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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시스트 56호_트로츠키와 러시아 좌익반대파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

 

비판적 평가서

트로츠키와 러시아 좌익반대파

[스파르타시스트 56호, 2001년 봄]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쇠퇴의 상황들에서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관료화에 반대하여 투쟁했던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를 위한 새로운 강령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전들에 직면했다. 트로츠키가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1936년 저작 배반당한 혁명에서, 악의에 찬 관료라는 암 덩어리의 근원은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들이라는 파괴에 의해 심화된 궁핍"이었다. 외국으로부터의 투자가 짜르 러시아의 도시 중심지들에서 몇몇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공장들을 만들었지만, 그것들은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존재했다. 1918-20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세계대전으로 인한 산업과 기반시설의 파괴를 가중시켰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혁명이 유럽 사회주의 혁명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진 산업 국가의 물질적 도움 없이는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1919-20년 격변의 시기에 이탈리아, 핀란드, 헝가리 그리고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대결에서의 패배는 막 수립된 노동자 국가가 심각한 물질적 궁핍을 보충하기 시작하도록 해줄 도움의 기회를 없앴다.

막 수립된 노동자 국가는 부족한 자원들에 대한 조정자였다. 그러한 자원들의 배치와 관련하여 발생되는 관료주의에 대한 압력이 굉장히 컸는데, 특히 새로운 국가기구의 건설에 고용되어야만 했던 구 짜르 시대의 공무원들, 군 장교들과 기술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중이 컸다. 1921년 자본주의 질서의 부분적 안정화 이후 유럽에서의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망이 줄어들면서, 관료집단은 자신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해 초에 도입되었던 신경제정책(NEP)이 이러한 관료집단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경제를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시장 세력들에 대한 일련의 양보조치들이었던 NEP는 경제활동을 조절하던 기구를 좀먹던 투기꾼들, 소상인들과 부유한 농민들의 층을 창출했다. 1922년 11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위험의 경고를 담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수중에 있는 경제적 권력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확실하게 하기에 분명히 충분하다. 그럼 무엇이 부족한가? 부족한 것은 명백하게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산주의자들 계층 중에서의 문화이다. 만약 우리가 책임있는 직책에 있는 4700명의 공산주의자들을 보유한 모스크바를 예로 든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거대한 관료 기구를 예로 든다면, 그 거대한 기구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한다. 누가 누구를 감독하고 있는가?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거대한 관료기구를 감독하고 있다는 대답을 진실로 들을 수 있을까 매우 의문스럽다. 솔직히 말해서, 공산주의자들은 감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독을 받고 있다."

- 레닌,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보고", 1922년 3월 27일 (전집33권)

볼셰비키 당에 조직화된 소규모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에 대한 막 성장하고 있던 관료주의라는 보수화의 압력에 맞서는 의식적인 정치투쟁이 필요했다. 이러한 정치 투쟁이 있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볼셰비키 당은 거의 항상적인 분파투쟁으로 고통을 겪었다. 사후에 성찰해 볼 수 있는 이점을 가졌던 1935년 트로츠키는 1924년 1월에 개최되었던 13차 당대회에 앞서 1923년 가을에 통합했던 느슨한 반 관료주의 반대파가 분쇄당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혁명적 전위의 수중으로부터 관료집단과 노동계급의 상층부 사이에 있던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에게로의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으며 "1924년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의 시작이었다"고 지적했다 ("노동자 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 1935년 1월, 레온 트로츠키 저작, 1934-35년).

그러나 이 사태의 모든 중요성이 당시에는 심지어 주요한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았으며 인식될 수 없었다. 노동자 국가의 관료화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다. 1923년 반대파가 투쟁했었던 이슈들은 내부의 당권과 소비에트 경제의 보다 급속한 산업화의 필요성에 국한되었다. 혁명적 국제주의의 볼셰비키주의의 계승자로서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스탈린이 이끌던 관료기구의 점증하던 계급협조주의라는 정치투쟁 노선들이 분명해지기까지는, 1926년 영국 총파업뿐만 아니라 1925-27년 2차 중국 혁명의 경험들 등 4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었다. 그 이후에조차, 부하린 우익반대파 분쇄, 러시아 농민에 대한 강제 집산화, 그리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쪽에서의 "제3기" 모험주의 등에서 구체화되었던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스탈린의 전술적 "좌경"화가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으며, 과거 트로츠키 지지자들의 다수를 무장해제 시켰다. 1935년 스탈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마지막 대회였던 7회 대회에서 "인민전선"의 채택과 함께 분명하게 그리고 공식적으로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과의 계급협조의 강령을 채택했다.

이들 전개들을 혁명의 퇴행의 초기 시대 속으로 복창하는 것은 역사적 유물론을 도덕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처음에 트로츠키는 관료집단의 주도권 장악의 심각성과 그것이 어디로 귀결될 것인지를 예견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역사적인 평가는 우리 선조들의 본질적인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고안된 종교적 활동이 아니다. 이런 것보다는 오히려 역사적인 평가는 오늘날 우리의 혁명적 강령을 어떻게 가장 잘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으로서의 유물론적 조사이다. 레닌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잣대를 붕괴하는 짜르 제국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절정에 달했다. 레닌주의는 이러한 1903년부터 1917년까지의 일련의 정치투쟁으로부터 진화했다. 이와 비슷하게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레닌주의의 연속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행의 시대에 그 잣대를 적용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발전되었다. 양쪽 모두 다 그들 시대의 혁명적 맑스주의를 의미하며,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완전히 성장한 채 태어난 아테네와 같이 부여받은 지혜의 집적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 노동자 운동의 지도자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1917년 여름에야 비로소 볼셰비키 당에 합류했었던 날카로운 두뇌를 가졌으나 오만하고 참을성이 없었던 행정가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관료집단에 대한 반대파를 지도하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범상했던 스탈린이 당의 관료 분파의 지도자로서 등장하리라는 것도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스탈린과 그의 도당은 당에 대한 관료적 압박의 초기 전조였던 1920-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레닌의 다수파의 핵심 성원들로서 활동했다. 이후 스탈린은 레닌의 사망 이후가 되어서야, 그리고 그가 형성했던 연합들의 비호 아래에서만 당기구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첫 번째로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다음에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톰스키와 연합을 맺었다.

1929년 스탈린이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를 분쇄한 이후에 조차, 그는 소련 공산당(CPSU) 내에서 계속적으로 불만에 직면했었다. "승리자들의 대회"로 광고가 되었던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 키로프가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스탈린보다 289표를 더 획득하였다. 17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1966명의 대의원들 중 겨우 수십 명만이 총회 이후 1936년에 시작된 대숙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부하린, 그리고 과거 반대파 성원들에 대한 재판 쇼가 1936년에서 38년까지의 숙청들이 스탈린 자신의 분파를 압도적으로 겨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덮어 가릴 수는 없었다. 1939년까지, 스탈린과 그의 소수 지지자 무리가 158만 9천명의 당원들을 가진 당의 꼭대기에 위치했다. 당원 중 70%가 1929년 이후에 당에 합류했다. 소련 공산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당이 아니라 천박하고 변덕스러운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기구의 조직이었다. 단지 레오나드 샤피로나 리차드 파이프스 같은 아둔하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반공산주의자들이나 혹은 스탈린주의가 불가피했다고 믿는 트로츠키의 전기 작가 아이작 도이처 같은 자들만이 이것만이 1920년대의 세계 혁명 투쟁과 볼셰비키 당에서의 정치적 격변의 유일하게 가능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의 경제적 후진성과 고립, 특히 1923년 가을 기대했던 독일 봉기의 실패 이후의 엄청난 낙담이 1920년대 볼셰비키 당 내부에서 투쟁했던 관료주의에 반대하던 세력들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1924년 1월에 관료집단이 당의 통제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르주아지 세계질서의 안정화에 대한 협조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강령으로 일반화하면서 권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리라는 것을 단기적 관점에서 예정하지 않았다. 오직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자만이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노동계급의 권력이 찬탈 당하는 것을 막아내고 소련을 세계 혁명의 기지로서 지켜내기 위한 투쟁에서 있어서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에 걸친 국제공산주의동맹 내부 토론들에서, 우리는1920년대 볼셰비키 당 논쟁들에서, 주로 1923년 반대파에서의 지도적 성원으로서, 이후 좌익반대파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1926-27년 통합반대파의 중심적 성원으로서의 트로츠키의 궤적을 검토했다. 우리의 검토는 많은 부분 패스파인더 출판사의 세권 짜리 1923-29년 트로츠키 저작집 시리즈인 좌익반대파의 도전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저작집은 현재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반대파에 관한 가장 완전한 문서상의 기록이다(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문서고에 있을 것이 분명한 중요한 러시아어 자료를 현재 우리는 확보할 수가 없다). 패스파인더의 중국관련 트로츠키 저작 모음집[Leon Trotsky on China]에 있는 1925-27년 중국에서의 혁명적 투쟁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작들도 역시 중요하다.

트로츠키의 투쟁은 1928년 여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초안 비판"(이후에는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로 더 잘 알려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소비에트 관료주의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혹은 CI)의 실천에 끼치는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해악적 영향에 대한 최초의 방대한 강령적 비판인 "비판"은 1920년대 국제 계급투쟁의 중심적인 교훈들의 정수를 뽑아낸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조와 코민테른의 굴욕적인 지그재그 행보, 특히 2차 중국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 사이의 관련성에 관하여 훌륭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퇴행의 초기 결정적인 시기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대변되는 관료적 위협에 맞서는 철저한 투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망명 직후에 한가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적어도 최초의 국면에서는 나 개인에 대한 무원칙한 음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 투쟁에 돌입하는 것을 피했다. 투쟁이 막상 벌어지면 그러한 투쟁이 불가피하게 극단적으로 격렬한 특징을 가지며, 혁명적 독재의 상황하에서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했다. 매우 개인적인 고백들을 대가로 집단적 작업을 위한 뭔가 공통점들을 유지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가 아니면 공세적인 실천을 위한 충분한 정치적 지점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선을 따라서 공세를 취했어야 했는가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첫 번째 길을 선택했던 것은 사실이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는 승리들이 있고, 새로운 길로 통하는 패배도 있는 법이다."

- 레온 트로츠키, "스탈린의 승리" 1929년 2월 25일(저작집, 1929)

내전으로부터 네프[NEP]로의 이행

러시아 내전 동안에 적군이 제국주의의 지원을 등에 엎은 반혁명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신생 노동자 국가의 거의 모든 최후의 자원까지 동원해야 했다. 1919-20의 겨울이 되어서야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의 상황에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극도로 고통스러운 경제적 모순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혁명이 막다른 곤경에 처했다. 산업은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고 노동계급의 대부분의 선진 부위들은 죽었거나 국가 행정기관으로 흡수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나머지 다수는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잇기 위하여 농촌으로 흩어졌다. 농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곡물 강제 징발 정책 때문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많은 농민들이 단지 자기 가족의 생계에 적당한 정도만 농사를 짓고 있었다. 운송체계는 거의 정지상태였다.

트로츠키는 막다른 곤경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제안했던 첫 번째 볼셰비키 지도자였다. 1919년 12월, 트로츠키는 경제 재건을 위해 인민의 노동을 동원하는 직책을 맡을 전쟁 병참위원회를 제안했다. 그는 이것을 "노동의 군사화"라고 불렀다. 이 계획이 프라우다에 발표되자 격렬한 반대를 일으켰고, 비록 레닌이 트로츠키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볼셰비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총회는 이것을 거부했다. "노동의 군사화"는 다른 모습으로 현실화되었다. 해산된 적군 병사들을 고향으로 수송할 기차가 없었기 때문에, 우랄, 우크라이나, 그리고 남부 러시아에서 군대들이 광범위한 노동 군대들로 변형되어 숲을 개간하고 광산에서 노동하며 다른 필요한 임무들을 수행했다. 1920년 2월 노동 군대들을 시찰하기 위하여 우랄로 갔던 트로츠키는 이것은 결코 볼셰비키의 딜레마에 대한 실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같은 달 트로츠키는 강제 징발을 정부가 농업 생산물의 형태로 징수하는 ("세금의 일종") 세금으로 대체할 것을 중앙위원회에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거부당했다.

몇 달 후 폴란드 군대들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가뜩이나 힘든 상황의 러시아 노동자 국가의 자원에 무거운 짐을 지웠다. 트로츠키가 그 당시 철도 책임자가 되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철도 보수를 위한 계획(이것이 소련에서의 첫 번째 계획의 사용이었다)을 이행했기 때문에, 적군은 폴란드 군대에 반격을 하기 위한 수송 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폴란드는 프랑스가 중심이었던 협상국 열강의 동맹이었다. 폴란드의 패배는 유럽 전역을 불안정하게 했다. 프러시아의 도시 단지크(현재의 그단스크)의 파업 중이었던 항만 노동자들이 폴란드로의 무기 수송을 거부하고 있었고, "실천위원회"가 영국 정부의 전쟁 개입을 막기 위하여 영국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고 있었다.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수립되었던 1차 대전 이후의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반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독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 국가를 유럽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레닌이 이후 1920년 9월에 있었던 러시아 당 9차 대회 보고에서 지적하였듯이, 이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책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정치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알 리차드슨[Al Richardson], '러시아 혁명을 방어하기 위하여' 1995년, 에서 출판됨).

레닌이 "우리의 총검으로 폴란드가 사회혁명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자"고 말했듯이 볼셰비키는 국경을 가로질러 후퇴하는 폴란드를 추격하고,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국가는 대규모 군사공세를 위한 자원이 부족했고, 돌연한 침공이 폴란드에서 민족주의적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통일되고 단호한 볼셰비키 지도부는 초기 민족주의적 반동을 극복할 수 있었고 독일 국경으로까지 밀어 부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과 그의 초기 지지자 보로쉴로프와 부데니 같은 자들이 먼저 트로츠키를 음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군 내에서 도당을 형성했다. 스탈린은 남부 군대들의 선임위원이었다. 명령을 받은 바와 같이 바르샤바로 이동하기는커녕, 스탈린은 투크하첸프스키의 서부 군대가 반격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채 부데니와 에고로프가 남쪽의 리포프로 이동하도록 설득했다. 1920년 8월 적군은 바르샤바로부터 철수했다. 소비에트의 패배는 고립의 시대를 열었다. 이것은 이제 태어난 노동자 국가를 혼자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러시아 혁명의 퇴행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 냈다.

그 해 가을 볼셰비키 당내에서 촉발되었던 노동조합 문제에 대한 논쟁은 당이 처해 있던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의 어려움을 반영했다. 내전 동안에 트로츠키는 레닌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최고 인물로서 전선에서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다양한 지역에서의 저항을 가차없이 극복했다. "군사적 반대"의 입장에 있던 스탈린 도당에 더하여 트로츠키는 또한 지노비에프가 기초하고 있던 당 비밀정보요원들에 대한 지노비에프의 옹호에 맞서 싸워해야만 했다. 노동자 국가에서의 물질적 상황들이 어느 때보다도 비참해지면서,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잔재들을 육체적으로 없애고 정치적으로 소멸시킨 페트로그라드의 지노비에프의 기반은 1919년이 되면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가당, 그리고 노동조합 속의 무정부주의자들의 편에서 반 공산주의적 선동에 굴복하기 시작했었다.

1919년 말 내전이 성공적인 결론으로 귀결되면서, 트로츠키는 점점 자신의 관심을 소비에트 경제의 재건을 위한 노력 쪽으로 돌렸다. 그는 전쟁 시기 군사적 집중의 행정 방책들과 규율을 이제는 평화적 시기 노동조합과 국가의 관계들에 관한 폭넓은 정치적 문제들에 적용하고 일반화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노동조합 기구가 경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국가기구와 합체되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면서 분파적 방식으로 노동조합 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제안의 배경에는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기초적인 노동계급 방어의 조직들은 좋게 말해서 불필요하고 최악의 경우 그가 내전 동안에 투쟁했었던, 퇴행적인 경제적 그리고 관료적 저항을 위한 지렛대들이라는 가정이 있었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그의 동맹자(당시에는 부하린을 포함했다)들에 대한 전력을 다한 투쟁에서 당 다수파를 결집시켰다. 그 결과 트로츠키의 당내 권위가 심대하게 타격을 입었다. 레닌이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반적이었던 구체적인 상황들에서, 노동계급이 동맹을 맺고 있던 다수 농민에 대한 상대자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국가 자신에 의한 실제의 관료적 억압에 맞서기 위하여 노동조합들이 노동계급 방어를 위하여 필요한 조직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옳았다.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 반대파는 이미 당내에서 형성되었었다. 그들의 정강은 "일인" 공장 운영과 많은 노동자들로부터 굉장한 증오의 대상이었던 구 짜르 질서의 잔재들인 고임금을 받던 부르주아지 전문인들의 활용에 반대했다.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자들은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고, 레닌은 그들의 구호와 그들의 존재를 절망적인 경제 상황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제기하던 위험성들에 대한 경고로 인식했다.

1921년 3월에 10차 당대회가 열릴 즈음에, 1년 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곡물에 대한 강제 징발을 일종의 세금으로 대체하는 전시공산주의로부터 후퇴하기 위한, 당의 압도적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았던 결정이 노동조합 논쟁에 뭔가 생각할 여지를 제공했다. 이 후퇴의 결정이 신경제정책의 핵심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에서 나타나던 균열이 이러한 전환을 긴급하게 필요하게 만들었다. 10차 당대회가 열릴 때, 페트로그라드를 보호하고 있던 핵심적인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 수병들의 반란에 의해 러시아 노동자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았다.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라는 수병들의 주장은 그들의 농민 출신성분을 반영했다. 노동조합 논쟁의 과정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자 반대파"(WO)가 또한 당을 내부로부터 위협했다. WO는 국가가 산업에 대한 통제를 노동조합에게 완전히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만약 실행되었다면 노동자 국가의 존립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WO의 정강에 의하여 제기되는 위험성에 관하여 레닌에 동의했으며, 그의 분파 지지자들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던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10차 당대회 동안에 트로츠키의 분파 모임에서 그것이 제안되자, 트로츠키는 열정적으로 그 생각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자신의 분파적 열정을 가졌으며, 막 성장하고 있던 관료에 반대하여 비당 대중들을 보호하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트로츠키가 레닌의 눈에는 성장하던 관료층을 위한 대변인으로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레닌의 두려움들이 당시에는 억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나중에 인식했다:

"소비에트 관료집단은 스탈린을 주저없이 즉시 지도부로 올려놓지 않았다. 1924년까지 스탈린은 인민들 사이에서는 고사하고, 광범위한 당 써클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스탈린은 관료집단 그 자체의 대오 안에서 인기가 없었다. 새로운 지배 계층은 내가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쪽 방향으로 몇 몇 노력들을 했다. 내가 노동자들에 반대되는 그들의 이해를 방어할 의사가 없고 반대로 새로운 귀족들에 맞서서 노동자들의 이해를 방어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관료집단은 스탈린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고,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 불렀다."

트로츠키, "코민테른과 GPU" 1940년 8월 17일 (저작집 1939-40)

트로츠키가 나의 일생(1929년)에서 언급했듯이, 노동조합 논쟁 동안 "스탈린과 지노비에프는 그들의 나에 대한 투쟁의 포문을 열 합법적인 기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포착했다." 그들은 상황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것은 이후 그들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미래 공세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관료의 우두머리"라고 공격했다.

1921년 10차 당대회의 중앙위원회 선거는 노동조합 논쟁에서의 상반된 입장들에 기초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부하린의 테제에 대한 대의원 찬성은 50표였고, 노동자 반대파는 18표, 레닌의 다수파는 336표를 획득했다. 결과는 중앙위원회에서의 중대한 변화였다. 트로츠키에 가깝게 협조했던 크레스틴스키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 직책을 잃었다. 지노비에프가 정치국에 추가되었다. 트로츠키의 노동조합에 관한 입장을 지지했던 프레오브라젠스키와 세레브리아코프 역시 크레스틴스키와 함께 나란히 당 서기국에 있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직위와 중앙위원회로부터 완전히 물러났다. 또 다른 트로츠키 지지자였던 안드리브도 마찬가지였다. 이반 스미르노프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고 모스크바 당 조직 의장직도 잃었다. 많은 스탈린의 동맹자들이 득세했다. 몰로토프가 당서기직의 일원으로 선출되었고,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프룬제, 오르드조니키드제와 보로쉴로프가 모두 처음으로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이후 벌어진 좌익 반대파에 대한 전쟁에서, 스탈린과 그의 도당은 당내 분파 형성을 금지하는 10차 당대회의 결정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어두운 그늘에서 법제화되었던 분파형성 금지는 레닌이 당시 말했던 것처럼 일시적인 차이들이 노동자 국가에 위험을 끼치는 방식으로 강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방책을 의미했다. 10차 당대회가 러시아 당에서 분파를 형성하여 진행되던 논쟁이 민주적인 결의로 마감되었던 마지막 대회였다. 이미 상당했던 관료집단의 과잉에 대하여 의식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회는 당의 출세주의적 인자들을 숙청할 것을 결정했고, 다음 해에 당원수가 65만 명에서 50만 미만으로 24% 감소했다(E.H Carr, 볼셰비키 혁명 1917-1923, 2권). 1922년 4월의 다음 당대회가 스탈린을 총서기로 지명한 것은 당내에서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효과적인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총서기로서의 스탈린

스탈린은 레닌주의 당 다수파의 핵심 성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의 퇴행의 시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은 스탈린을 10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하자는 지노비에프의 제안을 거부할 만큼 충분히 스탈린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 요리사는 맛없는 요리만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레닌은 다음 해 스탈린 지명을 수용했다. 11차 당대회가 끝난 2달 후인 1922년 5월말에 레닌은 마비증세로 그 해 10월까지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레닌의 강력한 영향력이 없어진 틈을 타서 스탈린은 자신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했다. 1922년 여름 일련의 서기국이 발표한 포고들을 통하여 선출되는 지역 당 조직들에 대한 광범위한 권리를 가지는 중앙위원회 "지도원" 기구를 만들었다. 서기국이 주단위와 심지어 지역 당 서기들을 "추천"(다시 말해 지명)하기 시작했다. 보다 중요하게, 스탈린은 당 기관원들의 물질적 특권들을 많이 늘려주었다. 당 관료들에 대한 엄격한 임금 차등제가 설립되었다. 지역 세포 서기의 최저임금이 당시 산업직 평균 임금의 3배인 30루블로 책정되었다. 일련의 포고들을 통하여, 당 사무원들을 위한 특별 보너스들과 재화 배급제가 만들어졌고, 당 사무원들만을 위한 일련의 새로운 별장과 휴양 주택이 건설되었다(A.M. Podshchekoldin "Sur la voie du 'pouvoir exhorhitant' on les debuts du stalinisme" [과도한 권력으로: 스탈린주의의 기원], Cahiers Leon Trotsky No. 44 1990년 12월). 스탈린은 비록 여전히 감추어져 있었지만, 당 관료집단의 방어자와 부양자로서의 정교한 의식을 보여주었다.

레닌의 트로츠키와의 관계는 노동조합 논쟁으로 인하여 심대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10차 당대회 이후 겨우 3개월 만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1921년 6월-7월에 열렸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대회쯤 지노비에프, 부하린, 그리고 라데크에 맞서는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지노비에프 등은 모험주의적 "3월 행동"으로 독일 당에 참상을 야기했던 헝가리 공산주의자 벨라 쿤의 바보 같은 "공세이론"을 방어하기 위하여 러시아 당의 명성을 활용하려고 애썼다("볼셰비키주의를 재무장하며-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판").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이번 직접적인 협조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1922년 가을에 다시 부분적인 정치활동으로 복귀했을 때, 레닌은 트로츠키와의 근본적인 정치적 동질성을 발견했다. 레닌은 성장하는 관료층의 압력들이 러시아 정치국 내부에서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스탈린 등이 밀어 부쳤던 외국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획에서 전율을 느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 계획에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협조했다. 이 승리의 결과로, 다시 일련의 마비증세를 앓았던 레닌은 스탈린을 총서기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유명한 "유언장"과 유언장의 부록을 1922년과 1923년 초에 구술시켰다. 레닌은 또한 당과 국가에 있는 관료주의와 싸우기 위한 계획들을 포함하는 일련의 글들을 구술시켰다. 정치국은 트로츠키의 찬성과는 반대로 레닌의 글 "작아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Better Fewer But Better"]의 출판에 저항했는데, 이 글은 스탈린이 직전까지 수장을 맡았던 노동자 농민 사찰국의 획일주의와 비효율성을 공격했다. 1923년 3월, 스탈린과 그의 정치적 협조자들이 대러시아 배외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폭력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코카서스의 비러시아 민족들과 관련하여 압제적인 중앙집중주의적 방식으로 활동해오고 있었다는 혐의들을 확인한 레닌은 다가오는 12차 당대회에서, 그의 비서들 중의 한 명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에 "폭탄"을 퍼부을 준비를 하면서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을 것을 결심했다. 불행하게도, 대회가 열리기 직전 레닌은 또 한번의 마비증세로 심각하게 쇠약해졌다. 그의 남은 인생 동안 레닌은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12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의 실패

트로츠키가 아니라 레닌이 1922년 후반과 1923년 초에 스탈린, 정치국 다수파와의 일련의 중요하지만 짧게 끝난 분쟁들로부터 명확한 실천적인 결론들을 도출한 것은 특징적인 것이었다.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이 종종 언급했듯이, 그의 경험적인 정치적 실천이 종종 완전한 이론적 이해에 앞섰다는 것은 혁명적 정치인으로서 레닌의 힘의 일부였다. 그렇게 해서 협소한 조직에 관한 문제(당원의 정의)에서 1903년 멘셰비키와의 분리가 발생했고, 이것은 1905년 혁명에서 드러난 부르주아지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서의 깊은 정치적 차이를 예고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부가 부르주아지 질서의 사회 배외주의적 방어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서야, 레닌은 마침내 개량주의의 물질적 기초에 관한 이론적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의 1916년 저작 제국주의에서 레닌은 최초로 식민지 세계로부터 짜내는 엄청난 초과이윤이 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노동귀족의 상층부에 뇌물을 줄"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스파르타시스트의 팜플렛 레닌과 전위정당을 보시오.)

반대로, 트로츠키는 그의 이론적 이해에 앞서서 실천하는 경향이 없었다. 1917년이 될 때까지, 러시아사회민주주의에서의 그의 경험은 1912년 완전한 분리에 이어 볼셰비키 당이 되었던 볼셰비키 분파의 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비록 그가 재빨리 멘셰비키들과 갈라섰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1903년 그들과 함께 있었다. 1905년 혁명에서 트로츠키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의 경험이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 정당들에 대한 그의 비타협적인 반대라는 측면에서 멘셰비키보다 볼셰비키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 1908년에서 1912년까지, 멘셰비키는 러시아에 비합법 당조직의 수립에 반대했다. 1912년 1월 프라하 대회에서 "친당" 멘셰비키들 부위와 함께 레닌은 볼셰비키 당을 창설했다. 그 해 후반기에 트로츠키는 혁명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이라는 이들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경향들을 화해시키기를 희망하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통합 대회를 요구했다. 레닌은 강력하게 이런 생각을 거부했고,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에 맞서는 사실상의 연합("8월 연합")으로 멘셰비키에 의해 지배되었던 대회에 참석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트로츠키가 혁명주의자들이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1917년, 레닌의 "4월 테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가 사회주의 강령을 기초로 한 권력의 장악으로 농민을 지도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 자신과 레닌 사이에 근본적인 동의를 나타낸 이후에야 비로소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로 완전히 넘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1905년 혁명의 전야에 그가 처음으로 영구혁명의 이론을 정립한 이래로 트로츠키의 전망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권력의 장악으로 당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투쟁을 자기 자신의 당내에서 전개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일부 볼셰비키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당의 과거 공식을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위한 이론적 변명으로서 사용했다.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온 직후인 1917년 5월에 트로츠키가 러시아로 돌아왔고, 그의 지구간 조직("메쯔라이온카")는 볼셰비키와 협력하여 활동했으며 7월에 당과 통합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서 상대적으로 신참이었다는 것이 그가 다양한 당 지도자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분리선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또한 레닌의 당내 분파적 경험, 그리고 볼셰비키 경향의 지도부를 단련시키기 위한 수 년 동안의 투쟁으로부터 생겨났던 레닌의 압도적인 정치적 권위가 그에게는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23년 봄이 되면서 트로츠키는 자신이 당 지도부를 맡는 것을 막아내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러시아 지도부 내의 비밀스러운 "삼자동맹"을 스탈린이 카메네프, 지노비에프와 함께 맺었다는 것을 알았다. 트로츠키는 삼자동맹의 뒤에 스탈린에 의해 통제되던 이제 막 자기 의식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성장하고 있던 당 관료가 있었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이것을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파벌적 음모로 바라보았다. 레닌은 스탈린이 당대회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썩은 절충을 하고 나서 속이"려고 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레닌이 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트로츠키의 주요한 근심은 지도부 내에서의 분열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12차 당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카메네프가 제안한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민족문제와 소비에트 경제의 산업화의 속도를 높일 것 등의 핵심 주제들에 관한 트로츠키의 결의안들이 당대회에서 수용되었고, 스탈린은 총서기로서 자신의 직책을 유지했다.

트로츠키가 공세로 나가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들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트로츠키가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권력을 탐하고 있다고 하는 삼자동맹이 퍼뜨린 소문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애써다. 삼자동맹은 트로츠키가 1922년 4월 초, 스탈린이 총서기로 임명되고 나서 단지 2주 후, 레닌이 자신에게 반복해서 맡기를 권했던 소비에트 정부의 부의장 자리를 거부할 만큼 "거만했다"는 것을 교묘히 활용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여전히 러시아 시골지역에 깊은 반 유대정서가 있는 조건에서 그의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노동자 국가에 짐이 될 것이라고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1917년 트로츠키가 국내부문 최고책임자 직위를 거절했던 핵심 이유였었고, 1922년에도 여전히 이런 것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레닌이 내가 인민위원 평의회(단 한명의 부의장)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나는 유대인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하는 핑계를 확증해 줄 이유를 적들에게 만들어주지 않기 위하여, 똑같은 이유들로 단호히 거절했다."

트로츠키,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전원출석회의 종결연설 요약" 1923년 10월 26일, V. Vilkova가 편집한 권력을 향한 투쟁:1923년 러시아(1996년)에서 출판됨

러시아 당 내에서의 다가오는 투쟁의 전후 관계에서, 트로츠키가 만약 레닌의 부의장 직을 취했더라면 그는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근심에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 동안에, 스탈린은 짜르주의의 유산인 사악한 대 러시아적 편견들에 여전히 감염되어 있던 후진적 인자들에게 비열하게 호소하면서 반유대적 빈정거림을 최대한 활용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내가 만약 12차 당대회의 전야에 스탈린 관료집단에 반대하는 '레닌과 트로츠키 연합'의 마음을 먹고 나갔더라면, 나는 레닌이 투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승리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그러한 승리가 얼마나 공고한 것이 될 것인가는 별도의 문제이다."(나의 일생)라고 썼다. 그러나 스탈린에 대한 일시적 승리는 독일이 거의 항상적인 혁명적 격변에 있었던 결정적인 해였던 1923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사실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줄 어느정도의 시간을 벌어주었을 것이다독일에서 노동자들의 승리는 소련에서의 관료주의를 위한 기초를 산산조각 냈을 것이다.

스탈린이 여전히 당기구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문제와 경제에 관하여 12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가 끌어냈던 명백한 정치적 합의는 어쨌든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었다. 당대회 직후, 관료는 계속해서 국가 계획국(Gosplan)의 강화와 산업화 강령을 시작하는 것을 주저했다. 이렇게 해서, 농민이 자신들의 곡물을 파는 가격과 농민들이 공산품을 살수 있는 가격 사이의 급격하게 커지는 차이에 대하여 트로츠키가 "가위들의 위기"라고 이름 붙였던 구조상의 문제들이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한편, 삼자동맹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중핵들을 핵심 직위에 임명하고 트로츠키의 동맹자들을 핵심 직위들로부터 제거하면서 당과 국가기구를 계속해서 바꾸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레닌이 회복되기를 희망했고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소련을 돕게 되기를 기대했다.

코민테른과 1923년 독일에서의 패배

그러나 관료라는 암 덩어리는 소비에트 당과 국가만을 감염시킨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중핵들까지 감염시켰다. 코민테른의 국가 지부의 많은 지도부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개량주의적 방어자들로부터 이탈했었는데, 이것은 1919-20년 혁명적 격변 속에서 자기 당원들로부터의 엄청난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인자들을 일련의 출세주의자, 모험주의자, 그리고 기회주의자들로부터 구분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개량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에 관한 볼셰비키의 경험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을 다양한 다른 국가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정치적 차별화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성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들의 점증하던 보수주의가 많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국가 지부들의 지도부들에게서 지속적으로 현상하던 기회주의적 충동들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에 대한 이전의 깊숙한 개입으로부터 레닌을 물러나게 강제했던 1922년 봄의 첫 번째 마비증세 이후에, 이러한 경향은 변덕스러운 지노비에프의 중도적이고 관료적인 경향들을 바로잡을 균형추를 실질적으로 제거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이번 스파르타시스트 판에 같이 실려 있는 기사[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판]에서 다루고 있듯이, 레닌의 철수의 영향은 특히독일 공산당(KPD)에게 심대했다. 1922년에, 코민테른은 독일 지방의회에서의 사회민주주당이 주도하는 연합정부를 독일공산당이 지지하는 것을 승인했다. 자기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자본가 국가의 타도로 지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독립적인 기관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독일공산당은 부르주아지 의회에서의 책략을 통하여 사회민주주당을 좌 쪽으로 "압박"하려고 했다.

1922년 11월-12월에 개최되었던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던 "노동자 정부"에 관한 테제들은 부르주아지 국가기구에 기초한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정부를 "노동자 정부"로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산당이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정의하려고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대회는 프랑스 군대가 베르사이유 조약 상의 전쟁채무 변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1923년 1월 루르를 침공했을 때 시작되었던 혁명적 기회를 활용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던, 기회주의적 의회주의적 크레틴 병의 늪에 빠져 있던 하인리히 브란들러 하에 독일공산당 지도부를 버려두었다.

1923년 초, 러시아 당 지도부 전체의 관심은 바깥, 즉 독일로 향했던 것이 아니라, 내부 즉 당 지도부 내에서 점증하던 불화와 4월의 12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에 의한 공개적인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향해 쏠려 있었다. 심지어 타협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대부분의 러시아 지도부의 관심은 국내 문제에 있었다. 초여름 트로츠키와 정치국의 몇몇 다른 회원들은 모스크바를 떠나 통상적인 휴가를 떠났다. 8월이 되어서야 트로츠키는 혁명적 정세가 독일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이후에 인정했듯이, 이 때는 매우 늦었다. 러시아 당 지도부와 코민테른을 실천으로 밀어붙이면서, 트로츠키는 독일 봉기의 날을 잡을 것을 주장했다. 스탈린의 관점은 비록 독일당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자동맹은 독일에서 혁명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을 거의 감당할 수가 없었고, 그들은 한편으로 트로츠키가 도움을 주기 위하여 독일로 가야한다는 브란들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바에 동의했다.

그러나 봉기 날짜를 정할 것에 대한 트로츠키의 강조는 사회민주당에 압력을 가하자는 브란들러 지도부의 정책들과 3자 동맹의 동요 양쪽 모두에 의해 대변되던 정치적 장애들을 무시했던 행정적인 방책이었다. 브란들러의 기회주의적 전략을 밝혀내고 투쟁하는데 실패하면서, 트로츠키는 색소니와 튜링지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준비시키는 "연병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0월에 두 지역의 SPD 정부에 대한 KPD의 참여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 정부에 대한 KPD의 참여는 SPD가 총파업 호소에 함께 하기를 거부하자 브란들러가 봉기를 취소했던 사태의 서곡이었다. 1923년 가을 독일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작들은 트로츠키가 "활동의 순전히 행정적인 측면에 대한 과도 몰두"를 보여준다고 했던 레닌의 유언장에서의 비판들에 완전한 설득력을 제공한다.

13차 당대회

1923년 가을에, 가위들의 위기가 깊어지고 중공업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거의 없는 가운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상황 그 자체가 위기 국면에 도달하고 있었다. 예상되었던 독일 봉기의 전야에, 경제파업과 불만의 거대한 파도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휩쓸었다. 1923년 10월 8일에 트로츠키가 산업계획과 관련된 긴급한 문제에 대한 실천과 당내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시작을 중앙위원회에 요구하는 문서를 쓰면서,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성장하던 관료주의에 대하여 포문을 열었던 것이 이러한 정세에서였다. 46명의 지도적 당원들이 그들이 특정해서 부르기를 당내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관료적 정권을 겨냥하고 있는 똑같은 일반적 노선에 따른 선언에 곧 서명했다. 3자 동맹은 10월 25일-27일 열렸던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전원참석 합동회의에서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상비방하고 헐뜯고 고립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공세로 대응했다. (이 기간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문서고로부터 출판된 원본 문서들: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배신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 1997년 여름 스파르타시스트 53호를 보시오.)

그러나 3자 동맹이 11월 7일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내부논쟁을 공개해야 할 정도로 반(反)트로츠키 공세에 반대하는 당내 정서가 강했다. 프라우다의 발행부수가 2배가 되었고, 저널란에서 보여진 당 정권에 대한 분출하는 반대에 3자 동맹은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와 폴란드 당들이 반트로츠키 공세에 반대한 항의가 3자 동맹을 더욱 두려움에 떨게 했다. 트로츠키는 자신과의 "합의"에 이르고자 하던 3자 동맹의 긴급한 시도들을 다시 한번 수용했다. 스탈린, 카메네프와 함께 트로츠키는 경제에 대하여 12차 당대회 결의들을 수행할 것과 당내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방침"를 입안 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을 작성했다. 정치국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던 결의안은 또 하나의 공허한 종이뿐인 합의였다. 중앙위원회의 위선적인 공개적인 "통일"은 다가오는 13차 당협의회의 당 대의원 확보투쟁에서 보여진 정치적 혼탁에만 복무했다. (당시 볼셰비키 당은 두 가지 종류의 대의원 회의를 개최했다. 공식적인 당대회[congress]와 보다 비공식적인 당협의회 [conference].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들 번갈아 열리는 각각의 모임들이 1년에 한번씩 열리는 것이 규범이었다.) 3자 동맹은 프라우다의 "당 생활"란의 편집자들을 바꾸면서, 12월 중순에 반격을 개시하기에 충분할 정도가 되었다고 느꼈다. 12월 말에, 저널란은 효과적으로 영원히 반대파의 관점들에 대하여 닫혔다.

기진맥진한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일의 사태를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고, 당과 적군의 모든 자원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원조하기 위한 준비를 위하여 동원되었다. 브란들러는 10월 21일 굴욕적으로 봉기를 취소했는데, 이것은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절망적인 고립을 끝내주고, 소비에트 공화국의 혁명적 방침을 다시 한번 확증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사기저하의 파도가 소비에트 노동계급을 휩쓸었고, 이것이 응집되고 있던 관료계층의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 전망을 표현하던 3자 동맹을 강화시켰다. 반대파는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당 조직에서 25-30%의 득표를 했다. 반대파에 대한 지지는 특히 적군과 청년 조직들에서 강했다. 3자 동맹은 이러한 현상을 끝내기 위하여 청년조직의 중앙위원회를 해산했다. 13차 당대회가 1924년 1월 개최되었을 때, 반대파가 전체 128명 중에서 3명의 대의원들만 확보했을 정도로 선출과정이 조작되었다. 이 대회에서 3자 동맹의 승리는 관료계층이 정치권력을 소비에트 노동계급으로부터 장악했던 결정적인 지점을 의미했다. 그때 이후, 소련을 지배했던 사람들, 소련이 지배되는 방식, 그리고 소련이 어떤 목적을 위해 지배되고 있는가가 모두 변했다.

몇 일 후에 있었던 레닌의 사망이 상승하던 관료계층에게 있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적을 제거해 주었다. 3자 동맹은 냉소적으로 "레닌을 위한 당원모집"을 시작하여, 당원수가(정당원과 후보당원을 포함해서) 1924년 47만 2천명에서 시작하여 1926년 초가 되면서 107만 8182명이 되었다(E.H. Carr,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1924-1926, 2권). 이것은 역사적으로 단련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를 희석시키면서 야심에 찬 출세주의자들에게 수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1923년 반대파의 강령은 경제계획과 소비에트 산업화의 속도를 높일 것에 대한 요구와 결합된 당과 국가기구의 반관료주의적 개혁의 강령이었다. 국제주의적 원칙들과 10월 혁명의 강령과 관련해서, 코민테른의 강령에 관해서는 볼셰비키 당 내부에서 여전히 상당한 합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트로츠키는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잘못된 활용에서 성문화되었듯이, 독일패배의 근원이 좌익 사회민주당에 압력을 행사하는 기회주의적 전략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브란들러가 기회주의적 방침을 입안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코민테른 지도부의 역할을 깨닫지도 못했다. 독일사태는 1923년 반대파의 투쟁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당시에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당내의 관료주의의 질병이 이미 혁명적 강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활동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문의 고열의 재발로 고통을 겪던 트로츠키는 병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떠나 코카서스로 떠났다. 그는 독일 사태를 평가했던 13차 대회나 1924년 1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패배의 중대함을 덮어 가리려고 하는 지노비에프의 시도가 모험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멀리서 근심하면서, 트로츠키는 ECCI 회의를 위하여 라데크가 작성했던 혼란스러운 테제들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에 동의했는데, 이 행동을 그는 나중에 실수했던 것으로 바라보았다. 스탈린은 레닌의 장례식 때문에 트로츠키가 모스크바로 확실하게 돌아오지 못하도록 책략을 썼고, 이것이 나중에는 트로츠키에 불리하게 활용되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방침" 논쟁에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던 13차 당대회를 위하여 5월에야 돌아왔다. 어떠한 분파적 활동도 당대회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1923년 반대파가 공식적인 조직적 의미에서 해산하도록 했다. 트로츠키는 크리스찬 라코프스키, 칼 라데크, 에드게니 프레브라젠스키, 유리 피야타코프, 그리고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젠코를 포함하는 가까운 지지자들을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만났다.

"학구적 토론"

1924년 초기 몇 달 동안 내내, 트로츠키는 독일패배의 원인들을 분석하려고 애썼다(1923년 독일과 코민테른에 대한 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비판). 5월에, 자신의 저작들에 대한 한 서문에서, 트로츠키는 KPD의 무능력의 높은 위험성과 결과를 강조했다:

"여기, 그냥 지나가 버리도록 내버려 둔 혁명적 정세의 진정으로 고전적인 예가 있다. 루르 점령의 순간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동적인 저항의 파산이 명백해졌을 때에 더욱 그러한데, 공산당이 권력장악을 향한 굳건하고 단호한 방침을 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오로지 용감무쌍한 전술적 전환만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단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10월 한 달 동안, 당의 정책에서의 날카로운 분절이 있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 트로츠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첫 5에 대한 서문

1924년 6월, 트로츠키는 "지금이 권력장악을 위한 즉각적인 준비가 문제가 되는 시기라는 것을 대중들과 무엇보다도 모든 당 그 자신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봉기를 위한 날짜를 정하는 것의 문제는 오직 이러한 관련과 이러한 전망 속에서만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 "우리는 어떤 국면을 통과하고 있는가?", 1924년 6월 21일,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25)

독일 당의 실패와 1917년 볼셰비키 자신의 경험을 대비시킬 긴급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1917년 저작집의 출판을 제의받았을 때, 이 주제에 관하여 강렬한 서문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9월에 출판된 10월의 교훈들은 스탈린과 같이 부르주아지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위한 위장막으로 이미 시대에 뒤쳐진 공식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활용했던 자들에 맞서서 1917년 4월에 시작하여 그 해 내내 러시아 당을 재무장하고 당의 방침을 바꾸기 위해 레닌이 수행했던 투쟁을 상세하고 다루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어떻게 10월 봉기에 반대했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레닌의 계승자로 자신들을 표현하려는 그들의 시도들에 대한 암시적인 도전이었다.

3자 동맹에 의해 개시된 엄청난 반격이 어울리지 않게도 "학구적 토론"으로 당 연보에 기록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진 이야기로 소위 "트로츠키주의"를 발명해내면서, 3자동맹은 당의 소위 "고참 수호자"들의 구성원들로서 그들이 방어한다고 주장하던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에 대치시켰는데,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 대한 스탈린 유파의 거대한 왜곡으로 귀결되었던 과정의 시작이었다.

주요한 공격의 목표는 1905년 전에 제기했고, 그 후 1906년에 출판되었던 결과들과 전망들에서 보다 완전하게 설명되었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이론이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은 짜르 귀족과 외국의 제국주의 투자자들과 서로 완전히 뒤엉켜있고, 농민과 도시 소 부르주아지 계급은 역사 속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산업화가 적지만 강력하고 집중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러시아에서 창조했음을 말하면서,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성공적인 혁명은 "농민의 지지를 확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 하에 소집되는 국가의 대표기관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민주주의의 단지 외관이 되는"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임을 제기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이 유럽에서는 역사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들과 관련된 임무들인 정치적 전제와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이라는 족쇄들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또한 경제에 대한 집산주의적 재건설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을 유럽 사회주의 혁명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오로지 혁명을 유럽의 제국주의 중심지들로 확대하는 것으로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완전히 승리할 수 있었다.

1917년 혁명의 실제 경로가 트로츠키의 예측을 완전하게 확증하면서, 영구혁명은 이론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과들과 전망들의 1906년 첫째 판은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 혁명적 러시아가 독서계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이 저작은 1919년에 모스크바에서 다시 출판되었고, 아이작 도이처에 따르면 레닌은 트로츠키의 저작을 처음으로 읽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1921년에 영어번역판을 출판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의 경로를 올바르게 설명했었다는 사실은 볼셰비키 당과 코민테른의 강령적 선언들에 결코 성문화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에 대한 레닌의 1917년 4월 거부도 결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어떠한 혁명에 대한 표준적인 역사도 쓰여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경험에 관한 면밀한 연구는 세계의 신생 공산당들의 재무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 자신의 방침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3자 동맹은 볼셰비키의 실패들만을 활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1924년이 되자, 당원의 다수가 혁명 이전의 논쟁들에 관한 직접적인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17년 초부터 당원이었던 비율이 1% 미만이었다.

1920년대 초반 자본주의 발달이 뒤늦은 다른 국가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러시아의 경험이 자동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를 전자본주의적 제국의 틀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제국주의 체인의 가장 약한 고리였는데, 이것은 아시아의 보다 후진적인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들과 반드시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볼셰비키는 식민지들에서 국내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운동들을 기대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들이 식민지 세계를 그들의 자취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보고에서, 레닌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적절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을 받아 후진국들이 소비에트 시스템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특정한 발전단계를 거쳐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로 갈 수 있다는 명제를 제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전집31권). 코민테른의 관심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산당들이 자기 자신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맞서 내부로부터 투쟁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는 유럽의 자본주의 질서가 일시적으로 재안정화되었음을 인정했다. 동양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에 대한 재평가가 요구되었던 것은 이러한 기초 위에서 였다. 1차 대전 중의 세계무역 중단은 인도와 중국에서 산업의 발전을 의미했고,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나라에서도 시골 지방의 반봉건적인 농경적 관계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작지만 집중되어 있는 도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이 있었음을 의미했다. 지역 부르주아지 계급들은 지주들과 제국주의 대군주와 완전히 뒤섞여 있었다. 빈틈없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코민테른 지도부라면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른 나라, 세계에서 새롭게 산업화되는 지역들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곧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자 동맹의 악의에 찬 영구혁명에 반대하는 공세가 이러한 필수적인 재평가를 막았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로 불리는 별개의 이론이 완전한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근심하던 트로츠키는 3자 동맹의 공격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수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트로츠키는 "나는, 어떤 경우에도, 레닌 혹은 볼셰비키 당이 자신들의 오류를 깨닫고 나서 혁명에 관한 '나의' 공식으로 넘어왔다고 하는 것이 나의 의견이라는 주장을 완전한 웃음거리로서 거부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1906년 저작을 간접적으로 부인했다("우리의 차이들", 1924년 11월에 쓰여졌으나 결코 출판되지 않았던 문서로서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금지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함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25]). 그 시대의 트로츠키의 유일한 공개적인 선언인 1925년 1월 15일에 쓰여진 혁명적 군사위원회 의장직 사임을 제출하는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은 "완전히 과거에 관하여" 적용되고 "현재의 정치적 임무들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관련도 없"다고 썼다.

"학구적 논쟁"의 와중에, 스탈린이 먼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관한 그의 이론을 1924년 12월 이즈베스티아 기사에 "10월과 트로츠키 동지의 영구혁명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제시했다. 스탈린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완전한 수정주의적 사상을 영구혁명에 대치시키는 것은 트로츠키 자신의 정치적 기록 이상의 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어야 했다. 스탈린은 암묵적으로 소련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한 헌신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년 반보다 더 후에 통합반대파의 조직화와 함께서야 비로소 트로츠키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개인적으로 스탈린의 새로운 교조에 반대하여 거침없이 발언했던 것은 1926년 11월의 15차 당협의회에서였다.

트로츠키의 수세적 입장은 10월의 교훈들이 3자 동맹에게 반트로츠키 공세를 다시 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전술적 오류였다는 그 저작을 보았던 그의 1923년의 일부 사상적 동지들의 반응을 의심의 여지없이 반영했다. 트로츠키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어떤 경우에든 "학구적 토론"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왜곡의 스탈린 유파[1937년]의 "'트로츠키주의' 전설의 기원과 관련한 몇 가지 문서들"을 보시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단순히 경제자립을 합리화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경제발전의 속도를 설정해야 하는 것은 사적 농민 시장이라고 주장했다. 이 정책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자는 주변에 "붉은 교수들의 그룹"과 다른 우익 인자들이 포진해 있던 부하린이었다. 트로츠키가 "농민을 평가절하 했다"고 하는 반복적인 비난들은 1923년 반대파에 반대하여 소비에트 인민들 중의 가장 후진적이고 잠재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인자들에 호소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적군의 수장에서 사임한 이후 4개월 동안 소비에트 국가에서 어떠한 직책도 없었다. 부패한 노동당의 개량주의에 대한 통렬한 논박인 "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썼던 때가 이 시기 동안이었다. 영국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대표단이 1924년 11월에 러시아를 방문했었는데, 우호적인 보고를 작성했다. 트로츠키가 자신의 팜플렛을 완성했을 때, 러시아 노동조합 지도자 톰스키가 영국을 답방하고 있었다. 5월 14일 영국과 러시아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우호조직인 영러 노동조합 통합위원회(ARC)가 출범했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영국 총평의회의 좌익화와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 대오 속으로의 공산주의의 점진적으로 고통이 없는 침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국의 공식적인 생각에 대한 반대를 본질적으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썼다(나의 일생). 트로츠키의 논박은 저작의 출판 전에 저작을 허용하던 정치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에, 그는 국가경제 최고 평의회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직위에서의 그의 모든 저작들은 특히 1925년 9월 프라우다에 시리즈로 나왔던 "자본주의를 향하여 아니면 사회주의를 향하여?"는 소련이 정치, 경제 두 방면 모두에서 세계 제국주의와의 생사를 건 투쟁 속에 있음을 강조했다. "누가 누구를 앞지르는가?"라는 레닌이 NEP와 관련하여 제기했던 문제를 반복하면서, 트로츠키는 세계시장에서 교역하면서, 그리고 가능한 곳에서 선진화된 산업 기계장치를 확보하면서 소련이 경제발전의 속도를 크게 가속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단지 스탈린과 결별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조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있던 때에 수행되었던 그 교조에 반대하는 암묵적인 논박이었다.

3자 동맹의 분열

"학구적 토론" 동안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반트로츠키주의에 있어서 스탈린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예를 들면, 그들은 트로츠키가 정치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1924년의 대부분과 1925년 초에, 지노비에프는 스탈린이 2류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투쟁했다. 스탈린은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의 파트너들이 주된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정치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런 종류의 교활한 책략에 능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대함"을 같은 해 나중에 활용하고자 했다.

1984년 한 독자로부터의 편지에 대한 장문의 답변에서, 노동자 전위는 3자 동맹이 1924년 5월 13차 당대회에서 분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다("트로츠키는 1924년에 지노비에프와 연합을 맺었어야 했는가?", 노동자 전위369호, 1984년 12월 21일). 같은 기사는 트로츠키가 당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연합을 맺지 않은 것에 대하여 트로츠키를 비판했다. 1924년에 연합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3자 동맹의 인물들은 13차 당대회에서 통일된 외관을 대표했다. 스탈린은 여전히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필요했다. 그룹스카야의 주장에 따라 레닌의 유언장은 대회가 열리기 직전 고참 당 지도자들의 회합에서 읽혀졌다. 주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의 사례를 변호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회합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레닌의 유언장은 대회 전체에서는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1925년 4월, 14차 당협의회 즈음이 되어서야 3자 동맹에서의 커져가는 불화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으려고 하던 스탈린의 시도에 반대했다. 3자 동맹의 불화가 공공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최종 협의회 결의안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모호했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이 커지고 있는 균열음을 듣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뒤이은 달에 트로츠키가 국가경제 최고 평의회에 지명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유익한 활동을 하게 해 줌과 동시에 협조의 가능성을 농후하게 보여주었다.

14차 당협의회는 사적 농경과 상행위 영역의 확대, 토지의 대여에 대한 제한들의 철폐, 노동의 고용 등 일련의 조치들을 채택했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하린이 예견했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25년 추수는 굉장히 좋았으나, 국가에 팔린 곡물의 양은 훨씬 뒤 처졌다. 쿨락들과 중간계층의 농민들이 그들의 곡물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겨울과 봄을 나면서 곡물이 귀해지면서 가격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수입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다. 트로츠키는 오래 동안 스미츠카가 농민에게 적정한 가격에 팔 공산품의 부족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시미츠카의 기초는 값싼 쟁기와 못, 값싼 천, 그리고 값싼 성냥들이다"(새로운 방침[1923]). 그러나 산업화의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쿨락들에 세금을 부과하기보다는, 부하린은 "스스로 부자가 되"라고 쿨락에게 권하는 그의 유명한 슬로건을 제출하면서 또 다시 양보할 것을 주창했다. 1925년 여름에 3자 동맹 내부에서 이 주제에 관하여 공공연한 분열이 나타났다.

지노비에프는 강력한 친 쿨락 정책의 주창자였으나 그의 기반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중이 큰 레닌그라드 당 기관이었고 이들은 부유한 농민들에 대한 양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비슷하게, 카메네프의 기반은 모스크바 당이었다. 부하린의 신(新) 나로드니키적 농경주의에 상충되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있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프롤레타리아트적 기반 사이의 이해의 충돌이 3자 동맹을 명백하게 불안정한 동맹으로 만들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공개적으로 계속되는 쿨락들에 대한 양보들에 관하여 부하린을 공격했다. 스스로가 레닌의 후계자임을 주장하기 위해 계획되어 1925년 여름에 출판된 지노비에프의 논문, 레닌주의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사상을 비판했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그리고 그룹스카야에 의해 제출된 "4인 선언"은 1925년 말로 소집되어 있던 14차 당대회 전에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 기간을 요구했다.

3자 동맹 내부에서의 불화는 무엇보다도 관료적 권력투쟁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강령적 주제들이 논쟁으로 인입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게로 접근하지 않았다. 7월에 트로츠키는 그의 미국인 친구이자 반대파 지지자인 막스 이스트만에 의해 막 출판되었던 레닌 사망 이후를 거부하는 성명에 서명할 것에 대한 스탈린의 요구에 응했다. 이스트만의 책은 레닌의 유언장과 당내 투쟁에 관한 진실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소비에트 대사였던 트로츠키의 사상적 동지 크리스찬 라코프스키는 책이 출판되기 전에 사본을 읽었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성명에 대한 서명 결정은 1923년 반대파의 지도적 그룹 사이에서 일치된 의견이었는데, 그들은 "당시는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시작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몇 가지 양보들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고 썼다("막스 이스트만: 10월 혁명의 친구", 1928년 9월 11일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8-29]). 그러나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의 분리를 예상하면서 스탈린은 이스트만의 폭로들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했음에 틀림없다. 트로츠키의 거부는 단지 1923년 반대파를 약화시키고 국제적으로 반대파의 지지자들을 무장해제 시켰을 뿐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이후 반대파를 지지하는 잡지를 출판하기 시작하고 있던 피에르 모나트와 알프레드 로즈머를 규탄하는 성명에 트로츠키가 9월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게 되면서 이것은 더욱 나빠졌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1925년 여름에 카메네프의 지지자들로부터 모스크바 당 조직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에 항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10월에 레닌그라드 당 조직에 대하여 공격의 포문을 열었을 때, 이 싸움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비록 14차 당대회 회기 중에 작성되었던 트로츠키의 사적인 기록들이 그가 3자 동맹의 불화는 "자본주의의 포위라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관계라는 사회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인식했었음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12월 14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에프의 지지기반을 분쇄하는 것에 대하여 수수방관했다(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25). 대회에 뒤이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야 비로소 트로츠키는 레닌그라드 당에 대한 스탈린의 제재 요구에 항의하면서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때쯤 지노비에프의 기반은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잠재적인 지노비에프-트로츠키 연합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러한 관계발전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했다. 스탈린은 자신이 일찍이 트로츠키가 정치국에 계속 남아 있도록 투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면서, 부하린을 보내 트로츠키와 개인적 접촉을 하도록 했다.

듀이 위원회에 앞선 1937년 증언에서, 트로츠키는 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에프간의 공개적인 전쟁이 드러난 것에 관하여 놀랐다고 보고했다. 그의 트로츠키 전기가 스탈린의 권력으로의 상승이 불가피했었다는 관점(만약 미리 받았다면, 스탈린 자신에게 의미있는 구원이 되었을 의견)에 의해 손상되지만 않았다면 훌륭한 것이 되었을 아이작 도이처까지도 트로츠키의 주장을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E.H. Carr는 레닌그라드 당 저널인 Leningradskaya Pravda[레닌그라드 프라우다]에 대회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커지고 있던 불화의 많은 공개적인 증거들이 있었다고 서술했다.(일국에서의 사회주의 1924-26, 2권)

코민테른의 더해가는 기회주의

지노비에프는 너무도 자만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고 난 이후까지도 그가 그 자신의 트로츠키와의 정치적 의견접근을 깨달았던 것 같지는 않다. 트로츠키의 명백한 정치적 무감각은 더욱 놀랄 일이다. 트로츠키는 1926년 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점증하는 기회주의, 특히 중국에서의 기회주의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1차 중국혁명은 만주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절망적인 빈곤과 나라의 식민지 상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1925년에 막 생겨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선두에 섰고, 1926년 초에 2차 중국 혁명이 본격화되었다. 남부 중국이 대규모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에 의해 뒤흔들렸고, 농민들은 토지를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민족주의 국민당은 군벌들에 대한 공성망치로 봉기를 활용하고자 했지만, 부르주아지 재산에 대한 모든, 어떠한 공격에도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제국주의자들과 독자적인 거래들을 하려고 했다.

1922년 지노비에프의 코민테른의 국민당 입당 명령에 의해, 갓 태어난 중국 공산당(CCP)은 전개되고 있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소위 "반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게 갖다 바치면서 그 곳에 머물렀다. 중국 공산당 중핵들이 국민당의 주요한 조직적 중핵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심지어 자기 자신의 전국 신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월에 트로츠키는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러시아 정치국에 제출했다. 또한 그는 이 민족주의 정당의 "동조적인" 부문으로서의 코민테른 가입 허가에서 반대투표를 했다(2차 중국 혁명에 관한 완전한 내용을 위해서는 스파르타시스트53호, 1997년 여름, "영구혁명 대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을 보시오.)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에 대한 양보는 세계 전역에서 코민테른의 실천을 소련과 관련하여 당시 가장 무자비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동맹을 찾는 것에 종속시키던 점증하던 패턴의 일환이었다. 영러 노동조합 통합위원회는 국제적인 노동조합 단결과 전쟁의 위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한 의도였다. 스탈린과 지노비에프는 이 위원회를 소련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개량주의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았다. 1926년 5월 초에, 영국 광산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나라 전체를 마비시켰고 쇠퇴하던 영국 사회 질서를 그 근본으로부터 뒤흔들었다. 소련의 "동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영국에서 2번의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에 가장 결정적인 계급 전투를 심지어 소련 노동조합을로부터 제공되는 물질적 파업 원조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배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노동조합들은 영러 노동조합 통합위원회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이것이 부패한 노동당 지도자들의 배신행위를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좌익적 위장막을 제공해주었다. 영국 공산당은 소련의 노동조합 "동지들"에 대한 반대를 거의 조직하지 않으면서,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에 마음내켜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4월 초에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베를린으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국 총파업에 대한 배신을 목격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폴란드에서 급진적인 척하는 파퓰리스트이며 전투적인 반공산주의자였던 조제프 필수드스키가 권력을 장악했던 군사 쿠데타를 목격했다. 필수드스키의 군사 쿠데타는 귀족과 지주에 우호적이었던 교권주의적 반동 의회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당"이라는 두 계급 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지노비에프의 코민테른에 의하여 방향을 잃고 있던 폴란드 공산당은, 비록 재빠르게 "5월 실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으로부터 물러서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플수드스키의 권력 장악을 지지했다.

베를린으로부터 돌아오고 나서 곧, 트로츠키는 프라우다에서 앵글로-러시아 노동조합 통합위원회를 공격했다. 그는 또한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와의 연합을 위한 협상들을 진지하게 시작했다.

통합반대파

통합반대파(UO)는 1926년 7월에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회의에서 "13인 선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선언했다. 처음에 통합반대파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1921년 노동자 반대파의 잔재들과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자[Democratic Centralist] 경향의 잔재들까지도 포함했다. 통합반대파는 처음부터 반(半) 비밀성의 조건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의 형성에 이르도록 했던 협상들이나 이후의 내부 토론들에 관한 문서가 거의 없다. 초기 조직화를 위한 모임들은 모스크바 외곽의 숲에서 열렸다. 이 모임들의 조직가들은 중앙통제위원회에 의해 비난당했고 심지어 통합반대파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기도 전에 중앙위원회로부터 축출되었다. 여전히 명목상으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었던 지노비에프는 7월 전체회의에서 정치국으로부터 축출되었다.

통합반대파의 공개적인 정치적 선언에 관한 완전한 기록은 적어도 영어로는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고 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증가하는 기회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선명한 비판들을 반대파의 "단결"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흐름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기에 통합반대파는 좋기도 하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연합은 그 성격 자체에 의해 제한된 목적을 위한 합의이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카메네프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대와 스탈린/부하린 연합의 친 농민적 경제정책에 대한 반대를 공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코민테른 정책의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달랐다. 지노비에프는 그가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수행했었던 정책들에 대한 방어를 자연스럽게 주장했다. 그래서 통합반대파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관련해서 강령적 잡탕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13인 선언"은 영국 노동조합 배신자들을 소비에트 국가의 믿을 수 없는 동맹자들로서 공격하지만, 소비에트 노동조합들이 영러 노동조합 통합위원회로부터 분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언은 폴란드 당의 "5월 실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선언은 임박한 혁명의 와중에서 중국 공산당의 부르주아지-민족주의 국민당에 에 대한 지속적인 입당이라는 범죄적 정책에 관하여 비난은 고사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통합반대파의 내부에는 국내 전선에 대한 풍부한 합의가 있었다. "13인 선언"은 국가의 점증하는 관료적 퇴행을 당내에서의 비민주적이고 분파적 당 지도부의 근원으로 인식했다. 지명 체제의 폐지와 민주주의적 당내 지도부의 복구를 주장하면서, 선언은 부하린의 쿨락에 대한 "스스로 부자가 되라"는 권고를 러시아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복구를 추구하게 될 사회세력들에 대한 잠재적인 치명적 양보로 인식했다. 반대파는 쿨락에 대한 증가된 세금부과로부터 나오는 자금으로 중공업에 대한 계획화된 건설을 주창했다. 반대파는 보다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집산화를 늘리기 위한 경제적 인센티브들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반대파는 임금 인상을 주장하면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의 즉각적인 개선을 주장했다. 7월 전체회의는 반대파의 주장을 무시했으나, 곧 정치국이 물러섰다. 9월에 임금 인상들이 적용되었는데, 이것은 반대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통합반대파가 존재했던 1년 반 동안 내내,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잘 알려진 중도주의적 동요의 경향에 의존하면서, 반대파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E.H. Carr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자신과의 합의의 희망을 놓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들을 빼내고 나서, 양보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스탈린의 전략을 간명하게 묘사했다(계획경제의 기초, 2권). 이렇게 해서 1926년 9월, 코민테른은 독일 당에 있는 지노비에프 지지자들(루스 피셔, 아르카디 마슬로브, 그리고 휴고 우르반스가 지도하던 역사적 "좌익"들)의 제명을 명령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통합반대파를 방어하는 선언에 700여명의 서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926년 10월-11월에 개최되었던 15차 당협의회 직전에 통합반대파를 강제로 뒤로 물러서게 하기 위하여 러시아 당에서도 비슷한 제명 협박을 활용했다. 그는 만약 통합반대파 지도자들이 그들의 독일 지지자들을 거부하고 1921년 분파금지를 존중한다면 싸움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통합반대파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독일 "좌익"에 대한 거부는 통합반대파의 이질적인 국제적 지지자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해산하는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그의 적들에게 어떠한 숨쉴 공간도 허용할 의도가 없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반대파는 반대파의 "원칙에서의 오류들"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통합반대파가 "사회민주주의적 편향"이라고 비난하는 일련의 테제들을 정치국에 제출했다. 바로 이 정치국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테제들을 당협의회에 제출하면서, 스탈린은 반대파에 반대하여 혹평하는 보고를 제출했다. 비록 통합반대파의 지도자들이 미리 당협의회의 연단에서 발언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연설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의 저작들로부터의 인용을 사용하면서 구체적으로 논박하면서 공개적으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교조를 공격했다. 당협의회는 지노비에프를 모든 코민테른 활동으로부터 해임시켰고,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를 정치국으로부터 해임시켰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1926년 12월에 코민테른 7차 집행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공식적인 승인을 확보했다. 그러나 통합반대파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서 발언하는 것을 막으려던 스탈린의 시도는 무산되었고,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트로츠키는 모두 회의장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비난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의 발언에서 다시 한번 레닌이 영구혁명의 문제에서 옳았다고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중국과 영국에서의 기회주의적 정책들에 대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국제 부르주아지 언론은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의 전원참석회의에서의 패배를 "온건한" 스탈린 지도부에 의한 국제주의에 역행하는 행보라며 즐겁게 축하했다.

통합반대파와 중국

1927년 봄에, 장개석의 북부 토벌대가 중국 남부의 혁명적 격변을 양자강 심장부까지 가져갔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과의 분열을 두려워한 나머지 계속해서 농민과 노동자들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정책은 장개석 주변의 부르주아지 세력들이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명백하게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에 올가미를 감는 것이었다. 장개석의 군대가 상하이에 접근하고 있을 때, 노동자들의 봉기가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3월 26일, 장개석은 도시에 진입했고, 그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국주의자들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재앙에 직면하여, 모스크바의 통합반대파는 코민테른의 중국 정책에서의 변화를 강제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에 대한 정치적 종속을 끝낼 것과 중국 공산당 일간 기관지의 창설을 요구하면서, 통합반대파는 노동자, 농민,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들에 대한 호소를 제기했다. 통합반대파에게 핵심적인 돌파구였던 이 요구는 중국혁명의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력의 진정한 가능성을 주장했다. 슬로건은 트로츠키의 주도로 제기되었고 반대파 전체가 받아 안았다.

그러나 통합반대파는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으로부터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적어도 1926년 8월 이래로 연합 내부에서 논쟁이 되고 있었다. 지노비에프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좌익 반대파의 지도적 성원이었던 라데크도 역시 이 요구에 반대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완전한 조직적,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중국에서 혁명적 전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에서 타협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이 실책이었다고 인정했다:

"우리는 공산당의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라는 슬로건을 전체 정세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가 이것을 요구했던 것보다 2년 정도 뒤늦게 공개적으로 제출했다."

- 트로츠키, "반대파의 오류들 – 실제의 것과 근거 없이 주장된 것들" 1928년 5월 23일,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8-29)

통합반대파가 조직되기 전에, 트로츠키는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반대파 내부의 분명한 차이들을 활용할 수 있었고, 반복적으로 반대파가 국민당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철수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삶의 말미에 쓴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몇 중요한 문제들에서, 1923년 반대파가 나의 투표와는 반대로 1926년 반대파에 원칙적인 양보들(내가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을 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러한 양보들에 대하여 내가 공개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던 상황은 어느정도 오류였다. 그러나 공개적인 항의를 위한 여지가 전반적으로 매우 많지 않았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쨌든, 양쪽 모두 논쟁적인 문제들에 관한 나의 관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 트로츠키, "작은 상처에서 괴저의 위험으로"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하여(1940)

1927년 봄에, 스탈린/부하린은 무한(武漢)의 양자강 산업 중심지에서 1926년 12월 수립되었던 민족주의 정권 주변에 모여있던 "좌익" 국민당 세력들에 의존하는 정책을 설교하고 있었다. 무한의 노동계급은 2월 3일 영국의 조차지를 장악했고, 그곳의 국민당은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획득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과의 연맹을 지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1927년 3월에는 두 명의 중국 공산당원이 농업과 노동부의 장관으로 민족주의 정부에 참여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 공산당은 두 당 사이의 협조를 뒤집게 될 어떠한 것도 출판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무한에서 국민당 정부의 "규율"을 수용하겠다는 장개석의 보장을 믿을 만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중국 정책은 4월 중순에 중앙위원회 전원참석 회의에서 논쟁이 되었고, 스탈린은 "혁명적 국민당 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의 슬로건"이라는 이유로 소비에트를 호소하는 것에 반대했다("중국 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들" 1927년 5월 7일 [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4월 5일에 스탈린은 모스크바 당 노동자들의 회합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장개석과 같은 국민당 우익들을 활용해야만 하는데, 그들을 "쥐어 짜내진 레몬처럼" 늦게 버릴 수록 더 좋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이 있고 겨우 1주일이 지난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의 군대가 상하이의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기동했고,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고, 부르주아지 질서를 재수립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스탈린의 4월 5일자 연설은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그들의 기회주의적 정책의 비참한 결과를 필사적으로 덮어 가리려고 했다. 4월에는 또한, 베를린에서 앵글로-러시아 노동조합 통합 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영국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한편으로 영국 노동조합 내부 문제들에 관한 불개입 서약을 러시아 노동조합 활동가들로부터 받아내면서, "중국에서 손을 떼라"는 운동을 위한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영국 정부는 런던에 있던 소비에트 무역 사절단을 급습했고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에 관한 공개적인 논쟁을 금지하기 위한 핑계로 영국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와 공산주의 청년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인 지노비에프주의자인 유고슬라비아의 보자 부조비치는 5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의 8차 전체회의에 반대파의 관점들을 발표할 수 있었다.

통합반대파는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단지 "민족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한편으로 중국에서 소비에트를 위한 호소를 제기했다. 통합반대파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주장하면서 1917년 4월 이전의 볼셰비키 공식을 사용했다. 스탈린과 부하린 역시 민주주의적 소위 "반제국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의존이라는 완전히 멘셰비키적 전망을 불어넣으면서 이 슬로건을 사용했다. 이 속에는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 전망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이 있다. 트로츠키는 당시에 이것을 본성적인 모순이라고 비판했었고, 이 비판은 올바른 것이었다. 혁명적 정부가 장기간 두개의 계급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통합반대파 내부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은 무한의 국민당 "좌익"에 대한 평가 주변에 집중되어 있던 많은 차이들을 숨겼다. "중국 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들"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부르주아지 국민당이 "노동자와 농민의 당"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반대했고, "공산당의 완전한 이론적, 정치적, 그리고 조직적인 독립성"을 주장했다(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지노비에프는 1927년 4월 15일자로 되어 있는 일련의 테제들에서 국민당에 "우익의 지도하에 있는 무정형화된 조직"으로 이름 붙였고, "현재의 군사적, 정치적 정세에서, 중국의 공산당은 국민당에 남아 있을 수 있고,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트로츠키의 중국혁명의 문제들[1932]에서 부록으로 출판됨).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에 대한 호소를 혁명적 노동자들와 농민, 병사들 사이의 동맹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대치시키면서, 무한 정부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노비에프는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군대들과 민족 정부를 지지할 수 있고 지지해야만 한다"고 썼다.

트로츠키의 노선이 아니라 지노비에프의 노선이 통합반대파의 공식적인 노선이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전원참석 회의를 위해 작성되었고 5월 25일 정치국에 제출되었던 "84인 선언"은 반대파는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으로부터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한다는 주장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담고 있었다. 지노비에프의 테제들을 전원참석 회의에서 방어하던 트로츠키와 부조비치는 중국공산당의 뻔뻔스러운 무한 부르주아지 정부 참여를 비난하지 않았다. 트로츠키 그 자신이 이 문제의 긴급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원참석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던 5월 28일에, 트로츠키는 무한 정부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철수를 주장하는 짧은 메모를 작성했다("한구(漢口))와 모스크바" 1927년 5월 28일, 트로츠키 중국관련 저작집). 이 메모가 통합반대파 내부 회람을 위해 쓰여진 것인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를 위해 쓰여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27년 7월에, 무한 정부는 난징에 있는 장개석 정부와 타협하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 대한 탄압의 공세를 개시했다. 후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무한 정부가 처음으로 수립되었던 때로부터 중국에는 어떠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민족적 전통을 포함하는 부차적인 질서의 요소들 때문에 종종 독특한 형태를 띠는, 근본적인 사회적 사실들이 정치적으로 굴절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사실들에 대한 분석에 정확하게 기초했다. 나는 무한의 난파가 국민당 좌익에 대한 전설을 완전히 파괴했을 때, 기초적인 사회적 사실들이 이미 정치적 상부구조들의 모든 특수성들을 관통하여 스스로를 위한 길을 분명하게 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 프레오브라젠스키에 보내는 2번째 편지, 1928년 3월 혹은 4월에 쓰여짐(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그러나 1927년 9월이 되어서야 트로츠키는 중국에서 "긴급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중국 혁명에 대한 새로운 기회들, 새로운 임무들, 새로운 실책들", 1927년 9월, 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그 이후에도, 통합반대파의 공식적인 노선은 지노비에프의 노선으로 남아 있었다. 15차 당대회를 위한 준비 차원에서 통합반대파의 이름으로 9월에 제출되었던 "반대파의 정강"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요구했다(좌익반대파의 도전, 1926-27). 정강은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가 영구혁명의 문제에 있어서 트로츠키에 대해서 옳았다고 주장했다. 1년 후에, 트로츠키는 이 실책을 비난했다:

"지난 가을 우리는 1925-27년의 경험이 중국 혁명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을 이미 청산했고, 미래에 이 슬로건은 국민당주의나 모험주의를 다시 토해내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게 예측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우리는 중국문제에 대한 후퇴의 깊이를 과소평가했던 자들에게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양보들을 했다.

- 트로츠키, "반대파의 오류들 - 실제 오류와 근거 없이 주장된 것들"1928년 5월 23일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8-29)

반대파의 정강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한 모든 조직적, 정치적 의존을 끝낼 것"을 요구했지만, 중국 공산당의 철수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이미 6월에 이 정책을 "심각한 대실수"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공산당이 국민당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우리 당과 코민테른이 과도하게 이 문제에 천착했지만, 국민당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당 내부에 있는 모순들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남아 있을 일종의 조건들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문서화되지는 않았지만, 이것들은 핵심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장기간 국민당 조직 내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제외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잘못된 방침으로부터 올바른 방침으로 후퇴할 수 있는 다리가 될 수 있는 이행적인 공식을 고안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교육학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경우들에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은 실책으로 판명되었다. 우리는 한편으로 실책을 저지르고 있는 지도부를 계몽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바쁘면서, 대오 사이에서는 정치적 명확성을 희생하고 있었다."

- 트로츠키,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는가?", 1927년 6월 23일 (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심지어 1927년 9월이 되어서도, 트로츠키는 명백하게 통합반대파 내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투표에서 졌다.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재앙으로 인해 너무나 불신을 당해서 1927년 여름 잠깐 동안 당의 다른 지도적 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들을 수용하도록 하는데 애를 먹었다. 7월 하순에,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를 러시아 당으로부터 축출을 시도하기 위하여 중앙통제위원회(CCC)를 소집했다. 그러나 중앙통제위원회는 제명들에 관한 최종결정을 거부하면서 진행절차를 질질 끌었다. 중앙통제위원회의 청문회가 길어지고 있을 때, 통합반대파는 8월 8일 스탈린의 또 다른 "휴전"을 수용함으로써 스탈린을 구해주게 되었다. 스탈린은 만약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가 소련에서 테르미도르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대한 반대를 선언하고 러시아 당과 코민테른을 분열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을 비난한다면,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를 단순히 "징계"하겠다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테르미도르"의 문제는 반대파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토론되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타도에 관한 이 유추가 정치적 반혁명이 아니라 사회적 반혁명, 즉 자본주의의 복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광범위하게 이해되고 있었다. (1935년에 트로츠키는 그의 저작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에서 소비에트 테르미도르는 계급이 아니라 관료 계층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며, 계속해서 노동계급 소유양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 유추의 사용에 관하여 정정했다.)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자들은 사회적 반혁명이 이미 발생했고, 소련에서 새로운 혁명정당이 건설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10월의 사회적 성취들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반대파는 볼셰비키 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분파로서 활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입장들에 맞서 투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가 결코 고수하지 않았던 입장들의 폐기를 그들로부터 강제로 이끌어냈다. 정확하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선언은 두 사람의 정치적 불리함을 의미했고, 이것은 스탈린의 수중에 있던 무기였다.

스탈린은 새로운 "휴전"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에 충분할 만큼만 오래 지속되도록 했다. 반대파가 1927년 9월에 자신의 정강을 회람하기 시작하자, 그는 8월 협약이 깨졌음을 선포했다. 트로츠키는 9월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서 축출되었다. 통합반대파의 러시아 혁명 10주년에서의 공개적인 시위 이후인 11월에 관료기구의 억압이 강화되었다. 12월 초에 시작되었던 15차 당대회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1월 14일에 두 사람이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대회는 반대파의 입장들과 당원자격은 양립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대다수의 그들의 지지자들은 대회가 끝나자 마자 항복했다. 대회가 있고 수개월 동안에 1500명의 반대파들이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던 반면, 약 2500명 정도가 자신의 신조를 포기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오랜 기간 트로츠키의 최측근 정치 동료 가운데 하나였던 아돌프 조페는 스탈린과의 1927년 8월 8일의 타협에 반대했었다. 이것은 1927년 11월 16일 자살하기 직전에 트로츠키에게 그가 썼던 편지에서 무엇보다 강력하게 나타난다(스탈린주의자들은 조페가 가중되는 고통스러운 건강상태를 치료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여행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당신이 레닌의 불굴의 의지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미래에 다수가 될 수 있음을 예견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에서 심지어 혼자서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1905년부터 시작하여 당신은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옳았고, 나는 레닌이 심지어 1905년에 자신이 아닌 당신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을 내 자신의 귀로 들었다고 반복해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당신에게 다시 한번 이 사실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종종 과대평가된 합의나 타협을 위하여 당신의 올바름을 포기해왔습니다. 이것은 실책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만 당신의 올바름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오로지 굴복하지 않겠다는 극도의 의지, 최고로 엄격한 정직함, 모든 타협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에 있습니다. 레닌의 승리의 비밀이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여러 차례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서야 겨우 마지막 인사로 이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 아돌프 조페,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편지, 1927년 11월 16일

스파르타시스트 경향은 종종 조페의 편지가 국제 좌익반대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트로츠키의 결의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해왔다.

트로츠키가 1927년 9월에 영구혁명의 전망을 위한 주장을 시작했을 때,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판단을 썼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요구가, 예를 들면 북부 토벌의 초기에 제기되었다면, 소비에트를 주장하는 것과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이것은 중국 혁명의 발전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중국 혁명이 완전히 다른 경로로 갈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그 슬로건이 부르주아지 계급을 고립시키고 그래서 화해주의자들을 고립시켰을 것이고, 과거보다 무한정 더 많이 우호적인 조건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경로를 되돌릴 수 없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발적으로, 부르주아지가 선택한 환경 하에서 그리고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 하에서 혁명으로부터 후퇴했다. 화해주의자들도 정확하게 똑같이 했다. 우리가 제때에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성공적으로 고립시켰다. 상하이에서뿐만 아니라 에딘버그에서도, 마지막 노동조합 총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벌어졌다[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에딘버그 총회에서 앵글로-러시아 노동조합 통합위원회와 분리할 것을 막 투표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쨌든, 부르주아지 계급이 - 도시와 지방에 있던 대 부르주아지 계급과 중간과 상층 소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지식인들 역시 - 혁명으로부터 후퇴한 것은 이미 벌어진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혁명적 격변이 벌어지고 있는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요구하는 것은 모호하고 무정형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리고 혁명에서 어떠한 모호하고 무정형한 슬로건도 혁명당과 피억압 대중들에게 위험하게 된다."

-트로츠키, "중국 혁명에 대한 새로운 기회들, 새로운 임무들, 새로운 실책들", 1927년 9월, (트로츠키 중국 관련 저작집)

2차 중국 혁명의 경로는 젊고 역동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사회적 비중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해, 중국의 부르주아지 계급들이 제국주의 앞에서 완전히 납작 엎드리고 있음을 증명했다. 2차 중국 혁명의 파멸적인 패배로부터,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의해 정당함을 인정받았던 영구혁명의 강령을 중국과 인도와 같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로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1917년 이전 슬로건을 더욱 분명하게 폐기했다:

"중국 부르주아지 계급의 역할뿐만 아니라 중국 '민주주의'의 역할이 철저한 테스트를 거친 이후, 이것이 '민주주의'가 과거보다 다가오는 전투들에서 더욱 더 교수형 집행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된 이후에,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제기하는 것은 알기 쉽게 새로운 이런저런 국민당주의를 덮어 가리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다."

- 트로츠키, 레닌 이후의 제인터내셔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함에 있어서, 트로츠키는 자기 자신의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했는데, 그 지지자들 중에 다수가 트로츠키 자신의 반복된 영구혁명에 대한 폐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던 자들이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라데크, 그리고 다른 많은 지도적 반대파들은 그에게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더 이상의 타협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행에 맞서 레닌주의 강령을 지키기 위한 트로츠키의 투쟁이 진정한 강령적, 이론적 일관성을 확보했다. 그는 라데크와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코민테른 6차 대회에 대한 보다 유화적인 그들 자신들의 테제들을 제출했을 때 분명하게 이에 반대하면서, 반대파 내부에서 일련의 투쟁을 수행했다. 스밀가도 역시 승인했던 라데크의 문서는 결국 철회되었다. 두 사람 모두 트로츠키가 작성한 좌익 반대파의 복권을 위한 호소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영구혁명으로 넘어오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 폭넓은 정치적 유약함의 표시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부하린 지지자들과의 블럭에 반대하는 투쟁

자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주의-레닌주의의 혁명적 강령의 연속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트로츠키의 결의는 더욱 강해졌다. 트로츠키에게는 그 다음 시기에 이러한 모든 결의가 필요했다. 부하린의 쿨락들에 대한 회유책이 반대파가 예견했던 모든 재앙으로 드러나자, 스탈린은 과거 블럭의 부하린 쪽 파트너들을 숙청하고 반대파의 경제 강령의 일부를 이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어떠한 기술적, 혹은 경제적 기반들도 닦지 않으면서, 스탈린 특유의 잔혹성으로 소비에트 국가는 농민 집산화로 나아갔고 무모한 산업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이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구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을 제거했다.

당 지도부를 부하린의 우익과 스탈린의 중도파 사이의 불안정한 블럭으로 오랫동안 인식해왔던 트로츠키에게 분열은 놀랍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 국가의 관료기구라는 스탈린의 기반과 톰스키 하의 보수적인 노동조합 관료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부하린의 "붉은 교수들" 사이에서 어떠한 정치적 차이점도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주의자들을 완전히 무장해제 했다. 부하린/리코프/톰스키는 소련 내부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주의적 세력들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만을 수행하는데 전념했다.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은 스스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전념했다.

트로츠키는 1928년 1월에 알마 아타로 추방되었다. 그는 1929년 초에 소련으로부터 쫓겨났고, 망명 중에 국제 좌익반대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터키에서 코민테른이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임박했다고 선언했던 1917년 이후 자본주의의 "제3기" 선포를 보았다. 코민테른 지부들은 그들 자신의 친 부하린 우익들을 축출했고,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이라는 슬로건으로 기존에 조직되어 있던 노동조합들을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면서, 그리고 "사회 파시스트"로 명명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어떠한 공동실천도 반대하면서 모험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방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수사학상의 좌익주의는 단순히 편의적인 그리고 일시적인 자세였다.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스탈린주의자들을 관료주의적 중도파로 정의했다. 스탈린의 전환은 남아있던 반대파의 지지자들에 대한 가중되는 탄압과 함께 이루어졌다. 1929년 8월에서 1930년 11월 사이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의 추방이 700명으로부터 7000명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좌익반대파의 존재가 소비에트 도시 지역들에서 파괴되었다.

일련의 굴복들이 뒤따랐다. 가장 주요한 굴복자들이 영구혁명에 반대하던 라데크와 프레오브라젠스키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면서, 그들은 스탈린이 적어도 소비에트의 산업화 속도는 높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라데크는 항상 반대파 내부에서 좌익 중도주의자였다. 이것에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1923년에서 27년까지 소비에트 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부는 지노비에프의 변화를 제외하면 우익 중도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좌익 중도주의 인자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이끌렸다. 그러나 우익 중도주의 블럭의 분열과 스탈린주의자들의 좌선회 이후에, 반대파 내부의 중도주의자들은 그들의 '최종 목표'가 달성된 것으로 생각했고, 심지어 좌익 반대파의 압력으로 스탈린이 더 왼쪽으로 나아갈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라데크 등이 이미 반대파에 반대하여 공식적인 중도주의를 방어하기 시작하고 있는 이유이며, 곧 지배 블럭의 수레의 오른쪽에 있는 필요도 없는 5번째 바퀴로 드러나게 될 이유이다."

- 트로츠키, "외교술인가 아니면 혁명적 정치인가?", 1929년 7월 1일 (저작집, 1929)

부하린은 재빨리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부하린을 지지하는 우익 반대파(RO)는 국제적으로 조직된 조직이었다. 부하린 지지자들 또한 스탈린주자들의 "제3기" 분파주의에 반대했으나, 이것은 20년대가 끝나기 전에, 대부분의 자신에 대한 지지자들을 사회민주당의 품 속으로, 혹은 심지어 명백한 자본가 반동의 품 속으로 이끌고자 하던, 진화하고 있던 계급 협조주의적 관점으로부터의 반대였다. 1923년 실패한 혁명 동안에 독일 당의 동요하던 수장이었던 하인리히 브란들러는 공산주의 우익 반대파의 지도적인 국제적 대변인이 되었는데, 무원칙한 미국의 모험주의자 제이 러브스톤과 인도의 민족주의자 로이 등도 역시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들이었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좌선회에만 반대하면서 우익 반대파는 1925-27년 중국에서 코민테른에 의해 저질러진 재앙적 정책들을 계속해서 방어했다. 게다가, 그들은 국내 소비에트 업무들에서의 그의 지도력과 관련해서는 스탈린을 지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좌익 반대파에 대한 박해를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과 코민테른에서의 당 민주주의를 복구하는 한정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떠한 목적을 위한 우익 반대파와의 블럭에도 반대했다:

"우리는 어떠한 장소에서도, 어떠한 특정한 것에 관해서도, 심지어 당 규약의 부분적인 복구를 위해서도 당의 어떠한 세력과도 '합의'에 이르고자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치적 분파들로서 우익들과 중도주의자들과 관련하여, 이것은 우리가 화해 불가능한 투쟁을 위한 조건들에 관하여 그들과 합의에 이르고자 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부이다."

- 트로츠키, “현재의 화재 거리들에 관하여", 1928년 12월,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8-29)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에 관한 서평을 하는 서명된 스파르타시스트 초기판의 기사에서 쉐인 매이지는 트로츠키가 우익 반대파와의 블럭을 거부한 것은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아이작 도이처에 동의했다:

"'논리'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들[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스탈린주의자들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정반대의 양극을 상징하던 때인 1920년대 중반의 과거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자신들을 소비에트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극좌(혹은 만약 원한다면 ‘초좌익’)에 위치하도록 했던 모험주의적 정책들을 채택한 이후에 조차 스탈린 분파를 '중도'라고 간주했다. 부하린은 그가 카메네프에게 '우리의 스탈린과의 불일치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당신과의 불일치들보다 훨씬 훨씬 더 큽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러한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계혹해서 트로츠키과 나머지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들은 더욱 부하린주의 우익을 '최고의 적대자'로 인식했다."

- 셰인 매이지, "트로츠키와 러시아 혁명의 운명", 스파르타시스트5호, 1965년 11-12월

매이지는 굉장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부하린 지지자들의 우익 반대파와 기치를 섞는 것에 대한 좌익반대파의 비타협적인 투쟁이야말로 혁명적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을 위한 투쟁에서 핵심적 요소였다매이지의 주장은 트로츠키주의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강령과 원칙들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주로 관료주의적 스탈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반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부하린과 그를 지지하는 우익들이 주창했던 쿨락들과 네프 세력들에 대한 양보들이 1928년이 되면서 소비에트 유니언을 재앙의 벼랑으로 끌고 갔었다. 그들과의 어떠한 연합도 미래의 언젠가 있을 자본주의 반혁명을 위한 연합이 되었을 것이다. 우익반대파는 1928-29년에 쉽게 분쇄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실제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당 외부의 쿨락들과 네프맨들에게 호소할 의지도 없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의 중도파와 쿨락/네프맨 사이의 공공연한 충돌의 경우에, 이 시기에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는데, 좌익반대파는 이 경우 스탈린과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히 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성취에 대한 방어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우익반대파는 국제적으로 좌익반대파와 대결했으며, 그들 사이의 노선의 차이는 레닌주의와 급속하게 개량주의로 진화하고 있던 우익화되던 중도주의 사이의 차이였다. 트로츠키는 다양한 국가들에서 우익반대파와 기치들을 섞기를 원했던 인자들에 맞서서 초기 국제 좌익반대파에서 반복적으로 투쟁을 수행했다. 그는 어떠한 그런 종류의 단결도 모든 종류의 중도주의와 개량주의로부터 공산주의 전위들을 분리하기 위한 레닌의 투쟁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트로츠키가 부하린과 그의 지지들과의 지속적인 정치적 연합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의 시작에서부터 스스로를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틀 바깥에 위치시키는 자들이다.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경우가 트로츠키의 이러한 이해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압도적인 증거들을 제공해준다. 닌은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로서, 그리고 창시 당시의 스페인 공산주의자로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 대표로서의 영웅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좌익반대파에 획득되었다. 그는 소련에서 추방되어 1931년 왕조의 타도 전야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에서의 강렬한 정치적 격동의 이 시기에, 트로츠키는 닌이 엄격한 정치토론을 개인적인 술수로 대체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투쟁들을 벌였다. 닌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축출된 분파로서 활동한다는 국제 좌익반대파의 정치적 전망에 저항하였고, 1931년에 최대 800명의 조직원들이 있던 스페인 공산당에는 눈을 감으면서, 조아퀸 모린[Joaquin Maurin]이 지도하던 카탈로니아에 기반을 둔 더 커다란 규모의 노동자 농민연합을 향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모린의 조직은 제3기에 반대하여 스페인 당으로부터 분리했었고, 우익 반대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심지어 코민테른이 1933년 히틀러의 권력장악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조직하지 못하자 국제 좌익반대파가 혁명적 세력으로서의 코민테른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국제적으로 새로운 당들의 건설로 향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닌은 계속해서 트로츠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는 스페인 스탈린주의자들에게 1936-37년 스페인 혁명을 배신할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1936년 스페인 스탈린주의자들의 먹이가 되었던 스페인 사회주의 청년그룹에서의 희망적인 좌선회를 무시했다. 대신에, 닌은 이전의 스페인 좌익반대파를 모린의 조직과의 통합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인 중도주의 정당인 POUM(Workers Party of Marxist Unification/통합 맑스주의 노동자당)은 스페인 혁명 동안의 맹아적인 이중권력의 기관들의 선두에 서는 것을 거부했고, 대신에 프랑코의 반혁명적 공세 전에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면서 카탈로니아의 자본주의적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했다. POUM의 배신은 반동을 달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뿐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1937년 5월 노동자 봉기 직후, POUM은 금지되었고, 중앙위원회는 체포되었고, POUM의 중심적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살해되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선봉에 섰던 이 테러 공세는 프랑코의 승리와 스페인 노동자 운동의 분쇄의 전조였을 뿐이었다. 스페인 좌익반대파는 1923년 독일 이후 유럽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의 발전의 선두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좌익반대파와 우익반대파를 통합하려고 애쓰던 자들이 추진하던 반(反)혁명적 방침이 피비린내 속에서 증명되었다.

ICL이 물려받은 유산

자신의 트로츠키 전기 2권, 무장하지 않는 예언자에서 아이작 도이처는 100만이 넘는 당원들 중에서 1920년대 후반의 분파투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소련공산당 당원은 최대 2만 명에 불과했다고 썼다. 1922년 3월에 이미 레닌은 "만약 우리가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 당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책이 당원들의 성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의 고참 수호자라고 불릴 수 있는 작은 그룹에 의해 향유되는 거대한 하나의 명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몰로토프에게 보내는 편지, 1922년 3월 26일, 전집33권)고 썼었다. "레닌을 위한 당원모집"는 야심에 찬 관료들의 눈사태 속에 고참 수호자들을 파묻었다. 반대파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고참 수호자들과 그들의 결정적인 정치적 경험이 볼셰비키 혁명이었던 청년들로부터 압도적으로 획득했다. 도이처는 4천에서 8천명의 적극적인 통합반대파의 성원들이 지노비에프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누어졌다고 예측했다. 부하린과 스탈린 분파들의 적극적인 성원들은 이 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이처는 "스탈린 분파에 관해서는, 그들의 강력함이 그 크기에 있지 않았고, 지도자의 당 기구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에 있었다"고 결론내렸다(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1959).

소비에트 당에서의 반 관료주의 투쟁이라는 호된 시련 속에서 등장했던 좌익반대파는 명백하게 레닌주의의 연속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진정한 후계자들이었다. 생디칼리즘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잠깐 동안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대오에 머물렀던 프랑스 지노비에프주의자 알버트 트레인트[Albert Treint]가 러시아 투쟁에서 트로츠키의 "오류들"에 관한 장황한 목록들을 주장하자, 트로츠키는 한편으로 트레인트에게 다음과 같이 도발하면서 기꺼이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당신이 속해 있던 반대그룹은 레닌주의에 치명적인 수정을 가하고, 프롤레티라아트의 독재를 뒤흔들고, 코민테른을 약화시켰던 반면, 이런 저런 부분적 실책이나 죄악이 무엇이었건, 1923년 반대파의 근저에 있던 중핵들이 전위 중의 전위였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그들이 맑스주의 이론, 레닌의 전략, 10월 혁명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었고, 지금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고 있었는가?"

- 트로츠키, "알버트 트레인트에게 보내는 편지", 1931년 9월 13일 (저작집, 1930-31)

1923년 반대파의 강령은 당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산업화에 관한 주제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1923년 독일에서의 혁명적 정세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의 독일 공산당의 완전한 무능력은 분명하게 소비에트 당의 관료화가 코민테른을 침식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표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나 다른 어떤 반대파 지도자도 당시에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트로츠키의 1924년 저작 10월의 교훈이 러시아 투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강령이라는 것에 대한 첫 번째 힌트였다. 앵글로-러시아 노동조합통합위원회와 특히 1925-27년 2차 중국혁명에서의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실천은 1923년 반대파가 활동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기타 반대파 세력들과 연합을 맺었고, 러시아 당에서 공세를 시작했고, 그들이 가능했던 만큼에서 러시아에서의 투쟁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속으로 확대시켰다. 중국에 대한 통합반대파 선전의 무딤에도 불구하고, 통합반대파는 소비에트를 위한 요구를 제기했고, 당시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백 명의 중국 공산주의 학생들을 중국 공산당의 계급적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획득했다. 당시 중국으로 성공적으로 귀국했던 몇 안되는 학생들이 중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중핵이 되었다.

그의 1928년 저작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초안 비판"에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의 강령을 중국과 다른 새롭게 산업화된 국가들로 확장하면서 2차 중국 혁명의 교훈들을 도출해 냈다. 그는 또한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코민테른의 지그재그 행보의 기록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했는데, 지노비에프와 연합하고 있던 동안에 이 작업에 제한을 받았다. 트로츠키의 "비판"은 러시아 당에서의 투쟁이 소련의 관료적 기형화에 맞서는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인 볼셰비키주의의 이론적, 강령적 유산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레닌 이후의 제인터내셔널은 국제 트로츠키주의의 창립선언으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미국 트로츠키주의를 창립했던 중핵들을 국제 좌익반대파로 획득했었던 문서이다. 이것이 ICL이 자랑스럽게 고수하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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