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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협동조합"의 바탕이 되는 말이다. 3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교육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다는 기대감과, 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도 속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과, 협동조합법 제정이 맞아 떨어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에서는 단체장의 교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다가온다.협동조합이 갑작스레 튀어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지 않고도 상호부조하고 힘을 모으며 살아왔다. 마을에는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가면서 살았고, '두레'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였으며, '계'를 조직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부상조하면서 지내왔다. 농사일에 품앗이는 당연한 일이고, 관혼상제나 큰일을 당해도 계를 통하여 미리 조성해 놓은 기금과 계원들의 협력으로 어려움 없이 치러 왔다. 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 있고, 구판장에서는 외상으로 구매하고 추수해서 갚기도 했다. 면 단위 정도에는 오늘 농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농민조합도 있었다. 우리 또래만 하더라도 계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청년 나이에 접어들면 또래 별로 나락(벼)을 거두어 계금을 마련하여 계를 만든다. 우리 또래는 25년 전에 10명 넘는 동무들이 계를 모아 지금껏 이어오면서 부인들과 함께 한해 몇 차례씩은 만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 결혼식 때도 함께한다. 계원인 동무가 죽어 땅에 묻어주는 슬픔도 있었다. 농촌 마을에도 예전과 달리 초상을 치르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자식 동무들이 와서 일을 도맡아 해주면 마을에서도 좋아한다.
 
한국 사회가 70년 즈음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울산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보급되고, '통일벼'가 나오면서 식량도 증산되면서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공장이 생기는 도시로 이농이 줄을 잇게 되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몰려갔다. 몰려가기 보다는 도시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맞겠다.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던 농촌 마을에도 품앗이 보다는 품을 팔아 받는 품삯을 더 좋아하게 된다.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에 새벽종을 울리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 운동이 일으킨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라고(강제적 인지는 모른다)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마을금고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마을금고는 새마을운동의 열매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신협'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앞장서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마을금고는 법도 없어 신협법을 준용한다고 했다. 지금의 새마을금고가 처음에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이었다.
 
청년 때에 내무부에서 하는 마을금고 교육을 받고, 신협 교육에도 참여한 후 동네에서 동무들과 어른들이 모여 00(동네이름)마을금고를 만들기도 했다. 녹색 종이표지로 된 마을금고 통장을 들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았다. 그때 출자금 한 구좌가 얼마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지금 물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천원이면 너무 큰 액수이고, 백 원이면 너무 적은 액수인 듯하다. 모은 출자금을 가지고 대출도 해 주었다. 대출사유가 대체로 '가용'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자발적이지 못하던  마을금고들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서 계속되어 오던 마을금고가 97년 환난을 겪으면서 또 문을 닫았다. 그때 덩어리가 커진 신협도 사고를 당하고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협동조합 정신에  더 충실했던 신협은 마을금고 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새마을금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새마을금고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새마을금고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래도 협동정신을 모태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협동운동은 있어왔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애초에 있었던 협동운동의 싹이 말랐다가 다시 되살아 낫다고 해야 맞겠다. 산업사회 속에서 자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다가, 다른 길로 너무 많이 달려간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협동조합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 나간 우리 사회가 협동조합으로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협동조합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있다.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이론적이거나 지식적인 부분도 필요하겠다.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이나 이념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고 하지도 않는가. 이보다 물리적인 조직, 규모, 대외적인 요소 같은 것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이전에 몰락해 간 협동조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을금고가 그랬듯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같이 직능별로 구성되어 있는 협동조합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생협에도 이런 물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준비하고 설립되는 협동조합을 보면서 돌아보았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이름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도,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협동조합이라는 간판만 걸게 되면 하려는 사업이 잘 되리라는 (착각에 가까운)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대외적인 공신력이 있어 보여서? 지원이나 후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 좋겠다.
 
협동조합은 회사와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을 하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고 본다.(비록 영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협동조합의 틀을 가져가려고 하는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 사회단체로 가늘게 낫다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출자금은 후원금이 아니고, 자본금이다.(가깝다)
 
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사업'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에 근거를 해야 한다고 보는데(약간의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이 그런지 돌아보면 좋겠다.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이나 지역이 명확하고, 범위가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다. 추상적이거나 좋은 내용으로 나열만 하는 경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사업의 내용을 보면 카페와 교육 사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업도 협동조합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협동조합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꿰어 맞추다보니 카페와 교육 사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협동조합이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서 시작하면은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협동조합을 만들면 관의 지원이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있기 까지 하다.  관에서도 재정 지원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협동조합을 설립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가 말하기를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운영하면서도 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본인들도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 협동조합의 앞날을 보는가 같다.
 
협동조합법이 제정되기 전, 2년 동안 다달이 협동조합과 협동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록 협동조합 법이 없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공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다못해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발휘하여 잘 운영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협동하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협동조합"의 바탕이 되는 말이다. 3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교육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다는 기대감과, 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도 속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과, 협동조합법 제정이 맞아 떨어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에서는 단체장의 교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다가온다.협동조합이 갑작스레 튀어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지 않고도 상호부조하고 힘을 모으며 살아왔다. 마을에는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가면서 살았고, '두레'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였으며, '계'를 조직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부상조하면서 지내왔다. 농사일에 품앗이는 당연한 일이고, 관혼상제나 큰일을 당해도 계를 통하여 미리 조성해 놓은 기금과 계원들의 협력으로 어려움 없이 치러 왔다. 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 있고, 구판장에서는 외상으로 구매하고 추수해서 갚기도 했다. 면 단위 정도에는 오늘 농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농민조합도 있었다. 우리 또래만 하더라도 계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청년 나이에 접어들면 또래 별로 나락(벼)을 거두어 계금을 마련하여 계를 만든다. 우리 또래는 25년 전에 10명 넘는 동무들이 계를 모아 지금껏 이어오면서 부인들과 함께 한해 몇 차례씩은 만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 결혼식 때도 함께한다. 계원인 동무가 죽어 땅에 묻어주는 슬픔도 있었다. 농촌 마을에도 예전과 달리 초상을 치르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자식 동무들이 와서 일을 도맡아 해주면 마을에서도 좋아한다.
 
한국 사회가 70년 즈음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울산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보급되고, '통일벼'가 나오면서 식량도 증산되면서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공장이 생기는 도시로 이농이 줄을 잇게 되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몰려갔다. 몰려가기 보다는 도시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맞겠다.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던 농촌 마을에도 품앗이 보다는 품을 팔아 받는 품삯을 더 좋아하게 된다.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에 새벽종을 울리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 운동이 일으킨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라고(강제적 인지는 모른다)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마을금고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마을금고는 새마을운동의 열매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신협'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앞장서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마을금고는 법도 없어 신협법을 준용한다고 했다. 지금의 새마을금고가 처음에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이었다.
 
청년 때에 내무부에서 하는 마을금고 교육을 받고, 신협 교육에도 참여한 후 동네에서 동무들과 어른들이 모여 00(동네이름)마을금고를 만들기도 했다. 녹색 종이표지로 된 마을금고 통장을 들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았다. 그때 출자금 한 구좌가 얼마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지금 물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천원이면 너무 큰 액수이고, 백 원이면 너무 적은 액수인 듯하다. 모은 출자금을 가지고 대출도 해 주었다. 대출사유가 대체로 '가용'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자발적이지 못하던  마을금고들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서 계속되어 오던 마을금고가 97년 환난을 겪으면서 또 문을 닫았다. 그때 덩어리가 커진 신협도 사고를 당하고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협동조합 정신에  더 충실했던 신협은 마을금고 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새마을금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새마을금고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새마을금고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래도 협동정신을 모태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협동운동은 있어왔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애초에 있었던 협동운동의 싹이 말랐다가 다시 되살아 낫다고 해야 맞겠다. 산업사회 속에서 자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다가, 다른 길로 너무 많이 달려간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협동조합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 나간 우리 사회가 협동조합으로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협동조합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있다.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이론적이거나 지식적인 부분도 필요하겠다.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이나 이념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고 하지도 않는가. 이보다 물리적인 조직, 규모, 대외적인 요소 같은 것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이전에 몰락해 간 협동조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을금고가 그랬듯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같이 직능별로 구성되어 있는 협동조합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생협에도 이런 물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준비하고 설립되는 협동조합을 보면서 돌아보았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이름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도,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협동조합이라는 간판만 걸게 되면 하려는 사업이 잘 되리라는 (착각에 가까운)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대외적인 공신력이 있어 보여서? 지원이나 후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 좋겠다.
 
협동조합은 회사와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을 하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고 본다.(비록 영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협동조합의 틀을 가져가려고 하는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 사회단체로 가늘게 낫다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출자금은 후원금이 아니고, 자본금이다.(가깝다)
 
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사업'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에 근거를 해야 한다고 보는데(약간의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이 그런지 돌아보면 좋겠다.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이나 지역이 명확하고, 범위가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다. 추상적이거나 좋은 내용으로 나열만 하는 경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사업의 내용을 보면 카페와 교육 사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업도 협동조합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협동조합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꿰어 맞추다보니 카페와 교육 사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협동조합이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서 시작하면은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협동조합을 만들면 관의 지원이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있기 까지 하다.  관에서도 재정 지원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협동조합을 설립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가 말하기를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운영하면서도 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본인들도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 협동조합의 앞날을 보는가 같다.
 
협동조합법이 제정되기 전, 2년 동안 다달이 협동조합과 협동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록 협동조합 법이 없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공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다못해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발휘하여 잘 운영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협동하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협동조합"의 바탕이 되는 말이다. 3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교육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다는 기대감과, 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도 속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과, 협동조합법 제정이 맞아 떨어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에서는 단체장의 교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다가온다.협동조합이 갑작스레 튀어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지 않고도 상호부조하고 힘을 모으며 살아왔다. 마을에는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가면서 살았고, '두레'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였으며, '계'를 조직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부상조하면서 지내왔다. 농사일에 품앗이는 당연한 일이고, 관혼상제나 큰일을 당해도 계를 통하여 미리 조성해 놓은 기금과 계원들의 협력으로 어려움 없이 치러 왔다. 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 있고, 구판장에서는 외상으로 구매하고 추수해서 갚기도 했다. 면 단위 정도에는 오늘 농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농민조합도 있었다. 우리 또래만 하더라도 계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청년 나이에 접어들면 또래 별로 나락(벼)을 거두어 계금을 마련하여 계를 만든다. 우리 또래는 25년 전에 10명 넘는 동무들이 계를 모아 지금껏 이어오면서 부인들과 함께 한해 몇 차례씩은 만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 결혼식 때도 함께한다. 계원인 동무가 죽어 땅에 묻어주는 슬픔도 있었다. 농촌 마을에도 예전과 달리 초상을 치르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자식 동무들이 와서 일을 도맡아 해주면 마을에서도 좋아한다.
 
한국 사회가 70년 즈음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울산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보급되고, '통일벼'가 나오면서 식량도 증산되면서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공장이 생기는 도시로 이농이 줄을 잇게 되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몰려갔다. 몰려가기 보다는 도시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맞겠다.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던 농촌 마을에도 품앗이 보다는 품을 팔아 받는 품삯을 더 좋아하게 된다.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에 새벽종을 울리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 운동이 일으킨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라고(강제적 인지는 모른다)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마을금고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마을금고는 새마을운동의 열매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신협'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앞장서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마을금고는 법도 없어 신협법을 준용한다고 했다. 지금의 새마을금고가 처음에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이었다.
 
청년 때에 내무부에서 하는 마을금고 교육을 받고, 신협 교육에도 참여한 후 동네에서 동무들과 어른들이 모여 00(동네이름)마을금고를 만들기도 했다. 녹색 종이표지로 된 마을금고 통장을 들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았다. 그때 출자금 한 구좌가 얼마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지금 물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천원이면 너무 큰 액수이고, 백 원이면 너무 적은 액수인 듯하다. 모은 출자금을 가지고 대출도 해 주었다. 대출사유가 대체로 '가용'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자발적이지 못하던  마을금고들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서 계속되어 오던 마을금고가 97년 환난을 겪으면서 또 문을 닫았다. 그때 덩어리가 커진 신협도 사고를 당하고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협동조합 정신에  더 충실했던 신협은 마을금고 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새마을금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새마을금고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새마을금고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래도 협동정신을 모태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협동운동은 있어왔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애초에 있었던 협동운동의 싹이 말랐다가 다시 되살아 낫다고 해야 맞겠다. 산업사회 속에서 자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다가, 다른 길로 너무 많이 달려간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협동조합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 나간 우리 사회가 협동조합으로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협동조합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있다.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이론적이거나 지식적인 부분도 필요하겠다.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이나 이념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고 하지도 않는가. 이보다 물리적인 조직, 규모, 대외적인 요소 같은 것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이전에 몰락해 간 협동조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을금고가 그랬듯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같이 직능별로 구성되어 있는 협동조합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생협에도 이런 물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준비하고 설립되는 협동조합을 보면서 돌아보았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이름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도,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협동조합이라는 간판만 걸게 되면 하려는 사업이 잘 되리라는 (착각에 가까운)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대외적인 공신력이 있어 보여서? 지원이나 후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 좋겠다.
 
협동조합은 회사와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을 하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고 본다.(비록 영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협동조합의 틀을 가져가려고 하는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 사회단체로 가늘게 낫다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출자금은 후원금이 아니고, 자본금이다.(가깝다)
 
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사업'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에 근거를 해야 한다고 보는데(약간의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이 그런지 돌아보면 좋겠다.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이나 지역이 명확하고, 범위가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다. 추상적이거나 좋은 내용으로 나열만 하는 경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사업의 내용을 보면 카페와 교육 사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업도 협동조합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협동조합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꿰어 맞추다보니 카페와 교육 사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협동조합이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서 시작하면은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협동조합을 만들면 관의 지원이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있기 까지 하다.  관에서도 재정 지원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협동조합을 설립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가 말하기를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운영하면서도 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본인들도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 협동조합의 앞날을 보는가 같다.
 
협동조합법이 제정되기 전, 2년 동안 다달이 협동조합과 협동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록 협동조합 법이 없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공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다못해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발휘하여 잘 운영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협동하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협동조합"의 바탕이 되는 말이다. 3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교육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다는 기대감과, 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도 속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과, 협동조합법 제정이 맞아 떨어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에서는 단체장의 교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다가온다.협동조합이 갑작스레 튀어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지 않고도 상호부조하고 힘을 모으며 살아왔다. 마을에는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가면서 살았고, '두레'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였으며, '계'를 조직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부상조하면서 지내왔다. 농사일에 품앗이는 당연한 일이고, 관혼상제나 큰일을 당해도 계를 통하여 미리 조성해 놓은 기금과 계원들의 협력으로 어려움 없이 치러 왔다. 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 있고, 구판장에서는 외상으로 구매하고 추수해서 갚기도 했다. 면 단위 정도에는 오늘 농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농민조합도 있었다. 우리 또래만 하더라도 계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청년 나이에 접어들면 또래 별로 나락(벼)을 거두어 계금을 마련하여 계를 만든다. 우리 또래는 25년 전에 10명 넘는 동무들이 계를 모아 지금껏 이어오면서 부인들과 함께 한해 몇 차례씩은 만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 결혼식 때도 함께한다. 계원인 동무가 죽어 땅에 묻어주는 슬픔도 있었다. 농촌 마을에도 예전과 달리 초상을 치르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자식 동무들이 와서 일을 도맡아 해주면 마을에서도 좋아한다.
 
한국 사회가 70년 즈음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울산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보급되고, '통일벼'가 나오면서 식량도 증산되면서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공장이 생기는 도시로 이농이 줄을 잇게 되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몰려갔다. 몰려가기 보다는 도시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맞겠다.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던 농촌 마을에도 품앗이 보다는 품을 팔아 받는 품삯을 더 좋아하게 된다.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에 새벽종을 울리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 운동이 일으킨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라고(강제적 인지는 모른다)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마을금고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마을금고는 새마을운동의 열매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신협'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앞장서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마을금고는 법도 없어 신협법을 준용한다고 했다. 지금의 새마을금고가 처음에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이었다.
 
청년 때에 내무부에서 하는 마을금고 교육을 받고, 신협 교육에도 참여한 후 동네에서 동무들과 어른들이 모여 00(동네이름)마을금고를 만들기도 했다. 녹색 종이표지로 된 마을금고 통장을 들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았다. 그때 출자금 한 구좌가 얼마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지금 물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천원이면 너무 큰 액수이고, 백 원이면 너무 적은 액수인 듯하다. 모은 출자금을 가지고 대출도 해 주었다. 대출사유가 대체로 '가용'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자발적이지 못하던  마을금고들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서 계속되어 오던 마을금고가 97년 환난을 겪으면서 또 문을 닫았다. 그때 덩어리가 커진 신협도 사고를 당하고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협동조합 정신에  더 충실했던 신협은 마을금고 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새마을금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새마을금고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새마을금고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래도 협동정신을 모태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협동운동은 있어왔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애초에 있었던 협동운동의 싹이 말랐다가 다시 되살아 낫다고 해야 맞겠다. 산업사회 속에서 자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다가, 다른 길로 너무 많이 달려간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협동조합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 나간 우리 사회가 협동조합으로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협동조합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있다.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이론적이거나 지식적인 부분도 필요하겠다.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이나 이념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고 하지도 않는가. 이보다 물리적인 조직, 규모, 대외적인 요소 같은 것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이전에 몰락해 간 협동조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을금고가 그랬듯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같이 직능별로 구성되어 있는 협동조합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생협에도 이런 물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준비하고 설립되는 협동조합을 보면서 돌아보았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이름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도,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협동조합이라는 간판만 걸게 되면 하려는 사업이 잘 되리라는 (착각에 가까운)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대외적인 공신력이 있어 보여서? 지원이나 후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 좋겠다.
 
협동조합은 회사와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을 하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고 본다.(비록 영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협동조합의 틀을 가져가려고 하는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 사회단체로 가늘게 낫다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출자금은 후원금이 아니고, 자본금이다.(가깝다)
 
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사업'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에 근거를 해야 한다고 보는데(약간의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이 그런지 돌아보면 좋겠다.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이나 지역이 명확하고, 범위가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다. 추상적이거나 좋은 내용으로 나열만 하는 경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사업의 내용을 보면 카페와 교육 사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업도 협동조합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협동조합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꿰어 맞추다보니 카페와 교육 사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협동조합이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서 시작하면은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협동조합을 만들면 관의 지원이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있기 까지 하다.  관에서도 재정 지원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협동조합을 설립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가 말하기를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운영하면서도 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본인들도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 협동조합의 앞날을 보는가 같다.
 
협동조합법이 제정되기 전, 2년 동안 다달이 협동조합과 협동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록 협동조합 법이 없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공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다못해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발휘하여 잘 운영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협동하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협동조합"의 바탕이 되는 말이다. 3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교육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후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다는 기대감과, 법이 제정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협동조합도 속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과, 협동조합법 제정이 맞아 떨어진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에서는 단체장의 교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다가온다.

협동조합이 갑작스레 튀어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지 않고도 상호부조하고 힘을 모으며 살아왔다. 마을에는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가면서 살았고, '두레'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였으며, '계'를 조직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부상조하면서 지내왔다. 농사일에 품앗이는 당연한 일이고, 관혼상제나 큰일을 당해도 계를 통하여 미리 조성해 놓은 기금과 계원들의 협력으로 어려움 없이 치러 왔다. 마을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구판장이 있고, 구판장에서는 외상으로 구매하고 추수해서 갚기도 했다. 면 단위 정도에는 오늘 농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농민조합도 있었다.

우리 또래만 하더라도 계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청년 나이에 접어들면 또래 별로 나락(벼)을 거두어 계금을 마련하여 계를 만든다. 우리 또래는 25년 전에 10명 넘는 동무들이 계를 모아 지금껏 이어오면서 부인들과 함께 한해 몇 차례씩은 만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언제라도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 결혼식 때도 함께한다. 계원인 동무가 죽어 땅에 묻어주는 슬픔도 있었다. 농촌 마을에도 예전과 달리 초상을 치르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자식 동무들이 와서 일을 도맡아 해주면 마을에서도 좋아한다.
 
한국 사회가 70년 즈음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울산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화도 함께 이루어진다.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보급되고, '통일벼'가 나오면서 식량도 증산되면서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공장이 생기는 도시로 이농이 줄을 잇게 되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아 도시로 몰려갔다. 몰려가기 보다는 도시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맞겠다.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던 농촌 마을에도 품앗이 보다는 품을 팔아 받는 품삯을 더 좋아하게 된다.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에 새벽종을 울리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 운동이 일으킨다.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라고(강제적 인지는 모른다)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마을금고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마을금고는 새마을운동의 열매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신협'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가 앞장서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마을금고는 법도 없어 신협법을 준용한다고 했다. 지금의 새마을금고가 처음에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이었다.
 
청년 때에 내무부에서 하는 마을금고 교육을 받고, 신협 교육에도 참여한 후 동네에서 동무들과 어른들이 모여 00(동네이름)마을금고를 만들기도 했다. 녹색 종이표지로 된 마을금고 통장을 들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았다. 그때 출자금 한 구좌가 얼마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지금 물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천원이면 너무 큰 액수이고, 백 원이면 너무 적은 액수인 듯하다. 모은 출자금을 가지고 대출도 해 주었다. 대출사유가 대체로 '가용'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자발적이지 못하던  마을금고들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서 계속되어 오던 마을금고가 97년 환난을 겪으면서 또 문을 닫았다. 그때 덩어리가 커진 신협도 사고를 당하고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협동조합 정신에  더 충실했던 신협은 마을금고 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새마을금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새마을금고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새마을금고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래도 협동정신을 모태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협동운동은 있어왔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애초에 있었던 협동운동의 싹이 말랐다가 다시 되살아 낫다고 해야 맞겠다. 산업사회 속에서 자본에 예속된 삶을 살아가다가, 다른 길로 너무 많이 달려간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협동조합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 나간 우리 사회가 협동조합으로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협동조합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있다.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이론적이거나 지식적인 부분도 필요하겠다. 그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신이나 이념을 이해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고 하지도 않는가. 이보다 물리적인 조직, 규모, 대외적인 요소 같은 것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이전에 몰락해 간 협동조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을금고가 그랬듯이. 농협, 수협, 중소기업협동조합 같이 직능별로 구성되어 있는 협동조합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생협에도 이런 물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준비하고 설립되는 협동조합을 보면서 돌아보았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이름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도,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협동조합이라는 간판만 걸게 되면 하려는 사업이 잘 되리라는 (착각에 가까운)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대외적인 공신력이 있어 보여서? 지원이나 후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 좋겠다.
 
협동조합은 회사와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을 하지만, 사업을 하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고 본다.(비록 영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가까운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협동조합의 틀을 가져가려고 하는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 사회단체로 가늘게 낫다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출자금은 후원금이 아니고, 자본금이다.(가깝다)
 
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사업'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에 근거를 해야 한다고 보는데(약간의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는 협동조합이 그런지 돌아보면 좋겠다.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이나 지역이 명확하고, 범위가 좁을수록 좋다는 말이다. 추상적이거나 좋은 내용으로 나열만 하는 경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사업의 내용을 보면 카페와 교육 사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업도 협동조합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협동조합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꿰어 맞추다보니 카페와 교육 사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협동조합이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서 시작하면은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본다. 아무리 사회적 협동조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협동조합을 만들면 관의 지원이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있기 까지 하다.  관에서도 재정 지원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립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겠다.
 
협동조합을 설립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가 말하기를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고, 운영하면서도 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본인들도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는다. 앞으로 우리 협동조합의 앞날을 보는가 같다.
 
협동조합법이 제정되기 전, 2년 동안 다달이 협동조합과 협동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록 협동조합 법이 없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공제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하다못해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발휘하여 잘 운영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협동하면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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