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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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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고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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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2
-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
- 살고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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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몇몇 지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여섯째 날에 함께 모였으니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킨 후 주님의 만찬을 거룩하게 행했다. 거룩한 것을 먹고 마신 후에 온 힘을 다해 자신과 다른 영혼이 거룩에 이르도록 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아버지께로 부르짖어 구했다. 목자들도 양들도 다 함께 무릎 꿇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말씀을 전하며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소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여호와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송축했다. 후식을 나누며 주님 나라의 소망을 보고들은 후 거룩하신 영의 탄식에 따라 죽어가는 이웃영혼들의 깨어남과 큰 구원을 위해 부르짖었다. 그리고 만찬을 마친 후 모든 지체가 마음과 영혼에 만족을 얻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 한 지체가 육의 욕심에 이끌려 범죄한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다 문득 아버지께로 부르짖어 회개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애통하던 그는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먹을 것 한 가지를 준비해 공동체를 찾아가되 먼저 목자가 거하는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목자가 나오자 그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린 후 제사를 드려달라며 참새를 내밀었다. 그러나 목자는 지금은 예배를 마치고 쉬고 있으니 내일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고개를 떨구며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으나 갈 곳이 없으니 이리저리 방황했다. 잠시 후 다른 한 지체가 자신과 가족의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고민하다 거룩한 공동체에는 아버지께서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준비하신 영과 육의 양식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러므로 목자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자신과 가족들의 영혼이 먹을 것을 조금만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목자는 지금은 예배를 마치고 쉬고 있으니 당신도 당신의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배고파 울며 이곳 저곳을 방황했으되 그 목자는 자신의 이름과 선함이 알려지는 곳에는 언제든지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한편 많은 재물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어떤 한 지체가 어떻게 해야 일이 잘 될까를 고민하다 목자에게 말씀과 기도를 받으면 복 받는 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그 영혼도 제물을 하나 준비하여 부푼 마음을 가지고 사택을 방문했다. 그러자 목자는 그의 형편과 위치를 알고 있으니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그가 가져온 수소와 송아지들을 창고에 묶어두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흔들어 넘치도록 구하되 그의 자손들도 바다에서 수영선수가 되도록 간구했다. 이에 그는 만족하며 하얀 봉투를 기쁘게 건넨 후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그 목자는 아예 일년에 한두 번을 정하거나 수시로 지체들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말씀과 기도로 양들을 바다로 인도하며 하얀 봉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의 다음 날인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괜찮은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것이니 예를 들어 어느 한 백성이 자신의 범한 죄를 깨달아 율법이 정한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고 싶어한다. 이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오시오.'라고 말할 수 없으니 오직 한 영혼을 위하여서라도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독사자식들은 거룩을 깨닫지 못했기에 누구든 안식일에 제사의 제물을 가지고 오는 자는 안식을 범한 자이니 성전을 찾아온 그 영혼에게는 안식을 범한 죄가 있겠노라며 아무도 받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거룩과 안식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그 백성들을 오히려 죄와 세상가운데 늘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목자가 이렇게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방인의 목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거듭난 한 영혼이 자신의 안에 거하는 그 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고통당하며 애통하고 있다. 그러면 그에게 죄에서 승리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마땅하니 인자의 살과 물과 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돌이켜 십자가로 나오도록 인도함이 옳다. 그러나 거룩을 모르는 자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믿는 자는 이미 회개했으니 다시 회개하면 믿음이 없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비록 죄를 범하는 중에도 자유 하는 것이 큰 믿음이다.’라는 무식한 말을 하며 그가 죄와 어둠에서 돌이킴이 아니요 오히려 죄와 세상에 안일하게 머물러있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런 목자들은 아버지와 양들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겠노라 서원한적이 없는 거짓양치기들이니 자신은 주님의 사역에 충성하고 있다고 말하되 사실은 자신의 썩어질 육을 아끼고 있는 자들이다.
안식을 범해도 죄 없는 또 다른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율법을 다 이루신 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룩한 공동체에 드리고 필요한 만큼만을 받아서 사용하는 교회시대와는 달리 구약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곡식과 짐승을 얻을 때마다 즉 십 분의 이를 제사장에게 바쳤다. 그러면 제사장은 거기서 반을 아버지께 감사 드리며 취했고 반은 육의 음식을 못 먹는 자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다 가난한 자가 왔을 때 이것은 아버지께로 온 것이니 아버지께로 감사 드리라는 말과 함께 그것을 전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전에는 십일조를 통해 여호와의 종들도 먹을 것이 항상 있으며 또한 게으른 자가 아닌 가난한 영혼들도 먹을 것이 항상 넘치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육신의 굶주림으로 인해 성전에 와 먹을 것을 좀 구할 때에는 그날이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성전창고와 우리와 외양간을 열어 그 쌓아둔 것들을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육의 힘을 얻은 후 거룩에 애쓰므로 새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요 자신과 가족의 육과 또한 사람에게 영광을 얻고자 목자의 일을 하던 자는 굶주린 영혼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내어쫓으며 오히려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자 '오늘은 안식일이니 너도 저기에 가서 안식을 취하라.'고 말하되 자신들은 늘 배가 불어있었다.
그런데 구약과 2천년 전의 이러한 상황은 첫 사랑을 잃은 교회시대 이방인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썩어질 것을 여기저기에 전하되 정작 자신의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아니함은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계획에 도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썩어질 것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영의 양식이랴?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자신과 자기가족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위해서는 늘 창고의 문을 열되 가난한 영혼들은 돌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주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배가 불어있는 목자는 육은 있어도 주지 않는 것이요 영은 없어서 못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진리라며 앞에서 말씀을 전하되 그들이 만일 십자가의 희생으로 전달되는 진리와 산제사로 이루어지는 거룩을 안다면 그렇게 행하고 있겠는가?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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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과 가인이 야곱과 에서가 동일한 애비와 애미의 사이에서 나왔을지라도 아버지께서는 아벨과 야곱은 받으시되 가인과 에서는 받으시지 않으셨다. 한편 밭이 다르되 씨는 동일했을지라도 오직 이삭은 받으시고 이스마엘은 안 받으셨다. 구약의 많은 제사장들을 다 버리시고 몇몇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또한 2천년 전 큰 건물에서 영광을 받던 많은 목자들과 육이 가난한 자들에게 선한 제자로 인정받던 가룟은 버리시되 11제자와 맛디아와 자신이 영광 받는 자리에서 내려온 바울은 받으셨다. 환난으로 들어가는 이 마지막 때에 자신을 목자라고 칭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을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는 불의하신 분이신가? 결코 그럴 수 없으시니 사람이 인격과 이성을 가지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기준이 있다.
사람의 영혼을 이끄는 자의 마음이 육의 욕심과 사람의 영광에 있느냐 아님 영의 욕심과 하늘의 영광에 있느냐가 첫 번째 기준이다. 그러므로 육의 욕심을 품은 자는 진리는 버리고 썩어질 것을 구하며 즐기고 만족하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썩어질 것은 버리고 오로지 진리를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영원한 것은 포기하고 사람들에게서 높임 받기를 원하되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내려놓고 오직 아버지의 영원하신 나라를 구하며 아버지께로 의롭다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썩어질 욕심은 사람을 죄로 이끌고 세상의 영광은 불의한 길을 걷는 자에게 주어지되 아버지의 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목숨을 버리는 그 길의 끝에서 인정받고 아버지의 그 영광스런 나라는 오직 거룩한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어떤 길을 걷는 영혼을 받으시어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이끄시겠는가?
둘째 그에게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다. 사람은 마음에서 죄가 나오니 육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불의한 자신을 옳게 여기거나 자신을 높이기 원하면 범죄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어떤 자는 죄를 범한 후 상한 심령을 가지고 통회하며 그 죄가 자신에게서 떠나가기 원하되 어떤 자는 주님이 용서했다며 그것을 은밀히 품고 계속 사랑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으되 후자는 버린 자다. 그런데 거룩을 향해 애통하는 마음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자를 계속 더럽히겠다는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어떤 영혼을 자신의 품에 안으시어 위로해주시겠는가?
마지막 기준은 주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마음이다. 누가 거룩한 자인지 깨달을 수 있는 비유로써 어떤 남자가 자신의 마음과 목숨을 바쳐 오직 한 여자를 사랑했으니 그들은 한 몸을 이루었으며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늘 만족을 얻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여자는 종이 옷을 입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린 후 자기남편에게 와 사랑한다 말하자 남자는 그것은 당신과 나와 자식들을 더럽히는 것이니 돌이키라며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여자는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의심이 가득한 마술사에게 벌린 후 남편에게 와 똑같이 말하자 남자는 동일한 말과 함께 또다시 용서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도 부족했으니 이번에는 하체가 큰 이웃집남자에게 벌린 후 똑같은 말을 하자 남자도 동일한 말과 함께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여자는 거리의 모든 남자를 집으로 불러 부부의 침상에서까지 벌렸으니 남자는 결국 돌이키지 않은 여자를 쫓아냈다. 그러므로 자신이 과거에는 비록 창기였을지라도 목숨까지 바쳐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를 만났다면 그 이후로 그것을 멈추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한 영혼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가 비록 자기생각을 따라 세상과 간음하며 살았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영접한 이후로는 그것을 멈추는 것이 옳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고 평일에는 다른 남자와 한 몸을 이루며 살다 여섯째 날과 주일의 거룩한 만찬을 통해 자신의 남편과 한 몸을 이룬다면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요 신랑과 다른 지체들까지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과연 어떤 영혼을 거룩하고 신령하게 받으시리요?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혼을 공평하게 보시며 대하시니 바로 이 기준들로 가까이 혹은 멀리 두셨다. 그러므로 비록 크게 범죄한 다윗이었으나 그는 육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잃는다 해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그 소원으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에 합했다. 그러나 다윗처럼 똑같은 죄인이었으나 사울은 썩어질 육의 부요와 헛된 세상의 영광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오히려 거룩을 버리고 여호와를 불렀으니 아버지께서는 그의 거짓된 마음을 아시고 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원수는 거룩을 이루고자 애쓰는 영혼을 핍박하며 죽이기 원하되 그와 가까운 자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이용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가인과 에서는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아벨과 야곱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했고 가룟은 그럴 힘이 있는 성전의 목자들에게 인자를 넘겼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역시 같은 이유로 세상권세를 가진 사울에게 핍박 받으며 도망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자신을 따르던 자들과 함께 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떡을 취했으나 그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목자의 일을 하던 구약목자들이 변경한 그 율법과 유전에 따라 다윗은 두 개의 법을 어겼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다윗이 행한 일을 안식일과 성전의 율법을 어긴 것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윗이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거룩한 만찬을 나눈 것으로 보셨다. 즉 그가 광야에서 핍박 받으며 쫓겨 다닌 것은 거룩을 위해서였으니 거룩한 떡을 먹은 것은 육신의 욕심을 채우며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거룩에 힘을 쓰기 위해서였고 왕이 될 자신을 따르며 함께하는 영혼들에게 오직 여호와의 율법과 도를 가르치므로 그들도 거룩에 애쓰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성소의 그 거룩한 떡을 오직 먹어야 할 자가 먹었기에 다윗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보셨으며 오히려 그의 깨끗한 마음을 아시고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그를 계속하여 자신의 오른손으로 붙드셨던 것이다.
한편 당시에 자기자신을 위해 목자의 일을 하던 성전의 인도자들은 늘 인자의 뒤를 따라 다니며 이미 고소할만한 것들을 충분히 모아두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들의 율법으로 인자를 붙잡기 위해 기다리던 차에 비로소 제자들이 다윗을 따르던 자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자 곧바로 안식일을 범했다며 고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옳음을 보이려면 그들에게 우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또한 다윗은 거룩을 이루기 위해 다니며 그것을 먹었으니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옳게 행한 것임을 알리셔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단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배고플 때 행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으니 그 이유와 목적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였다.
첫째 아버지께로 합당하지 않은 마음을 품은 그들은 이미 여호와를 알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거룩을 이루고자 애쓰는 자들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은 육의 욕심과 자기가족의 필요와 자신이 높아지는데 있으니 더러운 떡을 상에 올려 제사 드린 후 그것을 먹고 얻은 힘으로 자기유익을 위해 입과 손과 발을 놀리며 양들을 세상으로 흩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반문하는 자들이다. 고로 그들은 성경의 어느 곳을 펴서 보아도 전해도 들어도 오직 자신의 그 유익만을 깨닫게 되리니 그리스도께서 그 악한 자들에게 말씀을 허락하신들 그들이 어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리요? 오히려 화만 부르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될까 두려워 깨닫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진리를 전해 화를 부르는 대신 입술로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요 사역이라며 오히려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잡아 피 흘리므로 아버지와 멀어지되 그런 자신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려는 그들의 악한 마음을 찌르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전부터 내려오던 율법으로 이제는 인자를 잡으려는 그들에게 그들보다 더 위에 있는 다윗과 구약제사장들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알리셨던 것이다. 즉 너희가 만일 너희가 가진 법으로 나를 잡는다면 동일한 그 법으로 다윗과 제사장에 대하여는 어떻게 심판을 내리겠느냐는 의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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