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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서 소외와 인간 해방─「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총명한 유물론』 제3집 봄호
조윤재 |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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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는 1844년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자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의 저술 「유대인 문제」를 반박하며 출간한 책으로 브루노 바우어를 비판한 3대 주저1의 하나이자 첫 번째로 나온 저술이다.
브루노 바우어는 말하자면 무신론자로 헤겔의 관념론을 끝까지 밀어붙여 과거 신실한 그리스도교도였다가 무신론자가 된 인물인데 그에 의하면 최고의 해방은 인간의 정치적 해방에 있다. 인간의 정치적 해방은 곧 종교로부터의 해방, 즉 공민적(Stadtsbürgerliche) 해방을 의미한다.2 이는 종교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능력인 자기의식에 근거해서만 자유로운 공민들의 체계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바우어에게 있어 인간이 가진 제일로 가는 능력은 자기의식인데, 이는 자기의식이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관념에만 의존하여 범주를 전개해나가면 선명하게 기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드러나 세계를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치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은 유럽적인 의미로, 곧 인간이 그리스도교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바우어는 그의 동료 포이어바흐에 가까워지고 있다.3 바우어는 아예 종교가 필요 없다 한다. 유럽의 인간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예속되어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전 단계는 곧 유대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바우어가 보기에 유대인들은 이중으로 속박되어있는데, 그들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교 국가인 독일에 의해 배척되어있고 둘째로 그리스도교보다 전 단계의 종교인 유대교라는 정체성에 의해서도 소외되어있다.
따라서 바우어가 보기에, 유대인이 정치적인 해방을 얘기하기에 앞서 취해야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인 유대교를 내다 버리는 일이다. 유대인이 유대교를 버리면 그들은 자유롭게 공민권을 이야기할 권리를 얻게 되며, 탈종교를 통해 해방을 얻게 된다. 즉,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 스스로의 유대인적 성격을 버려야 하는 데, 이에 의거하여 바우어는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 해방되어서는 안 된다”라 한다.4 그에 의하면 만약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해방된다면 그는 여전히 유대교에 묶여있는바,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5
인간의 공민적 해방이란 무엇인가? 곧 정교가 분리된 세속적(secular)인 국가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미국도 헌법 제1조에 국교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완연한 세속국가이다. 하지만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세속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시민사회와 국체 작동의 구체적 메커니즘의 실질에 있어 그리스도교 국가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문제를 발본하고 있는 것인데, 현재에나 마르크스의 시대에나 미국은 세속국가였으나 신앙심은 유럽보다도 더 으뜸갔다. 이는 실천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바우어의 주장을 반박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우어에 의하면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될 때 정치적 해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했음에도, 독일보다 더욱 종교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으로 잘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정치적으로 종교 국가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종교적인 국가 중 하나라는 점에서 실천적-역사적으로 미국은 정치적 해방이 (바우어의 의미에서)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비판은 비판이길 멈춘다”고 조소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르크스는 그 현상의 본질을 이렇게 적고 있다: 종교를 공법의 영역에서 사법(私法)의 영역으로 추방함으로써, 인간은 종교로부터 정치적으로는 해방된다. 비록 제한된 방식, 특수한 형식, 특수한 영역 안일지라도 인간이 타인과의 유대 안에서 유적 존재로 태도를 취하는 곳에서, 종교는 더는 국가의 정신이 되지 못한다.6 마르크스가 지적하듯 세속국가인 미국에서 종교는 공동체(Gemeinschaft)의 본질은 아니다. 다만 개개인의 본질로 되어있다. 미국의 그리스도교는 외관상으로는 국가와 무관하며 완전히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어있으나 여기서 인간은 두 가지로 분류되어있다: 그것은 공민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이다.7 바우어의 “비판”대로 인간의 공민적 특질이 종교적 성격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종교적인 성질이 지배하다가, 다른 때에는 공민적인 성질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회 자체는 공민적 일지라도 개인은 그 사회의 성원으로서만 공민적이며, 그 사회에서 분리된 개인으로서는 여전히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연관된 다음 구절은 이 책의 핵심일 것으로 파악된다:
“완성된 정치적 국가는 그 본질에 따라 인간의 물질적 삶에 대립하는 인간의 유적 삶(Gattungsleben)이다. 이 이기적인 삶의 모든 전제는 국가 영역 외부의 시민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속성으로 존립한다. 정치적 국가가 참다운 완성을 이루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사상과 의식뿐 아니라 현실, 그리고 삶에서도 천상의 삶과 세속적 삶으로 이중화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중 하나의 삶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의 삶으로,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공동체적(Gemeinwesen)으로 여긴다. 다른 하나의 삶은 시민사회에서의 삶으로, 여기서 인간은 사인 (Privatmenschen)으로 활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수단으로 저하시키면서 스스로를 낮선 힘의 노리개로 만든다. 천상과 지상이 서로 관계하듯, 정치적 국가 역시 정신적으로 시민사회와 관계한다.”8
여기서 이미 바우어의 주장이 해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우어의 요구는 인간의 정치적 해방이었다. 인간의 정치적 해방은 근대국가 미국에서 알 수 있다시피 국가 공동체가 종교적이지 않게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종교와 공민을 분리하는 것은 곧 종교를 공민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공민이 ‘천상과 지상의 삶’처럼 양립하는 것을 의미하는바, 바우어가 말한 해방은 정치적 해방을 전제해도 다가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서 한 인간이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것이 순전히 개인적으로 는 종교적이게 된다는 것만 말하지는 않고 있다. 내 생각에 여기서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바우어의 맹점은 근대 시민사회의 업적이자 성과인 공민권으로서 권리(즉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일신의 자유 등)는 외면적인 해방일 뿐 실질적, 즉 인간적 해방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종교적 자유는 그것에 대한 하나의 예시이다. 정치적으로만 해방된 자유주의 사회의 인간은 세속적인 국가에 관계할 때에만 공민으로서 세속적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오로지 ‘자유로운’ 정치 체계와 권리적, 제도적으로 관계할 때에만 ‘자유’롭고 그 외의 측면─즉, 실질적이고 경제적인─에서는 구시대 못지않은 속박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투표를 통해 위정자를 몰아낼 권리를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지지만, 우리를 얽매는 주체의 인격인 사장을 몰아낼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민은 오로지 정치와 권리의 부르주아적 양식에 관계하고 또 관계됨으로써만 ‘자유’로우며, 그 이외에는 어디에서나 ‘낯선 힘’에 묶여있는 소외된 인간이 된다. 속칭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정치와 관계할 때 자유로운 권리를 얻지만, 그 자유로운 권리는 한편으로 억압을 보증하는 한에서만 자유롭다. 따라서 근대 공민권의 자유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필수 계기이자 조건이라고 볼 수 있고, 이는 인민 ‘자유’의 옹호라는 가상태에 둘러싸여 은폐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내용을 프랑스 헌법과 「인권선언」에 기초하여 분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랑스 헌법에 명시된 것은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인데 하나는 Homme로서의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Citoyen(공민)으로서의 인간이다.9 Citoyen은 권리적으로 해방된 인간으로 공동체의 성원으로 존재하지만, Homme는 낱낱의 개인으로 소외되어있으며 각자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10 그렇다면 왜 인권은 Citoyen이 아닌 Homme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1791년과 1793년 프랑스 헌법에서 자유(Liberté)는 타인과 결합하는 공동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혹은 〈필연성의 인식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다른 사람들의 외력으로부터만 자유로운, 한마디로 말해 단자적(Monade)11 주체로만 실존한다.
한편 소유권(Propriété)은 사회 공동체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재산을 취득 혹은 처분할 권리를 의미하며, 이기적인 권리로 설명된다. 자본주의의 최초축적은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면서 발생한다. 즉, 농노가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유일한 소유물인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노동자가 된다. 물론 노동자는 투표권과 각종 “권리”로 표상되는 공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그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에 있어 자유로우나,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로 인하여 낯선 힘에 맡겨진 소외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된다. 노동자는 권리상으로 자유롭지만, 그러한 자유로움으로 인하여 자신을 상품으로 판매할 권리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자유롭다는 근대 민주정의 역설은 그것이 일면으로 자유를 창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유는 오로지 소외를 보증함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에 의하면 공민권에 의한 외적인 해방은 곧 다른 한편으로 자본에 의한 예속을 보증하는 한에서 자유일 수 있다. 헤겔이 말한 오성국가(den Not-und Verstandesstaat)는 시민사회의 최고 상태이지만 이기주의를 몰아내기는커녕 그것을 보증한다. 마르크스는 그렇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위에 거론한 인권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이기적인 인간을, 시민사회의 구성원과 같은 인간을, 다시 말해 자신 속으로 퇴각한 개인, 자신의 사적 관심과 사적 자의로 퇴각해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과 같은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인간은 그 인권을 통해 유적 존재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유적 생활 자체가, 즉 사회가 개인에게 외적인 환경으로서만, 개인의 근원적 자립성의 제한으로서만 현상한다. 개인을 결집하는 유일한 끈이란 자연필연성, 욕망과 사적 관심,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이기적인 인격 보존일 뿐이다.”12
여기까지 논지를 전개한 이후 고찰해보자면 브루노 바우어의 실패는 곧 재산권을 바탕으로 한 현대 자유주의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제 제2장의 내용을 다루어보자; 마르크스는 “모든 해방은 인간의 세계를, 그 관계를 인간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것”13이라고 하는데, 이는 루소(J. J. Rousseau)를 재인용한 것이다.14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고, 자신의 경험적인 삶 안에서, 개별적 노동 안에서, 개별적 관계 안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유적 본질을 회복할 때에야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forces proper)”을 사회적인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는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 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인간해방이 완성된다”15
진정한 해방은 이러한 이유로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유적인 본질을 인식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16
그것은 어떠한 말인가? 곧 종교가 아닌 계급적인 지양을 현실 혁명의 당면 과제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유대인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인이 처한 경제적인 현실, 즉 반유대주의적인 서사로 사용되는 고리대금업과 금융업에 있다. 환어음은 유대인의 현실적인 신이다.17 동시에 자본은 오늘날 모든 세계의 보편적인 신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마르크스는 이 부분(즉, 제2장)에서 브루노 바우어의 주장을 전도시켜서 바우어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바우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이후에 등장했다고 말하지만, 마르크스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처럼 되었다고 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오늘날에는 과거 유대인이 전유한 것으로 파악되었던 금융업과 초기 자본주의가 전 서구 사회의 보편적인 물신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오경 혹은 탈무드 안에서만 유대인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유대인의 본질을 발견한다. 우리는 오늘날 유대인의 본질을 추상적 본질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경험적 본질로서 발견하고 유대인의 편협뿐만 아니라 사회의 유대교적 편협으로서도 발견하는 것이다.18
이는 소위 “마르크스의 반유대주의”라고 이야기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는 외려 그가 바우어의 반유대주의를 조소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19 핵심은 바우어는 유대인의 본질을 그들의 종교적인 특수성에 있다고 보았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유대인의 본질은 그들의 현실적인 상태, 즉 경제적인 상황에서 발견될 수 있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유대교라는 종교 자체의 편협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공동체로서 ‘유대인적’ 편협, 다시 말해 유대인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근대의 단자적 주체로서의 유대인은 자본주의 하 소외되어있다. 유대인은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 소외되어있다. 마르크스가 유대인의 인간적 해방이 곧 그들의 사회적, 현실적─마르크스의 표현에 의하면 “경험적” 또는 “역사적”─본질을 지양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헤겔과 바우어에 대한 비판은 일관되어있다. 헤겔에게 역사라는 것은 논리적 범주·개념이 운동하여 스스로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바우어는 청년 헤겔학파 중 헤겔의 그러한 측면을 강화하여 특유의 “비판적 비판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바우어와 같은 철학적인 태도는 20세기와 21세기 인문학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은 들뢰즈(G. Deleuze)나 푸코(M. Foucault), 근래에는 ‘신유물론자들’이 근대를 탈피한다는 명목하 수다한 ‘사회비판’을 전개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외를 구체적인 계급적 산물이 아니라 추상화된 ‘사물’의 ‘관계’ 정도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회분석에서는 계급성이 사상되어있으며, 소외는 “현대사회”의 추상적인 병리 정도로 파악된다.20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비판이 아니라 사회를 자기 자신의 추상적인 범주에─그들 표현에 의한다면 이른바 “사물”, “생성”─끼워 맞추는 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1세기 대륙철학자들의 처방은 바우어의 처방과 본질적으로 같다. 모순의 배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범주 체계 하 일면적·추상적으로 보는 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요컨대 모든 사회분석의 기초는 허공의 관념과 범주가 아닌 우리들이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에 기초해야 한다. 그것은 곧 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분석이 없는 한 모든 해방적인 운동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담론으로 그칠 수 밖에 없고, 언제나 세상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에서 ‘부유’하는 피상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참된 혁명적인 운동을 한다는 것은 곧 그 혁명을 현실적인 기초에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주의자는 철학-함에서 추상적인 범주에 현혹되지 말고,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현실에 입각한 철학을 전개하며, 구체 분석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끝>
2026년 5월 15일
-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1844), 『신성가족』 (1845), 『독일 이데올로기』 (1845-6)

- K. Marx,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김현 역, 서울: 책세상, 2021, 19.

- 포이어바흐에게 인간의 해방이란 다시 말해 인간이 신을 거치지 않고서도 자신의 유적인 본질(Gattungswesen)을 직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인간의 유적 본질은 의지, 이성 그리고 사랑이며,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대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구체적인 것은 그가 쓴 그리스도교 비판서인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문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참조하라.

- 같은 책, 23.

- 바우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대인은, 그가 공민이며 보편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생활하더라도, 유대인이며 유대인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의 편협한 유대인적 본질[유대교; 편집자 주]은 그의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의무에 대해 항상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근본원칙이 편견을 넘어서더라도 편견은 〔여전히〕 남을 것이고, 또한 편견이 남는다면, 편견은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 다시 말해 국가 안에서 유대인의 삶이란 다만 가상일 뿐이거나, 본질과 규칙에 대한 일시적인 예외에 불과할 것이다.”(같은 책 23-4.에서 재발췌)

- 같은 책, 37.

- 같은 책, 38.

- 같은 책, 34.

- 마르크스가 여기서 공민을 의미하는 Citoyen(불어로 “시민”)과 인간 자체를 의미하는 Homme(불어로 “인간” 혹은 “인류”)를 구분하여 쓰고 있음을 주의해야할 것이다.

- 같은 책, 51.

- 같은 책, 52.에서의 표현으로, 라이프니츠의 단자(모나드) 개념을 가리킨다.

- 같은 책, 54-5.

- 같은 책, 61.

- J. 루소는 이렇게 쓴다: “한 민족에게 법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그 사람은 자기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유일하게 완전한 전체인 각각의 개인을 커다란 전체의 부분으로 변경함으로써, (다시 말해) 개인이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존재를 받아들이는 전체의 부분으로 변경함으로써 육체적이고 독립적인 실존을 대신해 도덕적 실존을 정립할 수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그는 타인의 도움을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낯선 힘을 인간에게 주기 위해, 인간에게서 인간의 고유한 힘을 취해와야만 한다.” (같은 책 p.61.에서 재인용.)

- 같은 책, 61-2.

- 인간의 유적 본질(Gattungswesen)은 곧 인간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연에 작용해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노동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있는바 그것이 분리되어있다고 말해진다. 자유가 필연성의 인식일 때, 인간의 해방은 곧 자기 자신이 생산하는 대상에 대해 완전한 지식과 통제권을 확보하면서 경제를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낯선 힘이 아닌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는 하나의 체계로 변양시킴을 의미한다.

- 같은 책, 73.

- 같은 책, 77.

- 마르크스는 유대인이 자신의 본성, 즉 고리대금업을 지양함으로써만 현실적으로 해방이 된다고 적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서방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반유대주의자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우어의 주장, 즉 유대인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되돌려준 것이라고 봄이 옳다. 바우어는 유대인이 자신의 종교를 버림으로써 해방된다고 했는데, 마르크스는 그게 경제와 계급적 성격이라고 보았고, 그 함의를 패러디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당연하게도 마르크스가 모든 유대인을 부르주아적 계급성을 가졌다고 폄훼한 것이 아니므로(마르크스 본인부터 유대인이었다) 마르크스의 “반유대주의”설은 가당찮다.

- 예를 들어 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2012)』에서 사회적 병리로 피로를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사색하는 삶(Vita Contemplativa)으로 제시한다. 이는 의도치 않게 바우어에서 반복되었던 그러한 류의 ‘이상’을 재전유한 것이라고 하겠다. 피로를 종교로, 사색하는 삶을 “비판적 자기의식”으로 대체한다면 마르크스의 비판을 그대로 한병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류의 ‘현대사회 비판’은 단지 현상적으로 보이는 사회적 병리를 그것의 원인으로 그대로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들이 출현하는지, 어떻게 지양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극히 추상적인 분석을 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노동 대중이 자기 자신의 모든 물적 조건이 그대로인 채로 ‘사색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다(나아가, ‘사색하는 삶’이 어려운 것은 노동 대중의 경제적인 현실에서 기인하므로 그것이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