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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소외

신촌 어디쯤, 예술인 마을같은 한옥촌이 배경이다.

거기에서 나는 L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중에는 기혼이반을 파트너로 둔 사람도 있고

(꿈 속에서 그는 이름난 페미니스트인데도 자신의 파트너를 '아기엄마'라 부르고

 파트너가 속한 군을 '아기엄마들'이라고 서슴없이 불러서 나는 무척 놀란다)

내 앞에서 거리낌없이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도 멤버쉽을 가진 듯했다.

그 안에서 K위원장은 평소의 터프하던 면모와는 다르게 상냥하고 수줍은 태도를 보이고

나는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의아해하며

어쩌면 내가 평소에 봐왔던 모습은 그의 페르소나이고

내가 그의 다른 모습을 보게된 건 이너서클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한다.

나는 그들 안에 있으면서도 그들 바깥에 있다.

그들은 나를 존중해주고 밥을 나눌 때에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환대하지만

나는 사교적인 웃음을 보이며

말을 아낀 채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

 

꿈 속에서 MS가 나왔던가 안나왔던가.

잠깐 나왔던것같은데 잘 기억이....

확실히 기억나는 건

나는 봉천동 함께사는세상 거기 어딘가에 있는 그룹홈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뭔가를 만들고 놀기 위해 빠져나왔다는 것.

그걸 하고 다시 돌아가니 어떤 행사가 진행중이었고

나는 뒤쪽에 앉아 대표격인 인물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심심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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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에서 깨어 

머리를 비운 채 가만히 누워있으면

몸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련한 통증이 올라온다.

선생님은 그것이 치유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있는 어떤 상처같은 거라고 말해주었다.

새벽에 꿈에서 깨어 가만히 누워있다보면 꿈이 실마리가 되어 어떤 상념들이 펼쳐진다.

꿈에서 깨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꿈이 가리키는 방향이라는 꿈해설가의 말에 따라

나는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을 붙잡는다.

그 생각은 과거의 어떤 지점을 가리킨다.

그 지점에는 어김없이 괄호가 있고 꺼내보고 싶지 않은, 하지만 잊히지않는

어떤 기억들이 있다.

몸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응용해보면

요즘의 이런 꿈들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치유되지 못한 채 가라앉아있던 상처들의 반영인 듯하다.

이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몸에 대해서는 치료를 돕고 안내를 해주는 선생님이 계시지만

마음과 관련해서는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치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길어야 30~40분, 나머지 23시간 플러스 알파는

당신의 몫"이라고 말하지만 그 치료와 그 안내로 나머지 23시간을 보낸다.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디까지가 내부이고 어디까지가 외부인지

그 경계가 흐려진다.

경계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보면 

주인공이 정신분석가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그에게 빠져드는 상황이 나온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치료의 과정에서는 으레 그렇게 겪게 되는 일인가.

심신이 무너진 상태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에게

의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인 듯.

어쩌면 파더리스 컴플렉스의 일종일 수도.

 

지난 주에 어떤 외부 모임에 다녀왔는데

(그런 종류의 모임은 정말 백만년만인 듯하다.)

두 시간 정도만 앉아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앉아있는 게 힘들기도 했고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처음의 환대는 따뜻하고 반가웠으나

인터넷의 사진과 다르다는 말에 웃기도 했으나

예쁘다느니 생각보다 젊다느니

(나는 그냥 45살일 뿐이고 너무 늙어버린 듯해서 지친 상태인데)

하는 말들이 묘한 불편함을 일게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어제 어떤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수줍은 목소리로 정말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서 너무 좋았다, 또 만나자, 라고.

거미줄처럼 연약하고 끈끈한 이 호감의 실마리가

어떤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조금은 안다.

먼지처럼 떠돌던 20대의 그 어디쯤과 비슷한 상황들을 만나다보면

삶이란 정말 반복인가.

아니 세상은 새로울 것이 없나, 하는 생각.

20대 때 취재를 가거나 조직의 전체 모임에 가면

소위 예술가로 분류되는 남자들이 끈적이는 시선을 보낼 때가 있었다.

적당히 이름을 얻었고 적당히 팬도 거느린 작곡가, 시인, 평론가, 소설가, 화가들.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다시 만나자 해서 만났다가

몇 번 봉변을 당한 후엔 다시 비슷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아..지금도 신문에 문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가끔 이름이 나오는 그 남자는 정말 끔찍했다.

신촌에서부터 쫓아와서 도망쳐 집에 들어왔는데 우리 집을 찾지 못해서

잔디밭에서 이름을 부르며 난동을 피우던 남자.

아파트 단지에 내 이름이 구호처럼 외쳐지고

경비아저씨에게 끌려가던.

남동생한테 두고두고 욕을 먹었던 치욕스러웠던 그 상황.

그 밤에 거실에 앉아 가만히 내 이름을 듣던 오빠의 씁쓸한 표정.

다행히 오빠는 나를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치욕스러웠다)

 

그 행동들의 이유가

내가 예쁘거나 매력이 넘치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게서 어떤 결핍같은 게 보였을 거다.

"왜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내 앞에서 오래 머무는가"를 설명하던

김형경의 문장에서 나는 비슷한 기억을 떠올렸으니까.

거미줄처럼 끈끈한 그 유혹은

결혼을 하면 없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강화로 이주를 한 후 귀촌모임에 갔다가

그런 식의 끈적임은 결혼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나 있다.

목욕탕 발한실에 모여앉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사선생님한테 들은 몸의 구조가 연상된다.

"눈에 보이는 뼈, 신경계, 혈관 같은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이 하나 더 있다고 보면된다"

라는 그 분의 말처럼

세상도 그런가 싶다.

결혼제도라든지 윤리의식과 같은 것과는 다른

정말 다른 차원의 레이어? 구조? 같은 게 분명 존재하고

그 구조에 따라 이 사회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귀촌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려고 했다가

그 묘한 끈적임이 싫어서 결국 혼자 지내는 것을 선택했다.

 

류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놈의 세상'에 대한 한탄과 절망이 깊어가고

'딴 세상'에 사는 듯한 정치,경제 권력자들의 횡포가 커져간다.

그럴수록 우리 사이에서는 그 절망마저 함께 나누는 게 필요하다.

절망을 나누는 건 회피가 아니고 

비밀처럼 숨겨진 우리의 힘을 발견하는 길일지 모른다.

'흩어져라' '고립되라'는 속삭임을 무시하고 사람 '사이'를 만들고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궁리하는 일."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상처와 그 슬픔은 그대로 나에게 전염된다.

서울에서 살 때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늦게라도 사무실엘 들렀던 것은 

푸른영상 동료들로부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족도, 연인도 대신하지 못하는 그 위로는 동종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교환된다.

우리는 가끔씩 밤새 술을 마시고 또 노래를 하고

결국 편의점 탁자에서 깡소주를 나눠 마시며 아침을 맞았다.

그 시간은 류의 문장에 나온 말처럼

절망을 나누면서 비밀처럼 숨겨진 우리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을 거다.

나는 지금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결핍되어 있다.

혼자로서 견뎌내는 이 시간이

나를 새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꼭 움켜쥔 채

나는 견디고 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누군가들이 나의 그 상태를 읽는다.

누군가들에게는 그 상태가 매혹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상태에 매혹되는 상대는 스스로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일 거다.

이제는 나도 안다.

20대에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나와 닮아있었으니까.

닮아서 끌리고, 닮아서 매혹당하고, 닮아서.....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닮아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남편 덕분에 그 고리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남편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사람과 사랑에 대해서 더이상 기대없음,을 인정했기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

아이들이 내게 주었던 위로와 평화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제 오라토리오를 보다가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오늘 다시 수정한다.

이번 생의 앞의 45년은 망했다.

앞으로의 45년을 새로 디자인해보자.

그래보자.

다만 어제 꿈이 알려주는대로

L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투명한 소외감이

얇은 막처럼 존재할 거라는 깨달음을 잊지 않기.

이건 MS 당신 덕분이다. 슬프지만 결국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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