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추억도 나도 영원하지 않다

 

3월 9일(목)-10일(금), 이틀 동안 동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목적은 첫째 놀고 쉬는 것이었고, 둘째 앞으로의 날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둘째 고민은 여행에서도 지속되고 얘기되었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 생각하는 시간은 한 동안 계속될 것이다.

 

 

첫날, 숙소인 영랑호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영랑호는 왠지 겨울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재섭는 골프장은 빼고. 예전에도 영랑호를 방문했을 때에는 눈이 내린 겨울이었다. 춥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는 해도 영랑호는 겨울의 황량함이 살짝 느껴지는 그런 때가 좋아 보인다. 예전 방문 때에도 묵었던 영랑호리조트에 묵었는데 그때는 참 좋았던 시설이 지금은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에 아주 잘 꾸며진 리조트며 팬션이며 콘도를 수없이 지나쳐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추위가 몸속을 깊이 파고들 때까지, 경포호에 비하면 작고 아담한(?) 호수인 영랑호 물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물은 무척 더러워 기분을 깨긴 했으나 호수는 평온한 분위기를 풍겨 '쉬러 온 자'에겐 좋은 벗이었다.

 

 

저녁은 우수사랑의 솜씨로 맛나는 음식을 먹었다. 쇠고기 불고기와 돼지 불고기 두 가지를 모두 준비했다. 부러운 주부의 솜씨였다. 나도 그런 경지에 오를 날이 오겠지. 8일(수)에 저녁밥으로 무엇을 준비할까 고심한 적이 있었는데, 파란꼬리가 카레 재료를 사다두었으니 이왕 카레가 편할 듯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새로 사야했는데, 그래서 점심 식사 전에 모래내 시장에 나가서 감자를 사왔다. 먹는 건 절대 못참는 내가 배고픔을 참으며 시장통을 헤매고서는 '필요한 감자'만 달랑 사왔다는 건 나 스스로도 놀란 일이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빵이며 튀김이며 오뎅이며 순대며 떡볶이며 호떡이며 등등을 그냥 지나치다니... '집에 가서 밥 차려먹으면 돼'하면서...

 

이런 변화는 주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게 우수사랑의 의견이다. 아줌마답게 다음부터는 밥먹고 배부를 때 시장엘 가란다. 그게 살림하는 아줌마들의 노하우란다. 금요일 아침에는 파란꼬리가 밥을 잘 먹고 출근했을까 걱정이 들었느데 이런 걱정은 예전과는 다른 걱정이었다. 파란꼬리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걱정은 항상 있었지만 '밥을 먹었을까'는 새롭다. 사람은 확실히 변한다.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이제 나는 열심히 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저녁을 뽀지게 먹었다. 헉헉대며... ㅎㅎ

 

우수사랑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우수사랑의 남편과 함께 동명항에서 회를 떠왔다. 잡어들이기는 했으나 그 가격에 그만한 양을 먹을 수 있는 건 동명항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동명항도 예전의 맛과 싱싱함과 저렴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다. 속초 바로 위에 있는 고성군 땅 봉포항이 더 낫단다. 다음에는 봉포항에서 회를 떠야겠다.

 

'봉포항'은 9시경에 영랑호로 왔다. 교육이 있어서 늦었단다. 우수사랑 내외와 봉포항과의 수다는 이런 저런, 정해놓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동명항의 회는 밤 늦게까지 안주가 되었다.

 

 

금요일 아침은 별미로 시작했다. 늦게 일어나서 아침도 늦었다. 동명항에서 멀지 않은 '사돈집'이라는 곰치국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곰치는 최고의 해장음식이란다. 물곰탕이라는 메뉴로 있었다. 흐믈흐믈한 고깃살이 독특했다. 아구를 먹다보면 아주 흐믈흐믈한 부위가 있는데 꼭 그런 느낌이다. 물곰탕은 생선만 곰치로 바꾸었지 재료는 여느 매운탕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데다가 속도 아주 편한 음식이었다. 보통의 매운탕이라면 아침 첫 식사로는 자극적이어서 약간 거북할텐데 말이다.

 

 

사돈집의 곰치국을 먹고나서 바닷가 한번 구경하고 봉포항과는 헤어졌다. 선거 준비로 일이 바쁘니 계속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있으니 본격적인 등산은 어렵고 설악산 권금성에 케이블카나 타고 오르려 했는데, 바람이 세게 분다고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았다. 산 구경은 해야 하겠고 오대산 상원사로 가기로 했다.

 

 

상원사 가는 길에 배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지만 봉포항이 소개해 준 입암리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입암리 이정표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입암메밀타운'이라는 음식점은 폼나고 크게도 지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5천원짜리임에도 이런 맛을 가지고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나는 물막국수를 먹었는데 그 많은 양을 몇 젓가락으로 술술 다 넘겨버렸다.

 

양양공항 근처의 '실로암'이라는 막국수집이 있다. 10여년 전에 처음 갔을 때 아주 감동적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국수와 동치미가 따로 나와서 동치미를 국수에 부어 말아 먹었었다. 아주 독특한 막국수를 잊을 수 없었다. 두어번 먹어본 후 한참 후에야 작년에 다시 가게 되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약간 헤매고 찾은 실로암은 달라져 있었다. 동치미를 부어 먹는 막국수가 아니었다. 만들어져 나왔다. 나름대로 개성있는 맛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왠지 옛날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만족스럽게 먹었다. 좀 비싸기도 했지만...

 

이곳 현지 사람들이 '실로암'보다는 '입암메밀타운'을 찾는단다. 이유는 맛이다. 변해버린 맛보다는 여전한 맛을 즐기나보다. '입암메밀타운'의 막국수는 실로암의 막국수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다. 육수가 아주 좋다. 다음에 또 가야지. 지금도 생각난다... 먹고싶다. 이번 여행 중 가장 강렬한 맛을 안겼다.

 

 

오대산을 처음 가본 건 95년이었다. 상원사와 월정사를 구경했었다. 깊은 산 중의 상원사. 크지 않은 절이었지만 깊이와 장중함이 느껴지는 절이었다. 철분 많고 찬 약수를 한모금 마시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번 상원사 방문은 실망이었다. 건물도 신축하고 옛 건물도 칠을 새로 하는 등 절터를 정비했지만 촌스럽다는 느낌만 생겼을 뿐이었다. 이 절의 역사는 오래 되었기 때문에 고증을 제대로 해서 사옥을 잘 정리하거나 아니면 옛 스타일을 아니더라도 멋지게 정비하면 될 것을, 주제넘을 참견을 하자면, 졸부들이 하듯이 지들 보기에만 만족스러운 모양새로 만들어 놓았다. 약수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월정사로 내려갔다.

 

월정사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큰 절로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달라진 느낌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큰 절로 있다 싶었다. 상원사와 월정사 사이의 10여 km의 비포장도로에 대한 추억이 있는데, 그 추억도 왠지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5월이었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파란꼬리와 함께 걸어 내려온 적이 있었다. 높고 굵게 뻗은 나무숲과 계곡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는 낭만 그 자체였다. 그 때 보았던 통나무 다리도 없어졌다. 확연히 티나게 달라진 건 사람의 손길이, 문명과 기계의 손길이 많이 닿아 닳고 닳아진 길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계곡의 얼음과 굵은 나무 숲이 위로는 되었다.

 

 

추억 속의 그곳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그곳이 여전할 때는 기쁨을, 달라졌을 때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번엔 확실히 확인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강산에서 먹는 음식도 달라진다. 내게 가장 큰 아쉬움은 오대산의 실제 모습이 나의 추억과는 다르다는 데에 있다. 내 머릿속이 착각 속에 빠져 있던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쉬움은 컸다.

 

 

오대산에서 잠시 길을 돌려 경포호 근처의 초당리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초당두부를 먹어보자고. 우수사랑의 큰 언니가 강릉에 산 적이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선호한다고 소개해 준 식당엘 갔다. 맛있었다. 훌륭한 두부인 건 사실이지만 지난 해 주의장의 안내로 먹었던 두부맛에는 못미친다. 밀양에서 언양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자리한 간판도 없는 허름한 두부집. 언제 한 번 다시 가 보아야겠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서부터는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내 인생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려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버거울 따름이다.

 

다음 주에는 이런 부담을 다시 한번 미루게 될 강진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여행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속초보다는 마음이 더 무거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