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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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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웅

2007/09/03

겨울철쭉님의 [[SMF3일차]노동운동,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에 관련된 글.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을 위치지우는 과정은 지난 역사적 프로젝트의 성패를 다시 재구성하는 현재적 노력의 결과다. 이것이 현실 운동에서 하나의 전망으로 자리잡기까지 10년이라는 정리의 과정을 거친듯 하다. 나열되는 다양한 운동들 속에 노동운동의 중심성이 이론적/현실적으로 유효한가라는 질문들, 그리고 노동운동이 나열된 다양한 운동 중 하나인가라는 도식적인 10년 전의 그 물음들도 떠오른다.

 

사회운동포럼은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에 대한 한 단락의 정리의 자리였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겨울철쭉님이 정리를 잘 해주셨다. 핵심정리 요약본이다. 이 정리를 따라가면서 한결 더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로 열린 사회운동포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운동 방식을 구체화하기위한 초석을 다지는 자리였다. 그런 의미로 200%의 목마름으로 사람들은 모였고 120%의 만족과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희망을 느끼는 것이 정말 얼마만인가. 

 

그동안 활동가들은 무너져가는 지붕의 끝자락을 밀어올리느라 다른 것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무너질까 무서워 섵불리 손을 떼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강요당해왔다. 그 속에서 지쳐가고 떨어져나가면 그걸로 부채의식만 잔뜩 가진 찌질이가 되거나, 애초부터 그 지붕을 밀어올릴 생각이 없었던 이에겐 배재와 상처만 준 터였다. 사실 지붕은 허물어도 주춧돌과 그 토대는 아직 튼튼하게 살아있다. 이제 그 위에 새로운 지붕을 만드는 것이 현재 이 사회를 살아가는 자들이 할 일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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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2

삐약~

새 둥지 틀다.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홀짝, 마음이 그 바람을 먹고서 변덕이 생겼나보다.

온 종일 비 핑계로 이불보에 등짝을 붙이고 있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버렸지만 게으른 관성은 등짝에 그대로 남아있네.

그냥 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같지만, 이렇듯 생산적인 뭔가를 만드는 걸로 위안을 삼아보련다.

 

손에 쥔 리모콘이 바빠지고 머리 속에 슬슬 짜증이 올라올 때 EIDF 편성표가 문뜩 떠올랐다. EBS가 나름 노림수로 배치한 듯한 마이클 무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참 방영중이다.



<로저와 나>로 이자를 처음 접했을때는 그냥 똘아이 기질이 있는 발랄한 감독이라 생각했다. 당시 국내 독립 다큐멘터리가 메시지의 진보성에서 한 걸음 더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라 오랜만에 시원하게 가슴이 뚫리는 느낌도 주고 말이지. 책 [멍청한 백인들]과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 <화씨 911>까지 그 신선함은 줄었지만 관객으로써 느끼는 희열은 여전했다. 현상적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대중적 흥행과 영화제 수상을 한 독보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EIDF 방영한 <마이클 무어에 뒤집어 보기> 다큐멘터리는 그간 마이클 무어에 대한 비판과 의문들을 쏟아냈다. <로저와 나>가 국내 소개될 때 이미 팩트 왜곡과 제작 윤리 문제도 함께 전달이 되면서 국제적으로 <로저와 나> 배급 중단 성명과 호소 글들이 활동가들 사이에 흘러다녔었다. 당시에는 그저 보수진영에서 가하는 음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듬어서 마이클 무어가 그 이후 보여준 행적들을 보면 실망스런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의 감독이 전개하는 재조명의 각도가 다층적이긴 하지만 핵심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마이클 무어스러운 형식의 차용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이와 유사한 마이클 무어 다시보기 류의 다큐멘터리가 적지 않다는 걸 고려해보면 특별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저 우익들이 마이클 무어에 자극받아서 만든 노골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여기 나온 것들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끈건 대선에 적극 개입한 마이클 무어의 모습이다. 주류 엔터테인먼트계로 편입해서 그야말로 "스타"가 되어버린 그 사람은 녹색당을 지지하다가 배신(녹색당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하고 민주당으로 흘러가게된다. 이자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민주당을 지지해온 많은 연예계 스타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큰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 핵심 쟁점은 부시 재당선을 어떻게든 막아보자는 것이었는데, 이런 측면에서 녹색당에서 민주당으로 버스를 갈아탄 마이클 무어의 변명도 정치공학적으로는 일리가 있어보이는 말이다.

 

왜? 이 자는 스스로 좌파라고 선언한 적도 없었고, 당시 대안이 될 만한 좌파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그다지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대박터뜨린 스타가 대중을 대하듯 그 정도의 쇼맨십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들여다보면 지금 반한나라당 전선을 두고 술렁이는 범여권과 진보진영의 모습이 당시 미국 대선의 모습을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다. 범여권은 그렇다쳐도 얼마나 많은 진보진영의 우파들이 반한나라 전선이라는 정치공학적 이유로 버젓히 버스를 갈아타겠냐 말이다. 이미 그 조짐은 보이고 있고 12월이 가까워 질수록 본색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진보진영이 마이클 무어와 다른 점은 대중과의 관계 문제다. 스타가 대중과 관계맺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관계가 명확하게 뭔지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은 없지만 달라야 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 존재의 이유를 망각하는 순간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영화에서 한 평론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마이클 무어가 전국적으로 투표 참여 강연을 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좌파!!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된 좌파가 있었다면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그저 웃음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대선을 앞둔 국내 상황도 비슷하단 생각이다. 진보진영이 반한나라당 전선을 이유로 버스를 갈아탈 준비를 하는 것은 좌파가 그만큼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스믈스믈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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