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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잊지 않기 위해 메모.

 

이번 영화제의 화제작 <외가>를 보려 했으나 상영시간 변경으로 보지 못했다.

중간에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초대손님(대만감독인 것같음)이 중간에 들어가는 바람에 묻어서 들어가게 되었다.

끝에 5분 정도를 보았는데...다 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

러닝타임이 길었더라면 <워낭소리>를 능가할 흥행작이 되었을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어제까지 본 영화들 간단 정리.

 

엄마의 영화, 빨간구두 아가씨 The red shoes      

"저 사람들은 참 좋겠다.이 사람도 되어 보고, 저 사람도 되어보고"

TV보던 엄마의 한 마디를 시작으로 영화감독 아들이 엄마가 출연하는 영화를 만든다.

영화 만들기 중간중간에 엄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딴집 살림을 차려 "남의 자식만 챙기고 지 자식은 나몰라라했던" 남편.

도박에 빠져 폭력을 일삼던 그 남편.

그리고 엄마와 아들의 영화. 영화 속 영화도, 전체 영화도 참 잘 만들어진 것같았다.

한가지 배운 점이 있다면, 한가지 이야기만 하는 영화는 뭔가 허전하다는 점이다.

내 영화를 만들 때 고려해야할 사항.

 

 잘했어요? Am I good?

세진은 어찌나 열심히 편집을 했는지 사무실에서 보던 영화와는 딴판이었다.

사무실에서 볼 때마다 좀 길다는 생각을 했는데 잘 줄여졌다.

'길다'는 느낌은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소모되는 컷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감독의 입장에서야 한 컷, 한 컷을 신중하게 이어붙였겠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미가 약한 컷이 붙어있으면 군더더기라는 느낌을 받을 수있고

그런 영화는 길다는 느낌을 준다.

끈기를 가지고 상영직전까지 밤을 새서 편집을한 세진에게 박수를.

 

생각해보면 난 아기들 보느라 작업을 하지못한 2003년 이후로 끊임없이 기획해왔지만

말하자면, 내가 카메라를 들 수 있다면 만들었을 작업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획서를 쓰고 감독을 물색해왔지만 번번히 실패했는데

이 영화는 최초로 현실화된 영화이다.

영화는 감독의 영화라서, 최초의 기획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함께 머리를 맞댄 영화를 극장에서 감상하는 일은 기쁜 일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기획' 이라는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최초 기획안은 이 블로그의 내영화이야기-기타 분류에 나와있다.

최초 기획안과 완성된 영화 사이의 거리. 그것이 기획과 연출 사이의 거리.



구름 저편에 雲的那端 Somewhere over the Cloud         

뜻밖의 만남.

동원감독의 지론은 한국다큐는 다시 볼 기회가 있지만 대만다큐는 다시 못 보니까

대만다큐 봐야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무 정보없이 선택한 영화인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딸을 찍은 엄마의 영화였다!

프랑스인 아빠와 대만인 엄마.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잉태된 딸의 이야기.

초반에는 이입이 좀 힘들었는데 아이한테 손을 뻗느라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

"엄마 역할을 하느라 예술가의 자리를 포기해야한다"는 내레이션에

같이 본 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외할머니며 친할머니며 이모며 항상 다른 누군가가 아기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카메라 앵글 약간 흔들리는것 같고서...'뭘 그정도 가지고' 하는 생각.

 

대만인 모임의 날 행사에서의 아이를 보여주며

'전통적인 것과 포스트모던한 것 사이에 선 디디'라고 표현하는 것이라든지

중국에 대항하는 대만인들의 거리 행진에 선 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언젠가 본 어떤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 만화 제목이 뭐였더라. 아, 궁금.....

어떤 목장같은 곳의 대문에 섰던 인형이 집을 나갔다.

나가서 사진엽서를 보내오는 것이다. 에펠탑, 만리장성 등등의 풍경 앞에 선 사진들을.

다시 말하면, '나는 세계일주를 하고 있어요' 뭐 그런 메시지인 셈인데.

목장주인인 할아버지 말씀이 '인형이 가출을 하고...' 뭐 그런 입장.

 

엉뚱하겠지만 초반에는 저 감독이 지금 그 인형처럼 아이를 그 곳에 데려다놓고

현실문제들을 얘기하려고 일부러 아이가 서있는 자리를 선택한 건 아닌가 했다.

또 이런 대목이 불편했다.

"친구가 묻는다. 이렇게 시국이 어수선한데 왜 프랑스로 떠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난 내 딸과 공통의 정치적 경험을 하고 싶어서 나는 이곳에 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로서의 여유,

혹은 이 현실이 자신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영화적 필요같은 것에 의해서

실험하고 있는 장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좀 그랬다.

 

프랑스에 사는 아빠는 웹캠으로 자주 딸과 대화를 하는데

영화 말미, 아이는 아빠를 거부한다. 현실세계로 나온 아빠는 엄마를 빼앗는 존재일 뿐.

사이버공간을 통해서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부모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어린 딸은 아빠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모든 것은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하고 아빠는 떠난다.

 

딴 얘기이기도 하고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앵두가 나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새벽에 깬 앵두가 내 손길 자체를 거부한 채

아빠 품에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주양육자였던 내가 어린이집에서 함께 지냈고 지금은 내가 아이와 이별을 한다.

그애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은 원망스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아빠를 거부하던 디디의 몸짓과 나를 거부하는 앵두의 몸짓이 너무나 닮았다.

내 손길 자체를 뿌리치고 내가 말만 해도 나를 때린다.

그리곤 나를 외면한 채 아빠의 품에서 잠이 든다.

엉엉 우는척하던 디디의 아빠처럼 나도 울고 싶어진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영화는 배울 점이 많다. 목소리이다.

목소리를 넣는 위치. 목소리의 변화양상.

처음에 손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주던 내레이션도 마지막에 공감을 주던 내레이션도

그건 아마도 모두 계산되었을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적 시간과 함께 움직인다.

<할매꽃>의 감독이 00아주머니와 엄마를 만나게 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어리다', '무리가 있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영화 속 목소리와 영화 밖 감독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들은 그 모든 것을 계산한 채 목소리를 넣는다.

<구름 저 편에>를 보던 나 또한 감독의 목소리와 감독을 동일시했다.

다보고 나서 깨닫는다. "참 똑똑한 사람이구나...."

이 지점도 나의 영화를 위해 체크.

 

 마지막 농사꾼 無米樂 Let it be  

시작하는 순간의 아름다운 영상들은 <워낭소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덜 재미있고 다큐적으로는 감동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올바르다.

쌀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밥을 먹으며 자꾸자꾸 "내가 잘 판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카메라를 위로하려는 75살 주인공 할아버지가 사랑스럽고 짠했다.

<워낭소리>보다는 <농민가>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영화.

 

 달동네에는 바다가 있다 Inner-city and the sea   

 농민약국 Pharmacy for Peasant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이 참 다 좋다.

그런데 워크숍 작업인 <달동네>는 그렇다 쳐도

태일감독의 <농민약국>까지 등장인물에만 기대어 있어서 아쉬웠다.

물론 그 사람을 등장시킬 수 있었던 감독의 연출력은 높이 사지만

좀더 만질 순 없었을까, 너무 쉽게 갔던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

그리고 군데군데 설명적인 내레이션들이

화면을 연결하기 위해 쓰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어서 역시나 아쉬웠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스승이었던 태일감독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분이 내게 가르쳐주었던 것은 "농부의 마음으로 다큐멘터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풍작도 있고 흉작도 있지만 농부는 항상 거둔다고.

첫 작업부터 항상 기획의도와는 멀리 떨어져버린 채 실패를 자인해왔지만

태일감독의 그 말을 등대삼아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것이 내가 세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제 다시 기획의도와는 이만큼 떨어져서 네 번째 영화의 편집을 눈앞에 둔 채로

나는 멘토였던 선배감독의 영화를 또 이만큼 떨어져서 바라본다.

"다큐와 농사는 닮아있다. 노력하는 만큼 거둔다는 것"

98년 첫만남에서 했던 그 말을 선배는 이번 영화에서 자기 목소리로 들려준다.

또한 그는 삶으로 보여주고 있는 뭔가가 있다.

나는 그 삶과, 삶에서부터 길어올린 그 말을 소중히 갈무리하면서도 

정성일의 말을 홀로 곱씹는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자세와 거리."

 

G8 잡으러 간 고양이들 Cats who went to catch the G8   

즐겁고 활기넘치는 영화였지만 너무 거죽만 핥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처음엔 '미디어행동'처럼 시의성을 위해 기획된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나온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정성일의 말을 빌린다면 너무 겸손한 영화라고 할 수밖에.

 

G8 에 반대하는 인물들의 시위장면을 보는데....찡했다.

그들은 즐겁고 당차지만 그렇게 행복하지만 참 작다.

가끔씩 무서운 건 저항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좀 마음이 아팠다.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각하의 만수무강>은 신선했으나 김경만감독은 항상 그자리인 것같다.

뭐 자기 스타일이겠지.

역사적 자료들을 지금의 자리에서 재구성해보는 건 재미있지만

매너리즘 같은 것, 조금 느껴졌고

영화보다는 옘비 때문에 참 재수없었다.

그 사람은 정치적 행태도 무진장 스트레스지만

그런 거 말고 드러나는 표정, 언행 자체가 참 천박하다는 느낌.

사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싫어할 수 있다는 게....참 힘들다.

온 몸의 털들이 삐죽삐죽 설 만큼 싫고 진저리가 쳐진다.

'촛불미디어방송국'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

 

인터뷰, 꿈 Interview, Dream     

영화 시작전에 감독이 '광고 아니다'라는 농담을 던졌는데

영화를 보니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더라.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무실 JOON에게 말을 던졌더니 그의 말이

"옛날에 키에슬로프스키감독이 그런 비슷한 다큐를 만들었었대요.

물론 더 길고 심오한 물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그건 너무 하잖아.

열심히 노력한 건 알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건 심술 때문일 수도 있을 거다.

<엄마...>는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떨어져서 상영도 못해봤다.

프로그래밍의 원칙이 궁금해지던 영화!

 

ACT OF LIFE    

2005년이던가 인디포럼에 가서 폐막작 <얇은 살갗보다 얇은>을 온가족이 함께 봤다.

하돌이가 울어서 업고 나왔는데 하늘과 남편은 끝까지 보았다.(짧지 않은 영화였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남편은 화가 치민 채로 "어떻게 끝내나보자"라는 기분으로

하늘은 영화 시작 장면에 무지자막에 사탕먹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 사탕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싶어서였다고 한다!(놀라운 아이라고 할밖에!)

<얇은 살갗보다 얇은>은 정성일의 분류에 의하면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는 영화'에 속하고, <액트 오브 라이프>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자꾸자꾸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자력이 궁금하다.

 

관객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든 아니든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재구성일 뿐이다.

<액트 오브 라이프>는 그 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딱 떨어지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피부로, 가슴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

맞아떨어지지 않는 퍼즐조각들을 들고서 골몰하게 만드는 그런 것.

뽐내고 있지만 뽐낼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영화. 그런 면에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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