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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하노프,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에 의하여 예견된 바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

  • 분류
    트로츠키
  • 등록일
    2013/05/16 09:47
  • 수정일
    2013/05/16 09:47
  • 글쓴이
    얼치기 공산주의자
  • 응답 RSS

                 [http://www.marxists.org]

 

플레하노프, 레닌 그리고 트로츠키에 의하여 예견된 바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

 

 

          트로츠키

          1940년

 

            1905년 혁명은 “1917년의 총 연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의 정치사상 그룹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맑스주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경향들과 명암들이 모양을 갖추거나 윤곽을 갖추었던 실험실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성격과 발전 경로들에 관한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논쟁들과 차이들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히 이 개념들과 예측들의 전쟁은 그 속에서 독립적인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던 스탈린의 전기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그 주제에 관하여 스탈린이 썼던 몇 안 되는 선전 기사들은 가장 사소한 이론적 흥미조차도 없는 것들이다. 수십 명의 볼셰비키들이 똑같은 사상들을 대중화했고,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게 했다. 본질적으로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설명이 레닌의 전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론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혁명적 교의들이 만들어지고 현실화되었던 첫 번째 혁명의 기간 동안과 그 이후 1923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스탈린이 어떠한 독립적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1924년부터는 상황이 갑자기 달라진다. 관료적 반동과 과거에 대한 격렬한 평가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의 필름이 거꾸로 돌아간다. 과거의 교의들은 새로운 평가들과 새로운 해석들에 굴복한다. 한눈에 봐도, 매우 예상외로 “트로츠키주의”라는 모든 대 실책의 근원으로서의 “영구혁명”의 개념이 관심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 이후 수년 동안, 이 개념에 대한 비판이 스탈린과 그의 협조자들의 이론적[sit venio verbo] 작업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한다. 이론적 지평에서 본다면 전체 스탈린주의가 1905년에 정식화되었던 것과 같은 영구혁명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도까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이론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이 이론에 대한 설명이 부록의 형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이 책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결합발전

            러시아의 발전은 후진성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역사적인 후진성은 단지 한 두 세기의 지연 속에서의 선진국들의 발전의 단순한 재생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봉건적, 전(前)봉건적 야만주의라는 관계들을 변형시키고, 그것들을 복종시키는 가운데, 그리고 계급들 사이의 특이한 관계를 창출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기술과 구조의 가장 최근의 획득물들이 스스로를 그것들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완전히 새로운 “결합된” 사회의 형성을 야기한다. 사상의 영역에서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정확하게 러시아의 역사적 더딤 때문에, 러시아는 교의로서의 맑스주의와 당으로서의 사회민주당이 부르주아지 혁명 이전에 조차 강력한 발전을 획득했던 유럽의 유일한 나라로 판명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가장 심오한 이론적 분석에 정확하게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주로 나로드니크들이었던 이상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임박한 혁명을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미신에 사로잡혀 거부했다. 중립적인 정치공식으로 혁명의 사회적 내용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도 덮어 가리고자 하면서, 그들은 임박한 혁명에 “민주주의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나르드니크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러시아 맑스주의의 창시자인 플레하노프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나 될 정도로 오래 전에 러시아는 다른 “불경스러운” 나라들처럼 다른 우선통행권을 가진 발전의 경로를 예측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자본주의라는 일시적인 고단함을 뚫고 나아가야만 할 것이며, 정확하게 이 경로를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한 투쟁에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했다. 플레하노프는 하나의 임무로서의 부르주아지 혁명을 그가 특정할 수 없는 미래로까지 미루었던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떼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 각각을 위하여 전혀 다른 세력들의 조합들을 그려냈다. 정치적 자유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 연합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리고 더 높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단계에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계급에 맞서는 직접적인 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혁명을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항상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요, 그것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부르주아지 사회에서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공화국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한 단계이다.

 

           그는 1905년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썼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러시아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 온 그러한 민주주의적 변형들이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침식을, 부르주아지 지배의 침식을 의미하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이 처음으로 그리고 진정한 방식으로 폭넓고 신속한, 아시아적인 것이 아닌 유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양을 개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처음으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

 

           그는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틀을 넘어설 수 없지만, 이 틀을 엄청난 정도로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의 투쟁을 위한 훨씬 더 우호적인 조건들을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들 한계들 내에서 레닌은 플레하노프를 따랐다.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두 분파들에게 그들의 출발점으로서 복무했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코바(스탈린)가 자신의 선전에서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의 공통의 성질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 대중적인 공식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1905년 1월에 “평등, 직접, 그리고 비밀 보통선거의 기초에서 선출되는 제헌의회 - 현재 우리가 투쟁해야만 하는 것은 이것을 위한 것이다! 오로지 사회주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위하여 우리에게 그렇게도 긴급하게 필요한 이 의회만이 우리에게 민주주의 공화국을 줄 것이다“라고 썼다.

 

            사회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지속되는 계급투쟁을 위한 장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공화국, 그러한 것이 전망이다.

 

            1907년, 즉 페테르스부르크와 해외 양쪽 모두의 신문에서의 무수히 많은 토론들 이후, 그리고 첫 번째 혁명의 경험 속에서 이론적 예측들에 대한 진지한 검증 이후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지적이라는 것, 혁명이 반드시 자본주의 질서가 아니라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는 것, 혁명은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 - 이것에 관하여는 우리 당내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혁명이 무엇을 가지고 시작되는지에 관하여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으로 끝나는 지에 관하여 말했으며, 그는 미리 그리고 매우 명료하게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혁명을 제한했다. 우리가 그의 글에서 민주주의적 전복과 연결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어떠한 전망에 대한 암시조차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에서 레닌의 페테르스부르크 도착 때까지 그의 입장으로 남아 있었다.

 

 

          멘셰비키의 관점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그리고 멘셰비키주의의 지도자들에게는 전반적으로 부르주아지적인 것으로서의 혁명의 사회학적 성격이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망령으로 부르주아지 계급을 도발하지 못하게 했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반동 진영으로 “쫓아버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은 오직 부르주아지 혁명을 위해서만 무르익었다”고 멘셰비키의 최고 전술가인 악셀로드는 통합대회에서 말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정치적 권리의 전반적인 박탈을 앞에 두고, 정치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계급들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있을 수조차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적 발전의 조건들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는 투쟁에서 부르주아지 계급과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것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으로 만든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내용은 미리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이해와 관점들과 양립하는 그러한 변형들로 제한되었다.

 

            두 분파들 사이의 기본적인 불일치가 시작되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이다. 볼셰비키주의는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이 자기 자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보다 무한히 거대한 힘과 일관성을 가지고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적 전복의 중심적인 문제로서 경작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급소는 경작지(토지) 문제이다. 혁명의 승리나 패배와 관련되는 결론들은 ... 토지를 위한 투쟁에서 대중들의 조건에 대한 계산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플레하노프와 함께, 레닌은 농민을 소부르주아지 계급으로 바라보았으며, 농민 경작지 강령을 부르주아지적 진보의 강령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통합대회에서 “국유화는 부르주아지적 방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자극을 줄 것이며, 계급투쟁을 첨예하게 할 것이며, 토지의 동산화를 강화할 것이며, 자본의 농업으로의 유입을 야기할 것이며, 곡물의 가격을 인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지 혁명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르주아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부동산의 몰수에 적대적인 채로 남아 있으며, 정확하게 이 이유 때문에, 프러시아 식의 입헌군주제와의 타협을 위하여 애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 사이의 동맹이라는 플레하노프의 사상에 대하여,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이라는 사상을 대치시켰다. 이들 두 계급들의 혁명적 협력의 임무는 러시아에서 봉건적 잡동사니를 급진적으로 청소하고, 자유로운 농민들의 체제를 창출하며, 프러시아 노선들이 아니나 미국의 노선을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길을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방책으로서의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선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즉각적으로고 긴급하게 변형들을 성취할 필요가 있고, 농민이 지주들, 대(大)부르주아지 계급, 그리고 짜르주의의 필사적인 저항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의 승리는 “오로지 독재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독재가 없이는, 혁명은 저항을 깨뜨리고 반혁명적 시도들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 독재일 것이다. 그것은 (혁명적 발전의 일련의 이행의 국면들 전체가 없이는) 자본주의의 기초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 그것은 농민들을 위한 토지 재산의 급진적 재분할을 현실화하고, 공화국을 성립하는 것까지의 일관성 있고 완전한 민주정치를 도입하며, 농촌의 일상생활로부터 뿐만 아니라 공장으로부터도 모든 아시아적이고 봉건적인 요소들을 뿌리 뽑고, 노동자들의 조건들과 그들의 생활수준의 상승의 중대한 개선이 시작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혁명적 대 화재를 유럽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입장의 취약성

            레닌의 개념은 그것이 헌법적 개혁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혁명의 중심적 과제로서의 농지 전복으로부터 기인하는 한 엄청난 전진을 의미했으며, 혁명의 성취를 위한 사회 세력들의 유일하게 현실적인 조합을 뽑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의 개념의 약점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내부적으로 모순되는 생각이었다. 그 독재를 공공연하게 부르주아지적인 것이라고 불렀을 때, 레닌 스스로가 이 “독재”의 근본적인 한계를 강조했다. 이것으로 레닌은 농민과의 동맹을 지키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다가오는 혁명에서 사회주의적 임무들의 직접적인 제기를 선행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 하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제의 요지는 비록 노동자들의 참여가 있기는 하지만, 농민의 독재를 포함했다. 어떤 경우에는 레닌은 단지 이것만을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스톡홀롬 대회에서, 권력 장악이라는 “유토피아”에 반대했던 플레하노프를 논박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강령이 토론되고 있는가? 농민. 이 강령 하에서는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가? 혁명적 농민. 레닌은 이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뒤섞고 있는가?” 레닌은 스스로를 참조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권력을 농민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권력과 날카롭게 구별한다. 그는 “그러나 혁명적 농민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 없이 어떻게 농민 혁명의 승리가 가능한가?”라고 다시 외친다. 이 논쟁적인 정식에서, 레닌은 그의 입장의 취약성을 특별히 명료하게 드러낸다.

 

            농민은 주요한 접합점들이 도시들인 광대한 나라의 표면에 걸쳐 흩어져 있다. 각각의 지구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농민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식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주(州)들 사이의 경제적 연결은 시장과 철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만, 시장과 철도들은 도시의 수중에 있다. 농촌이라는 제한조건들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반화하기 위하여, 농민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대한 정치적 의존에 빠져들게 된다. 결정적으로, 농민은 그들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이질적이다. 즉, 쿨락 계층은 도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으로 흔들리는 반면, 농촌의 다른 계층은 도시 노동자들 쪽으로 당겨진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농민은 그 자체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고대 중국에서 혁명들이 농민을 권력에 앉혔거나,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농민 봉기의 군사 지도자들을 권력에 앉혔다는 것은 그대로 사실이다. 이것은 매번 토지의 재분할과 새로운 “농민” 왕조의 수립으로 귀결되었고, 그 후에는 새로운 폭리의 집중과 새로운 봉기라는 역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혁명이 자신의 순전히 농민적 성격을 보존하는 한, 사회는 이들 희망 없고 사악한 순환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이것이 고대 러시아 역사를 포함하는 고대 아시아적 역사의 기초였다. 중세의 종결과 함께 시작되는 유럽에서는, 각각의 승리한 농민 봉기가 농민 정부가 아니라 좌익 도시 정당들을 권력에 앉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농민 봉기는 정확하게 도시민의 혁명적 부위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성공했던 정도만큼만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20세기의 부르주아지적 러시아에서는, 이것들이 혁명적 농민에 의한 권력의 장악에 관한 화제조차 될 수 없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

            말 했던 것처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태도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오에서 혁명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 사이의 구분의 시금석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미래의 혁명적 임시정부의 성격은 무엇이 될 것인가? 혁명적 임시정부는 어떤 임무들과 대면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무슨 질서에서? 모든 그것들의 중요성을 지니는 이 문제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의 근본적인 성격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올바르게 제기될 수 있었고, 이 정책의 성격은 이번에는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플레하노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 세력으로서 앞으로 나설 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반혁명 진영으로 옮겨 간다는 19세기의 정치역사의 근본적인 결론에 대하여 명백하게 그리고 완고하게 눈을 감았다. 대중투쟁이 더욱 대담할수록, 자유주의의 반동적 퇴행이 더 빨라진다. 아직까지 누구도 계급투쟁의 법칙의 효과들을 무력화시킬 방책들을 발명하지 못했다.

           

            첫 번째 혁명의 몇 해들 동안에 플레하노프는 “우리는 비-프롤레타리아트 정당들의 지지를 소중히 해야만 하며, 감각 없는 행동들로 그들을 우리로부터 쫓아내지 말아야만 한다”고 반복했다. 이런 종류의 단조로운 설교로, 그 맑스주의 철학자는 사회의 살아있는 동학들이 자신에게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감각 없음”이 예민한 개별 지식인을 쫓아버릴 수 있다. 계급들과 정당들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끌어당겨지거나 밀쳐내 지거나 한다. 레닌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은 수백만 번의 ‘감각 없는 행동’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할 것이지만, 땅을 빼앗으려는 설교에 대해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플레하노프에 응답했다. 그리고 지주들뿐만이 아니다. 부르주아지 계급의 최 상층부들은 소유를 위한 이해관계에 따른 단결, 그리고 보다 좁게는 은행 시스템에 의하여 지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소부르주아지 계급과 인텔리겐챠의 최고 상층부들은 대규모와 중간 규모의 재산가들에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의존한다. 즉, 그들은 모두 독립적인 대중운동을 몹시도 두려워한다. 반면,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영웅적이고, 자기부정의, 그리고 어떠한 것에도 멈추지 않을 구속되지 않은 혁명적 공세로 수백만의 피억압 인민들을 세워내는 것이 필요했다. 오로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기치 하에서만, 그리고 그 결과로서 지주에서 시작되는 착취 계급들을 향한 비타협적인 적개심의 영감 속에서만, 대중들은 봉기로 일어설 수 있다. 따라서 반대파 부르주아지 계급의 혁명적 노동자들과 농민들로부터의 “반발 작용”은 혁명의 내재적 법칙 그 차체였으며, 외교나 “센스 있는” 방책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달마다 레닌의 자유주의에 대한 평가가 확증되었다. 멘셰비키들의 최선의 희망과는 반대로, 카데트들은 “부르주아지” 혁명의 선두에 있는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은 혁명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더욱 더 그들의 역사적 임무를 발견했다.

 

            12월 봉기의 분쇄 이후, 하루살이 듀마 덕분에 정치적 주목의 대상을 차지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군주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고, 위험이 “문화”의 가장 신성한 소품을 위협했던 1905년 가을에 있었던 그들의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혁명 행위에 양해를 구한다. 겨울 궁전과의 무대 뒤 협상들을 했던 자유주의자들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1905년 말에는 카데트들이 대중들 앞에 스스로를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는 점을 신문에서 매우 정확하게 증명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라는 혁명적 환상들에 맞서는 집회를 잡는 것으로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금 (카데트) 당을 꾸짖는 사람들은 ... 간단히 말해서, 당시 집회의 민주주의적 공공 모임들에서 지배적이었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그는 썼다. “트로츠키주의라는 환상들”로 인하여, 그 자유주의 지도자는 도시들의 가장 아래 계층들, 병사와 농민, 그리고 모든 피억압 인민들의 호의들을 소비에트들로 끌어 당겼으며, 이로 인하여 “교육받은 사회층”을 쫓아버렸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 정책을 이해하였다. 멘셰비키들의 진화는 평행선을 따라서 전개되었다. 자신들이 1905년 10월 이후 트로츠키와의 블록에 있었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자유주의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만 했다. 대중들의 “혁명적 환상들”에 대하여 양보들 할 필요가 있었다는 멘셰비키들의 유능한 출판가인 마르토프의 설명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논쟁에서 스탈린 쪽

            티플리에서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와 똑같은 원칙적인 기초에서 정치 그룹들이 모양을 갖추었다. 코카시안 멘셰비키들의 지도자인 조르다냐는 “반동을 분쇄하고, 헌법을 쟁취하여 지탱해 내는 것 -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계급 세력들 편에서의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의식적인 통일과 열정에 달려 있을 것이다 ... 농민이 운동에 기초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가운데, 그 속으로 인입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 운동은 두 개의 계급들의 방앗간에 곡물을 추가해주게 될 것인 반면, 결정적인 역할은 이들 두 개의 계급들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다”라고 썼다. 레닌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정책은 노동자들을 무기력하게 할 것이라는 조르다냐의 두려움을 조롱했다. 조르다냐는 “민주주의적 전복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을 수 있는 고립의 문제를 토론하고는 농민에 관해서는 ... 잊어버린다! 그가 알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한 모든 동맹들 중에서 그는 지주-자유주의자들에게 반해버린다. 그리고 그는 농민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리고 코카서스에 있는 농민을!” 본질에서 올바른 한편으로, 레닌의 논박들은 문제를 한 가지 지점 위에 단순화 한다. 레닌 그 자신의 암시로부터 추론될 수도 있는 것처럼, 조르다냐는 농민에 관해서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당시 농민이 멘셰비키들의 기치 하에서 폭풍처럼 들고 일어나고 있었던 코카서스에서 농민에 관하여 잊었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조르다냐는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 속에서 부르주아지 계급에 의하여 활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역사적인 공성망치만큼의 정치적 동맹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농민이 혁명에서 지도적인 혹은 심지어 독립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를 위하여 농민 봉기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속에 그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이라는 멘셰비키의 사상은 실제로는 노동자들과 농민들 모두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 이 강령의 반동적 이상주의는 계급들의 보다 심화된 분할이 미리 혁명적 요소로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을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올바름은 온전하게 볼셰비키주의 쪽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을 좇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혁명적 운동에 사회민주당을 대치시키게 될 것이다. 1905년에 멘셰비키들은 “부르주아지적” 혁명이라는 그들의 이론으로부터 모든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할 용기가 여전히 부족했다. 1917년에 그들은 그들의 사상들을 그것들의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끌어내고는 그들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말았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에서, 스탈린은 첫 번째 혁명의 여러 해 동안에는 레닌의 편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부르주아지 계급 반대파 세력에 관계되는 주제들에서 심지어 평조직원 멘셰비키들의 다수조차 플레하노프 보다는 레닌에 더 가까왔다는 것을 말해두어야만 한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는 지적 급진주의의 문필적 전통이었다. 하지만, 코바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독립적인 기여, 코카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분석, 새로운 주장들, 혹은 심지어 오래된 주장들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코카시안 멘셰비키들의 지도자인 조르다냐가 스탈린이 레닌과의 관계에서 그랬던 것 보다 훨씬 더 플레하노프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이었다. 1월 9일 이후에 코바는 “자유주의자들께서는 헛되이도 위기에 놓인 짜르의 권좌를 헛되이도 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헛되게도 원조의 손길을 짜르에게로 뻗치고 있다”고 썼다.

 

            “떨쳐 일어선 인민 대중들은 혁명을 준비하고 있지, 짜르와의 화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렇다, 신사양반들, 당신들의 노력들은 헛된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은 불가피하며, 해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들은 떠오르는 해를 멈출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고 기타 등등. 코바는 이것보다 더 위로는 오르지 않았다. 2년 반이 지난 후, 거의 글자 그대로 레닌을 반복하면서, 그는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은 반혁명적이다. 그들은 동기를 부여하는 세력일 수 없을 뿐 아니라 혁명의 지도자일 수는 더더군다나 없다. 그들은 공공연한 혁명의 적이며, 그들에 맞서 불굴의 투쟁이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그는 썼다. 하지만, 스탈린은 정확하게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10년 후에 완전한 탈바꿈을 해야 했고, 이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계급과의 동맹의 열성적인 지지자로서, 그리고 이에 따라서 하나의 당으로의 멘셰비키들과의 통합을 주장했던 자로서 2월 혁명을 마주해야 했다. 오로지 외국에서 돌아오는 레닌만이 자신이 맑스주의를 우롱하는 것으로 불렀던 스탈린의 독립적 정책을 급작스럽게 끝을 냈다.

 

 

          농민의 역할에 대하여

            나로드니크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 속에서 단순히 사회주의에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하는 사람들[toilers]”과 “피착취자”를 보았다. 맑스주의자들은 농민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농민이기를 멈추는 한에서만 오직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소부르주아지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특이한 감상주의를 지닌 나로드니크들은 이 사회학적 성격묘사에서 농민에 맞서는 도덕적 치욕을 감지했다. 두 세대 동안, 이 노선을 따라서 러시아의 혁명적 경향들 사이의 주요한 투쟁이 발생했다.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미래의 논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의 모든 전통에 따라서 레닌은 결단코 한 순간도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동맹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능성은 정확하게 농민의 엄청난 수적 우세로부터 그에 의하여 추론되었다. 이 사상은 농업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그의 모든 글들을 관통한다.

 

            1905년 9월에 레닌은 “우리는 농민 운동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인 정도까지는 농민운동을 지지한다. 우리는 농민 운동이 반동적, 반(反)프롤레타리아트 운동으로서 앞으로 나서게 되는 정도까지는 (지금 당장, 그리고 즉각적으로) 그 것과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썼다. 맑스주의의 전체 요점이 이 이중적 임무에 놓여 있다. 레닌은 서구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인자들 속에서 사회주의의 동맹을 보았지, 농민 속에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특유한 일관성을 가지고 “시작부터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몰수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 일반을 지지하며, 나중에 우리는 농민 일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 한다”라고 반복했다.

 

            1906년 3월에 그는 “농민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에서 승리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농민으로서의 자신들의 혁명적 영감을 완전히 소진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혁명에서 승리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사회주의 혁명적 정신을 실제로 전개할 뿐이다”라고 섰다. 같은 해 5월, 그는 “농민 운동은 타(他)계급의 운동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근본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아니라 봉건주의의 모든 잔재들을 일소하는 운동이다”라고 반복했다. 이 관점은 하나하나의 글들에서, 모든 해, 모든 책 속에서 레닌의 예를 따른다. 언어와 예들은 다양해도, 기본적인 사상은 동일한 채 남는다.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만약 레닌이 농민 속에서 사회주의적 동맹을 보았다면, 그는 혁명의 부르주아지적 성격을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순수하게 민주주의적 임무들에 제한하는 것을 위한 가장 사소한 근거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이 이 책의 저자가 농민을 “과소평가” 한다고 비난했던 그 경우들에 있어서, 그는 농민의 사회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나의 비인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농민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적 독립성, 농민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독재의 수립을 방해할 농민의 능력에 대한 (레닌의 관점으로부터의) 불충분한 인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가치들의 재평가는 테르미도르 반동의 몇 해 동안이 되어서야 비로소 개시되었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의 시작은 레닌의 질병과 죽음과 얼추 동시에 벌어졌다. 그 때부터 러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은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히 복구의 위험들에 대항하는 충분한 보증이며, 소련의 국경 내에서 사회주의의 실현의 불변의 맹세임이 선포되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으로 국제혁명의 이론을 대체하면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농민에 대한 맑스주의적 평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더욱이 그는 현재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전체 과거와 관련해서도 그렇게 했다.

 

            물론 농민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 관점이 잘못 된 것으로 증명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논제는 우리를 현재의 재검토라는 한계들 훨씬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는 맑스주의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성격을 가지는 비사회주의적 계급으로서 농민에 대한 자신의 예측들을 결코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맑스 자신이 농민은 미신들뿐만 아니라 이성(理性)에 대한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농민 그 자신의 성격이 변화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통치 양식은 농민에 영향을 미치고, 농민을 재교육 할 매우 폭넓은 가능성들을 열어주었다. 이들 가능성들의 한계들은 아직까지는 역사에 의하여 소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증가하는 국가 압제의 역할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을 나로드니크들과 구별해주었던 농민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해 주었음이 이미 현재로서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이후 20년이 지난 후의 새로운 통치 체제에서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10월 혁명까지 혹은 보다 정확하게 1924년까지는 맑스주의 진영에서 누구도 농민 속에서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소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채 남아 있다 - 특히 레닌이 가장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도움이 없다면, 러시아에서의 복구는 어쩔 수 없다고 레닌은 반복했다. 그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탈린 관료집단은 단지 부르주아지적 복구의 첫 번째 국면에 불과하다.

 

 

          트로츠키가 세 번째 입장을 취하다

            우리는 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두 기본적인 분파들의 이탈의 지점들을 분석했다. 그러나 그것들과 나란히, 첫 번째 혁명의 새벽에 이미, 세 번째 입장이 정식화 되었는데, 이 입장은 당시에는 거의 어떠한 인지도 받지는 못했으나, 이 개념이 1917년의 사건들 속에서 확증되었기 때문뿐만 아니라 특히 10월 혁명으로부터 7년이 지나 뒤죽박죽이 된 이후에 스탈린과 소비에트 관료집단 전체의 정치적 진화에 관하여 완벽하게 예언적 역할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꼭 필요한 완벽함으로 이 입장을 적어두어야 한다.

           

            1905년 벽두에, 트로츠키가 쓴 한 팜플렛이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이 팜플렛은 1904년 겨울에 전개되었던 정치정세를 분석했다. 글쓴이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간청들과 연회들이라는 독립적인 캠페인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들을 소진했고,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희망들을 걸었던 급진적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으며, 농민운동은 승리를 위한 우호적인 조건들을 창출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장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경로의 다음 국면은 총파업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팜플렛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피의 일요일 전에 쓰였기 때문에, “1월 9일 이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 날 이후 거대한 파업 물결을 보충해 주었던 최초의 무장 충돌과 함께 찾아왔던 강력한 파업의 물결은 이 팜플렛의 전략적 예측에 대한 명쾌한 확증이었다.

 

            나의 팜플렛에 대한 서문은 그때 즈음 저명한 독일 작가가 되는 것에 성공했던 러시아 망명인 파르부스가 썼다. 파르부스는 다른 사람들의 사상들에 영항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들로 다른 것들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예외적인 창조적 개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가와 작가로서의 능력의 값어치만큼의 기여를 노동운동에 제공하기 위한 활동에 대한 내부적 평형과 충분한 사랑이 부족했다. 나의 개인적 발전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시대에 대한 사회 혁명가의 이해와 관련하여 특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첫 번째 만남 몇 년 전에, 파르부스는 독일에서의 총파업 사상을 정열적으로 방어했지만, 독일은 이후 긴 산업 호황을 통과하고 있었고, 사회민주당은 호엔졸레른가의 통치체제에 순응했고, 외국인의 혁명적 선전은 풍자적 무관심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만나지 못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유혈사태들 이후 두 번째 날에 나의 팜플렛을 잘 알게 되면서, 파르부스는 후진국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할 운명의 예외적 역할에 대한 사상에 매료되었다.

 

            뮌헨에서 함께 보냈던 그 몇 일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교류임이 분명했던, 그리고 우리를 개인적으로 서로 더욱 가깝게 이끌었던 대화들로 가득 채워졌다. 팜플렛을 위하여 당시 파르부스가 썼던 서문은 굳건하게 러시아 혁명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몇 쪽들 속에, 그는 이전에 알려졌지만(이것은 사실이다) 누구도 그것들로부터 필요한 결론들을 도출하지는 못했었던, 후진적인 러시아의 사회적 특수성들을 조명했다.

           파르부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서유럽의 정치적 급진주의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주로 소부르주아지 계급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수공업 노동자들과,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을 뒤쫓아 왔으나 동시에 자본가 계급에 의하여 밀려난 부르주아지 계급의 일부이다 ... 러시아에서는 전(前) 자본주의 시대 동안에, 도시들은 유럽 노선보다는 중국의 노선을 따라서 발전했다. 도시들은, 그 성격에서, 가장 사소한 정치적 중요성도 가지지 않는 순전히 기능적인 행정적 중심들이었던 반면, 경제적 관계라는 점에서는, 그것들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주와 농민을 위한 무역 중심들, 시장들로서 복무했다. 그것들의 발전은 이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대도시들을, 예를 들면 공장 도시들과 세계 무역의 중심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자본주의적 과정들에 의하여 중단되었을 때까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해했던 바로 똑같은 것이, 즉 생산의 수공업적 형태의 미약한 발전이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에 도움이 되도록 복무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즉각적으로 공장들에 집중되었다.

 

           농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대중들로 운동 속으로 인입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나라에서의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증가시킬 수 있을 뿐이고, 이 방식으로, 정부를 허약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은 강력하게 결합된 혁명적 군대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의 발전과 함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양의 정치적 역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의식은 확장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에너지가 성장할 것이다.

 

           사회민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것인지,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비켜설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에 봉착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도하는 지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전복은 오직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적 임시정부는 노동자 민주주의 정부일 것이다. 만약 사회민주당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이끈다면, 이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일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없지만, 전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바로 그 과정은 정치적 활동을 위한 풍성한 토양을 그것에 제공할 것이다.

 

            1905년 가을의 혁명적 사태들의 한 가운데에서, 이번에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나는 다시 한번 파르부스를 만났다. 양쪽 분파 모두로부터 조직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우리는 대중적 노동자 신문인 러스코예 슬로보[Russkoye Slovo]를 그리고 멘셰비크들과 연합하여 큰 정치 신문인 나챨로[Nachalo]를 공동으로 편집했다. 영구혁명의 이론은 보통 “파르부스와 트로츠키”의 이름들과 연결되었다. 이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파르부스의 혁명적 최고조의 시대는 소위 “수정주의”, 즉 맑스의 이론에 대한 기회주의적 왜곡에 대항하는 투쟁의 선두에서 그가 행진할 때인 지난 세기 말에 속해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보다 단호한 정책들의 경로로 밀어붙이기 위한 시도들의 실패가 그의 낙관주의를 침식했다.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향하여, 파르부스는 점점 더 많은 유보조건들을 붙여 반응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사회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적 전복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의 예측들은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변형이 아니라, 단지 러시아에서의 농민체제의 기초 위에 부르주아지 통치체제의 틀을 넘어서지 않는 노동자 정부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오스트리아 형태의 노동자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수립만을 지적했다.

 

            나는 이 결론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대륙의 처녀지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했고, 한때 보수적 성격을 취했으며, 스스로를 젊지만 매우 특권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종시켰다. 반대로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그것[혁명적 전복]의 동학들이 노동자 정부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틀 내에 있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웅장한 혁명적 전복의 결과로서만 오직 생겨날 수 있었다. 1905년 혁명 직후에 시작되었던 우리의 차이들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르부스(그의 내부에 있던 회의(懷疑)가 이 혁명가를 완전히 죽였다)가 독일 제국주의의 편에 있음이 드러나고, 나중에는 독일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 에버트의 고문과 그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자가 되면서 우리 사이의 완전한 결별로 귀결되었다.

 

 

          영구혁명 이론

            팜플렛 19일 이전에서 시작하여, 나는 영구혁명 이론의 발전과 정당성으로 2번 이상 되돌아 왔다. 나중에 이 이론이 이 전기의 영웅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에서 획득했던 중요성을 고려하여, 나의 1905-06년 글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형태로 여기에 제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화된 도시, 최소한 경제-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의 인민의 핵심은 임금노동자라는 첨예하게 차별화된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은 대 프랑스 혁명 동안에 본질적으로 알려졌던 정확하게 이 계급이다 ... 경제적으로 더 후진적인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보다 먼저 권력에 오를 수도 있다. 한 나라의 기술적 힘들과 자원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일종의 자동적인 의존성에 대한 가정은 극단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경제적” 유물론으로부터 발생하는 편견이다 ... 미국에서의 생산력들은 우리 것들의 10배가 넘지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역할, 나라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세계 정책들에 대한 향후 영향력의 가능성은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과 중요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은 아마도 (그리고 혁명의 승리와 함께 반드시) 권력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가다운 천재적 재능을 완전하게 발전시킬 기회를 갖기 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것이다 ...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든 혁명적 지위들을 내어주고 있다. 그들은 농민에 대한 혁명적 지도력도 마찬가지로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에게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계급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 농민에 스스로를 기초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농민들 속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 그러나 아마도 농민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들이닥쳐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리를 점령하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의 모든 경험이 이러한 가정에 저항한다. 농민은 독립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의 모든 경험이 보여 준다 ... 상술한 것처럼,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라는 사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요체는 우리가 그것을 원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적 제휴를 ‘열망하는지’ 여부이다. 우리는 적어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제출된 개념이 “부르주아지 혁명을 건너뛰는” 것이라는 주장(나중에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던)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앞의 상술이 증명한다. 당시에 나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적 혁신을 위한 투쟁은 온전하게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해왔고,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는 세력들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의 길에 있는 봉건적 멍에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단지 무슨 세력들과 방책들이 이들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혁명은 그것의 객관적 목적들에서,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들에서 부르주아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문제들을 제한할 수 있을 지도 모르며, 그래서 우리가 이 부르주아지 혁명의 주요한 행위자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과, 혁명의 전체 경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권력을 향하여 밀어붙일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 동지들은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들이 아직은 사회주의 경제를 위해서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일단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상황의 전체 논리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국가에 의하여 작동되는 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 무기력한 인질들로서가 아니라 지배 권력으로서 정부에 들어가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은 바로 이러한 실천들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를 파괴, 즉집산주의를 일정에 올리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방향 속의 어느 지점에서 멈춰질 것인지는 세력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지,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의 원래 의도들에 달려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지금 너무 이른 것은 아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지 혁명의 틀에 맞서다 불가피하게 박살날 것인가? 혹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어진 세계-역사적 기초들위에서, 이 제한된 틀을 박살냄으로써 성취되어야 하는 승리의 관점을 스스로의 앞에 펼칠 것인가? ...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에 남아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장기간 지속되는 사회주의 독재로 바꿀 수 없다 ...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비관적인 예측이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정치적 해방은 이 지도자를 전례가 없는 역사적 높이로 끌어올릴 것이며, 거대한 힘들과 자원들을 그들의 수중으로 옮길 것이고, 그들을 세계적 자본주의 청산의 선구자로 만들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객관적인 전제조건들을 창출해 왔다.”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혁명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음을 판명할 수 있는 정도에 관하여, 나는 19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험을 담고 있는 조직으로서 그들 자신의 보수주의를 각자 실천해 온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 무엇보다도, 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정당이 어느 특정 순간에 노동자와 부르주아지 반동 사이의 공공연한 투쟁의 경로에 있는 직접적인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내 분석의 결론을 맺었다.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사회주의로 집결하면서, 동방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적 이상주의의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며,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러시아인’ 속에 있는 그들의 적에게 말할 열망이 생겨나게 할 것이다 ...”

 

 

          세 가지 관점에 대한 총괄

            총괄해보자. 나로드니크주의는 슬라브인 숭배자들을 따라서 러시아의 발전의 절대적으로 고유한 길과 관련한 환상으로부터 나아갔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 공화국을 옆에서 환영했다. 플레하노프의 맑스주의는 러시아와 서구의 역사적 경로들의 원칙적 동일성을 증명하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이것으로부터 나온 프로그램은 러시아의 사회구조와 러시아의 혁명적 발전에 관한 신비적인 것이 결코 아닌 온전하게 현실적인 특수성들을 무시했다. 일시적인 덮어 가리기들과 개인적 일탈들을 특징으로 하는 멘셰비키의 혁명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 혁명의 승리는 오직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도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만 한다. 민주주의 통치체제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길에서 그들보다 더 오래된 서구의 형제들을 따라잡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레닌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뒤늦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기 지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도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매개를 통한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나라의 봉건주의를 일소할 것이고, 미국의 템포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진할 것이며,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할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확대된 가능성들을 열어젖힐 것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서구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강력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며, 후자는 러시아를 복구의 위험들로부터 막아낼 뿐만 아니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적 기간에 권력의 장악에 이르도록 허용할 것이다.

 

            영구혁명의 전망은 다음의 말들로 총괄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그 자신을 농민에 기초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형식에서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적 임무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들까지도 일정에 올리게 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에 강력한 자극을 제공할 것이다. 오직, 서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만이 러시아를 부르주아지적 복구로부터 막아 줄 것이며, 러시아로 하여금 사회주의적 건설을 그것의 결론으로까지 가져가게 할 가능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들 간결한 정식화는 자유주의-멘셰비키주의자들의 전망과는 화해할 수 없이 모순을 빚고 있는 마지막 두 개의 개념들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사회성격의 문제와 혁명으로부터 성장해야 하는 “독재”의 임무들에 관한 그것들의 극단적으로 본질적인 서로간의 차이도 똑같은 명료함으로 드러내준다. 1905년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강령이 “시기상조”였다는 취지에 대한 현재의 모스크바 이론가들의 자주 반복되는 반대는 완전히 내용이 부족하다. 경험적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의 강령은 동일하게 “시기상조”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 번째 혁명의 시대의 불리한 역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혁명 그 자체의 승리를 불가능하게 했다. 한편 모든 혁명적 경향들은 완전한 승리에 대한 희망들로부터 나아갔는데, 그러한 희망이 없었다면, 구속받지 않는 혁명적 투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차이들은 혁명의 일반적 전망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전략에 영향을 끼쳤다. 볼셰비키주의의 전망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투쟁의 일반적인 방향을 올바르게 가리켰으나 그것의 단계들을 올바르게 특징짓지는 못했다. 볼셰비즘의 전망의 불충분함은 1905년에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로지 혁명 그 자체가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7년 초에 레닌은 당의 최고참 중핵들과의 직접적인 투쟁 속에서 그 전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적 예측은 천문학적 예측과 같은 정확함을 주장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발전의 일반적 노선의 올바른 방향을 제공한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기본적인 노선이 불가피하게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움직여지는, 사태들의 실제 경로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런 의미에서, 영구혁명의 개념은 역사의 검증을 완전하게 통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비에트 통치체제의 첫 몇 해 동안, 이것은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이 사실은 수 개의 공식 출판물들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침묵 속의 경화된 소비에트 사회의 꼭대기들에서 10월에 대항하는 관료적 반동이 시작되자, 바로 그 시작부터 관료적 반동은 역사 속에서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다른 어떤 것 보다 더 완벽하게 반영했던,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던 이 이론에 대항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스탈린의 기본적인 교조인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이 기원하였다. 1939년 여름.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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