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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7월 6일

7/3(일) MP

눈을 뜨면 "15명이 우글우글"하는 공간이 보이지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순간 나는 어느새 중재 워크숍이 열리던 공간에 앉아있다. 정말 대단한 마법이다. 일요일 오전 6시. 하루 더 쉬면서 책보고 편지를 쓸 수 있다니 기분이 좋다. 편지 쓰는 것이 '일'처럼 느껴질 법도 한데, 아직은 돌아올 답장을 생각하면 힘이 불끈 솟는다. 문장을 짧게 쓰는 연습을 신경써서 해야겠다. 일기장에 쓰는 글씨도 좀 더 알아보게 쓰고.

7/4(월) MP

파리의 거리가 떠올랐다. 르네 아저씨 집도 생각이 났고. 하루하루 어떤 새로운 일이 펼쳐질까 기대하고 설레던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옆에 의지하고 같이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 오른쪽만 안 굽혀지던 손가락이 이젠 왼쪽도 안 굽혀진다. 좀 쉬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15명이 씻는 아침시간. 내가 씻을 타임. 화장실에 갈 시간을 잘 찾아야겠다. 곧 익숙해지겠지. 월요일이다! 꼭 첫 출근하는 기분이다. 약간의 긴장 약간의 설레임.

7/4

쿠사리. '꼽산다'는 말. 노이로제에 걸린 것 같긴 하다. 이럴 땐 '아직도'다. 아직도 1년 남았는데 앞으로 좀 더 무던해져야겠다. 햄 생일, 기념일을 앞두고, 갇혀있는 처지가 주는 무기력감일까. 힘이 잘 안 난다. 달리기를 시작해야겠다.

7/5(화) MP - 햄, 엄마 접견

나를 돌보는 것,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벨기에 브뤼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호스텔에 현지랑 남아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독이던 시간들이었다. 하루하루 리듬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 같다. XP 활용에 대한 교육, 진도를 나가고 있다. 어떻게 공부를 할지 조금씩 감이 잡힐 듯 말듯, 아직은 여전히 간을 보는 중이다. 사생활이 없는 곳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실감이 난다. 날 자꾸 만지는 이에게 어떻게 관계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잘 표현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난 아직 구속된지 100일도 안 된 '싱싱한' 존재이다. 10년을 예사로 산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7/6(수) MP

1년의 절반이 지났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제 절반 더 보내면 내년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도 그 순간만 지나고 스트레칭하면 많이 개운해지는 것 같다. 몸이 편해져서인지 갑자기 남은 시간이 길단 생각이 들었다. 참 간사하다. 편지가 더 많이 오면 좋겠다. 그럼 그때 충족되는 욕구는?

7/6

기다리던 햄의 전자서신이 오긴 왔다. 그런데 내가 보낸 등기는 못 받았다고 한다. 헐, 했다. 등기영수증도 받아 확인을 해봤다. 자세히 보니 익일특급으로 처리가 안 된 것이다. 짜증, 당황스러움, 무기력함. 억울하기도 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치워주세요"라는 지시에 누군가 "징역에 불필요한 게 어딨어. 다 필요하니까 이ㅣㅆ는 것데 불필요한게 아니라 못 쓰게 하는거지". 무릎을 딱 쳤다. 이곳의 규율에 어느새 적응해서 뭐 걸릴 건 없다 내 스스로 검열을 하던 프로세스에 시선한 충격을 준 말이었다.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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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7월 2일

6/13 나동 접견

 

6/28(화)

쌀 300가마를 드디어 끝냈다. 40kg쯤이야 이제 거뜬히 나를 수 있는 요령이 생긴 것 같다. 4시에 입방을 했기에 혼자 짐 정리를 좀 했다. 책 권수가 생각보다 많아서 얼른 택배로 내보내야겠다. 왜 갑자기 런던 떠나던 날 준비하며 택배를 부치러 가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일까.

딱 1년 전, 햄과 나는 홍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만나 걷고 저녁을 먹고 술 한잔 하고 홍대 앞 놀이터에서 데이트를 했었지. 휴우-

 

6/29(수)

드디어 내일 이 취장을 떠난다. 영치로는 같이 있던 형제 분이 역시나 내일 옮긴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니 좀 만 더 기다리고 참아볼 걸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지난 주 내 정신 상태를 떠올려보면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마음이었기에, 예측가능성을 원했기에 내 최선의 선택이었다 위로를 하고 있다. 갑을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자격증도 따고 자기표현 더 알아보고 판단할 걸 하는 후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난 너무 막막했었다. 현민과 마지막 만남이었던 어제까지도 제대로 된 인사 못 나누고 고작 어디로 옮길지 하는 얘기나 나눈게 미안하고 민망하고 아쉽다. 편지나 한통 보내야지-.

내일, 어떤 사람들을 새로 만나게 될지 궁금, 설렘. 위계질서가 좀 낫긴 할까. 아니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든다.

6월 27일 엄마 동생 접견.

6월 김정연 홍수봉 접견

 

6/30(목)

6월의 끝, 여자친구, 뭐 이런 농담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지금 기분은 매우 편안하고 여유롭다. MT촌 단체 방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술이 없고 서로 아직 잘 모르기에 각자 일을 하거나 옆사람과만 조용히 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배낭여행 다닐 때 묵었던 유스호스텔 생각이 나기도 한다. 기분이 참 묘하다.

늘 편지 쓴다고 빠듯하던 시간에서 벗어나 이젠 오히려 시간이 남는 게 오히려 낯설고 뭔가 불안하기도 하다. 졸지에 '소지'란 역할을 맡았다. 징역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민이 나갔다. 나가고 나니 이제야 12시 운동 시간에 관용부 출역수들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참.

 

7/1(금)

와. 7월이다. 이게 얼마만에 써보는 MP인가. 감격스럽다. 아침마다 잘 굽혀지지 않는 오른 손가락도 한 일주일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아침에 일어나 씻고, 다른 사람들이 씻는 동안 난 자기명상 공감을 하고 이렇게 노트를 하고 심지어 책도 잠깐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소지로서 생활이 시작된다. 커피 타는 일. '을'이 안 되면 '교육생'으로 있을 땐 커피 타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뭐 '존중' '공평함' 이런 욕구들이 아쉽지만, '유대' '친밀함' 인정, 평탄함을 위해서 선택하고자 한다. 드디어 영배씨와 수다를 떨 수 있겠구나. 와. 비가 안 와야 할텐데.

(-이번 주말에 편지 보낼 곳:)

낮에 영배씨와 감격적인 해후를 맞았다. 40분 남짓. 운동장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더라. 낮에 고무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을 수 있다니 이거 뭐 하루아침에 지옥에서 천당으로 온 기분이다. 햄 생일 선물을 뭘 해줄 수 있을까. 그림을 못 그리는 게 한이다.

겹겹이 놓여있는 장벽들- 유리창, 철창, 철조망, 담벼락, 촘촘한 구멍으로 시야를 가로막으려 애쓰는 철제 슬레이트 틈 사이로 정차하는 버스 소리가 들려온다. 녹색칠이 된 구로05번 마을버스. 금요일 밤 9시 30분. 이 시간에 마을버스를 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려나. 일주일의 노동을 마무리 하며, 다가오는 주말을 떠올리며. 열심히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각자의 형 종료일을 향해 다시 또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7/2(토) MP

아침에 깨어 차분히 명상을 할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하다. 여러 통찰들이 생긴다. 내 어깨가 취장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경직되어 있구나. 햄 생일. 기념일을 앞두고 신경이 쓰여서 뒷골이 무거웠구나. 어떡하면 햄에게 내 사랑을 표현할까 고민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보였다. 그동안 했던 일 리스트, 앞으로 할, 하고싶은 리스트를 만들어서 보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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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6월 27일

"새집을 구할 때까지 선릉역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거처를 마련했다. 주변을 산책하기에도 그만인 곳이다. 한 변호사와 출소 기념으로 일식식사를 하고 호텔에 짐을 풀었다. 가슴이 뛰었다. 하얀 시트 위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시트가 흥건하게 젖을만큰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도 아니었고 기뻐서도 아니었다. 그냥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샤워를 하고는 그리웠던 편의점으로 가서 신선한 우유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거리는 현란한 불빛과 건물들과 빠르게 움직이는 차들로 현기증이 났다. 나는 작은 방에 갇혀 1년 6개월을 보낸 후유증을 그렇게 겪고 있었다." - 신정아 <4001) 401쪽.

그냥 괜히 공감이 되었다. 내가 출소하는 날, 집에 돌아가면 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눈물을 흘릴까?

"일년을 죽어라 먹던 '꿀꽈배기'와 '야채크래커' '빠다코코넛'이 사라지고 '맛동산'과 '홈런볼'이 들어오자 나는 기쁨에 겨워 정신없이 먹어댔다. 심지어 나갈 때가 되어 가는데 그제서야 '홈런볼'이 들어오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홈런볼' 때문에 안 나갈 수도 없는데 그토록 아쉬움이 들었으니, 나는 스스로도 엽기적으로 느껴졌다."

*13일 소인이 찍힌, 18일에 받아본 염 편지에 적힌 글귀. 수하가 염에게 보내주었던 메모라고.

"팔이 하나 남아 있고 눈이 하나 남아있다. 그러니까 아직 괜찮다."

"마음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빠짝 말라가는 삭막함 속에서도 마음 한켬에서는 풍성함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오아시스를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괜찮다 부터 쭈욱 빨간 줄을 그어놓았더라)

 

6/20(월)

덥다.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이틀 쉬고 다시 일 시작한 날. 위드 자격증 교육생 신청을 했다. 조출을 해서 새벽달을 본 감동이 남아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잡힌 조출. 일주일 뒤 달은 좀 더 하늘 높이 떠있겠지? 그믐달 정도는 아닐테고 .16시간을 깨어있다. 피곤하긴 하다. 이번주엔 휴일이 없네. 이번 주말이 취장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면 좋겠단 심리적 마지노선이 만들어지고 있다.

6/21(화)

또 긴 하루가 이렇게 끝이 났다. 어제 아침 쌀 푸다가 찧은 왼쪽 무릎의 멍이 시퍼렇게 보인다. 내게 선택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내일 본다는 정보화교육생 선발 시험에 합격해도 괜시리 영치과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린다. 약속-영치에서 일하고 싶다는-을 지키는 것, 배려, 평탄함도 중요한데 정보화 교육생 신청을 한 것은 눈 앞에 더 확실하게 보이는 평탄함 예측가능성 때문이리라. 아, 이런 고민들이 피곤하다. 확실한 정보,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6/22(수)

"정보화교육생" 선발시험을 보고 왓다. 금요일에 발표가 된단다. 분류과에 가서 물어보고 싶긴 한데 귀찮기도 하고. 결과 나온 다음에 가서 물어볼까나. <경제성장이~> 다읽었다. 독서의 속도를 높여야겠다.

6/23(목) (햄 접견)

어느 새 6월도 이제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햄 말대로 오늘도 이렇게 일기를 쓴다. 고마워도 모자랄 판인데 오늘은 햄의 말에 서운함을 느꼈다. 내 처지를 좀 더 이해받는 것, 물론 햄만큼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겠지. 그렇다면 그 걱정해주는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내가 "그럼 정보화 교육생 신청 취소할까요?"라고 물었을까.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햄도 내게 서운하거나 섭섭한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방금 햄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 같은 방 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씨이 행동에 뜻하지 않은 큰 자극을 받았다. "파스 갖고 계신 분?"이라는 다른 이의 질문에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그의 모습을 곁눈으로 본 것이다. 난 편지를 쓰다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얄밉고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욕구가 안 찾아져서 자칼쇼, 자칼 인아웃을 해보니 그나마 욕구 찾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찾았다고 보니 사실 그리 큰 건 아니었다.

그는 영치금을 안 쓰고 나는 쓰는 상황에 대해 인정(표현) 받는 것? 공평함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그를 좀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는 다만 파스가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혹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손가락질을 한 것일까? 평소에 쌓인 이미지들, 쉽게 자각하지 못하지만, 특정 행동에 자극을 크게 받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이미지, 평가가 무의식 중에 있는 것이다.

6/24(금)

여기서 배우는 것, 일희일비하지 않는 초연함? 정보화교육생 담당 주임이 왔다갔다. 분류과에 월요일에 가기로 했다. 뭐 결과가 어찌되든 이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초연해지려는 평정심을 유지해야겠다. 취장에 남으면 남는대로 떠나면 떠나는대로.

편지를 먼저 쓰고 일기를 쓰니 필력, 기운이 달린다. 주말 이불 빨래 할 수 있는 날씨였음 좋겠다. 장마의 한가운데에서.

6/25(토)

출근. 아침 6시 20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며, 기억해야 하는 날이라는 상투적 말을 하는 담당주임. 그치, 기억해야겠지.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한겨레21, 씨네21 정기구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답답해서인가? 분류과와의 면담. 어떻게 될지. 이거 스트레스다. 머리 숱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이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6/26(일)

비가 좀 개어가는 듯 보이는 하늘의 모습이다. 비 갠 뒤, 비 갠 오후의 하늘의 구름들이 참 예쁘다. 비갠 뒤 불어오는 습하지 않은 바람도 선선하니 좋다.

<나는 가수다>에서 한영애 "조율"을 JK김동욱이 부른다. 원곡이 아쉽지만 아쉬운대로 반갑다. <오늘의 교육>에 괜찮은 글, 레퍼선스가 많아서 자극이 된다. 즐, 온정에게 감사 인사를 다시 표현해야겠다.

6/27(월) (엄마, 문창 접견)

휴. 긴 하루였다. 조출을 해서인지 지금, 노곤하다. 우여곡절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뭔가 내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것만 같은데 어쨌든 정보화 교육생에 선발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정도로 아직은 정리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민망함. 수많을 것 같은 느낌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이젠 다 극복했다고, 들춰보기 멋쩍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타이핑을 해나가는데, 취장 벗어났다고 좋아하기엔 또다른 인간관계와 부딪혀야 하는 긴장과 대기상태의 팽팽함이 5년이 지난 나의 몸에 다시 되찾아오는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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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독일 출장(?) 후기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4월 한 달간 독일의 평화운동단체인 ‘커넥션’의 초대를 받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다녀왔어요. ‘전쟁없는세상’이 함께 기획한 총 석 달의 강연투어 중 첫 한 달 일정에 제가 결합했고, 6월 말까지 예정된 일정에 다른 활동가들 그리고 현재 프랑스에 망명해 살고 있는 병역거부자 이예다 씨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권교육’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업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다른 상임활동가들이 흔쾌히 다녀오라고 얘기를 해줘서 한편엔 고마운 마음 한가득(다른 한편엔 뭔가 결과물을 들고 오리란 부담?ㅎㅎㅎ)을 안고서 다녀왔지요. 근데 또 그런 부담감 갖지 말고 다녀오라고 얘기해주기도 해서 세상에 들 같은 조직이 어디 또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을 했다지요.^^;; 암튼 들 회원들과 독일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8월 중에 정식으로 가질 예정이니, 여기선 대략의 느낌 정도 나누는 것으로 적어볼게요.

커넥션에서 애를 많이 써준 덕분에 독일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들어왔고, 하루에 한군데씩 돌며 강연을 다녔어요. 예를 들면 월요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그 주 첫 강연지로 출발,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곳 담당자를 만나 인사 나누고, 그날 밤 묵을 숙소에 짐을 풀고, 컨디션 괜찮으면 1-2시간 강연장 근처를 걷다가 저녁 먹고 강연을 하는.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그 다음 강연이 있는 도시로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식의 일정을 소화했는데, 어느 순간엔 매일 잠자리도 바뀌고,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비슷한 패턴의 대화를 하는 일들에 진이 빠져서 내일 하루만 더 하면 주말이다 이런 마음으로 버티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들이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자기 신념으로 군대를 거부해서 감옥에 갇힌 이들이 700명이 있다는 걸 알고선 자신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물어와 줄 때 그리고 그곳 활동가들이 자기 지역에서 해온 운동 이야기를 해줄 때 힘을 얻기도 했다지요.

강연을 다니던 때 마침 철도파업이 있었어요. 듣기로 독일 철도회사인 ‘디반(DB)'에 있는 두 개의 노조 중 작은 쪽 노조가 자신들도 제1노조와 같은 권리를 주장하며 72시간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라 했어요. 미리 예고된 파업이었고 열차가 아예 안 다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일정에 따라 기차를 타야했던 상황에서는 예측불가능함에 스트레스가 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독일어를 못 알아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철도역에서처럼 “금번 노조의 불법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고객님들께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처럼 노조 탓 하는 재수없는 방송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독일 사람들은 다른 이동수단을 미리 찾거나 지연된 시간표에 따라 자기 일정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러한 철도 파업 관련 얘기를 해준 분은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 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님이었는데요. 마침 자기도 그 주말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교회 세미나가 있어서 기차 타고 가려고 했는데 파업이 어떻게 끝날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얘기해준 게 하나 더 있어요. 공교롭게도 이번 교회 세미나의 주제 중 하나가 교회에 고용된 이들의 파업권을 인정할지 여부였대요. 그런데 어쨌든 교회 사람들 중에는 그 세미나가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위해 봉사하는 일’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연결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 철도 파업과 같은 특정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아예 언급을 피하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네요. 암튼 한국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들어가는 교단 중에는 보수적인 곳이 더 많은 것 같던데, 독일에서 한국의 인권상황에 관심을 가진 종교그룹은 동아시아선교회(DOAM)나 이엠에스(EMS, 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처럼 에큐메니컬 배경으로 일하는 이들이 많더라고요.

 



이 사진은 슈투트가르트로 가던 중 파업의 영향으로 예정과 다르게 기차가 멈춰섰던 역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찍었던 사진이에요. 이 역의 이름이 비블리스인데요, 나중에 듣고 보니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폐쇄된 핵발전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대요. 독일에선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운동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후쿠시마 사고 터지고 나서는 무려 25만명 정도가 원전 폐지 데모에 참여했다네요. 일본에서 사고가 난게 3월 11일인데 3월 30일에 독일 총리가 2022년까지 원전을 다 폐기하겠다고 발표했으니 오랜 운동의 역사에 비하면 순식간에 결정이 나온 것이기도 하죠.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 비즈니스 어쩌니 하며 나서던 한국 정부에 비하면 독일 정부가 그래도 더 나은건가 싶기도 한데, 한편으론 한국에서 한창 황사와 미세먼지 신경쓰다가 독일에 도착해서는 너무나 상쾌한 공기를 경험하면서 했던 생각들, 가령 제1세계에 있던 공장들을 다 제3세계로 내보내고 자기들만 ‘친환경’을 누리는 것처럼 원전폐지도 그렇게 사고한 결과인건가 얄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부활절 평화 집회 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적은 세월호 피켓을 들고. (독일)
우크라이나 분쟁 규탄 시위에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설명하느라 애쓰던. (핀란드)



세월호 1주기가 겹치는 때이기도 해서 들고갔던 <금요일엔 돌아오렴> 책을 그 쪽 단체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집회 때 “진실을 인양하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있기도 했는데요. 처음엔 저의 짧은 영어 때문에 사
람들이 이 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섬으로 가는 페리가 중간에 침몰했는데, 수학여행가던 고등학생을 비롯한 300여명이 죽었고, 구조된 이는 한명도 없었다. 지금도 물 속에 10명이 있고, 유가족들은 이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고 하는데 국가는 시위대를 진압만 하고 있다.” 나중에 돌아서 생각해보니 사고가 났을 때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상식이 있는데, 제가 설명한 내용으론 한국 정부가 하는 짓이 그 ‘상식’밖의 이야기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차라리 활동가들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말의 허상을 알기에 서울에서 세월호 문제로 5만명씩 모여 집회를 했다고 해도 바로 알아들었고요. 최근에 세월호 인권선언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요, 독일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더 느꼈던 건 결국 무엇이 존엄한 삶인지 그 기준에 대한 공통의 감각이랄까 이런 것들이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곳 사람들과 우연히 실업급여 얘기가 나왔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요. 한국에선 실업급여나 일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에 대해 ‘복지병’이니 ‘공짜점심’이니 하며 여전히 논쟁이 되는데, 독일에서 그런 논쟁은 이미 사회적으로 종결이 된 논쟁이고 아무리 보수정권이 들어서도 ‘복지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든다’는 식으론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들은 오히려 지금의 복지혜택으론 그럴 듯한(decent) 일상을 꾸리지 못하기에 복지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부럽기도 했어요. 한국에서도 열심히 싸워나가야겠죠. 

아래 사진은 커넥션 사무실이자 이번 사업을 코디한 상근자 ‘루디’가 사는 집이기도 한 건물의 정원 모습입니다. 90년대 초에 만들어진 단체이고, 활동은 80년대부터 같이 해오면서 지금은 다들 50대 초중반에 접어든 이들인데요, 그들의 관계 사이에서도 많은 굴곡들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20년 넘게 한 활동을 같이 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떠올려보기도 했어요. 거기도 단체들 재정이 상근자를 여러 명 둘 정도가 안 되기도 해서 1명을 제외하곤 다들 각자의 생업을 가진 상태로 활동을 하는 점이나 남아있는 여성 활동가의 숫자가 극소수라는 점, 최근 10년간 조직에 새로 들어온 활동가가 없다는 점들은 또 다른 생각 거리들을 던져주지만, 적어도 동네 이웃으로 지내며 같은 지향을 가지고 고민을 나누며 행동으로 이어나가는 모습은 좋아보였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누렸던, 정원을 바라보며 앉아 커피 한잔 하며 잠시 숨 돌릴 수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독일 다녀온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 마치도록 할게요. 더 궁금한 게 있는 분은 8월에 있을 회원모임에 놀러들 오세요. 조만간 일시와 장소를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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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집회

(들 상임들에게)

 
지금 이곳은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근교(서울로 치면 하남 쯤?)의 오펜바흐Offenbach란 곳입니다. 일전에 언급한 코넥숀Connection e.V.이란 단체의 사무실이자 이 단체 상근자인 루디가 파트너와 함께 사는 곳이기도 해요. (잠깐 다른 얘기. e.V.가 무슨 뜻인가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알게 됨. 한국말로 하자면 등록단체란 뜻이라고. 뭔가 피스나 반군사주의나 그런 단어일 줄 알았더니. 듣고 살짝 김빠짐)
금요일 밤 늦게 도착하여 주말을 보냈고, 오늘 낮에는 자전거를 빌려타고 루디, 루디 파트너인 카린, 여옥 그리고 저까지 넷이서 프랑크푸르트에 나가 피스마치(부활절 평화 집회?)에 다녀왔어요. 세월호 피켓이랑 병역거부 피켓을 만들어 나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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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녀온 집회 모습. 맞은 편에 보이는 시계 달린 건물이 프랑크푸르트 시장 집무실이어서 이 곳에서 집회를 연다고 하네요. 이 부활절 집회는 1960년대부터 시작했는데 핵무기 반대부터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의 이슈를 다뤄왔고 오늘 집회에는 (독일어라 확신할 순 없지만ㅋ) 독일 군과 나토의 해외 분쟁 개입 반대가 주로 보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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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루디. 오른쪽이 파트너인 카린. 오늘이 둘이 만난지 25년째 되는 기념일이기도 하대요. 반군사주의 워크샵에서 만나 눈이 맞았다는. 결혼을 하지 않고 파트너로 살아도 유산 상속 등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68혁명 이후 70년대에 독일에 결혼이 아닌 파트너십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끔 법제가 정비되었다는. 
카린은 터키에서 이주한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후 학교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더 자세한 얘기는 아마 곧 다시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쪽 동네가 특히나 터키 쪽 이주민이 많다고 하네요. 유럽 역사를 감안할 때 순수 게르만 비율을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 모르나 지금 프랑크푸르트나 오펜바흐나 루디 말로는 이주민 비율이 50프로가 넘는다고)
암튼 내일 노이디텐도르프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선교회 세미나를 시작으로 (보따리 장수는 아니지만) 몇 군데 강연 돌아다니다가 2주 뒤에 다시 오펜바흐로 돌아오면 하루 비는 날이 있는데 그 때 아마 이 학교와 청소년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그때 가서 일정이 또 어찌될지 보긴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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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힌 걸 보니 저의 시선과 얼굴 각도는 마치 무슨 선거 자보용 사진처럼 나오긴 했지만...암튼 농성 중인 유가족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응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사진들 보냅니당.
참고로 저 뒤에 보이는 건물 양식이 관광객들한테 인기 있는 곳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30분 정도 사진 찍은 뒤에 다시 기차 타고 하이델베르크나 스위스로 바로 넘어가는 게 보통의 관광 코스라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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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무대를 뒤로 하고 한 컷. 집회 마무리할 때 쯤이어서 오늘 함께한 단체 이름 사회자가 하나씩 소개하면 박수치고 노래 한곡 부르고 그런 분위기더라고요. 마지막엔 소말리아에서 이주한 난민 한 분이 (아마도) 독일 정부의 난민 지위 인정에 관한 규탄 발언을 영어로 하면 옆에 분이 미리 준비한 독일어 번역으로 발표를 하는 장면도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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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많이 타는 동네라 그런지 자전거에 앰프를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든 것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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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넥숀 사무실이자 지금 머물고 있는 집 정원 사진이에요. 날씨가 한국보다 좀 더 쌀쌀한데 꽃들은 웬만큼 다 피어있더라고요. 비가 오락가락 했는데 어제 하루 햇살이 쨍 나와서 정원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지요. 부자 단체도 아니고 상근자 1명과 10여명이 참여하는 운영회의 같은 구조로 굴러가는 곳이라고 하는데, 루디를 포함한 5명이 3년 전에 이 집을 돈 모아 샀다고 해요. 그 전까지는 렌트로 이리 저리 옮겨다녔다고. (코넥숀 단체 소개와 역사는 여기에서. 독일어라 번역기 돌려야함;; 루디가 코넥숀에서 20년 일했다는데, 단체 창립년이 93년이라고 나오는 듯.)
쉬는 날 정원에 나와 반쯤 누워 책 읽다가 졸리면 그대로 자는데 참으로 부러워보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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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바라본 정원 모습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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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많은 종류의 치즈들이 보이시나요.ㅋㅋ 부모님들이 왜 서양사람들은 삼시세끼 빵에 치즈 먹는다고 그래서 노린내(?) 난다고 하기도 하잖아요. 근데 와서 보니 진짜 삼시세끼 빵과 치즈가 등장하더라고요. 한 이틀 화장실 못 가다가 오늘 좀 밀어냈는데 스멜이 아주 그냥...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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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내려먹는 커피 모습이에요. 이런걸 뭐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암튼 저도 이젠 어느새 커피가 습관이 되어서 요런 도구들을 보면 유심히 보게 되는 듯 해요. 쇼핑을 할 시간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요거 가격이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싼 것 같으면 사무실에도 하나 사갈까봐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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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코넥숀 사무실 건물 사진이고요. 왼쪽 갈색 문이 입구, 들어가면 정원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나옵니당. 갈색 문 오른 쪽에 보이는 창문 두 개가 지금 제가 머물고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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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이가 찍은 사진. 대충 이런 분위기의 동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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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인강 자전거도로 표지판. 왼쪽으로 가면 프랑크푸르트. 더 가면 라인강. 예전에 자전거 여행했던 그 코스를 만날 수 있고, 오른쪽 방향은 남쪽으로 강 발원지를 향하고 어디에선가(지명 까먹음) 산을 넘으면 다시 프라하와 비엔나까지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강이 이어진다고 하는데..더 늙기 전에(?) 꼭 한번 와보리라 다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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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컷..
 
 
 
 
내일 방문하는 노이디텐도르프Neudietendorf (발음완전어려움)에서 동아시아선교회주관 한국상황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는데..거기 가서 또 인터레스팅한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을 듯 합니다. 
 
앞으로 남은 독일 일정 동안 풀고 싶은 질문
1) 독일 징병제 폐지과정에서의 여론이나 완전거부에 대한 독일사회의 반응, 동독 징병제는 어떠했고 통일 이후에는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류의 질문 
2) 사회권을 다룰 때 언급되는 인간 존엄에 대한 공통감각의 문제. 오늘 잠깐 대화 나눈 코넥숀 회원 토마스와 카린 말로는 복지가 가난한 이들 더 게으르게 만든다는 식의 논쟁이 독일에서는 이미 종결된 이슈라고 하는데, 심지어 지금 메르켈 총리처럼 보수 정당이 잡더라도 복지를 줄여야 한다고 나오진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연대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철학이나 합의일 수도 있고, (동독) 사회주의 영향일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셨음. 어쨌든 서독의 흡수통일에 가까웠기에 의료시스템 등등 통일 이후에 서독의 방식으로 재편됐다고 하긴 하는데 그런 것도 궁금하고.
복지 혜택을 받는 이들에 대한 관용수준이 이주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화제가 넘어가서 못 물어봤는데 다음 기회에 다시 물어보는 것으로. (예컨대 이들의 친구인 킴에 대해 말해주는데 그녀가 원래는 극장 건물 외관 담당 기술자였다가 아티스트로 직업을 바꾸어 뉴욕에 가서 공부를 하고 개인 전시회까지 열었고 지금 잠시 반년 정도 독일에 돌아와 잠깐 쉬고 예전에 하던 theater technician으로 단기 일자리를 구했단다. 그 얘기를 하다가 실업수당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물었고, 1년에서 1년 반 실업수당을 받고 난 뒤에는 다른 급여들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아파트(플랫)가 제공되고 다른 수당들도 (실업수당보단 적지만) 나오기에 럭셔리하게 살진 못해도 어쨌든 살아갈 순 있다고 한다. 우리는 복지병을 걱정하는데 이들은 그런 수당으로 사는 삶의 수준이 높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한다. 복지 혹은 사회경제적 존엄에 대한 독일 사회의 공통감각이 어떤 배경을 통해 형성된 것인지, 다른 인접 유럽 국가들과는 또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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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6월 18일(토) - 아침, 조짱 접견

오른 발목 통증이 나아질만하면 또 아파와서 의무과에 휴역증을 끊어왔다. 휴식을 얻어 오랜만에 주말 이틀 온전히 쉴 수 있다는 안도감도 들지만, 작업장 다른 재소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몸이 아픈 것 자체보다는 나의 아픔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지 않고 걱정이나 돌봄보다는 오히려 의심과 불신을 받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왜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못 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일까. 아파도 참고 일해야 한다, 너가 일을 쉬면 내 할 일이 많아진다는 생각. 그렇다면 시스템의 문제인데, 보통은 시스템이 아닌 해당 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군 가산점에 흥분하는 예비역들. 귀족노조라고 몰아붙이면서 파업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것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 

이곳에서 통용되는 언설들이 있다. 징역에서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거나 그렇기에 징역살이는 결국 혼자 견뎌야 한다는 그리고 이곳에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착함이 오히려 이용당하는 곳이라는 말들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나 적자생존의 정글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말들이다.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말은 일면 자신이 처한 역경을 현명하게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유용한 생활방식일 수도 있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보편성을 갖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방법은 각자 살아온 환경,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이 택하게 되는 방식은 남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따져보는 것이다. 나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쉬 말하긴 어렵다. 이 때 개인을 비난하기보다는 개인을 그렇게 환대와 상생이 불가능한 곳으로 내모는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붕괴시켜 농민들을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키고 근대적 빈곤을 만들어내면서 두려움(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할거야라는 식의)과 경쟁이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탄생시킨 것처럼 한국의 교정 현실 즉 이 징역도 결국은 자기 몸을 건사하기 위해선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정신을 심어주고 이로써 사회 복귀한 자들이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징병제를 유지함으로써 순응적 노동자를 양산한다는 박노자 선생의 지적처럼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정'은 개별 교도관들의 인성이나 성품과 무관하게 인간에 대한 불신, 시스템에 대한 무기력(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어차피 혼자 나서봐야 자기만 손해야)을 학습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명제를 이 곳에서 증명하려는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인간에 대한 불신을 내면화한 이들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이 역시 나의 '평가'일 뿐 한 사람 한 사람 대화를 나누면 분명 그들이 가진 인간성(예컨대 '좋은 아빠') 또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생각들로부터 일단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아프지 말아야겠다. 힘이 약하고 아픈 것도 '죄'처럼 느끼게 만드는 이 곳의 현실이 원망스럽고 분하기도 하지만, 몸이 제 상태가 아니면 생각의 흐름도 건강하지 못하고 나 역시 타인에 대한 증오를 은연 중에 키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단 경각심이 든다.

우리의 선한 인간성을 믿으며

(일기를 보니 색깔 펜으로 쓰고 지우며 많이 고쳐놨던데, 이렇게 정리해서 밖에 써보냈나보다. 문단 별로 번호를 매긴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직 손으로 직접 쓰는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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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16일

6월 11일(토) - 지환, 미란, 영선 접견

반가운 얼굴들이 접견을 와주었다. 그런데 접견실을 나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접견실에 흐르던 묘하게 무거운 기운을 바꿔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즐거운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내 걱정을 안 해줄거란 두려움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관심, 돌봄에 대한 내 욕구를 확인한다. 한편으론 먼 길 와준 분들이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배려를 하고 싶은 욕구 또한 있다는 것을 보았다. 역에 내가 갇혀 있는 게 국가의 탓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택해 온 길이니,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분들을 떠올리면 미안해지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렇기에 그들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내가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겠다. 연기하면 힘들테니 실제로도 잘 지내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도록 잘 살아야겠다. 출소했을 때 온 기운이 빠져 쓰러지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내 마음 돌봄을 잘 해야겠다.

지금 TV에 영화 <글러브>를 보여주고 있다. 올 1월 인천 전교조 연수에 연미 쌤과 함께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것보다 채식에 대한 배려를 받았던 기억이 크게 떠오르는 걸 보면 역서 채식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있긴 있나보다. 연미 쌤한테도 편지 한통 보내야 할텐데. 다음 주에 아침과 함께 면회를 오면 좋으련만.

"집합"이란 말은 사회에 나가면 들을 일이 없으면 좋겠다. 불신의 존재가 되는 것. 언제든 혼날 준비가 되는 것. 그 위축된 기분이 불쾌하고 싫다.

6월 12일(일)

사람들에 치이다보니 가끔은 내 편은 커녕 주변 모두가 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 마음은 꽁꽁 닫혀 있어서, 얼굴은 웃으려 하지만 초췌하다는 말을 듣기 일쑤이고 작은 자극에도 날카로워지거나 혹은 모든 감정을 삭제한 채 멍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씩 예기치 못한 호의를 한번씩 받고 나면 이내 곧 마음이 눈 녹듯 풀려서 여름 하늘 구름 한번 올려다보며 심호흡 한번 고르기도 한다. 경직된 내 몸 곳곳의 근육들에 호흡을 불어 넣어주면서 몸을 편하게 이완시켜 주는 것이다. 날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그 상대의 말과 행동 이면에서 비극적으로 표출된 아름다운 욕구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가져본다. 뒷골이 땡기고 목 두, 어깨가 경직될 때마다 이제 습관처럼 존중 받는 것, 자기 보호, 따뜻함, 자기 표현 이런 욕구들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쌍욕을 아침 7시부터 들었던 긴 하루도 드디어 저물어간다. 조출을 나가 간마네 형광등 불빛 방해 없이 동틀녁 사위를 볼 수 있었다. 괜히 더 황홀해지는 기분이었다. 생매장한 살인마. 이러니까 그가 괜히 더 악마처럼 보인다. 존중 (받는 것). 자기표현. 나는 과연 그와 인간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연결하고 싶은 걸까? 그냥 피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다.

6월 13일(월) - 나동 접견

나동이 다녀갔다. 마치 엊그제 만나고 다시 만난 것처럼 익숙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덤덤히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 좋았다. 내 말을 온전히 다 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간지러운 부분을 적시에 얘기해주는 나동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마침 오늘 보라 생일이라고 오후에 접견 마치고 이제 보라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맥주 한 잔. 캬. 내일은 특별접견이 있다고, 오늘 들어온 여옥 전자서신으로 들었다. 매일 접견만 있어도 징역 살만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아카펠라 공연에 갔다가 정말 우연히 현민을 만났다. 이 무슨 기묘한 상황인지. 일을 뺄 수 있단 생각에 그리고 갔다가 겪은 일로 글 쓸 거리가 생길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라이브 공연의 맛을 느껴보려고 갔었다. 국민체조를 시키는 부분에선 뜨악하기도 했지만, 마음껏 소리지르고 하니 스트레스는 풀리는 기분이었다. 현민은 어찌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가면 홍대 클럽 공연도 바로 가야겠다. 어제 오늘 달리기를 쉬었으니 내일부터 다시 뛰어봐야겠다. 태양볕이 뜨겁긴 하다.

6월 14일(화)

부은 손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런데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반질'크림 구매를 했다. 손발의 굳은 살, 주부습진을 위한 연고라고 한다. 오늘 승호씨, 케이티, 여옥이 특별접견을 와주었다. 무지 반가웠다. 내 징역에 몇 라운드까지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접견까지 마치고 나니 한 고비를 또 지난 기분이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험한 말들이긴 하지만 그냥 이 상태를 받아들인달까. 내일은 햄이랑 통화를 또 할 수 있으니, 그러고 나면 이번 한주도 훌쩍 흘러있겠구나.

6월 15일(수)

1시 살짝 전에 전화 불려가서, 햄이 씻고 있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쉽지만 아침과 통화를 한 것으로 만족. 엄마 편지(장접 일정 관련) 받고 살짝 또 울컥하려고 하는데, 워워. 느낌에 어제 앰네스티 접견 덕에 담당 주임이 나를 '잡범'과 구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은 게 학창시절 교사들의 관심을 받으며 누리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떠올랐다. '존중'을 가장 큰 욕구라 생각했는데, 오늘 주임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돌봄, 관심, 보살핌도 큰 욕구였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리던 수감자 우편물이 들어온 날. 카페에 올릴 글 하나 보내야겠다.

6월 16일(목)

어제부터 신호가 오던 오른 발목이 오늘 더 아파와서 얘기를 하고 1시 입방을 했다. 꾀병 소리를 듣는게 힘들긴 하지만 -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이해. 돌봄의 욕구- 그래도 쉬고 싶었다. 내가 빠져서 일을 더 할 분들에 대한 배려도 중요한데 여기는 "배려를 배려로 받지 않고 이용해 먹는" 불신의 공간이기에 나도 그냥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 몸을 챙긴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전에 양파, 오이, 당근, 양배추, 배추, 감자, 대파, 애호박 등등 식재료들 오후엔 냉동 닭, 돈육, 돈불(고기) 등의 고기가 들어오기에 일을 하고 있다가도 "물건" 외침과 함께 달려나가 물건들을 수시로 나른다. 물건을 나르는 사람, 물건 나르는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된 이곳에서 처음엔 괜한 욕 안 들으려고 그리고 내가 더 들면 남이 덜 고생하리란 생각에 남들만큼의 양을 들고 날랐지만 오늘은 기운이 없어서 남들이 2개, 3개씩 들 때 1개를 들었더니 바로 "야 넌 왜 한 개만 들어, 장난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가 힘자랑 하는 곳도 아니고 딱 한번 그렇게 들었는데 바로 '쿠사리'를 먹는 이곳에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건 나의 과도한 예민 반응인 것일까. 다같이 똑같이 들어야 평등하단 그의 마음. 결국 '이해'의 문제란 생각.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데 이해받지 못했을 때 그는 '버럭'했지만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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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10일

6월 1일(수)

드디어 6월이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5월 마지막 날. 6월 첫 날. 일도 평소보다 많았다. 한 사람의 실수 아닌 실수를 재수없게 소장이 발견했고 보안과에서 취장 주임에게 연락을 한다. 주임은 반장을 부르고 반장은 다시 조장들, 조장은 다시 작업원들을 소집한다. 이 연쇄고리. '처벌'은 '장급'들이 받는다. 이 무슨 파시즘도 아니고. 내가 아는 '책임'의 의미와 이 곳에서 '책임을 진다'의 의미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어쨌든 난 덕분에 5일간 설거지를 쉴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이렇게 고비 넘겼으니 남은 6월은 후딱 가면 좋겠다. 6월 말 난 여전히 취장에 있으려나-

6월 2일(목)

어느 새 목요일이라니. 냄새에 민감한 내게 어느 덧 취장 곳곳의 조금씩 다른 냄새, 방 안의 냄새가 익숙해진 것 같다. 여전히 불쑥불쑥 낯섬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며칠 만에, 근 1주 아니 10일 만에 뛰었더니 기분이 좋았다. 뛰기 힘들어도 걷기는 계속 해야겠다 최소한. 오이미역냉국의 시원함. 고기가 간간이 들어있는 하이라이스와 밥. 찐감자. 이불 빨고 싶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여기 생활에 정착해야겠단 마음을 갖고 있나보다. 조출. 설거지 없는 이번 주 말까지의 시간을 즐겨야지.

6월 3일(금)

<그날이 오면>에서 보내준 책을 받았다. 고마울 따름이다. 주말에 답장이라도 한통 보내야겠다. 즐에게 온 편지를 통해 서울대 본부 농성 분위기를 들었다. 역시나 KBS 뉴스나 신문으로 접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라 반갑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다. 2005년 농성 때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취장에 와서 네번째 맞는 주말이다.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접해보지 못했을 사람들"이란 표현을 머리로 들었을 때와 여기 막상 지내면서 증인 분에게 듣고 나니 기분이 또 새롭다.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차이 역시 섣불리 동질화하려고 하지 않는 것. 둘 사이에 발란스를 맞추는 것.

6월 4일(토)

벽에 걸어둔 가방에서 편지지를 꺼내다가 사라졌거나 혹은 내가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햄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25일자 전자서신. 햄이 접견와준 날 써준 서신이다. 이번 주는 햄의 손을 잡아보긴 했지만 편지가 없어서 내심 불안해하던 차였다. 합동접견 때 엄마 옆에 앉지 말고 햄 옆에 앉아서 손도 잡고 껴안기도 할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온다. 에효. 내일도 이빠이 편지를 써보아야겠다.

6월 5일(일) 

아직 아침 9시가 안 된 시간. 어젯 밤에는 내가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는 시간을 두고 방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졸려서 생각 정리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형은 너무 내성적이야. 아직 세상 사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애." 이 말이 자극이 되는 것 같다. 나도 내 딴에선 신경 많이 쓰고 배려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욕구가 가장 큰 욕구인 듯 하다. 그 아이도 배려받고 이해받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자극에서 시작된 생각들이 이제는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들,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까, 나의 선택은 어디로 이런 생각들로 이어졌다. 예컨대 비폭력대화가 전제하는 보편적인 욕구의 그 보편적 인간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경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에 전제된 서로의 차이들에 대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 있는 것인가 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분명 차이가 있는데 거기서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질문인걸까. 아직 명확히 정리는 안 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 읽었다. 고통 속에서조차 의미를 찾아 내는 것. 삶에 물을 것이 아니라 삶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을 찾을 것.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참고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해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특별히 사용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될 수 있는 인간의 이 기본적인 능력은 로고테라피 치료 테크닉에서 말하는 역설적 의도가 작용될 때마다 실현된다. 그와 동시에 환자는 자신의 신경증 증세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고든 W. 울포트 교수의 말과도 일치한다. (...) "신경증 환자가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이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며 아마 치료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6월 7일(화)

기대했던 챔의 편지가 없었다. 네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도 어딘가 허전하다. 과대망상에 빠졌다가 내일 온다고 지난 월요일에 얘기한 햄의 말도 믿지 않고 있다가 불쑥 햄이 오고 나면 민망해질테니 오늘은 이 정도에서 적절히 감정을 통제해야겠다. 이번 주 일요일 드뎌 첫 조출을 한다. 시뮬레이션을 했더니 불안함이 좀 주는 것 같다. 4시에 출근해본다는 경험에 대한 은근한 설레임도 있고. 징역보살. 징역이 보살이라는 그 표현이 와닿는다.

5시 입장인데 4시에 들어와보니 그 한시간 차이가 주는 여유,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오늘 축구 중계를 생중계로 해준단다. 사회의 광고를 실시간으로 본다니 어떤 기분일까. 소설 봐야겠다. 햄이 넣어준 학술서는 잘 읽히지가 않는다.ㅠㅠ

6월 8일(수) - 햄 접견

햄이 와주었다. 전자서신과 손편지까지 3종 세트를 받은 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오늘 15분 뛰었다. 당분간 15분씩 꼬박 뛰어야겠다. 군사주의 문화와 계급과는 관련이 없다는 깨달음. 이곳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이라서 좋은 경험한다고 생각하라는 말에 대한, 당분간 화두로 붙잡고 고민해봐야겠다.

6월 9일(목)

또 하루가 갔다. 아침에 눈 뜨고 몸이 찌뿌둥할 때 햄과 함께 봤던 일출. 낙산사 산책길. 그리고 미래에 함께 걸을 길들을 떠올리면 기운이 불끈! 난다. 고마운 햄.

6월 10일(금)

오늘은 좀 몸이 찌뿌둥한게 다른 날보다 더 피곤한 것 같다. 현지 편지를 받고 답장을 열심히 썼다. 아무래도 6월 말까지는 꼼짝없이 취장에 붙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오늘 만난 영배씨, 현민과의 대화에서 들었다. 아 피곤하다. 좀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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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31일

5월 21일(토)

첫 휴일. 밀린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가 짧아보이기만 하다. '국조'의 작업도 이젠 대충 다 알겠다. 개근하고 12사 갔다가 돌아와 상차리고 밥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화장실 청소 하고 걸레 빨로 좀 쉬면서 화장실 다녀오고 국 짬 버리고 다시 식간 깔고 국여분 버리고, 식수 받고 상 차리고 밥먹고 개근하고 설거지 하고 김치 개근 하면 점심 쉬는 시간. 이때 손빨래를 하고 구매장 쓰고. 전업을 언제 나갈지 기대 말고 일단 두 달 꼬막 채운다 생각해야 겠다.

오후 운동 30분 동안 담벼락 안 운동장을 걸으며 현민과 대화를 나눴다. 내 징역의 전망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과의 경쟁 관계 때문에 내가 관용부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아보인다는 것이 현민의 전망이었다. 이떻게 될지. 훈련생 신청을 다시 해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생각 중인데, 이번엔 여러 말 안 돌게 잘 넣을 수 있을지 걱정, 불안, 초조, 두렵긴 하다. 그래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단 낫겠지.

5월 22일(일)

일요일. 이상하게 몸도 무겁고 허리, 꼬리뼈 통증이 심했다. 차기 조장이 저녁 설거지를 대신 해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고마운데 자꾸 그 이면에 뭐가 있진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욕구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겠다. 주임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들어서 내일 분류과 면담 신청 얘기를 할지 말지 모르겠다. 그냥 여기서 계속 일할까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얼른 허리가 괜찮아져야 할텐데.

지난 주부터 일요일에 <나는 가수다>를 보여준다. 지난 주엔 작업장에 있는 시간이라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7시 넘어서 보여주니 기쁘다. 지금은 김연우가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부르는 중. 여기서 이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감동이다.

5월 23일(월)

끝이 있는 고통은 견딜 힘을 준다.(예측가능성).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때 이 고통을 왜 겪어야 하는가 회의가 들면서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심리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분류과 면담을 신청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사람이 허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 군대 훈련소 왔다 생각하고 해야지. 여긴 강제로 노동을 하는 거잖아. 강제로 하는 데서 못 이겨내면 밖에서 자유로울 때는 어떻게 이겨내겠어. 분류과 면담은 시켜줄게. 시켜는 주겠지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작업장 주임의 말이다. 이걸 확 물어버리고 싶긴 한데 일단은 좀 더 간을 보는 중이다. 국가인권위에도 내고 국민신문고에도 내고. (존중) 계산기를 좀 두드려봐야겠다.

5월 25일(수) - 햄 접견

오늘이 벌써 25일이라니. 곧 있으면 6월이네. 뜨거운 물을 페트에 받아와서 등허리를 좀 지졌다. 오늘은 기온이 꽤 높았던 것 같다. 여름을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급히 편지를 썼다.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일면 예상이 되면서도 투정을 좀 부리고 싶었다. 이러나 가족 접견에 엄마가 안 와버리면 어쩌나 싶다.ㅎㅎㅎ 내일도 접견이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전없세 CO노트 원고 청탁 받았는데...쩝. 무슨 말을 써서 보낼지 모르겠다.

5월 26일 - 혜란, 염 접견

오늘 무슨 종합선물세트처럼 무수한 편지를 받았다. 2009년 초 런던에서 Turning the Tide 트레이닝 때 만난 분들이 지지의 엽서를 보내주었는데 완전 감동이다. 아침이 보내준 손편지 세트도. 아까 작업장에서 얼핏 받았을 땐 햄 편지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방에 돌아와 보니 보이지가 않는다.ㅠㅠ 허리보호대를 하니 좀 더 괜찮아진 것 같다. 아프다 생각하면 더 아픈 것 같아서 돌봄 관심 존재감 평탄함의 욕구는 윶하면서도 안 아플 수 있게 내 몸을 잘 보살펴야겠다.

5월 27일(금)

관료 조직, 군대의 위계서열과 근대 학교 교육이 가정하는 교사-학생 관계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가르치는자-배우는 자가 이미 결정이 되어 있고 그에 따른 권력 그리고 심지어 인격적 우열까지 정해지기도 한다는 것. 개인차가 있겠지만 학생-낮은 지위의 사람은 배우는 자이기에 의심을 받는 존재 혹은 부족한 존재로 전제가 된다.

5월 28일(토)

드디어 내일 휴일이다. 1년 전 이때, 교생 마지막 날 아이들과 헤어져 마로니에 공원에서 인권영화제에 앉아 있으며 현지를 기다렸던, 그리고 밥을 먹고 성곽길에 올라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선 부천 집으로 먼 귀가 길에 올랐지. 아까 작업 마치고 사동으로 돌아오는데 아직 밝은 저녁 햇볕을 보며 캔맥주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읽을 책이 적당히 밀려 있다는 사실이 주는 긴장감이 마음에 든다. 꾸역꾸역 산다는 생각을 없애주고 하루하루가 아깝단 생각을 들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일 밀린 편지도 쓰고 카페에 보낼 글도 쓰고. 시와의 "여신이시여" 노래가 떠오른다.

5월 30일(월)

뭔가 긴 하루였다. 약 9시간 전 엄마와 햄을 만나 손을 잡고 포옹을 한 게 잘 믿겨지지가 않는다. 떡, 초콜렛, 과일, 밥, 나물, 다 더먹고 싶었는데..중간에 울컥 울음이 나왔는데 엄마도 역시나 우는 모습을 보며 슬프고 착잡하고 미안하고. 나를 지긋히 바라봐주던 햄이 고마웠다. "신입 오면 좀 더 편해질거야." "야 너가 엄살이 심한거지." 자극이 되는 말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5월 31일(화)

선규 형이 취장으로 왔다. 정말 기묘한 인연. 반가움이 컸다. 비가 왔다가 날이 맑아졌다 다시 소나기 후 지금은 그냥 살짝 우중충. 과거의 기억들이 자꾸 떠오른다. 3년전 이날 런던으로 출국했지. 편지에 더 집착하게 되는데, 기대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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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 20일

5월 14일

오늘 아침엔 타이밍을 못 잡아서 자기연결할 시간을 놓치고, 처음으로 풀타임 일을 한 뒤 돌아와 TV(해리포터)를 눈앞에 두고 호흡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그동안 한달을 했으니, 하루쯤 못해도 괜찮겠지 생각 중이다. '식깡' 외우는 게 일이긴 한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말고, 여기 나 잡아 먹는 사람 없고 결국 다들 각자의 징역을 사는 사람들이니, 쿠사리 주는 혹은 까칠한 사람은 그 정도의 인격밖에 안된다 생각하며 내 할일 최선을 다해서 하면 곧 적응해서 '평탄'한 시간이 오리라 믿어야겠다. 많이 긴장한 상태란 걸 부정할 순 없을 것 같고, 다만 내 사고가 이 곳에 매몰되지 않도록 수시로 스스로 깨우쳐줘야 할 것 같다. 급한대로 편지 쓸 시간도 있을 것 같고 뭐 나쁘지 않다.ㅎ 일단은 6월 말까지 꾸욱 참고. 그럼 이제 딱 1년 남은 셈이다.

5월 15일

"On Air"- 딱 듣고 난 이제 저녁 설거지할 거리들이 들어온다는 소린 줄 알고 급 긴장을(?). 긴장까진 아니고 준비를 했는데, 알고 보니 오늘부터 일요일 저녁 5시 25분(잘 기억이ㅠ)부터 해주는 "나는 가수다"방송 얘기였다. 참, 취장 휴게실에는 벽걸이 평면 TV가 있다. 만화책도 많고. 참, 사동 방 화장실에선 바깥의 네온사인까지 보여서 기분이 참 묘하다. 징역이란 생각이 안 들고 그냥 '노동'하는 기분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저녁 식깡 설거지가 끝나고 나서 흘린 땀. 곧이어 이어지는 샤워. 그 개운한 기분. 하루가 끝났다는. 일종의 성취감마저 든다. 그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보내야지. 1시간 운동시간도 마음에 든다. 슬슬 리듬도 잡혀가고 있다. 나의 적응력이란.ㅋ

5월 16일

훈련생 신청을 했다. 서울대라는 학벌이 주는 후광이 크다. "선생님"소리를 듣다니. 허허. 얼른 햄에게 편지쓰고 자야겠다. 내일 하루도 무사히 마쳐야할텐데. 시간 잘 간다.ㅎ

5월 17일

운동시간에 운동을 안 하고 누워서 혼자 울었다. 복창을 안 한다고 지적을 받고 기분이 급 다운되었다. 관찰로 다시 적고 싶지가 않다. 계속 드는 생각이지만 서로 같은 '존중'의 욕구를 갖고 있지만 그게 비극적으로 표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어렸을 적 싸우다가도 불리해지거나 혼자 힘으로 안 될때 아빠한테 달려가면 해결이 되던. 지금은 그 누구도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순 없다는 사실이 날 울게 만든 것 같다. 결국 내가 이 상황을 온전히 혼자 견디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막막함. 지원, 따뜻한 돌봄이 필요하다. 축 쳐져 있는 기분이 오후에 작업장 찾아온 현민을 보고, 5시 입방하며 만난 영배씨를 만나 좀 회복이 되었다. 아침엔 재리 반장이 나 보고 이발 배워볼 생각이 있냐고 해서, 바로 훈련생 신청 포기를 했다. 알고보니 전업에 2달 이상 걸린다는 말에 바로 후회를 해서 기분이 더 안 좋았다. 에휴. 영배씨 얘기 들으면서 다시 희망이 생기긴 했지만, 이런게 희망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취장에서 눌러 앉아야지 생각해야겠다 싶지만, 그래도 이 곳의 문화에서 버틸 자신이 없다. 결국은 각자 징역이고, 역할극을 하는 것인데 그 사실이 잘 안보이고 인격에 대한 비난으로 들리는 상황이 힘들다.

5월 18일 - 햄 접견

긴 하루의 끝. 재진이, 수봉, 아침한테 온 편지를 읽으며 하루를 정리해본다. 내가 훈련생 신청했다 취소하고 다시 재리 가볼까 한다는 말이 돌아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너 재리 간다매?"하는 소리를 들었다. 봉사원(서열 1위를 봉사원이라고 칭하는 게 아이러닉하긴 하다)한테도 한 소리 듣고 데미지가 컸다. 접견 온 햄을 만나 내내 울었다. 안 울려고 했는데. 걱정할텐데. 접견 마치고 돌아가는 햄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만이형"을 알아 다행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 했던 "목포"라는 공통점 덕분에 큰 지원군을 얻었다. '아빠'가 생긴 셈이다. 지금 이 시간들이 날 괴롭히는 시간이 아니라 내게 뭔가 의미를 남겨줄 선물이란 생각을 해야겠다. 여기서 적응하면 남은 징역은 껌처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5월 19일 - 햄 통화

ㅁㅅ. 햄에게 편지 한통씩 쓰고 나니 어느새 잘 시간이다. 에효. 허리가 조금씩 아픈데 적응이 되겠지 싶다. 내일만 일하면 이제 휴일이다. 밀린 편지를 누구부터 써야할지 모르겠다. (...) 카페에도 한통 써야할텐데. 쓸 여력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책 읽는 시간보단 편지 한통이 더 힘이 많이 된다.

5월 20일 - 엄마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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