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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땅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화연대 6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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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택에 처음 가 본 것은 지난 해 평화캠프 때였다. 그 이전부터 평택의 투쟁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들 들어왔었고 실지로 많은 친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지만 통 함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2000년부터 매년 평화캠프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2005년 평화캠프를 대추분교에서 하기로 한 건 그 곳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평화이고 기지 이전으로 군사력이 확장되는 것이 평화를 해치는 커다란 요인이란 점을 캠프를 준비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2004년부터 평화캠프에는 비폭력직접행동을 위한 트레이닝을 주요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해왔다. 사실 우리에겐 직접행동이니 이걸 위한 준비 트레이닝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까진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2004년에는 병역거부와 평화운동으로 2001년부터 꾸준히 연대해왔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활동가이자 비폭력트레이너인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 씨를 모시고 함께 토론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우기도 했었다. 2005년엔 비록 아마추어지만 우리끼리 한 번 준비해보고 나름대로 발전시켜나가 보기로 하였다. 또 평택의 상황을 직접 보고 활동가를 모시고 얘기도 듣고 하면서 캠프 참가자들의 평택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자 하였다.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택역에서 대추리, 도두리 상황에 대한 선전전을 진행하기로 한 날 갑자기 국방부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주민설명회를 한다며 대추분교로 무작정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서둘러 모이시고 많지 않은 수였지만 캠프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달라붙고 해서 정문을 막아보려 했지만 방패와 곤봉, 커티기을 쥔 많은 경찰들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경찰이 방패로 손을 마구 찍어대는 와중에도 정문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오르기까지 하였다. 난 너무 겁이 나서 친구에게 다가가 다치니까 손을 빼라고 애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친구 손을 내 손이나 혹은 다른 무엇으로 그 상태 그대로 보호해줬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난 누구든 다치는 것이 싫다. 그게 나든 내 친구든 아니면 경찰이든… 그 날의 충돌로 주민 한 분이 실신하고 캠프에 참가했던 상용이 연행되었다. 나중에 캠프에 참가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우리는 빠른의사결정이나 인간 브릿지(bridge) 등의 트레이닝 툴을 사용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첫째로 우리가 내린 결정은 주민보다 우리가 앞에 나서서 뭔가를 선동하거나 행동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방부나 경찰로 하여금 외부세력 어쩌구 하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이 투쟁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주민들이라는 참가자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옥신각신 했지만 결국 경찰을 앞세운 국방부는 대추분교로 밀로 들어왔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주민설명회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각종 칠 것을 이용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연설을 방해하기로 두 번째 결정을 내렸다. 당장 사람들이 학교 건물로 들어가 북이며 꽹과리며 장구, 징 등을 빌려다가 연단 앞에서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민들이 연단을 잘 볼 수 있도록 경찰이 연단 옆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우리가 풍물을 가지고 등장하자 경찰들이 연단을 빙 둘러 막아섰다. 경찰들의 숲 안에서 볼 수도 없이 소리로만 주민설명회를 하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더 웃긴 것은 우리가 약간 물러가 주민들 옆에서 춤추고 놀면 다시 경찰대열을 열었다가 우리가 다시 연단 쪽으로 오면 다시 막고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주변에서 관찰자 노릇을 잘 해준 매닉의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의 풍물 소리가 너무 작아서 연단에서 하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막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간중간 체크를 해가며 다른 방법들을 강구했어야 했었는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 행동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뭐 특별한 행동을 한건 아니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 행동에 ‘국가야 국방부야 짖어라. 우리는 열심히 놀겠다.’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한 번도 꽹과리를 쳐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한 달 동안 왼손 검지가 퉁퉁 부어 구부러지지도 않는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비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비판의 요지는 (내가 잘 이해한 것이라면) 캠프 참가자 내부에서도 잠깐 그런 얘기가 나왔었다고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으며 심지어 캠프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주민들을 막아섰다는 것이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하지 못했다. 평택 투쟁을 열심히 해오고 있는 그 친구에게 그저 주변이기만한 나로서는 한창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괜히 기운 빠지는 소리만 될성싶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대화를 나눠보려 한다.


그리고 5월 4일 최종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 나는 대추분교 교문 앞에 다시 연좌를 하였다. 그 전날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긴장감에 하나도 졸립지가 않았다. 그 날의 비참했던 대추리는 이미 언론에 많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다시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 하다. 다만 나는 앞서 2005 평화캠프에 대한 어떤 친구의 평가와 이번 평택 투쟁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그냥 나열해 보고자 한다. 이상하게 언젠가부터 글쓰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렇게 진행 중인 민감한 문제에 관해선 더욱 그렇다. 제일 두려운 건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긍정적 방향으로 토론이 되었으면 한다.


5월 3일 나를 제일 당황케 한 것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발언들 속에서 ‘전쟁’, ‘결사항전’과 같은 단어들을 젤루 많이 들을 수 있었다는 거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내가 여기 왜 와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지지 않은 채 주로 남성연사들로 채워진 연단은 시종일관 결사항전을 주문했고 문화공연도 심장을 두근거리고 흥분시키게 하는 리듬의 노래 일색이었다. 차분히 내일을 준비하고 싶은 바램도 내일 연행되면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경험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도 귀가 터져라 울리는 노래와 선동에 묻혀버렸다. 게다가 간간히 수원 어디 어느 조직에서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공병을 주으러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대추분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마스크를 쓴 남성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으로 수가 모자랐는지 사람들 여기저기서 ‘남성 앞으로’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랑스럽게 나가는지 마지못해 끌려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본대오를 이탈하는 남성과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의 투쟁에서 여성인 나는 주체가 아닌 것마냥 느껴졌다. 분명 어제 아주 비밀스럽게 오늘의 전술을 전달받기로는 비폭력이고 끝까지 대추초교를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라 했는데 무엇 때문에 남성들을 따로 불러내는 것일까 의아했다. 실제로 대추초교 정문의 경우 경찰이 남성들을 먼저 끌어냈기 때문에 가장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여성이었다. 게다가 1,000명도 안되는 지킴이들이 물리력으로 13,000여명의 병력을 막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평화인권연대에서 평택 관련한 회의를 할 때 현장에서 욱 해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닌 최소한 폭력을 준비하지는 말자는 것을 범대위 차원에서 합의를 할 순 없겠냐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폭력을 정의내리는 것은 아마 사람마다 다 다들 것이고 대항폭력에 대한 생각은 아마 더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당한 무언가를 주장하는 투쟁에서 누구는 폭력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최소한의 대항폭력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모든 폭력은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며 (물론 국가의 폭력과 시위대의 대항폭력을 한꺼번에 싸잡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시위대도 가능하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통해 비폭력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1, 2, 3차 행정대집행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시민의 지지는 그렇게 바른 방법을 통해 인간들의 선한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번 집회에서만은 폭력을 준비하지 않기로 하자는 최소한의 합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공병을 줍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물론 결과적으로 화염병은 등장하지 않았다) ‘남자 앞으로’를 당연히 외치는 활동가를 보면서 나는 여기 왜 와 있을까 잠깐 고민이 되었다. 내가 나의 투쟁에 대해 당당하지 못할 때 누굴 설득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거대한 국가폭력에 대항폭력을 맞선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대추분교 정분에서 연좌를 하고 있을 때 시위대 안쪽에서 누군가가 ‘이건 성폭력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직접 보질 못해서 어떤 상황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당시 내 앞에 있던 전경들이 갑자기 ‘뒷짐져’라고 계속 옆으로 말하며 차렷 자세에서 뒷짐 지는 자세로 자세를 바꿨던 것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혹여라도 언론이나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경찰들 나름대로의 대응수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심지어 경찰도 시위대의 행동에 따라 대응방식이 이렇게 진화하는데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의 작태를 뻔히 알고 있는 시위대가 그들에게 신나서 떠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하고 단순히 경찰과의 거리 확보를 위한 긴 죽봉이었겠지만 조작과 왜곡의 대가인 보수언론들에게는 시위대를 음해하기 위한 좋은 먹이었을 것이다. 단 한 장의 사진에 의해 시민들에게 우리의 투쟁이 왜곡되게 전달이 되고 정당성이 가려진다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 아닐까.


김지태 이장님이 최근 구속이 되었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문정현 신부님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에 들어가셨다. 평택의 투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보다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다. 쉬엄쉬엄 투쟁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큰 그림을 보며 투쟁하는 것과 한치 앞으로 내다보며 조급하게 투쟁하는 것은 분명 다른 얘기일거라는 거다. 나는 어쩌면 대추리와 도두리의 주민들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농부들이란 것을 알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주민들이 그렇진 않았지만 그 중 땅을 일구는 것이 돈보다 값지다 생각하는 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결국 감옥에 갇혔지만 농부보다 미군이 소중하다는 이치를, 땅보다 돈이 소중하다는 자명한 진리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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