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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학파의 사적 소유 영속화 논리의 내적 모순


오스트리아 학파의 사적 소유 영속화 논리의 내적 모순


한동백 | 집행위원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과거 초기 계몽주의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다양한 방식으로써 사적 소유의 자연법적 또는 ‘논리적’ 영속화를 추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부르주아적 관념론, 형이상학의 낡은 표현 양태라고 간주하고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로 분류한다.

낡은 이데올로기적 표현의 사회적 규정력은 그것이 비록 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재생산하는 사회경제적 기초가 교체되기 전까지 그 사회적 지위에서 굳건하며, 심지어 교체된 후에도 얼마간 유지된다. 자연법적 사유는 경제적 관계에 대한 기존 관습적 취급 방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 누구에게든 ‘보편타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권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 방식은 아무리 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추동하는 객관적인 사회적 규정력을 뒤바꾸지 않는 이상, 그것은 계속 자연법적 ‘논증’에 기반한 사유의 재생산을 추동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 사적 소유를 영속화하는 논리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페가 제출한 ‘비침해성의 원칙(Non-Aggression Principle)’이다. 비침해성의 원칙의 성립을 위한 이론적 조건은 사적 소유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며, ‘공리적 기초’의 외양을 지닌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기 당위 옹호의 산물이다. 이 원칙은 논증 과정에 참여하는 즉시, 논증 과정에 참여하는 인식주관은 사적 소유를 당연 지지할 수밖에 없기에, 만약 추후의 논증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사적 소유 및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소유 정당화의 특정 형식을 부정하면 논증 윤리(Argumentation Ethics)에 위배된다는 원칙이다. 논증 윤리에 위배된다는 것은, 자신이 추후에 이어붙일 모든 논제를 뒷받침하는 전제를 자기 스스로 부정하거나, 또는 그러한 전제와 모순되는 논제의 전개를 뜻한다. 논증 윤리에 위배되는 주장 전개의 현실적 표현을 수행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고 한다. 이런 류의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은 로크의 개척(homesteading)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원칙의 전제에 개척을 두지만, 이 경우 개척은 인식적 논증 과정 전반의 양상과 직접적으로 동일한 ‘영역’을 점하고 있다는 또다른 전제를 두는 것이며, 이 경우 개척은 신체나 신체의 기능인 관념과 동일한 영역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는 호페가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원리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떼놓을 수 없는 논증 과정 참여가 어떻게 하여 그 참여자로 하여금, 사적 소유를 ‘영속적 기초’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지에 대해, 비침해성의 원칙은 어떠한 ‘해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원칙의 형성자인 호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논증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 주장, 그것이 참되고 객관적이거나 타당하다는 명제와 관련된 주장이 논증 과정에서 제기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논증은 결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떠도는 제안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논증 역시 항상 활동으로 된다. 그러나 진리 주장은 논증에서 제기되고, 해결되며, 그것은, 주장은 그 과정에서 어떠한 말이 되든지와 무관하게 객관성과 진리의 실질적 전제조건 점에서의 특별한 인지적 지위를 가진 상호주관적으로 유의미한 규범이 존재—정확히, 어떠한 행동을 주장하는 것들로서—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실천적인 문제라는 점을 뜻한다.”1

호페는 먼저 논증이 단순히 주관적인 상황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외적인 표현 형태로서 드러나는 실천의 문제임을 주장한다. 즉 우리가 논증 과정에 참여할 경우, 물론 그것은 먼저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의 그보다 앞서 존재함을 전제해 놓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무조건 어떠한 외적 형태로 드러나는 실제적 과정으로 진행된다. 만약 전자가 계기라는 점에서 독보적으로 강조된다면, 논쟁은 완전히 무의미한 행위가 될 것이다. 호페에 따르면, 논증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모든 경제 행위의 세포로 된다.

그런데 이 논증 과정의 실제적 의미가 "그것이 실천적인 과정임"에만 한정되어서 논의될 경우 역시 또다른 한계에 봉착하는데, 왜냐하면 이 사실만으로는 논증 과정에 어떠한 규범적 의의를 부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지적 지위를 가진 상호 주관적으로 유의미한 규범이 존재"해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논증은 아무런 맥락과 근거가 없는 명제로 구성되지 않으며”2, 그것은 "희소한 수단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동의 한 형태"3이다.

그렇다면 그 규범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이제 나와야 한다.

호페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개인이 논증이라는 명제적 교환에 참여함으로써 선호를 입증하는 수단은 곧 사유재산이다. 먼저, 만약 우리가 자신의 물리적 신체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전제돼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어떠한 특정 무언가를 제안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논증의 수단에 의해 제시된 어떠한 명제조차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증은 서로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상호 배타적인 통제를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이는 언술된 명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 불일치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의견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의가 가능하다는 명제적 교환으로서의 논증의 특징적인 측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4

호페의 이러한 공리적 기초를 통해 논증 윤리를 확정짓고, 이 논증 윤리가 경제학, 내지는 심지어 정치적 활동의 객관화된 당위로 작동해야 한다고 간주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규범'이다. 호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특유 연역주의적 시도를 이 공리적 기초를 통해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비침해성의 원칙을 통한 연역주의적 시도는, 모든 연역주의적 시도가 갖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리 기반 체계를 지적하면 무용한 이론이 되어버린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논증 윤리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연역주의적 시도의 자체 내의 근본적 한계를 이해하는 것보단, 연역주의적 시도가 항상 참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것의 공리적 기초가 비침해성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원칙’이 어떻게 하여 내적 모순을 지닐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비침해성의 원칙에 따르면, 논증, 즉 명제적 교환의 참여자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항상 전제하고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자신의 주장의 당위를 확보할 절대적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개인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실제적으로는 사물 일반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 일반의 지지와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전자가 허용되기 위해서는 후자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연 원리적으로 이 명제적 교환의 후속 과정에서 사적 소유에 대한 공격은 곧 그러한 공격이 행해질 수 있게 하는 모든 명제적 교환에 참여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에 대한 공격은 논증 윤리에 위배된다.

그러나 호페는, 그가 그의 저서에서 설정한 수많은 전제가, 이러한 논증 과정이 그가 바란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원리를 또 하나 몰고 올 수 있음을 간과하였다.

만약 명제적 교환이 항상 실천적이며 실제적이고, 상호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주관적인 것은 아님을 전제한다면, ‘사적 소유’라는 범주는 서로 간 논쟁이 목적하는 모든 관념이 표현하는 모든 실제적 행위에도 완전히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호페적 관점에서의 (명제적 교환 행위로 대표되는) 논증이 개시되기 위해선, 항상 논증 참여자는 자신의 상대 참여자의 실제적 행위를 침해하거나, 박탈하거나, 적어도 어떠한 의미에서든 제약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 참여자가 의도하고 있는 모든 가능적인 실제적 행위는, 그 실제적 행위를 그 상대 참여자가 끝끝내(또는 최대한) 보유하길 원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될 때, 그것도 역시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되는데, 문제는 논증이 개시되는 즉시, 논증 참여자가 상대 참여자와 대립하게 되고, 이는 상대 참여자가 보유하고 또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실재화된 구상 행위을 어떻게든 제약하는 것으로 현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명제적 교환 행위의 개시 조건은 그 자체로, 특정 상대 참여자의 상대로서의 논증 참여자가 상대 참여자의 사적 소유를 침해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이 상황은 그 상대 참여자가 그 상대로서의 논증 참여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유는 이미 호페가 아주 정당하게 밝혔듯이, 모든 명제적 교환 행위는 단순 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적이고 외적인 무언가로 나타나는 주관적이지 않은 과정이라는 데에 있다. 이 원리를 전제하는 순간, 두 명의, 또는 그 이상의 논증 참여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대립하며, 당연히 서로는, 그 상대 참여자가 소유하고 있는 실제적 과정으로서의 객관화된 구상, 즉 ‘소유되어 있는 객관화된 구상’을 침해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구상은 각자가 배타적으로 소유한 신체의 기능이 가지는 특수한 형태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오늘날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놓고 투쟁하는 온갖 현상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보다 훨씬 공상적인 입장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에 ‘소유되어 있는 객관화된 구상’이, 실은 완전히 주관적인 구상에 불과하며, 실제적이지 않다고 간주한다면, 호페는 그 자신을 위해 스스로 세운 전제를 어긴 셈이며, 그가 요구한 ‘규범’은 한낱 공상에 그친다.

호페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러한 원칙의 전제로서 개척을 두고, 따라서 어떠한 논증 행위이든 개척을 긍정하지 않으면 개시할 수 없고 참가할 수 없다고 하여 개척에 원초적인 합법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논증이 추후 개시되는 수준에서 각자가 상대의 특정한 신체적 기능에 변동을 가하고, 그 변동이, 변동을 가한 힘에 정립된 대상이 본래 자기 신체 기능의 특수한 부위를 그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대립한다면, 논증의 개시가 이미 사적 소유의 긍정의 대립항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그들이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신체 기능의 특수한 형태는 소유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신체의 기능은 논증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선험적으로 가정한 매우 부적합한 표상을 자의적으로 원리로 ‘격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유를 완벽히 “물리적인 것”이라고 전제하고 논증을 구상하더라도, 결국은 어떠한 특수한 형태로서 실재하는 이 ‘물리적인 것’이 그것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개개인에게 있어 명백히 “소유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배타적 소유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논증으로써도 이는 침해된다. 여기서 이 대상의 희소 수단으로서의 성격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무관하게) 그 신체의 기능이 표지하는 현실적 양태의 내용이 논증에 참가한 각각의 인격체에게 어떠한 이점을 줄 수 있으며 그 양태가 언제나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육체적 또는 지적) 노동력이 희소성을 지니는 상품 규정을 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는 (호페의 주관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호페가 모든 타당한, 즉 비침해성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명제적 교환 행위의 존립 근거를 개척의 긍정에서 끌어온 결과로서 허용된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지는 않되, 이 논증은 개척으로부터 어떠한 논리적 필연성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호페의 입장을 근본에서 부정하는 것이다.

 

호페가 제시한 이 원칙이 실제 역사적 전개와도 동떨어져 있음은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봉건제 하에서 농민은 자신이 개척한 땅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이 없으므로 착취당하며, 노예는 자신이 개척한 신체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이 없기에 착취당한다. 이와 반대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가지고 있고(즉 자유로운 임노동자인 경우) 개척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 착취가 있을 수 없다5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토지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의 가일층 확립, 즉 예컨대 자본의 발생사의 한 분지인 인클로저 운동이 당대 분산되어 자급자족하던 분할지 소농을 대규모로 몰락시켜 그들이 자기 노동의 기반인 생산수단과 생활 수단이 분리된 생산자, 즉 임노동자로서의, 피착취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실례이다. 로크에서 출발한 개척의 역사는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는 정복자들의 약탈적 소유의 법적이고 제도적인 형태의 확립, 그것의 정당화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다. 자본주의에 이르러 배타적 통제권을 보장하는 상부구조적 수단이 첨단에 서서 성립하면서 대규모 노동 착취의 역사적 전제조건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폭력은 광범위한 빈곤, 즉 소유 일반으로서 개인적 소유의 빈곤으로 이어졌는데, 우리는 이를 관찰함으로써 배타적 소유권의 최고도의 실현이 개인적 소유의 실현에 적대적임을 파악할 수 있다. 

비침해성의 원칙에 대한 반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그 어떠한 명제적 교환 행위도 내적인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명제적 교환 행위는 물론 자신의 신체를 당연 배타적으로 소유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개시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 명제적 교환 행위는 상대방이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실재화된 구상객관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또는 그럴 수 있게 하는 모든 구상이나, 실제적인 것들의 반정립이라는 전제 없이는 개시될 수 없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도, 이 실재화된 구상은 각각의 참여자가 역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고, 각자가 서로에 대해 행하는 반정립은 각자 참여자가 본래적으로 소유한 실재화된 구상 내지 행위를 자신의 의지를 통해 변형여건이 되는 만큼 더더욱 폭력적으로하겠다는 의도가 당연 전제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언급한 바 그대로 “소유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생산 조건들에 대하여 그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것으로서, 그 자신의 현존과 더불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서 관계하는 것, 다시 말해 생산 조건들에 대하여 자신의 연장된 신체를 이룰 뿐인 자기 자신의 자연적 전제들로서 관계하는 것을 뜻”6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가 자신의 생산 조건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즉 그 자신으로서 주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의 실존의 자연적인 무기적 조건들에서 객체적으로 존재한다.”7 결국 명제적 교환 행위, 즉 논증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숱한 법률적 분쟁을 야기하는 거래 행위들, 예컨대 부르주아 사회의 현실에서 임대차 계약만 관찰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폭력, 그리고 자기에 대한 주관적 비폭력을 동시에 행하고 있는 모순을 찾아낼 수 있다. 임차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실재화된 구상, 즉 외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과정으로서의 (상대적으로)낮은 수준의 계약금을 요구한다. 그리고 임대인은 그 반대이다. 그리고 서로는 자기 상대방의 객관적 표현을 온전히,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함을 한사코 부정서로에 대해 계약금을 올려서 받겠다고, 또는 낮춰서 지불하겠다는 식으로하면서, 자기 신체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를 당연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이미 오랜 시간 전에 인식된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판구매의 대립 과정을 밝혀내면서, 이 모순을 아주 간략하게 드러내었다. 교환 행위가 모순의 표현이며, 대립되는 항 간의 투쟁이라는 점을, 그는 간명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적 관계에 당연 전제되는 논증의 모순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 주관의 어떠한 ‘협의’가 아니라 오로지 생산력의 공산주의적 발전 수준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생산력의 공산주의적 발전 수준은 논증에서 불필요한 대립을 소멸시킬 정도로 높은 수준의 생산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를 통해서,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비폭력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항상 폭력과 (주관적)비폭력의 상호 부정적 교체라는 굴레 속에서 움직여질 것이다.

 

*   *   *

 

지금까지 나는 호페가 ‘소유’에 영속성을 부여한 논증에 내재하는 ‘논리적’ 모순만을 다루었지만, 그가 ‘소유’를 초역사적인 ‘그 자체’로 다룬다는 점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실지 그가 논구하는 ‘소유’는 역사의 자본제적 단계에 이르러서 다름이 아니라 특수하게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소유’이다. 즉 “그것은 이 생산 조건들에 따라 상이한 형태들을 가진다.”8 이러한 ‘소유’의 기초에는 늘 이에 상응하는 소유관계를 가능케하는 그것의 역사적인 전제조건과 자기 보존을 위한 사회적인 발전 연관이 서 있으며, 이 연관에는 추상적 인간이 차지할 그 어떠한 자리도 남아 있지 않다: “… 그러한 견해는 개별화된 인간의 발전으로부터 출발하므로주어진 종족이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옳을지 몰라도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비로소 개별화된다. 처음에 그는 유적 존재, 종족적 존재, 군서 동물로 등장한다정치적 의미에서 정치적 동물은 결코 아닐지라도 교환 자체가 이러한 개별화의 주요 수단이다. 교환은 군서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해체한다. 인간이 개별화된 자로서 오직 자신과 더 많이 관계하도록 사태가 변하자마자, 그러나 자신을 개별화된 자로서 정립하기 위한 수단들이 그의 자기 일반화와 공동화가 되자마자. 이 공동체에서 소유자, 예컨대 토지 소유자로서 개별자의 객관적 현존은 전제되어 있고, 그것도 그를 공동체에 붙들어 매거나 또는 공동체의 사슬의 한 고리로 만드는 일정한 조건들 아래서 그러하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노동자는 예컨대 순전히 객체 없이 주체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 마주 서는 사물이 이제는 그가 먹어 치우고자 하고 그가 먹히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었다.​9

 

그럼에도 ‘소유’의 실현에서 모든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추상적 자연사물과 거기에 대립하는 추상적 타자무주(無主)의 자연을 취하는 추상적 인간을 설정하고 그것을 오늘날의 역사적 국면에 그대로 도입한다. 즉, 호페가 감행한 ‘소유’의 영속화는 단지 그가 논증으로써 그것에 당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자체 모순을 폭로하는 반대의 논증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의 반(反)역사주의적 헛수고에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24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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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 -H. Hoppe, The Economics and Ethics of Private Property, 2nd Edition, Auburn: Ludwig von Mises Institute, 2005, 314-5.텍스트로 돌아가기
  2. Ibid., 334.텍스트로 돌아가기
  3. Ibid., 342.텍스트로 돌아가기
  4.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5. Ibid., 125.텍스트로 돌아가기
  6. K. Marx,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 서울: 백의, 2000, 117.텍스트로 돌아가기
  7.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8. 위의 책, 122.텍스트로 돌아가기
  9. 위의 책, 122-3.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