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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기억과 생각

0.
모두다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 대한 글을 한번쯤 써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미루다가 이제 한번 써 본다.

 

1.
87년 7~8월 뜨거웠던 여름의 여파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하는데, 이곳에 일한지 몇 달 되지 않아 회사가 폐업한다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게 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때인데, 마포에 있는 통일민주당에도 찾아갔다. 김영삼 총재가 나와서 ‘우리당에도 노동문제 전문인 노무현, 이인제 두 의원이 있다.’ ‘이들에게 부탁을 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도록 노력하겠다.’ 라고 하면서 설렁탕을 한 그릇씩 사 주었다. 이때부터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된 듯하다.

 

2.
그 후 다들 알고 있는 대로 ‘대우조선 노동문제 개입’ ‘5공청문회’ ‘3당합당반대’ 등을 통해서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산에서 지역감정으로 인해 낙선하고 ‘하이텔 큰마당(plaza)을 통해서 ‘노사모’를 만들겠다고 하는 글을 보고 함께 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함께 하지는 않았다. 그 후 대선이 있기 전전년인가 그들이 대전 근처에서 600명인가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3.
민주당에서 후보경선이 시작되면서 이인제에 비해서 크게 열세인 노무현이 노사모의 힘을 입어 광주에서 승리하면서,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노사모는 더욱더 확장되었고, 열정적인 그들의 모습에는 큰 점수를 주어도 좋을 듯하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면서 노사모 활동을 함께 하였다. 추운겨울 선거전 한 달 동안 아침저녁 지역의 지하철역을 지켰고, 강남역앞에서(6번) 돼지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2월 19일 당선된 날 한밤중에는 광화문도 갔었고, 뒤이어 여의도로 달려갔었다.

 

4.
대통령 이전에도 낙선을 하면서 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권위주의 해체’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노력은 반대파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이면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인정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 이외도 그에 대한 미담도 많고, 친근한 이웃 아저씨 같아, 대통령 후에도 봉화마을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는가 보다.

 

5.
그가 반대파로부터 대통령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탄핵까지 당하면서 대통령직을 끝내고, 봉화마을로 돌아갔다. 처음 한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추앙을 받는듯 하더니, 청와대 자료와 부정문제로 정권의 탄압을 받더니 급기야는 죽음을 택했다. 예측하지 못한 그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고 의안이 벙벙했다. 함께 있던 같은 학교 선배라는 분은 ‘짜식이 죽기는 왜 죽어, 그게 죽을 일인가?’ 하더니 오후에 동문회에서 분향소를 차렸다고 한다. 검찰의 수사가 한참 진행되던 때 그의 옆에서 함께 일하던 분이 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가 자살할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해서, 설마 했는데 다음날 유시민이 봉화마을로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헛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을 했다.

 

6.
대통령이 죽었다고 온통 애도하면서 추모열기로 가득하다. 서민의 대통령이라고 기억을 하고,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슬퍼하고 추모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서 추모하는 방송이나, 저마다 쏟아내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글들도 많았다. 대체로 그와 함께한 추억들을 말하고, 비통해 하면서 MB에 의한 타살이라고 믿으며 분노로 가득하다. 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같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너무 오버한다고 본다.



7.
그런 와중에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는 하겠지만, 추모까지는 하지 못하겠다는 이들도 적은수이지만 존재했다. 어린 나이에 대추리에 내려가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할머니들과, 경찰의 방패에 맞아 피로 얼룩진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는 도저히 추모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해 5월에 평택에서는 지난해 촛불에서 경찰의 폭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피가 낭자했던 전쟁터였다. 평택에서 뿐만 아니라, 수많은 투쟁현장에서 죽어간 노동자, 농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 추모하지 않아도 좋다. 모두가 추모할 필요도 없다.

 

8.
덕수궁 앞에 추모인파는 너무 많았고, 강남역에도 촛불친구들이 분향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함께 촛불을 드는 이들이 분향소를 만들고 고생한다고 하니, 같이 해야 하겠다는 마음에 가서 이틀 밤을 새웠다. 저녁에는 수백 미터까지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리고, 새벽이 되어도 추모객들은 끊어지지 않는다. 분향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소리 내어서 우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눈물이나 울음은 조금씩 차이는 있을 것이나,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함께 이명박 이후에 더욱 팍팍해진 자신들의 삶을 생각할 때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향하면서 눈물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따라서 슬퍼진다. 평소에 차가운 머리로 움직이는 나를 보면, 크게 슬퍼할 일이 아닐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가슴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오늘 대중들의 정서인 것도 사실일 것이다.

 

9.
이렇게 뜨거운 추모의 열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슬픈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잊어버릴 수 없는 그의 잘못된 과거도 함께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선된 노무현은 당선직후 부터 ‘너무 미국을 너무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촛불을 수그러들게 했고, ‘사진만 찍으러 미국에 가지 않을 것이며, 미국에도 할 말은 하겠다.’라고 했지만, 얼마지 않아 미국을 다녀왔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천성산 터널, 새만금, 부안 방폐장, 평택 미군기지 확장, 기륭 이랜드 KTX 등의 비정규직 양산, 한미FTA, 전국의 부동산값 인상, 이라크 파병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느 블로그에는 노무현 시절에 목숨을 잃은 노동자 농민 열사만 해도 스무 명이 훨씬 넘는다고 정리를 해 놓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지금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저항하는 많은 정책들이 노무현 시절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10.
그 중에서 3년전 여의도 농민집회에서 맞아죽은 전용철, 홍덕표 이 분들의 죽음은 내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전 독재정권 때는 투쟁을 하면 약간이라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정부에서는 싸우다가 맞아죽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상당한 실망과, 희망을 앗아간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명망가도 아니고, 옆집 아저씨 같은 택시기사 허세욱 님이 분신을 했을 때 여럿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도 참 많이 울었다. 이런 경우는 수 없이 많다. FTA투쟁 하러 새벽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소나기를 흠뻑 맞으면서 한밤중까지 싸우는 허리 굽은 노인들의 모습, 대추리에서 하루종일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면서 울리던 구급차의 경적소리는 지금도 들리는듯 하다.

 

11.
2004년 탄핵 때도 서울에 없어 촛불집회에 참석을 못했고, 이번 장례식에도 미리 예정해 놓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대통령 중에서 그래도 가장 국민의 편에 가까웠던 대통령께서 가셨다. 그것도 억울하게. 이에 우리 모두는 슬퍼하면서 그를 보내고, 아직까지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편안한 하늘에 가셔서 슬퍼하는 국민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이 나라의 민주와 서민들이 잘 사는 나라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가신 분은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저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추모할 때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되리라 믿는다.

 

대통령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편히 쉬십시오.
우리도 가신 걸음들을 되짚어 보면서 뒤 따라서 우리의 길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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