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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평균임금

20일 건강보험공단의 `표준보수월액 5000만원 이상 고소득자' 자료에 따르면 윤 부회장은 21억1000만원을 받아 이 회장의 10억원의 2배를 넘어섰다.
또 이윤우 부회장과 이기태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각각 11억8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 8억9000만원, 이학수 부회장(전략기획실장) 8억5000만원, 김인주 사장 5억7000만원의 순인 것으로 조사됐다. [윤종용 부회장, 이건희 회장보다 월급 많다 /머니투데이 / 이승호 기자 / 2006-10-20 09:34 ]

양극화와 계급투쟁 /노정협 / 2006-09-25 09:52:47

양극화와 계급투쟁


계급적대를 은폐하는 자본가식 양극화론

자본가계급은 양극화라는 눈에 보이는 적대적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본은 양극화를 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아전인수 격이다. 자본은 양극화가 노동자를 더 착취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양극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자본의 부의 축적과 그 반대편에서 절대 다수 인민의 빈곤의 축적에 대해서는 회피한다. 대신에 그들은 양극화가 계급모순의 증대가 아니라 중산층의 감소라고 얘기한다.

소득 양극화란 ‘중간 소득 계층이 줄어들면서 소득분포가 극단으로 쏠리는 현상’을 의미(삼성경제연구소, 2006.7.8, ‘소득 양극화의 현황과 요인)

삼성경제연구소는 이에 따라 ‘분배구조 개선’ 보다는 ‘중산층 복원’이 양극화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본은 “성장세 회복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구조조정 대책의 병행이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올 해 초에 ‘중산층을 되살리자’는 구호 아래 양극화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양극화란 관점에 서는 한, 가진 자의 편이냐, 못 가진 자의 편이냐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양극화 대신 중산층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증세냐, 감세냐'하는 논쟁은 공허해집니다. 가진 자도, 못가진 자도 아닌 중산층을 돕는 조세정책을 펴면 되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에선 좌우 이념 대결도 극단으로 흐르지 않습니다.”(중앙일보 2006년 2월 2일,  ‘연중기획 중산층을 되살리자 2부’)

자본가 신문은 "중산층을 두텁게 복원하는 게 자본과 노동의 대타협을 이끌어내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자본가계급의 기만적인 양극화론에 대해서 맑스는 이렇게 비판했다.

“한쪽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부와, 구매자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생산물들의 과잉이 존재한다. 다른 한쪽에는 사회의 다수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화되고, 임금 노동자로 전화되며,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생산물들의 과잉분을 전유할 수 없게 된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소수의 계급과 재산 없는 다수의 임금 노동자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은, 이 사회가 그 자신의 [생산물의] 과잉 속에서 질식사하는 반면 그 성원의 대다수는 극도의 곤궁으로부터 별로 보호받지 못하거나 혹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러한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부조리한 것으로 그리고―더욱더 불필요한 것으로 된다. 이 상태는 제거되어야 하며, 제거될 수 있다.”(맑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에 대한 엥겔스의 서문)

양극화는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들을 철저하게 수탈당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 사회의 대부분의 생산물을 생산한다. 그런데 자신이 생산하는 생산물이 늘어나면 날수록 노동자계급은 자본을 성장시키고 그 성장한 자본의 힘에 의해 억눌리고 짓밟힌다. 노동자가 창조한 노동의 결과물들은 자본이 되어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자본을 독차지한 자본가는 그 자본의 힘으로 경찰과 용역깡패를 고용하고, 구사대를 앞세워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대체인력을 투입하고 파업과 노조를 파괴한다. 노동자가 만들어낸 노동의 결과물들이 자본이 되어 노동자를 억압하는 엄청난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소외된다. 자신이 생산한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생산의 주역이면서도 주변부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노동은 노동자에게 삶의 활력과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는 기쁨이 아니라 억압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고역이다. 노동자는 이 지겨운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유일하게 기쁨을 느낀다.

“개인들이 그 속에서 생산을 행하는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적 생산관계들은 따라서 물질적 생산수단들, 생산력들의 변화 및 발전과 더불어 변화하고 변모한다. 그 전체성 속에 있는 생산 관계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들, 사회라고 칭하는 것을 형성하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한,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 사회를 형성한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맑스, 임금노동과 자본)

하나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자본은 자본이 된다. 자본이 자본이 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애초에 투하한 자본보다 더 많은 가치 즉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면 자본이 아니라 단순히 화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화폐는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지지 못하고 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 이 화폐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계급을 고용하여 지배자로 군림하여 생산할 때 자본가는 지배계급이 되고 노동자는 지배받는 계급이 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본에게 종속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이러한 생산을 둘러싸고 사람들 간에 맺어지는 관계에 따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은 자본가계급이 되고, 가진 것은 판매해야할 노동력밖에 없는 자들은 노동자계급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간의 관계는 서로 적대적이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더욱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늘리려고 한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을 높이고 더 나아가 착취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모순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자간의 계급모순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 -민족모순, 종교모순, 문화적 갈등 등 다양한 투쟁-은 다양한 색깔을 띠고 전개된다.

자본은 노사상생을 얘기한다. 그러나 자본의 성장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효과적인 착취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성장하는 자본은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기계와 생산방식, 근무체계를 도입하여 최소의 노동력으로 최대의 이윤을 내려고 한다. 이것이 자본의 구조조정이다. 자본의 구조조정은 인력축소, 비정규직화, 임금감축, 노동강도 강화, 노동밀도 증대 등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끝없는 이윤축적욕에 노동자계급이 끊임없이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킬 때에만 작은 양보라도 쟁취할 수 있다.

자본의 성장은 농민 등 소생산자들을 몰락시킨다. 그러나 자영업 등에서 중간계급은 절대적으로 감소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중간계급의 숫자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몰락한 자본가계급과 정리해고 된 노동자계급 양 진영으로부터 끊임없이 충원됐다가 또 몰락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기업 · 금융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자들이 대거 자영업에 진입하여 자영업자간에 경쟁이 심화되고 비임금 근로자 비중이 증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상시화되면서 자영업 창업이 증가”한다고 분석한다. 이 분석에 의하면 농업을 제외한 자영업자의 수가 1998년 약 420만 명에서 2004년 약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숫자는 그 사이에 몰락한 자영업자를 더하면 훨씬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자적대에 의해 양극화는 더 확대된다. 양극화의 한쪽에서 자본가들은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축적하면서 탐욕과 허영, 풍요 속에 호사스런 삶을 살아간다. 양극화의 반대편에서는 절대적 다수인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다행히 성장하는 자본의 빵 부스러기를 먹고 있는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 장시간 노동으로 자신의 고혈을 짜내는 대가로 약간의 소득이 상승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확대가 자본의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된다.

자본이 말하는 중산층은 “소득 기준으로 중위소득(median income)의 50~150%에 해당하는 계층”이다. 자본은 여기서 통계수치로 교활하게 장난치고 있다.(자본은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계산할 때 자본가 계급의 일원인 임원을 봉급쟁이라고 하여 노동자 임금에 집어넣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로 나온 노동자의 전체 평균임금은 실질적인 노동자의 평균임금 보다 상당히 높다. 그런데 이 평균임금은 자본가의 봉급 외의 금융자산과 각종 부동산 소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얻어진 n개의 값 중에서 가장 큰 값과 가장 작은 값의 평균값이 중간값이다. 자본은 소득의 중간 값을 근거로 중산층이라는 인위적인 계층을 만들어 낸다. 통계청의 도시근로자 가계수지 조사를 기초로 한국개발연구원(KDI)유경준 박사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도시근로자 가구의 중위소득(과세 표준 기준)은 연간 2397만원, 지난해엔 3213만원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97년엔 1200만~3600만원, 2004년엔 1600만~4800만원을 받은 노동자가 중산층에 해당한다. 심지어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당수도 중산층에 포함된다. 자본이 말하는 중산층은 이렇게 포괄 범위가 상당히 넓다. 그런데 이러한 기만적인 중산층 논리에 따르더라도 ‘중산층’은 줄어들고 있다. 이 사회는 20 대 80의 사회에서 10 대 90 더 나아가 5대 95의 사회로 점점 더 변하고 있다.

궁핍화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맑스는 자본주의의 계급적대를 기반으로 하는 궁핍화론을 제시했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굶어죽는 노동자계급은 거의 줄었기 때문에 맑스의 궁핍화론은 이제 틀렸다고 말한다. 남한 노동자계급은 과거에 비해서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 물론 그것조차도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실제 노동자계급에게 승용차는 필수품이 되었다. 90년대 중반에 노동자계급 사이에서도 노동자가 승용차를 구입하게 되면서 개인주의화 되고 더 이상 노동자계급은 절대적으로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은 과거와 같이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노동운동의 위기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제 노동운동은 전투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합리적인 대안과 정책모색으로 더 윤택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상대적 궁핍화론이 나왔다. 맑스는 노동자계급이 절대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위의 집들이 한결같이 작다면, 그 집은 주택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하나 솟아 있다면, 그 집은 오두막으로 오그라들 것이다. 이제 그 작은 집은 그 임자가 [주택에 대한] 요구를 전혀 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혹은 아주 작은 요구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문명의 행로 속에서 그 작은 집이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옆에 있는 그 궁전이 동일한 정도로 혹은 더 큰 정도로 높이 치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사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더욱더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짓눌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저한 임금의 증대는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을 전제한다. 생산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마찬가지로 부, 사치, 사회적 욕구 및 사회적 향유의 급속한 성장을 야기한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증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에 비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감소된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재는 것이지 그것들의 충족 대상들을 기준으로 재는 것이 아니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맑스, 같은 책)

맑스는 과거에 비해 절대적으로 삶의 조건이 나아질 수 있으나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나 욕구는 사회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노동자가 과거에는 집이 없어서 움막에 살다가 이제는 작은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은 집 주변에 자본가들의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이 생겼다. 자본가들의 호사스런 삶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삶의 장벽은 더 거대해졌다. 노동자계급은 움막에 살던 시절보다 더 심한 물질적, 심리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맑스의 궁핍화론에 대해서 상대적 궁핍화론이 나왔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대표적인 수정주의자의 원조 격인 베른슈타인은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제 다수 노동자의 삶의 개선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맑스의 궁핍화론을 더 이상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배경이 되었다. 소수의 자본가계급과 절대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계급이 서로 적대하고 계급투쟁을 하는 자본주의 모순 대신에 물질적 혜택을 받는 다수의 중산층이 생겼다. 더군다나 자본주의는 이제 선거제도를 통하여 민주주의가 강화됐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용한 혁명투쟁은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독일 사민당은 계급정당이 아니라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을 껴안는 대중정당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는 최근에는 더욱 우경화되어 국민정당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당시만 하더라도 엥겔스의 가장 충실한 정치적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던, 맛이 가기 전의- 카우츠키는 상대적 궁핍화론으로 맞섰다. 카우츠키는 맑스가 말한 궁핍화는 절대적인 가난과 빈곤의 증대가 아니라 자본의 성장과 부의 축적에 비한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절대적 궁핍을 포함하는)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끊임없이 증대하는 것은 생리적 빈곤이 아니라 사회적 빈곤이다. 즉 문화적 욕망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노동자의 생활재료, 바꿔 말하면 노동자의 머리 위에 쏟아지는 생산물과의 대립은 증대한다.”(사끼사까 이쓰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과 반비판에서 재인용)

맑스가 말한 궁핍화론의 본질은 다음의 글에 가장 잘 표현돼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며, 노동자를 부분인간으로 불구화하며,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로 떨어뜨리며, 그의 노동의 실제 내용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을 혐오스러운 고통으로 전환시키며,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 또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모든 방법들은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악하며,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를 독재[그 비열함 때문에 더욱 혐오스럽다]에 굴복시키며, 그의 전체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화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자거노트의 수레바퀴 밑으로 [자본을 위해 희생시키려고] 질질 끌고 간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의 방법이며, 그리고 축적의 모든 확대는 다시 이 방법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된다. 이로부터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의 상태는 [그가 받는 임금이 많은 적든] 악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 · 노동의 고통 · 노예상태 · 무지 · 야만화 ·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맑스,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 『자본론』)

맑스의 궁핍화론에서 가장 유명하게 인용되는 부분이 마지막 문장이다. 맑스는 궁핍화를 단지 임금만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소득만으로 상대적 궁핍화론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물론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은 끊임없는 화폐가치의 하락, 물가인상 등으로 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생활수단의 양들이 줄어들기도 한다. 특히 실업은 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빈곤을 가져오는 가장 큰 위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맑스는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를 대단히 폭넓게 이야기 하고 있다.

개량주의자들은 복지의 증대로 분배 문제를 해결하면 노동자의 고통이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의 내의 개혁을 이야기 한다. 물론 현재의 개량주의자들은 개량의 성과마저도 가져다줄 수 없다. 맑스는 창조성과 활력을 상실한 노동의 고통, 여기서 파생되는 지적 잠재력의 소실과 자본의 지배력에 포섭된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개악과 노동시간의 증대, 자본의 부의 축적에 비한 노동자 삶의 엄청난 격차, 자본이 조장하는 향락과 퇴폐, 무분별한 방종 등으로 인한 건강한 노동자 문화의 상실, 인간적 존엄의 상실로 인한 도덕적 타락과 인격적 모독이 가져오는 인간성의 타락과 황폐화, 경쟁이 가져다주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과 애정과 신뢰의 결핍, 이기주의, 온갖 억압과 폭력에 압도당하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주성의 상실 등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모든 현상을 저주하고 여기에 맞선 투쟁을 강조했다. 이것이 진정한 궁핍화 이론이다.

자본은 양극화를 제멋대로 해석한 뒤에 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안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은 이를 통해 양극화라는 사회적 위기를 은폐, 왜곡하고 자본의 패권적, 폭력적 지배력을 강화하여 영원한 자본의 착취왕국을 강화하고자 한다.

자본가들은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단지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상태를 분석한 것에 불과하고 고도로 발전한 현대산업자본주의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증대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은 생산은 점점 더 사회적 생산이 되는데 생산의 결과물들은 자본이 독차지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적대감은 깊어지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점점 더 생산할수록 사회적 지위, 생존권의 하락, 자본에의 노예적, 인격적 종속이 깊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모순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몰락을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의 경제적 법칙만으로 저절로 붕괴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몰락의 역사적 필연성을 현실화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다. 맑스의 붕괴론은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노력과 강고한 투쟁, 자본주의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노동자계급의 주체 역량에 달려있다. 이것이 맑스주의와 경제주의자들과의 근본적 차이다. 맑스주의를 단순히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경제적, 이론적 분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맑스주의의 혁명성을 왜곡시키는 자들이다.

맑스주의의 혁명적 이론을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혁명적으로 현실에 적용한 혁명세력들은 레닌과 러시아의 볼셰비키다. 볼셰비키와 레닌주의의 보편성을 이해하지 않은 채 러시아만의 특수성(후진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절대화하면서 이 후진성을 이유로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력이 더 발전하기까지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멘셰비키주의자, 카우츠키주의자)으로 이해한다거나, 레닌에게 전술은 빌려올 수 있으되 이론은 없다고 하는 세력들은 레닌주의와 맑스주의를 분리시킨다. 이러한 세력들은 레닌주의를 왜곡하고 폄하한다. 이들은 레닌주의를 공격하여 맑스주의를 세운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방법론과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귀결은 레닌을 죽여서 맑스를 혁명적 이론과 실천이 아니라 학문적 주의, 주장으로 왜곡시킨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과학적 방법론도 아니요 당파적인 혁명적 실천도 아닌 기회주의이다. 자본주의 양극화를 해석하는 방식과 그 해결책은 결국 계급투쟁의 문제이다.

“철학자들은 단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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