 정도의 촌락들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14만 표를 얻었다. 다른 많은 도시와 촌락 위원회들에서 당은 다수 야당들을 유지한다. 지방과 지구 위원회 기구들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당은 도시들과 촌락들에서 그 개별단위들이 혁명의 시기에는 지역과 주 대표기관들을 대체하고 그것들의 기능들을 맡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기 위한 강령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중들만이 그들의 기관들을 통하여 식료품, 주택과 물가인상, 그리고 모든 노동 인민들의 기타 즉각적으로 필수적인 것들에 관한 공산주의 지방자치 위원회들의 결정들을 중앙 정부가 존중하도록 만들 수 있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공산주의 지방자치체들에서의 캠페인들을 활용한다.”

- “의회주의” 2차 대회의 의사진행들과 문서들

CPB의 의회 활동이 샤블린이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믿을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던 스위스의 야코브 헤로조그가 샤블린에 대하여 반응을 했던 유일한 대의원이었다.

“위원회에서 우리는 지방자치 위원회의 공산주의 대표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만약 그들이 다수당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장시간 토론을 했다. 거기서 부하린 동지는 ‘만약 그들이 다수당이 된다면, 그들은 공산주의 지방자치 위원회와 국가 사이의 모순을 높여내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기회주의자들이 의회로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또한 말했던 것이 정확하게 그것이다.”

같은

하지만, 헤르조그는 어떠한 형태의 의회활동에도 반대했고 부르주아지 국가기구의 지역 기관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지방자치 위원회에 대한 통제와 부르주아지 입법기관에서 공산주의 반대파가 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 차이는 결정적인 것이다. 테제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서문 부분은 의회의 공산주의 성원들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의회 기구들 속의 척후병들”로서 혁명적 노동계급을 위하여 활동한다고 말한다. 결의안의 3번째 부분에 있는 테제 8번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회의 모든 공산당 성원들은 다른 입법부 의원들과의 합의들을 추구하는 하나의 입법부 의원이 아니라, 그러기는커녕 의회에서 당의 결정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적 진영 속으로 파견된 당의 선동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 “공산당들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들”

반대로 지방이나 혹은 전국적인 입법기관에서 공산당 다수당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집행기관장 직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예산과 행정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그러한 기관들에 대한 통제권의 획득이라는 문제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반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의회에 관한 언급들에서, 샤블린 자신이 공산당들이 지방 정부들을 관리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관하여 암시했다. 그는 CPB의 강령은 “혁명의 시기”에 이들 기관들을 소비에트들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불가리아 공산당원들은 자본가 계급 지배라는 틀 안에서 이들 지방 기관들을 관리하고 질서유지와 부족한 자원들에 대한 배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샤블린은 CPB의 실제 실천을 왜곡했다. 불가리아 당은 부르주아지 지방자치 행정기관들을 대체하기 위하여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기는 커녕 혁명의 시기에 이들 행정기관들을 소비에트들로 유기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CPB 창설자 디미타르 블라고예프는 1919년 아래와 같이 쓰면서 분명히 했다.

“지방자치체들을 획득하는 것은 소비에트 체제의 지배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지방자치 권력을 접수하기 위한 투쟁, 그리고 특히 우리 당이 우리가 지방자치체들을 운영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프롤레타리아트와 보다 빈곤한 계급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우리 당이 힘써야만 할 투쟁 - 이 투쟁은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권력(CP)의 확산, 전체로서의 소비에트 체제의 지배를 위한 것일 것이다.”

- G. Tsonev and A. Vladimirov의 Sentiabr'skoe vosstanie v Bolgarii 1923 goda (1923년 불가리아 9월 봉기) (모스크바: Gosizdat, 1934) (우리의 번역)

불가리아 공산당들은 미국의 빅터 버거와 같은 지방자치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CPB는 불가리아의 1차 대전 이후 붕괴라는 빈공간 속으로 급격하게 들어가 러시아 혁명에 찬성하는 대중적 지지의 갑작스런 상승으로 지방 행정기관장 직으로 진출했던 혁명적 당이었다. CPB의 선구는 블라고예프의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Narrow)인 테스냐키였는데, 이 조직은 1912-13년 발칸 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대를 이유로 그리고 의회에서 전쟁 채권들에 대한 반대투표를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았었다. CPB는 사회주의를 배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사회민주주의와 그들이 거의 알고 있지 못했던 볼셰비키주의라는 최고의 전통들 안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위해서 지방자치 기관장직을 맡았다. 지역적 수준에서 부르주아지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목적들과 그들의 지위들 사이의 모순들은 지속될 수 없었고, 지속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볼셰비키주의와의 동일시에도 불구하고, CPB는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부터 많은 사회민주주의적 인습을 넘겨 받았다. 레닌은 불가리아 군대 속의 농민병사들에 의한 대규모 반란인 1918년 9월 라도미르 반란에서 당의 기권주의적 정책에 관하여 깊은 염려를 표했다. 이 반란의 직전에, 이미 병사들은 볼셰비키 혁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소비에트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테스냐키의 평조직원들은 3일간의 호각의 격전에서 1만 5천명의 반란군 병사들로서 합류했고 짜르 페르디난드를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당은 봉기에 대한 어떠한 조직화된 개입에도 반대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농민조합 지도자 알렉산더 스탐볼리스키가 권력을 잡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CPB는 레닌의 비판들을 수용하지 않았고, 후에 블라보예프는 봉기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방향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못했던 것을 방어했다. 라도미르 봉기 개입에 대한 CPB의 거부는 좋은 측면에서 당의 농민에 대한 오랜기간 동안의 적대감을 반영했다.

당은 전쟁동안 그리고 전후의 격변들이 한창이었던 동안에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이것은 대부분이 산업 노동자들 속에 있지 않았던 다수의 미숙한 인자들의 인입을 의미했다. 동시에 CPB는 거대한 의회와 정부 기구들을 만들어내는 한편으로 많은 수의 인쇄소들, 협동조합들, 그리고 다른 기업체들의 망을 발전시켰다. 1922년이 되면서 3600명이 넘는 공산당원들이 지방자치 위원회를 차지했고, 그외 115명은 주단위에서 복무했으며, 거의 1500명이 학교당국들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3만 8천명의 CPB 당원들 중에서 압도적 비율에 이르렀다.

불가리아의 경험은 부르주아지 지방자치 정부에 대한 통제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과 대치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1923년 6월 농민에 기초한 스탐볼리스키 정부에 반대하는 찬코프의 유혈 쿠데타 속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이 결국 나라를 “재안정화”시킬 수 있게 되자, CPB은 자신의 “지방자치 코뮌들”로부터 일소되었다. 공산당 자신의 독립적인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대한 투쟁으로의 조직화에 기초하여,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우익 쿠데타에 맞서 농민조합 세력들과의 공동전선 실천을 준비하기는 커녕, CPB는 쿠데타에 앞서 정권에 무기들을 은밀하게 호소하는 것과 그리고 나서는 막상 쿠데타가 발생하자 쿠데타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

그 직후에 CPB는 단순히 증가된 부르주아지의 억압을 낳았을 뿐인 1923년 9월의 실패한 봉기를 포함하여 일련의 모험주의적 군사 행동들에 착수했다. 당시까지 하나의 예로서 떠받쳐지던 당이 1923-25년의 백색테러에 물리적으로 분쇄되었다. 샤블린 또한 CPB의 정치적 실패들에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5000명 이상의 공산당원들 중의 하나였다. 지노비에프 하에서 지그재그 행보를 하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부는 불가리아 당을 모험주의적 방침 쪽으로 몰아세웠는데, 동시에 한편으로 적색 농민 인터내셔널 크레스틴테른을 수립하고, 전세계적으로 부르주아지적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당들”의 형성을 지지했다. 이 때가 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처음 4번의 대회를 열었었던 때에 그랬던 혁명적 국제정당이 더 이상 아니었다. 1923-24년에 시작하여, 소비에트 당, 그리고 소비에트 당과 함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질적인 관료적 퇴행의 과정을 겪었다. 이것은 1924년 후반에 정치적으로 명문화되었는데, 그때 스탈린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반(反)국제주의적 교조를 공표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방자치주의에 관하여: 문제가 되는 유산(遺産)

2차 대회는 지방자치주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들을 수정함으로써 맹아 상태의 입각주의를 허용했던 모순투성이 꿀꿀이 죽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 문제를 수행하는 것에서의 실패를 고려함에 있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역할을 했던 실질적인 기능을 했던 첫번째 대회로서 2차 대회는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기초, 민족과 식민지 문제들, 노동조합 문제들 등을 포함하는 다른 많은 문제들을 역점을 두어 다루어야만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게다가 대회가 폴란드와의 전쟁, 그리고 필수드키와 그의 프랑스 제국주의 후원자에 대한 적군의 반격이 한창인 때에 열렸는데, 만약 소비에트 군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면 그들은 강력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로 가는 직접적인 교두보를 열었을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적군의 승리는 베르사이유 체제 유럽을 그것의 근본들로부터 뒤흔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1920년 혁명의 불꽃들을 유럽전역에서의 대화재로 확산시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방자치 행정부 참여의 문제는 1917년 때 처럼 직접적으로 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라는 정세 속에서 제기되었을 것이다.

2차 대회가 집행기관장 직위에 관해서 단지 암시적으로 다루었지만, 그 문제는 미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분명하게 제기되었었다. 유럽의 의회제도와는 달리, 미국의 대통령제에서는 입법부의 직위와 행정 기관장 직위들 사이의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공산당(CPA)의 당원인 알렉산더 스토크리츠키가 의회 위원회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는 2차 대회에서 의회주의에 관한 참석자들의 토론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19년 창립대회에서, CPA는 집행기관장 직위에 입후보하는 것에 반대하는 올바른 입장을 채택했었다. 이 당의 한 부분이 1920년 5월 공산주의 노동당과 통합하여 통합공산당(UCP)를 창설하기 위하여 분리해 나갔을 때, C.E. 루센버르가 주장했던 이 입장이 새로운 당으로 이월되었다. UCP 창립대회는 “공공 기관장 직위에 대한 후보 지명들과 선거 참여는 국회, 주의회, 시위원회 등과 같은 입법기관으로 한정한다”(UCP 강령, 혁명적급진주의, 1920년 4월 24일 제출된 러스크 위원회의 뉴욕주 상원 보고에서 재출판됨)고 주장했다.

그 입장은 UCP 대회 논쟁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첫번째 경향은 위의 입장을 고수했고, 두번째 경향은 모든 선거활동을 반대했고 세번째 경향은 모든 기관장 직위들에 대한 입후보를 지지했다. 당대의 평가는 “기관장 직 선거들을 반대했던 자들은 공산당원들의 주지사, 시장, 그리고 민선 치안감으로의 당선은 그들을 부패하게 할 것이고, 운동에 해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는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우리 스스로 떠맡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공산주의자, 1920년 9월 1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 올바른 주장들은 입법기관들에 있는 공산주의 대표자들은 “개혁적 방책들을 도입하지도 그것들을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CCP 강령 속의 극좌적 주장과 연결되었다. 2차 대회에서 극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후과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은 입법부 직위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행정기관장 직위 입후보의 구별을 포기했다. 1921년 벤 기트로가 뉴욕시에서 공산당 시장 후보로 입후보 했다. 다음 해, 1922년 8월의 미국 공산당 대회를 위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문서는 “공산주의자들은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지방자치, 주, 그리고 의회 등 모든 일반적인 선거운동들에 혁명가들로서 참여해야만 한다”(“미국에서 공산당의 다음 임무들”, 미국의좌익들 [뉴욕, 벡외드 프레서, 1924]에서 재출판 됨)고 주장했다. 1924년 미국 당은 자신의 후보로 윌리암 Z. 포스터를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시켰다.

행정기관장 직위와 지방자치 행정부라는 연결된 문제들에 대한 명확성의 부재가 트로츠키 자신의 글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코민테른과 가입 정당들을 괴롭힐 것이었다. 4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대회의 프랑스에 관한 1922년 12월 2일 결의안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시장들과 그밖의 같은 것들”을 “공산당 의원, 지방자치 위원, 제너럴 카운슬러들”과 융합하여, 전자도 마찬가지로 “혁명적 대중투쟁의 기구들 중의 하나”(“프랑스 문제에 관한 4차 세계 대회의 결의안”, 트로츠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5년들 [뉴욕: 모나드 프레, 1972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5년들에 대한 1924년 5월의 그의 서문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이들 직위들을 확보하는 것을 환영했다: “특히 만약 우리가 파리 교외에서 우리의 영향력의 빠른 성장을 고려한다면, 우리 당이 90만 표 정도 득표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성공을 의미한다.” 교외들에서의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력”은 꽤 많은 수의 지방자치체들에서의 입법부 직위들로 성장했었다.

트로츠키가 이 문제에 관한 그의 관점들을 바꾸지 않았음을 지적해 두어야만 한다.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던) 1939년 한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국유화된 산업의 경영에 대한 노동조합들의 참여가 사회주의자들이 가끔 다수를 획득하여 중요한 지방자치 경제를 감독해야만 하지만, 아직은 부르주아지 계급이 국가를 통제하고 부르주아지적 소유의 법들이 지속되는 지방자치정부들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참여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자치체 내의 개량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정권에 수동적으로 순응한다. 이 곳에 있는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모든 단계에서 지방자치 정책은 국가권력의 장악 없이는 무력한 것임을 가르친다.

“틀림없이, 그 차이는 지방자치 정부의 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적 선거들을 통하여 특정 직위들을 획득하는 것인 반면, 국유화된 산업의 영역에서는 정부 스스로가 노동자들에게 특정 직위들을 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순전히 형식적인 성격의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은 노동자들에게 특정 영역의 활동을 양보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은 이것들을 그들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활용한다.”

- “국유화된 산업과 노동자 경영”, 1939년 5월 12일

1924년에 트로츠키가 PCF의 지방자치체들에 대한 통제와 관련하여 PCF를 “부르주아지 정권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의무들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으로 언급하고, 1938년에는 지방자치체들에 관한 유사한 정식화를 제안할 수 있었던 것 때문에 그를 지방자치 개량주의로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했던 공산주의 전략의 문제가 우리에게로 인계되었던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2007년 ICL 5차 대회에서의 집행기관장 직에 관한 토론에 관한 우리의 보고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어떠한 환경들 하에서라도 부르주아지 국가의 집행 기관장 직위들에 입후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코민테른의 지지를 업은 독일공산당(KPD)의 1923년 10월의 색소니와 튜링지아 지방 정부들에 대한 참여에 대한 우리의 오래 동안 계속된 비판의 확장이다. ‘좌익‘ 사회민주당원들이 운영하던 이들 부르주아지 정부들에 대한 KPD의 지지는 - 처음에는 정부의 외부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정부 내부로부터 - 혁명적 정세가 틀어지게 하는 것을 도왔다 (“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평“,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을 보시오).”

스파르타시스트 60호, 2007년 가을 (ICL 팜플렛 레온트로츠키의영구혁명의이론의발전과확장에 1923년 독일 기사와 함께 재출판된 집행기관장 직위 발췌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4차 대회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서의 KPD의 이들 정부들에 대한 참여는 이 대회에서 채택되었던 “노동자 정부들”에 관한 흠결있고 혼란스러운 결의안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그 결의안은 혁명가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표현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아닌 노동자 정부에 대한 요구와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를 관리하는 온갖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을 혼동했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으로 그러한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트로츠키는 1923년 독일에서 혁명적 전망을 위하여 투쟁했고, 레닌이 1917년 9월과 10월에 그랬던 것 처럼, KPD가 구체적인 준비들을 하고 봉기의 날짜를 정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색소니와 튜링지아 정부들에 대한 참여가 혁명을 위한 “훈련의 장”이라고 주장하면서 색소니와 튜링지아 정부들에 대한 참여라는 KPD의 정책을 그릇되게도 지지했다. 대중들이 들었던 것처럼, 이것들이 만약 진정으로 “노동자 정부들”이었다면, 아마도 의회외적 혁명적 투쟁과 노동자 위원회들과 노동자 민병대들의 형성은 완전히 불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KPD와 지노비에프 하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부는 혁명적 기회가 유실되도록 했다. 계속 이어진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기저하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정치권력을 찬탈하는 것을 허용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923년 독일 패배 직후, 트로츠키는 실패의 정치적 이유들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다. 암묵적 자아비판이었던 10월의 교훈들(1924)에서, 트로츠키는 권력의 문제가 제기되자 꽁무니를 뺐던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그리고 스탈린 파들의 저항을 이겨냈던 1917년 레닌의 성공적인 투쟁을 1923년 10월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투항주의 정치들과 대비시켰다. 후에 트로츠키는 1923년 독일 사태들에 대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KPD의 개입에 관한 보다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평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KPD의 색소니와 튜링지아 정부들에 대한 참여에 대해서도, 4차 대회에서의 노동자 정부들에 관한 흠결있던 결의안에 대해서도 결코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집행기관장 직위에 공산당 후보들이 입후보하는 것에 대한 그의 수용은 지방 정부들에 대한 공산당의 운영에 대한 그의 지지의 당연한 결과였다. 수많은 시장 선거 운동들에 더하여, 프랑스 공산당은1924년에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냈다. 독일에서는, KPD는 1925년에 에른스트 탤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1932년에 다시 그렇게 했다. 트로츠키는 KPD가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 민병대들을 투쟁으로 조직하여 나찌를 분쇄하고,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하여 투쟁했다. 이것은 당시의 긴급한 임무였고,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했던 소란스럽던 제3기 성격규정과 함께 했던, KPD의 1932년 선거운동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당의 거부를 위한 소란스러운 위장막이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사회-파시스트” 노선의 파산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지만, 그는 KPD의 선거 운동에 대해서는 단지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을 뿐이고, 대통령 선거 입후보를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1940년에, 트로츠키는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가 민주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 맞서 대통령 후보를 입후보할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제기했다(“트로츠키와의 토론”, 1940년 6월 12-15일). SWP 지도자들이 논리적 근거들에서 이것을 제외하자, 트로츠키는 노동운동이 루즈벨트에 맞서는 독립 후보를 세워내도록 하기 위한 투쟁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당시 루즈벨트와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당 후보 얼 브로우더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 토론들에서, 트로츠키는 SWP가 “진보적” 친-루즈벨트 노동조합 관료집단에 순응적이었던 것에 대한 그의 염려를 분명히 했다. 이들 토론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트로츠키나 SWP 지도자들 모두 대통령 직 입후보의 문제를 원칙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과거 루즈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왈라스의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부르주아지적 진보당에 맞서 후보를 내세웠던 1948년부터, SWP는 정기적으로 대통령 선거들에 후보를 냈다.

브로우더의 입후보와 관련한 트로츠키의 제안은 매우 적절했다. 1939년 8월 스탈린의 히틀러와의 조약에 바로 뒤이어, 미국 스탈린주의자들은 루즈벨트의 “뉴딜”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던 것으로부터 미국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사들인양 하는 것으로 좌익을 향하여 일시적 방향전환을 했었다. 그들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이후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 루즈벨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되돌아 갈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브로우더에 대한 비판적 지지 주장들은 노동계급 속의 그들의 토대 앞에서 공산당을 폭로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일시적인 반제국주의 행보를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행정기관장 직위에 대한 입후보 반대를 주장함에 있어서, ICL은 적절한 경우들에 있어서 다른 노동자 조직들이 기본적인 계급 노선을 견지한다면 이들 조직들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는다. 레닌주의 조직이 상대방에 대한 선거에서의 비판적 지지를 할 때에는, 그 조직이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은 원칙들을 적용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들에 있어서는, 비판적 지지가 결코 대중적 개량주의 정당들로까지 확장될 수가 없는데, 이것은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어쩔수 없이 이 조직들은 정부를 형성하려고, 즉 자본주의를 운영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 주장은 우리의 비판적 지지의 핵심적인 논쟁적인 측면이다. 그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요점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그러한 정당들의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실천에서는 그들이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배신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유산(遺産), 그리고 우리의 유산(遺産)들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의 과거 투쟁들의 교훈들에 대한 비판적 학습이 우리의 혁명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제2 인터내셔널과 스탈린화된 코민테른의 정치적 시체들 위로 1938년에 창설된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첫 4개 대회들에 의거한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하여 무비판적인 것은 아니며, 우리 경향의 초기시절부터 우리는 4차 대회에서의 “반제 공동전선”과 “노동자 정부”에 대한 결의안들에 대한 유보를 표명했다.

반대로, 우리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10월 혁명의 원칙들과 레닌과 트로츠키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력적 근본들을 파괴하거나 거부하고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실행들에 역사적 권위라는 후광을 제공하는 그러한 “전통들”을 골라 선택한다. 국제주의자 그룹과 볼셰비키 경향이 그러한 경우인데, 부르주아지 국가에서 행정기관장 직들에 입후보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한 이들의 법률가적 주장들은 레닌의 볼셰비즘보다 제2 인터내셔널의 카우츠키를 추종하는 세력과 훨씬 더 닮아 있다. IG와 BT의 개량주의적 큰형님들로 말할 것 같으면, 이따금씩 있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언급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은 밀레랑파와 맥도날드파의 그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집행기관장 직위나 부르주아지 입법기관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에 의해 제기되는 소위 딜레마에 대한 IG와 BT의 거짓 번민은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1920년대 영국 좌익 노동당의 포플라 자치구 의회에 대한 그녀의 매우 우호적인 평가에서, 역사가 노린 브랜슨이 아주 똑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당신들이 다수를 획득하면 무엇을 하는가? 기존의 법적인 그리고 행정적 체제가 당신들이 옹호하는 변화들을 일으키도록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는가?” (브랜슨, 빈민구제주의(Poplarism), 1919-1925년 [런던: Lawrence and Wishart, 1979]). 브랜슨의 질문을 인용하면서, 당시 중도주의 영국 노동자권력 그룹(그 후 두 개의 경쟁하는 개량주의 조직들로 분리했다) 의 지방자치주의에 관한 1982년의 한 기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 대회의 테제 13번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했다 (“1919-21년 포플라에서의 투쟁: 공산주의 대 지방자치주의”, 노동자권력, 1982년 5월)!

노동자 권력의 기사는 “지방자치 투쟁에 대한 혁명적 태도”로서 기사가 서술하는 것을 추진하기 위하여 런던의 빈곤한 노동계급 이스트 엔드에 있는 2명의 공산당원들인 에드가와 미니에 랜스버리가 포함되었던 이 노동당이 이끌던 자치구 의회의 전투성에 열광한다. 2차 대회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영국의 혁명운동에 있던 생디칼리즘으로 경도되었던 인자들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 영국 공산주의를 실패하도록 그리고 노동당의 의회주의적 환경들에서 매우 편안해 했던 인자들로 구성된 지도부 하에 버려두었다 (스파르타스시트 36-37호, 1985-86년 겨울 “유산된 영국 공산주의”을 보시오). 그 2명의 공산당 자치구 의원들은 의회의 나머지 노동당 다수(에드가의 아버지인 기독교 평화주의자 조지 랜스버리가 이끌던)와 실천에 있어서 사실상 정치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가 영국이 격렬한 사회적 격변이 한창이던 때였다. 1920년 포플라 의회 활동의 최고 시점에서, “러시아에서 손을 떼라”를 요구하고 필수드스키의 폴란드에 대한 영국 무기 선적들을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들이 나라를 휩쓸었다. 이 운동에서 나타났던 실천위원회들은 이중권력 기관의 등장을 시사했다.

프롤레타리아트 권력 하에서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재조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곳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단순히 배급체제를 가지고 헛수고를 했다. 포플라 자치구 의원들이 분명히 그 당시에 조차 노동당의 주류 정치인들보다 더 전투적이었기는 했지만(자신들의 정책들을 위하여 감옥에 가고 대규모 시위들을 조직하는 등), 그들의 힘과 정치적 시야는 빈민과 실업자들을 위한 구제지급들을 인상하고 당분간 의회 피고용인들의 부족한 임금을 인상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통제하던 빈약한 자원들을 배급하는 것에 제한되었다. 조지 랜스버리가 언급하였듯이, “노동당 행정부가 자본가 행정부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실체가 있는 증명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야만 했고, 아주 간결하게 이것은 부를 지방세납부자들로부터 빈민들에게로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브랜슨의 빈민구제주의에서 인용). 실제로 노동계급 지역들에 있는 지방자치 의회들에 대한 통제는, 노동당이 1924년에 처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전국적 수준에서 정부의 당이 되는 것으로의 노동당의 도약에 결정적이었다. 1921년 왕이 이스트 엔드를 방문했을 때, 새롭게 선출된 포플라 자치구 의원들은 다음과 같이 왕을 영접했다: “포플라 자치구 위원회는 오늘 왕이 여왕의 정부가 나라의 실업자들을 위해 직업이나 완전한 생계비를 지급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같은에서 인용)!

60년 후에, 테드 그란트와 피터 타페 (그 이 후 분리하여 별도의 조직들을 꾸렸던 자들)이 이끌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투사경향이 녹초가 되었던 도시 리버풀에서 노동당 의회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기독교 평화주의자 랜스버리와 그의 패거리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 때, 지역 자본가 정부의 이들 “트로츠키주의” 행정가들은 보수당 대처 정부에 의해 과해지는 예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도시 전체의 3만 명이 넘는 지방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를 위협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청원을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지방 행정부는 노동계급 정당들을 부르주아지 질서 속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복무해왔다. 이것은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곳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원들과 미국”에 관한 한 논쟁은 “지방과 도시 정부들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는 ... 현실적 개량주의를 향한 PCI 내부에 있는 경향을 강화시키는 것에서 실제로 중요했다”(뉴욕도서서평, 2006년 5월 11일)고 서술했다. 어떤 수준에서라도 행정기관장 직에 입후보하거나 직을 맡는 것은 노동 대중들을 혁명적 투쟁으로 조직하는 것을 향한 디딤돌 이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의 개혁능력에 대한 지배적인 환상들을 깊게 만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의 적에게 결박시키는 사슬들을 강화하는 것에 복무한다.

반면, 맑스주의 노동자 당은 실제로 부르주아지 입법기관들에서 일부 의석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인데, 짜르 치하의 두마에서 볼셰비키가 반유대주의와 소수민족들에 대한 학살주의를 비난하는 것에서 했던 것처럼, 그곳에서 당의 대표자들은 “부르주아지 다수당에 의한 채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전, 선동, 그리고 조직화의 목적들을 위하여 고안된” (“공산당들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들”, 2차 대회의 의사진행들과 문서들, 1920) 본보기적인 법안들을 제출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지위들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방책들을 통해서 - 예를 들면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입법안을 제출하는 것 -, 그리고 공산주의 대표자들을 노동자 시위들과 파업 집회들의 “대오의 최선두에” 세움으로써 맑스주의 당은 자신의 의회에서의 지위들을 “당의 혁명적 활동을 위한 보조적 기초들”(같은)로서 활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전망은 집행기관장 직위들에 입후보하고 그러한 직위들을 맡는 것과는 분명하게 반대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선출직위에 입후보하는 것은 단순히 선전적 노력이나 국제주의자 그룹(IG)과 같은 자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기회가 아니다. 상대적 안정의 시대에,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지배에 대한 어떠한 지각된 도전도 없는 가운데, 제국주의적 “민주주의들”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은 혁명가들이 기관장 직위에 입후보하는 것을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것은 정부가 “인민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환상들을 강화할 수 있어서 더 좋다. 혹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빨갱이 소동”의 시기 동안, 1919년 11월 뉴욕 주의회에 자신들의 선거구들에서 정식으로 당선되었던 5명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이 사회당 당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다른 이유도 없이 그들의 의석을 거부당했던 사실이 이것을 증언한다. 민주주의 기구들이 훨씬 더 깨지기 쉽고 대중들이 제국주의적 착취의 채찍을 느끼는 반식민지 국가들에서는, 선거운동들에서 종종 부르주아지 국가와 우익 깡패 세력들과의 격렬한 충돌들이 발생할 수 있다. 당선되더라도 직위를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는 행정기관장직 후보를 위하여 이미 지독하게 착취당하고 탄압당한 노동인민들로부터 시간과 피를 요구하는 것은 조소의 대상이다.

이 모든 것들이 국가의 문제가 혁명적 노동자 당에게는 생사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복무한다. 이것은 혁명의 문제이다. 부르주아지 국가의 행정기관장 직들에 입후보하는 것에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을 채택함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책들과 실천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는 ICL과 맑스주의자들임을 그리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함을 거짓으로 주장하는 모든 기회주의자들 사이의 정치적 큰 간격을 조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우리의 임무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의 장악과 전 세계적인 노동자들의 지배의 수립에 필수적인 재건된 제4 인터내셔널의 지부들인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정당들을 조직하고 훈련하고 벼리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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