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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문제 설정에 관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3장 (1) 총명한 유물론 3


3장.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CE CF CG

문제 설정에 관하여

 

경제학의 방법론을 분석함에서 마르크스는 막대한 철학적 비중을 지닌 다수의 명제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라는 특수한 임무를 사유를 통해 해결하기 위한 유일하게 가능하고 올바른 절차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에 관한 저 유명한 테제가 포함된다.

 

마르크스의 개념에서 구체는 다양성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구체는, 비록 실제적인 기점(point of origin)이자, 그에 따라 지각과 상상력의 기점임에도, 사유 속에서는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집약이자 결과로 표현된다.

“지성이 통찰하는 개념적 실체로서의 총체성은, 자신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1예술적, 종교적, 그리고 실천적-정신적인 세계 전유와 구별되는 방식세계를 전유하는 사유하는 지성의 산물이다.”2

“추상적 규정이 사유의 경로를 통한 구체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3는 것은, 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마르크스에 의해 과학적 관점으로부터의 올바른 방법으로 정의되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 방법은 “사유가 구체를 전유하여, 그것을 정신적 구체로 재생산해 내는”4 특수한 양식이다.

 

오직 이 방법만이 이론가가 자신의 특수한 임무, 즉 관조와 관념의 자료를 개념으로 가공하는 임무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자본론』의 방법을 이해함에서 이 명제가 갖는 특수한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더욱 상세히 머물러 천착해야 한다. 부르주아 철학자와 수정주의자가 이 명제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및 철학적 이념을 왜곡하는 대상으로서 빈번하게 악용해 왔음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먼저 다음을 상기하자: 마르크스는 구체를 결코 생생한 관조의 이미지나 의식 속에 반영된 대상의 감성적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추상을 오직 ‘정신적 분류’로서만 해석하지도 않는다. 만약 협소한 경험론과 신칸트주의의 특징으로서의 저 추상과 구체에 대한 관념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위 명제를 읽는다면, 반영론과는 양립 불가능한 부조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즉, 마르크스가 직접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으로서 정신적 추상으로부터, 사유와 관련하여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어떤 것으로서 생생한 관조의 이미지로 상승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를 읽을 때, 우리는 인식론에 관한 마르크스 이전의 저술이나 신칸트주의적 논문으로부터 비판 없이 차용된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르크스의 추상과 구체에 대한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위 명제는 생생한 관조에서 추상적 사유로의 이행, 관조와 관념에서 개념으로의 이행, 그리고 관조와 관념에 주어진 구체에서 이론적 사유 속에 표현되는 구체로의 이행의 변증법을 특징짓는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자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다음의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이론가가 그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의 종합을 통해 세계를 정신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저 모든 추상은, 분석을 통해 드러난 객관적 실재 그 자체의 개별적 계기에 대한 개념적 모상(模像)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으로 취해진 각각의 추상적 규정은 관조의 직접적인 자료에 대한 일반화와 분석의 산물이라는 점이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그것[추상적 규정]은 실재 속의 구체를 의식 내의 추상적이고 요약된 표현으로 환원시킨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전) 경제학에서 사용된 모든 규정이 관념 속에 주어진 구체로부터 멀어져 점점 더 빈약한 추상으로 향하는 운동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경제학이 가로지른 역사적 경로를 기술함에 있어, 마르크스는 그러므로 그것을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먼저 “빈약한 추상”에 도달하고, 오직 그 이후에야 그 “빈약한 추상”으로부터 이론 내에서의 추상의 체계이자 종합이며 결합으로 나아가는 경로로서 특징짓는다.

 

실재의 구체적 풍부함을 의식 속에 요약된(추상적)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은, 자명하게도, 그것 없이는 어떠한 특수하고 이론적인 연구도 진행되거나 시작조차 될 수 없는 전제이자 조건이다. 더욱이, 이러한 환원은 세계의 이론적 전유를 위한 전제나 역사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규정의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 그 자체, 즉 정신의 종합하는 활동의 유기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론가가 체계 속으로 조직해 넣는 규정은 물론 인식의 이전 국면(혹은 단계)으로부터 이미 주어진 것을 빌려온 것이 아니다. 그의 임무는 결코 그러한 종합을 위한 친숙한 규칙에 따라 이미 주어진 “빈약한 추상”의 순수 형식적 종합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이전에 획득된 추상으로부터 하나의 체계를 구축함에서 이론가는 언제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사실에 비추어 검토하며, 그리하여 실재 속의 구체에서 사유 속의 추상으로 상승을 다시 한번 밟아 나간다. 따라서 이러한 상승은 과학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전제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구축 자체의 유기적 계기이다.

 

“사유 속의 구체”를 산출하는 개별적인 추상적 규정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그 자체의 과정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구체적 지식의 획득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과정은,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 고리에서도 언제나 구체를 추상으로 환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상승과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은 세계의 이론적 전유, 추상적 사유의 상호 전제적인 두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은 오직 자신의 대립물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과의 통일 속에서만 실현된다. 자신의 대립물 없이, 즉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상승 없이 행해지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은, 비판 없이 빌려와 주어진 빈약한 추상을 순전히 스콜라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될 뿐이다. 그와 반대로, 연구에 관한 명확히 인식된 일반적 상(Idea) 없이, 가설 없이 무작위로 수행된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환원은 이론을 산출할 수 없으며 산출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파편화된 빈약한 추상의 더미만을 산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르크스는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서도,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세계의 이론적 전유(반영)의 유일하게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올바른 양식으로 정의했는가? 그 이유는 변증법이 절충주의와는 구별되게,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렇다”는 식의 원리에 따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물의 통일 속에 주어진 사례 내에 주도적이거나 결정하는 요소인 결정적 측면을 언제나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변증법의 공리이다.

 

(단순한 사실에 대한 경험적 친숙성과는 구별되는) 이론적 전유의 특수하고 고유한 특질은 각각의 개별적 추상이 대상의 더 완전하고 더 포괄적인, 즉 구체적인 개념을 향한 연구의 일반적 운동 내부에서 형성된다는 점이다. (‘구체에서 추상으로’라는 공식에 따른) 각각의 개별적 일반화는, 그것이 사유 속에서의 대상에 대한 추상적 반영으로부터 개념 속에서의 그것의 점점 더 구체적으로 되는 표현으로 상승하는 도정에서, 현실의 구체적 이해로 나아가는 길 위의 한 단계라는 조건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만약 개별적인 일반화 행위가 동시에 이론 발전에서 한 걸음의 전진, 즉 이미 이용 가능한 지식에서 새롭고 더 완전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 위의 한 걸음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일반적 규정으로 이론 전체를 풍부하게 하며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알려진 것을 반복할 뿐이라면, 그것은 이론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무의미한 것임이 증명된다.

 

다시 말해, 구체(즉, 점점 더 구체적으로 되는 이론적 이해를 향한 지속적인 운동)는 여기서 이론적 사유의 특수한 목표로서 출현한다. 그러한 목표로서 구체는 하나의 법칙처럼, 각각의 특수한 경우와 각각의 개별적 일반화에서 이론가의 행동 양식(물론 여기서는 정신적 활동을 의미한다)을 결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상은 이론적 과정의 목표라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수단임이 증명되며, 반면에 각각의 개별적 일반화 행위(즉, 구체를 추상으로 환원하는 것)는 전체 운동의 종속적이고 소멸하는 계기로서 나타난다. 변증법의 언어로 ‘소멸하는 계기’란, 다른 계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오직 다른 계기와의 연관 속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 속에서, 즉 이행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정확히 마르크스는 변증론자였기에, 이론적 사유에서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운동과 추상에서 구체로의 운동이 모두 일어난다는 사실을 단순히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어진 사례에서 주된 것이자 지배적인 것으로 판명되어 타자의, 대립물의 비중과 의미를 결정하는 저 사유의 운동 형태를 무엇보다 먼저 추려냈다. 특수 이론 연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형태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론적 사유의 특수한 형태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다른 한편의 그것대립 형태가 사유에서 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실의 구체적 풍부함을 의식 속의 추상적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이 세계의 이론적 반영의 특수한 형태도, 하물며 결정적인 형태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직 미친 사람만이 사람이 [이를 일러 사람이] 음식 없이 전적으로 지내야 한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이 격언이 음식의 역할을 폄하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그만큼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동일한 것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로 옳다. 오직 과학적 사안에 전적으로 무지한 자만이 감각적으로 구체적인 사실의 충만함을 추상 속으로 흡수하는 것을 이론가의 정신적 활동의 주된 것이자 결정적인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과학에서 이것은 더 진지한 과업, 즉 세계의 이론적 전유를 위해 특수한 것이며 이론가 활동의 진정한 목표를 구성하는 저 과업을 수행하는 데서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사유 속에서 구체의 재생산은 개별적인 일반화 행위 각각의 비중과 의미를 결정하는 목표이다.

 

물론 사유 속의 구체가 궁극적인 목적, 그 자체 종결점인 것은 아니다. 이론 전체 또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실재적이고 실천적인 객관적 물질대사 속에서는 단지 하나의 ‘소멸하는 계기’일 뿐이다.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며, 이 이행 또한 추상에서 구체로의 이행으로 기술될 수 있다. 실천은 더는 자신의 외부에 더 높은 목적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이론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개별 단계와 각각의 일반화는 끊임없이 실천의 자료와 견주어지며, 그것에 의해 검증되고, 이론적 활동의 최상위 목적으로서 실천과 상호 연관된다. 이것이 레닌이 『자본론』의 방법을 언급하며 그 가장 고유한 특징의 하나로 다음을 지적한 이유이다: “사실에 의한, 또는 각각의 실천에 의한 검증은 여기서 분석의 단계에 발견된다.”5

 

분석의 “매 단계”를 과학적 연구 경로 전체의 방향과 궁극적으로는 실천과 끊임없이 상호 연관시킴은, 세계의 이론적 전유가 갖는 특수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의 본질 그 자체와 결합되어 있다. 분석의 각각의 개별적 단계, 즉 구체를 추상으로 환원하는 각각의 개별적 행위는, 처음부터 생생한 관조 속에, “관념 속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전체를 지향해야만 한다. 이 전체의 반영이야말로 이론적 작업의 최상위 목적이다(물론 우리가 이론적 작업을 다루는 한에서, 즉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오직 이론적 관계만을 맺고 서 있는 한에서만 그러하다).6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야말로 이론적 과정에 특수하게 내재하는 특성을 구성하며, 살아있는 관조와 관념 자료를 개념로 변형시키는 유일하게 가능하므로, 유일하게 과학적으로 올바른 과학적 규정의 전개 양식이라는 마르크스의 명제에는, 바로 이러한 심원한 변증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모든 참된 과학적인(불합리하거나 공허하지 않은) 추상적 규정이, 구체를 추상으로 환원하는 생각 없는, 무작위한 행위의 결과로서 인간의 머릿속에 출현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과학의 전반적인 법칙적인 발전 속에서 인식이 일관되게 전진함으로써, 즉 이용 가능한 지식의 구체화와 그것의 비판적 변형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각각의 과학이 세계에 대한 일면적인 분석적 태도의 단계, 즉 구체를 추상으로 환원하는 순수하게 귀납적인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며 오직 나중에 이 작업이 완전히 성취되었을 때에만 그렇게 획득된 추상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하여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경제학의 역사를 언급하며, 그것이 그 기원에서는 실제로 일면적인 분석적 경로를 따랐으나 오직 나중에서야 과학적으로 올바른 경로를 채택했다는 사실을 거론했을 때, 이는 물론 모든 현대 과학이 이 사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 즉 먼저 순수하게 분석적인 단계를 거치고 나중에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진행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기 부르주아 경제학의 특징인 저 일면적인 분석적 방법은 결코 모범으로서 권고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 경제학의 역사적 한계의 표현이었으며, 특히 잘 발달한 변증법적 사유 방법의 부재가 조건 지은 것이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결코 현대 과학이 먼저 순수한 분석, 즉 구체의 추상으로의 순수한 환원을 수행하고, 나중에 순수한 종합, 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순수한 상승을 진행할 것을 권고하지 않는다. 구체적 지식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는 획득될 수 없으며, 만약 획득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마르크스 전 부르주아 경제학의 발전이 겪어야 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방황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용한 사례는 오히려 오늘날의 과학이 17세기의 방황을 반복하기보다는 바로 그 시초부터 과학적으로 올바른 길을 택해야 한다는 테제를 옹호하는 논거이며, [즉 과학은] 일면적인 분석적 방법이 아니라 분석과 종합이 긴밀하게 뒤섞여 있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변증법적 방법을 바로 그 [분석의] 시초부터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 바로 그 시초부터, 각각의 추상적 규정이 동시에 구체적 진리, 즉 통일되고 일관되며 발전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실재에 대한 인식을 향하여 전진하는 도정 위의 한 걸음이 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추상적 규정을 가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논거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초기에 다른 길을 택했으나, 그것이 그 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과학이, 만일 그것이 사실과 다양한 자료의 잡다한 복합체일 뿐이 아닌 참된 과학이라면, 바로 그 시초부터 자신의 대상을 반영해야 하며, 마르크스가 과학에 있어 유일하게 가능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특징지었던 저 방식으로 자신의 규정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쿠노, 레너 등의 신칸트주의적 수정주의자가 권고했던 것처럼, 이미 획득된 결과를 문학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이 방법을 나중의 용도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우리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관한 마르크스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즉 이 방법을, 단지 순수하게 귀납적인 방식으로 획득되었다고 주장되는 그런 이용 가능한 결과를 서술하는 문학적 양식으로서만 제시하려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물론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마르크스의 저작, 즉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경제학 비판 요강』 그리고 『자본론』에서 가장 명확하게 목격된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서술[이미 획득된 결과에의 문학적 서술]이 그것의 방법 면에서 탐구[추상과 구체로의 상승]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거나, 혹은 마르크스가 탐구에서 적용한 방법이 결코 탐구 결과의 서술 방식과 직접적으로 대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자본론』의 논리학’에 대한 분석은 마르크스에 의해 적용된 탐구 방법, 즉 관조와 관념 자료를 가공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자본론』은 전에 획득된 결과를 문학적으로 진술하는 모델로서만 유익할 뿐,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의 예증으로서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마르크스의 탐구 방법은 『자본론』의 분석으로부터 재구성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가 경제적 사실을 독창적으로 연구할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거친 초안, 발췌록, 단편, 주장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쓴 반마르크스주의 팜플렛의 저자이자 신학자인 페처(Fetscher)의 주장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따랐던 방법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학자에 의해 적용된 것과 동일하다. 변증법은 마르크스 스스로 『자본론』 제2판 서문에서 말했듯이 단지 ‘서술 방법’, 즉 실제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더 상세히 고려하지 않을 저 방법으로서만 사용되었는데”7,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 방법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페처는 여기서 발전된 형태의 이론적 제출은 그 이론을 낳은 탐구와 다르지 않을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진술에 대해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 둘 사이의 형식적 차이는 사고 방법의 본질, 즉 관조와 관념 자료를 개념으로 정교화하는 방식의 본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 방식은 자료의 예비 가공 단계에서나 최종적인 정교화 단계에서나 동일하게, 즉 변증법적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자본론』의 창조로 정점에 달한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그 방법이 완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결코 문학적·수사적 성격이 아닌 저 서술 방식의 주요한 이점은, 『자본론』의 저자가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획득된 기존의 결과물을 교조적이고 설교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를 얻어내는 전체 과정, 즉 그 결과로 이어지는 전체 탐구를 독자의 눈앞에서 거쳐 간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는 이미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나를 진정으로 따르고자 하는 독자는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8라고 충고한 바 있다. 서술 방법은 독자를 특정한 특수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즉 추상으로부터 경제적 실재에 대한 점점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견해로, 즉 특수성의 결합물로서의 보편으로 인도한다.

 

물론 25년이 넘는 탐구의 모든 세부 사항과 일탈이 서술 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연구 자체가 보여주었듯이 사고를 구체적 이해의 경로를 따라 실제로 전진시켰던 저 주요하고 결정적인 특징만이 재현될 뿐이다. 마르크스는 출판을 위한 사실의 최종 정교화 속에서, 학자라면 누구든 불가피하게 빠지는 연구의 주요 주제로부터의 수많은 일탈을 더는 반복하지 않았다. 실제 탐구 과정에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실이 종종 고려되기도 한다: 그것이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오직 분석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기에 그렇다. 게다가 이론가는 한때 철저히 분석된 것처럼 보였던 사실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 빈번히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결과, 연구는 매끄럽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빈번한 회귀와 일탈을 동반하는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전진하게 된다.

 

이러한 계기는 물론 최종적인 서술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이 덕분에 탐구 과정은 우연적인 요소와 일탈로부터 자유로워진 참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탐구는 이를테면 곧게 펴져, 사실 자체의 본성 및 운동과 일치하는 연속적인 전진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서 사고는 하나의 사실을 정말로 완전히 소진하기 전에는 다음 사실의 분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완으로 남겨진 것을 처리하기 위해 동일한 주제로 몇 번이고 되돌아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에서 재료의 서술 방법은 그것의 탐구 방법을 ‘교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교정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탐구 자체가 명령한 요구와 법칙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서술 방법은 온갖 부수적인 것과 혼란스러운 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진 탐구 방법즉 연구의 객관적·논리적 법칙에 엄격히 순응하는 탐구 방법이다. 그것은 순수한 형태의, 즉 일탈과 우연적 요소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체계적 형태의 탐구 방법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2판 서문에서 말한 형식의 차이에 관해서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상황, 특히 마르크스 개인이 자본주의 연옥의 여러 층계를 알게 된 순서가 그 층계 자체의 발전 법칙에 상응하게『자본론』에 제시된 순서와는 다르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정 측면이 어떠한 이유로 개별 이론가나 과학 전체의 시야에 들어온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연구 중인 구체성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계기의 객관적 상호연관성에 상응하는 순서만을 지향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진정한 순서는 단번에 실현되지 않는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이론가의 과학적 경력이나 심지어는 과학 전체의 역사적 발전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과학 전체 또한 길고 고된 탐색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출발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사람들 사이의 법적, 정치적 관계 연구를 통해 경제적 관계의 분석과 이해에 도달했다. 그에게 법과 정치의 영역은 사회 유기체의 구조 연구를 위한 출발점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 이론의 서술에서 마르크스의 요구는 경제적, 물질적 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법과 정치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페처 유형의 이론가는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법이나 정치가 아닌 경제여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테제가 단지 마르크스 이론의 문학적 서술 방식의 특수성에 속할 뿐이며, 탐구 자체에 있어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는 여느 부르주아 과학자와 똑같은 일을 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핵심은 비록 법과 정치의 영역이 마르크스가 경제적 탐구에 착수하기 전에 연구되었을지라도, 그가 이 영역을 과학적(유물론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한 것은비록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개요 수준이었을지라도오직 그가 경제를 분석한 이후였다는 점이다.

 

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진정한 이중적 성격과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화폐, 이윤, 지대의 운동 법칙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가 가치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기 전까지, 화폐와 지대에 대한 그의 개념은 부정확했다. 『철학의 빈곤』에서 그는 여전히 리카도주의 화폐·지대 이론의 환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1850년대에 도달한 가치의 본성에 대한 명확한 개념만이 화폐와 지대 모두에의 진리의 빛을 보여주었다. 그전에는 화폐를 원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50년대 초에 마르크스는 위기와 ‘호황’의 시기에 화폐 순환과 관련된 혼란과 충돌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로 이러한 시도가 그로 하여 가치 개념을 아주 상세하게 파악하지 않는 한 화폐 순환의 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가치 개념을 가공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리카도의 수많은 환상을 공유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사실에 대한 탐구 방법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자료 연구가 진행된 순서를 언급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실재의 어떤 측면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론가의 주의를 끌어 과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 순서가 아니라, 대상에 상응하는 객관적으로 올바른 개념이 이론가의 정신 속에서 형성되는 순서를 표현한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과학적 이해의 발전이라는 내적 법칙을 표현하며, 이 법칙은 역사적 전진 과정에서 이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우연적 계기와 일탈, 그리고 종종 우회로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과학 발전의 표면(즉, 이론가 자신의 의식)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론가의 의식 속에서 이 법칙은 오랫동안 전혀 나타나지 않거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과학의 개별 대표자는 종종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잘못된 개념을 갖는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사상가를 그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견해가 갖는 객관적 의미와 과학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그의 역할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하다.

 

 이유로, 어떤 과학자의 전기적 사실이 갖는 참된 의미와 과학적 규정의 참된 발전 순서는 순수한 전기적 조사를 통해서는 밝혀질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의 실제적 진보(즉, 구체적 진리를 향한 사고의 체계적 전진)는 흔히 일반적인 연대기적 순서와 상당히 어긋난다. 레닌은 그의 단편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에서 지식 발전의 논리를 분석함에서 인물에 관한 연대기는 불필요하며, 그것이 사고가 그 대상을 파악하는 실제적인 단계적 순서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마르크스의 탐구 방법의 모든 고유한 특징이 경제적 사실을 연구하며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거친 초안·발췌록·주장이 아니라 바로 『자본론』에서 가장 명확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과학적 규정의 발전이 갖는 참된 순서가 드러나는데, 이는 자료에의 예비 연구 과정에서 오직 점진적으로만 빛을 보게 된 것이며 마르크스 자신에 의해서도 항상 명확하게 자각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언제나 자신의 성취물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태도였다: 그는 예비 탐구 단계의 오류와 누락을 여러 차례 ‘사후에’ 단호하게 교정했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진리의 핵심과 그것이 의식 속에 최초로 나타난 형태 사이를 객관적인 엄밀함으로 구별하함은 오직 사후에야 가능하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맹아는 오직 이 더욱 발전된 형태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마르크스의 탐구 방법을 『자본론』이 아니라 그의 기록 보관소에 있는 방대한 초안과 단편으로부터 재구성하려 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뿐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먼저 『자본론』을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 속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의 맹아’를 그야말로 식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이 탐구가 나중에 나온 더 정제되고 성숙한 표현 형태보다 초기적이고 예비적인 표현 형태를 선호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된다면 초기 표현 형태가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후기 형태는 왜곡된 변종으로 간주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자본론』에서의 체계화와 그것의 전개 방법은 사고의 범위, 지각 및 탐구 방법의 확대라기보다는 서술의 문학적 양식 및 그 완성도 덕분인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9

 

그것이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한 논리학’의 전개에서 무엇보다도 『자본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 이유이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적용한 서술 방법이 실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의 모델이자 변증법 일반에의 연구 및 정교화의 모델로서 공헌해야 한다고 지적한 이유이다. 이러한 예비 고찰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과학적 규정을 형성하는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서, 즉 생생한 관조와 관념 자료를 이론적으로 가공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를 착수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의 관조와 관념 자료는 개인이 개인적으로 관조하고 감각적 표상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마르크스주의의 선행 철학 및 인식 주체에 대한 인간학적 개념에 특징적인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며 극도로 협소하다. 마르크스에게 관조와 관념 자료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축적된 경험적 경험의 전체 덩어리, 즉 책, 보고서, 통계표, 신문 그리고 회계 장부를 통해 이론가가 이용할 수 있는 거대한 양의 경험 자료 전체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 자료가 사회적 기억 속에 요약된 형태로, 즉 추상적 표현으로 환원되어 저장되어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그것은 언어 속에서, 용어 속에서, 수치, 표, 그리고 기타 추상적 형태 속에서 표현된다. 현실에 관한 이 모든 정보를 사용하는 이론가의 특수한 과업은, 당연히, 이러한 추상적 표현에 한층 더 추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있지 않다. 반대로,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인식의 경험적 단계의 추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 및 재검토와 함께, 즉 이러한 추상의 비판적 극복과 함께 시작되며, 전체로서의 현실의 관점에서, 그것의 구체성 속에서 이러한 추상의 일면성과 주관적 성격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리고 그것 속에 포함된 환상을 폭로함으로써 진보를 달성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인식의 경험적 단계에서 이성적 단계로의 이행은 또한 추상에서 구체로의 이행으로 나타난다.

 

물론, 단순 상품 형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이자와 같은 부르주아적 부의 저토록 잘 발달한 형태에 대한 파악으로의 상승은 또한, 어떤 관점에서는,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사건의 표면 위에서의 그것의 표현의 추상적인 형태로의 운동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자는 그것의 비인격적인 수량적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과정을 표현한다. 이자 속에서 잉여가치는 극도로 추상적인 표현 형태를 취한다. 이 추상적 수량적 형태는 오직 그것의 구체적 내용으로부터만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현실의 그 어떤 추상적 계기도 오직 그것을 발생시킨 조건의 구체적 체계 속에서만 사실적인 설명을 발견하며,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자는 오직 최종적인 분석에서만, 하나의 최종 결과로서 구체적으로 (과학적으로) 이해되는 반면, 현상의 표면 위에서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헤겔적 해석에 대한 직접적인 논쟁 속에서 형성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후자(헤겔)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마르크스 방법의 유물론적 본성은 그것과의 비교를 통해 명확하고 생생하게 부각될 것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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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은 문자 그대로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으로(ihm einzig moglichen Weise)”이다. 이에 대해서는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 (Rohentwurf): 1857-1858, 1939, 22.를 참조할 것.텍스트로 돌아가기
  2.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978, 207.텍스트로 돌아가기
  3.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 (Rohentwurf): 1857-1858, 1939, 22.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텍스트로 돌아가기
  5. V. I. Lenin, “Plan of Hegel’s Dialectics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76, 318.텍스트로 돌아가기
  6. 미학적으로 발달된 ‘상상력(Einbildungskraft)’의 역할이라는 이 별개의 주제는 저자가 다른 저서─『우상과 이상에 대하여(On Idols and Ideals)』─에서 다루고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G. Bornkamm et al, Christen oder Bolschewisten, Stuttgart: Kröner, 1957, 89.텍스트로 돌아가기
  8.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978, 19.텍스트로 돌아가기
  9. 참고로, 이러한 어색한 수법은 오늘날의 수정주의자에 의해 정력적으로 실행되고 있는데, 그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그의 성숙기 저작이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원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자본론』은 1843-4년에 마르크스와 앵겔스에 의해 전개된 소위 ‘실재적 휴머니즘’의 왜곡된 개념으로 제시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