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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에 대하여〔 上 〕

보편자에 대하여 〔 총명한 유물론 3


The Universal1, The Ideal in Human Activity, Pacifica: MIA, 2009[1975], 225-52.


E. VIl'enkov | 구 소련 유물론 철학자·논리학자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보편자(Universal)’란 무엇인가?

 

만약 적어도 인접한 두 단락을 읽는 동안에 모호함과 오해를 피하려면, 이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vseobshchee(보편적)’라는 용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obshchee vsem(모든 것에 공통적)’이다. 'Vsem(모든)'은 우리가 살고 있거나 말하고 있는 세계의 첫인상을 구축하는 무한한 다수를 이루는 개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이 아마 ‘보편자’에 관해 누구나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부일 것이다. ‘보편자’에 관한 본격적인 철학적 논쟁들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우리는] ‘obshchee(보편적)‘라는 용어 자체가 일상 언어 속에서 상당히 제멋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용어적] ‘지시들(denotations)’ 가운데에는 서로 다르거나 일치하지 않는 대상들(objects)과 명칭들(designations)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반대되며 상호 배타적인 대상들과 명칭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현대 러시아어 사전』은 이 의미를 열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 두 가지는 스펙트럼의 양극단에는 위치하여 서로 거의 양립하기 어렵다. ‘공통자(Common)’는 비록 어떠한 둘에게만 공통적일 뿐만이 아니라 ‘모두’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그 양쪽[둘과 ‘모두’]의 구성 요소로서도 속하는 것이며,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와 카이우스에게 이족 보행과 필멸성이 그러하거나 전자와 기차에게 속도가 그러한 것처럼, 이 두 개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공통자’는 또한 이 두 개체와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정확히는 하나의 사물이나 [두 개체에 자립하는] 또다른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 즉 공통 조상·둘을 위한(또는 모두를 위한) 공통하나··공통의 자동차·부엌·공동의 친구나 지인 등으로 이해된다.

 

분명히, 같은 용어 및 같은 ‘기호’[보편자]는 이 경우에 결코 동일한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이를 자연어의 ‘불완전성’ 중 하나로 간주하든, 혹은 반대로 자연어가 인공어의 경직된 정의에 비해 가지는 유연성의 장점으로 간주하든, 이는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으며 상당히 전형적인 사실이므로, 해명을 요한다.

 

용어의 절대적인 비모호성(the absolute non-ambiguity of a term)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및 그것의 적용)는 ‘과학적 언어’의 이상을 위해 전제된다. 보편적 논리 범주에 관한 엄밀한 정의를 추구하는 과학은, 일상 언어에서 ‘공통자’라는 용어의 그러한 ‘모호성’과 타협할 의무가 있다적어도 ‘공통자’와 ‘보편자’가 논의될 때마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모호함이라는 사실은 상반된 의미 중 하나를 첫째가는(the initial one) 의미로 전제하고 다른 하나를 오용된 것(illegitimate)으로 선언한 다음, 자연어의 ‘비과학적 성격’을 이유로 그것[오용된 것]을 폐기함으로써 간단히 무시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오용된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칭하기 위해 또다른 용어, 또다른 ‘기호’를 만들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새로 고안된 기호와 ‘공통자’라는 용어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 시도해야 할 것인즉 비록 다른 언어적 형태 속에서라도 이전의 문제를 소생시키려 시도해야 할 것이다.

 

가정을 하나 하고, 누군가가 ‘공통자’를 단지 추상적 단일자, 동일자, 또는 감각적으로 인지된 둘(혹은 그 이상)의 개별 ‘사실’(‘언어외적 사실들’)의 구성에서 드러날 수 있는 불변적인 것만을 함축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더 나아가 ‘공동의 밭’, ‘공통 조상’, ‘공동의 친구(또는 적)’ 등의 단어 조합들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사용하지 않기로(또한 함축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 단어[‘공동의 밭’, ‘공통 조상’, ‘공동의 친구(또는 적)’ 등]는 명백히 개별과는 따로 존재하고, 개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파악되며, 그 개체들에 대해 어떠한 ‘공통자’로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고독한 대상(또 하나의 개체로서)을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주츠카는 개이다”, “논리학은 과학이다”와 같은 ‘과학적 언어’ 표현마저 배제했다고 가정한다면, 이로부터 (우리가 타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그 의미에서의) 공통자는 또한 관조(‘감각’에서, 상상에서, 기실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것)에서 제시되는 개별(특수) 사물이나 대상의 직접적 정의로서도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위해[언어를 이 직접적 정의에 조응시키기 위해] ‘관계 논리학’에 의해 발명된 번거로운 구두 언어적 구문들(verbal constructions)을 계속 사용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 ‘공통자’와 개체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어려움들이 우리 언어에서 사라지고, 더는 그 속에서 표현되지 않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들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것은 ‘언어 일반’과 ‘언어외적 사실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어려움으로서, 다소 생소한 외관 아래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의 인정은 그것들을 다루거나 해결하기를 조금도 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그것들은 ‘언어외적 사실들’을 표현하려 애쓰는 ‘언어’ 속에서 생성될 것이다.

 

우리는 (‘공통자’의 정의라는) 논리적 문제를 ‘언어외적 사실들’의 ‘언어’에서의 표현 기법들과 관련된 다른 문제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는 그 수많은 무익한 시도를 더 자세히 분석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법들은 지성으로 하여금 ‘공통자’와 ‘개별적인 것’의 상호 연관에 관한, 그리고 자연어의 ‘모호성’과 ‘불명료성’으로부터의 어려움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신실증주의의 길고도 악명 높은 사례사(事例史)는 결국 일종의 상호 비방과 중상모략으로 귀결된다. 공통자와 보편자의 객관적 실재성을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근거들로) 거부하는 그 모든 형이상학(그리고 사유의 대상을 ‘원자화된 사실들’의 경계 없는 바다로 해석하는 것은)으로 유명론을 재정비하려는 이 뒤늦은 시도는,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해결책이 이 경로를 따라서는 발견될 수 없음을 충분히 명료하게 증명해 보였다.

 

‘자연어’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 바깥의 ‘공통자’의 실재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플라톤이나 헤겔의 형이상학은 신실증주의의 형이상학에 못지않게 이 언어 속에서 정확한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자연어는 적어도 ‘과학의 언어’가 그에 대해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헛되이 배제하려 애쓰는 문제를 단어(words)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한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는 그것을 부적합하게 공식화하거나 순수 심리생리학(pure psycho-physiology)·언어학의 차원으로 옮김으로써즉 언어 기호와 그 ‘의미’의 관계라는 문제로 계속하여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의 탐구자에게] 되돌아온다. 예를 들어, 과학의 언어의 옹호자들은 개별적·일회적으로 주어지며 유일무이한 ‘경험들(experiences)’, 다시 말해, 개개인의 심리생리학적 찰나의 ‘상태들(states)’의 총체를 표현하려 한다.

 

만일 그리 공식화된다면, ‘공통자’(보편자)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무의미해지겠지만, 이는 순전히 그 문제에 굴복하는 것일 뿐, 그것의 해결은 아닐 것이다. 실생활(특히 이론가의 삶)에서, 그리고 필경 이 삶을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살아있는 언어 속에서, 보편과 개별의 관계에 대한 문제(the problem of the universal and its relationship to the individual)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리 물어야 적절할 것이다: ‘공통자’라는 단어의 두 가지 극단적그리고 상호 배타적인의미, 다시 말해 살아있는 언어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게 유효한 이 두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각각의 것들이 공통으로 무얼 가지는지, 즉 이 의미 차이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밝혀낼 수 있는가?

 

형식 논리학은 그 전통에서 단어의 해석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 선언되었던 방식[을 그대로 함유한] 탓에 그것[의미 차원의 근원을 밝혀내는 일]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공통자’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각각의 정의에서 그러한 ‘공통 특징’은 발견될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이 전통의 가장 단호한 옹호자들인 신실증주의자들에게조차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후자의 경우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상대적인 단어들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한데이 단어들은 인간의 친척들처럼, 아무것도 공통으로 가지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동일한 권리로서같은 성(姓)을 지닌다.

 

‘자연어’의 용어 사이에 그러한 관계는 L.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상당히 전형적인 것으로 기록되었다: 처칠-A는 처칠-B와 가족 유사성 a, b, c를 가지고 있다; 처칠-B는 처철-C와 특징 b, c, d를 공유한다; 처칠-D는 처칠-A와 단 하나의 특징만을 ‘공통자’로 가지며, 반면 처칠-E와 처칠-A는 그들의 이름 외에는 단 하나의 특징도, 아무런 공통점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데, 우리는 또한 거기에 그들의 ‘공통 조상’도 덧붙여야 한다.

 

이 경우 처칠 가문의 공통 조상이자 창시자의 특성은 그 모든 후손에 의해 유전적으로 보존된그리고 오직 그러한 것으로서‘공통 특징’을 추상화함으로써 재구성하기 어려울 것임이 명백하다. 이 공통 특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공통된 기원을 증명하는 공통된 이름(common name)은 명백히 존재한다.2

 

‘공통자’라는 바로 이 용어 [자체 또한] 거의 그와 같다. 용어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특징’을 하나의 가족(family)으로서, 형식적으로 결합하거나 모든 후손 용어를 하나의 ‘친족(kin)’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의 비유를 확장하는 데로 나가자면, 처칠-알파[공통 조상으로서 ‘처칠’]는 금발이면서 흑발인(=금발이 아닌); 크고 작은; 눅눅한 코와 매부리코 등 수다한 특징을 가진 개체로 묘사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유는 아마도 이 지점에서 끝장날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친족-가문(kin-family)의 기원에는 항상 두 유전 계통[부모]이 존재하므로, 처칠-알파는 그의 직계 후손들의 가족 유사성 중 과반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는 아마 순전히 형식적인 수단들이 답하지 못할 문젯거리이다.

 

상대적 용어들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조상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함께 살아가듯이, 통상 거의 죽지 않은 채 오히려 그의 후손들과 나란히 그의 삶을 이어간다; 여기서 핵심은 유효한 특수자 중에서 다른 모든 이들보다 출생이 앞서고 따라서 나머지를 낳을 수 있었던, 그러한 개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외부 유전 계통[아버지 계통에 대해서는 어머니 계통, 어머니 계통에 대해서는 아버지 계통]의 어떤 기여도 없이 발생하며, 그것은 한 개인 안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공통 특징들’의 출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그러한 계통이다; 따라서 그것들[‘공통 특징들’] 사이의 관계는 순전히 논리적 부정의 관계일 것이다.

 

그의 후손 가운데 살아서 계속 실존하는 공통 조상의 ‘특징’ 중 하나에 자기 자신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생성하는 능력큰 사람(자신에 비해)과, 반대로, 작은 사람(역시 자신에 비해) 둘 모두를 생성하는 능력이 있음이 시사된다. 논리적으로, 이는 ‘공통 조상’이 중간 키에, 곧은 코와 연한 회색 머리를 가진 개체, 즉 반대 규정들을, 비록 잠재적으로라도 ‘조합하는’ 개체; 또는 이 특징과 그와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마치 용액이나 혼합물의 상태처럼 자기 내부에 함유하는 개체로 떠올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추론으로 이끈다. 따라서, 회색은 흑과 백의 혼합물, 즉 흑과 백이 동일 인물 안에서, 게다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으로 쉬이 생각될 수 있다. 실증주의자들이 변증법적 논리를 공격할 때 아군으로 삼는 ‘상식’과 양립할 수 있는 게 여기에는 사실상 없다.

 

그럼에도 이는 논리학에서, 특히 ‘공통자’(보편자)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있어, 명백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하는 유일 지점이다. 하나는 변증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통자’의 문제에 관한 궁극적으로 형식[주의]적인 개념을 규정하는데이는 본질과 기원 모두에서 실체 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진화의 이념을 논리학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나는 실체 개념과 연결된 진화, 즉 언뜻 보기에 어떠한 추상적 공통 ‘특징들’도 그들 사이에서 찾지 못하므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바로 그] 현상들의 발생학적 유사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the genetic similarity of phenomena)를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실증주의 지도자들이 이 존경받는 범주에 대해 적대적이고,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불쾌해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해명한다. 특히 헤겔은 바로 이 명제를 변증법적 사유(혹은 그의 용어로 ‘사변적인 것’)와 순전히 형식적인 사유 사이의 분수령, 즉 그 길이 갈라지는 지점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이해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 논리학 분야에서 그의 추종자들의 정신보다 훨씬 뛰어나게 한 심오하고도 풍부한 장점으로 규정하였는데, 그 추종자들은 스피노자·헤겔·마르크스의 발전 계보를 무화(無化)하면서 자신들이 논리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일하고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세 영혼의 관계[영양혼(營養魂), 감각혼(感覺魂) 그리고 지성혼(知性魂), 즉 식물 생명, 동물 생명 그리고 인간 생명]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이 구분은 잘못되었지만) 우리가 이 모든 영혼이 존재하는, 또한 명확하고 단순한 형태로서 이들 중 어느 하나와도 일치하는 하나의 영혼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완전한 진리를 말한다. 이는 심오한 관찰이며, 이를 통해 진정으로 사변적 사유는 단순히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사유와 구별되기에 이른다. 유사하게, 도형 가운데 삼각형·정사각형·평행사변형 등과 같은 다른 명확한 도형들만이 참으로 어떠한 것으로서 규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공통자인 보편적인 도형은 하나의 공허한 사고물, 단순한 추상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삼각형은 최초의, 진정으로 보편적인 도형이며, 정사각형 등에서도 나타나는 도형으로서 가장 단순한 정의로 귀결될 수 있는 도형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삼각형은 정사각형·오각형 등과 함께 특수한 도형으로서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주장은 바로 그것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도형[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것으로서 도형이다; 일리옌코프]이라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영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구해져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생명체 안에서 영양혼과 감각혼은 지성혼 안에 포함되지만, 단지 그것의 대상이나 그것의 가능태로서만 포함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식물의 본성을 구성하는 영양을 공급하는 영혼 또한 감각을 느끼는 영혼 안에 현존하지만, 그와 똑같이 그 안에 내재한 것으로서, 또는 보편자로서만 존재한다. 혹은 하위 영혼은 오직 상위 영혼 안에 내재하는데, 이는 주어 안의 술어와 같다: 그리고 이 단순한 이념은 형식적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높이 평가될 만한 게 아니다; 그 자체 존립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 부정을 거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이는 현실태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들을 더욱 각별히 규정할 수 있다. 우리가 영혼과 육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육체를 대상적인 것으로, 영혼을 주체적인 것으로 부른다; 자연의 불행은 바로 이것인데, 자연은 대상적이라는 것, 즉 명시적이지 않고 암묵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자연에는 필경 어떠한 활동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영역은 그보다 높은 것의 개념 속에 내재한 대상적인 요소일 뿐이다. 더욱이, 그 영역에 내재한 것은 이념의 발전을 위한 실재성으로 나타나므로 양면성을 띤다. 보편자는 이미 그 자체로 현실적인 것이며, 예컨대 식물혼이 그러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공허한 보편자란 그 자체로 실존하지 않거나, 그 자체로 종(種)이 아니다. 모든 보편자는 기실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 타자에 대해 실존하는 것으로서 실재한다. 하지만 그 보편자는 그것 자체로, 더이상의 변화 없이, 그 자신의 첫 번째 종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이며, 더 발전했을 때 그것은 이 첫 번째 종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단계에 속한다. 이것들은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는 일반적 규정들이며, 그것들은, 만약 발전한다면, 유기체 등에 관한 모든 참된 관점으로 이어질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현 원리의 올바른 일반적 표상(correct general representation)을 제공하기 때문이다.”3

만약 우리가 이 관점에서 ‘일반적인 공통자’를 정의하는 문제를 관련된 의미들로서 가족의 ‘공통 조상’의 이론적 재구성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보편적(논리적) 범주로서 조망한다면, 우리는 이를 언젠가 해결하리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동일한 ‘친족’(그리고 그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에 속하는 모든 개별 표본에 추상적인 것, 즉 어떠한 공통적인 것을 찾으라고 지시하는 형식-논리적 지침은 이 경우에 적용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보편자’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애초에 이런 곳에는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개체에게 공통적인 ‘특징’ 또는 정의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각 개체를 독립적으로 취한다면, 그 개체의 전형적인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특정한 언어적 기교가 있다면 어디서든 ‘동일성’을 발견할 수야 있겠다만, 그 경우라면 명목상의 의미 외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독자와 책은 어떠한 ‘공통자’를 가지는가? 둘 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 속한다는 점이 그것일까? 아니면 둘 다 탄소·산소·수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일까?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공통자’는 무엇일까? 혹은 소비와 생산 사이의 ‘공통자’는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다양한 현상(개별자)을 어떤 ‘하나’로, 공통된 ‘집합’으로 결합시키는 관계의 구체적-경험적, 판연한 본질은 결코 그들의 추상적 공통 특징에 의해서도, 양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특징적인 정의에 의해서도 전혀 윤곽이 그려지거나 표현되지 않는다. 개체의 통일(또는 ‘공통성’)은 한 개체가 가지고 있고 다른 개체는 가지고 있지 않은 '특징'에 의해 훨씬 더 빨리 형성된다. 알려진 특징의 부재 자체가 그 특징이 두 개체 모두에게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두 개체를 서로 연결시켜 준다.

 

둘의 절대적으로 동일한 개별자들각자가 동일한 지식·습관·성향 등의 집합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그들은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흥미를 느끼지도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는 순전히 두 배로 늘어난 고독일 뿐일 것이다. 한 명의 현자가 변증법적 논리학의 입문을 그의 젊은 친구에게 설명하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조언했다. “그 신부에게서 젊은 남자를 매료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 ‘공통성’의 고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토의는 개별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상 생산과 소비와 관련하여 명목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동일한 유에 속하는 특정한(따라서 그 전문 분야에서 전형적인) 대상에 관한 것이다.

 

이는 변증법에서 가장 흔하고 추상적인(그래서 여전히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보편자 개념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이다. 각각을 따로 취한 개별 대상에서 수적으로 반복되는 ‘유사성’이 ‘공통 특징’의 형태로 표현되고 ‘기호’에 영속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둘(또는 그 이상)의 특정한 개별적 대상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는 그들을 동일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순전히 명목상의 통일물이 아닌하나의 통일물의 계기로 변화시키는데, 바로 이를 서로에게 전혀 무관심한 불확실한 (분절화된 사실 등의) ‘단위(units)’의 ‘집합(set)’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다양한 특수 계기의 총체라는 형식(form of some totality of various special moments)으로 나타내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할 것이다. 이때 ‘보편자’는 마르크스가 헤겔을 따라 표현한 ‘총체성’이라는 전체 안에서 이 세부 요소의 상호 관련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로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추상이 아니라 분석이다.

 

물론 이 문제는 ‘유사성’, 즉 추상적인 특징, 다시 말해 ‘모든 것’에 공통적인 세부 요소를 찾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목표를 이리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마치 변압기와 저항, 콘덴서와 스피커 확산기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주파수 대역 스위치의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라디오 수신기의 보편적인 구조와 작동 원리를 배우려는 시도만큼이나 무의미할 것이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6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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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에서 첫 번째 영어 번역본은 Frederick J. Adelmann이 편집한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in the U.S.S.R., Chestnut Hill: Boston College, 1975.에 수록되어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역자 주〕 ‘처칠-A’에서 ‘처칠-E’까지 그들의 공통 조상인 ‘처칠’을 이름으로는 공통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각 특징이 공통 조상인 ‘처칠’의 모든 특성을 온전히 보유하지는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모든 후손에 의해 유전적으로 보존된─그리고 오직 그러한 것으로서─‘공통 특징’을 추상화함으로써 재구성”될 수 없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G. W. F. Hegel,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tran. J. B. S. Haldane.의 아리스토텔레스 장. 일리옌코프는 독일어 원문을 인용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